눈이 온다. 쌓인다. 밤새 모든 것이 하얗게 변했다. 낙엽은 마지막 치장을 끝내지도 못했는데 눈은 잎새마다 사뿐히 내려 앉는다. 울긋불긋 흩어지는 잎새에 ‘시월의 마지막 밤’의 추억을 떠나보내기도 전에 계절은 하얀 모포를 쓰고 ‘뜻 모를 이야기만 남긴 채’ 세월 속으로 떠나간다. 어머니 생각이 난다. 눈이 오면 애들은 동네 끄트머리에 있는 민둥산에 썰매 타러 간다. 산타할아버지가 타는 바퀴 달린 멋진 썰매(Sleigh)가 아니라 플라스틱으로 만든 알록달록한 슬래드(Sled)을 매고 신나게 미끄럼을 탄다. Sleigh는 산타할아버지가 타는 두 사람이 탈 수 있는 큰 썰매로 눈이나 얼음 위를 달릴 수 있는, 말이나 사슴이 이끄는 지붕 없는 자가용(?)이다. Sled은 크기가 작고 밑이 납짝해 눈이 쌓인 언덕에서 탈 수 있다. 큰 차이는 가격이다. 롤스로이스와 삼륜 자전거다. 비싼 산타할아버지 썰매보다 슬래드는 몇달러 주고 사서 언덕에서 깔고 엎드려 아래로 내려가면 스릴 만점이다. 아이 셋이 각자 Sled 들고 가면 할머니는 놓칠 새라 대형 쓰레기통 뚜껑에 몸을 싣고 아래도 질주한다. 주름 진 어머니 얼굴은 눈 속에 핀 목련 꽃이다. 내일은 리사가 떠난지 1년이 되는 날이다. 가슴이 내려 앉아도 울지 않기로 한다. 마지막 편지에서 리사가 부탁한 것처럼 행복해지기로 한다. 이렇듯 이른 계절에 눈이 내리는 건 모든 아픔과 고통을 땅에 묻고 새로 시작하라는 소망일 것이다. 그래도 잊지 말라고 여기저기 흔적을 남겨 두었구나. 손자들이 내게 보낸 카드를 재활용해 카드 앞장에 ‘Kee hee. Thank you! Save my life’라고 적고, 카드 안쪽에는 원하는 문장(You’ve always given me freedom to explore my dreams. every step of the way. Thank you for all you are to me)에 동그라미 쳐서 부엌 서랍 속에 감춰 두었구나. 잠시 떠나있을 뿐이라고, 영원히 헤어지는 것은 아니라고, 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으면 다시 만날 수 있다고. 리사는 다운증후군으로 태어나 심장수술 받고 기적처럼 살아나 주변의 사랑을 받으며 행복하게 살았다. 착하고 성실하며 남을 배려하고 거짓을 입에 담지 않고 인내심이 강하며 유머감각이 뛰어났다. 티나와 크리스는 리사를 보물처럼 아끼고 사랑했다. 우리 애들이 어른을 섬길 줄 알고, 타인을 존중하고 사랑하는 마음이 넘치는 것은 할머니의 지극한 보살핌과 리사에 대한 각별한 사랑에서 출발한다. ‘자식은 죽으면 가슴에 묻는다’는데 가슴에 담을 수 없어 유해를 뒷마당에 묻었다. 리사방 침실과 연못이 보이고, 코스모스 피는 곳에 ‘Lisa Garden’을 만들었다. ‘내가 떠나면 누가 엄마를 돌보느냐’고 걱정하던 착한 딸! 수간호사는 ‘엄마 챙겨줄 사람 많으니 걱정 말고 떠나도 된다’라고 리사에게 말하고, 지금 안하면 영원히 못하니까 하고 싶은 말 모두 하라고 했다. 죽음의 문턱에서 육체는 인식을 못해도 말은 들을 수 있다고 했다. 딸 티나가 리사의 오른쪽을, 내가 왼쪽 가슴을 껴안고 의식이 불투명해질 때까지 수없이 ‘사랑한다. 아무 걱정말고 잘 가라’고 속삭였다. 자식에게 ‘이제 떠나도 된다’고 하는 것처럼 힘든 말이 있을까? 숨을 멈추기 전 리사가 내 손을 꼭 잡았다. 마지막 신호였다. 계절은 하염없이 바뀌고 언 땅에 꽃은 피고 지고, 장편소설처럼 사는 게 힘들어도, 무거운 짐 내려 놓고, 잊힌 것들 속에 잊히지 않는 것들은 화석으로 남는다. (Q7editions대표) 이기희장편소설 이기희 산타할아버지 썰매 카드 안쪽 어머니 얼굴
2025.11.12. 12:49
때(時)는 오고 간다. 애타게 그리워해도 지워진 사랑이 돌아오지 않는 것처럼 마음 떠난 사람은 뒤돌아보지 않는다. 때(時)는 시간의 어떤 순간이나 부분이다. 어떤 일을 하기에 좋은 기회나 알맞은 시기를 말한다. 베스비오 화산의 대폭발로 멸망한 폼페이에는 화산재가 덮칠 당시 그 모습 그대로, 살아있는 듯 죽은 사람들이 엉겨 붙어 있다. 연인들은 서로 껴안고 생의 마지막 순간을 마주하고, 만삭의 어머니는 아이를 보호하기 위해 바닥에 배를 깔고 웅크리고 있다. 너무 생생해서 금방이라도 화산재를 뚫고 걸어나올 것 같다. 참고 기다리면 때(Time)가 온다. 썰물처럼 떠내려 간 생의 편린들이 무채색의 바다를 거슬러 밀물처럼 몰려온다. 바다는 원래 푸른 빛이었을까? 자음과 모음이 엉겨 붙은 파도는 저녁 노을에 활화산처럼 타오른다. 마지막은 찬연하다. 사는 것과 죽는 것은 순간의 불꽃놀이다. 성냥개비나 불쏘시개로 사라진다 해도, 스러지고 다시 일어나, 길 위에서 길이 되는 사람들의 언어를 진솔하게 적고 싶었다. 오래 전 자전소설 두 권과 자전에세이를 출간했다. 자전소설 ‘찔레꽃’은 소설의 형식을 갖추지 못해 서술에 가깝다. 자전에세이 ‘여왕이 아니면 집시처럼’은 이기희 삶을 그린 투영도(投影圖)다. 장편소설 두 권을 정말 쓰고 싶었다. 절망의 늪에서 희망의 불꽃으로 타오르고, 나락으로 꼬꾸라져도 목숨줄 놓지 않는 사람들의 싱싱한 언어를 담고 싶었다. 20년 가까이 한 주도 빠짐없이 미주중앙일보에 칼럼을 썼다. 사업하며 아이들 키우면서 밤잠 설치며 글쓰기 연습을 했다. 마감 시간 안 놓치려고 수술 받은 날은 가슴을 동여매고 글을 쓰고 어머니 장례식 날은 눈물로 자판기를 두드렸다. 인생의 반을 지나면서 보고 듣고 느끼고, 쓰고 싶은 이야기는 차고 넘친다. 문제는 구성 즉 플롯이다. E.M 포스트는 ‘소설의 이론’에서 플롯은 사건들 간의 필연적 연관 관계가 있기 때문에 스토리와 구분된다고 설명한다. 무식은 실력 부족으로 유식을 이기지 못한다. 소설다운 소설을 한 편도 쓴 경험이 없어 맨 땅에 헤딩하다 지렁이 잡는 실수를 범하게 될까 두렵다. 작가는 실제 있는 것들을 쓰지 않는다. 입히고 꾸미고 각색하고 분탕질하며 창작의 꽃을 피운다. 백마 탄 왕자와 결혼해 무명시인을 죽음에 이르게 하는 시나리오는 유명 영화감독 신춘문예 당선작의 소재로 비난의 대상이 됐다. 베스트셀러 소설가 작품들 속에도 사랑을 버린 여자의 모습으로 등장한다. 텃밭에 뿌린 씨는 싹이 트면 푸릇푸릇 잎이 돋아난다. 이방인으로 남의 땅을 떠돌아도 그리움이 얼룩진 씨앗 한 톨 땅 속 깊이 묻으면 수만 수천개로 번져나간다. 디아스포라는 ‘흩뿌리거나 퍼트리는 것’을 의미한다. 의학적으로 파종은 다른 장기로 전이된 것으로 족보에서 종통이 바뀌는 것을 말한다. 꿈 속에서 ‘바람벽(Wind wall)’이 소설 제목으로 떠올랐다. 바람벽은 집의 둘레나 방의 칸막이를 위해 흙을 발라 만든 벽이다. 진흙을 뭉개 바른 벽이라도 얼어붙은 몸 녹일, 따스한 구들목이 있는 땅을 찿아 얼마나 헤매였던가. 바람은 동에서 서로 서쪽에서 다시 동쪽으로 분다. 그대와 나, 사람과 사람 사이를 가로막는 벽을 허물 수 없다 해도, 바람은 수시로 가슴을 뚫고 지나간다. (Q7 Fine Art 대표, 작가) 이기희이기희의 같은 하늘 다른 세상 장편소설 바람벽 베스트셀러 소설가 소설 제목 어머니 장례식
2024.06.04. 13:17
소설가 김상분 씨가 단편소설 ‘겁 없는 도전’(규장·사진 위)과 장편소설 ‘설마 그래도 누가’(서울문학출판부·사진 아래)를 출간했다. 오랜 시간을 거슬러 올라 이야기가 시작되는 ‘설마 그래도 누가’는 한 여성에게 잠재되었던 내면을 꾸밈없이 진솔하고 담백하게 담았다. ‘겁 없는 도전’은 한국 문학지와 미주 문학지 등에 게재된 한편, 한편의 작품을 한데 묶은 소설집이다. 작가는 “우리들의 일상생활에서 흔히 있을 수 있는 일들이 글의 소재가 된다”며 “가볍게 스치고 지나쳐도 찾아내고 걸러내고, 다듬는 과정을 거쳐 진국으로 만드는 과정은 고단하면서도 가슴 찡한 행복”이라고 밝혔다. 김상분 작가는 ‘문학저널’ 소설로 등단, ‘문예운동’ 시로 등단을 거쳐 미주 크리스찬 문학상을 수상했다. 저서로 소설 ‘호박꽃 미소’가 있다. 장편소설 김상분 소설가 김상분 김상분 작가 미주 크리스찬
2021.12.12. 15:4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