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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희의 같은 하늘 다른 세상- 장편소설 쓰듯, 무거운 짐 내려 놓고

Chicago

2025.11.12 11:49 2025.11.12 12: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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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희

이기희

눈이 온다. 쌓인다. 밤새 모든 것이 하얗게 변했다. 낙엽은 마지막 치장을 끝내지도 못했는데 눈은 잎새마다 사뿐히 내려 앉는다.
 
울긋불긋 흩어지는 잎새에 ‘시월의 마지막 밤’의 추억을 떠나보내기도 전에 계절은 하얀 모포를 쓰고 ‘뜻 모를 이야기만 남긴 채’ 세월 속으로 떠나간다.
 
어머니 생각이 난다. 눈이 오면 애들은 동네 끄트머리에 있는 민둥산에 썰매 타러 간다. 산타할아버지가 타는 바퀴 달린 멋진 썰매(Sleigh)가 아니라 플라스틱으로 만든 알록달록한 슬래드(Sled)을 매고 신나게 미끄럼을 탄다.
 
Sleigh는 산타할아버지가 타는 두 사람이 탈 수 있는 큰 썰매로 눈이나 얼음 위를 달릴 수 있는, 말이나 사슴이 이끄는 지붕 없는 자가용(?)이다.
 
Sled은 크기가 작고 밑이 납짝해 눈이 쌓인 언덕에서 탈 수 있다. 큰 차이는 가격이다. 롤스로이스와 삼륜 자전거다. 비싼 산타할아버지 썰매보다 슬래드는 몇달러 주고 사서 언덕에서 깔고 엎드려 아래로 내려가면 스릴 만점이다.
 
아이 셋이 각자 Sled 들고 가면 할머니는 놓칠 새라 대형 쓰레기통 뚜껑에 몸을 싣고 아래도 질주한다. 주름 진 어머니 얼굴은 눈 속에 핀 목련 꽃이다.
 
내일은 리사가 떠난지 1년이 되는 날이다. 가슴이 내려 앉아도 울지 않기로 한다. 마지막 편지에서 리사가 부탁한 것처럼 행복해지기로 한다.  
 
이렇듯 이른 계절에 눈이 내리는 건 모든 아픔과 고통을 땅에 묻고 새로 시작하라는 소망일 것이다.
 
그래도 잊지 말라고 여기저기 흔적을 남겨 두었구나. 손자들이 내게 보낸 카드를 재활용해 카드 앞장에 ‘Kee hee. Thank you! Save my life’라고 적고, 카드 안쪽에는 원하는 문장(You’ve always given me freedom to explore my dreams. every step of the way. Thank you for all you are to me)에 동그라미 쳐서 부엌 서랍 속에 감춰 두었구나. 잠시 떠나있을 뿐이라고, 영원히 헤어지는 것은 아니라고, 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으면 다시 만날 수 있다고.
 
리사는 다운증후군으로 태어나 심장수술 받고 기적처럼 살아나 주변의 사랑을 받으며 행복하게 살았다. 착하고 성실하며 남을 배려하고 거짓을 입에 담지 않고 인내심이 강하며 유머감각이 뛰어났다. 티나와 크리스는 리사를 보물처럼 아끼고 사랑했다. 우리 애들이 어른을 섬길 줄 알고, 타인을 존중하고 사랑하는 마음이 넘치는 것은 할머니의 지극한 보살핌과 리사에 대한 각별한 사랑에서 출발한다.
 
‘자식은 죽으면 가슴에 묻는다’는데 가슴에 담을 수 없어 유해를 뒷마당에 묻었다. 리사방 침실과 연못이 보이고, 코스모스 피는 곳에 ‘Lisa Garden’을 만들었다.
 
‘내가 떠나면 누가 엄마를 돌보느냐’고 걱정하던 착한 딸! 수간호사는 ‘엄마 챙겨줄 사람 많으니 걱정 말고 떠나도 된다’라고 리사에게 말하고, 지금 안하면 영원히 못하니까 하고 싶은 말 모두 하라고 했다.  
 
죽음의 문턱에서 육체는 인식을 못해도 말은 들을 수 있다고 했다. 딸 티나가 리사의 오른쪽을, 내가 왼쪽 가슴을 껴안고 의식이 불투명해질 때까지 수없이 ‘사랑한다. 아무 걱정말고 잘 가라’고 속삭였다. 자식에게 ‘이제 떠나도 된다’고 하는 것처럼 힘든 말이 있을까? 숨을 멈추기 전 리사가 내 손을 꼭 잡았다. 마지막 신호였다.
 
계절은 하염없이 바뀌고 언 땅에 꽃은 피고 지고, 장편소설처럼 사는 게 힘들어도, 무거운 짐 내려 놓고, 잊힌 것들 속에 잊히지 않는 것들은 화석으로 남는다. (Q7editions대표)  
 
 

이기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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