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주 전, LA 근교 리돈도비치의 한 미국 천주교회에서 조용하지만 깊은 울림의 장례식이 열렸다. 주인공은 94세의 한국전 참전 미군 노병이다. 그는 스무 살이던 1952년, 피비린내로 가득했던 ‘단장의 능선(Heartbreak Ridge)’ 전투에서 살아 돌아온 마지막 생존자 중 한 사람이었다. 오죽하면 ‘창자가 끊어지는 아픔의 고지’라 이름하였으리. 그 전투는 미군 1000여 명이 전사하고, 적 중공군 1만5000여 명이 쓰러진 치열한 격전이었다. 그 고지를 지켜 세운 결과가 오늘의 휴전선, 그리고 대한민국의 자유를 지켜낸 밑거름이 되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 그리 많지 않다. 그는 전쟁 후 평범한 시민으로 돌아가 묵묵히 생을 마쳤지만, 그 젊은 시절의 상흔은 평생 가슴속에 남아 있었다. 그의 희생은 결코 평범하지 않았고 그의 젊음은 한반도의 자유와 평화를 위해 불태워졌다. 장례식에는 그 지역 미재향군인회 회원들과 정치인들이 참석했다. 정중한 예식 속에 조총이 발사되고, 미 성조기가 그의 관 위에 덮였다. 엄숙한 묵념 속에서 군악이 흐르고, 조객들은 숨죽여 고개를 숙였다. 몇 사람의 조사가 낭독되는 순서 중, 한 한국 참전용사도 전우로서의 마지막 인사를 영어로 낭독했다. 조객들은 일제히 기립해 박수로 화답했다. 피로 맺어진 우정과 전우애가 세월을 넘어 다시 하나가 되는 감동의 순간이었다. 장례식 후, 주재 영사가 뒤늦게 도착해 종이봉투에 담긴 기념 메달을 유가족에게 건넸다. 종이봉투에 담긴 ‘전쟁영웅’ 기념메달을 개봉도 안 한 채 그냥 유가족에게 전달하는 그 모습은 마치 아이에게 건네는 작은 선물처럼 초라하고 쓸쓸했다. 국가와 민족의 이름으로 마땅히 드려야 할 ‘감사’가 형식적 절차로만 남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이제 한국전 참전용사들은 하나 둘 떠나가고 있다. 그들이 사라지면 전쟁의 기억도, 자유의 의미도 함께 희미해질까 두렵다. 전쟁의 참혹함은 시간이 지나면 희미해지지만, 그 희생과 헌신의 의미만큼은 결코 잊혀져서는 안 된다. 그들이 흘린 피가 오늘의 대한민국을 있게 했음을, 그들의 청춘이 자유의 충혼탑을 세웠음을, 이 나라의 자유와 오늘의 번영은 그들의 피 위에 세워진 것이기 때문이다. 미국 전역에서 이름없이 떠나가는 참전용사들이 아직 많다. 그들의 마지막 길이 쓸쓸하지 않도록 우리가 다시 기억하고, 감사하며, 존경을 표해야 한다. 그 젊은 병사들이 한반도의 자유를 위해 싸웠음을, 그리고 그들의 피가 오늘의 대한민국을 있게 했음을 감사와 존경으로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줄 수 있는 마지막 훈장이다. 그들이 지켜낸 ‘단장의 능선’ 고지 위에 대한민국의 오늘이 서 있다. 그리고 그들의 용기와 헌신은 여전히 한미 양국의 우정을 이어주는 가장 숭고한 다리로 남아 있다. 세월은 영웅의 육신을 데려가지만, 그들의 용기와 희생의 이야기는 우리 가슴 속에서 영원히 살아있다. 그것이 우리가 그들에게 드릴 수 있는 가장 숭고한 경의일 것이다. 모든 전쟁영웅들에게 마지막 경의를 바친다. “우리는 당신들의 희생을 영원히 잊지 않겠노라”고. 이재학 / 6.25참전유공자회 회장열린광장 전쟁 영웅 한국전 참전용사들 전쟁 영웅 한국 참전용사
2025.10.23. 19:32
1950년 7월 1일, 6.25 전쟁 발발 닷새만이었다. 이승만 대통령의 다급한 전갈을 받은 맥아더 장군은 딘 소장 휘하의 미 24사단 보병 병력을 한반도에 투입했다. 제2차 세계대전 승리의 환희가 채 가시기도 전, 미군 장병들은 오산에서 한국전쟁의 첫 참혹한 전투를 치러야 했다. 이후 8월, 워커 사령관의 대전 사수 명령을 받은 딘 소장은 밀려드는 적의 전차 부대에 맞서 오직 보병 병력만으로 대전을 지켜내려 사투를 벌였다. 그는 직접 3.5인치 로켓포를 들고 적의 T-34 전차를 격파하며 전장을 누볐다. 그러나 혼전 속에서 부대와 떨어진 딘 소장은 36일간 산속을 헤매다 안타깝게도 한 농부의 밀고로 북한군에 붙잡히는 신세가 되었다. 3년간의 길고 고통스러운 포로 생활 끝에 풀려난 딘 소장에게 미국 정부는 미군 장성으로서 보여준 그의 군인 정신을 높이 평가하여 최고 훈장을 수여하려 했다. 그러나 딘 소장은 “사단장으로서 적군의 포로가 된 행위는 결코 훈장을 받을 수 없다”며 이를 극구 사양했다. 그는 적 전차 격파는 어떤 하사관이라도 할 수 있는 일이었다며 겸손하게 세상의 관심에서 물러났다. 하지만 그의 진정한 위대함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딘 소장은 단돈 5달러에 자신을 밀고하여 3년간의 포로 생활을 겪게 했던 그 농부가 5년 형을 선고받고 복역 중이라는 소식을 들었다. 그는 무지한 농민이 살기 위해 한 행동임을 헤아려 한국 정부에 감형을 간청했고, 결국 그 농부가 출소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딘 장군의 이러한 숭고한 정신은 당시 북한군 심문 통역을 맡았던 이규현(전 중앙일보 사장·문공부 장관 역임)씨의 증언을 통해 세상에 알려졌다. 만약 외국에 파견된 우리 군 사령관이 그 나라를 위해 목숨 바쳐 싸우다 민간인의 밀고로 포로가 되었다면, 우리 국민과 국가는 과연 어떤 선택을 했을까? 딘 소장의 사례는 단순한 희생을 넘어선 인간적인 고뇌와 용서, 그리고 진정한 리더십에 대한 깊은 질문을 우리에게 던지고 있다. 노영자·풋힐랜치독자 마당 윌리엄 전쟁 전쟁 영웅 소장 휘하 밀고로 포로
2025.06.29. 16:20
오래전에 100살을 넘게 살다가 세상을 떠난 숼리 힐다 와인드롭이란 여성이 프랭크 시내트라의 ‘마이 웨이(My way)’를 즐겨들었다고 한다. 그 노래의 ‘way’ 가 그녀의 삶의 방식과 너무 닮았기 때문이라고 했다. 재미있는 삶의 길을 택한 여인이었던 같다. 미·중 정상회담을 성사시킨 학자이며 외교전략가인 헨리 키신저 전 국무장관도 지난달 100살의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사람은 언젠가는 죽기 마련인데 나이란 무엇인가를 생각해 본다. 나이란 ‘생물이 태어나서 지낸 햇수’를 말하는데 사람도 생물이니 이 범주에 들어간다. 창조주가 만든 해를 지구 덩어리가 365일 걸려서 한 바퀴 돌아오면 한 해라 하니 그 도는 숫자가 사람에겐 나이가 되는 셈이다. 옛날 한국에서는 예순 살만 되면 오래 살았다고 환갑잔치를 요란스럽게 벌이곤 했으며, 일흔 살을 넘기기 어렵다보니 ‘70 고래희’란 말도 있었다. 그런데 어쩌다 여든 살을 살게 되면 더 오래 살고 싶다는 의미에서인지 망구순 (望九旬, 짧게는 망구)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물론 사람은 누구나 오래 살고 싶어 한다. 아무리 나이 든 사람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나이란 놈이 오래 살겠다는 늙은이의 기를 딱 꺾어 놓고 만다. 그래서 모세는 ‘세월이 제아무리 길다 해도 주의 목전에선 1000년이 지나간 어제 같고 밤의 한 점 같을 뿐’이라고 읊었다. 본인의 나이가 1000살이라고 말한 사람이 있었는데 프랑스의 전쟁 영웅 나폴레옹이다. 프랑스군이 밀랑을 점령하기 전날, 그는 어느 부인으로부터 저녁 만찬에 초대받았는데 이 부인이 나폴레옹에게 대뜸 이렇게 물었다. “장군님! 장군께서는 이미 많은 전쟁을 했고 수많은 승리를 거두었는데, 도대체 나이가 어떻게 되십니까?” 이 물음에 나폴레옹은 “부인! 나는 오늘 아직 이렇게 젊지만. 내일은 1000살이 됩니다.” 나뽈레옹은 ‘내일은 밀랑을 점령할 것’ 이란 말의 발음이 ‘내일은 1000살이 될 것’ 이란 말의 발음과 똑같은 데서 온 것을 재치있게 대답한 것이다. 오늘 한 세기를 넘게 사는 분이 있다. 연세대학교 김형석 명예교수다. 그는 “내가 아는 분들 가운데 일곱 분이 100세를 넘게 사셨는데 이분들의 공통점은 재산이나 명예엔 욕심이 없고, 화를 내거나 남을 욕하지 않는 감정이 아름다운 분들이에요”라고 말한다 위의 김 교수 말을 생각해 보면서 내 나름대로 그의 철학 사상을 다음과 같이 나타내 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저 높은 곳에 떠 있는 하얀 구름 사이로 밝게 보이는 달과 별, 그리고 푸른 하늘이 아름답고 착하고 참된 삶을 살라고 속삭이고 있지만, 그달과 별과 하늘이 구름에 가려 잘 보이지 않는구려!” 윤경중 / 연세목회자회 증경회장열린광장 연세대학교 김형석 전쟁 영웅 헨리 키신저
2023.12.24. 18: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