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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드가 반한 스위스, 설경과 액션·낭만이 만나다

서유럽 투어 중 손님들에게 가장 좋았던 여행지를 물으면 단연 스위스가 1등이다. 단순히 그림처럼 아름다운 풍경 때문만은 아니다.     평화롭고 목가적인 전원마을, 수정처럼 맑은 호수, 그리고 그사이에펼쳐진 알프스의 설경은 마음속 깊은 곳까지 맑게 씻어 준다. 파란 하늘 아래 펼쳐진 초록 목초지를 유유히 거니는 소들의 방울 소리는 마치 한 편의 목가적인 시를 듣는 듯 하다. 이런 풍경은 여행자들에게는 그 자체로 영화 한 편이며, 도시에서 잊고 살았던 여유와 자유를 되찾게 한다.   스위스를 걷다 보면 자연스럽게 어린 시절 TV에서 보던 007시리즈가 떠오른다. 1962년부터 시작된 제임스 본드 시리즈는 시대에 따라 주연 배우가 바뀌었지만, 내 마음속 본드는 언제나 숀 코너리와 로저 무어였다. 화려한 액션과 기발한 장비, 전 세계를 누비는 첩보 작전과 매혹적인 여주인공들까지, 본드는 그야말로 남자들의 영원한 로망이었다. 다양한 슈퍼히어로가 있는 요즘과 달리, 어린 시절 내게는 제임스 본드가 세상에서 가장 멋진 히어로였다.   007시리즈는 전 세계를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그중에서도 스위스는 빼놓을 수 없는 무대다. ‘여왕 폐하 대작전(On Her Majesty’s Secret Service, 1969)'에서는 본드가 알프스의 설원을 스키로 달리며 스릴 넘치는 추격전을 펼친다. '골드 핑거(Goldfinger, 1964)'에서는 마터호른을 배경으로 한 산악 도로를 질주하며 숨 막히는 액션을 보여준다. '뷰 투어 킬(A View to a Kill, 1985)'에서는 알프스 리조트에서 본드 특유의 기지가 돋보이는 전투가 펼쳐진다. 스위스 알프스의 설경은 그 자체로 영화 속 긴장과 로망을 담아낸 무대였다.   ▶베른: 첩보 영화의 배경, 고풍스러운 도시   베른은 구시가 전체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될 만큼 중세의 모습이 잘 보존된 도시다. 시계탑(Zytglogge)은 13세기부터 시민들의 시간을 알려왔으며, 그 주변에 펼쳐진 좁은 골목과 구불구불 이어진 '라우벤' 아케이드는 고풍스러운 정취를 한층 더한다. 영화 속 본드가 이 도시에서 비밀리에 정보를 주고받는 장면을 상상하며 걸으면, 내가 마치 스파이 영화의 한 장면 속 주인공이 된 듯한 착각에 빠진다. 분수대마다 전설과 이야기가 얽혀 있고, 곰 공원에는 베른의 상징인 곰이 여전히 사람들을 맞이하고 있다. 밤이 찾아오면 돌길 위로 늘어선 가로등 불빛이 부드럽게 깔리고, 골목마다 아른거리는 그림자는 마치 어두운 밤 본드의 그림자가 숨어 있는 듯 긴장감을 더한다.   ▶인터라켄: 액션의 관문, 알프스의 심장   인터라켄은 툰 호수와 브리엔츠 호수 사이에 자리 잡은 작은 도시지만, 스위스 알프스 여행의 출발점으로서 빼놓을 수 없다. 영화 속 본드는 이곳을 거쳐 헬기를 타고 알프스를 넘나들며 적을 따돌리고, 눈 덮인 산악 지형을 스키로 질주한다. 실제 인터라켄에서는 패러글라이딩, 급류 래프팅, 암벽 등반 같은 다양한 액티비티가 가능하다. 아침에 일어나 창문을 열면, 아이거, 묀히, 융프라우 세 개의 거대한 봉우리가 햇살에 반짝이며 여행자를 맞이한다. 마치 본드 영화의 오프닝 장면 속 알프스가 현실이 된 듯한 느낌이다. 이곳의 맑고 차가운 공기, 머리 위를 날아다니는 패러글라이더의 실루엣, 그리고 하늘과 맞닿는 설산은 감히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전율을 안겨준다.   ▶융프라우요흐: 유럽의 정상, 한계에 도전하다   '유럽의 정상'이라 불리는 융프라우요흐는 해발 1만1332피트에 위치하며, 도착하는 순간부터 진정한 감탄사가 터져 나온다. 영화 속 본드는 이곳 설원을 배경으로 숨 막히는 추격전을 벌였고, 그 장면은 지금도 많은 팬들에게 전설로 남아있다. 전망대에서 내려다보는 알레치 빙하는 약  14.3마일 길이로, 그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광활하다. 맑은 날에는 눈과 하늘의 경계가 사라지고, 마치 한 폭의 수묵화처럼 모든 풍경이 하나로 녹아든다. 얼음 궁전, 눈 터널, 고산 열차 등은 단순한 관광을 넘어 새로운 세계에 발을 들인 듯한 기분을 준다. 고산 열차를 타고 오르는 길, 긴 터널을 빠져나오는 순간 느껴지는 시원한 공기는 마치 영화 속 한 장면처럼 머릿속을 스쳐 지나간다.   “This never happened to the other fellow.”   “이런 일은 다른 요원에게는 일어나지 않았는데.”   ▶체르마트와 마테호른: 전설이 된 산, 모험의 상징   차량이 금지된 친환경 마을 체르마트는 기차를 타고만 들어갈 수 있다. 기차에 몸을 싣고 천천히 올라가는 동안, 마음 한켠에서부터 설렘이 차오른다. '골드 핑거' 속 본드가 이 지역 산악 도로에서 보여주었던 자동차 추격전 장면은 이곳의 강렬한 설경과 완벽하게 어울린다. 체르마트에 도착하면, 마테호른이 솟아 있는 장면은 마치 한 편의 예술 작품을 마주한 듯한 감동을 안겨준다. 이 산은 피라미드 형태의 봉우리로, 알프스의 아이콘이자 스위스를 대표하는 상징이다. 케이블카를 타고 고르너그라트 전망대에 오르면, 마테호른과 체르마트 마을의 전경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그곳에서 서 있으면 숨이 멎을 듯한 경이로움에 압도되고, 내 안에 숨겨져 있던 모험심이 깨어난다. 바람 소리와 함께 들려오는 본드의 테마 음악이 귓가를 스치는 듯한 기분은 체르마트만이 줄 수 있는 특별한 경험이다.   ▶스위스의 밤: 본드 마티니와 별빛의 순간   하루 종일 설원과 산악을 넘나드는 모험을 마친 후, 산장 바에 앉아 한 잔의 마티니를 주문한다. 본드의 시그니처 주문, '흔들어서, 젓지 말고(Shaken, not stirred)'를 되새기며 잔을 들 때, 눈꽃처럼 반짝이는 얼음과 투명한 술은 스위스의 순수함과도 잘 어울린다. 유리창 밖에는 눈으로 뒤덮인 산봉우리와 반짝이는 별빛이 춤추듯 빛난다. 그 순간만큼은 세상의 모든 소음이 사라지고, 오직 나와 별빛, 그리고 마티니 한 잔만이 존재한다.     본드처럼 스릴 넘치는 액션을 즐기고 싶었던 내 마음과는 달리, 스위스의 밤은 평화롭고 따뜻하며, 또 한없이 낭만적이다.   푸른투어의 서유럽 여행 일정 속 스위스 투어에 참여하면, 베른의 미로 같은 골목길, 인터라켄의 맑고 깨끗한 하늘위를 날아가는 패러글라이딩, 융프라우의 장대한 설원과 빙하, 마테호른의 위용까지 모두 직접 만나볼 수 있다. 007 시리즈 명장면을 따라가며 만나는 스위스는 액션과 평화, 긴장과 낭만이 공존하는 거대한 무대다.   푸른투어와 함께라면 당신도 한 편의 본드 영화 속 주인공이 될 수 있다. 영화 같은 알프스의 모험을 직접 경험해보자.   ▶문의: (213) 739-2222. www.prttour.com   ━       박태준 이사 푸른투어 서부본부의 박태준 이사는 25년째 여행 현장을 누비며 가이드, 해외 인솔자, 상품 기획자, 여행컨설턴트로 활동해 온 여행 전문가다. 다년간의 현장 경험과 기획력을 바탕으로 고객 맞춤형 여행은 물론 미국 전역과 해외를 아우르는 고품격 여행 서비스를 선도하고 있다.  스위스 낭만 스위스 알프스 마음속 본드 제임스 본드

2025.07.24.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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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존에 팔린 007…제임스 본드는 죽었다

2005년 영국 축구의 자존심 맨체스터 유나이티드가 미국의 글레이저 가문에 넘어가자 성난 영국 축구 팬들은 거리로 몰려나왔다. 소유주인 말콤 글레이저의 꼭두각시로 화형식도 했다. 당시 BBC는 “축구경기 한 번 제대로 본 적 없는 글레이저가 맨유를 인수한 건 오로지 돈 때문”이라고 비난했다. 영국인들의 상처 난 자존심은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20년 뒤인 지금, 그에 필적할만한 일이  또 일어났다. 영국 대중문화의 상징이며 자존심인 007 제임스 본드의 창작권이 미국 아마존으로 넘어간 것이다. 지난주 나온 이 뉴스에 영국인들은 충격과 실망, 그리고 분노에 휩싸였다. 영국인들은 아마존이 본드의 영국색을 굳이 지켜줄 거라 믿지 않는다.   007시리즈는 60년 전 이언 플레밍의 소설을 원작으로 제작사 EON에 의해 세상에 나왔다. 전세계를 열광시키면서 영국의 소중한 문화유산으로 자리 잡았다. 비틀스와 함께 영국 대중문화의 양대 아이콘이었다.   25편의 모든 작품에는 영국색이 짙게 배어 있다. 본드를 비롯한 주인공들이 영국식 영어를 구사한다. 또 영국 해외정보국 MI6 소속 국가공무원으로서 영국에 대한 본드의 충성심이 은연중에 깔렸다.   여기에 귀족주의적이고 다분히 제국주의적인 정체성도 숨어 있다. 여성들이 세련되고 섹시한 본드를 넋 놓고 바라보는 동안, 영국의 남성들은 본드를 통해 제국주의의 화려했던 지난날들을 회상했다. 본드 시리즈는 영국이 세계 제1의 국가임을 과시하며 영국인들에게 자긍심을 심어주는 역할을 했다. 영국인들이 제임스 본드의 영국성에 집착하는 이유다.   문화적 측면에서 본드는 ‘우아한 영국’의 상징이었다. 제임스 본드는 그냥 첩보원이 아니다. 용모, 스타일, 매너, 개성, 취향, 이 모두가 뭇 남성의 동경 대상이다. 신작이 나올 때마다 남성 패션잡지에 멋쟁이 ‘본드 스타일’이 소개되곤 했다.   탄력 있는 근육과 섬세한 실루엣을 동시에 갖춘 핸섬한 용모에 박학다식한 두뇌, 그리고 스포츠 만능인데다 귀족적 매너와 화술을 겸비했다. 입맛 까다로운 소믈리에급 미식가이자 패션 스타일도 완벽하다. 주변엔 늘 슈퍼모델 명함 내밀 법한 미녀들이 차고 넘친다.   새 시리즈마다 등장하는 기발한 자동차와 첨단무기들은 거의 SF 수준이다. 그에게 주어지는 임무 역시 초우주급 황당무계 그 자체다. 툭하면 감방 가거나, 재판 불려나가는 우리 국정원 공무원과는 노는 물이 다르다.     그렇다. 제임스 본드는 현실 첩보물이 아니라 남성용 팬터지다. 관객들은 그걸 알면서도 스크린에 빠져든다. 그게 제임스 본드 시리즈의 매력이다.     독특한 어투도 그의 트레이드마크다. 자기소개할 때도 꼭 이렇게 폼을 잡는다. “내 이름은 본드, 제임스 본드요.” 마티니를 주문할 때도 유난을 떤다. “흔들어서, 젓지 말고(Shaken, not stirred).” 흔들어 만들건, 저어 만들건, 그 차이를 알 사람이 몇이나 될까만, 그런 사소한 취향 역시 본드의 매력이 됐다. 이게 유행하자 캐나다 웨스턴 온타리오대 생화학과에선 흔들어 만든 마티니와 저어 만든 마티니의 차이를 분석했다. 본드의 말 하나하나가 얼마나 수컷 본능을 자극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007 시리즈의 음악 '본드 뮤직' 도 빼놓을 수 없는 매력이다. 영국의 존 배리 등을 비롯해 전설적 작곡가들이 만든 주제가는 당대 최고 뮤지션들의 히트송 리스트에 올랐다. 셜리 배시, 낸시 시내트라, 폴 맥카트니, 칼 사이먼, 시나 이스턴, 티나 터너, 마돈나, 아델 …     또 영화의 시작을 알리는 건배럴 시퀀스의 테마는 007 시리즈의 시그너쳐가 됐다. 딩디디딩딩 딩딩딩 … 이 팽팽한 멜로디에 가슴이 두방망이질쳤던 사내들, 한둘이 아니었으리라. 이런 게 본드라는 존재에 온통 뭉뚱그려져 영국적 체취로 소비돼왔다.   본드 시리즈는 2021년 ‘노 타임 투 다이’ 이후 답보 상태에 있다. 본드가 영국 해군 미사일에 맞아 충격적 죽음을 맞이했음에도 팬들은 EON이 그를 부활시킬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 아마존의 인수는 본드가 다시 돌아올 것이라 믿고 있던 영국팬들에게 본드의 죽음 이상의 충격을 안겨줬다. ‘영국적인 본드’를 볼 수 없게 될지도 모른다는 불안함 때문이다.     이제 세인의 관심은 숀 코너리, 로저 무어, 티머시 돌턴, 피어스 브로스넌, 대니얼 크레이그에 이어 누가 차기 제임스 본드가 될 것인가에 쏠려 있다. 그간 차기 본드로 물망에 오르던 이드리스 엘바, 톰 하디, 헨리 카빌, 킬리언 머피와 같은 A급 영국 배우들이 모두 떨어져 나가고 대신 유대계 영국 배우 아론 테일러 존슨이 강력한 후보로 부상했다. 언론은 성급히 ‘최초의 유대인 007’ 이라고 보도하기 시작했다. 이에 일부 극렬 팬들은 불매운동을 벌이겠다고 으름장을 놓고 있다.   본드 시리즈 제작에 대한 미국의 개입은 이미 1975년 시작됐다. 브로콜리가의 제작 파트너 해리 살츠만이 자신의 권리 절반을 유나이티드 아티스트에 매각하면서다. 1995년 ‘골든 아이’부터는 EON 창업주의 딸 바바라 브로콜리와 의붓아들 루이스 윌슨이 운영해왔지만, 자금 조달과 배급을 위해 대기업 파트너에 의존해야 했다.     007 프랜차이즈의 제작비는 상상을 초월한다. 브로콜리와 윌슨은 갈수록 방대해지는 엄청난 예산을 끌어오는 데 어려움을 겪자, 결국 미국 자본과 손잡은 것으로 추정된다. 영국의 한 매체는 ‘오금이 저릴 정도의 돈’이 건네졌을 것이라고 했다.     지금은 모든 것이 불투명하다. 아마존이 제임스 본드의 영국적 색채를 유지할지가 주요 관심사다. 얼마 전 브로콜리는 차기 본드 하마평이 나돌자 “어떤 피부색이든 남자, 그리고 영국인이어야 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브로콜리는 협상 과정에서 007시리즈를 ‘콘텐츠’라고 부르는 아마존 측에 격노했다는 후문이다. 이처럼 영국색을 유지하려는 EON 측의 정서적 언어와 이윤 추구에 비중을 둔 아마존의 기업적 언어는 지속적으로 충돌할 것으로 예상된다.     아마존이 영화사상 가장 사랑받는 시리즈 중 하나인 007의 창작권을 인수한 이유는 간단하다. 더 많은 돈을 벌기 위해서다. EON 시대에 벌었던 액수보다 더 많은 수익을 올리기 위해 아마존은 많은 것을 시도할 것이다. 본드의 주변인물을 활용한 스핀오프, 프리퀄, 리메이크 등이 쏟아질 것으로 예상한다. 그중에서도 최악의 시나리오는 제임스 본드가 마블 시리즈에서 나오는 슈퍼 히어로쯤으로 변질되진 않을까, 하는 점이다.   기업 자본이 프랜차이즈를 사들여 실패한 사례들도 많다. ‘스타워즈’의 제작자 조지 루카스는 2012년 소유권을 디즈니에 40억 달러에 매각했다. 이후 13년 동안 디즈니의 새로운 시도가 이어졌지만 결국 지루한 프랜차이즈로 전락했다. 루카스 없는 ‘스타워즈’처럼 EON 없는 007을 걱정하는 시각이 많다.     지금은 관객 형성 구조상 제임스 본드라는 영웅 하나만으로 흥행이 보장되지 않는 시대다. 디즈니는 지난해 ‘인디아나 존스: 운명의 다이얼’로 1억 3400만 달러를 손해봤다. 영국색 짙은 제임스 본드에 익숙해 있는 영화팬들은 아마존의 미국식 007에 즉각적으로 실망할 가능성이 크다. 아마존의 자금력과 창작 능력은 별개의 이야기다.   누가 차기 본드가 될 것인가에 대한 영국인들의 지대한 관심은 영국 대중문화의 정체성과 깊은 관련이 있다. 그들에게 영국성이 사라진 제임스 본드는 상상하기조차 싫은 일이다. 제임스 본드 역을 제안 받았지만 거절한 것으로 알려진 킬리언 머피(오펜하이머)의 말대로 아마존은 차기 본드를 여자 배우로 캐스팅할지도 모른다. 물론 돈에 끌려가는 프랜차이즈의 실태를 비꼰 말이었겠지만.     영국인들에게 EON없는 제임스 본드는, 알렉스 퍼거슨 없는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와도 같다. 회사명 EON이 ‘Everything Or Nothing’의 약자라는 사실이 아이러니하다. 영화에서 창작은 Everything이 아닌가?   김정 영화 평론가 [email protected]영국 아마존 제임스 본드 본드 제임스 본드 시리즈

2025.02.26. 18: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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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망경] 007 가방

숀 코네리(Sean Connery, 1930~2020) 주연 007시리즈 총 7개를 인터넷을 뒤져 다시 본다. 20세기, 인류 역사상 최초로 달에 인간 발자국을 남긴 1960년대 초반에 시작해서 21년 동안 전 세계를 휩쓴 육중하고, 좀 능글맞고, 배짱 좋은, 본드, 제임스 본드!   제임스 본드 시리즈 처음 4편은 해마다 쉬임없이 나왔다. ‘살인번호, Dr. No(1962)’, ‘위기일발, From Russia With Love(1963)’, ‘Goldfinger(1964)’, ‘Thunderball(1965)’.   나머지 세 편은 띄엄띄엄 나왔다. ‘You Can Only Live Twice(1967)’, ‘Diamonds are forever(1971)’, ‘Never Say Never Again (1983)’. 그리고 숀 코네리는 내 눈에는 보험회사 세일즈맨처럼 보이는 로저 무어(Rodger Moore, 1927~2017)에게 007 바톤을 넘겨준다.   ‘007 가방’이 처음 선을 보인 영화는 ‘From Russia With Love’. 검정 가죽에 빨강 내부. 각종 치명적인 무기가 안팎으로 장착돼 있다. 본드는 외교관이 들고 다닐 듯한 가방을 손에 들고 더더욱 자신감이 솟는다.   그런 007 가방을 본떠서 만든 철제 가방을 들고 오랫동안 직장을 출퇴근했다. 옛날 우편배달원처럼 한쪽 어깨에 메고 다니는 가방이 내키지 않는다. 영화에 나오는 테러리스트의 자살폭탄이라도 들어있음 직한 백팩은 어딘지 유치하다는 느낌. 누가 뭐래도 나는 007 제너레이션이다.   병동 환자와 직원들이 내 007 가방을 보면 실실 웃으며 물어본다. 안에 뭐가 들어있느냐. 권총, 흉기가 들어있느냐 하는 질문이 끈질기다. 여직원들이 시치미를 떼고 다이아몬드가 얼마나 크나요? 한다.   가방을 중국어로 ‘캬반’, 일본어로 ‘가방’, 러시아어로 ‘카반’이라 한다. 네덜란드어 ‘카바스’에서 유래했다는 설이 지배적이다. 빵도 가방도 한자어가 아닌 유럽어에서 왔다. 호떡, 호주머니는 달라요. 오랑캐 호(胡)!   가방을 통상 ‘핸드백, handbag’이라 하지만 명품이 아닌 허드레 백을 미국 여인들은 ‘pocketbook’이라 부른다. 참참, ‘주머니’는 한자로 배낭(背囊, backpack), 침낭(寢囊), 음낭(陰囊) 할 때처럼 ‘낭(囊)’이라 하는 걸 당신은 알랑가 몰라.   007 가방에 버금가는 네모반듯한 가방을 1906년부터 ‘briefcase’라 했는데 본래 1806년에는 ‘brief-bag’이라 불렀단다. 20세기 초에 서류가방을 ‘attache’라고도 했다. ‘아타셰이’라 발음하는 이 프랑스어를 다움 사전은 우리 귀에 익숙한 ‘공공칠 가방’이라 풀이한다. ‘attache’는 불어로 대사관 또는 공사관의 ‘수행원’, 쉽게 말해서 높은 사람에게 붙어 다니는 사람을 뜻한다. 내가 걸핏하면 침을 튀기며 역설하는 ‘attachment, 애착이론(愛着理論)’이라는 정신분석 학설이 고개를 드는 대목이다.   얼마 전 의사 왕진 가방처럼 보이는 가방을 장만해서 정중한 자세로 들고 다닌다. 이제 병원에서 아무도 내 가방에 대하여 질문하지 않는다. 숀 코네리의 치명적인 최신 무기와 돈뭉치와 영원한 다이아몬드에 대한 화려한 상상이 청진기, 주사기, 응급치료 도구 같은 물품이 대충 들어있으리라는 덤덤한 추측으로 변한 것이다. 정신과 의사가절대 사용하지 않는 물품들이 가방에 그득하다는 생각은 좀 따분한 노릇이지만서도. 서량 / 시인·정신과 의사잠망경 가방 철제 가방 빵도 가방 제임스 본드

2022.09.06. 1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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