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동은 속죄할 수 있다. 그러나 반드시 용서를 보장하지는 않는다. 군사 독재 시절 행해졌던 고문과 실종을 되돌릴 수 없기 때문이다. ‘시크릿 에이전트’가 끝까지 ‘용서’라는 단어를 말하지 않는 이유다. 영화는 감정의 봉합을 거부한다. 브라질 군사 독재 이후 많은 가해자가 처벌받지 않았다. 국가가 선언한 ‘화해’는 정의의 회복이 아니라 망각의 제도화에 가까웠다. 법적 단죄가 부재한 자리를 채운 것은 침묵이었고 침묵은 곧 일상이 되었다. ‘시크릿 에이전트’가 시작하는 지점이다. 이 영화가 말하려는 것은 ‘누가 나쁜가’가 아니라 ‘어떻게 가능했는가’다. 누군가의 악의보다 다수의 순응과 침묵이 어떻게 폭력을 지속시키는 데 ‘기여’했는지를 집요하게 파고든다. 단순한 개인의 서사가 아니라 국가적 망각에 대한 저항의 시각에서 이 영화는 화해의 언어 대신 브라질의 아픈 과거를 끊임없이 들추어낸다. 그래서 영화에는 용서도 없고 처벌도 없고 명확한 정의도 없다. 1970년대 브라질 군사독재 말기. 주인공 마르셀루(와그너 모라)는 정부 정보기관에서 일했던 전직 요원이다. 그는 과거 작전에서 동료의 고문과 실종에 간접적으로 가담했고 그일 이후 조직을 떠났다. 지금 그는 가짜 신분으로 해안 도시 헤시피에 숨어 살며 라디오 수리공으로 일한다. 라디오는 이 영화에서 중요한 오브제다. 잡음과 전파, 들리지만 명확히 포착되지 않는 소리. 그것은 이 영화가 다루는 기억의 상태와 닮았다. 도시는 평온해 보이지만 감시는 여전히 일상에 스며 있다. 군용 차량은 배경처럼 등장하고 정보기관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아도 삼엄한 존재를 과시한다. 독재는 끝난 것처럼 보이지만 그 작동 방식은 여전히 브라질의 일상을 포위하고 있다. 어느 날 마르셀루는 옛 상관에게서 암호화된 연락을 받는다. 그가 과거에 관여했던 ‘비공식 제거 작전’ 파일이 외부로 유출될 위기에 처했고 그 파일을 회수하거나 필요하다면 관련 인물을 정리하라는 명령이다. 마르셀루는 거절하려 하지만 그의 가짜 신분이 이미 들통났고 특히 멀리 떨어져 있는 아들에 대한 위협이 그를 주저하게 한다. 조사를 시작한 마르셀루는 점점 현실이 이중으로 분열되어 있음을 깨닫는다. 정부 요원들은 그를 다시 도구로 사용하려 하고 반정부 지하 조직은 그를 배신자로 의심한다. 그는 정보원을 만나지만 직접적인 말 대신 침묵·은유·소음으로 채워진다. 이 영화의 특징답게 총격이나 추격 대신 정지된 카메라와 긴 침묵이 오히려 긴장감을 키운다. 마르셀루는 유출된 파일의 핵심이 문서 자체가 아니라 ‘증언자’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 증언자는 과거에 존재하지 않는 사람으로 처리된 여성이다. 그녀는 국가가 저지른 고문과 학살을 국제 인권기구에 증언하려 한다. “국가를 지킨다는 명목으로 우리는 어디까지 괴물이 될 수 있는가” 이 순간 영화가 던지는 질문이다. 마르셀루는 처음으로 명령을 따르지 않는다. 그는 여성의 탈출을 돕고 동시에 정보기관에 거짓 보고를 올린다. 여성은 국외로 탈출에 성공하지만 마르셀루는 도시에 남는다. 그는 다시 라디오 수리점을 연다. 군용 차량이 천천히 거리 끝에 멈춘다. 카메라는 그의 얼굴을 오래 응시한 채 커트하지 않는다. 그가 체포된 것인지 제거된 것인지 혹은 또 다른 감시의 시작인지 명확하지 않다. 마지막에 흐르는 라디오 뉴스. “정부는 모든 것이 정상화되었다고 발표한다.” 그들의 ‘정상화’란 폭력이 사라진 상태가 아니라 폭력이 더는 말해지지 않는 상태다. ‘시크릿 에이전트’는 독재를 직접 고발하지 않는다. 대신 그 체제에 순응했던 평범한 개인을 주인공으로 삼아 가해 구조 안에 있었던 침묵의 얼굴을 응시한다. 관객에게 판단을 강요하지도 않는다. 다만 침묵 속에 머물렀던 책임을 되돌려놓을 뿐이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는 얼굴로 유지되는 세계 속에서 용서를 말하지 않음으로써 이 영화는 가장 냉정한 방식으로 우리의 의식을 깨운다. 기억을 포기하지 않는 태도만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소한이라는 것을. 기억을 지우지 않는 것, 봉합하지 않는 것, 끝내 정리되지 않는 상태로 남겨두는 것. ‘시크릿 에이전트’는 바로 그 불편함 속에서 비로소 완성된다. 영화는 끝까지 ‘용서’라는 단어를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의도적으로 용서를 배제한다. 가해의 구조를 흐리지 않기 위해 제시하는 문제는 한 사람이 잘못했는가가 아니라 국가 폭력에 사람들이 어떻게 편입됐느냐는 질문이다. 영화 속 증언자 역시 용서하지도 복수하지도 화해를 제안하지도 않는다. 피해자가 가해자를 용서해야만 이야기가 완성되는 일반적 구조를 거부하기 때문이다. 만약 그녀가 용서한다면 관객은 안도하고 가해자는 구원받은 인물이 되며 역사는 감정적으로 봉합된다. 그녀는 차갑다기보다 아예 감정을 제공하지 않는 존재로 그려진다. 그래서 화해와 구원의 서사도 존재하지 않는다. 가해의 책임, 그에 따른 불편한 기억을 지속시키고 마르셀루의 영웅적 선택을 미화하지 않는다. 결말에서 그가 체포되지 않는 이유는 침묵함으로 모두가 공범이 되고 망각함으로 국가의 폭력이 용인될 수 없음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이 영화에서의 서스펜스는 사건이 아니라 기억이 들켜버릴지도 모른다는 공포에서 나온다. 영화는 첩보물의 외형으로 진행된다. 그러나 스파이 영화가 아니라 독재 이후에도 사라지지 않은 국가 폭력에 대한 죄책감을 본질에서 표현한 영화로 해석하는 것이 옳다. 클레베르 멘돈사 필류 감독이 연출한 ‘시크릿 에이전트’는 3월에 열리는 아카데미상 시상식에 작품상, 국제영화상, 최우수 남우연기상, 캐스팅상 등 4개 부문 후보에 올랐다. 특히 2015년 넷플릭스 드라마 ‘나르코스’에서 마약왕 파블로 에스코바르 역으로 단숨에 세계적 배우로 뛰어오른 와그너 모라의 남우주연상 후보 지명은 브라질 배우로서는 최초라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김정 영화 평론가 [email protected]죄책감 폭력 브라질 군사독재 순응과 침묵 시크릿 에이전트
2026.02.18. 19:08
“걱정이 많았는데 이제 홀가분합니다(I came in heavy, but now I am in light).” 환자의 아들이 ‘완화치료 상담(Palliative Care Meeting)’을 마친 뒤 한 말이다. 정원 일을 하다가 갑자기 뇌출혈로 쓰러진 어머니가 뇌사에 빠졌다. 지난 5일 동안 병상에 누워있는 어머니를 지켜보면서 그가 경험한 시간은 절망과 좌절, 무기력과 혼돈의 절정이었다. 82세의 모친은 고혈압 말고는 건강한 편으로 교회와 지역 사회에 많은 봉사활동을 하며 정원 가꾸기가 취미였다고 한다. 사고가 난 그날 오전에도 정원에 새로 사 온 모종을 심다가 심한 두통을 호소하며 집 안으로 들어왔다. 소파에 앉자마자 구토하면서 쓰러졌다. 앰뷸런스에 실려 응급실에 도착, 바로 인공호흡기를 꽂고 CT Scan을 해보니 뇌의 3곳에 심한 출혈이 있었다. 조속하게 응급처치했으나 환자는 이미 의식을 잃고 동공은 풀렸으며 팔다리 경직 증세도 보였다. 생명을 유지하는 가장 기본적인 호흡과 맥박도 매우 불안정한 상태로 생명이 위독한 응급상황이 되었다. 거의 뇌사에 가까워지고 있으며 오직 한 가지 살아있는 증후로는 자가 호흡이 2~5번 정도 있었다. 의사는 가족에게 환자의 회복 가능성이 아주 희박하다고 언질을 주었다. 환자는 남편과 아들, 딸을 두고 있다. 가족 간의 사랑이 넘치고 화목함을 첫눈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 중환자실에서 일하다 보면 정말 다양한 질병만큼이나 다양한 가족관계(family dynamic)를 경험하게 된다. 상상을 넘어서는 아름다운 관계부터 비인간적인 냉혈한 행위들도 쉽게 만난다. 하루하루 평화롭게 일상을 이어가던 가족에게 이 환자와 같은 갑작스러운 사고는 가족을 엄청난 충격에 빠뜨린다. 가족 멤버 셋은 입원 당시부터 지금까지 5일 동안 줄 곳 환자 곁에 머물렀다. 5일 동안 환자 상태가 호전을 보이지 않자, 의사는 완화 치료 상담을 주선했다. 간호사들은 다른 환자도 돌보아야 하므로 참석하기가 쉽지 않다. 그런데 웬일인지 이번에는 꼭 참석하고 싶었다. 미팅은 한 시간을 훌쩍 넘었다. 먼저 의사는 가족 일원 개개인에게 그들이 현재 상황을 어떻게 얼마만큼 이해하고 있는지 물었다. 참 우연이지만 환자 가족은 모두 고등학교 교사다. 환자와 환자 남편은 은퇴했지만 아들과 딸은 현역이다. 환자는 평소에 자상하고 너그럽고 베푸는 타입이어서 많은 사람한테 사랑을 받고 있다고 한다. 지난 며칠 동안 환자를 방문한 수십 명의 지인만 보아도 그녀가 얼마나 많은 사람한테 사랑을 받고 있는지 충분히 알 수 있었다. 그녀의 집은 항상 열려 있었고 지역 사회 모임에 중요하고 어려운 일을 도맡아 많은 이들로부터 존경을 받아 왔다고 한다. 항상 감사하는 마음으로 요즘처럼 화창한 날씨, 뺨을 어루만지는 달콤한 바람, 손에 들어온 맛있는 음식에 깊은 감사를 표하며 사람과의 교류를 진심으로 즐겨왔다고 딸이 울먹이며 전한다. 환자는 회생 가망성 없는 생명을 기계에 의존하며 생명을 연장하고 싶지 않다고 분명히 유서에 명시해 놓았다. 가족은 한결같이 이성적으로는 환자의 뜻을 존중해야 함을 알고 있지만 현실적으로는 이 생명 장치를 제거하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 결정인지 한없이 밀려오는 죄책감으로 신음하고 있었다. 의사는 치료책이 없는 지금은 증상 완화 방법으로 진통제, 안정제, 가래 말리는 약 등을 처방해 놓겠다고 설명한 후 미팅을 마쳤다. 그때 환자 아들이 “I came in heavy, but now I am in light”하며 긴장을 풀었다. 함께한 우리는 무거웠지만 가볍게, 서로 깊은 포옹을 했다. 정명숙 / 중환자실 간호사이아침에 죄책감 유서 환자 가족 가족 일원 가족 멤버
2025.08.26. 20:11
#. 직장인 김 모씨는 식당 투 고(To-Go) 주문을 할 때마다 "죄책감이 든다"고 말한다. 최근 식당 카운터에서 흔히 찾아볼 수 있는 태블릿형 카드 결제기로 주문을 결제하면 화면에 뜨는 15%~25% 팁 권장 금액을 제쳐두고 "팁 없음"(No Tip) 버튼을 누를 때마다 괜히 "쪼잔한 구두쇠"가 되는 기분이기 때문이다.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투 고 주문으로 끼니를 때우는 직장인들이 많아지고, 식당·카페에서 태블릿형 카드결제기가 빠르게 보급되면서 뉴요커들이 투 고 주문을 할 때마다 심리적 부담감을 느끼고 있다. 카드 결제 후 태블릿 화면에 팁을 남기겠냐는 질문이 나올 때마다 멀뚱히 서 있는 직원을 앞에 두고 팁 지불을 거절하기 어렵다는 심리적 요인이 작용하기 때문이다. 한인 정 모씨는 점심시간에 카페에서 빵이나 커피를 사 먹을 때 팁을 내고는 있지만 "마음에서 우러나와서 내는 팁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그는 "서빙·리필 같은 추가 서비스가 제공되는 것도 아니고, 정작 식사는 회사에 돌아와서 한다"며 "그저 팁을 묻기에 내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같은 이유로 투 고 주문에는 팁을 안내는 한인들도 상당히 많다. 퀸즈 플러싱의 한 식당 업주는 "투 고의 경우 손님 중 90% 이상이 팁을 지불하지 않는다"고 전했다. 8일 뉴욕포스트도 해당 이슈를 두고 뉴요커들이 "죄책감 티핑"(Guilt Tipping)의 시대에 살게 됐다고 지적했다. 뉴욕시에서 레스토랑 서버 등 팁을 받는 근로자들의 최저 임금은 일반 근로자 최저임금보다 낮기 때문에 팁을 주는 것이 당연하지만, '패스트푸드' 매장 직원이나 카페 바리스타, 캐셔 등은 시간당 15달러의 최저임금을 보장받기에 이들에게 꼭 팁을 남겨야 하는가에 대한 뉴요커들의 의문이 늘어나고 있다고 보도했다. 특히, 파이브가이즈와 같은 패스트푸드점에서도 카드 결제 후 권장 금액인 15%·20%·25%의 팁을 지불하겠냐는 문구가 나와 손님들이 적잖이 당황하고 있다고 전했다. 그럼에도 요식업 관계자들은 매장 내 식사(Dine-In)·투고·배달 등 어떤 형태의 서비스라도 "팁은 의무적이지 않지만, 아주 적은 금액이라도 팁은 남기는 것이 관례"라고 주장하고 있다. 한편, 지난해 12월 팝메뉴가 발표한 보고서에 따르면, 코로나19 팬데믹으로 경제적 어려움을 겪은 식당·카페 등을 위해 뉴요커 중 58%가 팬데믹 전보다 더 많은 팁을 지불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으며, 평균적으로 결제금액의 25%에 달하는 팁을 지불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심종민 기자죄책감 뉴요커 태블릿형 카드결제 뉴요커들 심리적 심리적 부담감
2022.04.08. 20:4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