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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불아래서] 죽는 준비가 아니라, 살 준비를 하라

 우주는 우리에게 친절하지 않다. 아름다운 밤하늘은 유독 생명에게는 혹독하다. 그 압도적인 광대함과 놀랄 수밖에 없는 정밀한 운행은 우리를 한없이 겸손하게 만든다. 그러나 동시에 ‘생명’이라는 놀라운 사실 앞에서, 우주 역시 겸손해질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우주가 가만히 있는 것은 아니다. 끊임없이 별들을 낳고, 키우고, 소멸시킨다. 우주에는 창조자의 영광이 있다.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의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시 19:1).   이 말씀은 사람이 우주의 중심이 아니라는 뜻이다. 오히려 하나님은 인간을 청지기요, 다스리는 자로 부르셨다. 창조자의 영광을 기뻐하고 누리며, 하나님의 선을 더욱 빛나게 하는 존재로 세우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우주의 중심이 되고, 주인이 되기를 원했다. 나 자신의 생명에 대한 감사는 사라졌고, 오직 소유만이 남았다. 생명이 허무한 데 굴복한 것이다(롬 8:20). 감사와 영광, 즐거움과 사랑은 사라지고, 나 자신 외에는 의미가 없는 ‘나’만 남았다. 귀중한 나대신 이기적인 내가 남았다. 그렇다. 우리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간다.   이 죽음 앞에서 우리는 소망해야 하고, 기뻐해야 하며, 의미를 찾아야 하기에 고통은 더욱 깊어진다. 어떤 이는 오직 오늘만 생각하자고 말하고, 또 어떤 이는 죽음 이후를 준비하자고 한다. 그러나 죽음은 여전히 고통이고 두려움이다.   이 땅에 살았던 모든 사람 가운데 죽음을 가장 두려워한 이는 예수였다. 그는 죽음이 무엇인지를 가장 깊이 알았기 때문이다. 그것은 단순한 소멸도, 극한의 고통도 아니었다. 하나님을 떠나 하나님께 버림받는 것이 무엇인지 아는 일이었다. 그는 괴로움과 두려움에 떨며 호소했다.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그는 이렇게 고백한다. “나의 뜻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우리의 자리에 오신 예수는 주인 된 자리를 버리셨다. 자기를 낮추어 죽음에까지 이르셨다. 자신을 삼키는 혹독한 압박 속에서도 우리를 기억하시고, 우리를 대신하셨다.   생명의 문은 이렇게 열렸다. 예수 안에서 죽음의 지배는 끝났다. 우리는 죽음을 준비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삶을 준비하는 사람들이다. 영원한 영광의 삶이 열렸는데, 더 이상 죽음에 매일 수 없다.   우주 또한 우리가 살 준비를 하기를 기다린다. 허무 속에서 신음하고 있기 때문이다. 세상과 우주는 의미 없는 소멸에서 벗어나기를 갈망한다. 진리가 춤추고, 정의가 숨 쉬며, 땅이 회복되고, 화평이 노래하는 날을 준비하라고 말한다. 그날을 오늘부터 살아 내는 것, 그것이 바로 신앙이다.   [email protected]  한성윤 목사.나성남포교회등불아래서 죽음 이후 이상 죽음 소멸도 극한

2026.03.30. 19:19

[이 아침에] 나르키소스의 죽음 이후…

 나르키소스(Narcisus)는 죽었다. 연못에 비친 자신의 얼굴에 반해서 그 얼굴을 잡으려다, 또 잡으려다, 실망. 그리고 자신에 대한 상사병으로 시나브로 죽어간다.     그의 죽음을 누가 가장 슬퍼했을까?   그의 어머니 리리오페(Liriope)가 0순위 후보. 그녀는 나르키소스가 어릴 때부터 그의 운명을 걱정한다. 너무 잘 생긴 인간의 숙명…. 오만, 질투, 욕심을 그녀는 너무 잘 안다. 리리오페는 물의 요정, 남편, 즉 나르키소스의 아버지 세피서스(Cephissus)는 강의 신.     나르키소스가 14세가 되자 리리오페는 당시 아테네의 최고의 예언가 시각장애자 테이레시아스(Tiersias)에게 데리고 간다. 테이레시아스가 말한다. “나르키소스가 자신을 알아보는 일이 없으면 (fail to recognize himself) 장수하리라.”     “자신을 알아보다” 알쏭달쏭한 말이다. 결국은 거울 이야기가 되어버린다. 자신의 얼굴을 보게 되면 그 아름다운 모습에 겉잡을 수 없이 빠져 버린다는 예언.     나르키소스가 15세 때 또 하나의 요정이 나타난다. 에코(Echo, 메아리). 그녀는 착하고 말이 많은 여자였다. 제우스가 바람을 필 때 그의 아내 여신 헤라에게 거짓말을 시킨다. 제우스와 그의 상대 요정을 배려하는 마음으로. 헤라는 물론 크게 화를 낸다. 에코에게 말을 빼앗아 버린다. 에코에게는 남이 말을 걸었을 때 마지막 구절을 되풀이하는 능력만 남는다.     사냥 나온 나르키소스를 보고 에코는 한 눈에 반한다. 그를 졸졸 따라다닌다. 그가 화를 내며 말한다. “보기 싫어, 꺼져 버려.” 에코가 답한다. “꺼져 버려.” 서로가 말을 주고받는 것 같지만 대화는 아니다. 아무것도 이루어질 수 없는 말장난이 그들의 운명.   나르키소스가 작은 연못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본다. 황홀하게 아름답다. 그러나 잡을 수 없는 그림자. 그는 서서히 죽어간다. 그 모습을 안타깝게 바라보는 에코. 그의 죽음을 가장 슬퍼할 후보 두 번째가 바로 에코. 그러나 에코는 소리 내어 울 수도 없다.     나르키소스의 어머니 리리오페나 그 남자를 연모했던 에코는 그의 죽음을 슬퍼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죽음 때문에 가장 슬피 운 존재는 따로 있다. 19세기 아일랜드의 시인 오스카 와일드, 그의 ‘제자(The Disciple)’라는 제목의 시에 답이 있다.     나르키소스가 죽은 후 그 연못의 물은 짠물이 되었다. 연못이 흘린 눈물 때문. 산의 요정이 연못에게 말한다. “그래 많이 슬프지. 나르키소스가 참 미남이었지.” 연못이 묻는다. “정말 그가 미남이었어요?” “아니, 연못 네가 모르면 누가 아니?”   연못이 답한다. “그가 죽어서 슬퍼요. 나는 그의 눈에 비친 멋진 나를 더 이상 볼 수 없잖아요.”   연못의 솔직한 대답은 오늘 우리에게도 유효하다. 누가 누구를 좋아한다는 것은 상대를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이라는 거울에 비친 자신을 좋아하는 것이다. 우리는 상대방의 눈 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에 빠져서 살고 있다. 상대를 보면서 그 사람을 보지 못한다.   김지영 / 변호사이 아침에 나르키소스 죽음 상대 요정 죽음 이후 요정 남편

2021.11.07. 12: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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