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어웨이 벙커샷은 벙커 턱의 기울기와 높이에 따라 클럽을 선택해야 한다. 벙커 턱이 2피트 높이라면 8번(43도)아이언 거리일지라도 48도 이상의 피칭웨지를 선택, 볼을 띄워 벙커에서 먼저 탈출하는 것을 우선으로 해야 한다. 주말 골퍼들은 매번 라운드에서 한 두 번 내지 심하면 서 너 번씩 잘못된 클럽 선택으로 최악의 스코어를 내는 경우가 빈번하다. 그릇된 선택은 종류가 많아 어느 것을 꼬집어 설명하기 힘들지만 집약하면 몇 가지 안 되는 만큼, 침착하게 행동하면 충분히 극복해 나갈 수 있다. 드라이버 티샷의 진로를 잘못 정한다거나 자신의 샷을 과대평가, 클럽을 짧게 선택하여 그린 앞 벙커나 물에 넣기도 한다. 반면 자신의 비거리는 언제나 짧다는 피해망상에 잡혀 긴 클럽을 선택, 그린 앞이나 뒤의 해저드(hazard)나 OB지역에 볼을 빠트리는 경우도 있다. 정상적인 판단에 의해 클럽을 선택했지만 부득이한 사정, 즉 기상조건이 나쁘거나 미스샷 등으로 인한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자만이나 소심함으로 인한 결과는 100% 본인 실수다. 연속된 실수는 불치병으로 간주한다. 라운드가 끝나면 스코어카드를 들고 더블보기 때고, 퍼팅 미스서너 개 빼는 등 나름대로 위안하며 싱글 문턱에 있다고 자위하는 골퍼도 의외로 많다. 그러나 핸디캡을 내리려면 실수한 샷 몇 점을 뺄 것이 아니라 욕심을 버려야 한다. 욕심, 이것이 골프를 망치는 원흉이다. 특히 페어웨이 벙커 턱이 만리장성인 줄도 모르고 무작정 샷을 쏘아대는 골퍼들이 많다. 그들은 혹시나 하고 벙커샷을 하지만 역시 벽을 넘지 못하고 벙커 속에서 ‘퍼덕’대는 상황까지 종종 일어난다. 예를 들면 그린까지 130야드가 남았다고 가정할 때 독자라면 어떤 판단을 내릴 것인가? 그동안의 벙커샷 설명만 기억하고 있다면 별문제 없이 클럽선택을 할 것이다. 벙커 턱으로부터 볼이 있는 지점은 10피트 정도에 그린까지 거리는 130야드, 평상시라면 8번(43도), 9번(47도)으로 가볍게 처리할 수 있는 상황이다. 그러나 벙커 턱 높이가 무릎 높이 (약 2피트)정도만 된다 해도 8번 아이언이라면 그 샷은 턱에 걸려 탈출에 실패한다. 따라서 9번 (47도)을 사용해도 타면이 볼에 접촉할 때 가운데를 맞춰야 47도의 각도로 볼이 뜬다. 그러나 페어웨이 벙커샷은 타면 아래 날 부분 (leading edge)으로 친, 탑핑샷 기분이 들어야 제대로 친 것이다. 그런데 타면이 볼에 접촉될 때 타면의 중앙이 아닌 아래를 치면 그 각도는 현저히 낮아져 심한 경우 4번(24도)아이언 각도와 같아질 때도 있다. 따라서 무릎 높이 이상의 벙커 턱이라면 타면 각도가 최소 48도 이상인 피칭웨지로 샷을 하는 것이 바람직한 방법이다. ‘마음이 급하면 샷도 급해진다’는 선택의 진리를 터득해 나가야 한다. 또한 잘못된 클럽 선택이 전체 18홀의 점수를 좌우한다는 걸 명심해 둘 필요가 있다. ▶www.ThePar.com에서 본 칼럼과 동영상, 박윤숙과 동아리 골프도 함께할 수 있습니다. 박윤숙 / Stanton University 학장골프칼럼 선택 진리 페어웨이 벙커샷 클럽 선택 벙커샷 설명
2025.02.13. 19:39
낙관보다는 비관으로, 확신보다는 회의로 얼룩진 지난해의 그림자를 지우며 을사년 새해를 맞이했다. 하지만, 지구촌은 아직도 전쟁, 테러, 여객기 참사, 탄핵으로 인한 불확실성으로 인해 희망과 절망이 뒤범벅된 상태여서 사람들의 마음이 어둡기만 하다. 이럴 때일수록 우리는 삶의 균형과 조화를 이룰 필요가 있다. 빛과 어둠은 삶의 일부로 서로 공존하게 마련이다. 밤은 어둠과 고난을 상징한다. 우리가 어려운 상황 한가운데 있을 때, 모든 것이 어둡고 답답하게 느껴진다. 허나 어려운 시기일수록 그 속에서 더 큰 깨달음이나 가능성을 발견할 수 있다. 인생의 어려움이나 고난이 깊어질수록, 희망이나 긍정적인 요소가 더 돋보이게 된다. 그런 시점에서 점점 더 뚜렷하게 빛을 발하는 별들은 고난 속에서도 희망과 기회가 존재함을 일깨워 준다. 별은 수소를 헬륨으로 바꾸는 핵융합 반응을 하면서 스스로 빛을 발하는 천체이다. 별처럼, 우리도 내면의 강인함과 인내심으로 성숙해져서 긍정적이며 상황을 앞서서 주도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별이 밤하늘의 어둠 속에서 빛을 발하듯, 힘든 상황에서도 우리에게 희망과 용기를 발견할 수 있다는 강한 메시지를 전한다. 마치 별이 어둠 속에서 가장 아름답게 빛나듯, 우리의 인생에서도 어려움이 있어야 그것을 이겨낸 성취와 기쁨이 더욱 값지게 느껴지게 된다. 어둠 속에서 밝게 빛나는 별은 이러한 역경 속에서 오히려 빛을 발하는 존재의 아름다움과 가능성 그리고 희망을 상징한다. 어둠이 깊을수록 별빛이 더욱 선명하게 드러나듯, 어려운 시기일수록 희망과 내면의 강인함이 더욱 빛을 발해야 한다. 밤이 깊어질수록 별이 더 밝게 빛난다는 것은 어려움이 깊어질수록 인내하면서 더 많은 것을 배우고 성장할 수 있음을 뜻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어려운 시간을 지나면서 더 강해지고, 결국 그 과정이 우리에게 빛을 비추게 되기 때문이다. 별빛이 시간이 지날수록 더 뚜렷하게 보이듯이, 우리도 어려움을 통해 더욱 성숙해질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줄 수 있어야 한다. 밤이라는 어두운 시간이 지나가면 아침이 오듯이, 힘든 시간이 끝나면 희망과 기회가 찾아온다는 교훈을 기억해야 한다. 고난의 시기를 지나면, 결국엔 더 밝은 미래와 성취가 있기 때문이다. 어려운 상황일수록 사람의 진정한 가치나 잠재력이 드러나게 마련이다. 고난을 겪을 때, 평소에는 보이지 않던 힘과 지혜가 발휘될 수 있다. 어려운 순간에도 희망을 잃지 말고, 고난을 통해 성장하면, 마지막에는 밝은 빛이 있을 것이라는 확고한 믿음을 가져야 한다. 그러면 절망 대신 희망을 갖게 되고, 삶의 도전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 빛과 어둠, 이 둘을 동시에 인정하는 것이야말로 우리의 삶을 전면에서 직시하는 용기이고 지혜라고 한 철학자는 말했다. 왜냐하면 빛은 어둠을 만들고 어둠은 빛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야심성유휘(夜深星逾輝), “밤이 깊어 갈수록 별은 더욱 밝게 빛난다.” 먼 어두운 밤길을 걸어가는 사람들과 함께하는 따뜻한 위로와 격려의 말이다. 손국락 / 보잉사 시스템공학 박사기고 진리 상황 한가운데 핵융합 반응 을사년 새해
2025.01.13. 18:59
100여년 전 원불교 창시자이신 소태산 대종사를 어떤 한 사람이 찾아와 대종사께 물었습니다. “저는 항상 진세(塵世)에 있어서 번뇌와 망상으로 잠시도 마음이 바로 잡히지 못하오니 그 마음을 바로 잡기가 원이옵이다.” 대종사께서는 다음을 말씀하셨습니다. “마음 바로잡는 방법은 먼저 마음의 근본을 깨치고 그 쓰는 곳에 편벽됨이 없게 하는 것이니 그 까닭을 알고자 하거든 이 의두(疑頭)를 연구해 보라.” 하시고 “만법귀일(萬法歸一) 하니 일귀하처(一歸何處)오”라고 써 주셨습니다. 상식적으로는 마음 안정을 원하는 사람에게 명상 등 수양방법을 가르쳐 주어야 하는데, 소태산 대종사께서 그분께 의두, 즉 진리적인 의문 거리를 연마해 보라고 하신 말씀은 참으로 의미 깊습니다. 필자는 20대 중반 원불교 교학과 학생 시절 어느 날 갑자기 이마에 부스럼 돌기 같은 것이 나기 시작했습니다. 붉게 된 부분이 가렵기 시작했고 이마가 흉하게 되었습니다. 피부과를 찾아갔고 조직검사까지 하였으나 의사 선생님께서는 정확한 원인을 알지 못하겠다고 하며 아마 어떤 바이러스 혹은 박테리아 감염이 원인이 아닌가 하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의사가 권하는 약을 먹고 처방된 연고를 두 달간 발랐으나 전혀 효과가 없었습니다. 방학이 되어 어떤 한의사를 찾아갔습니다. 한의사는 저를 진맥해 보더니 제 몸이 너무 피곤한 상태이며, 이마의 돌기는 피곤으로 인해 화기(火氣)가 얼굴로 올라와 생긴 것 같다고 하며 화기를 내리고 수기(水氣)를 강하게 하는 한약을 처방해 주었습니다. 약을 먹는 것이 주요한 것이 아니라 잘 쉬는 것이 우선이라는 당부를 하셨습니다. 여름방학 동안 두 달 정도 잘 쉬고 나니 이마에 돌기가 저절로 완전히 사라졌습니다. 어떤 문제가 있으면 그것에는 원인이 있습니다. 원인에는 피상적 원인이 있고 근원적 원인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어떤 바이러스가 제 이마에 돌기를 일으켰다고 하는 것은 (이가 어느 정도 사실이겠지만) 피상적 원인이며, 돌기의 근본 이유는 제 몸이 너무 피곤했기 때문입니다. 화나는 마음, 요란한 마음, 어리석고 그른 마음, 비교하는 마음 등 우리는 마음을 잘 다스리지 못합니다. 그것의 피상적 원인은 여러 가지가 있겠으나, 근원적 원인은 우리가 마음의 실체를 보지 못하고 마음의 근본원리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대종사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마음을 바로잡기를 원하면 마음의 근본을 깨쳐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이런저런 경계에서 해탈을 잘하지 못하는 이유도 바로 마음의 원리를 모르기 때문이라고 대종사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대종사 서울 박람회에서 화재보험 회사의 선전 시설을 보시고 한 감상을 얻었다 하시며, 말씀하시기를 “우리가 항상 말하기를 생사고락과 해탈을 하자고 하지만 생사의 원리를 알지 못하면 해탈이 잘 되지 않을 것이니….” (천도6) 예수님께서도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말씀하셨습니다. (요한 8:32) 진리를 알지 못하고 우리가 마음의 자유를 얻지 못합니다. 인생의 제반 고통으로부터 근원적으로 벗어나는 방법은 진리를 깨닫는 것입니다. 따라서 불교를 ‘깨달음’의 종교라 합니다. 불교(佛敎)의 불(佛)자는 ‘깨칠 불’ 혹은 ‘깨달을 불’입니다. 진리란 우주만유의 본원이자 우리의 본성입니다. 진리를 깨치는 것, 즉 우리 마음의 실체를 아는 것을 불교에서는 견성(見性), 즉 성품을 본다고 말합니다. 진리를 깨닫기 위해서는 우선 ‘의심’을 일으켜야 합니다. 진리에 관한 의심 없이 깨달음을 얻기란 불가능합니다. 문제가 없는데 답이 있을 수 없습니다. 유도성 / 원불교 원달마센터 교무삶과 믿음 깨달음 진리 진리적 의심 우리 마음 마음 안정
2024.11.14. 17:52
“참 오래 애썼다. 너에게 진 빚, 어떻게 다 갚아?” “우리가 모르고 산 것 아니냐, 다 알아. 이제부터는 너희도 오붓하게 우리도 오붓하게 살아보는 거야.” 이어 “한마디만 더할게요” 한 뒤 며느리를 향해 90도 머리 숙여 울먹이며 “감사합니다.” 그리고 현관을 향해 걸으며 하는 말 “앞으로 신세 질 일 전혀 없지는않겠지만, 그동안 정말 하늘만큼, 땅만큼 고마웠다.” 요즘 아침나절에 재방송 중인 ‘그래 그런 거야’ 라는 드라마 44회에 나오는 대사 일부다. 노부부가 수십 년 함께 살았던 셋째 아들 집에서 분가키로 작정한 뒤 이사하는 날 아침, 시어머니 강부자가 그동안 모시고 고생하며 산, 막내며느리 김해숙에게 하는 감사의 표현이다. 말솜씨의 달인 작가, 김수현이 썼다는 것을 고려해도 너무 감동적이다. 도저히 한국사회의 고부지간에 있을법한 장면과 대화가 아니라 귀를 의심하며 몇 번이고 유튜브를 돌려가며 받아적어 소개한다. 앞으로 우리 가정의 말문화가 이처럼은 아니라도 조금씩의 변화를 기대하는 소망과 함께 말이다. 말의 사전적 뜻은 사람의 생각과 뜻을 담아 내놓는 그릇인 동시 뜻과 생각을 표현하는 수단이다. 맛있게 요리한 음식을 어울리는 그릇에 제대로 담아 정성스럽게 치장하는 것을 플레이팅이라 하여 훌륭한 셰프는 요리실력만큼 이 분야의 연구도 게을리하지 않는다고 한다. 말도 마찬가지다. 같은 말도 아! 다르고 어! 다르듯이 때와 장소 분위기는 물론 누가 어떻게 표현되느냐에 따라 다르게 들리는 법이다. 그런 면에서 말도 플레이팅이 필요하지 않을까? 빛깔 좋게 담긴 음식이 맛도 좋고 건강에도 유리해 보이듯이 말 또한 곱게 다듬고 향취를 더할 때 더 맛깔나고 진정성 있게 전해지며 때로는 감정선까지 자극하기도 한다. 그 좋은 예가 강부자의 대사다. 그녀가 짧은 감사의 말을 울음과 함께 허리 굽힌 최상의 겸손이란 그릇에 담아 전달하므로 며느리는 물론 시청자들의 마음마저 훔쳐가고 있는 것이다. 일반인들의 경우 보통 하루에 20만 단어나 되는 말을 한다고 한다. 책 한 권의 원고량이 대략 18만 단어라고 한다니 우리는 매일 책 한 권, 일 년에 400여권, 한평생 3만여권의 자서전을 쓰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말이 많다고 다 좋거나 쓸만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사람의 입에서 나오는 말들은 악한 생각과 음란과 도둑질, 살인과 간음, 탐욕과 속임수, 질투와 비방, 교만, 우매함’이라고 성경은 말하고, 부처님 또한 ‘생각은 말로, 말은 행동을, 행동은 습관이 되고 습관은 성격으로 굳어진다’라며 생각과 말의 무서움을 경고하고 있다. 원칙적으로 말의 순기능은 이웃과 좋은 관계를 형성하고, 배우고 익힌 진리를 표현하며, 변화된 문명을 전달하라는 뜻에서 하나님이 인간에게 베푸신 특별한 은혜다. 그런데 인간은 말을 통해 좋았던 인과 관계를 깨고 참된 진리를 왜곡시키며, 길이 전해야 할 문명을 훼손시키는 등 말의 순기능을 ‘필요악’으로 전락시키는 경우가 많다.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 내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성경이 말하는 답이다. 우리 모두 세상의 거짓 선동에 현혹되지 말고 참진리 곧 하나님의 말씀(로고스)에 귀 기울이므로 참자유를 누리길 소망해본다. 김도수 / 자유기고가살며 생각하며 진리 자유 막내며느리 김해숙 음란과 도둑질 재방송 중인
2022.10.28. 18:05
오늘날 과학기술의 발전, 물질문명의 발달은 하루가 다르게 진보하고 있습니다. 역사가 토인비의 말에 따르면 물질문명은 토끼의 뜀뛰기와 같은 속도로 빠르게 진행되지만, 정신문명의 발달은 거북이걸음이라 했습니다. 철없는 어린아이가 칼을 갖게 되면 결국 사고를 내듯, 영적으로 미성숙하고 지혜가 어두운 사람이 찬란한 현재의 물질문명의 이기 속에 살게 되면, 이는 마치 어린이가 칼을 가지고 놀게 되는 상황이 된다고 원불교 창시자 소태산 대종사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노벨이 처음으로 화약을 만들었을 때 그것이 처음 응용된 분야가 전쟁용 폭탄제조였습니다. 과학자들에 의해 마침내 원자 구조가 밝혀지고 원자들의 결합과 분리과정에서 무한 에너지가 발생하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처음으로 그것이 응용된 분야는 원자폭탄 제조였습니다. 물질문명 속에서 우리의 참 가치가 매몰되고 물질적, 상업적, 경쟁적 환경 속에서 물질이 우리 삶을 풍요케 하기보다 오히려 우리를 속박하고 있습니다. 이는 물질 자체의 문제라기보다 인간의 나약한 정신, 성숙하지 못한 마음의 문제입니다. 세탁기, 자동차, 전화 등으로 과거보다 한없는 시간 여유가 생겼지만, 현재 우리 마음은 과거보다 더 불안합니다. 오히려 더 급해지고 선진국일수록 정신병은 많아집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여야 인생을 바르고 안락하게 살 수가 있을까요.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요한 8:32)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소태산 대종사께서는 인생을 낙원으로 이끄는 방법을 “진리적 종교와 사실적 도덕의 훈련”이라 하셨습니다. 우리가 진리를 모르고 진리적인 가치관에 따라 살지 않으면 설사 우리가 아무리 기도하고 선과 명상을 하더라도 자유롭고 행복한 인생을 사는 데에 한계가 있습니다. 우리가 세상 것을 좇아서 세상 자랑으로 사는 이상, 우리는 남과 비교하며 살지 않을 수 없고, 현실에 만족하기 힘듭니다. 한 제자가 대종사께 물었습니다. “무슨 방법으로 수양하여야 오욕을 다 없애고 수도에 전일 하여 부처님과 같이 한가롭고 넉넉한 생활을 하오리까.” 대종사께서는 “욕심은 없앨 것이 아니라 도리어 키울 것이니, 작은 욕심을 큰 서원으로 돌려 키워서 마음이 거기에 전일 하면 작은 욕심들은 자연 잠잘 것이요, 그러하면 저절로 한가롭고 넉넉한 생활을 하게 되리라”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나는 그대들에게 희로애락의 감정을 억지로 없애라고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희로애락을 곳과 때에 마땅하게 써서 자유로운 마음 기틀을 걸림 없이 운용하되 중도에만 어그러지지 않게 하라고 하며, 가벼운 재주와 작은 욕심을 미워할 것이 아니라 그 재주와 발심의 크지 못함을 걱정하라 하노니, 그러므로 나의 가르치는 법은 오직 작은 것을 크게 할 뿐이며, 배우는 사람도 작은 데에 들이던 그 공력을 다시 큰 데로 돌리라는 것이니, 이것이 곧 큰 것을 성취하는 대법이니라” 필자는 어린 시절부터 종교에 관심을 가졌지만, 20대 중반에 불법을 만나서 희미하지만, 영생의 진리, 생사 해결의 중요성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후 원불교에 출가한 후 세상 것들에 별로 끌리지 않게 되었는데, 그 이유는 좌선을 많이 해서 정력이 쌓여서 그랬다기 보다 필자의 가치관이 변했기 때문입니다. 무엇이 참으로 주요하고 영생으로 이르는 길인가를 알았고, 필자의 인생관과 가치관이 달라져서 세상 것에 별로 끌리지 않게 된 것입니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라고 말할 때 앞의 구절이 주요합니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우리가 자유로운 인생을 위해서는 우선 진리를 알아야 하고, 진리를 배워야 합니다. 우리를 자유케 하는 궁극의 진리는 학교에서, 가정에서, 직장에서 배울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전 세계 많은 인류 중 극소수 사람들만이 진리를 깨달았고 우리는 그 진리를 깨달은 성자들로부터 진리를 배워야 합니다. 유도성 / 원불교 원달마센터 교무삶과 믿음 진리 공부 진리 공부 진리적 종교 진리 생사
2022.10.20. 18:24
지난 한주 무척 바빴다. 월요일부터 4박 5일 일정으로 뉴욕주 끝자락에 위치한 Lake Placid에 머물다 금요일 저녁 돌아왔다. 인구 2638명의 작은 산골 마을이 1932년, 1980년 겨울 올림픽을 개최하면서 일약 유명 관광지로 발돋움하면서 찾는 이들로 넘친다. 개인적으로 이번 여행은 지난 2월에 이어 두 번째다. 당시는 마지막 겨울 끝자락의 눈 나라였다면 이번은 가을의 찬란한 시작이 거기 있었다. “산마다 불이 탄다 고운 단풍에, 골마다 흘러간다 맑은 물줄기, 황금빛 논과 밭에 풍년이 왔네. 드맑은 하늘가에 노래 퍼진다. 눈이 닿는 우주 공간에 손이 닿는 구석구석에…”라는 찬송 가사가마음에 와 닿았다.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산 White face를 오른 것이다. Adirondack park의 랜드마크 격인 1483m(4867ft)의 이 산은 4600피트까지 차가 올라간다. 나머지 267피트는 돌산 한 중앙을 꿰뚫고 꼭대기까지 연결된 엘리베이터를 이용하거나 외곽 등산로를 15분 정도 걸어서 오를 수 있다. 정상에 서면 야호! 하늘과 구름, 굽이굽이 이어진 산과 들판, 호수 사이로 북쪽으로는 몬트리올, 동북으로는 버몬트주가 손에 잡힐 듯 저 앞에 고개를 디민 모습을 굽어볼 수 있다. 다시 336마일을 돌아 토요일, 펜실베이니아주 랭커스터로 갔다. 수개월 전 예약한 성극 ‘David’을 관람하기 위해서다. 팬더믹 이전 본 작품들도 좋았지만, David는 정말 대단한 영감을 준 명작이었다. 전반부는 인간 다윗의 신실한 믿음과 하나님의 사람으로 쓰임 받는 과정이라며 후반은 실수와 범죄, 참회 그리고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사랑 이야기다. 명장면을 꼽으라면 끝부분, 다윗이 넘어져 절망 중일 때 화면 가득 비친 구세주 예수의 모습과 함께, 용서의 상징인 듯 온 극장에 가득 흩날리는 흰 눈발과 사방에서 들려오는 천상의 화음들! 2000명 관객은 자신도 모른 채 눈가를 훔치며 아멘, 할렐루야 하고 화답한다. 성극 관람 후 찾은 곳은 ‘아미시 타운’이다. 1720년대 독일에서 건너온 재세례파 극보수주의 신앙촌 격으로 지금도 현대문명을 거부하고 옛 방식을 고집하며 불편 없이 살아가고 있었다. 직접 만든 검은색 계통의 옷을 주로 입고 4마리의 말이 끄는 쟁기로 땅을 갈며 작은 수확에도 만족해하는 듯하다. 전기도 가능한 직접 사용치 않고, 셀폰 대신 마을 전체가 공용전화 한 대로 비상시를 대비해도 불안해하지 않는다. 자녀들은 마을 내 학교에서 읽기 쓰기 더하기 빼기 정도만 배우고, 주 이동수단은 마차이고 단거리는 바퀴가 두뼘 정도에 지나지 않는 씽씽이를 사용한다. 요즘 세상이 변하고 있다. 금과옥조처럼 알고 지켜왔던 윤리와 도덕 신앙적 기준들이 무너지고 있어 혼란하다. 자녀들이 학교에서 가져온 교재나, 책을 무심코 펼치다 보면 민망한 내용과 장면들로 가득하고, 상대를 he, she 대신 they로 부를 것을 가르침 받고 그것이 옳다고 알고 있어 답답하다. 교회도 예외는 아니다. 성경에서 가증하다고 규정한 동성애 문제가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용납당하고, 싫으면 당신들이 떠나라는 항변이 불편한 진실이다. 아미시인! 그들에게 세상은 무엇일까? 참 진리가 주는 자유함을 누리며 작은 불편을 신앙으로 감수하며 평안을 누리는 그들이 오늘 한없이 부럽고 귀한 존재로 느껴진다. 김도수 / 자유기고가살며 생각하며 진리 자유 극보수주의 신앙촌 뉴욕주 끝자락 산골 마을
2022.10.14. 16:4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