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미국 전역에서는 기후 위기의 잔혹한 현실이 다시 한번 목격됐다. 지난 1월 캘리포니아의 하늘은 사상 최악의 산불 연기로 검게 물들었고, LA 인근에서 피어오른 큰 불은 수천의 보금자리를 잿더미로 만들고 수만 명의 삶을 송두리째 뒤흔들었다. 지난 7월 텍사스 힐 컨트리에서는 분노한 과달루페 강이 모든 것을 삼켰다. 불과 몇 시간 만에 135명의 소중한 생명이 사라졌고, 그중 27명은 여름 캠프의 단꿈에 젖어 있던 아이들이었다. 기상청의 절박한 경보는 ‘안전할 것’이라는 낡은 믿음과 행정 시스템의 안일함 속에 공허한 메아리가 됐다. 이 비극은 북미 대륙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지구 반대편, 아프리카 말라위는 엘니뇨가 할퀸 상처 위로 가뭄과 홍수가 번갈아 덮치며 420만 명을 식량 위기의 벼랑 끝으로 내몰았다. 5세 미만 아동의 중증 영양실조 비율이 6배나 폭증했다는 참혹한 통계는, 기후 위기가 단순한 날씨의 변덕이 아니라 가장 연약한 이들의 생존권을 박탈하는 실존적 위협임을 뜻한다. 과거 ‘한 세대에 한 번’ 겪을까 말까 했던 극한의 재난은 이제 매년, 매 계절 우리를 위협하는 ‘뉴노멀’이 되었다. 기후 위기는 재난의 속도와 파괴력을 동시에 증폭시키며, 언제나 가장 취약한 공동체와 사회적 약자의 숨통부터 조여온다. 역설적이게도, 국가 시스템이 마비된 재난의 최전선에서 가장 먼저 손을 내미는 것은 거대한 정부 조직이 아닌, 풀뿌리 민간 단체와 지역 공동체다. LA 산불 당시, 행정력이 미치지 못하는 공백을 뚫고 신속하게 구호 기금을 모아 절망에 빠진 이웃에게 전달한 LA한인회의 활동은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이들의 헌신은 단순한 온정이 아니다. 무너진 일상을 다시 세우고 인간의 존엄을 지키는, 대체 불가능한 사회 안전망의 마지막 보루다. 정부의 손길이 닿기 어려운 제3세계에서 그 역할은 더욱 절대적이다. 굿네이버스와 같은 국제 인도주의 단체들은 말라위의 가뭄 피해 지역 6000가구에 식량과 영양을 공급하며 꺼져가던 생명의 불씨를 살려냈다. 이들은 재난 초기 긴급구호를 넘어, 지역 공동체가 자립할 수 있도록 장기적인 생계 회복 프로그램을 설계하고 실행하는 ‘끊김 없는 지원 시스템’을 구축하고 있다. 국경을 넘어선 필사적인 연대야말로 기후 재앙 시대의 유일한 희망임을 현장에서 증명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언제까지 이들의 선의와 헌신에만 기댈 수는 없다. 한정된 자원과 시간 속에서 벌이는 사투는 기후 재앙의 거대한 파도 앞에서 위태롭기 짝이 없다. 이제 기후 위기 대응 패러다임의 근본적인 전환이 필요하다. 일회성 모금과 단발성 지원을 넘어, 재난의 예방과 대비, 신속한 구호와 장기적인 재건을 아우르는 ‘지속 가능한 인도주의 시스템’으로 나아가야 한다. LA의 불길, 텍사스의 홍수, 말라위의 굶주림은 더 이상 ‘남의 일’이 아니다. 대륙과 국경, 부의 격차를 넘어 우리 모두의 문을 두드리는 예고된 비극이다. 재난은 언제나 가장 약한 곳을 먼저 무너뜨리며, 생존은 물론 인간다운 삶의 권리마저 잔인하게 빼앗는다. 정부의 더딘 대응과 행정의 한계가 명확해진 지금, 해답은 시민사회에 있다. 재난 발생 직후부터 평온한 일상이 회복될 때까지, 피해자들의 곁을 지키는 촘촘하고 끊김 없는 지원 네트워크를 민간의 주도로 설계해야 한다. 기후 위기는 우리 시대의 가장 중차대한 인도주의적 과제다. 우리는 선택의 기로에 서 있다. 다음 재난의 희생자를 지켜보며 방관자로 남을 것인가, 아니면 지금 당장 연대의 손을 내밀어 변화를 이끌 것인가. 역사는 결국, 행동하는 사람들의 기록으로 채워질 것이다. 김재학 / 굿네이버스 USA 본부장구호 현장에서 최전선 재난 재난 초기 기후 위기 지원 시스템
2025.09.01. 19:00
4000달러. 지난 15일부터 18일까지 콜로라도주 애스펀에서 열린 애스펀 안보 포럼 입장권 가격이다. 4일간 현장 취재를 위해 참석했다. 업계 전문가들의 의견만 듣는 자리의 참가비로 수천 달러를 내야한다는 건 일반적인 상식선에서 납득하기 어려울 수 있다. 그러나 다른 시각에서 보면 4000달러는 결코 비싸지 않다. 지난해 11월 주미한국대사관은 4만 달러에 로비업체 머큐리 퍼블릭 어페어스와 2개월 단기 계약을 맺었다. 전략 컨설팅, 공보, 정부 관계자 접촉 등을 대행하기 위한 계약이었다. 금액만 놓고 보면, 포럼 참가비는 로비 계약의 10분의 1 수준이다. 물론 4일짜리 포럼 입장권 가격과 2개월짜리 계약금을 숫자만 두고 비교하면, 당연히 후자가 더 경제적이다. 그러나 애스펀 안보 포럼이 제공하는 ‘현장 외교’ 기회를 고려하면, 이 4일짜리 포럼 참가가 훨씬 가성비 있는 대미 외교 투자일 수 있다. 국제 안보 현안을 다루는 애스펀 안보 포럼은 크게 두 가지 기회를 제공한다. 하나는 세계 각국의 외교·안보 전문가들 인사이트를 직접 들을 수 있다는 점이다. 또 하나는 이들과 동등한 위치에서 식사하고, 대화하며 자연스레 네트워킹할 기회다. 참석자 대부분은 쟁쟁한 전문가들이지만 현장에는 의전도, 수행원도 없었다. 로키산맥에 둘러싸인 리조트에서 전·현직 장·차관, 군 장성, 기업인, 대학교수, 언론인 등 수백 명이 자연스럽게 어울렸다. 포럼 참가자는 누구든 ‘이름표 하나’만으로 관계를 시작할 수 있다. 일례로 포럼 둘째 날인 지난 15일, 아침 식사가 제공되는 리조트 가든 텐트에 차히아긴 엘벡도르지 전 몽골 대통령이 홀로 벤치에 앉아 식사 중이었다. 지난 1990년 몽골 민주화혁명 핵심 인사로, ‘몽골 민주화의 아버지’라 불린다. 기자가 “같이 앉아도 되겠느냐”고 묻자 그는 흔쾌히 허락했다. 그렇게 한인 언론사 기자와 전직 국가 정상 간 ‘1대1 조찬’이 40분간 이어졌다. 식사 중 그는 방북 경험부터 북한 체제의 문제점,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 파병된 북한군의 함의, 미국의 아태 전략 속 한반도와 몽골의 지정학적 위치 등에 대한 견해를 나눴다. 또 이날 점심에는 국방부, 사이버보안 및 인프라 보안국(CISA), 세계적인 경영컨설팅 업체인 ‘프라이스워터하우스쿠퍼스(PwC)’ 관계자들과 한 테이블에 앉았다. 인공지능(AI)을 비롯한 기술 발전 과정 속 정부의 역할에 대한 의견을 주고받았다. 대화 중, PwC 관계자는 과거 한국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장관과 만났던 경험을 언급하며, 한국의 톱다운식 정책 결정 방식과 정부와 기업 간 관계가 기술 혁신에 걸림돌이 될 수 있다고 지적했다. 로비업체를 통해서는 얻기 어려운, 생생하고 진솔한 대화의 연속이었다. 안타까운 점은 이런 자리에 주미한국대사관이나 한국 외교부 관계자는 보이지 않았다. 중국, 일본, 대만 정부 및 기업 관계자들은 빠짐없이 참석했다. 특히 사실상 주미 대만 대사관 역할을 하는 주미 대만 경제문화대표부(TECRO)의 유타레이 대사가 활발히 미국 고위 인사들과 어울리는 모습은 부럽기만 했다. 이번 포럼에는 미국 방위산업 및 첨단기술 기업 관계자들도 대거 참석했다. 예를 들어 크리스 브로스 안두릴 인더스트리즈 최고전략책임자를 비롯해 보잉, 록히드마틴, 인텔, 오픈 AI 등의 대표자들도 자리했다. 항공우주, AI, 위성 등 기술 기반 안보 전략이 가속화되는 가운데 한국 입장에서 이들과의 접점은 절실하다. 더구나 K-방산 강화와 한국형 3축 체계 고도화를 추진하는 현재 상황에서 한국 방산 기업이나 정부 관계자들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애스펀 안보 포럼은 단지 앉아서 듣는 행사가 아닌, 직접 보고, 만나고, 말 걸고, 관계를 맺는 ‘현장 외교’의 장이었다. 물론 새 정부 출범 초기이자 외교부 장관이 이제 막 임명되고, 주미대사직이 공석인 점을 고려하면 관계자 부재를 어느 정도 이해할 수는 있다. 하지만 외교의 시계는 기다려주지 않는다. 진정성 있고 관계 중심적인 외교, 정보 밀도 높은 외교는 로비업체가 아닌 이런 현장에서 시작된다. 외교도 경쟁이다. 현장에서의 경쟁력 없이는 존재감도, 영향력도 없다. 애스펀 안보 포럼 같은 외교 최전선에서, 한국은 더 많이, 더 자주, 더 적극적으로 보여야 한다. 김경준 / 사회부 기자기자의 눈 최전선 외교 정부 관계자 애스펀 안보 대미 외교
2025.07.23. 19:55
요즘 미국 언론엔 지식인들의 푸념이 자주 들린다. 트럼프 정부 탓에 표현의 자유가 사라졌다는 것이다. 지난 13일 뉴욕타임스에 실린 노벨경제학상 수상자 조지프 스티글리츠 칼럼을 보자. 그는 DEI(다양성·형평성·포용성) 정책을 폐기한 트럼프 정부 탓에 자신의 해외강연이 차질을 빚을 뻔했다고 썼다. 외국 대학에서 강연할 예정이었는데, 이 학교가 DEI 폐기를 서약하지 않아 국무부 후원금 1만 달러가 취소됐다는 것이다. 그 바쁜 국무부가 이런 것까지 깐깐하게 통제하다니, 트럼프 정부의 옹졸함이 부각됐다. 비슷한 글은 부지기수다. 트럼프가 표현 자유 억압? 반쪽만 보는 것 자유의 나라 미국이 어쩌다 이 지경이 됐나, 탄식하기 십상이다. 하지만 이를 액면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반쪽만 보는 거다. 반대의 시각이 엄연히 존재한다. DEI 어젠다에 눌려 침묵해온 보수층 말이다. 그들에게 저 글은 ‘피해 호소인’의 엄살에 불과하다. 바이든 정부는 DEI 준수를 정부 후원의 조건으로 걸었다. 트럼프 정부에선 폐기가 조건이다. 방향만 반대일뿐 후원에 조건을 건 것은 같다. 한쪽만 비난할 일이 아니지만, 2007년 베네수엘라의 우고 차베스 정권을 대놓고 칭찬했던 스티글리츠의 글이니 그러려니 넘어가자. DEI를 둘러싼 공화당과 민주당의 대립은 가치논쟁 수준을 넘는다. 2021년 조 바이든은 대통령 취임 첫날 DEI를 정책으로 채택하는 행정명령 13985호에 서명했다. 4년 뒤 도널드 트럼프 역시 보란 듯 취임 첫날 이를 폐지하는 행정명령 14151호에 서명했다. 정권교체에 따른 극단적 시계추 현상을 인권운동가 아이라 글래서(87)는 통렬하게 비판한다. “표현의 통제는 마치 독가스와 같다. 적에게 뿌리면 딱 좋을 것 같지만 바람이 바뀌면 자기에게 덮쳐온다.” 도대체 DEI가 뭐길래 이토록 파열음을 내나. 원래는 차별 해소와 통합을 지향하는 사회운동의 구호였다. 민주당 정부를 거치며 정부와 대학을 중심으로 제도화됐다. 그 과정에서 절차의 일방성과 내용의 편향성에 보수층이 반발했고, 트럼프 정부가 이번에 전면 백지화에 나섰다. 이제 DEI는 미국 내 헤게모니 싸움의 핵심 전선이 됐다. DEI는 진영 구분의 리트머스 시험지인 측면이 있다. DEI 진영은 자기들이 옳다고 여기는 이슈에 동의하면 같은 편, 아니면 적폐로 간주했다. 적폐엔 집단 공격을 예사롭게 가하곤 했다. 대학에서 자유롭게 의사 표현하다 불이익당한 사례가 한둘이 아니다. 2023년 오하이오 노던 대학의 스콧 거버 교수는 DEI의 맹점을 지적하다 강의실에서 보안요원에게 끌려나갔다. 2021년 시카고 대학의 도리안 애벗 교수는 대입에서 인종보다 능력이 중요하다고 했다 강연을 취소당했다. 매사추세츠 대학의 레슬리 닐-보일러 간호대학장은 2020년 “모든 이의 생명이 소중하다”고 썼다 해고됐다. 흑인 생명이 소중하다(BLM)고만 해야 했다는 것이다. DEI는 생각의 다양성을 인정하지 않는다. 정치권에선 숙청 도구로도 쓰인다. 최근 민주당 내부 분란이 잘 보여준다. 올 2월 전국위원회(DNC) 부의장으로 선출된 데이비드 호그(25)가 급진 개혁안으로 풍파를 일으키자, DNC는 백인 남성인 그의 당선을 DEI의 성별 할당 규정 위반으로 몰아 무효화할 태세다. 한쪽의 과잉반응은 반대쪽의 과잉교정으로 이어지는 법. 트럼프의 반DEI 드라이브가 그렇다. 그 최전선이 된 곳이 최고 명문 하버드다. 트럼프 정부는 지난 4월 하버드가 DEI 폐지 기준을 충족하지 못했다며 22억 달러의 연방 지원금을 동결했고, 하버드는 이에 반발해 소송을 냈다. 급기야 21일엔 하버드의 유학생 등록 자격을 박탈하기에 이르렀다. 하버드가 DEI 격전지가 될 조짐은 2년 전부터 있었다. 대법원은 2023년 인종별 쿼터를 둔 하버드의 소수계 우대 입학 사정이 헌법에 어긋난다고 판결했다. DEI 진영이 크게 반발했다. 그해 10월 이스라엘-하마스 전쟁을 계기로 벌어진 반이스라엘 시위도 영향을 줬다. 시위대는 이스라엘의 전쟁을 인종차별의 연장선이라고 비난했다. 과격한 인종차별 구호가 난무하는데도 당시 클로딘 게이 총장이 뜨뜻미지근한 반응을 보이자 보수층이 격앙했다. 역사적으로 하버드는 DEI 이론의 산실이었다. 사회학 교수 찰스 윌리(1927~2022)의 발언을 계기로 DEI의 핵심인 다양성이 힘을 받았다. 그는 1987년 크리스천 사이언스 모니터 기자에게 “모두에게 이로운 법을 바란다면, 입법 구조의 구성원을 다양화해야 한다”고 말했다. 백인이 권력을 독차지하지 말고 흑인에게도 개방하라는 뜻이다. 마틴 루터 킹 목사와 대학 동창인 그는 인종적 정의를 특히 강조했다. 다양성이 전통적인 자유 개념에 앞선다고도 봤다. 이를 계기로 ‘diversity(다양성)’는 정치적 함의와 운동 에너지를 지닌 용어로 변신하기 시작했다. 더 과격하게 나간 이가 법대 첫 흑인 종신직 교수 데릭 벨(1930~2011)이다. 1989년 마르크스주의를 인종에 접목시킨 비판적 인종이론(CRT)을 주도했다. 미국을 백인의 인종적 위계사회로 규정하고, 이 차별 구조를 해체해야 한다고 했다. DEI를 급진 인종운동으로 확장시키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하버드에서 배양된 이념이지만, 지금 제정신 갖고 들여다보면 구멍이 숭숭하다. 논리의 출발점이 인종이라는 점에서 외려 인종주의적이다. 인간을 백인·흑인·히스패닉·아시안으로 나눠 인종 구성비에 상응한 대우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흑인이 인구의 14.4%이니, 교수와 학생, 공무원, 기업 경영진 등의 구성도 대칭적으로 맞추자는 것이다. 나쁜 쪽의 비대칭은 차별이다. 흑인 죄수 비중이 인구보다 높은 36%이므로 인종차별적 사법체계를 뜯어고치라 한다. 흑인 선수 비중이 높은 프로 농구의 인종 구성에 대해선 말이 없다. 사람을 무 자르듯, 어느 한 인종으로 분류하는 것도 억지다. 1997년 타이거 우즈는 어느 인종이냐는 오프라 윈프리의 우문에 “캐블리내시언(Cablinasian)”이라고 현답했다. 코카시언·흑인·인도인·아시안의 피가 다 섞였다는 뜻이다. 퓨리서치센터에 따르면 2010년대 후반 이후 미국 신생아 7명 중 한 명이 서로 다른 인종의 부모 밑에서 태어난다. 그 후손은 어느 인종이고, 어느 비율로 대우받나. DEI와 CRT엔 답이 없다. 척 보면 금발의 백인인데도, 체로키의 피가 섞였다는 엘리자베스 워런 상원의원이 그런 애매한 사례다. 워런은 1998년 하버드에서 ‘원주민 출신의 유일한 종신직 소수인종 여교수’로 기록됐으나, 소수계 혜택을 노려 꾸며냈다는 의혹을 샀다. 유전자 검사를 하자 많게는 32분의 1, 적게는 1024분의 1의 원주민 피가 섞였다고 나왔다. 희미하지만 체로키 후손이라는 게 영 날조는 아니었다. 2018년 민주당 대선 경선에 나온 워런을 트럼프가 ‘마이 리틀 포카혼타스’라고 조롱한 것도 그 맥락이다. 하버드, 권력과 여론의 인큐베이터 역할 DEI는 시간이 지나며 마치 진영 정치의 에너지를 흡수하는 태양광 집열판 같은 존재가 됐다. 그 결과 DEI는 미국 좌파 이념의 독과점 사업자쯤으로 등극했다. 미국재건센터(CRA)는 최근 “바이든 정부 시절 24개 연방기관에서 460개 DEI 프로그램에 약 1조1200억 달러가 사용됐다”고 발표했다. 모두 미국인의 혈세다. DEI의 역설은 포용을 내세우면서도 배타적이라는 점이다. DEI 진영은 ‘억압적 관용(repressive tolerance)’을 내세운다. 1960~70년대 좌파의 정신적 지주 헤르베르트 마르쿠제의 말이다. “진정한 평등을 위해선 반동적 표현에 대한 억압이 필요하다. 모든 표현을 똑같이 관용하면 오히려 불평등을 고착시킨다.” 말 잘못했다 조리돌림 당하는 ‘취소(캔슬) 문화’가 대표적이다. 그 위선이 보수층의 혐오 대상이 됐다. 트럼프 정부도 이 지점을 공격 포인트로 삼고 있다. 그럼 왜 하버드 같은 대학 캠퍼스가 DEI 전쟁의 최전선이 됐을까. 이탈리아 공산주의 이론가 안토니오 그람시(1891~1937)의 말을 빌리자면 ‘진지전’에 딱 좋은 지형이다. 종신직 교수는 계속 남고, 학생은 매년 순환되며 유입된다. 교육·연구·저술·강연 등으로 이념을 퍼뜨리는 데도 효과적이다. 이념적 헤게모니를 잡기 위한 더없이 좋은 무대다. 그중에서도 하버드는 상징성이 크다. 학교를 넘어 권력과 여론의 인큐베이터 역할을 한다. 2023년 이곳에서 공부한 박영선 전 중소벤처부 장관은 “미국의 힘을 느꼈다”고 했다. 하버드는 이제 좌파에겐 놓칠 수 없는 거점으로, 우파에겐 꼭 점령해야 할 고지가 됐다. 남윤호 미주중앙일보 대표하버드 최전선 트럼프 정부 민주당 정부 도널드 트럼프
2025.05.28. 18:4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