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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호 현장에서] 재난의 최전선에 필요한 희망

Los Angeles

2025.09.01 19:00 2025.09.01 1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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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학 굿네이버스 USA 본부장

김재학 굿네이버스 USA 본부장

2025년 미국 전역에서는 기후 위기의 잔혹한 현실이 다시 한번 목격됐다. 지난 1월 캘리포니아의 하늘은 사상 최악의 산불 연기로 검게 물들었고, LA 인근에서 피어오른 큰 불은 수천의 보금자리를 잿더미로 만들고 수만 명의 삶을 송두리째 뒤흔들었다. 지난 7월 텍사스 힐 컨트리에서는 분노한 과달루페 강이 모든 것을 삼켰다. 불과 몇 시간 만에 135명의 소중한 생명이 사라졌고, 그중 27명은 여름 캠프의 단꿈에 젖어 있던 아이들이었다. 기상청의 절박한 경보는 ‘안전할 것’이라는 낡은 믿음과 행정 시스템의 안일함 속에 공허한 메아리가 됐다.
 
이 비극은 북미 대륙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지구 반대편, 아프리카 말라위는 엘니뇨가 할퀸 상처 위로 가뭄과 홍수가 번갈아 덮치며 420만 명을 식량 위기의 벼랑 끝으로 내몰았다. 5세 미만 아동의 중증 영양실조 비율이 6배나 폭증했다는 참혹한 통계는, 기후 위기가 단순한 날씨의 변덕이 아니라 가장 연약한 이들의 생존권을 박탈하는 실존적 위협임을 뜻한다.
 
과거 ‘한 세대에 한 번’ 겪을까 말까 했던 극한의 재난은 이제 매년, 매 계절 우리를 위협하는 ‘뉴노멀’이 되었다. 기후 위기는 재난의 속도와 파괴력을 동시에 증폭시키며, 언제나 가장 취약한 공동체와 사회적 약자의 숨통부터 조여온다.
 
역설적이게도, 국가 시스템이 마비된 재난의 최전선에서 가장 먼저 손을 내미는 것은 거대한 정부 조직이 아닌, 풀뿌리 민간 단체와 지역 공동체다. LA 산불 당시, 행정력이 미치지 못하는 공백을 뚫고 신속하게 구호 기금을 모아 절망에 빠진 이웃에게 전달한 LA한인회의 활동은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이들의 헌신은 단순한 온정이 아니다. 무너진 일상을 다시 세우고 인간의 존엄을 지키는, 대체 불가능한 사회 안전망의 마지막 보루다.
 
정부의 손길이 닿기 어려운 제3세계에서 그 역할은 더욱 절대적이다. 굿네이버스와 같은 국제 인도주의 단체들은 말라위의 가뭄 피해 지역 6000가구에 식량과 영양을 공급하며 꺼져가던 생명의 불씨를 살려냈다. 이들은 재난 초기 긴급구호를 넘어, 지역 공동체가 자립할 수 있도록 장기적인 생계 회복 프로그램을 설계하고 실행하는 ‘끊김 없는 지원 시스템’을 구축하고 있다. 국경을 넘어선 필사적인 연대야말로 기후 재앙 시대의 유일한 희망임을 현장에서 증명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언제까지 이들의 선의와 헌신에만 기댈 수는 없다. 한정된 자원과 시간 속에서 벌이는 사투는 기후 재앙의 거대한 파도 앞에서 위태롭기 짝이 없다. 이제 기후 위기 대응 패러다임의 근본적인 전환이 필요하다. 일회성 모금과 단발성 지원을 넘어, 재난의 예방과 대비, 신속한 구호와 장기적인 재건을 아우르는 ‘지속 가능한 인도주의 시스템’으로 나아가야 한다.
 
LA의 불길, 텍사스의 홍수, 말라위의 굶주림은 더 이상 ‘남의 일’이 아니다. 대륙과 국경, 부의 격차를 넘어 우리 모두의 문을 두드리는 예고된 비극이다. 재난은 언제나 가장 약한 곳을 먼저 무너뜨리며, 생존은 물론 인간다운 삶의 권리마저 잔인하게 빼앗는다.
 
정부의 더딘 대응과 행정의 한계가 명확해진 지금, 해답은 시민사회에 있다. 재난 발생 직후부터 평온한 일상이 회복될 때까지, 피해자들의 곁을 지키는 촘촘하고 끊김 없는 지원 네트워크를 민간의 주도로 설계해야 한다.
 
기후 위기는 우리 시대의 가장 중차대한 인도주의적 과제다. 우리는 선택의 기로에 서 있다. 다음 재난의 희생자를 지켜보며 방관자로 남을 것인가, 아니면 지금 당장 연대의 손을 내밀어 변화를 이끌 것인가. 역사는 결국, 행동하는 사람들의 기록으로 채워질 것이다.

김재학 / 굿네이버스 USA 본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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