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는 말이 있다. 거대한 고래조차도 따뜻한 말 한마디에 물 위로 솟구친다면, 사람은 어떨까. 나는 살아오며 그 말을 종종 실감하곤 했다. 몇 해 전, 나는 용기를 내어 찬양대에 들어갔다. 음악을 좋아하긴 했지만, 내 목소리는 튼튼하거나 강한 편이 아니었고, 특히나 소프라노 파트에 어울릴까 하는 의구심이 컸다. ‘내가 이 자리에 있어도 될까…’ 하는 마음이 들 무렵, 어느 주일 아침에 바로 앞자리에 계시던 한 권사님이 살며시 뒤돌아보시더니 내게 말했다. “자매님 목소리 너무 좋네요. 역시 젊은 분의 목소리라 우리 찬양에 힘을 더해줘요.” 순간, 마음 깊은 곳에서 울컥하고 무언가가 올라왔다. 단 한마디였지만, 그 말은 마치 “너, 이 찬양대에 꼭 필요한 사람이야”라는 확신처럼 들렸다. 그날 이후, 나는 더 이상 찬양대의 자리를 불편하게 느끼지 않았다. 오히려 누군가에게 작게나마 도움이 되고 있다는 그 감동을 품고, 더 열심히 노래하고 싶어졌다. 지금 나는 2년 넘게 찬양대를 섬기고 있다. 피곤할 때도 있고, 늦잠 자고 싶은 날도 있지만, 그 칭찬 한마디가 여전히 내 마음을 따뜻하게 붙잡아 준다. 그 시간은 내게 은혜의 시간이고, 감사의 시간이다. 나는 한국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교사이기도 하다. 아이들을 볼 때마다 절실히 느끼는 것이 있다. 아이들에게 칭찬은 곧 에너지라는 사실이다. 특히 한국어는 생각보다 미국에서 태어난 아이들에게 어려운 언어다. 집에서 부모와 한국어로 자주 대화하는 아이들도 막상 글로 표현하려 하면 자주 틀린다. 그중에서도 받아쓰기는 가장 까다로운 활동 중 하나다. 말로는 자연스럽게 구사하던 단어들도, 글로 옮기려 하면 헷갈리기 쉽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꽃이’와 ‘꼬치’를 구별하지 못하거나, ‘앉다’의 받침 ‘ㄴㅈ’을 빠뜨리는 경우도 흔하다. 그만큼 한국어는 소리와 글 사이의 차이가 큰 언어다. 그래서 받아쓰기를 시켜보면 100점을 맞는 아이는 드물다. 대부분 한두 개는 틀리게 마련이다. 그런데 그때 “이거 왜 틀렸어?”, “좀 더 잘해야지”라며 지적부터 하면, 아이들의 눈빛은 금세 작아지고 자신감을 잃는다. 반면, “잘했어!”, “정말 많이 발전했네!”, “이번엔 여기까지 맞았구나!” 그렇게 칭찬으로 말을 열면, 아이들은 스스로 자랑스럽게 느끼고 다음주 수업을 기대하게 된다. 받아쓰기 하나가 아이의 마음에 자라는 씨앗이 되고, 1년 동안의 수업을 기쁨으로 이끈다. 그런데 가끔은 한국인의 정서 속 깊이 자리한 ‘칭찬은 독이 된다’는 사고방식이 떠오르기도 한다. 어릴 적 우리는 종종 “너 잘하면 교만해진다”, “지금 칭찬하면 자만할 수 있어” 같은 말을 들으며 자랐다. 어떤 부모는 아이가 조금 잘해도 “그 정도에 안주하면 안 돼. 더 분발해”라며 채찍을 먼저 들고 당근은 아껴두었다. 칭찬을 받으면 나태해질까 봐, 칭찬을 하면 버릇 나빠질까봐, 우리는 너무 오랫동안 칭찬을 두려워해 왔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건 오해였다. 진심에서 나온 칭찬은 사람을 망치지 않는다. 오히려 사람을 일으키고, 변화시키고, 스스로 더 나아지게 한다. 나 역시 그랬으니까. “말 한마디에 천 냥 빚을 갚는다”는 속담처럼, 말의 힘은 생각보다 강하다. 특히 칭찬은 단순한 기분전환을 넘어, 사람의 삶에 깊은 울림을 남긴다. 물론 그 권사님의 칭찬은 어떤 이들에게는 그냥 지나치는 인사처럼 들릴 수 있다. 하지만 내겐 달랐다. 나는 그 말이 진심에서 비롯되었다고 믿었고, 그렇기에 그 한마디가 나를 춤추게 했다. 어쩌면 나는 그 말을 듣기 위해 용기를 냈던 것인지도 모른다. 사람은 칭찬을 먹고 자란다. 단순히 “잘했어”라는 말이 아니라, 나를 바라봐주고, 인정해주고, 기대해주는 그 따뜻한 시선이 사람을 자라게 한다. 그리고 그 칭찬은 말한 사람은 잊었을지 몰라도, 들은 사람의 마음엔 오래도록 남는다. 나는 이제 안다. 누군가에게 건넨 진심 어린 말 한마디가 얼마나 큰 울림이 될 수 있는지를. 그래서 나도 이제 누군가를 춤추게 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너 참 잘하고 있어요.” “당신 덕분에 힘이 나요.” 그런 한마디가 누군가의 걸음을 바꾸고, 삶을 밝히는 빛이 될 수 있을 테니까. 이선경 / 수필가이 아침에 칭찬 한마디 오랫동안 칭찬 자매님 목소리
2025.07.14. 20:07
칭찬하고 싶지 않았다. 훌륭한 아티스트라 소개 받았지만, 인터뷰에 아무런 준비 없이 찾아온 그가 무책임하게 느껴졌다. 날이 선 질문을 쏟아내자 아티스트의 표정이 점점 굳어진다. 인터뷰하던 방안에 묘한 긴장감이 흘렀다 “한인 신문사 뭐… 미국인들이 볼 거도 아닌데 굳이 인터뷰해야 하나 싶네요.” 자신의 분야에서 어느 정도 인지도가 있었던 그는 자존심이 상했는지 무시하는 듯한 발언을 하기 시작했다. 순간 기분이 상했다. ‘이럴 거면 애초에 인터뷰에 응하지 말던가.’ 나는 마음속으로 소심하게 분노했다. 그러다 문득 오늘 처음 보는 사람과의 이 갈등이 과연 합리적인 감정소비인가라는 물음표가 달렸다. 민감한 이슈도 아니고 단지 홍보성 기사에 결코 불필요한 갈등이라는 답이 섰다. 심호흡 한 번 하고 태세를 바꿨다. 그가 가져온 브로셔를 넘기며 은근슬쩍 툭 말을 던졌다. “근데 어떻게 이런 생각을 하셨어요?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없는 디자인이네요.” 예상 반응은 적중했다. “뭐… 그래요? 남들이 그렇다고 말하긴 하더라고요.” 성의 없던 목소리가 조금 부드러워지면서 머쓱한지 괜히 눈을 아래로 떨궜다. “다들 작가님 찾는 이유가 있네요. 예술을 잘 모르는 제가 봐도 대단해 보여요.” 나를 낮추고 들어가 상대를 인정하며 쐐기를 박았다. 그제야 마음이 풀린 듯, 그는 수줍은 미소를 띠고 “에이 뭐 별거 아녜요. 그나저나 제가 말주변이 없어서 인터뷰가 잘 되고 있는 건지 모르겠네요”라며 마음을 열었다. 고대 로마 시인 유베날리스는 “논쟁은 사람을 설득하는 가장 불리한 방법이다. 사람들의 의견은 못과 같아서 때릴수록 깊이 들어가 버린다”고 말했다. 지적하고 헐뜯을수록 감추고 마음의 문을 닫는 것이 본능이다. 반대로, 상대의 방어 태세를 푸는데 가장 좋은 방법이 ‘칭찬’이다. 칭찬의 힘은 생각보다 강력하다. 소설가 마크 트웨인은 ‘좋은 칭찬 한마디면 두 달을 견뎌 낼 수 있다’는 말을 남겼고, 일본에는 ‘칭찬 한마디는 3개월간의 겨울을 따뜻하게 만들어 준다’는 속담이 있다. 칭찬의 효과를 실험적으로 입증한 대표적 사례가 바로 ‘로젠탈 효과’다. 1968년 하버드 대학 심리학 교수 로버트 로젠탈 교수가 발표한 이론이다. 초등학교 교사들에게 특정 아이들의 명단을 주며 지능이 좋아 공부를 잘하는 아이라 믿게 했는데, 실제론 무작위로 선정된 평범한 아이들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난 후 공부를 잘할 것이라 인정한 아이들의 성적이 다른 아이들보다 상위권이었다. 교사들의 칭찬과 기대, 격려가 아이들에게 작용한 힘이었다. 한국인들은 특히 칭찬에 인색한 경향이 있다. 예로부터 문벌끼리 경쟁, 당쟁 등 저변에 깔린 경쟁의식과 흑백논리의 전통 탓인지는 몰라도 남을 깎아내리고 그 위에 올라서야 만족하는 심리 같다. 오죽하면 “남 못 되는 것이 나 잘되는 것보다 낫다”는 속담이 있을까. 그러다 보니 대선에서도 자신의 장점 내세우기보단 상대 결점을 부각시키는 전략을 더 흔히 사용한다. 하지만 대부분은 칭찬의 원리를 모른다. 칭찬하면 상대만 높아지는 것이 아니라 칭찬하는 사람도 결국 높아진다. ‘행복해지고 싶다면 먼저 칭찬하라’라는 말까지 있다. 누구나 사랑받고, 관심받으면 좋아하는 게 인간이기 때문이다. 사람은 자신의 내면의 가치를 상대방이 알아주길 원하는 본능을 가지고 태어났다. 그렇기 때문에 상대의 마음을 열 수 있는 가장 좋은 마스터키는 ‘칭찬’이다. 누군가를 내 편으로 만들고 싶은가. 행복하고 원만한 대인관계를 원하는가. 먼저 칭찬하자. 장수아 / 사회부기자의 눈 인터뷰 경험 칭찬 한마디 상대 결점 초등학교 교사들
2022.02.28. 17:5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