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고닫기

최신기사

[특별기고] ‘팍스 아메리카나’라는 왕의 죽음, 그 다음은?

왕이 죽었다, 국왕 만세(Le Roi est mort, vive le Roi)!   이 말은 1422년 프랑스에서 샤를 7세가 부친을 이어 즉위할 때 처음 쓰였다. 왕정의 연속성을 알리기 위한 것이었다. 옛 왕은 죽었으나, 새 왕이 같은 룰 아래 통치할 것이라는 의미였다.   제2차 대전과 한국전쟁 이후, 미국은 힘과 리더십을 바탕으로 세계 질서를 구축했다. 이는 여러 이름으로 불려왔다. 팍스 아메리카나, 자유주의 세계 질서, 글로벌 체제 등….   어떤 대통령이 선출되든 기본 체제는 유지됐다. 아이젠하워가 떠나고 케네디가, 카터가 떠나고 레이건이, 클린턴이 떠나고 부시가, 부시가 떠나고 오바마가 왔어도 그랬다. 각 대통령은 미국 주도의 세계질서를 염두에 두고 정권을 운영했다. 팍스 아메리카나가 세계 각국뿐 아니라 미국에도 이익이 된다고 확신했다. ‘미국 예외주의’, ‘계몽된 자기 이익’, ‘없어서는 안 될 미국’이라는 신념이었다.   사회, 경제, 그리고 국가가 안정적이고 신뢰할 수 있는 질서 속에서 번성한다는 건 자명한 원리다. 예측 불가능한 상황은 혼란을 낳는다. 미국은 여러 잘못도 저질렀지만, 세계의 균형을 잡는 동시에 안정을 지탱하는 역할을 하려고 애썼다. 자유무역이 그 중요한 수단이었다. 세계는 중간 정도의 균형 상태에 있었고, 한국은 70여 년간 예측 가능한 무역 규범과 미국의 안전보장 아래 번영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제 미국 국내 정치에서 압력이 쌓이고 있다. 과연 팍스 아메리카나가 수많은 보통 미국인들이 치른다고 느끼는 대가에 걸맞은 가치가 있는지, 의문이 제기되기 시작했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이 회의론을 발판 삼아 ‘아메리카 퍼스트’라는 구호로 당선됐다. 그는 이전 대통령들보다 훨씬 좁은 의미로 국익을 정의한다.   팍스 아메리카나라는 왕이 명을 다해 가고, 아메리카 퍼스트가 그의 숨통을 끊어놓을지 모른다는 사실에 한국인들이 아무리 불안해하고 불편해해도, 그게 현실이다. 아메리카 퍼스트의 구체적인 형태와 세계 질서에 대한 영향은 아직 좀더 두고 봐야 한다. 분명한 건 옛 왕이 사라질 것처럼 보인다는 점이다.   여기에서 가장 중요한 질문이 나온다. 한국, 동아시아, 그리고 세계는 언제 어떻게 다시 안정적이고 신뢰할 수 있는 질서를 이루어낼 것인가? 번영의 토대인 예측 가능성을 보장해줄 그 질서 말이다. 한국은 1940~50년대 팍스 아메리카나 초기와 달리 더 이상 큰형님 미국에 의존하는 약자가 아니다. 물론 힘의 격차는 여전히 크다. 하지만 한국은 이제 세계 10위권 경제 대국이며, 미국엔 큰손 투자자다. 한국의 음식, 음악, 문화는 전 세계에서 모르는 이가 없을 정도다. 제조업에선 일본에 도전장을 내밀었고, 몇몇 분야에선 추월하기도 했다. 미국, 영국, 유럽, 호주, 인도, 필리핀 등 수많은 나라의 고등학교에 ‘코리아 클럽’이 있을 정도로 세계의 젊은이들은 한국에 푹 빠져 있다.   한국은 다가올 새 질서를 만드는 데 주체적 역할을 할 수 있다. 이재명 대통령이 강조한 실용 노선은 옳아 보인다. 한국에선 5년 주기로 정권이 바뀔 때마다 정책방향이 180도 뒤집히곤 했는데, 이젠 진보와 보수가 사려 깊은 대화를 통해 새 질서 속에서 최선의 길을 찾아가는 게 바람직하다.   미국, 아시아, 유럽 곳곳에 사무소와 지부를 둔 유서 깊은 아시아 소사이어티가 한국 지부를 다시 연다. 이는 강경화 아시아 소사이어티 회장이 주미 대사로 가기 전 최우선 과제로 지정했던 일이었다. 그는 한국 지부 재건과 폭넓은 재정적.사회적 지원 확보를 위해 임시로 책임을 맡아 달라고 내게 요청했다. 훌륭한 이사회 덕분에 그 일이 추진되고 있다.   다시 문을 연 아시아 소사이어티 코리아의 핵심 과제 중 하나는 본부의 강력한 국제 네트워크의 시너지를 한국에 제공하는 것이다. ‘새로운 왕’을 모색하고 있는 국제질서 속에서 한국이 나아갈 최선의 길을 찾으려는 이론가와 활동가들에게 말이다. 물론 진보·중도·보수 진영을 모두 아우른다.   앞으로 전개될 아시아 소사이어티 코리아의 활동을 기대해도 좋다. 스펜서 김 / PCI 공동창립자특별기고 아메리카 팍스 팍스 아메리카나라 아메리카 퍼스트 한국 동아시아

2025.09.02. 20:17

썸네일

[중앙칼럼] '팍스 아메리카나' 시대의 종언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3월4일부터 멕시코와 캐나다에서 수입되는 모든 제품에 25% 관세를 부과하고, 이미 10% 관세를 부과받은 중국에는 10% 추가 관세를 부과했다. 불법이민과 합성마약인 펜타닐의 미국 유입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것에 대한 징벌적 성격이다.   이에 그치지 않고 트럼프 대통령은 미국으로 수입되는 철강과 알루미늄 제품에 3월 12일부터 25% 관세를 부과하겠다고 발표했다. 특히 동맹이건 적국이건 예외를 두지 않았다. 트럼프 대통령은 “우리는 친구와 적들로부터 두들겨 맞고 있었다. 외국 땅이 아닌 미국에서 철강과 알루미늄을 만들어야 한다”고 언급했다.   미국의 무역적자를 해소하겠다며 모든 무역 파트너를 대상으로 한 ‘상호 관세’ 부과 방침도 발표했다. 4월 1일까지 미국의 무역상대국의 관세와 비관세 장벽 모두를 조사하여 미국 경제에 손해를 끼치는 국가에 정도에 따라 추가 관세를 부과하겠다는 것이다. 4월 2일부터는 자동차에 대한 고율 관세를 예고하며 전방위적인 ‘관세전쟁’을 시작했다.   브라질, 인도, 유럽연합(EU), 캐나다, 프랑스 등 주요 교역국들이 불공정 무역 상대로 지목되었으며, 미국의 동맹국들마저 경제적 타격을 피할 수 없는 상황에 놓였다. 트럼프 대통령은 “미국이 더 이상 이용당하게 두지 않겠다”며 전 세계를 상대로 무역 질서를 재편하겠다는 강경한 입장이다.   미국 주도로 1995년 출범한 세계무역기구(WTO)의 관세와 비관세 장벽 철폐 원칙을 정면으로 위배하는 트럼프의 일방적 관세 정책은 미국이 구축했던 자유무역 시스템을 스스로 무너뜨리는 결과를 초래하고 있다.   트럼프의 ‘관세전쟁’ 배경에는 미국이 처한 심각한 경제적 위기가 자리하고 있다. 2023년엔 사상 최대인 9184억 달러의 무역적자를 기록했다. 그 해 재정적자는 GDP의 6.3%인 1조8330억 달러에 달했다. 미국 경제의 지속 가능성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는 동시에, 초강대국으로서의 입지를 흔드는 주요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트럼프 행정부는 재정 위기를 해결하기 위해 ‘미국 우선주의’ 경제 질서를 구축하려 하고 있다. 2024년 11월 발표된 대통령 경제자문회의 위원장 스티븐 미란의 보고서(글로벌 무역 시스템 재구조화를 위한 가이드)는 “미국이 다른 국가들에 경제적 군사적 지원을 제공하면서 강달러, 막대한 무역적자, 제조업 공동화를 초래했다”며 “관세와 환율 정책을 통해 제조업을 부활시키고 국제 무역 시스템을 재편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때 세계 GDP의 50%를 차지했던 미국의 경제력은 현재 25% 수준으로 감소했다. 2024년에는 미국의 국채 이자 총액이 국방 예산을 넘어서는 초유의 사태가 발생했다. 미 의회예산처에 따르면 미국의 국채 이자는 8700억 달러에 달하며, 국방 예산(8500억 달러)을 초과했다.   역사학자 니얼 퍼거슨은 “과도한 군사 개입과 재정적자가 미국 패권을 약화시킬 수 있다”고 경고했다. 이는 지금 미국이 처한 현실과 정확히 맞아떨어진다. 트럼프의 ‘미국 우선주의’와 ‘신고립주의’는 단순한 개인의 정치적 성향이 아니라, 초강대국 미국이 쇠퇴를 피하려 몸부림치는 과정으로 볼 수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러우 전쟁 종전 협상에서 “유럽 안보는 유럽이 책임져야 한다”는 입장을 명확하며 기존 동맹 관계의 변화를 시사했다. NATO 방위비 분담금을 GDP의 최소 5%까지 올릴 것을 요구하며, NATO 탈퇴 가능성까지 언급했다. 동맹국들이 안보 무임승차하며 미국에 손해를 끼치는 걸 더 이상 두고 보지 않겠다는 뜻이다.   이제 세계는 팍스 아메리카나(미국에 의한 평화) 시대의 종언을 목도하고 있다. 막강한 군사력으로 해상 무역로를 보호하며 자유무역 시스템을 정착시킨 미국의 시대는 끝나가고 있다. 각자도생을 해야 하는 새로운 국제질서가 형성되고 있으며, 이는 불확실성과 충돌 가능성을 더욱 증대시키고 있다. 이무영 / 뉴스룸 에디터중앙칼럼 아메리카 팍스 트럼프 대통령 비관세 장벽 대통령 경제자문회

2025.03.03. 19:03

썸네일

[아메리카 편지] 팍스 로마나

2001년 9·11 테러와 잇따른 중동 전쟁, 그리고 또 20년이 채 안 돼 벌어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목격한 우리는 세계 평화 유지가 안일한 희망이었다는 것을 절감한다. 그런데 평화라는 개념 자체가 시대와 문화에 따라 다르다는 것은 별로 생각하지 않는다. 대표적인 예가 바로 로마시대의 평화다. 그 유명한 라틴어, ‘팍스 로마나(Pax Romana)’는 한마디로 군사적인 기량과 전쟁을 통해 이루어진 평화라는 뜻이다.   팍스 로마나는 로마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기원전 63~서기 14)부터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서기 121~180)까지 약 200년간의 로마제국 번성기를 지칭한다. 로마시대 제국주의적인 팽창기였으며 북쪽으로는 영국, 남쪽으로는 모로코, 그리고 동쪽으로는 이라크 영토까지 다스리는 거대한 헤게모니였다.   아우구스투스가 고대 그리스의 마지막 왕족인 클레오파트라와 그와 동맹한 안토니우스를 격퇴한 후 로마제국 첫 황제가 되기까지, 로마 공화국 말년은 권력 투쟁과 내전으로 혼란스럽기 그지없었다. 끔찍하게 암살된 율리우스 카이사르와는 달리 그의 조카 아우구스투스는 조심스럽고 현명한 방책으로 정치적 권력 균형을 잡고 41년간 다스렸다. “나는 벽돌의 도시를 발견했는데, 대리석의 도시를 남긴다”는 그의 말대로 어마어마한 로마 제국의 미래를 구축했다.   아우구스투스가 세운 유명한 ‘평화의 제단(Ara Pacis Augustae)’을 보면 태평성대를 찬양하는 정치적 선전으로 가득하다. 그러나 이때의 평화는 주위 영토를 끊임없는 전쟁으로 강제 예속시켜 안정성을 유지한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흥미롭게도 아우구스투스의 평화 제단은 무솔리니가 1938년에 옮겨서 자신의 정치적인 선전에 도용했다. 21세기에 들어선 우리는 제국주의 이데올로기에 바탕을 둔 평화의 개념을 다시 생각해야 할 필요가 있다. 김승중 / 고고학자·토론토대 교수아메리카 편지 팍스 로마 팍스 로마 로마제국 번성기 로마 공화국

2023.07.07. 19:13

많이 본 뉴스

      실시간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