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월에 동남아 크루즈를 다녀왔다. 비행기로 뉴욕에서 타이페이로, 타이페이에서 인도네시아 발리까지 거의 하루 만에 도착했다. 계절이 겨울에서 여름으로 하루 사이 바뀐 셈이다. 88도의 바닷바람이 끈끈하게 몸에 엉긴다. 가로수의 야자수 나무가 ‘Welcome to Bali’ 두 손 벌려 환영한다. 세계적인 휴양도시인 발리의 제일 큰 자랑은 하늘에서 춤추는 구름과 시시각각 변하는 바닷물 색의 오묘하고도 신비로운 조화였다. 건축물과 관광산업을 위한 모든 시설은 인간이 만들었지만, 결코 인간이 흉내 낼 수 없는 자연경관은 어느 각도에서 보아도 그대로 멋진 한 장의 그림엽서가 된다. 인도네시아는 국토 한가운데로 적도가 통과하여 많은 지역이 열대 정글로 이루어져 있고 많은 섬에는 사화산, 활화산, 휴화산들이 있다. 일 년 내내 고온다습한 우기와 고온 건조한 건기가 교차한다. 이슬람교가 국교는 아니지만 2억이 넘는 88%가 이슬람교를 믿지만 발리는 87%가 힌두교 신자이다. 다만 발리 힌두교는 발리 토착 신앙과 인도 불교 및 힌두교의 융합으로 인도와 다르게 ‘성스러운 물의 종교’라 불리며 현세적인 정령신앙에 가깝다. 그들에게 종교는 일상생활에 젖어있어 각 개인의 집에, 공공장소에 또 마을에 성전을 모시는데 식사 전에 마른 바나나 잎으로 만든 접시에 꽃, 밥, 음식 등을 담아 조상신께 정성껏 공양하는 ‘카낭 사리’로 가는 곳마다 공양 접시가 눈에 띄었다. 덥고 습한 날씨여서 위생과 질병이 염려되었으나 그들은 진지하고 마냥 행복해 보였다. 발리는 네덜란드 식민지로 300여 년을 보내고 일본의 짧은 지배 기간을 거쳤으나 서구식 건물이나 철도 하나 만들어지지 않았고 그 섬에서 생산되는 천연자원을 유럽으로 실어 나르는 관광지로만 알려졌기에 더 이상의 발전을 보지 못했다. 아직도 사람의 손을 타지 않고 자연 그대로인 순수하고 아름다운 경관은 세계인의 눈을 사로잡는다. 타나롯 사원은 발리의 명소다. 주위에 바위가 많아 옥색 바다와 더불어 숨이 막히는 경관을 자아낸다. 논과 커피농장(Coffee Plantation)도 그들만의 자랑이며 아주 인상적이었다. 어떤 사원을 방문했는데 힌두교 사원, 교회, 성당, 절과 모스크가 함께 있어 신기했다. 가이드가 발리에서는 모든 종교를 서로 존중하고 하모니를 이루며 살기를 기원하는 의미에서 지어졌다고 설명하자 가슴이 뭉클했다. 발리에서 3일을 바쁘게 보낸 후 크루즈에 승선했다. 하룻밤을 항해 후 첫 도착지가 롬복(Lombok)이다. 발리와 다르게 여기는 거주민의 90%가 이슬람교 신자다. 남자들은 밭에 나가 벼농사를 짓고, 히잡을 쓴 여성들이 매일 아이들을 등하교시키고 일상생활을 한다. 아낙들은 바틱(Batik)이라는 수공예품을 직조해 일상에 필요한 생활용품을 만든다. 다음에 들린 곳은 스삭 엔디(Sesak Ende)라는 마을이다. 차에서 내리자, 소똥 냄새가 진동했다. 이번 여행에서 나에게 가장 깊은 인상을 남긴 할머니 한 분이 조그만 방갈로 같은 초가집 앞 마루에 앉아 계셨다. 소똥을 바른 마루 뒤에 4x4 피트 크기 방이 있었는데 선반 위에는 담요 한 장과 바구니 하나가 전부였다. 부엌은 마을 공동으로 마을 중심부에 있었는데 역시 솥 하나와 몇 개의 기구들이 전부였다. 가이드는 3월 한 달이 라마단(일출에서 일몰까지 금식하는 종교의식)이어서 부엌을 사용하지 않는다고 했다. 정갈하게 차려입은 이 할머니는 우리에게 당신의 집안을 보여주는 호의를 베풀었지만, 이분은 하루를 어떻게 소일하실까 궁금해졌다. 여기 주민들은 모두 무소유주의자이며 금욕주의자들인가. 마을 회당에 들어가니 사내아이 넷이 평상에서 카드 게임을 하고 한 9살 정도로 보이는 한 여자아이가 휴대폰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 장면 또한 나에게는 충격이었다. 이 애는 과연 무엇을 보고 있을까. 인터넷이 연결되어 있을까. 그들은 현실과 인터넷 세상을 어떻게 조율하며 살아가는 것일까. 정명숙 / 시인이아침에 할머니 휴대폰 인도네시아 발리 발리 힌두교 휴양도시인 발리
2025.05.27. 18:36
예비신부 할머니
2025.05.27. 16:52
할머니 뷰티
2025.05.01. 15:18
생존 할머니 손주들 극적 뉴욕 맨홀
2025.04.22. 16:05
사랑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라서, 나는 내가 그렇게 많은 것을 받은 줄도 몰랐다. ‘받은 사람이 받은 줄도 모르게 하는 것’. 그것조차 명인의 솜씨에서 가장 중요한 한 부분이었다. 할머니에게 배운 사랑을 한 줄로 요약한다면 그것은 ‘사람이 주는 평화’일 것이다. 그 사랑은 평화였다. 할머니가 나에게 무언가 잘해주었던 기억은 거의 없다. …그저 그분의 작은 평화 속에 나라는 존재를 온전히 끌어 안으셨다. 심윤경 『나의 아름다운 할머니』 글은 이렇게 이어진다. “아이에게 무언가 잘해주려 애쓰다가 오히려 평화를 깨뜨리고 불만과 다툼의 늪에 빠지고 만다는 것을 깨닫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할머니는 나에게 평화로 가득 찬 작은 방을 주셨는데, 그 방은 영원히 내 안에 남아서 내가 힘들 때 들어가 쉴 수 있는 피난처가 되어주었다.” 딸을 낳고서야 작가는 비로소 할머니의 사랑을 되돌아본다. 말수 적은 “언어의 미니멀리스트” 할머니는 잘했든 못했든 “장혀”라며 등을 두들겨줬다. “뭘 잘했다는 칭찬이 아니라, 괴로운 시간들을 견뎌낸 것이 장하다는 소중한 인정”이었다. 과정에 대한 칭찬이었다. “할머니가 베푼 관용은 나에게 심리적인 안전판이 되었다. 혹시 잘못을 저지르더라도 관용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는 믿음은 무언가 새로운 것을 시도해볼 수 있다는 자신감의 씨앗이 되었다. 그것은 본질적으로 매우 중요한 창의력의 씨앗이기도 했다. 남들과 다른 선택을 하고, 다른 질문을 던지고, 반대하는 목소리에 굴하지 않고 나의 주장을 내세울 수 있는 용기의 근원이었다.” 양성희 / 중앙일보 칼럼니스트문장으로 읽는 책 할머니
2025.03.05. 18:53
샌디에이고 한인사회의 입맛을 사로잡으며 39년 간 요식업계에서 활동했던 지선희(사진) 여사가 지난 2월5일 자택에서 향년 87세로 별세했다. 일명 '김치 할머니'로 불리던 고인은 빼어난 음식 솜씨로 한인들의 사랑을 받았다. 남편 지옥근(1993년 작고) 씨와 함께 1986년 도미해 당시 샌디에이고 지역에서 제일 큰 한식당이었던 '코리아하우스(지금의 프라임 그릴 자리)'에서 근무하다 1989년 2월 아리랑하우스(지금의 '송학' 식당 자리)를 오픈한 것을 시작으로 '고향식당(지금의 전주집)', '반찬 및 김치 케이터링 전문점' 등을 운영한데 이어 '할머니 순두부' 식당을 운영해 온 한식 요리 전문가였다. 고인은 건강이 악화돼 몸이 힘든 최근까지도 자신의 김치를 찾는 이들을 위해 김치를 담가왔다. 유가족으로는 장남 지현수 씨('할머니 순두부' 대표), 차남 지용철 씨('올레' 대표) 등 2남 1녀가 있다. 고인의 두 아들 뿐 아니라 할머니의 영향을 받은 손녀들도 '두 엔 마이' 베트남 식당 등 5곳의 식당과 카페를 운영하고 있다. 한인사회의 맛손인 김치 할머니의 명복을 빈다. 고인의 장례 일정은 미정이다. 케빈 정 기자삶과 추억 할머니 지선희 김치 할머니 음식 솜씨 할머니 순두부
2025.02.06. 20:52
한 달쯤 전에 손주 A가 말했다. “내 꿈에서 할머니가 ‘마녀’로 나왔어.” “뭐라고?” 마녀라는 말에 가슴이 움찔했다. “할머니가 내 친구에게만 잘해줬어.” 친구? 나는 A의 친구를 본 적도 없다. 현실에서 라이벌이 자기 누나일 텐데, 꿈에서 친구로 바뀌어서 나타난 것 같았다. 사실 A는 나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사건은 주로 학교에서 픽업한 오후 시간에 벌어진다. 나는 큰 애와 붙어 앉아서 숙제하고 책 읽고 산수도 한다. 작은 애는 처음 얼마 동안은 혼자 논다. 그러다가 누나의 숙제 시간이 길어지면 심술이 슬슬 나는 모양이다. 곁에 와서 쿠션을 던지고 소리를 지르고 온갖 난리를 친다. 나는 시끄럽다고 할아버지에게 가라고 소리친다. 꼼짝 못 하고 피하던 아이가 요즘은 ‘이이이이 우우우우’ 이상한 소리로 나를 반격한다. 입을 오므리면서 놀리는 소리에 나는 기분이 나빠진다. 유치원에서 친구들끼리 저렇게 하는 것 같았다. 할머니에게 그러면 안 된다고 또 야단을 친다. 지난주 토요일 저녁, 느닷없이 A가 우리 집에 쫓겨왔다. 아들은 책만 열댓 권 들어있는 A의 백팩을 건네주며 말했다. “엄마 아버지는 TV 하루 정도 안 봐도 되지요?” 유치원에서 친구와 싸운 벌로 주말에만 허용하는 특권을 금지했다고 한다. “노 오 티브이, 노 오 게임, 노 오 캔디”라고 한다. 저녁에 아들네는 마침 선약이 있어서, 큰아이는 외할머니네로, 작은 아이는 우리 집으로 보내졌다. 벌을 받는 중이므로, 외가에 같이 보낼 수 없다고 한다. A가 온 그 저녁에 남편은 자리를 피해주었다. 둘이 잘해 보란다. A는 여기에 누나가 없으니, 안심하고 자기 책을 들이민다. 애가 펼치는 슈퍼맨 책을 보았다. 무슨 이런 슈퍼맨 책이 있담? 애들 그림책이 간단하지 않았다. 수많은 슈퍼맨틀의 특징을 공학적으로 연구해 놓은 무슨 전문적인 도감 같았다. 자잘한 글씨로 기술한 캐릭터를 하나도 알 수가 없었다. “이거 할머니 못 읽어.” “왜?” “너무 복잡해.” “그냥 읽으면 되잖아.” 다행히 공룡 책은 읽어 줄 수 있었다. 그 책 역시 백과사전같이 두꺼웠지만, 그나마 아는 주제라서, 그럭저럭 같이 넘길 수 있었다. A의 백팩에는 한글 숙제도 들어 있었다. 연필을 엉성하게 잡고 ㄱ ㄴ ㄷ을 거꾸로 쓰는 아이를 보면서, A에게 책을 읽어준 적도, 숙제를 봐준 적도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A는 할아버지 옆에서 단잠을 자고 일요일 아침에 일어났다. 내 옆은 오지 않는 아이가 할아버지 옆에는 자석처럼 붙어 있다. 아침으로 요거트와 바나나를 넣은 오트밀 와플을 구워 주었다. 바싹하게 구운 와플이 과자 같은지 2개나 먹었다. 와플은 손녀가 좋아하지 않아서 만들지 않았던 메뉴였다. 그러고 보니 나는 손녀가 좋아하는 음식만 했던 것 같다. 큰아이가 잘 먹으니 작은 아이도 잘 먹을 줄 알았다. 작은 아이의 첫 마디는 무조건 “오 노”였다. “나 그거 싫어해.” “왜 싫어? 이거 먹어야 해.” 작은 애를 향한 내 목소리는 어느새 올라가 있곤 했다. 남편은 두어 번 나에게 말한 적이 있다. “A가 언제까지나 5살인 줄 알아? 자라서 중학생, 고등학생 될 텐데, 그때 어쩌려고 그래?” 키가 장대 같고 어깨가 우람한 A가 나를 본체만체하는 그림이 그려졌다. 어이쿠, 큰일 났다. 지금이라도 만회해야 할 것 같다. 나의 기준은 큰아이에 맞춰져 있었다. 작은 애를 누나 옆에 붙어서 반쯤은 가려있는 애로 여겼던 것 같다. 처음으로 A의 작은 얼굴과 작은 키가 내 눈에 오롯이 들어왔다. 김미연 / 수필가살며 생각하며 할머니 마녀 마녀 할머니 이거 할머니 숙제 시간
2024.03.07. 22:32
사랑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라서, 나는 내가 그렇게 많은 것을 받은 줄도 몰랐다. ‘받은 사람이 받은 줄도 모르게 하는 것’. 그것조차 명인의 솜씨에서 가장 중요한 한 부분이었다. 할머니에게 배운 사랑을 한 줄로 요약한다면 그것은 ‘사람이 주는 평화’일 것이다. 그 사랑은 평화였다. 할머니가 나에게 무언가 잘해주었던 기억은 거의 없다. …그저 그분의 작은 평화 속에 나라는 존재를 온전히 끌어 안으셨다. 심윤경 『나의 아름다운 할머니』 글은 이렇게 이어진다. “아이에게 무언가 잘해주려 애쓰다가 오히려 평화를 깨뜨리고 불만과 다툼의 늪에 빠지고 만다는 것을 깨닫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할머니는 나에게 평화로 가득 찬 작은 방을 주셨는데, 그 방은 영원히 내 안에 남아서 내가 힘들 때 들어가 쉴 수 있는 피난처가 되어주었다.” 딸을 낳고서야 작가는 비로소 할머니의 사랑을 되돌아본다. 말수 적은 “언어의 미니멀리스트” 할머니는 잘했든 못했든 “장혀”라며 등을 두들겨줬다. “뭘 잘했다는 칭찬이 아니라, 괴로운 시간들을 견뎌낸 것이 장하다는 소중한 인정”이었다. 과정에 대한 칭찬이었다. “할머니가 베푼 관용은 나에게 심리적인 안전판이 되었다. 혹시 잘못을 저지르더라도 관용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는 믿음은 무언가 새로운 것을 시도해볼 수 있다는 자신감의 씨앗이 되었다. 그것은 본질적으로 매우 중요한 창의력의 씨앗이기도 했다. 남들과 다른 선택을 하고, 다른 질문을 던지고, 반대하는 목소리에 굴하지 않고 나의 주장을 내세울 수 있는 용기의 근원이었다.” 양성희 / 중앙일보 칼럼니스트문장으로 읽는 책 할머니
2024.01.17. 19:18
한국의 동생이 카톡을 했다. 가수 임영웅이 필리핀에서 상을 받는데 엄마가 거기에 가고 싶어 해서 고민이란다. 동생은 아이들 방학을 맞아 취소할 수 없는 여행계획이 있다나. 개인 콘서트라면 나라도 한국에 나가 모시고 가겠지만 수상식이라니 노래 한두 곡 하는 것이 다일 텐데 굳이 갈 필요가 있을까, 핑계를 찾는다. 동생에게 부모님 시중을 떠맡겨 온지라, 마음이 개운치 않다. 콘서트에 몇 번 가본 후 엄마의 덕질은 시작됐다. TV에서 보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신세계란다. 표 구하기가 하늘의 별 따기이다. '피케팅(피가 튀는 전쟁터와 같이 치열한 티케팅)'이라는 신조어까지 생겼다. 일반 가정에서 사용하는 컴퓨터 속도로는 어림도 없고 광속을 자랑하는 피시방에서 ‘피케팅’을 해야 한다. 서울에서 표를 구하기는 불가능했다. 미국은 조금 수월해서 LA공연 표를 구해 다녀가셨다. 암표 살 돈이면 우리도 만날 겸 미국에 오는 게 훨씬 경제적이란 계산이다. 가수의 팬클럽 ‘영웅시대’에서 나온 하늘색 후드티를 입고 행여 깨질까 여러 겹 조심스레 싸 온 응원봉을 꺼낸다. 응원봉은 공연장 필수 아이템이라 비싸지만 계속 사용할 테니 샀단다. 평생 엄마의 이런 모습은 처음이라 우리는 깔깔 웃었다. 거울을 보며 희미한 눈썹을 새로 그리고 립스틱을 바른 후 공연장인 코닥극장으로 갔다. 엄마는 병상에 누워계신 아버지를 돌아가실 때까지 혼자 돌볼 만큼 건강하지만, 구순을 바라보는 노인이다. 등도 굽고 쪼그라든 엄마에게 세월이 보여 안쓰러웠는데, 덕질을 시작하며 눈이 초롱초롱 빛난다. 힘들어하던 스마트폰 사용도 가수의 팬이 되면서 금세 익혔다. 여러 유튜버에게 얻은 정보를 지치지 않고 부지런히 전한다. 노래 실력도 좋지만, 예의 바르고 성품이 훌륭하다고 칭찬이 끊이지 않는다. 일찍 혼자되어 고생하며 외아들을 키운 가수의 엄마와 가수가 대견하고 애틋하단다. 나이 들며 재미있는 일도, 감동할 일도 줄고 매사에 시큰둥해지는 것이 일반적인데, 엄마를 보면 나이는 진정 숫자에 불과하다. 아버지 떠난 빈자리를 손주 나이의 가수가 채워서 허전함을 위로받는다. 누구보다 사리 분별 명확하고 이성적이던 엄마의 뒤늦은 덕질이 당황스럽다. 나는 팬심을 가져본 적이 없다. 학창 시절에도 흔하던 브로마이드를 벽에 붙여본 적 없고 하다못해 연예인 얼굴을 코팅한 책받침도 없었다. 요즘 유행하는 BTS의 인기곡이 무엇인지 멤버가 몇 명인지 당최 관심도 없고 알지도 못한다. 메마른 내가 비정상인가. 내가 몰두할 열정과 호기심은 어디 있을까. 세월은 얼굴에 주름살을 남기지만 우리가 열정과 흥미를 잃을 때 영혼이 주름지게 된다는 법정 스님의 말씀이 생각난다. 어려운 일 있을 때마다 항상 뜨거운 응원과 격려로 든든한 울타리 역할을 해주던 씩씩한 엄마, 지금 그대로의 모습으로 부디 아프지 말고 계속 영웅이를 벗 삼아 오래도록 우리 곁에 계셔주세요. 최숙희 / 수필가이 아침에 할머니 덕질 가수 임영웅 평생 엄마 스마트폰 사용
2023.12.20. 19:46
부산 할머니의 손맛을 이어 LA 반찬가게를 운영하는 한인이 눈길을 끌고 있다. 21일 LA타임스는 음식 섹션에서 김지희씨의 반찬가게 ‘페릴라(Perilla)’를 소개했다. 신문은 반찬과 도시락을 판매하는 김씨의 작은 가게 안에서 눈이 즐거운 다양한 한식을 맛볼 수 있다고 전했다. 2020년 여름 테이크아웃 형태의 반찬가게 페릴라를 시작한 김씨. 지난 7월에는 260스퀘어피트 규모로 옮겼다. LA차이나타운과 에코파크 경계에 자리 잡은 김씨의 작은 반찬가게는 웹사이트(perillala.com)를 통해 입소문을 타고 있다. 김씨 가게는 오이 김치, 계란말이, 미역 줄거리, 배추김치, 고추 장아찌, 계란 장조림 등 한식에서 빼놓을 수 없는 기본 반찬을 판매한다. 최근에는 미국 내 인기 절정인 김밥도 한국식 양념장과 함께 선보였다. 김씨의 김밥에는 아보카도도 들어간다. 이밖에 다양한 반찬과 구운 생선이 들어간 일반도시락, 불고기 덮밥, 버섯 덮밥, 닭고기 도시락, 아보카도 도시락 메뉴도 인기다. 김씨는 부산에서 유년시절을 보냈다. 스무살 때 샌디에이고로 이주했고, 샌프란시스코 조리학교를 나온 뒤 고급식당에서 일했다. 북가주 베이지역에서 자리 잡았던 김씨는 돌연 남편과 남가주 행을 택했다고 한다. LA지역에 사는 가족과 좀 더 시간을 보내기 위한 노력이었다고 한다. LA로 이주한 김씨는 지난 2020년부터 어릴 적 맛보던 전통 한식을 만들어 판매하는 시도에 나섰다. 김씨가 한식에 매료되고 관심을 쏟게 된 것은 유년시절 경험에서 나왔다. 40여년 전 그의 할머니는 부산에서 식당을 차렸고, 부모님 또한 그 식당을 이어받아 운영했다. 김씨는 어린 시절 반찬을 만들기 위해 매일 아침 시장에 나가 장을 봐오던 아버지를 보고 자랐다. 그의 10대 시절은 된장, 고추장 등 다양한 반찬 식재료가 늘 함께한 셈이다. 김씨가 LA에서 반찬가게를 차린 것은 어쩌면 자연스럽다는 반응이다. 할머니의 손맛과 부모님의 반찬가게 운영 노하우 등 한식의 기본기가 몸에 배어 있어서다. 김씨는 ‘인위적인 퓨전’ 시도는 지양한다고 한다. LA 등 미국에서 한식을 선보일 때 현지 입맛에 맞게 식재료나 양념에 변화를 시도하곤 한다. 반면 김씨는 한식 고유의 맛을 살리기 위한 노력을 아끼지 않고 있다. 고춧가루, 된장, 젓갈, 마늘, 생강 등 한식의 맛을 결정짓는 재료를 고수한다. 꼭 필요한 경우에만 ‘캘리포니아’ 스타일에 맞게 살짝 맛의 변화를 꾀할 뿐이다. 김형재 기자 [email protected]반찬가게 할머니 반찬가게 운영 la 반찬가게 부산 할머니
2023.09.21. 21:42
백인명 여사(1898~1987)가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한 건 1921년 12월이었다. 본적도 없는 남편의 얼굴 사진 한 장을 손에 꼭 쥐고 있었다. 사진 결혼을 통해 낯선 이국땅을 밟았던 백 여사는 생전 ‘만세 할머니’로 불렸다. 백 여사는 옥고를 치른 직후 미국으로 왔다. 경기도 가평 공립보통학교와 황해도 연안공립학교에서 교사로 재직하던 그는 1919년 3월1일 진명여고 앞에서 독립을 외치다 체포됐다. 본지는 3.1여성동지회가 제공한 백인명 여사의 생전 육성 파일(1976년 2월28일 녹음)을 들어봤다. 2분 남짓한 녹음 파일에는 카랑카랑한 백 여사의 목소리가 생생하게 담겨있다. “나라가 말살될 것이라는 감정 속에 눈에 보이지도 않고, 손으로 만질 수도 없는 애국심…허리춤에 감춘 독립선언서를 이 상점, 저 상점에 다니며 전했다. 방방곡곡이 독립의 소리로 가득 찼다. 그때 나도 그중 한 사람이었다.” 백 여사는 북가주 맥스웰 지역에 정착했다. 그곳에서 벼농사를 지었다. 이후 윌리엄스 지역에서 세탁소를 운영하다 LA로 왔다. 그때가 1945년이었다. 백 여사는 광복을 LA에서 맞았다. 그때의 감회도 기록으로 남아있다. “너무 좋아서 택시를 불러 대한인동지회 사무실로 달려갔다. 밤새도록 목이 메어라 만세를 부르며 날을 보냈다.” 백 여사는 이민 초창기 세대다. 쉴 틈 없이 일했다. 슬하에 4남 3녀를 두고 어머니 그리고 아내로서 세월을 흘려 보냈다. LAPD의 한인경찰관 1호(1965년)인 레이 백씨가 백 여사의 아들이다. 백 여사는 푼푼이 모은 돈도 늘 고국을 위해 썼다. UCLA에는 한국 전통음악과가 있다. 당시 백 여사가 학교 측에 쾌척한 2000달러를 기반으로 1973년에 개설된 학과다. 당시 화폐 가치를 오늘날 기준으로 환산(연방노동부 데이터)해보면 약 1만5000달러에 달한다. 한국 독립기념관 건립 기금모금 때도 웰페어를 조금씩 모아 마련한 1000달러를 선뜻 내놓았다. 샌프란시스코 차이나타운에서 억울하게 살인 누명을 썼던 이철수씨 사건 당시에도 구명 운동에 후원금을 냈다. 한국 정부는 백 여사에게 대통령상(1970년), 외무부장관상(1970년), 문화공보부장관상(1973년) 등을 수여했다. 백 여사는 평소 이승만 박사를 존경했다. 대한인동지회 지방회장 등을 역임했다. 한인 사회내 각종 행사 때마다 ‘대한민국 만세’를 선창했다. 본지 신문에도 백 여사의 기록이 남아있다. 지난 1974년 11월3일, LA지역 맥아더 공원에서는 중앙일보 미주판 발행 및 동양TV개국 기념을 맞아 2만 명의 한인이 모인 가운데 ‘미국에서의 장수무대’가 열렸다. 이때 백 여사가 1등 장수상을 받았다. 76세였다. 그는 유머와 재치도 있었다. 사회자가 “미국서 시어머니 노릇 하기가 어떠냐”고 묻자 “아들은 많은데 모두 미국 며느리라서 시어머니 노릇 하기도 어렵다”고 답해 관중의 웃음을 자아냈다. 백 여사는 지난 1987년 9월 눈을 감았다. 향년 89세였다. 그는 죽을 때까지 고국 땅을 다시 밟지 못했다. 대신 미국땅 곳곳에 그가 심은 대한민국의 흔적은 생생하다. 장열 기자 [email protected]미국 할머니 만세 할머니 대한민국 만세 한국 독립기념관
2023.09.21. 18:07
역주행 사고로 할머니와 손자가 함께 목숨을 잃었다. 밴나이스 경찰 측에 따르면 비극적인 사고는 4일 밤 빅토리 불러바드 인근 6400블록 우들리 애비뉴에서 발생했다. 이 사고로 엘살바도르에서 방문한 할머니 아우라 토바(74)와 그의 손자 예슈아 토바(5)가 숨졌다. 수사 당국은 사고 직전 흰색 혼다 어코드가 자신이 운행하던 차선을 넘어 반대편 차선을 지나던 회색 혼다 시빅 차와 정면으로 충돌하면서 시빅에 타고 있던 할머니와 손자가 목숨을 잃었다고 전했다. 사고 당시 할머니와 손자는 다른 가족과 함께 저녁 식사를 하러 가던 중이었다. 사고 차량에는 할머니와 손자 외에도 이복 자매와 그의 남자친구도 동승하고 있었다. 역주행 사고를 낸 차량의 운전자는 사고 당시 약물이나 술에 취한 상태였던 것으로 알려졌다. 김병일 기자역주행 할머니 역주행 차량 역주행 사고 사고 차량
2023.07.06. 14:47
얼마 전 타운에서 85세로 하늘나라로 소천한 한 할머니의 장례식이 열렸다. 고인은 40년 전 남편을 교통사고로 먼저 보내고 평생을 홀몸으로 장사하며 5남매를 키워낸 K씨다. 3명의 아들 가운데 2명은 의사, 한명은 변호사로 활동 중이고 딸들도 각자 전문직에 종사하면서 안정된 가정을 꾸리고 있는 유복한 집안이다. 지금이야 남들로부터 자식 농사 잘 지었다는 부러움을 받을 정도지만 이렇게 되기까지 K 씨의 고생담은 절절하기 그지없다. 단 하루도 쉬지 않고 자식을 키우기 위해 열심히 일해온 고인은 평소에도 철저한 근검절약 정신으로 유명했다고 한다. 쌀 한톨, 양말 한 짝도 함부로 버리지 않았고 스스로는 헌 옷을 기워서 입을망정 자식들만큼은 새 옷을 사서 입혔다. 고인이 하늘나라로 떠난 후 자녀들은 어머니 유품에서 서류봉투 속에 고이 간직해 둔 생명보험 증서를 찾아냈다. 자녀들로부터 받았던 생활비를 아끼고 아껴 꼬박꼬박 부어온 20만 달러의 생명보험이었다. 100만 달러가 넘는 고급 주택에 사는 자녀들의 생활규모에 비하면 결코 많은 돈이 아니지만, 자녀들의 피부에 와 닿는 돈의 가치는 200만 달러 아니 2000만 달러에 비할 바가 아니다. 결국 자녀들은 보험금 전액을 형편이 어려운 한인 학생들을 돕기 위한 장학금으로 기부하기로 결정했다. 자신들을 훌륭하게 키워준 어머니의 사랑을 조금이나마 다른 이들에게 나누어주기로 한 것이다. K 할머니의 얘기는 절대 드물지 않은 우리 부모님들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조건 없는 사랑과 헌신으로 점철된 윗세대들의 헌신이 오늘날의 한인사회를 만들어낸 것이다. 얼마 전 칼럼에서 ‘끼인 세대’에 대해 쓴 적이 있다. 현재 40~50대의 한인들이 바로 이 세대에 속한다. 그 의미는 부모를 부양해야 한다는 의무감과 의식을 갖고 있으면서도 정작 자신들은 자식들로부터 부양받지 못하는 약간은 억울한 세대가 바로 끼인 세대다. 부모세대에서는 자식을 잘 키워내는 것이 곧 노후 대책의 하나로 여겨졌지만 끼인 세대들은 자식을 잘 키워도 노후대책은 자신 스스로의 몫으로 남겨진다는 것이다. 보험적인 측면에서도 이 세대는 끼인 세대가 분명하다. 지금 40~50대의 한인들은 부모들이 K 할머니처럼 생명보험을 가진 경우가 그리 흔치 않고 갖고 있다고 해도 10만 달러 안팎의 적은 액수에 불과하다. 하지만 끼인 세대들은 부모들이 생명보험 없이 돌아가신다고 해도 전혀 개의치 않는다. 우리 부모 세대에서 생명보험 가입이 결코 일반적인 선택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다행히 보험이 있어서 보험 혜택이 있다면 고맙지만 그렇지 않다고 해도 전혀 섭섭할 것이 없다는 얘기다. 그러나 우리의 자녀들은 어떤가. 지금 30대 미만의 젊은 층은 훗날 부모가 돌아가신 뒤 보험금을 받는 것이 유대인 사회처럼 자연스러운 일로 여겨지게 될 것이다. 물론 미래의 이야기겠지만, 생명보험 가입이 더욱 보편화하면 자녀들의 입장에서는 다른 부모들은 다 생명보험이 있는 데 왜 우리 부모만 보험을 하나도 가입하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을 할 법도 하다. 어쨌든 이 또한 끼인 세대들에게는 억울한 일임이 분명하다. 하지만 세대는 이어서 흐르기 마련이다. 생명보험은 다음 세대를 생각하는 사랑과 마음의 표현이다. 지금 본인에겐 혜택이 없어도 자녀들이 득을 볼 수 있다면 아낌없이 베푸는 부모의 마음이기도 하다. 또 단지 바로 다음 세대뿐 아니라 그다음 세대까지도 생각하는 장기적인 안목일 수도 있는 것이다. ▶문의:(213)503-6565 알렉스 한 / 재정보험 전문가보험 상식 할머니 쌈짓돈 생명보험 가입 생명보험 증서 보험금 전액
2023.06.28. 18:31
조봉남 OC한인회장은 한국의 어버이날이었던 지난 8일 어바인의 곽태순(88)씨의 집을 방문, 곽씨에게 꽃다발을 전달하고 카네이션도 달아드렸다. 조 회장은 “한인회 이사들의 추천을 받아 곽 할머니를 찾아가 만났다. 곽 할머니는 45년 전 미국에 왔고 홀로 살고 계신다”고 설명했다. 이어 “곽 할머니가 ‘어버이날 같은 다 잊어버리고 사는데 너무 고맙다’고 하셨다”고 전했다. 한인회 측은 앞으로 도움이 필요한 독거 노인을 지원하는 데 힘쓸 것이라고 밝혔다.어버이날 할머니 어버이날 독거 독거 노인 조봉남 oc한인회장
2023.05.11. 17:20
버나비RCMP는 20일 아침 메트로타운에서 89세 할머니를 폭행한 용의자를 찾고 있다. 경찰에 따르면 이날 오전 9시 30분 폭행사건이 일어났다는 신고를 받고 현장에 출동했다. 피해 할머니에 따르면, 쇼핑몰을 따라서 걸어가고 있느데 모르는 자가 밀쳐서 할머니를 땅에 넘어트렸다. 이 용의자는 이 할머니 이외에도 다른 2명의 사람들도 폭행한 것으로 조사됐다. 할머니가 폭행을 당하기 몇 초 전에 한 남성도 밀려서 넘어졌다. 또 다른 남성은 이 사건 이후 밀려서 넘어졌다. 그런데 이들 두 남성은 아직 경찰에게 피해 신고를 하지 않아 신원을 확인하지 못한 상태다. 이에 따라 경찰은 피해 남성들이 경찰에 나와 피해를 진술해 주기를 요청했다. 경찰은 현재 이 용의자의 묻지마 폭행 동기에 대해 조사를 하고 있다며, 시민들의 제보를 요청했다. 제보전화는 604-646-9999번이고 사건번호는 23-12960번이다. 경찰이 발표한 용의자 신상은 5피트 7인치에 중간 체격이다. 사건 당시 흰색 줄이 들어간 검은색 웃옷을 입고 녹색 위장색 야구 모자를 쓰고 있었다. 표영태 기자메트로타운 할머니 피해 할머니 할머니 이외 아침 메트로타운
2023.04.21. 15:42
같은 학년이었던 용이는 문간방에서 할머니와 엄마, 동생과 살았다. 할머니의 아들인 용이 아빠가 죽었는지 살았는지, 살아있으면 어디서 누구와 무엇을 하고 사는지 아무도 몰랐고 묻지도 않았다. 용이 아빠 얘기는 하나의 터부였다. 용이 엄마는 식당에서 일했고, 용이 할머니는 동네 궂은일을 도맡아 했다. 동네 세탁소는 큰 이불 빨래를 용이 할머니에게 맡기곤 했다. 할머니는 김 사장네 이불도 빨았고 미군 군복도 세탁했다. 두껍고 커다란 군복을 빨 때면 할머니는 방귀를 붕붕 뀌었다. 물을 잔뜩 먹어 뻣뻣해진 군복은 생각보다 무거웠다. 어느 날, 구청 직원이 집으로 찾아왔다. 구청에 가서 주민 등록증을 갱신해야 하는데 할머니가 하지 않으신 것이다. 할머니는 하루도 일을 쉰 적이 없었다. 할머니의 인적 사항을 묻고 지문을 채취하려고 인주를 할머니 오른손 엄지에 묻혔지만, 지문은 나오지 않았다. 다른 손가락도 마찬가지였다. 일을 많이 해서 지문이 지워졌기 때문이다. 딱한 표정의 직원은 할머니에게 당분간 손으로 하는 일을 자제하라며 사흘 후에 오겠다고 했다. 하지만 손을 쉬며 놀 수가 없었던 할머니는 궁리 끝에 면장갑과 고무장갑을 끼고 최 사장네 이불을 빨기 시작했다. 하필 이때 온 직원이 할머니의 지문을 채취하려 했으나 지문이 나올 리 만무했다. 화가 난 직원이, “할머니 지문 꼭 채취해야 해요”라고 큰 소리로 말했다. 할머니도 지지 않고, “그러면 나더러 일도 하지 말고 먹지도 말라는 소리여. 뭐여.” 하면서 대들었다. 이 소리에, 집 안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나왔다. 어이없어하는 직원이 할머니에게 지문을 채취하지 않으면 벌금도 내고 유치장에 가야 할지도 모른다고 엄포를 놓았다. 곧 서슬 시퍼렇던 할머니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용이가 이 말을 듣고 뒤로 돌아서며 소매로 눈물을 훔쳤다. 그 장면을 봤지만, 나는 모른척했다. 할머니는 구청 직원이 주고 간 인주로 매일 엄지손가락에 지문이 생겼나 확인했다. 하지만, 닷새가 지나고 열흘이 넘도록 지문은 나오지 않았다. 두 주가 지났다. 방에서 숙제하고 있는데 할머니가 방에서 소리치는 소리가 들렸다. “나왔다.” 드디어 새살이 돋은 것이었다. 그길로 구청으로 달려간 할머니는 저녁 식사 후에 돌아왔다. 얼굴에 희색이 만연한 채로. 진한 지문이 아니어서 인주가 잔뜩 묻으면 잘 보이지 않아 직원이 이리저리 시도한 끝에 겨우 열 손가락의 지문을 채취하는 데 성공했다고 나중에 들었다. 그다음 날, 학교 가는 길에 용이가 말했다. “난 우리 엄마 고생시키지 않고 잘할 거야.” 그가 잘했으리라 믿는다. 이리나 / 수필가이 아침에 할머니 할머니 지문 할머니 오른손 진한 지문
2023.04.09. 18:00
거투르드 호킨스 할머니가 지난 28일 106번째 생일을 맞았습니다. 걸을 때 워커를 이용하지만 여전히 흥이 넘치는 유머 감각을 보여주면서 오래 살고 싶어하는 사람들을 위한 조언도 해줍니다. "그 어떤 것도 당신을 짜증나도록 내버려 두지 말아요(Don't let nothing bother you)." 호킨스 할머니는 1917년 3월 28일, 미시시피와 아칸소 출신의 농부의 딸로 태어났습니다. LA 지역에 사는 그녀가 사랑하는 사람들은 호킨스 할머니를 '깔끔이 이모(Aunt Trim)'로 부릅니다. 호킨스 할머니는 "나는 그 어떤 것도 나를 짜증나게 하는 것을 내버려 두지 않아요. 걱정은 머리를 새게 만들 뿐이예요. 나는 그렇게 살고 싶지 않아요"라고 말했습니다. 지난 82년 동안 호킨스 할머니와 친분을 쌓고 있다는 루 데이비스는 호킨스 할머니의 카리스마와 친절함을 사랑한다고 전했습니다. "그는 베푸는 사람이예요. 친절하구요. 또 우리는 그의 카리스마를 좋아합니다. 그녀만의 성격을 사랑해요. 그가 자기자신을 표출하는 그녀 만의 방법말이예요." 호킨스 할머니는 가족들에게는 개척자로 기억됩니다. 미국 남부 지역에서 생활하던 가족을 서부쪽으로 데리고 왔기 때문입니다. 후손들이 모두 감사하는 부분입니다. 하지만 할머니 본인은 농부의 딸로 지냈던 어릴 적이 '인생의 절정'(best life)이었다고 말합니다. 호킨스 할머니는 장수하며 사는 비결의 핵심은 모든 사람을 올바르게 대하며 계속 살아가는 것이라고 강조했는데요. "나는 누구에게나 올바르게 대하려고 노력해요. 그러면 달리 걱정할 필요도 없고 내 인생과 관련해 후회할 것도 없어요. 아, 그리고 지금까지 살면서 모든 사람을 위한 유일한 답을 얻었어요. 그것은 죽지 말고 살라는 것입니다." 김병일 기자할머니 걱정 호킨스 할머니 할머니 걱정 할머니 본인
2023.03.30. 15:58
오래전, 스스로 너무 늙었다고 느꼈지만 사실은 아직 새파랗게 젊던 시절에 할머니는 늙는다는 게 몸과 마음이 같은 속도로 퇴화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 하지만 할머니는 이제 알았다. 퇴화하는 것은 육체뿐이라는 사실을. 그런 생각을 할 때면 어김없이 인간이 평생 지은 죄를 벌하기 위해 신이 인간을 늙게 만든 거 아닐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마음은 펄떡펄떡 뛰는 욕망으로 가득 차 있는데 육신이 따라주지 않는 것만큼 무서운 형벌이 또 있을까? 꼼짝도 못하는 육체에 수감되는 형벌이라니. 윤성희 외 『나의 할머니에게』 늙는 게 두려운 게 아니라, 마음이 따라 늙지 않는다는 게 두렵다. 차라리 마음도 몸처럼 늙어지면 편할지 모르겠다. 그런데 세상은 젊음의 욕망을 찬양하며, ‘노욕’은 추하다고 쉽게 말한다. 젊은 작가 6인이 할머니를 주제로 쓴 소설을 모았다. 누구도 주목하지 않은 ‘할머니’의 존재성을 전면에 내세웠다. 한 생애를 살아낸 그들에게 바치는 헌사이기도 하다. 인용문은 할머니의 로맨스를 그린 백수린의 ‘흑설탕 캔디’에서 따왔다. 강화길은 ‘선베드’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대하는 것을 멈추지 못하리라는 것. 할머니, 이런 게 살아 있다는 거야?”라고 묻는다. 손원평의 ‘아리아드네 정원’은 “늙은 여자가 될 생각은 없었다. 하루하루 살아 오늘날에 도착했을 뿐이다”로 시작한다. 손원평은 작가 노트에 “미래는 순식간에 다가와 현재를 점령한다. 늘 우리가 예상하지 못했던 모습으로”라고 썼다. 모두 늙는다. 그것도 몸만, 몸이 앞서 늙는다. 양성희 / 중앙일보 칼럼니스트문장으로 읽는 책 할머니 아리아드네 정원 흑설탕 캔디
2023.01.25. 20:12
영상 할머니 손녀 시민들 경찰
2022.12.23. 17:29
다우니 소재 아파트에서 20일 밤, 화재가 발생해 엄마와 딸이 숨지고 할머니는 중태에 빠졌다. 다우니 소방국에 따르면 이날 오후 10시45분경 트위디 레인과 딘스데일 스트리트가 만나는 교차로 인근의 2층 아파트 건물에서 화재가 발생했다는 신고가 접수됐다. 다우니 소방국은 LA 카운티 소방국에 장비 및 지원을 요청해 화재 진화에 나섰다. 이 과정에서 소방관들은 심하게 화상을 입고 건물 밖에 쓰러져 있는 한 여성을 발견했고 불에 타고 있는 집 안에 2명이 더 남아있다는 이야기를 전해들었다. 수색에 나선 소방관들은 2층 화장실서 심정지 상태로 쓰러져 있는 모녀를 발견했다. 이들 중 엄마는 현장에서 숨진 것으로 확인됐고 12세로 추정되는 딸은 심폐소생술을 받고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결국 그곳에서 숨을 거뒀다. 화재 현장에서 화상을 입고 밖에 나와 있던 여성은 12세 소녀의 할머니로 파악되고 있다. 소방당국은 현재 정확한 화재 원인을 조사하고 있다. 김병일 기자아파트 할머니 아파트 화재 아파트 건물 소재 아파트
2022.12.21. 15: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