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가 말살될 것이라는 감정 속에 눈에 보이지도 않고, 손으로 만질 수도 없는 애국심…허리춤에 감춘 독립선언서를 이 상점, 저 상점에 다니며 전했다. 방방곡곡이 독립의 소리로 가득 찼다. 그때 나도 그중 한 사람이었다.”
백 여사는 북가주 맥스웰 지역에 정착했다. 그곳에서 벼농사를 지었다. 이후 윌리엄스 지역에서 세탁소를 운영하다 LA로 왔다. 그때가 1945년이었다.
백 여사는 광복을 LA에서 맞았다. 그때의 감회도 기록으로 남아있다.
“너무 좋아서 택시를 불러 대한인동지회 사무실로 달려갔다. 밤새도록 목이 메어라 만세를 부르며 날을 보냈다.”
백 여사는 이민 초창기 세대다. 쉴 틈 없이 일했다. 슬하에 4남 3녀를 두고 어머니 그리고 아내로서 세월을 흘려 보냈다. LAPD의 한인경찰관 1호(1965년)인 레이 백씨가 백 여사의 아들이다.
백 여사는 푼푼이 모은 돈도 늘 고국을 위해 썼다.
UCLA에는 한국 전통음악과가 있다. 당시 백 여사가 학교 측에 쾌척한 2000달러를 기반으로 1973년에 개설된 학과다. 당시 화폐 가치를 오늘날 기준으로 환산(연방노동부 데이터)해보면 약 1만5000달러에 달한다.
한국 독립기념관 건립 기금모금 때도 웰페어를 조금씩 모아 마련한 1000달러를 선뜻 내놓았다. 샌프란시스코 차이나타운에서 억울하게 살인 누명을 썼던 이철수씨 사건 당시에도 구명 운동에 후원금을 냈다. 한국 정부는 백 여사에게 대통령상(1970년), 외무부장관상(1970년), 문화공보부장관상(1973년) 등을 수여했다.
백 여사는 평소 이승만 박사를 존경했다. 대한인동지회 지방회장 등을 역임했다. 한인 사회내 각종 행사 때마다 ‘대한민국 만세’를 선창했다.
본지 신문에도 백 여사의 기록이 남아있다. 지난 1974년 11월3일, LA지역 맥아더 공원에서는 중앙일보 미주판 발행 및 동양TV개국 기념을 맞아 2만 명의 한인이 모인 가운데 ‘미국에서의 장수무대’가 열렸다. 이때 백 여사가 1등 장수상을 받았다. 76세였다.
그는 유머와 재치도 있었다.
사회자가 “미국서 시어머니 노릇 하기가 어떠냐”고 묻자 “아들은 많은데 모두 미국 며느리라서 시어머니 노릇 하기도 어렵다”고 답해 관중의 웃음을 자아냈다.
백 여사는 지난 1987년 9월 눈을 감았다. 향년 89세였다. 그는 죽을 때까지 고국 땅을 다시 밟지 못했다. 대신 미국땅 곳곳에 그가 심은 대한민국의 흔적은 생생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