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적합한 이민교회의 예배문화는 과연 어떤 것일까? 해답은 쉽지 않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교회마다 구성원의 특징, 전통, 종파, 교파, 담임목사의 목회 철학에 따라 다를 수 있기 때문이다. 예배에는 두 가지 차원이 있다. 영적인 차원과 문화적인 차원이다. 영적인 차원은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을 만나고 대화하며 경배하고 찬양하는 차원이다. 영적인 차원은 다분히 문화적인 차원을 통해 표출된다. 따라서 예배형식은 문화적인 차원에 따라 다분히 영향을 받는다고 볼 수 있다. 특히 그 시대에 주어진 사회문화는 예배문화에 지대한 영향을 준다는 사실을 부인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이런 면에서 미국문화의 영향을 받는 이민교회는 한국문화 속에 있는 한국교회와 크게 다른 면이 있다. 예배문화는 단지 서로 다를 뿐이지 이 예배문화가 옳고 저 예배문화가 틀렸다고 말하는 것은 잘못된 판단이라는 생각이 든다. 지난 40년 동안 벧엘교회 예배문화가 어떻게 변천되어 왔는가를 숙고하면 벧엘교회 문화의 변천을 가늠하는데 큰 유익이 된다고 생각한다. 1980년 1월 6일 김상복 목사가 초대 담임목사로 취임할 당시 벧엘교회 예배문화는 한국전통장로교회를 많은 부분 답습한 것이다. 따라서 볼티모어연합교회(담임 필유일목사)에서 이 문화에 익숙했던 벧엘교인들은 그대로 몸에 베게 되었다. 김상복 목사 시무기간 동안 예배문화의 특징은 ‘조용한 예배’다. 따라서 예배시간에 손을 들고 음성을 높혀 기도하거나 손벽을 치며 찬송하는 예가 거의 없었다. 이 전통은 2대 김영진 목사를 거쳐 3대 이호영 목사 때까지 이어졌다. 볼티모어연합교회 문화와 김상복 목사 벧엘교회 문화에는 몇가지 다른 면이 있었다. 첫째 예배순서가운데 사도신경을 통한 신앙고백과 복음성가의 소개다. 벧엘교회 담임목사로 청빙되어 오기 전 인디아니주 한 미국교회에서 목회를 했던 김상복 목사는 당시 복음적인 미국교회들이 사용했던 복음성가들을 예배시간에 소개했다. 그 가운데 벧엘식구들이 가장 즐겨부르던 복음성가는 김목사 자신이 영어원문을 한국어로 번역하여 소개 한 “살아계신 주”였다. 특히 수요 예배 시간에 이 찬송을 많이 불렀다. 그래서 어떤 벧엘식구는 이 찬송을 ‘벧엘교회가’라고 까지 불렀다. 초기에는 1980년에 발행된 ‘새찬송가’를 사용하다가 후기에는 복음성가가 첨부된 1987년에 발행된 ‘한영 찬송가, 복음성가’를 사용했다. 자주 부르던 복음성가 제목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오 주없이 살수없네” “주님의 얼굴 보라” “예수 인도 하셨네” “물가로 나오라” “사랑의 종소리” “강물같은 주의 평화””내일 일은 난 몰라요.” 김상복목사가 1990년에 사임한 후 이 복음성가들이 벧엘교회에서 잘 불려지지 않고 있는 현실이 좀 섭섭하다. 김상복목사는 초기에 한글판 성경전서(개혁 한글판)를 벧엘교회 성경으로 소개했다. 그 후 1985년에 발행된 한영 성경전서(새 영어 흠정역판 개혁한글판 대조)를 1990년 퇴임 때까지 사용했다. 2대 김영진목사는 1993년 발행 성경전서(표준새번역)을 채택했다. 주일예배 대표기도와 헌금기도는 장로들이 돌아가며 맡았으며 수요예배 성경봉독은 권사와 여집사들이 맡았다. 그 때만해도 장로가 원고를 읽으면서 대표기도하는 장면을 볼 수가 없었다. 이 전통은 3대 이호영목사 때 까지 이어졌으나 지금은 사라져가고 있다. 김상복목사는 원고없는 기도를 선호했다.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대표기도는 미리 준비하고 연습을 해야합니다. 기도는 사람에게가 아니라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때문에 기도 말가운데 좀 실수가 있어도 하나님은 받아 주십니다.” 3대 이순근목사가 취임하면서 벧엘예배문화에 큰 변화가 일어났다. 이목사는 2000년판 한영해설성경(NIV)을 소개했다. 주일 예배를 4부로 나누고 예배순서에 경배와 찬양팀을 소개했다. 그동안 기타로 조용히 인도했던 복음성가가 전자 올갠, 북, 그리고 다른 악기들이 함께하는 경배와 찬양으로 변했다. 찬양 리더에 따라서 교인들은 일어나 손을 들고 또는 손벽을 치며 찬양을 했다. ‘조용한 예배문화’가 ‘뜨거운 예배문화’로 바뀐것이다. 이런 현상은 4대 진용태목사 시무기간까지 이어졌다. 진목사 시무기간중에 장로가 인도했던 헌금기도가 사라졌다. 어떤 때는 장로의 헌금기도가 너무 길어져 바꾸었다는 소문이다. 이 새로운 전통은 백신종목사 가 취임한 후 지금까지 이어지고있다. 백목사 취임 후 경배와 찬양은 11시 30분 드리는 4부 예배에서만 진행하고 있다. 따라서 교인들은 1부와 2부에서 ‘조용한 예배’를 선택하거나 4부에서 ‘뜨거운 예배’를 선택 할 수 있게 되었다. 백목사는 한영해설성경(ESV)을 소개했다. 허종욱 버지니아워싱턴대교수 사회학 박사
2019.11.03. 12:06
금년 95세인 지미 카터 미 전직대통령이 지난 2019년 10월 1일 조지아주 플레린스 고향집에서 왼쪽눈이 멍들고 눈썹위가 찢어져 14발 바늘로 꿰매는 낙상 부상을 입었다. 2015년 뇌암을 수술받 후 지금까지 암과 싸워오고 있으며 더구나 이날 이런 부상을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카터 전대통령은 이 교회의 집사로 지난 6일 고향 마라타나 교회 장년주일학교 성경공부반에 예전과 다름없이 참석, 40여명의 교인들에게 성경을 가르쳤다. 그는 10대부터 마라타나 교회를 85년 동안 출석해오고 있다. 그리고 그는 대통령직 퇴임 후 30여 년 동안 주일학교 교사로 봉사해 오고 있다. 2015년 뇌암이 발견돼었을 때 그는 “뇌암이 나의 주일학교 봉사를 멈추게하지 못할것이다”라는 가슴을 뭉클케하는 말을 남기고 주일학교 교사직을 계속해 오고 있다. 카터 전 대통령은 재직당시보다 은퇴 후의 그의 활동이 세상의 큰 주목을 받아오고 있다. 카터 전 대통령 내외는 은퇴 직후부터 지금까지 미국내는 물론 한국을 포함해서 세계 여러 지역에서 빈곤층 무주택자들에게 집을 지어주는 ‘사랑의 집 지어주기운동’(Habitat for Humanity International)에서 망치와 톱을 들고 직접 집짓기에 참여해 오고있다. 또 그는 세계분쟁조정을 위해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특히 1993년 북한을 방문, 김일성을 만나 김영삼 대통령과의 만남을 주선하기도 했다. 나는 카터전대통령으로부터 믿는 사람이 갖는 헌신과 겸손이 어떤 것인가를 그의 삶 속에서 배우고 있다. 나는 벧엘교회에서 지난 40년간 몸담아 오면서 하나님께서 여러모로 교인들을 섬길수 있는 기회를 주신 것을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다. 벧엘교회는 여러모로 나에게는 신앙의 출발지며 요람지다. 나는 벧엘교회를 통해 하나님께서 구원과 부활의 확신을 심어주신 감격을 지금도 잊지 못한다. 그리고 주님의 몸이신 벧엘교회를 통해 많은 봉사를 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신 것 또한 너무 감사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여러모로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지난 40년 동안 주님께서 들어 써 주신 것을 되돌아보면 감사가 넘친다. 집사와 장로의 직분을 맡기시고 여러 부서에서 섬기에 해주셨다. 그 가운데 특히 1982년부터 17년간 매주 주일 오전 10시에 실시된 장년주일학교 교사로 섬긴 사역을 잊지 못한다. 아마 벧엘교회에서의 내 신앙생활가운데 가장 영적인 은혜와 변화를 체험한 과정이라고 볼 수 있다. 벧엘교회는 김상복 담임목사의 건의에 의해 1982년부터 주일 장년 기초 성경공부반을 열었다. 이 기초반은 7단계기초반, QT반, 그리고 확신반으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훈련을 받은 장로가 담당하고 있었다. 7단계 기반은 신앙생활에 기초가 되는 성경지식을, QT반은 매일 말씀을 묵상하며 생활에 적용하는 영성훈련을, 확신반은 구원과 부활을 확신하는 신학지식을 중심으로하는 성경공부였다. 나는 ‘오늘의 양식’을 중심으로해서 이루어지는 말씀개인묵상을 인도하는 QT반을 맡았다. 벧엘교회에 등록한 교인은 누구나 이 기초성경반을 마친 후에 다른 성경공부반에도 들어갈 수 있으며 교회직분을 맡을 수 있는 이른바 ‘벧엘교인필수코스’였다. 이 성경공부반은 2009년 5대 진용태 목사가 담임목사로 취임하면서 목회자가 담당하게 되었으며 지금은 그 내용이 많이 바뀌어 목회자 담당으로 이어져 오고 있다. 주일 아침 10시 장년성경공부시간, 교회 본관 지하실 L12교실에서 내가 인도하는 QT반이 열린다. QT반 학생들은 여러 층이다. 30대부터 70대에 이르는 여러 연령층, 그 가운데 학생 선생 교수 사업 공무원 의사 변호사 회계사 가정주부 여러 직업층이다. 그 주일 날자에 해당되는 ‘오늘의 양식’으로 주어진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한다. 그 말씀을 관찰하고 그 속에서 교훈을 받으며 그 교훈을 실생활에서 적용하는 영적 생활의 연습이다. 반에서 학생들은 QT노트를 일일히 기록한다. QT반의 하이라이트는 영적 체험의 나눔이다. 영적인 도전을 주는 많은 체험 나눔이 날마다 이어졌다. 나는 은퇴한 내과의사 김상완 집사의 체험 나눔을 잊지 못한다. 그는 심장마비가 와서 헬리콥터에 실려 병원으로 이송되어지는 동안 ‘오늘의 양식’을 통해 묵상한 말씀을 통해 이루어진 영적 체험을 눈물로 간증했다. 한 권사가 자신이 운영하는 주얼리가게에서 가끔 상품을 훔쳐가는 한 어린 소녀 고객과의 이루어진 영적 관계를 소개했다. 한 번은 권사가 귀걸이 하나를 훔쳐 도망가는 소녀를 붙잡으려고 쫓아가다가 넘어져 팔을 다쳤다. 그 소녀가 다시 상점에 왔을 때 그가 좋아하는 상품을 선물로 미리 주고 ‘오늘의 양식’ 한 권을 주었다. 며칠 후 소녀는 엄마와 함께 가게에 왔다. 그리고 그동안 내 아이가 값을 치르지 않고 몰래 가져간 상품들의 값을 갚겠다고 했다. ‘오늘의 양식’이 엄마에게 준 영적 선물이다. 얼마나 아름다운 시간들인가! 허종욱 버지니아워싱턴대교수 사회학박사
2019.10.13. 14:27
라디오 방송을 통한 복음전도를 위해 RBC(Radio Bible Class) 선교회가 엠 알 디한(M. R. De Haan) 목사에 의해 1938년 설립되었다. 세계최초의 기독교방송이다. 원래 외과의사인 디한목사는 40대 후반에 하나님의 소명을 받고 신학을 마친 후 목사 안수를 받고 미시간주 그랜드 레피츠시내에 개혁장로교 갈보리교회를 개척, 목회 5년 되던해 교회사역을 그만두고 당시에는 상상하기조차 하기 힘들었던 라디오성경공부반을 설치, RBC선교회를 시작했다. 그 후 디한목사의 아들인 리차드 디한(Richard DeHaan)목사가 RBC선교사역을 이어받아 1950년에 개인묵상(Individual Devotion) 지침서 소 책자인 Our Daily Bread(오늘의 양식) 사역을 시작했다. 리차드 디한목사가 첫 편집장을 맡다가 1980년대 초 데니스 디한목사가 편집장을 맡았다. 이는 세계최초의 QT교재다. 나는 QT(경건의 시간)라는 용어가 누구에 의해 언제부터 쓰여지기 시작했는지 알 길이 없지만 RBC는 이 책자를 소개할 때 QT라는 용어 대신 Individual Devotion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월간으로 출판되는 이 책자의 특징은 내용이 간단하여 짧은 시간에 읽을 수 있고 크기가 주머니에 넣고 다닐 수 있도록 작아서 어디서나 어떤때나 쉽게 개인묵상 시간을 가질 수 있도록 되어 있는 것이다. 1960년 후반에 미국으로 유학 온 나는 미국 교회에 새벽기도예배가 없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나는 한국의 새벽기도예배가 미국에서 전수된것으로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피츠버그대학에서 유학생활을 할 때 참석했던 피츠버그감리교 데이빗 스톤브레이커(David Stonebreaker) 담임목사에게 이유를 물었다. 그는 미국 교인들은 새벽기도예배대신 새벽에 개인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는 시간을 갖는다고 말했다. 나는 그때 까지만 해도 개인적으로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는지를 알지못했다. 그 후 1979년 벧엘교회 초대담임으로 부임한 김상복 목사가 1980년 봄 Our Daily Bread를 교인들에게 소개, 한글판 ‘오늘의 양식’이 벧엘교회를 통해 출판 되면서 이 책자를 통해 전교인 QT훈련을 시작했다. 벧엘교회가 미국이민교회와 한국교회를 통틀어 최초의 QT훈련을 한 교회인 것으로를 알고있다. 이때부터 나는 매일 새벽 하루일과를 시작하기전 성경과 ‘오늘의 양식’을 펴놓고 개인묵상 또는 QT를 하는 습관이 생겼다. 내 개인 신앙성장에 너무나 큰 영향을 주고있다고 확신한다. 한국교인들은 QT대신 매일 새벽예배를 드리고, 반면 미국교인들은 새벽예배대신 매일 QT를 갖게된 전통에는 문화적인 특징이 작용했다고 생각한다. 1907년 1월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평양대각성운동을 주도했던 길선주목사가 새벽마다 기도회를 인도함으로써 한국교회의 새벽예배전통이 시작된 것으로 알려져있다. 이후로 한국교회는 새벽마다 예배당에 모여 죄를 회개하며 통성으로 기도하는 전통이 생겼다. 한국의 집단중심문화를 아주 잘 나타낸 것이라고 생각한다. 반면 서양교인들은 각자가 새벽에 개인적으로 말씀을 묵상하는 QT를 함으로서 서구사회의 개인중심문화를 잘 표출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벧엘교회는 2003년 8월 2일부터 2일간 하용조 목사를 강사로 특별집회를 가진 적이 있다. 이른바 QT스타일의 설교로 이름이 나있는 하목사는 이 집회에서도 QT의 중요성을 여러번 강조했다. 집회 마지막 날 Sandy Cove수양관에서 하목사와 목회자 장로간담회를 가졌다. 하목사는 한동대 이사장직을 맡고 있었으며 나는 이 대학의 도서관장으로 교무위원직을 맡도있던 차라 하목사와는 구면이었다. 우리 둘은 그 날 공동관심사인 QT에 대해 여러 이야기를 나누었다. 하목사는 새벽기도예배를 통한 통성기도와 QT를 통한 개인묵상시간을 갖고있는 한국교인은 하나님의 이중축복을 받고있다고 결론을 냈다. 나도 동감이다. 누가 뭐라고해도 한국교회의 QT선구자는 하용조목사다. 미국 Liberty University 신학대학원에서 목회학박사를 받은 홍귀선목사의 2017년 학위논문 ‘도시선교를 위한 큐티(QT)’ 메뉴얼에 관한 연구에 의하면 하용조목사는 영국에서 신학공부를 하고있던 1980년대 초 하목사 내외 숙소에서 하룻밤을 지냈던 뉴질랜드 바이블 대학 학장 제임스 스튜어드박사가 새벽에 일어나 노트에 무엇인가 적어가면서 말씀을 묵상하는 모습을 보고 QT의 아이디어를 갖게 되었다고 한다. 이 기회를 계기로 온누리교회는 하목사에 의해 1983년 한국최초의 QT안내서 ‘생명의 삶’을 출판하고 ‘QT백만운동’을 QT학교를 통해 전개했다. 따라서 ‘생명의 삶’은 한국 최초, ‘오늘의 양식’은 미국 한국 최초의 QT를 교계에 소개한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벧엘교회는 얼마나 축복을 받은 교회인가! 허종욱 버지니아워싱턴대교수 사회학박사
2019.10.09. 15:24
벧엘출판사는 ‘오늘의 양식’ 발간 2주년을 기념해서 1982년 8월 두째 주에 영어원본 Our Daily Bread 편집장을 맡고 있는 데니스 디한(Dennis De Haan)목사 부부를 초청, 기념예배를 가졌다. 이 기념예배를 기점으로 해서 벧엘출판사는 매년 8월 둘째 주일에 기념예배를 드리는 전통을 갖게되었다. 데니스목사는 교회목회 일선에서 은퇴하고 이 선교회의 편집장직을 10년째 맡아오고 있었다. 기념예배 후 ‘오늘의 양식’ 에서 봉사하는 편집위원 그리고 운영위원들 등 관계자 40여명이 자리를 같이하여 ‘오늘의 양식’ 발전을 위한 토론회, 그리고 데니스 목사로부터 Radio Bible Ministries 선교사역의 역사 철학 목표 운영방향에 자세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벧엘출판사는 2박3일의 일정을 마치고 돌아가는 데니스 목사 부부에게 항공료를 포함한 강사료 등 비용을 수표로 발행했다. 데니스목사는 항공료 영수증을 출판사에 제출한 후 강사료를 반환했다. 소속기관에서 봉급을 받고있기 때문에 실제로 들어간 비용인 항공료 외에는 받지 않는다고 그 이유를 설명했다. 1985년 8월 창간 5주년 기념식에 마트 디한(Mart De Haan) 선교기관 대표 부부와 릭 디한(Rick De Haan) 운영총책 부부가 초청이 되었다. 이들은 항공편 대신 벤차를 타고 그랜드 레핏츠로부터 이틀동안 운전하고 벧엘교회에 도착했다. 도중에 호텔에서 하루 밤을 묶은 것이다. 마트대표는 이 선교기관의 설립자인 엠 알 디한(M. R. De Haan)목사의 손자이며 릭 디한은 마트 디한의 동생이다. 이들이 벧엘교회에서 모든 행사를 마치고 돌아갈 때 데니스목사의 경우처럼 호텔 숙박비용, 차량 연료비용, 강사료 등을 수표로 지불했다. 강사료는 실제로 들어간 비용이 아니라는 이유로 강사료를 반환했다. 1990년 봄 RBC선교기관은 벧엘출판사 발행인 김상복목사와 편집인인 나를 초청했다. 우리는 넬슨 베넷국제선교국장댁에 머물면서 융숭한 대접을 받았다. 김목사는 이 기관에서 사역하고 있는 300여명의 선교사들에게 아침 특강을 했다. RBC는 우리의 왕복 항공료를 지불했다. 그러나 김목사의 강사료는 아무런 설명도 없이 지불하지 않았다. 얼마 후 넬슨국장에게 강사료에 관련된 질문을 했다. 그의 대답은 이러했다. “국가 부서나 기관들이 국민의 세금으로 재정 운영을 하는 것 처럼 교회 선교기관 등은 교인 또는 독자들의 헌금으로 재정 운영을 합니다. 이 헌금은 바로 하나님이 맡기신 것입니다. 따라서 재정 지출에 하나니의 뜻을 살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미국 교회의 경우는 잘 알지 못하지만 대부분의 한인교회들은 초청강사에게 일정의 강사료를 지불하는 것이 상례로 되어있다고 생각했던 나는 이 분들의 설명을 처음에는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그 설명에 어느정도 설득력이 있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많은 한인교회들은 매년 봄 가을에 부흥 또는 사경집회를 갖는다. 이름이 알려져있는 또는 대형교회의 목회자들을 강사로 초청하는 경우가 많다. 교회창립예배, 예배당봉헌예배 등 특별한 경우에도 강사를 초청한다. 대부분의 강사들은 그분들이 몸담고있는 교회 학교 또는 선교기관에서 일정한 봉급을 받는다. 강사료를 포함해서 이런 행사의 비용은 연례예산에 책정되거나 예비비에서 지출되는 것으로 알고있다. 이 예산은 교인들의 헌금으로 이루어진다. 그리고 이 헌금은 하나님에게 드려진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뜻에 따라 쓰여져야 한다는 생각은 아주 성경적이다. 허종욱 버지니아워싱턴대교수 사회학박사
2019.10.09. 15:23
나는 1992년 9월 첫주 일본 동경 기독교방송국서 만난 스티브와 나누었던 대화가 요즘 새삼스럽게 생각이 난다. 스티브는 미국남침례교 교단에서 선교사로 파송받아 이 방송국에서 15년째 사역하고 있었다. 미국남침례교단은 이 방송국의 운영과 재정을 40여년간 도와주고 있었다. 영어본 ‘오늘의 양식’을 발행하고 있는 Our Daily Bread Ministries 선교회 Dick Mason CEO, Nelson Bennett 국제선교국장, 그리고 내가 이 방송국의 초청을 받아, 이 방송국 대표들과 일본어판 Our Daily Bread를 이 방송국에서 발행하는 안건을 논의했을 때 스티브도 자리를 같이했다. 나는 스티브의 이름만 기억하고 그의 성을 잊어버렸다. 회의가 끝난 후 우리 일행은 스티브의 안내를 받아 동경 교외에 위치한 일본침례교신학교 기숙사에서 머물기 위해 지하철을 탔다. 나는 지하철안에서 스티브에게 일본에 대한 그의 인상을 물었다. 그는 “Japan is Japan”이라고 간단하게 대답했다. 그래서 그 말이 무슨 뜻이냐고 되 묻자, “내가 일본에서 직접 경험한 이야기를 말씀드리죠”라고 말했다. 스티브가 일본에 대해 잘 알지못했던 이 방송국에 부임한지 2년 되던 해 일어난 ‘사건’이다. 스티브는 퇴근길에 지하철에서 기다리고 있는 동안 책을 읽고 있었다. 지하철이 왔을 때 앞에 놓았던 가방을 깜빡 잊고 집에 왔다. 경찰에 신고를 했다. 경찰은 가방을 놓았던 자리에 가보면 그대로 있을 터이니 걱정 할 필요가 없다고 했다. 스티브는 경찰의 말대로 가방 자리에 가 보았더니 가방이 주인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 때 깨달은 것이 말만 듣던 일본은 과연 진짜 일본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Japan is Japan”이라는 것. 스티브는 자신의 선임 선교사가 일본에서 경험한 이야기를 덧 붙혔다. 선임자는 공원 공중화장실에서 손을 싣고 손목시계를 선반위에 두고 집에 간 후 시계를 둔곳을 잊어버리고 3주를 지나다 바로 그 화장실에 들렸을 때 자신의 손목시계가 바로 그 선반위에 있을 뿐 아니라 들린 사람들이 시계에 밥을 주어 계속 가고 있었다는 것. 스티브는 이렇게 말을 이어갔다. 일본에는 기독교인이 전체 인구에 1% 정도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미신에 가까운 범신교인 신도를 믿고 있습니다. 일본에도 강도, 절도, 무고, 사기, 허위 위증 등 범죄가 많습니다. 그런데 기독교인이 10%가 넘는 나라들에 비하면 그 범죄율이 놀랄 정도로 낮습니다. 참 이상한 일입니다. 왜 기독교인 비율이 높은 나라가 1%밖에 안되는 일본보다 범죄율이 훨씬 높을 까요? 스티브는 15년간 일본 쳬험 결과를 통해 그 이유를 민족성을 바탕으로 해서 이렇게 분석했다. 첫째, 일본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정직하다. 둘째, 신의를 지킨다. 셋째, 의리가 있다. 넷째 남의 의견을 존중한다. 스티브는 일본의 국격과 국력이 바로 여기에 근거하고 있다고 말했다. 2005년 5월 중순 우리 부부가 일본을 10일간 여행하는 동안 오사카의 샤핑시장을 구경한 적이 있다. 비가 억수로 쏟아지는 밤이었다. 운전기사가 출구에서 40여명의 관광객들의 손을 일일히 붙들어주면서 우산 하나씩을 건네주었다. 미국 한국 등 여러 나라를 여행해봤지만 운전기사가 승객에게 우산 서비스를 하는 경우는 처음 겪는 일이다. 한시간 가량 시장 구경을 마치고 돌아올 때는 비가 말끔히 멎었다. 나를 포함해서 몇몇 관광객이 우산을 챙기지 못한 채 돌아왔다. 돌아 올 때 비가 멎었기 때문에 그만 잊어버린 것이다. 운전기사는 이런 경우를 생각해서 여유 분을 준비했으니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말로 미안해하는 승객을 위로했다. 나는 운전기사의 말을 들으면서 시티브가 말했던 “Japan is Japan”이라는 말을 다시 생각했다. “반일 종족주의”(미래사, 2019)의 주 저자 이영훈 서을대 은퇴교수는 이 책 ‘프롤로그’ 첫 부분 ‘거짓말하는 국민’에서 한국문화의 특징을 일본의 경우와 비교해서 이렇게 서술하고 있다. “한국의 거짓말 문화는 국제적으로 널리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2014년에만 위증죄로 기소된 사람이 1400명입니다. 일본에 비해 172배라고 합니다. 인구수를 감안하면 1인당 위증죄는 일본의 430배나 됩니다. 허위사실에 기초한 고소, 곧 무고 건수는 500배라고 합니다. 1인당을 치면 일본의 1,250배입니다…” 왜 일본에 비해서 한국의 범죄율이 이렇게 높을까? 한국은 기독교인이 인구 전체의 20%가 넘는 나라로 알려져 있다. 이영훈 교수가 프롤로그에서 지적한 것 처럼 ‘한국의 거짓말 문화는 국제적으로 널리 알려진 사실입니다’가 사실이라면 이에 대해 우리 믿는 사람들은 무슨 책임을 져야하나? 한번 생각해 볼 일이다. 허종욱 버지니아워싱턴대교수 사회학박사
2019.09.22. 12:58
1993년 10월 첫주 나는 이 책자의 영어원본 발행기관인 RBC(Radio Bible Class)선교회의 최고경영책임자 딕 메이슨(Dick Mason) CEO와 국제선교책임자 넬슨 베넷(Nelson Bennett)국장과 함께 ‘오늘의 양식’ 한국지부인 할례루야교회를 3일간 방문한 적이 있었다. 한국 지부가 벧엘출판사로부터 ‘오늘의 양식’ 원고를 받아 인쇄, 한국 내에 배본 한지 2년만이었다. 우리 셋은 비행기 안에서 많은 이야기들을 나눌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이때 이들과 나누었던 이야기들 가운데 한국 교회와 선교기관들이 좀 배울점들이 있다고 생각되어 이 자리에서 소개한다. 메이슨최고경영자는 신학교육을 받은 분으로 원래 IBM회사 사장으로 특급의 봉급을 받고 경영을 맡고있다가 RBC선교회의 구조혁신을 부탁받고 RBC 자리를 옮긴지 3년째 되었으며, 베넷국장은 원래 주식투자가로 성공하여 일찍 은퇴하고 신학교를 마친 후 RBC국제선교책임자로 2년 째 일하고 있었다. 두 분은 모두 RBC에서 무급봉사를 하고 있었다. RBC는 아주 중요한 직책의 두 책임자를 내부에서 기용하지 않고 외부로부터 초청, 경영의 혁신을 도모하려고 했다. RBC는 TV와 라디오선교사역을 집중적으로 해오다가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 Our Daily Bread를 중심으로 한 문서선교사역이 확장됨에 따라 선교회 이름도 Radio Bible Class에서 Our Daily Bread Ministries로 바꾸고 선교범위를 더 국제적으로 확장했다. 현재 아프리카, 아메리카, 아시아 및 태평양, 호주, 유럽 등 38개국에 이르는 지부에서 600여 명의 선교사들이 사역하고 있으며, 58개국어로 번역되어 150나라에서 이 책자가 읽혀지고 있다. 매달 영어본 100만권을 비롯해서 600백만권이 출판되어지고 있다. 이를테면 모든 종류의 간행물 가운데 세계 최고부수의 월간지로 매일 600만에 이르는 사람들이 매일 이 책자를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접하며 묵상하고 생활에 실천하는 QT를 하고 있는 것이다. 이 두분이 RBC에 부임 할 때인 1990년 초 RBC에는 300여 명의 동역자들이 미시간주 그랜드 렛핏에 위치한 본부 건물에서, 플로리다 카나다 홍콩 등 8개의 지부에서 100여명이 사역하고 있었다. 당시 RBC선교회 회장은 창설자 엠 알 디한(M. R. De Haan) 목사의 아들인 리차드 디한(Richard De Haan)목사가 맡고 있었으며, 그는 이 선교기관을 더 효율적이고 효과적으로 운영하기 위해서는 신앙적이고 경영에 전문성이 있는 사람을 통해 경영혁신을 해야겠다고 결심, 이 두분을 외부에서 초청한 것이다. 첫번째 메이슨최고경영자가 한 혁신은 폐쇄형에서 공개형으로 지향하는 공간혁신이었다. 본부 건물 2층에 집중되어있는 모든 사무실 사이의 벽을 헐고 칸막이를 설치하여 책임자와 부서원들이 얼굴을 맡대고 근무하도록 했다. 다른 부서들과의 효율적인 커뮤니케이션을 도모했다. 같은 층에 위치한 리차드 디한 회장 사무실 문을 늘 열어놔 누구나 쉽게 접근 할 수 있게 했다. 부서내 또는 부서간의 회의를 위해 회의실을 따로두어 시간별로 사용하도록 했다. 나는 아직도 공개형으로 되어있는 한국 교회 사무실 구조를 보지 못했다. 즉 담임목사와 모든 사역자들이 공개 공간에서 같이 사역사는 모습 말이다. 담임목사 사무실은 부목사나 교회 직원 사무실과는 동떨어진 독립된 장소에 위치해 있으면서 담임목사의 접근은 사전 예약하거나 비서실을 통해 할수있게 되어있다. 부목사나 전도사들은 대개 한 넓은 공간에서 함께 근무하거나 한 사무실에 여러 명이 나누어 사용하고 있다. 두번째 혁신은 결정권 집중에서 결정권 분산이다. 각 부서에서 결정한 내용들을 이 선교기관의 철학, 원칙, 그리고 규약에 어긋나지 않는 한 곧 실천에 들어 갈수있는 결정권의 분산이다. 그래서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지금까지 일일히 회장에게 보고, 결제에 의해 실행됐던 사항들을 제한한 것이다. 각 부서의 창의력과 혁신력을 존중해 줄 뿐 아니라 실행의 속도를 촉진할 수 있게 했다. 대개 결정권 집중제도를 가지고 있는 조직들은 상층책임자들의 권위의식과 독선으로 인해 변화를 두려워 하여 창의적인 발전이 더디기 때문에 경쟁에서 낙오자가 되기 쉽다. 이 결정권 혁신에 따라 새로 취임한 베넷국제선교국장은 Our Daily Bread Ministries를 국제적으로 확산시키는데 자신의 소신을 크게 펼칠 수 있었으며 그로인해 벧엘출판사 ‘오늘의 양식’ 사역도 큰 혜택을 보게 되었다. 어떤 한국 교회 또는 선교기관에 하층부서가 결정한 사항들을 담임목사나 기관장의 권위의식으로 햇볕을 보지 못하는 경우가 있지는 않은지. 한국 교회나 선교기관들이 담임목사나 선교회 회장의 권위의식과 변화기피증으로 인해 결정권 집중 구조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면 결정권 분산 구조로 바꾸도록 해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허종욱 버지니아워싱턴대교수 사회학박사
2019.09.15. 10:41
1992년 봄에 모스코바개신교연합회에서 편지 한장이 벧엘출판사로 배달됐다. 편지 내용은 모스코바개신교 교인들이 한글-영어판 ‘오늘의 양식’을 받아보고 있는데 러시아어-영어판을 만들려면 어떻게 했으면 좋겠는가를 묻는 편지였다. 벧엘출판사가 발행하는 ‘오늘의 양식’이 모스코바에까지 우송된다는 사실을 알고 나는 너무 깜짝 놀랬다. 소련공산정권이 1991년 12월 26일 붕괴된지 1년 반 만이다. 나는 이 사실을 영어원본 Our Daily Bread를 발행하고 있는 Radio Bible Class 선교회측에 알렸다. 이 선교회의 요청으로 1992년 6월 첫 주일에 모스코바를 방문, 모스코바개신교연합회분들과 만나 벧엘출판사가 한글-영어판 ‘오늘의 양식’을 발행했을 때의 경험을 알려주며 의논을 했다. 그리고 내가 가져간 한영판 ‘오늘의 양식’을 그분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러시아교인들이 한글은 읽지 못하지만 ‘오늘의 양식’을 통해서 성경공부와 영어공부를 함께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2년 후 러시아어-영어판이 Radio Bible Class 도움으로 발행된 것은 정말 감사한 일이다. 나는 모스코바의 일을 마치고 라트비아 수도 리가에서 1992년 6월 말에 진행되고 있는 소련지하교회 교회지도자들의 선교대회에 참석했다. 이 선교대회는 소련 16개 공화국에서 60여년간 지하교회를 이끌어 온 교회 지도자와 교인 300여명, 그리고 미국 유럽 지역에서 선교사 목사 50여명이 자리를 같이 했다. 러시아, 우크라이나, 조지아 그리고 발틱 3국(라트비아, 루티아니아, 에스토니아) 등에서 지하교회를 이끌던 분들의 간증은 장내를 눈물바다로 변화시켰다. 한국에서도 김의환 김명혁 목사 등 10여 명의 목사들이 자리를 같이했다. 이날 할례루야교회 담임 김상복 목사가 주제 설교를 맡았으며 40여 명으로 구성된 할례루야교회 여성합창단이 찬양을 하여 큰 환영을 받았다. 특히 영어 러시아어 한국어가 함께 연합하여 다 함께 불렀던 찬송 ‘믿는 사람들은 군병같으니’가 끝난 후 모두 ‘아멘’으로 화답했던 장면은 잊을 수 없다. 지하교회 선교대회기간중 리가 시에 거주하고있는 고려인 3명이 우리를 찾아왔다. 이분들은 리가지역고려인회 임원들로 회장 의사인 최드미트리씨, 부회장 건축설계사 김씨, 총무 컴퓨터기술자 박씨였다. 300여 명의 고려인들이 라트비아에 살고 있다고 그들은 말했다. 한 달에 한번씩 모임을 갖는다고 했다. 대부분의 이곳 고려인들은 러시아 우즈백스턴지역에서 이주해 왔으며 3세 내지 4세로 한국말을 거의 알고 있지 못했으나 간단한 대화는 할 수 있었다. 김상복 목사, 모스코바한인선교사 피터 김 목사, 그리고 나는 최회장의 초청으로 그의 승용차를 타고 약 40분 동안 비포장 도로를 먼지속에 터덜거리며 달린 후 그의 집에 도착했다. 2층에 있는 그의 아파트는 부엌 거실 침실 등 3방 짜리로 딸 러시아인 부인 그리고 90이 가까운 노모 등 4식구가 살고있었다. 노모께서 정성드려 마련한 된장찌게 콩나물 시금치 뭍침 그리고 라트비아식 김치가 밥상에 올려졌다. 노모께서는 강한 함경도 사투리로 조선요리 솜씨 를 다 잊어버렸는데 제대로 맛이 날런지 모르겠다고 걱정을 했다. 1988년 서울 올림픽 때 TV를 통해 한국 사람들을 본 후 남한에서 온 한국사람들을 평생 처음 직접 보는 이들은 너무 감격해서 어쩔 줄을 몰랐다. 식사 후 다과가 나왔다. 그리고 돌아가며 식구 이야기들을 했다. 최씨는 우선 딸과 아내 자랑을 했다. 딸은 중학교를 다니고 있는데 피아노 바이올린 등 음악에 뛰어났다고, 아내는 학교 선생으로 과학을 가르치고 있는데 학생들 사이에 인기가 좋다고 했다. 그리고 자신은 모스코바국립대학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리가에 직장이 되어 이곳으로 이사오게 되었다는 것. 식구들의 서투른 한국 말을 노모께서 일일이 통역을 했다. 마지막으로 노모 차례가 왔다. 노모가족은 원래 함경북도 희령에 살다가 일정시대에 러시아 땅 연해주로 이주, 그런대로 행복하게 살고있었다고 했다. 그러다가 1950년 6.25사변나던 해 스탈린의 쏘련정부가 연해주에 살고있는 수천명의 고려인들을 기차로 우즈배크스탄으로 강제 이주시키기 시작했다는 것. 노모가족은 수백명의 고려인들과 함께 승객칸이 아닌 화물칸 기차에 실려 추운 겨울에 음식도 제대로 공급받지 않은 채 1주일 이상을 여행, 도중에 수백명이 목숨을 잃었다고 했다. 노모께서는 그 때 고려인들과 함께 기차안에서 불렀던 “조선아, 조선아, 너는 어찌하여 우리를 버리느냐”라는 애처러운 노래를 들려주었다. 노모는 죽기전에 크게 발전한 한국 땅에 한번 가보는 것이 소원이라고 말했다. 우리는 이들 가족에게 복음을 전했다. 노모를 빼놓고는 모두 순순히 복음을 받아드렸다. 그런데 노모께서는 “죽으면 끝나는 것이지 무슨 다른 세상이 있느냐”라면서 완강히 거절했다. 김상목 목사가 쉬운 말로 차근차근히 예수님을 소개했다. 그리고 노모는 끝내 눈물로 예수를 영접했다. 피터 김 목사가 간절히 축도를 했다. 김상복 목사는 노모에게 한국에 한번 초청하도록 노력하겠다고 약속했다. 다음 해 할례루야교회는 최씨 가족을 비롯해서 고려인회 임원 가족을 한국으로 초청했다. 그러나 노모는 끝내 소원인 한국 땅을 밟아보지 못하고 하나님 품에 안기셨다는 소식을 김상복 목사로부터 듣고 마음이 아팠다. 나는 지금도 그 때 만났던 고려인들과 최씨 가족을 잊지 못한다. 허종욱 버지니아워싱턴대교수 사회학박사
2019.09.09. 8:01
이영호 목사가 재임기간 중 이룬 사역가운데 벧엘시니어카카데미 설립은 지금까지 큰 열매를 맺어가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영호 목사가 연세가 많은 분들에게 관심이 많은데는 이유가 있었다. 안과의사인 이목사의 아버지가 실로암의료선교회를 설립, 의료비를 내지 못하는 가난한 사람들의 눈수술을 무료로 해주는 사역을 오래동안 해왔다. 이 목사는 어머님이 일찍 돌아가시고 홀로 살고있는 연세가 많은 아버님에 대해 늘 미안한 마음을 안고 있으면서 벧엘교회 연세드신 분들에게 각별히 관심을 보였다. 2002년 3월 1일 벧엘시니어아카데미가 이목사의 주도로 한 준비팀을 통해 정식으로 설립됐다. 이를 위해 김창제 장로, 유자열 장로, 오광동 집사가 수고했다. 나는 이분들을 도와 주는 역할을 했다. 이 세분은 하워드카운티노인회를 발족시키는데도 중추적인 역활을 했다. 기창제 장로는 이 노인회의 초대 회장을 엮임했다. 나는 노인회의 초청을 받아 매주 월요일 오후 3시에 콜럼비아에 있는 베인센터에서 시사 특강을 했다. 우리 팀들은 워싱턴지구촌교회(당시 김만픙목사 담임) 와싱턴중앙장로교회(당시 노창수목사 담임)의 시니어 아카데미 담당자들을 만났으며 현지를 답사하여 운영실태를 참관했다. 교회 시니어 아카데미에는 두 모형이 있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하나는 워싱턴지구촌교회가 시작한 교회와 지역을 통합한 메릴랜드상록회와 와싱턴중앙장로교회가 시작한 교회 단독 시니어 사역이다. 메릴랜드 상록회는 벧엘교회를 섬기던 변종서 장로(당시 집사)가 지구촌교회로 이적하면서 시작한 모임이다. 현재 상춘회는 지구촌교회로부터 분리하여 독립 운영되고 있다. 두 모임이 모두 카운티로부터 얼마간의 재정후원을 받고 있다. 벧엘시니어아카데미는 초기에 유자열 장로가 교장직을 오광동 집사가 교무직을 맡게 되었다. 매년 봄 가을학기 동안 매주 금요일에 학교를 열었다. 벧엘교회는 교회 단독운영 모형을 채택했다. 그동안 여러번 하워드노인회와의 통합이 논의 되어왔으나 실행이 되지 못했다. 오광동 집사가 시니어아카데미 규약을 초안했으며 이 규약이 당회에서 인준을 받음으로 인해 시니어아카데미는 정식으로 벧엘교회 산하기관이 되었다. 나는 유자열 교장의 특별 배려로 벧엘시니아아카데미에서 특강했다. 특강시간은 오전 10시에 소예배실에서 진행되었다. 나는 미국 대통령을 중심으로 한 미국역사와 한동대에서 경험한 한국 이야기들을 내 자신의 신앙생활과 엮어서 특강을 이어나갔다. 내 강의는 수강생들에게 인기를 모았다. 어떤 때는 자리가 부족했다. 지금 생각하면 이분들이 나를 너무 사랑해 주신 것이다. 그러다가 한동안 시니어아카데미 강의를 교회사정과 내 개인 사정으로 한 3년간 멈추었다. 그랬더니 여러분들이 나를 찾아와서 특강을 다시 해달라고 간청했다. 교회의 어려움과 겹쳐 지난 7년 동안 시니어아카데미가 한동안 운영에 어려움을 겪었다. 그러다가 백신종목사가 부임하면서 다시 소생했다. 2년 전 한상구 장로가 교장직을 맡으면서 활성화 되기 시작했다. 아카데미의 효율적인 행정조직과 운용, 다양한 프로그램의 편성, 좋은 강사들의 초청 등이 활력소가 됐다. 그동안 협소한 장소로 많은 분들이 등록을 하지 못하는 현상이 일어났는데 이 문제도 프라미센터가 개관함으로서 풀렸다. 나는 지금 한 학기에 두 번 특강을 맡고 있다. 벧엘교회 신앙생활가운데 크게 기억에 남는 아름다운 추억이다. 나는 빌립보교회 시니어아카데미 평생교육원의 초청으로 미국 역사를 2년간 특강하기도 했다. 그리고 갈보리 장로교회에서도 매주 화요일에 진행되었던 노인대학에서 5년간 강의를 했다. 그런데 지금은 이 사역이 중단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아쉬워하고 있다. 허종욱 버지니아워싱턴대 교수 사회학 박사
2019.09.02. 13:16
“목사가 사표를 내고 교회를 떠난 후 이웃에서 개척을 해야 하나 아니면 타지로 떠나야하나?”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을 찾는 일은 그리 쉽지 않을것 같다. 왜냐하면 내가 알고있는 한 성경이 분명히 해답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질문은 성경적인 면보다는 윤리적인 면에서 해답을 찾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을것 같다. 그러나 교회의 궁극적인 목적이 복음을 모든 족속에게 전파하는 대사명을 수행해야 한다는 의미에서 볼 때 복음전파의 방법은 큰 논쟁이 될 수 없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즉, 하나님께서 쓰시는 방법이 다를 뿐이지 어느 것이 틀렸고 어느 것이 옳다고 말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다. 벧엘교회를 떠난 부목사들의 경우는 전자와 후자로 갈라져 있다. 2000년 12월 1일에 부임한 이영호 목사가 5년 3개월만인 2006년 3월 31일에 사임했다. 그리고 2001년 3월 8일에 부임한 이성주목사가 2005년 4월 24일 5년만에 사임했다. 이영호목사는 리치몬드한인장로교회 담임목사로 청빙을 받아 타지로 떠났으며 이성주 목사는 벧엘교회 근처 엘크릿지에 있는 미국교회에서 몇몇 벧엘교회 가정들과 함께 하늘문교회를 개척했다. 이 사례는 손인식 목사가 1990년 11월 18일 벧엘교회 부목사직을 사임하고 LA베델교회 담임목사로 부임했으며 1993년 2월 14일 사임한 송영선 목사가 벧엘교회 부목사직을 사임하고 근처에서 몇몇 벧엘교회 교인들과 함께 빌립보교회를 개척한 경우와 비슷하다. 또 다른 사례는 2014년 5월 25일 진용태 담임목사의 사표를 전후에서 생겼다. 이태복 목사가 진목사 사표전인 20014년 3월 메릴랜드 웨스트 프랜드십지역에 몇몇 벧엘교인들과 함께 새길개혁교회를 개척했다. 반면 박준필목사는 진목사 사표 후 2015년 1월 25일 플로리다주 탬파에 있는 탬파한인장로교회 담임목사로 취임했다. 벧엘교회 부목사로 시무하다가 타지로 가서 담임목회를 시작한 예는 많이 있으나 그 가운데 내가 기억하고 있는 예들을 보면 다음과 같다. 3대 이호영목사와 함께 부목사로 동역을 했던 김지섭목사는 1999년 11월 뉴욕 웨체스터에 있는 웨체스터반삭교회 담임목사로 부임했으며, 함께 부목사로 섬겼던 이은수 목사는 1998년 10월 피츠버그중앙한인교회 담임목사로 부임하여 사역하다가 4년전 한국에서 새로운 목회를 시작했다. 그 후 임철성 목사는 2009년 10월 25일 버지니아 맥클린한인장로교회 담임목사로 부임, 7년간 시무하다가 2016년 6월 10일 시카고 해브론교회 담임목사로 현재 시무하고 있다. 이영호 목사가 부임한 지 3개월 째되는 2006년 6월 첫주에 우리 부부는 리치몬드한인장로교회의 초청을 받아, 나는 금토요일 2일간 이 교회 제직들에게 ‘오늘의 양식’을 통한 QT를 나눌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이 교회 구성원의 특징은 전문직에 종사하는 교인들이 많다는 점에서 벧엘교회와 비슷한 점이 많다. 13년간 시무해오고 있는 이영호 목사는 2백여명이던 교인을 6백여명으로 성장시켰다. 우리 부부는 맥클린한인장로교회로부터 2010년 5월 첫 금요일 저녁예배에 초청을 받았으며, 나는 한동대에서 겪은 아름다운 이야기들을 예배중에 간증했다. 이철성 목사는 재임중에 교육관 건물을 완성했다. 허종욱 버지니아워싱턴대교수 사회학박사
2019.09.02. 13:14
벧엘교회는 창립 10주년을 맞이하여 1989년 6월 1일부터 4일동안 임동선 동양선교회 담임목사를 강사로 창립기념집회를 가졌다. 이 성회는 말 그대로 축제분위기 속에서 이루어졌다. 엘리콧시티 새 건물로 이사온지 1년 반 만이었다. 벧엘교회 역사 10년이면 초대 김상복 목사를 중심으로 교인들과 함께 이루어 온 ‘벧엘 1세대 문화’가 어느정도 그 두각을 나타내는 시기라고 나는 생각했다. 집회 후 임동선 목사와의 제직간담회 자리에서 김상복 목사는 10년이 지난 벧엘교인들의 정체성을 한번 조사해 보았으면 좋겠다는 의견을 냈다. 다시말하면 벧엘교인들의 자화상을 확인해보자는 제안이었다. 나는 변종서 장로(당시 집사)와 함께 이 조사를 위해 신앙 및 이민생활을 측정 할 수 있는 40개 항목으로 된 무기명 설문조사안을 작성했다. 무기명이기 때문에 해답은 솔직하다고 볼 수 있다. 이 40개 항목에는 성별, 연령, 신앙연수, 이민햇수, 직업 등 설문해답자의 신상을 조사하는 항목은 포함되지 않았다. 사회학을 전공 한 나는 당시 볼티모어대학에서 사회학을 가르치고 있었으며 행정학을 전공한 변장로는 연방사회보장청에서 통계분석관으로 일하고 있었다. 설문조사는 1989년 7월 첫 주일 예배중에 실시됐다. 500여 명 성인예배참석교인 가운데 450여명이 설문에 회답했다. 주목을 끄는 대목은 1세대 미주이민자로서 자신이 자신을 어떻게 보고 있느냐는 설문에 대한 회답이었다. 신앙생활에 관계된 설문의 해답들은 70%가 넘는 공통점들로 나타났기 때문에 언급하지 않겠다. 신앙생활 이외의 이민자로서의 장점들과 단점들을 50%이상의 회답을 찾이하는 문항의 순서를 보면 다음과 같다. 우선 장점들을 순서대로 살펴보자. 첫째, 고생하며 열심히 일한다. 둘째, 자식의 교육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한다. 셋째, 부모와 윗 사람에게 예의범절을 잘 지킨다. 넷째, 열심히 배우려고 노력한다. 반면, 단점들을 살펴보자. 첫째, 솔직하지 못할 때가 많다. 둘째, 어려움에 처한 남을 돌봐주는데 게을리한다. 셋째, 남이 잘되는 것을 함께 축하해주는데 인색하다. 넷째, 조국에 대한 사랑이 부족하다. 나는 ‘2003년 재미한인교포역사 100주년’을 기념해서 2003년 11월 초부터 미주중앙일보에 “우리는 유대인 이민에서 무엇을 배울것인가?’라는 제목으로 10회에 걸쳐 3개월간 매주 특집으로 연재했다. 나는 유대인 주거지역 상업지역 회당 학교등에서 유대인들을 만나 설문과 인터뷰를 통해서 자료를 모아 분석했다. 그리고 그 결과를 벧엘교회 교인들과의 설문해답자료와 비교했다. 유대인과 한국인이 지적한 장점들이 일치하는 결과를 보고 놀랬다. 왜 그럴까? 두 민족은 수천년에 걸쳐 겪고 온 고난의 역사적인 배경이 비슷하다. 이 가운데서 생겨난 민족의 정체성이 이루어 진 것이다. 두 민족은 미국으로 이민와서 살기 위해 열심히 일하고 있다. 그리고 그 일하는 목적이 다분히 자녀교육을 위한 것이다. 자신들이 희생해서 자녀가 성공하면 바로 그것이 행복이기 때문이다. 유대교와 유교사상의 전통은 부모와 윗사람을 존경하는 예의범절을 잘 지키는 것이다. 그리고 열심히 배우려는 열정도 유대교와 유교의 저통에서 왔다고 본다. 그러면 단점들을 한번 살펴보자. 왜 한국사람들은 어떤 면에서 솔직하지 못할까? 유교사상에서 온 체면 때문일까? 남과 비교하는 의식 때문일까? 나는 콜럼비아에 있는 유대교 회당에서 유대인들이 서로 자신들의 어려움을 털어놓고 이야기하는 장면을 보고 가슴이 뭉클했다. 과연 우리는 가슴속의 아픔을 다른 사람들과 솔직하게 나눌수 있는가? 많은 유대인 이민자들은 미국에 와서 열심히 벌어놓은 재산을 사회환원에 인색하지 않은 예들을 얼마든지 볼수있다. 존스합킨스병원에 “Ann and Harry Weinberg Building”이 좋은 예다. 그리고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는 속담이 아직도 우리에게 적용되는 것인가? 우리는 유대인들의 조국 사랑은 너무 잘 알고 있다. 과연 한국인들은 어떤가? 미국에 있는 많은 유대인 청년들이 이스라엘 조국에 전쟁이 났을 때 자원하여 전선에 나갔던 장면들은 원정출산을 해서라도 자식의 병역을 기피시키려는 일부 한국 부모들과 비교해보면 가슴 아픈 일이다. 나는 한국인의 단점들을 논의하면서 이는 다른 사람이 아니라 바로 나에게 해당되는 것임을 깨닫고 마음이 숙연해진다. 허종욱 버지니아워싱턴대교수 사회학박사
2019.09.02. 13:11
벧엘교회를 통해 탄생한 ‘오늘의 양식’이 2019년 8월 두째 주에 40세 생일을 맞이한다. 나는 앞으로 몇회에 걸쳐 ‘오늘의 양식’ 봉사를 통해 하나님께서 베푸신 역사와 내 자신이 이를 통해 경험한 하나님의 은혜를 나누어 보려고 한다. 한글판 ‘오늘의 양식’이 1980년 8월 벧엘에서 태어나서 한 해를 빼고 1993년까지 13년간 편집책임을 맡아 ‘오늘의 양식’의 기초를 닦는데 일익을 감당한 나로서는 40년의 생일을 맞이하면서 감회가 깊다. 한동대에서 교수로 가르치고 있던 2004년 4월 1일 주일 할레루야교회(담임 김상복목사) 의 초청으로 ‘오늘의 양식’에 관련된 강연회를 가진 적이 있었다. 할레루야교회는 김상복목사가 1990년 담임목사로 부임 한지 1년 후인 1991년 10월에 벧엘출판사의 허가를 얻어 ‘오늘의 양식’ 한국지부를 설립하고 ‘오늘의양식’을 매월 발행해오고 있었다. 이날 강연에는 50여명의 ‘오늘의 양식’봉사자들을 비롯해서 약 150여명의 ‘오늘의 양식’을 사랑하는 교인들이 소예배실을 메우고 있었다. ‘오늘의 양식’에 대해 일부 벧엘교회 교인들은 이미 알고 사용해 오고 있지만 좀 생소하게 여길지도 모르는 할레루야교인들에게는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다. 40년동안 벧엘교회 교인들도 많이 바뀌었으며, 또 이 소책자를 받아보는 독자들에게도 도움이 되리라고 생각이 되어 이날 강연한 내용을 중심으로 ‘오늘의 양식’에 관련된 이야기들을 소개한다. 이 책자는 벧엘교회를 통해 3개월마다 8만권, 할레루야교회를 통해 매월 10만권을 독자들에게 우송하고 있다. 그리고 온라인을 통해 매일 ‘오늘의 양식’을 접하는 독자들까지 합하면 30만명은 족히 되리라고 믿는다. ‘오늘의 양식’의 영어본은 미시간주 그랜드 레피즈에 위치한 TV, 라디오, 그리고 문서선교를 하고있는 RBC(Radio Bible Class) 선교회에 에 의해 매월 영어판 1백만권, 스페니쉬판 30만권, 중국어판 20만권등 한국어를 포함해서 12개국 언어로 발행되고 있다. 이 선교기관은 엠 알 디한(M. R. DeHaan) 목사가 라디오를 통한 선교를 시작하면서 햇볕을 보게되었다. 디한목사의 라디오방송은 세계 최초의 기독교방송을 기록하고 있다. 외과 이사였던 디한목사는 50세사 다 되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신학 공부를 시작, 그랜드 레피즈 시내에서 갈보리교회를 개척, 목회를 하였으나 그 후 하나님이 주신 달란트가 라디오 선교임을 깨닫게 된 것이다. RBC는 1950년에 영어판 ‘오늘의 양식’(Our Daily Bread)를 포함한 문서선교, 1970년에 TV선교를 시작했다. Our Daily Bread의 첫 편집장은 장로교 담임목사로 은퇴한 데네스 디한( Dennis DeHaan)목사가 맡아 30년간을 머물면서 1만권으로 시작한 영어판을 1980년대에 매월 1백 70만권까지 올려놨다. 당시 발행부수가 가장 많았던 Time지의 부수를 능가했다. 지금은 온라인독자들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기 때문에 그때에 비해 발행부수가 내려갔다. Our Daily Bread는 구독료를 받지않는것을 이 선교기관의 기본 정책으로 세웠다. 모든 비용은 독자들의 헌금과 유산으로 충당하고 있다. 독자들이 ‘오늘의 양식’이 매일 소개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며 예화를 읽고 실 생활에 적용하는 믿음 생활을 독려하는 이 책자는 세가지 중심을 가지고 있다. 즉 성경중심, 예수중심, 적용중심이다. 저자 자신이 경험한 내용, 신실한 믿음의 선배들의 경험, 성경속에서의 사건과 인물들, 하나님의 섭리와 은혜가 펼쳐진 역사들 등을 중심으로 엮어지는 예화들은 적용생활에 큰 도움을 주고있다. 신학적인 논쟁이나 어느 한 교파의 주장을 초월하여 일상생활에서 벌어지는 평범한 생활 영어로 엮어지는 내용들은 우리의 신앙생활을 날로 살찌게 하고 있다. 허종욱 버지니아워싱턴대교수 사회학박사
2019.09.02. 13:00
나는 ‘지금으로부터 40년 후 벧엘교회는 어디로 갈 것인가?’라는 질문을 던져본다. 이 질문은 다만 벧엘교회에만 해당되는 질문만 아니라 한국이민교회 전체에게 던지는 질문일것이다. 지난 40년 동안 벧엘교회는 이민 1세 교회로서 출발하여 지금은 한어권 1세와 차세대 영어권 1.5세및 2세교회가 공존하는 한인교회로 존립하고 있다. 그러면 이 단일민족의 한인교회가 앞으로 얼마나 계속될것인가? 어느 시점에가서 사라질것인가 아니면 주류사회 교회에 흡수되고 말것인가? 한어권 이민 1세대가 점점 세상을 떠나고 차세대 영어권 1.5대, 2세대, 또는 3세대가 주류문화에 동화되고 있는 이 시점에서 우리는 지금쯤 이 문제를 고민해볼 때가 됐다고 생각한다. 1974년 5월 첫 주 볼티모어선지 첫면에 교인들이 주일 예배를 드리는 사진과 함께 실린 “마지막 예배”라는 제목의 머리기사를 나는 기억한다. 60년의 역사를 가진 볼티모어 다운타운에 있는 독일이민 1세대 루터란교회에서 마지막으로 예배를 드리는 장면이다. 사진속에는 젊은이들의 모습은 전혀 보이지 않고 10여명의 나이든 교인들의 모습만이 보인다. 이 기사는 “마지막 예배”의 사연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독일에서 이민 온 1세들이 이 교회를 세우고 모국어인 독일어로 예배를 드려오다가 한편으로는 대부분의 1세가 세상을 떠나고 독일로부터 이민오는 1세가 거의 사라지면서 교인 수가 급속히 줄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독일어가 불편하고 영어가 편리한 2세와 독일어를 구사하지 못하는 3세들은 미국문화로 동화되어 미국교회로 흡수되게 되었다. 이러한 일련의 사태는 이 교회가 문을 닫게 되는 결과를 가져오게 했다. 미래 어느 시점에가서 한국이민교회도 위의 독일교회의 예처럼 자취를 감추게 되고 미국교회로 동화될 것인가? 아니면 한국민족교회는 문화적으로 서양에 속하며 인종적으로 백인에 속하는 독일민족교회의 경우와는 다르기 때문에 여러 대를 거쳐 민족교회로 남아있을 것이라고 예측 할 수 있을까? 한국 1세들이 세상을 떠나기 시작하고 한국으로부터 오는 이민자들이 급속히 주는 상황은 독일민족교회와 비슷하다. 그리고 차세대인 영어권 1.5세 2세들이 교회를 떠나고 있는 경향도 또한 독일교회의 경우와 비슷하다. 결과적으로 한국교회도 세대의 연결고리가 끊어져 가고 있는 것이다. 특히 부모를 따라서 벧엘교회에서 유아주일학교를 거쳐 고등학교 졸업할 때 까지 한 지붕밑에서 예배를 드리다가 일단 타지역 대학으로 떠난 많은 차세대들이 모교회로 돌아오지 않을 뿐 아니라 모교회로 돌아왔던 일부 차세대들도 미국교회로 떠나는 현상은 세대의 연결고리가 끊기는 주 원인이 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면 이런 현상속에서 한국교회는 어떻게 생존 및 성장을 할 수 있을까? 교인수 100명 내외의 중소교회는 이른바 대형교회로의 수평이동관계로 점점 생존하기가 힘들어진다. 대형교회는 한국으로부터의 이민자 축소로 인해 복음전도를 통한 수직이동이 힘들어짐에 따라 중소교회로부터의 수평이동으로 현상유지를 하는 수 밖에 없게 될 것 같다. 다른 방법으로는 주위에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더 열심히 전도하여 수직이동인구를 늘이거나, 교회가 1세대와 차세대 사이와의 관계를 공고히 하여 한 지붕밑에서 공생성장하는 방법이다. 벧엘교회는 금년에 ‘2019벧엘 새생명축제’를 마련하고 미전도자들에게 복음의 손을 펴는 운동을 펼치고 있다. 오는 9월 28일 전도대상자초청모임을 갖는다. 이 모임을 위해 전도대상작정자들은 두 번에 걸쳐 특별전도훈련을 받는다. 나는 버지니아 열린문교회(담임 김용훈목사)가 주최한 ‘열린문 컨퍼런스’에 참석하여 미래의 한국교회상을 볼 수 있었다. 이 컨퍼런스가 내세운 주제는 “Exploring an interdependent, intergenerational, & intercultural church”, 즉 열린문교회가 시도해왔으머 앞으로 시도하려고 하는 미래한국교회의 청사진이다. 한 지붕밑에서 1세대와 차세대가 공생성장하는 방법으로 1세대와 차세대가 상호의존하여 세대의 장벽을 넘어서는 목회다. 그리고 더 나가서 다른 종족과도 함께하여 궁극적으로 다종족 교회를 이루는 것이다. 허종욱 버지니아워싱턴대교수 사회학박사
2019.09.02. 12:58
교회는 영어판 Our Daily Bread를 한글로 번역한 ‘오늘의 양식’ 첫호 1백부를 1980년 8월 두째주 예배후 교인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그 후 매주 2백부씩 복사했다. 이를 위해 교회는 공병우식 한글 타자기 한대를 샀으며 이 타자기에 익숙한 신길은 집사가 수고했다. 6명의 번역위원들이 번역한 초본을 편집자인 내가 교정을 본 후 신집사님에게 넘겨주어 타자본은을 마련, 복사기로 복사하여 교인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그런데 타자기가 가끔 고장이 났다. 그래서 글재주가 뛰어난 정정인 집사에게 부탁하여 친필본이 햇볕을 보게 되었다. 그 뒤 신집사가 사정상 타자를 더 이상 못하게 되어 내 아내 허연진 집사가 여러번 친필본을 맡았다. 표지는 대학에서 미술을 전공한 박봉희 집사가 맡아 도안해 주었다. 한 번은 교회 복사기가 고장이 나서 존스합킨스대학 도사관 복사실에서 우리 부부가 거의 5시간이 걸려 1천부를 복사한 적도 있다. ‘오늘의 양식’이 외부로 알려지면서 다른 교회로부터 주문이 쇄도했다. 김상복 목사가 외부 집회에서 돌아 올때마다 수십명 또는 수백명의 주문을 받아왔다. 그리하여 복사기로는 공급을 감당하지 못하게 되었다. 그래서 버지니아에 있는 한인 인쇄소에서 복사를 했다. 그런데 가끔 제 시간에 도착하지 않았다. 마침 운전거리가 1시간 이상이되는 헤거스타운에서 교회를 왔던 김효성 장로 내외가 배달을 자청했다. 그래서 김 장로 내외는 2주에 한번씩 헤가스타운에 있는 인쇄소에서 복사본을 찾아 차 트렁크에 싣고왔다. 그 뒤부터 한번도 지각을 한적이 없다. 마침 이 때에 백경환 선생이 지휘자로 부임, 부인 백숙자 집사께서 교회 비서직을 맡으면서 ‘오늘의양식’ 타자문제는 해결됐다. ‘오늘의 양식’이 1983년에 새 얼굴을 갖게 되었다. 버지니아에 있는 자이언트 인쇄소에서 소책자 모양의 인쇄를 맡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번역위원회 명칭도 벧엘출판사로 바꾸고 교회 독림기관으로 운영하기로 결정했다. 이에 따라 발행인 편짐인 총무 재무 등 운영위원과 편집위원 제도를 두고 출판사를 편집인 책임하에 운영하기로 했다. 타자기를 통한 ‘오늘의 양식’ 제작에 두 가지 어려움이 있었다. 첫째는 글자의 크기와 모양을 한가지 방법으로 밖에 할 수 없으며, 둘째는 글자를 교정하는데 큰 어려움이 있었다. 마침 당시 한글식자기가 미조히대학의 한 교수에 의해 개발되었다. 우리는 그 교수를 벧엘출판사로 초청, 백숙자 집사와 오봉구 집사가 식자기 쓰는 법을 강습받았다. 그런데 식자기에도 문제가 있었다. 식자된 글자를 다시 바꾸는 일이 쉽지 않았다. 그러다가 1980년대 후반에 ‘아래 하’ 한글이 개발되면서 본격적인 한글 워드 프로세씽을 이용 할 수가 있었다. 한국서부터 컴퓨터학을 전공하고 경험이 많았던 오봉구 집사가 ‘오늘의 양식’제작과 독자관리를 컴퓨터화하는데 큰 기여를 했다. 출판부수가 1만권 이상에 도달했다. 제작비용과 운송비용이 엄청나게 들어갔다. 그래서 당시 비용이 쌌던 한국에서 인쇄하기로 결정, 기독교 출판사 보이스사에서 1년, 그리고 소망출판사에서 8년간 인쇄를 했다. 마지막 해에는 인쇄가 3만권에 육박했다. 박종세 집사와 나는 매달 볼티모아공항에 가서 인쇄물을 찾아왔는데 어떤 때는 통관하는 절차가 너무 복잡하여 애를 먹기도 했다. ‘오늘의 양식’ 편집위원 수는 해가 바뀌면서 늘어 났다. 1980년 후반에는 20명이 됐으며 매달 좀더 좋은 책자를 발행하기 위해 편집위원회를 매 가정에서 돌아가며 진행했다. 그래서 ‘오늘의 양식’사역은 편집위원 가정사역으로 번져 나갔다. 매년 수양회를 갖고 더 좋은 출판을 위해 논의했으며 외부로 부터 특별강사를 초빙, 의견을 청취했다. 이때 발행된 ‘오늘의 양식’에는 발행인의 글과 편집인의 글을 실어 출판사의 동정을 독자들에게 알려주었으며 편집위원들이 돌아가면서 자기소개와 간증을 발표, 독자들과 한 식구가 된 끈끈한 관계를 유지했다. 독자들로부터 온 편지들로부터 온 편지들도 간추려 소개했다. ‘오늘의 약식’을 통해 독자들이 받은 간증들은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과 은혜를 주었다. 독자들과의 소통은 이 소책자 발전에 큰 기여를 했다고 생각한다. 허종욱 버지니아워싱턴대교수 사회학박사
2019.09.02. 12:56
‘오늘의 양식’을 발행하는 벧엘출판사는 독자들에게 신앙생활에 도움이 되는 벧엘문헌시리즈를 10권 발행했다. 그 가운데 샌프란시스코에서 침례교회 목회를 하고 있던 로버트 보인드 먼거 목사의 소 책자 “나의 마음은 그리스도의 집”은 독자들사이에 큰 인기를 끌었다. 또 벧엘교회에서 성경공부 교재로 쓰고 있는 “7단계 공부”를 인쇄, ‘오늘의 양식’과 함께 독자들에게 우송했다. 7권으로 구성된 7단계는 네비게이토선교회가 전도용으로 사용하고 있는 신안안내서로 신앙생활의 기초로부터 성화에 이르는 과정을 순서에 따라 자세히 안내하고 있으며 매권 끝머리에 복습을 하는 문제들이 출제되어있다. 독자들은 이 문제의 답안을 벧엘출판사로 반송하면 김상복 목사가 일일히 점수를 매겼으며 7과를 완성한 독자들에게는 수료증과 함께 격려의 편지를 동봉해서 우송했다. 따라서 ‘오늘의 양식’ 독자들은 이 소책자를 통해 매일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적용하는 생활을 할 뿐 아니라 “7단계” 공부를 통해 성경지식을 날마다 더해가고 있었다. 1989년부터는 ‘오늘의 양식’ 한영대조판을 만들어 독자들이 영어원본과 대조하며 읽을 수 있도록 했다. 한영판이 나오면서부터 영어권의 독자들이 부쩍 늘었다. 많은 독자들이 이 책자를 통해 QT도 하며 영어공부를 할 수 있는 일조이석의 효과를 보기 때문이다. 부모들이 자녀들에게 이 책자를 권하는 바람에 대학에 가있는 자녀들의 독자수가 급증했다. 한영판 인쇄로 인해 제작비용이 급증했다. RBC선교회의 방침에 따라 책자를 무료로 배포해야 되기 때문에 제작비용은 교회예산과 독자헌금으로 충당해야 했다. 그때만해도 한인교포들 사이에 무료책자를 받아보고 헌금을 하는 문화는 그리 성숙되어 있지 않았다. 그래서 이 책자에 헌금을 격려하는 발행인 김상복 목사의 글과 함께 헌금봉투를 첨부했다. 격려글의 내용은 이러했다. “오늘의 양식은 여러분에게 무료로 우송해 드립니다. 이 책자를 받아보시고 은혜를 받으시는대로 1달러를 헌금해주시면 다른 한 분에게 한 부를 보낼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여러분이 이 책자를 통해 문서선교사가 되시는 것입니다” 두 가지 큰 기도 제목이 대두됐다. 하나는 번역 할 영어원본을 적어도 3개월 전에 받아 번역 및 제작 작업에 들어가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독자들에게 도저히 제 날짜에 우송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또 하나는 치솟는 비용을 도저히 감당하기 힘든 것이다. 벧엘출판사 대표들이 RBC본사를 방문하여 데니스 디한 편집장, 제리 폴슨 국제선교국장, 이 선교회 최고 책임자인 리차드 디한회장 등과 만나 의논했다. 다음과 같은 기도 응답을 받았다. 영어원본이 인쇄되기 전에 원고 초본을 우리에게 보내어 영어원본과 동시에 발행하도록 배려해주며 매년 5만 달러씩 3년간 재정보조를 해주어 재정독립이 되는데 도움을 준다는 것이다. 그리고 ‘오늘의 양식’은 RBC 본사에서 직접 우리 독자들에게 우송하며 인쇄와 우송비용은 원가를 기준으로 한다. RBC의 이러한 특별한 배려가 없었으면 지금의 ‘오늘의 양식’으로 자랄 수 없다고 생각한다. 정말 고마운 분들이었다. 우리는 ‘오늘의 양식’ 창간 기념일이 되면 RBC분들을 초청하여 설교, 세미나, 강연회, 전시회 들을 가져왔다. 그런데 전시회에 재미있는 부분이 많았다. 틀린 글자 투성인 첫 타지 복사본, 손으로 써서 만든 ‘임시변통본’, 남의 잡지 표지를 그대로 사용한 첫 인쇄본, LA 모교회가 만든 해적판 ‘너늘의 양식’, 첫 한영대조본, 첫 편집위원들의 모습을 담은 기념 사진 등이다. 대개 매년 9월 첫 주일에 기념예배를 드리고 특별헌금을 하는 순서를 가졌다. 지난 25주년을 마지하여 RBC최고책임자 마틴 디한과 국제선교국장 릭 디한도 벧엘교회를 방문, 특별 행사를 가졌다. 창간 기념예배 순서로 모든 편집위원들이 ‘오늘의 양식 노래’를 합창했다. 이 노래는 피아노 반주자 이경미 선생이 작사 작곡했다. 이경미선생은 지휘자 홍성근 목사의 사모로 음악에 다재다능한 분이다. 타자와 관리를 맡았던 백숙자 집사가 우리 교회를 떠난 후 주정미 간사가 후임으로 지금까지 수고를 아끼지 않고 있다. 독자관리시스템을 구축한 오봉구 집사, 회계를 맡아 독자헌금을 장려하여 8만달러에 이르는 예산을 확보하여 RBC와 교회 예산에 의존하지 않고 독립 할 수 있도록 노력한 재무 신구용 장로, 한국에서 항공편 우송된 ‘오늘의 양식’을 볼티모어 공항에서 매달 찾아와 독자들에게 우송한 박종세 집사, 모두 고마운 분들이다. 그리고 모두 아름다운 추억 들이다. 허종욱 버지니아워싱턴대교수 사회학박사
2019.09.02. 12:45
벧엘교회는 창립 10주년을 맞이하여 1989년 6월 1일부터 4일동안 임동선 동양선교회 담임목사를 강사로 창립기념집회를 가졌다. 이 성회는 말 그대로 축제분위기 속에서 이루어졌다. 엘리콧시티 새 건물로 이사온지 1년 반 만이었다. 벧엘교회 역사 10년이면 초대 김상복 목사를 중심으로 교인들과 함께 이루어 온 ‘벧엘 1세대 문화’가 어느정도 그 두각을 나타내는 시기라고 나는 생각했다. 집회 후 임동선 목사와의 제직간담회 자리에서 김상복 목사는 10년이 지난 벧엘교인들의 정체성을 한번 조사해 보았으면 좋겠다는 의견을 냈다. 다시말하면 벧엘교인들의 자화상을 확인해보자는 제안이었다. 나는 변종서 장로(당시 집사)와 함께 이 조사를 위해 신앙 및 이민생활을 측정 할 수 있는 40개 항목으로 된 무기명 설문조사안을 작성했다. 무기명이기 때문에 해답은 솔직하다고 볼 수 있다. 이 40개 항목에는 성별, 연령, 신앙연수, 이민햇수, 직업 등 설문해답자의 신상을 조사하는 항목은 포함되지 않았다. 사회학을 전공 한 나는 당시 볼티모어대학에서 사회학을 가르치고 있었으며 행정학을 전공한 변장로는 연방사회보장청에서 통계분석관으로 일하고 있었다. 설문조사는 1989년 7월 첫 주일 예배중에 실시됐다. 500여 명 성인예배참석교인 가운데 450여명이 설문에 회답했다. 주목을 끄는 대목은 1세대 미주이민자로서 자신이 자신을 어떻게 보고 있느냐는 설문에 대한 회답이었다. 신앙생활에 관계된 설문의 해답들은 70%가 넘는 공통점들로 나타났기 때문에 언급하지 않겠다. 신앙생활 이외의 이민자로서의 장점들과 단점들을 50%이상의 회답을 찾이하는 문항의 순서를 보면 다음과 같다. 우선 장점들을 순서대로 살펴보자. 첫째, 고생하며 열심히 일한다. 둘째, 자식의 교육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한다. 셋째, 부모와 윗 사람에게 예의범절을 잘 지킨다. 넷째, 열심히 배우려고 노력한다. 반면, 단점들을 살펴보자. 첫째, 솔직하지 못할 때가 많다. 둘째, 어려움에 처한 남을 돌봐주는데 게을리한다. 셋째, 남이 잘되는 것을 함께 축하해주는데 인색하다. 넷째, 조국에 대한 사랑이 부족하다. 나는 ‘2003년 재미한인교포역사 100주년’을 기념해서 2003년 11월 초부터 미주중앙일보에 “우리는 유대인 이민에서 무엇을 배울것인가?’라는 제목으로 10회에 걸쳐 3개월간 매주 특집으로 연재했다. 나는 유대인 주거지역 상업지역 회당 학교등에서 유대인들을 만나 설문과 인터뷰를 통해서 자료를 모아 분석했다. 그리고 그 결과를 벧엘교회 교인들과의 설문해답자료와 비교했다. 유대인과 한국인이 지적한 장점들이 일치하는 결과를 보고 놀랬다. 왜 그럴까? 두 민족은 수천년에 걸쳐 겪고 온 고난의 역사적인 배경이 비슷하다. 이 가운데서 생겨난 민족의 정체성이 이루어 진 것이다. 두 민족은 미국으로 이민와서 살기 위해 열심히 일하고 있다. 그리고 그 일하는 목적이 다분히 자녀교육을 위한 것이다. 자신들이 희생해서 자녀가 성공하면 바로 그것이 행복이기 때문이다. 유대교와 유교사상의 전통은 부모와 윗사람을 존경하는 예의범절을 잘 지키는 것이다. 그리고 열심히 배우려는 열정도 유대교와 유교의 저통에서 왔다고 본다. 그러면 단점들을 한번 살펴보자. 왜 한국사람들은 어떤 면에서 솔직하지 못할까? 유교사상에서 온 체면 때문일까? 남과 비교하는 의식 때문일까? 나는 콜럼비아에 있는 유대교 회당에서 유대인들이 서로 자신들의 어려움을 털어놓고 이야기하는 장면을 보고 가슴이 뭉클했다. 과연 우리는 가슴속의 아픔을 다른 사람들과 솔직하게 나눌수 있는가? 많은 유대인 이민자들은 미국에 와서 열심히 벌어놓은 재산을 사회환원에 인색하지 않은 예들을 얼마든지 볼수있다. 존스합킨스병원에 “Ann and Harry Weinberg Building”이 좋은 예다. 그리고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는 속담이 아직도 우리에게 적용되는 것인가? 우리는 유대인들의 조국 사랑은 너무 잘 알고 있다. 과연 한국인들은 어떤가? 미국에 있는 많은 유대인 청년들이 이스라엘 조국에 전쟁이 났을 때 자원하여 전선에 나갔던 장면들은 원정출산을 해서라도 자식의 병역을 기피시키려는 일부 한국 부모들과 비교해보면 가슴 아픈 일이다. 나는 한국인의 단점들을 논의하면서 이는 다른 사람이 아니라 바로 나에게 해당되는 것임을 깨닫고 마음이 숙연해진다. 허종욱 버지니아워싱턴대 교수, 사회학 박사
2019.07.28. 12:33
김영길 한동대 명예총장이 지난달 30일 아침 서울 세브란스병원에서 81세를 1기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는 소식을 접하면서 김 총장과 함께 11년간 한동대를 섬겼던 옛날들이 새삼스럽게 떠오른다. 4년 전 췌장암 4기 진단을 받은 뒤 치료와 기도로 어느 정도 차도를 보게되었으며 지난해에는 거의 완치가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안도의 기쁨을 갖고 있던 중 지난 5월 병세가 갑자기 악화되어 결국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는 소식을 듣고 슬픈 마음을 금치 못한다. 25년의 짧은 역사를 지니고 있는 한동대가 한국의 400여 개의 대학 가운데서 상위 40권에 속하며 이름만이 아니고 명실공히 기독교 중심 인성교육의 실천 대학으로 우뚝서게 된 ‘오늘의 한동대’에는 김영길 총장의 피눈물나는 열정과 기도가 담겨있음을 나는 직접 체험했다. 나는 이 글을 쓰는 동안 본관 4층 교수 기도실에서 아침마다 기도를 드리고 하루 일과를 시작했던 김 총장이 모습을 회상해 본다. 오늘의 한동대학이 있게된 원동력은 누가 뭐라고해도 김 총장을 비롯해서 모든 교수와 교직원 그리고 학생과 학부형 등 4위일체로 서로 신뢰하며 하나님께 간구한 은혜라고 확신한다. 나는 2000년 3월 봄학기부터 한동대에서 11년간 가르치다가 2011년 은퇴하고 미국으로 돌아왔다. 1999년 가을 펜실베이니아 주립대에서 가르치고 있던 나는 김태평 목사(당시 벧엘교회 집사)의 소개로 김영길총장을 알게되었다. 그 때 한동대가 세워진지 4년 만이었다. 나는 한동대에 대한 설명을 김 목사로부터 듣고 내가 가르치고 싶었던 대학이 바로 한동대라고 결정, 그 후 김총장의 교수 초청을 기꺼히 받아들이고 2000년 봄학기부터 글로벌 리더십학부에서 가르치면서 총장 자문역을 맡아 김 총장의 대학운용을 도와주고 있었다. 그런데 학기가 시작한 지 2달 만에 대학에 위기가 닥쳤다. 학교에 빚만 잔득 지어놓고 떠난 전 이사진이 대학애 대해 법정소송을 한 것이다. 5월 11일 김영길 총장과 오성연 부총장이 각각 2년과 1년6개월을 선고받고 법정 구속되었다. 재판부가 지적한 업무상 횡령과 사립학교법 위반 등 6개에 이르는 죄목은 대부분 대학재정 관리 및 사용에 관한 것이다. 3개월간 주지 못한 교직원 급여를 국고금에서 전용해 쓴 것이 그 한 예이다. 내 자신도 한동대 교수로 부임한 이래 급여를 전혀 받지 못했다. 국고금을 전용은 했으나 개인 착복은 없었다는 사실이 재판결과에서 드러났다. 중앙언론들이 선처의 목소리를 높이는 기사와 칼럼들을 실었다. 나도 동아일보 ‘동아광장’ 란에 같은 맥락의 글을 썼다. 6개월 후 대법원은 무죄를 선고했다. 2002년 초 새이사진이 구성됐으며 온누리교회 하용조 목사님이 이사장으로 취임, 급한 재정문제를 해결했다. 그 후 대학은 재정적인 어려움을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지만 어려움을 당할 때마다 하나님께서 문제를 해결 할 수있는 길을 열어주셨다. 그 한 예가 국내외에 있는 교회들과 성도들이 ‘갈대상자’ 모금운동을 통해서 보여준 성원이다. 김영길 총장은 1995년 2월 한동대 초대 및 설립총장으로 취임, 2014년 1월까지 20년간 재직하면서 초기에는 “Why Not Change The World”라는 기치를 앞세우고 한동대가 세상을 변화시키는 대학으로 거듭나기를 강조했다가 후에 세상을 변화시키는 방법으로 “공부해서 남주자”라는 실천강령을 내세웠다. 정직성을 강조한 인성교육은 다른 대학에서 찾아보기 힘든 한동대만의 색깔이다. 인성교육은 신입생으로부터 시작하여 졸업 후 사회 생활에까지 연결된다. 한동대 출신의 취업률이 높은 이유가 여기에 있다. 나는 이 글을 쓰면서 방학때면 김영길 총장 내외분과 함께 미주 여러 교회를 다니면서 두 분의 간증집회와 모금운동을 도우면서 가졌던 많은 추억들을 되새겨본다. 허종욱 / 버지니아워싱턴대 교수, 사회학박사
2019.07.07. 10:50
와싱톤중앙장로교회 담임목사로 22년간(1977-2003) 시무하시다가 은퇴한 고 이원상 목사는 영국 신학교(Wales Evangelical School of Theology)에서 2006년 “목회자의 리더십: 요한 크리소스톰에 대한 참고를 포함한 한 사례연구”(Pastoral Leadership: A Case Study, Including Reference to John Chrysostom)라는 제목의 논문으로 철학박사학위를 받았으며 이 논문을 같은 제목으로 2015년 미국 한 출판사(Wipe& Stock)에 의해 출판했다. 나는 이 책을 저자로부터 받아 읽을 기회가 있었으며 미주중앙일보(2015년 5월 6일자)에 서평을 쓴 적이 있다. 이 책은 이목사가 23년간 와싱턴중앙장로교회 담임목사로 시무하면서 본인이 직접 체험한 목회경험을 토대로 목회자 리더십 원리에 관한 이야기를 교부 요한 트리소스톰의 경우를 참고로 해서 설명해 나가고 있다. 이 목사는 1977년 이 교회의 제3대목사로 부임한 이후 겪은 여러가지 교회가 안고있는 어려움들을 통해서 어떻게 목회자의 리더십 원리를 개발, 체험을 통해서 미주지역에서 가장 크게 성장한 교회의 하나로 키웠는가에 대해 자세히 설명해주고 있다. 이목사는 교회의 안정적인 성장에 가장 중요한 요소로 담임목사 리더십과 담임목사 교체 회수를 들고있다. 이 목사는 이 책에서 워싱턴메트로폴리탄지역에서 1951년부터 1977년사이에 설립된 14개 한인교회 가운데 담임목사 리더십이 견고하고 담임목사가 3번 이하 교체된 교회들이 성장하고 담임목사 리더십에 문제가 있으며 3번 이상 교체된 교회가 성장을 이루지 못한 예들( pp.24-25, pp.78-79)을 들었다. 이 목사는 견고한 리더십을 구축하기 위해 교인가정심방, 성경공부, 개인전도, 새벽기도, 그리고 제자훈련과정을 통해 토대로 하여 진행했다고 말하고 있다(p.39). 이목사는 22년간 전체적인 목회를 통해서 터득한 리더십 원리를 4가지로 분류하여 소개하고 있다. 첫째, 교인 돌봄(caring for People) (pp.65-74). 둘째, 목회자의 성품: 신실성과 영성(Pastor’s Character :Integrity and Spirituality)(pp.75-88), 셋째, 설교(Preaching)(pp.88-90), 넷째, 선교(Cross-cultural Missions)(pp.91-93). 이목사는 이 원리를 바탕으로 1978년 7월 16일 현재 성인교인 90명, 전체 교인 117명, 주일헌금 $472로 목회를 시작한 이 교회(p.38)를 22년 후인 2003년 10월 12일 은퇴 할 때 전체 교인 3923명(p.55)으로 성장시켰음을 밝히고 있다. 벧엘교회가 다음 달 6월이면 40주년을 맞는다. 그동안 담임목사가 6번 바뀌었다. 40년가운데 담임목사 부재가 14년, 그 가운데 11명의 임시당회장이 목회를 감당한 기간이 약 7년, 초대 김상복 목사 이후 6년 이상 시무로 안식년을 가진 목사는 4대 이순근목사 1명 뿐, 아무리 보아도 벧엘의 오늘이 있게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는 말이외에는 다른 표현이 없을것 같다. 이원상목사의 저서가 지적한 교회성장 요건에 벧엘교회는 아무리봐도 해당되지 않은 것 같은 생각이 든다. 초대 김상복 목사가 취임하고 발간된 1980년 1월 27일자 주보에 의하면 주일예배 참석교인은 성인 145명, 어린이를 포함한 전체교인이 226명, 헌금이 $1,574이었다. 그리고 그후 5명의 담임목사가 바뀌면서 40년간의 주일 예배참석인수와 헌금액의 경향이 여러 상하 곡선을 그리면서 바뀌는 현상을 목격 할 수 있다. 이순근 목사가 4대 담임목사로 1996년 5월 19일 취임하면서 그 곡선이 계속 상승하여 교회성장의 극점을 이루기도 했다. 특히 그의 시무 후반기인 2005-2007년 사이에 주일 예배 참석 인원이 평균 2100명에 달했으며 2006년 6월 25일 주일에는 역사상 가장 많은 2444명에 달했다. 이 통계는 주일예배참석 수가 극도에 달하는 부활절과 성탄절 주일을 제외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상승경향은 5대 진용태 목사가 5년간 시무하다가 2014년 5월 25일 사퇴 전후로 해서 급격히 내려갔다. 그가 취임했을 당시인 2009년 6월 7일 주일참석 전체교인이 2213명이 었는데 그가 교회를 사퇴 할 당시에는 1597명으로 줄었다. 600여명이 교회를 떠난 것이다. 이러한 경향은 이원상목사의 목회자 리더십 원리에 비추어 볼 때 우리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2015년 8월 2일 백신종 목사가 6대 담임목사로 취임하면서 곡선의 상승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취임 주일 예배 참석 교인수는 1544명이었다. 그 후 4년 동안 계속 상승의 경향을 보여주고 있으며 지난 4월 21일 부활주일 예배 참석수는 2010명을 기록했다. 그 전주인 4월 14일 주일예배 참석수는 1853년으로 이순근목사 목회 중반기에 보여준 숫자에 이르게 되었다. 이런 추세로 상승한다면 2000명선을 곧 도달할 것으로 전망된다. 아무리 부목사가 여러명 있고 조직이 잘 활성화 된다고 해도 한 담임목사가 원만하게 목회 할 수있는 한계점이 2000명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본다. 그렇다면 벧엘교회는 새로운 미래의 진로를 기도하며 모색할 때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허종욱 / 버지니아워싱턴대 교수, 사회학 박사
2019.05.05. 15:08
지난 주 몸이 좀 불편해서 내 칼럼이 나가지 못했다. 많은 분들이 문의를 해 주셔서 감사의 뜻을 표시한다. 나는 한국 한동대에서 2000년부터 시작한 11년간의 교수생할을 마치고 2011년 12월 ‘제2고향’ 미국 집으로 돌아와 벧엘교회에서의 신앙생활을 재개했다. 한동대 교수생활 가운데 잊지 못할 추억들이 많이 있다. 그 가운데 하나는 내가 주도해서 이루어진 ‘한동 독회’라는 교수들의 토론 모임이다. 매주 화요일 저녁 6시에 한 40명의 교수들이 교수 라운지에 모여 관심주제를 토론하는 장이다. 매주 돌아가면서 주제발표자를 정하고 발표자가 발표자료를 중심으로 약 30분간 주제 발표를 한 후 1시간동안 토론 한 후 나름대로 결론을 진다. 토론 주제는 주로 기독교 신앙을 어떻게 강의실에 연결시킬수있느냐는 내용이다. 이 모임은 미국 대학교수토론모임에서 흔히 볼수있는 ‘브라운 백’(Brown Bag) 모임처럼 각자가 자신의 저녁을 준비해 왔다. 나는 2012년 가을 ‘한동 독회’와 비슷한 모임인 ‘벧엘 독회’를 벧엘교회 은퇴장로들과 교인들 약 30명이 중심이 되어 엘리콧 시티에 있는 하워드 카운티 도서관에서 시작했다. 한달에 한번 정도 모였는데 시간이 흐르면서 외부교회 교인들도 참석하여 성황을 이루었다. 미주 한인교회내에서 목회자가 평신도를 가르치는 강의는 많으나 평신도들이 한 주제를 놓고 서로 토론할수있는 장이 없다는 환경이 좀 안타까웠다. 나는 모임을 시작하기 전에 와싱턴중앙장로교회 이원상목사에게 자문을 구했다. 이목사는 아주 고무적인 독려를 하면서 첫 주제토론이 될 책으로 영국에 유명한 신학자이며 목회자인 John Stott목사 저서 ‘The Contemporary Christian’(InterVasity Press, 1992)을 소개했다. 이 책은 1993년 4월 2일부터 2일간 벧엘교회 사경회 강사로 왔던 총신대총장 김의원목사(당시 교무처장)가 집회를 마치고 홍정웅장로와 나와 같이 이원상목사를 방문한 적이있는데 이때 이목사가 김목사에게 꼭 읽어보라고 간청하면서 건네준 당시 갖 출판된 신간이다. 우리는 이 책의 영어 원본을 중심으로 토론하기로 결정하고 첫 주제발표를 내가 맡기로 했다. 우리는 첫 토론을 위해 이 책의 Part IV The Church가운데12쪽(pp.270-291)으로 된 17장 The Church’s Pastor 부분을 각자가 읽어오기로 했다. 이 부분은 목회자의 제사장적인 모델과 목양자적인 모델로 나누어 목회자의 영적 디러십, 섬김의 자세, 교인들과의 관계, 영적인 준비, 겸손과 순종에 대해 묘사하고 있다. ‘벧엘 독회’가 시작할 무렵 진용태 목사가 2009년 6월 7일 취임하여 5대 담임목사로 시무하고 있었다. 진목사 시무 3년째인 2012부터 교회는 ‘모종의 사태’로 어려움속에 들어갔으며 교인들사이에 이 ‘모종의 사태’를 둘러사고 갈등이 빚어지기 시작했다. 우리는 벧엘교회의 어려움과 John Stott목사의 목회자관을 참고로 해서 열띤 토론을 버렸다. 이 토론을 통해 참석자들 대부분이 좋은 영적인 성찰력을 갖게 되었다는데 동감했으리라고 믿는다. 이 책이 주제로 삼고있는 14장 Secular Challenges to the Church, 15장 Evangelism through the Local Church, 그리고 16장 dimensions of Church Renewal 등을 연이어 토론하기도 했다. ‘벧엘 독회’는 1년여 동안 지속하면서 외부의 강사들을 초청했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웨스트민스터신학대학원에서 조직신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전정구목사의 ‘구원사역에서 언약과 하나님 왕국’ 이라는 주제로 발표한 강의는 성경에 대한 안목을 언약이라는 각도에서 보게 해 주었다. 전목사는 후에 이 주제를 기반으로 ‘Biblical Theology: Covenants and the Kingdom of God in Redemptive History’(Wipe & Stock, 2017)라는 책을 출판했다. 1996년 5월 19일부터 1998년 6월 14일까지 2년동안 벧엘교회 3대 담임을 맡았던 이호영목사를 ‘벧엘 독회’ 강사로 2014년 9월 두 째주에 초청했다. 나는 이 모임을 위해서 많은 옛날 벧엘식구들에게 연락을 했다. 120여명이 참석하여 자리가 모자랄 정도였다. 이날 이목사는 자신의 저서 ‘정통과 이단을 구별하는 기독론’(쿰란출판사, 2013)을 중심으로 ‘정통과 이단을 어떻게 구별하나?’라는 제목으로 강의를 했다. 이목사는 벧엘교회 시무 중 주일 오전 10시 성인성경공부시간에 ‘기독론’을 강의했다. 참석자들이 모두 인정하는 명강의였다. 허종욱 / 버지니아워싱턴대 교수, 사회학 박사
2019.04.01. 16:01
벧엘교회 6대 진용태담임목사는 2009년 4월 5일에 취임, 2014년 5월 25일 5년만에 사임해 ‘벧엘 5세대 문화’를 마무리했다. ‘벧엘 5세대 문화’는 여러가지 의미에서 필자를 포함해 벧엘교인들에게 많은 영적인 도전을 준 문화다. 그 도전이 주어질 당시에는 많은 벧엘 식구들이 고통을 인내하고 다윗왕처럼 묵묵히 또는 소리질러 기도 드렸다. 하나님께서는 벧엘 식구들의 절규를 외면하지 않으셨다. 세월이 지나 되돌아보면 이가운데 하나님의 벧엘을 향한 분명한 뜻이 있었음을 알수가 있다. 우리는 그 뜻을 완전히 알수는 없지만 한가지 확실한 것은 벧엘교회를 외면하지 않으시고 끝까지 사랑하셨다는 증거다. 필자는 “벧엘교회 40년을 되돌아보며”라는 제목의 칼럼을 지난 9월 14일주부터 매주 써 오고있다. 23주 그리고 반년의 세월이 흘렀다. 많은 외부의 사람들이 내 글에 대한 반응을 보여주었다. 그들은 목회자 교인 일반인들이다. 큰 관심을 보여준 벧엘 식구들도 적지 않았다. 어떤 분들은 격려의 말을 아끼지 않았다. 가끔 제안을 하는 분들도 있었다. 대부분의 제안들은 고무적이긴 하지만 이 칼럼의 글이 다름 아닌 내 자신이 몸담고 있는 교회라는 것을 감안해 볼 때 수용할 수 없음을 죄송스럽게 생각한다. 내 칼럼 첫 호에서 이 칼럼을 10여회 걸쳐 연제하겠다고 언급했지만 쓰다가 보니 너무 길어진 감이 있다. 이 칼럼에서는 벧엘을 거쳐간 임시당회장에 대해 좀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벧엘교회는 지난 40년간 6명의 담임목사를 맞이한 사이 9명의 임시당회장을 외부에서 영입했다. 내부에서 영입한 2명의 임시당회장까지 합하면 모두 11명의 임시당회장이다. 임시당회장은 당회장인 담임목사가 부재시에 당회장을 대행하는 기능을 갖지만 어느정도 제한적이다. 임시당회장이 부재시에는 규약 제 2장 제6조 2항 “당회장 유고시에는 서기가 회의를 관장한다”라는 규정에 따라 당회 서기가 당회 제직회 등 모든 공식 회의의 사회를 관장했다. 당회는 김상복목사의 사임 이후 부목사였던 손인식목사와 송영선목사를 연이어 임시당회장으로 임명했다. 송영선목사가 사임 한 후부터는 당회는 외부로부터 임시당회장을 영입했다. 임시당회장의 목회는 여러면에서 벧엘교회에 영향을 주었다고 생각한다. 특히 설교와 청빙과정을 통해서 그런 면이 있었다고 생각한다. 1993년 2월 4일 송영선목사가 사임하고 1주일만인 2월 28일, 당회는 한국에서 오랜 동안 선교사로 헌신했던 인도아목사(Dwight Linton)를 자문위원으로 영입해 첫 임시당회장의 역활을 감당하게 했다. 인목사는 당시 미장로교 교단 PCA에서 한국교회 조정역을 감당하고 있었다. 교회 리더십은 물론 많은 교인들이 인도아목사님으로부터 많은 영적인 도전을 받았다고 생각한다. 인목사님은 두달만에 사직하고 아틀란타 교단본부로 돌아갔으며 곧 이어 1993년 5월 23일 오덕교목사가 임시당회장직을 맡았다. 오목사는 당시 웨스트민스터신학대학원에서 신학박사과정을 마무리하고 있었다. 오목사는 3개월간 시무하면서 많은 교인들을 심방했다. 박사학위를 마친 오목사는 3개월만인 8월 15일 사임하고 한국 합신신학대학원 교수로 부임했다. 1995년 6월 11일 2대 김영진목사가 사임한지 1주일만인 6월 18일 당시 웨스트민스터신학대학원 한국목회학박사과정의 디렉터로 있는 이호영목사가 임시당회장으로 부임했으나 3개월만에 사임하고 1995년 10월 8일 이 지역에서 목회하다가 은퇴한 배기주목사가 부임했다. 그러나 배목사도 5개월만에 사임, 임시당회장이 공석중있던 1996년 5월 18일 벧엘교회는 이호영목사를 3대 담임목사로 청빙했다. 그러나 이호영목사는 부임 2년 만인 1998년 6월 14일 사임했으며 2000년 8월 20일 4대 이순근목사가 부임 할 때까지 2년 동안 임시당회장들이 목회를 감당했다. 서부에서 목회하다가 은퇴한 서재승목사를 1997년 2월 7일 임시당회장으로 영입했으나 한달만인 1999년 3월 9일 사임했다. 그리고 2개월만인 1999년 5월 16일 펜실바니아주립대 철학과 교수며 피츠버그한인교회 협동목사였던 박일철목사가 부임, 5개월간 시무하다 1999년 12월 26일 사임했다. 그리고 덴버한인교회에서 은퇴한 이희봉목사가 2000년 1월 9일 부임해 2000년 8월 20일 이순근목사가 취임 할 때 까지 8개월간 시무했다. 2007년 12월 23일 이순근목사가 사임한 후 2008년 6월 1일 예종학목사가 2개월간 시무하다가 두달만인 7월 31일 사임, 그동안 여러 차례 벧엘교회 자문역을 맡았던 와싱턴중앙장로교회 이원상담임목사가 2008년 2월 1일 임시당회장으로 부임해 2개월간 시무하다가 2000년 8월 1일 재부임해 진용태목사 청빙과정을 도왔다. 이원상목사는 진용태목사가 2014년 5월 25일 사임한 후에도 임시당회장을 다시 맡아 6대 백신종목사가 취임할 때까지 임시당회장으로 봉사했다. 이원상목사는 본교회 시무에 바쁜데도 불구하고 벧엘교회를 위해 많은 헌신을 아끼지 않았다. 우리 벧엘교회가 이목사에게 너무나 큰 빚을 지고있다. 필자는 개인적으로 이목사가 벧엘에 몸담고 있는 동안 목회자의 겸손이 무엇인가를 몸소 체험했다. 허종욱 / 버지니아워싱턴대 교수, 사회학 박사
2019.03.17. 13:26
1.5세 진용태 목사는 벧엘교회 5대 목사로 2009년 4월 5일 부임, 같은 해 6월 7일에 취임했다. 그리고 2014년 5월 25일 5년간 시무하고 벧엘교회를 떠났다. 모처럼 1.5세 담임목사를 마지한 벧엘 식구들은 벅찬 기대와 희망속에서 진목사를 마지했다. 그리고 그 기대와 희망은 교인 가운데서 넘쳐나기 시작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그 기대와 희망이 조금씩 사라져가는 분위기가 몇 몇 교인들사이에서 맴돌았다. 결국 ‘모종의 사태’가 은혜롭게 해결되지 못해 진 목사는 자리를 떴다. 이 ‘모종의 사태’로 교인들 사이에 일어난 여러가지 갈등, 어려움, 그리고 역경은 내 자신을 포함해서 많은 벧엘교인들에게 자신들의 신앙을 되돌아보는 계기를 하나님께서 주셨다고 생각한다. 이제 되돌아보면 이 계기를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 벧엘 식구들에게 주시는 분명한 메시지가 있었음을 알 수 있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해본다. 진 목사가 떠난 지 5년이 가까워 오고있다. 하나님께서는 미리 예비하신 백신종 목사를 6대 담임목사로 벧엘교회에 보내주셨다. 그리고 벧엘식구들은 지난 상처를 잊고 지난 3년 동안 백 목사를 중심으로 새로운 희망의 도전을 시작했다. 성령님께서 함께하시는 성역임이 분명하다. 나는 지난 25년간 매주 크리스찬 타임스에 칼럼을 창간때부터 써오고 있다. 이 주간지 지난 2017년 9월 19일자 내 칼럼을 다시 소개한다. 이 글은 지금은 하늘나라에 가 계신 아틀란타한인연합교회 담임 목사이며 이 주간지 이사장직을 맡고 있었던 정인수 목사의 <1.5세 목회자, 한인교회의 희망인가? 한계인가?>라는 제목의 2017년 9월 5일자 칼럼을 읽고 내 나름대로 느낀점을 <1.5세 담임목사의 성공조건>이라는 제목으로 쓴 것이다. “지난 주 정인수 목사님의 칼럼 ‘1.5세 목회자, 한인교회의 희망인가? 한계인가?’를 재미있게 읽었다. 이 칼럼은 1.5세 한인교회 목회자들이 겪고있는 어려움들과 그 해결점들을 1세 목회자의 입장에서 분석하고 제안하고 있다. 그리고 칼럼은 다음과 같이 글을 맺고 있다. “1.5세 목회자들을 격려하고 용기를 주도록 하자. 그들은 외로운 목회여정을 걸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아울러 그들이 한인교회의 희망이기 때문이다.” 1.5세 목회자는 한인교회의 희망이라는 정목사님 결론에 전적으로 동의하면서 1.5세 목회자를 담임목사로 5년여간 경험한 한 평신도의 입장에서 나름대로 의견을 피력해보고자 한다. 1.5세는 2세와 1세사이의 세대를 의미한다. 미국문화와 한국문화의 교량 역할을 하는 세대다. 1.5세를 정확하게 정의하기는 쉽지 않지만 사회학적인 개념으로 보면 15세 이하 즉 중학교 2년 전에 미국에 이민 온 세대로 한국말을 구사하는데는 별로 어려움이 없다. 하지만, 한국문화를 충분히 소화하기 전에 미국에 왔으며, 미국문화와 생활관습을 소화하는데는 2세에 미치지 못하나 1세보다는 월등하다. 따라서 한인교회에서 1.5세 목회자가 가지고 있는 장점은 한국문화와 미국문화를 동시에 이해하며 미국문화에 서툰 1세 한어권에게 미국문화를, 한국문화에 서툰 2세 영어권에게 한국문화를 소개하며, 이들 사이의 연결고리를 맺는 것이다. 그러므로 1.5세 목회자의 가장 큰 장점은 1세 목회자가 하기 어려운 미국적인 상황속에서의 1세 목회와, 2세 목회와 1세 목회를 동시에 할 수 있는 점이라고 생각한다. 다시 말하면 1.5 목회자는 1세가 가지고 있는 단점 즉 영어 해득과 미국문화 이해의 단점을, 2세가 가지고 있는 한국어 해득과 한국문화 이해의 단점을 보충 할 수 있는 장점들을 말한다. 즉 1.5세는 2중문화를 동시에 소화할 수 있는 능력이다. 많은 1.5세 목회자들이 1세교회 목회에서 성공을 거두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는 이 2중문화를 1세 교인들에게 맞게 조정하지 못하는 이유에서 온다고 본다. 또 1.5세 목사는 1세 한인교인들이 미국 주류사회와 접촉하는데 가교역할을 한다. 대부분의 한인교회들은 미국 주류사회와 거리를 두고 있다. 예를 들면 교회 주위 이웃들 및 교회들과의 관계, 미국 교회와 연합한 커뮤니티를 위한 선교 및 봉사활동, 지방자치단체들과의 관계 등이다. 1.5세 목사가 2중문화를 충분히 소화하기 위해서는 1세 목회를 시작하기 전에 충분한 준비를 갖추어야 한다. 적어도 한국에 가서 2년 정도 한국교회에 머물면서 한국교회의 특수성을 배우고 더 나가서 언어와 한국문화를 몸서 익혀야 한다고 본다. 그 후 미국 교회현장에 와서 한인교회를 목회하면 목회자와 교인사이에, 특히 목회자와 당회사이에 일어나는 문화충돌을 피할 수 있다고 본다. 한 예를 들면 인간관계에 있어서 한국문화는 체면과 관계성이 중요한 반면, 미국문화는 실용성과 솔직성이 중요하다는 점이다. 1.5세 목회자가 미국의 한국문화와 한국의 한국문화는 다른 점들이 많다는 사실을 이해해야 한다. 1세 교인들은 한국의 한국문화쪽에 훨씬 익숙해 있다. 정 목사님이 지적하신 것처럼 1세 교회 교인들은 1.5세 목회자가 겪는 아픔을 이해하고 참아야 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다. 특히 당회원과 같은 교회 리더십에 있는 분들이 그렇다. 1.5세 목회자가 이중문화를 잘 조화해서 이해하고 그 가운데서 영적 리더십을 나름대로 형성해 나가는데는 어느 정도 긴 세월이 요구된다. 1세 교인들은 1.5세 목회자를 늘 격려하고 부족한 점들을 채워주어야 한다. 내가 섬겼던 교회는 지난 30여년 동안 네 분의 1세 담임목사를 모셨다가 5대 째에 1.5세 목회자를 모셨는데 교인들과 교회 리더십들은 1세 목회자들에게서 보아왔던 그런 리더십을 기대함으로 인해 교회가 어려움을 겪게 되지 않았나 하는 생각도 해본다. 결론적으로 1.5세 목회자가 1세 목회를 시작하기 전에 어느 정도의 준비를 갖추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그리고 1.5세 목회의 성공여부는 목회자와 교인들이 함께 책임을 감당할 때 가능하다” 허종욱 / 버지니아워싱턴대 교수, 사회학 박사
2019.03.10. 13:3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