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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산책] 일인칭 대명사에 대한 명상

오래전에 읽은 책을 다시 꺼내 읽는다. 전에 읽었을 때와 달리 울림이 새롭고 크다. 그런 책은 몇 번이고 다시 읽게 되는데, 읽을 때마다 새롭다.   헬렌 니어링이 쓴 ‘아름다운 삶, 사랑 그리고 마무리’도 그런 책 중의 하나다. 나이 탓인지 옛날 팔팔하던 시절과는 아주 다른 묵직하고 진한 느낌이 든다. 아마 ‘인간다운 죽음’에 대한 진지한 성찰이 많은 책이라서 그런 모양이다.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 인상적인 내용이 많다. 문득문득 생각나곤 하는 장면 중의 하나가 일인칭 대명사, 즉 ‘나’에 대한 것이다.   헬렌이 버몬트주에 살 때, 어느 날 여러 친구들과 점심식사를 하면서 대화를 나누는데, 끊임없이 나오는 일인칭 대명사가 거슬려서, 이런 제안을 한다.   “하루 종일, 아니면 한 시간, 아니 지금 같은 식사 시간만이라도 ‘나’라는 말을 하지 않고 지낼 수 있을까요?”   모인 사람들은 재미있는 실험이 될 거라고 동의했다. 하지만, 그 시도는 성공하지 못했다. 헬렌은 이렇게 말한다.   “나는 우리가 나날의 대화에서 얼마나 자기 중심으로 되어 있는지, 우리 삶 속에 얼마나 많은 ‘나’가 있는지 배우는 기회가 되었을 것이라 믿는다. 여러분 스스로도 대화 속에서 일인칭을 빼고 말할 수 있는지, 또 얼마나 오랫동안 그렇게 할 수 있는지 실험해볼 것을 권한다. 여러분은 벙어리처럼 될 것이다. 그렇게 되게 마련이다.”   언제 어디서나 ‘나’를 내세우고, 나만 옳다고 우겨대는 사람들 때문에 시끄럽기 짝이 없는 세상을 생각하면, 이 제안의 울림은 매우 크다. 돌아보면, 오늘날 사회 각 분야에서 저마다 자기 주장만 하고, 남을 배려하지 않기 때문에 세상이 어지러운 것이 아닌가? 겸손, 경청, 배려, 양보, 숙이기, 져주기, 양심, 부끄러움… 그런 지극히 당연한 낱말들이 사라져버린 세상.   나는 어떨까? ‘나’라는 낱말을 쓰지 않고 대화를 제대로 이어갈 수 있을까? 상대방의 주장을 거부감없이 받아들이고 나를 꺾을 수 있을까? 그럴 자신 없다. 그렇게 살아오지 못했다. 대화를 잘하는 방법을 단 한 번도 배워본 적도 없고, 토론이 없는 세상에서 살아남아야 하기 때문에 나를 포기할 수 없다.   영어에서는 주어가 중요하다. 주어가 없는 문장은 없을 정도다. 특히, ‘나’라는 낱말 ‘I’는 언제나 대문자로 쓰는 특별대우를 받는다. 이에 비해 우리말은 주어가 없거나 있어도 희미하다. ‘나’라는 주어는 더욱 그렇다. 없어도 별로 어색하지 않다. 주어를 또박또박 명확하게 쓴 글은 번역투 문장이 되기 쉽다.   우리 말은 참 재미있다. ‘나’라는 글자에서 밖으로 나와있는 점을 슬쩍 안으로 밀어넣으면 ‘너’가 된다. 그러니까, 너와 나의 차이는 점의 방향이라는 아주 작은 차이밖에 없다는 말이다. 그 작은 차이 때문에 죽을 듯이 싸우는 것이 현실이다. 타인을 배려하는 따뜻한 사람 되기가 그렇게 어렵다는 이야기….   헬렌은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개체로서의 자의식이다. 우리는 과연 자기중심(self-centered)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우리의 세계에서 어떻게 이 자기 중심주의를 뿌리 뽑을 수 있을까?”라고 묻는다. 달리 말하면, 내 중심에서 벗어날 수 있다면, 좀 더 너그럽고 따뜻해질 수 있다는 이야기다.   “45년의 연구와 공부 뒤에 얻은 다소 당혹스러운 결론으로, 내가 사람들에게 줄 수 있는 최상의 조언은 서로에게 조금 더 친절하라는 것이다.”     작가 올더스 헉슬리의 말이다. 조금이라도 좋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는 자기를 낮추는 훈련이 필요하다. 그런데, 자기 자신을 참으로 존중할 줄 알아야 낮출 수도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일인칭 대명사에 대해서 곰곰 생각하게 된다.  장소현 / 시인·극작가문화산책 일인칭 대명사 일인칭 대명사 헬렌 니어링 양심 부끄러움

2025.09.04. 1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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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산책] 아름다운 마무리를 꿈꾸며

카터 전 대통령이 병원의 연명 치료를 중단하고, 남은 시간을 집에서 가족과 함께 보내면서 호스피스 보살핌을 받기로 했다는 뉴스를 읽고, 여러 생각이 오갔다.   98세이니 천수를 누린 셈이고, 세계에서 가장 높은 벼슬자리에 올랐고, 활발한 사회활동을 하며 말년을 보람차게 보냈고, 노벨평화상 수상의 영예까지 누렸고, 두루 존경받는 성공적 삶을 살았으니 큰 여한이야 없겠지만, 그래도 죽음은 피할 수 있다면 피하고 싶은 것이 인지상정이다.   생물학적으로 보면 죽음은 삶의 끝이다. 사람은 누구나 죽는다. 젊은이는 늙고, 늙은이는 죽는다. 피할 수 없다. 그래서 무섭다.   그 마지막 순간을 인간의 존엄을 유지하면서 사랑 안에서 평화롭게 맞이하고 싶다는 소망은 많은 울림을 준다.    ‘좋은 죽음’이라는 말이 성립되는지는 모르겠지만, 실제로 품위 있게 죽음을 맞이하려는 움직임이 확산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호스피스 돌봄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는 것도 그런 현상일 것이다.   카터 전 대통령의 선택은 스콧 니어링이나 지난해 2월26일 세상 떠난 이어령 선생처럼 스스로 택한 방식으로 죽음을 맞은 이들을 연상시킨다. 잘 알려진 대로, 이어령 선생은 맑은 정신으로 글을 쓰고 싶어서 병원 치료를 거부하고 집에서 마지막 순간까지 책을 쓰고, 강연하고, 삶과 죽음에 대한 생각을 인터뷰를 통해 전했다. 몸이 너무 아파서 컴퓨터조차 다룰 수 없을 때는 육필로 글을 썼다. 그런 육필원고를 모은 것이 ‘눈물 한 방울’이라는 책이다. 그 책을 읽노라면 가슴이 먹먹해지면서 눈물이 난다.   스콧 니어링은 자신의 자유의지에 따라 능동적이면서도 평화롭게 세상과 작별하는 아름다운 작별을 꿈꾸었다. 죽음을 피하지 않으면서, 의식이 또렷한 상태에서 삶과 죽음의 조화로운 경계를 맞이하고 싶어 했다. 병원이 아닌 집에서 죽기를 원했고, 어떤 의사나 약물의 도움도 받지 않았고, 어떤 진정제나 진통제, 마취제도 거부했다. 스스로 기꺼이 자연스럽게 목숨을 버리는 평화로운 작별을 꿈꾸었다. 스콧 니어링은 100세가 되던 1983년 서서히 곡기를 끊음으로써 천천히 평화롭게 세상과 작별했다. 그렇게 꿈을 이루었다.   그는 이렇게 부탁했다. 자신이 죽으면 수의가 아닌 평소의 작업복을 입혀 침낭에 넣어 빠르고 조용하게 화장해달라고, 어떤 장례식도 원치 않는다고, 오직 영혼만을 바라보는 땅의 나무 아래 자신의 재를 뿌려주기만 하면 된다고….   스콧 니어링이 한 달간 단식하며 죽음을 맞이하는 마지막 순간은 부인 헬렌 니어링이 쓴 ‘아름다운 삶, 사랑, 그리고 마무리’에 사실적으로 자세히 묘사되어 있다. 헬렌은 남편의 죽음이 얼마나 아름답고 자연스러웠는지를 이야기한다. 곁에서 함께하며 남편의 의연한 죽음을 완성으로 승화시킨 것이다.   카터 전 대통령 기사 덕에 스콧과 헬렌 니어링 부부의 책들을 꺼내서 다시 읽는 기쁨을 누렸다. 조화로운 삶과 아름다운 마무리를 진지하게 음미하는 것은 벅찬 기쁨이다. 내 누추한 삶의 모습을 되돌아 살피며 옷깃을 여미고, 부디 나의 마지막이 추하지 않기를 기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잘 죽고 싶거든 잘 살아야 한다는 평범한 진리를 생각하며,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말씀을 가슴에 새긴다. “잘 보낸 하루가 행복한 잠을 가져오는 것처럼, 잘 살아낸 인생은 행복한 죽음을 가져온다.” 장소현 / 시인·극작가문화산책 마무리 스콧 니어링 헬렌 니어링 병원 치료

2023.03.06. 21:13

[문화산책] 아름다운 마무리를 꿈꾸며

카터 전 대통령이 병원의 연명 치료를 중단하고, 남은 시간을 집에서 가족과 함께 보내면서 호스피스 보살핌을 받기로 했다는 뉴스를 읽고, 여러 생각이 오갔다.   98세이니 천수를 누린 셈이고, 세계에서 가장 높은 벼슬자리에 올랐고, 활발한 사회활동을 하며 말년을 보람차게 보냈고, 노벨평화상 수상의 영예까지 누렸고, 두루 존경받는 성공적 삶을 살았으니 큰 여한이야 없겠지만, 그래도 죽음은 피할 수 있다면 피하고 싶은 것이 인지상정이다.   물론, 종교에서 말하는 죽음은 깊고 넓은 차원이다. 가령 죽음을 끝이 아니라 또 하나의 새로운 시작으로 믿고, 사후세계의 평안을 기도하며 기쁨으로 찬양한다. 하지만, 생물학적으로 보면 죽음은 삶의 끝이다. 사람은 누구나 죽는다. 젊은이는 늙고, 늙은이는 죽는다. 피할 수 없다. 그래서 무섭다.   그 마지막 순간을 인간의 존엄을 유지하면서 사랑 안에서 평화롭게 맞이하고 싶다는 소망은 많은 울림을 준다. 과학의 힘에 매달려 간신히 목숨을 부지하기보다는 사람답게 당당하게 마지막을 맞이하고 싶다는 꿈….   ‘좋은 죽음’이라는 말이 성립되는지는 모르겠지만, 실제로 품위 있게 죽음을 맞이하려는 움직임이 확산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호스피스 돌봄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는 것도 그런 현상일 것이다.   카터 전 대통령의 선택은 스콧 니어링이나 지난해 2월26일 세상 떠난 이어령 선생처럼 스스로 택한 방식으로 죽음을 맞은 이들을 연상시킨다. 잘 알려진 대로, 이어령 선생은 맑은 정신으로 글을 쓰고 싶어서 병원 치료를 거부하고 집에서 마지막 순간까지 책을 쓰고, 강연하고, 삶과 죽음에 대한 생각을 인터뷰를 통해 전했다. 몸이 너무 아파서 컴퓨터조차 다룰 수 없을 때는 육필로 글을 썼다. 그런 육필원고를 모은 것이 ‘눈물 한 방울’이라는 책이다. 그 책을 읽노라면 가슴이 먹먹해지면서 눈물이 난다.   스콧 니어링은 자신의 자유의지에 따라 능동적이면서도 평화롭게 세상과 작별하는 아름다운 작별을 꿈꾸었다. 죽음을 피하지 않으면서, 의식이 또렷한 상태에서 삶과 죽음의 조화로운 경계를 맞이하고 싶어 했다. 병원이 아닌 집에서 죽기를 원했고, 어떤 의사나 약물의 도움도 받지 않았고, 어떤 진정제나 진통제, 마취제도 거부했다. 스스로 기꺼이 자연스럽게 목숨을 버리는 평화로운 작별을 꿈꾸었다. 스콧 니어링은 100세가 되던 1983년 서서히 곡기를 끊음으로써 천천히 평화롭게 세상과 작별했다. 그렇게 꿈을 이루었다.   그는 이렇게 부탁했다. 자신이 죽으면 수의가 아닌 평소의 작업복을 입혀 침낭에 넣어 빠르고 조용하게 화장해달라고, 어떤 장례식도 원치 않는다고, 오직 영혼만을 바라보는 땅의 나무 아래 자신의 재를 뿌려주기만 하면 된다고….   스콧 니어링이 한 달간 단식하며 죽음을 맞이하는 마지막 순간은 부인 헬렌 니어링이 쓴 ‘아름다운 삶, 사랑, 그리고 마무리’에 사실적으로 자세히 묘사되어 있다. 헬렌은 남편의 죽음이 얼마나 아름답고 자연스러웠는지를 이야기한다. 곁에서 함께하며 남편의 의연한 죽음을 완성으로 승화시킨 것이다.   카터 전 대통령 기사 덕에 스콧과 헬렌 니어링 부부의 책들을 꺼내서 다시 읽는 기쁨을 누렸다. 조화로운 삶과 아름다운 마무리를 진지하게 음미하는 것은 벅찬 기쁨이다. 내 누추한 삶의 모습을 되돌아 살피며 옷깃을 여미고, 부디 나의 마지막이 추하지 않기를 기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잘 죽고 싶거든 잘 살아야 한다는 평범한 진리를 생각하며,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말씀을 가슴에 새긴다. “잘 보낸 하루가 행복한 잠을 가져오는 것처럼, 잘 살아낸 인생은 행복한 죽음을 가져온다.” 장소현 / 시인·극작가문화산책 마무리 스콧 니어링 헬렌 니어링 병원 치료

2023.03.02. 19: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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