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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산책] 일인칭 대명사에 대한 명상

Los Angeles

2025.09.04 1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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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소현 시인, 극작가

장소현 시인, 극작가

오래전에 읽은 책을 다시 꺼내 읽는다. 전에 읽었을 때와 달리 울림이 새롭고 크다. 그런 책은 몇 번이고 다시 읽게 되는데, 읽을 때마다 새롭다.
 
헬렌 니어링이 쓴 ‘아름다운 삶, 사랑 그리고 마무리’도 그런 책 중의 하나다. 나이 탓인지 옛날 팔팔하던 시절과는 아주 다른 묵직하고 진한 느낌이 든다. 아마 ‘인간다운 죽음’에 대한 진지한 성찰이 많은 책이라서 그런 모양이다.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 인상적인 내용이 많다. 문득문득 생각나곤 하는 장면 중의 하나가 일인칭 대명사, 즉 ‘나’에 대한 것이다.
 
헬렌이 버몬트주에 살 때, 어느 날 여러 친구들과 점심식사를 하면서 대화를 나누는데, 끊임없이 나오는 일인칭 대명사가 거슬려서, 이런 제안을 한다.
 
“하루 종일, 아니면 한 시간, 아니 지금 같은 식사 시간만이라도 ‘나’라는 말을 하지 않고 지낼 수 있을까요?”
 
모인 사람들은 재미있는 실험이 될 거라고 동의했다. 하지만, 그 시도는 성공하지 못했다. 헬렌은 이렇게 말한다.
 
“나는 우리가 나날의 대화에서 얼마나 자기 중심으로 되어 있는지, 우리 삶 속에 얼마나 많은 ‘나’가 있는지 배우는 기회가 되었을 것이라 믿는다. 여러분 스스로도 대화 속에서 일인칭을 빼고 말할 수 있는지, 또 얼마나 오랫동안 그렇게 할 수 있는지 실험해볼 것을 권한다. 여러분은 벙어리처럼 될 것이다. 그렇게 되게 마련이다.”
 
언제 어디서나 ‘나’를 내세우고, 나만 옳다고 우겨대는 사람들 때문에 시끄럽기 짝이 없는 세상을 생각하면, 이 제안의 울림은 매우 크다. 돌아보면, 오늘날 사회 각 분야에서 저마다 자기 주장만 하고, 남을 배려하지 않기 때문에 세상이 어지러운 것이 아닌가? 겸손, 경청, 배려, 양보, 숙이기, 져주기, 양심, 부끄러움… 그런 지극히 당연한 낱말들이 사라져버린 세상.
 
나는 어떨까? ‘나’라는 낱말을 쓰지 않고 대화를 제대로 이어갈 수 있을까? 상대방의 주장을 거부감없이 받아들이고 나를 꺾을 수 있을까? 그럴 자신 없다. 그렇게 살아오지 못했다. 대화를 잘하는 방법을 단 한 번도 배워본 적도 없고, 토론이 없는 세상에서 살아남아야 하기 때문에 나를 포기할 수 없다.
 
영어에서는 주어가 중요하다. 주어가 없는 문장은 없을 정도다. 특히, ‘나’라는 낱말 ‘I’는 언제나 대문자로 쓰는 특별대우를 받는다. 이에 비해 우리말은 주어가 없거나 있어도 희미하다. ‘나’라는 주어는 더욱 그렇다. 없어도 별로 어색하지 않다. 주어를 또박또박 명확하게 쓴 글은 번역투 문장이 되기 쉽다.
 
우리 말은 참 재미있다. ‘나’라는 글자에서 밖으로 나와있는 점을 슬쩍 안으로 밀어넣으면 ‘너’가 된다. 그러니까, 너와 나의 차이는 점의 방향이라는 아주 작은 차이밖에 없다는 말이다. 그 작은 차이 때문에 죽을 듯이 싸우는 것이 현실이다. 타인을 배려하는 따뜻한 사람 되기가 그렇게 어렵다는 이야기….
 
헬렌은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개체로서의 자의식이다. 우리는 과연 자기중심(self-centered)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우리의 세계에서 어떻게 이 자기 중심주의를 뿌리 뽑을 수 있을까?”라고 묻는다. 달리 말하면, 내 중심에서 벗어날 수 있다면, 좀 더 너그럽고 따뜻해질 수 있다는 이야기다.
 
“45년의 연구와 공부 뒤에 얻은 다소 당혹스러운 결론으로, 내가 사람들에게 줄 수 있는 최상의 조언은 서로에게 조금 더 친절하라는 것이다.”  
 
작가 올더스 헉슬리의 말이다. 조금이라도 좋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는 자기를 낮추는 훈련이 필요하다. 그런데, 자기 자신을 참으로 존중할 줄 알아야 낮출 수도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일인칭 대명사에 대해서 곰곰 생각하게 된다. 

장소현 / 시인·극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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