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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아침에] 꿈꾸던 시간, 돌아갈 수 없는 날들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아니 흔들려 꽃 좋고 열매 많노니’. 용비어천가 2장 첫 구절은 평생토록 나를 지탱해준 가슴에 새긴 서약(Pledge)이다.     뿌리는 살아있는 생명이다. 고향을 떠나면서 어떤 고난에도 굴복하지 않고, 세계 어느 곳이든 지축 깊이 뿌리내리기로 다짐했다. 목숨 걸면 불모지에서도 꽃은 피고 튼실한 열매를 맺는다.  ‘샘이 깊은 물은 가뭄에 끊어지지 않으므로, 내가 되어 바다로 흐른다’. 2장 다음 구절이다.     가뭄으로 마을이 힘들어도 우리 집 우물은 마르지 않았다. 깊고 맑은 우리 집 우물은 부엌 안에 있었다. 우물이 부엌 안에 있게 된 사연은 두 살 때 세상을 떠난 아버지와 관계가 있다.       국토의 90%를 북한군에게 빼앗긴 국군과 유엔군은 최후의 결전을 벌였지만, 낙동강 방어선은 무너졌다. 6·25 전쟁은 꿈과 희망, 살아있는 것들의 생명을 앗아갔다. 공들여 지은 새집은 북한군이 퇴각하며 불태웠다. 아버지는 우는 어머니 등 쓰다듬으며 “새집을 꼭 지어주마” 약속했지만 이를 지키지 못하고 2년 후 세상을 떠났다.       새집 터를 남겨 두고, 아버지가 임시 거처할 곳을 마련하면서 담장 옆에 있던 우물이 부엌 안쪽으로 들어오게 된 것이다. 도시로 이사 가기 전까지 임시로 지은 집에서 살았다. 대들보와 서까래가 까맣게 탄 흔적에 대해 알지 못했다. 어머니 소복에 감겨 날아드는 찔레꽃은 불에 그을린 처마에 매달려서 장 미쉘 바스키아의 그림처럼 기괴했다.   눈에 보이는 차별보다 보이지 않는 차별이 더 무섭다. 구멍이 없으면 뚫고라도 들어가야 승부를 가린다. 아무것도 안 하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현대미술 화랑을 경영하며 창작예술센터를 설립해 기희미술학교를 운영했다. 리틀 피카소(유년반), 영 다빈치(중고등학생), 미켈란젤로 (성인반), 조각과 동양화 수업을 병행했다. 미국 이름으로 바꾸지 않았다. ‘키키’, ‘키위’ 제 멋대로 내 이름을 불렀다. 학생들은 공손하게 “미스 기희”라고 했다. 뿌리 없는 나무는 언젠가 쓰러져 죽게 된다.   다운증후군으로 태어난 리사를 위해 예술교육학을 공부했다. 리사는 그림 그리는 것을 좋아해서 화랑 조수로 일하는 걸 자랑스럽게 생각했다.     세상의 모든 자식은 천재다. “우리 애는 유명해질 거 같아요”라고 하면 똑같은 대답을 해 준다. “훌륭한 화가로 되도록 가르칠 수 있지만, 유명한 화가로 만들지는 못합니다.”     평생 미술과 예술사업에 올인 했지만 어떻게 유명해지는지 모른다. 35년 동안 미 중서부에서 수많은 화가 전시회를 했지만 역사에 남을 위대한 화가를 찾지 못했다.     색깔은 차별의 벽을 두텁게 한다. 아시안 여성이 현대미술화랑을 운영하는데 부정적이다. “이런 비싼 작품 팔 수 있니?” 딜러가 묻는다. 은근히 깔보는 거다. “안 팔리면 우리 집에 걸지.” 적은 돈은 큰돈에 뭉개진다. 유명 딜러들이 전시 스케줄 잡으려고 줄을 섰다.   이빨 없으면 잇몸으로 물고 늘어지고, 재주 잘 부리는 곰이 돈도 잘 번다.     예술은 목마른 사랑처럼 한 번 빠져들면 헤어나기 힘들다. 파멸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글쟁이나 소문난 환쟁이의 길을 접고 인생의 방향을 바꾼 것은, 예술은 돈과 명예, 목숨까지 무참하게 파괴할 수 있다는 두려움 때문이다.     돌아갈 수 없는 날들 속에, 남아있는 것들의 깨알 같은 흔적을 적는다. 이 기 희 Q7 Editions 대표이 아침에 시간 화가 전시회 부엌 안쪽 현대미술 화랑

2026.04.22. 2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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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희의 같은 하늘 다른 세상- 꿈꾸던 시간, 돌아갈 수 없는 날들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아니 흔들려 꽃 좋고 열매 많노니.’ 용비어천가 2장 첫 구절은 평생토록 나를 지탱해준 가슴에 새긴 서약(Pledge)이다.     뿌리는 살아있는 생명이다. 고향을 떠나면서 어떤 고난에도 굴복하지 않고, 세계 어느 곳이든 지축 깊이 뿌리내리기로 다짐했다. 목숨 걸면 불모지에서도 꽃은 피고 튼실한 열매를 맺는다.    ‘샘이 깊은 물은 가뭄에 끊어지지 않으므로, 내가 되어 바다로 흐른다.’ 2장 다음 구절이다. 가뭄으로 마을이 힘들어도 우리집 우물은 마르지 않았다. 옥이 언니가 머리를 들이밀고 ‘아’ 소리지르면 메아리가 들려왔다. 우물에 빠질까봐 언니 치마를 붙잡았다.     깊고 맑은 우리집 우물은 부엌안에 있었다. 얼음처럼 차가워서 짚을 꼬아 만든 새끼줄로 수박을 매달아 놓으면 냉장고에 넣은 것보다 차갑고 상큼했다.     우물이 부엌 안에 있게 된 사연을 알게 된 것은, 두 살 때 세상을 떠난 아버지의 유언을 듣는 것처럼 파랑새가 슬픈 날개를 푸드득거리며 날아간다.     국토의 90%를 북한군에게 빼앗긴 국군과 유엔군은 최후의 결전을 벌였지만 낙동강 방어선은 무너졌다. 6.25 전쟁은 꿈과 희망, 살아있는 것들의 생명을 앗아갔다.     공 들여 지은 새 집은 인민군이 퇴각하며 불태웠다. 우는 아내 등 쓰다듬으며 “새 집을 꼭 지어주마” 약속했다. 아버지는 약속을 지키지 못하고 2년 후 세상을 떠난다.     새집 터를 남겨 두고, 아버지가 임시 거처할 곳을 마련하면서 담장 옆에 있던 우물이 부엌 안 쪽으로 들어오게 된다. 도시로 이사 가기 전까지 임시로 지은 집에서 살았다.   대들보와 서까래가 까맣게 탄 흔적에 대해 알지 못했다. 어머니 소복에 감겨 날아드는 찔레꽃은 불에 그을린 처마에 매달려서 장미쉘바스키아의 그림처럼 기괴했다.     눈에 보이는 차별보다 보이지 않는 차별이 더 무섭다. 구멍이 없으면 뚫고라도 들어가야 승부를 가린다. 아무것도 안 하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현대미술 화랑을 경영하며 창작예술센터를 설립해 기희미술학교를 운영했다. 리틀 피카소(유년반), 영 다빈치(중고등학생), 미켈란젤로(성인반), 조각과 동양화 수업을 병행했다. 미국 이름으로 바꾸지 않았다. ‘키키, 키위” 제 멋대로 내 이름을 불렀다. 학생들은 공손하게 “미쓰 기희’라고 했다.     뿌리 없는 나무는 언젠가 쓰러져 죽게 된다.    다운증후군으로 태어난 리사를 위해 예술교육학을 공부했다. 리사는 그림 그리기는 것을 좋아해서 화랑 조수로 일하는 걸 자랑스럽게 생각했다.     세상의 모든 자식은 천재다. “우리 애는 유명해질 거 같아요”라고 하면 똑 같은 대답을 한다. “훌륭한 화가가 되도록 가르칠 수 있지만, 유명한 화가로 만들지는 못합니다.”     평생 미술과 예술 사업에 올인 했지만 어떻게 유명해지는지 모른다. 35년 동안 미 중서부에서 수많은 화가들 전시회를 했지만 역사에 남을 위대한 화가를 찾지 못했다.   색깔은 차별의 벽을 두텁게 한다. 동양여성이 현대미술화랑을 운영하는데 부정적이다.     “이런 비싼 작품 팔 수 있니.” 딜러가 묻는다. 은근히 깔보는 거다. “안 팔리면 우리집에 걸지.” 작은 돈은 큰 돈에 뭉개진다. 유명 딜러들이 전시 스케쥴 잡으려고 줄을 섰다.   이 없으면 잇몸으로 물고 늘어지고, 재주 잘 부리는 곰이 돈도 잘 번다.   예술은 목마른 사랑처럼 한 번 빠져들면 헤어나기 힘들다. 파멸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글쟁이나 소문난 환쟁이의 길을 접고 인생의 방향을 바꾼 것은, 예술은 돈과 명예, 목숨까지 무참하게 파괴할 수 있다는 두려움 때문이다.   돌아갈 수 없는 날들 속에, 남아있는 것들의 깨알 같은 흔적을 적는다. (Q7 editions 대표, 작가)       이기희이기희 하늘 우리집 우물 화가들 전시회 현대미술 화랑

2026.04.21. 13: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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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아침에] ‘가난한 부자’로 살아가기

공들인 만큼 소출이 생긴다. 세상에 헛수고는 없다. 몇 알의 씨앗이 이토록 많은 수확의 기쁨을 주다니. 이른 아침 송송 돋아난 새파란 잎사귀들을 자식 얼굴 쓰다듬듯 어루만진다. 초여름 폭염에 어깨가 축처진 채소에 물을 준다. 금세 파릇파릇 살아난다.   새집 지어 이사오며 텃밭을 일구려고 단단히 맘 먹었다. 30년을 넘게 산 옛 집은 나무가 무성하게 자라 하늘을 가린 탓에 채소가 잘 자라지 못했다. 봄이며 땅을 갈아 엎고 퇴비로 땅을 비옥하게 다듬어도 소득이 없었다. 농사는 좋은 땅과 햇볕, 무시로 쏟아지는 비의 3박자가 맞아야 한다.   이사 와서 제일 먼저 동남쪽으로 향하는 곳에 작은 채소밭을 만들었다. 하늘을 가릴 나무가 없어 좋았다. 사람이건 풀잎이건 햇볕을 받아야 생명을 키운다.     막힌 데 없이 넓고 황량하게 빈 뒷마당을 무심히 바라본다. 비어있다는 것은 채울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제는 꽉 채우며 살지 않으리라 다짐한다. 뜰이건 마음이건 비어있으면 바람도 지나가고 잎새 소리도 들을 수 있다.     휘둘리며 모방하고 훙내 내며 살지 않아도 된다. 유배지에서 귀양살이 하듯 단조롭게 살면 세상 모든 근심 내려놓고 살 수 있다. 머리 꼿꼿이 쳐들고 잘난 척 할 일 없고 무릎 꿇고 사죄할 후회도 없을 것이다.     부자지만 가난했다. 현대미술 화랑을 운영하며 대작을 팔면 오늘은 부자였는데 내일은 그 돈이 썰물처럼 빠져 나갔다. 가난한 사람은 20달러가 부족하지만 부자는 수만달러가 필요하다. 사업하다 문 닫으면 외상하고 재고만 남는다고 한다. 다행히 미국은 외상 거래가 없다. 소매화랑 접고 화랑 딜러로 바꾸면서 화랑 두 곳 재고 정리하느라 죽는 줄 알았다. 그래서 내린 결론 ‘적게 가진 자가 부자다.’   우리 화랑 고객은 대체로 부자들이다. 화랑 고객 중 최고인 마담 T는 손꼽히는 재벌이다. 미스 오하이오 출신으로 땅부자인 재벌과 결혼했다. 남편과 사별 후 베르사이유 궁전처럼 화려한 집 짓고 수십 점의 작품을 의뢰했다. 자식 없이 개 두 마리와 사는데 그녀가 부자라고 생각한 적이 없다. 화려한 궁에 갇힌 외로운 노인일 뿐이다. 부엌은 요리한 냄새나 흔적이 없어 뭘 먹고 사는지 걱정이다. 에그롤 갖다 주면 무지 좋아한다.     온라인 도매업은 비대면이라 효율적이다. 고객 시중들 일 없다. 인터넷과 사진 작업의 발달로 전문기술과 사업방식, 창의적인 고객관리가 성패를 가른다.   뉴욕 사는 고객은 4캐럿의 다이아반지와 내가 추천한 작품 사이를 저울질하는 중이다. 이럴 땐 눈물 머금고 “반지를 부인에게 먼저 선물하세요”라고 말한다. 부인 마음을 사는 게 우선이다. 서두르면 잃는다. 끝날 때까지는 끝이 아니다.     나는 다이아몬드와 작별했다. 며느리와 딸에게 분양했다. 이젠 다이아보다는 빛나는 별이 더 아름답고, 진수성찬보다는 텃밭의 푸성귀와 소찬이 맛있다.     나는 요즘 우산 장사와 부채 장사를 오락가락한다. 비가 오면 트레일 산책을 못 가 비비적거리고 햇볕이 찡쨍 내리면 텃밭 채소가 목이 탈까 걱정이다. 작은 걱정들에 올망졸망 둘러싸여 가난한 부자로 사는 게 행복이다.     이기희 / Q7 파인아트 대표이 아침에 가난 부자 땅부자인 재벌 화랑 고객 현대미술 화랑

2022.06.23. 1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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