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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호철의 시가 있는 풍경] 새해 편지

Chicago

2022.01.10 14:59 2022.01.10 15: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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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호철

신호철

그와의 만남은 젊은 날 단 2년이었다. 대학 3년째 그는 군대에 입대했기 때문에 그 짧은 2년의 시간은 내게 10년 20년에 버금가는 신선하고, 아름다운 인생의 깊은 추억이 되었다. 오랜 기간 우정을 쌓아가진 않았지만 함께 떠난 스케치 여행, 거의 함께 지낸 화실 생활, 대학 2년 동안 겁도 없이 치른 두번의 그룹전 등은 젊은 우리에겐 거침없는 도전이었고 하루 하루를 맞는 기쁨이었다. 미국 생활 45년 내내 지금까지 마음의 한쪽에 담겨 지워지지 않는 위로와 용기가 되었다.  
 
한창 미국생활에 적응해 갈 무렵 대기업의 데코마스 작업을 위한 미국 방문 중 아내와 함께 시카고에 들려 함께 지낸 몇일간의 시간을 빼면 어쩌면 무심하게, 덤덤하게 서로의 삶을 충실하게 살았다. 저마다의 인생을 땀 흘려 개척하며 자신의 길을 걸었다. 오랜 시간이 흐른 뒤, 간혹 SNS 를 통해 그의 놀라운 행보를 보며 마음 속으로 박수를 보냈다. 그는 디자인 계열을 이끄는 깊이 있는 사유의 디자이너로, 존경 받는 대학의 교수로 자리매김 하고 있었다.  
 
내가 그를 다시 만난 곳은 2019년 가을 춘천에서였다. ‘바람에 기대어’ 출판기념회로 한국을 방문한 나를 위해 동기 9명이 모였다. 그야말로 젊고 발랄했던 미모의 친구들, 더벅머리 개성 뚜렷했던 친구들이 희끗희끗한 머리로 다시 만나 흘러간 지난 세월을 끄집어내며 박장대소했다. 다음날 아침 친구들이 떠나고 난 후에도 그와 그의 아내는 춘천 김유정 문학관, 서울가는 길에 들른 황순원의 소나기마을까지 동행해 주었다. 두물머리 근처 그의 작업장도 둘러보고 2층 그의 작업장을 꽉 채운 작품들을 뒤로 하고 나는 다시 발길을 돌렸다. 그리고 문득 지난 연말 편지가 왔다. 그리고 나도 반갑게 답장을 했다. 아내에게 이 글을 보여주었다. 아내가 피식 웃는다. 나도 피식 웃었다. 같은 웃음은 아닌 듯했다.
 
 
야호~
오늘은 6,000보, 어제는 건너뛰고 그제는 4,500보... 어쩌다 1만 보를 걸으면 예의를 다한 듯한 마음이 되었던 하루 하루로… 발밑만 보다 어느덧 세밑이 되었습니다. 꽃과 녹음, 단풍과 눈, 바람과 향기가 사물처럼 지나쳤습니다. 걷기가 일이 된 나이, 정처 없이 걷는 그 길에서 가끔 고요히 떠오르는 질문처럼 벗 신호철을 만납니다. 낯설지만 기뻤던, 침묵 속의 공감들, 서두르다 놓쳤던 것들... 그 기억의 파편들이 밤하늘 은하수 같습니다. 내일도 또 다른 날도 아름다운 반짝임은 계속해서 그곳에 있을 것입니다. 한 해가 끝나갑니다. 인간으로 산다는 그 어려운 일을 68년째, 무탈하게 버텨왔다는 것으로 한 해의 결실로 거둡니다. 더불어 둥근 완성을 위해 최선을 다하였을 그대의 노고와 현재를 존중하며, 느닷없이 안부를 묻고 고마움을 전합니다. 건강을 빕니다. 벗 신호철^^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2021년 12월 30일  / 서기흔 드림
 
 
이 나이 까지도 젊고 싱그러운 청년 서기흔! 어둠이 채 가시지 않은 길 위로 상큼한 바람이 불어온다. 우린 얼마나 흘러 왔을까? 얼마나 많은 날들이 깨어나고 다시 누웠던가. 꽃들은 피었다가 지기를, 그 뿌리의 생이 다할 때까지 얼마나 많은 날들을 뒤척였던가? 하늘은 얼마나 많은 날의 그리움으로 바람이 되어 불고, 비 뿌리고, 이내 먹먹히 쌓이는 눈이 되는가. 밀려왔다 부서지는 파도의 그 끝도 없는 걸음이 아프게 다가오는데 난 무엇이 되어 이렇게 늙으막히까지 이방인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인가? 지구의 반대쪽, 소리 내 부르면 되돌아 오는 얼굴들. 해가 뜨면 해가 지고, 해가 지면 이내 먼동이 트는 날들이 빠르게 흘러, 되돌아 가기엔 너무 멀리 걸어온 세월. 서로의 거리에서 잃어버린, 아니 소중히 포개어 깊숙히 담아 놓았던 시간들을 끄집어 내어 그대를 다시 만나고 있다. 솔 향기 가득한 길 모퉁이를 돌아서면 호수가 시작되고, 그 주변엔 억새가 지천에 자라 숲을 이루고, 청둥오리 한 쌍이 미끄러지듯 새벽을 흐르는데 우린 그동안 호수의 잔잔한 적막처럼 너무 침묵한 건가? 새벽 길을 걷다 보면 그리움이 등 뒤에서 나를 밀고 간다. 젊은 날 내 등을 밀었던 그 바람처럼….(시인, 화가)

신호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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