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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영어 스피치의 천당과 지옥

Los Angeles

2023.03.02 19:02 2023.03.02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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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 해병 군악대의 팡파르가 울렸다. 1977년 4월 30일 카할라 힐턴 호텔에서 하와이 (District 49) 토스트마스터스 클럽 스피치 대회에서 일등으로 입상한 나는 열광하는 청중 앞에서 상패를 들었다.  토스트마스터스 클럽은 전 세계 143국에 보급된 스피치와 리더십을 영어 또는 모국어로 연습하고 개발하는 비영리 교육단체다. 회원은 주기적으로 모여 무대 공포증 극복, 즉흥 또는 준비된 연설, 능숙한 회의 진행을 연습하고 피드백을 주고받는다. 애플, 구글, 마이크로소프트, 디즈니, 코카콜라, 도요타가 사내에서 이 클럽을 운영하는 대표적인 기업이다.  
 
나는 속된 말로 얼렁뚱땅 일등을 한 셈이다. 다시 말해서 어부지리로 승리했다. 그날 하와이 각 지역 클럽에서 우승한 네 명의 연사가 하와이주 결승전에 참가했다. 그 가운데 전직 방송국 아나운서가 가장 완벽한 연설을 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는 주제를 잘못 선택했다. ‘살인하지 말라(Thou shall not kill)’, 즉 사형제도를 철폐하라는 그의 주장은 찬반 여론이 분분한 말썽 많은 주제다.  “노”하며 고함을 지르는 사람도 있었다. 나는 ‘새옹지마(SaeOng’s Horse)'라는 제목으로 인생의 화복은 변수가 많으므로 불행이 닥쳐도 낙심하지 않고 최선을 다하면 전화위복이 된다는 내용이었다. 좋은 주제와 내용은 필승 조건이다.
 
미국 가족 이민을 위해 수속하는 중 큰딸이 결핵으로 신체검사에 불합격해 비자가 나오지 않았다. 서울 집을 팔고 가산을 정리한 후다. 용산 주한 미군 본부 인사처에 은퇴 날짜를 한 달 연기해달라고 요청했다. 인천의 장모 집에서 서울을 왕래하며 딸의 치료에 전념해서 비자를 받았다. 하와이로 이민 간 다음 몇천 달러의 퇴직금을 추가로 받았다. 생각지 않았던 보너스였다는 내용이었다. 청중 가운데 손수건을 꺼내서 눈물을 닦는 사람도 있었다.  
 
그해 가을 할리우드의 유니버설 힐튼 호텔에서 미 서부지역, 즉 남가주, 남네바다, 하와이의 8개 디스트릭에서 우승한 여덟 명의 연사가 출전하는 리전 II(Region II) 스피치 대회가 열렸다. 나는 하와이주 대표로 출전하는 자격을 얻었다.
 
스피치 주제를 바꿔야 했다. 나는 '작은 미소(A tiny smile)'란 연설을 준비했다. 갓 돌이 지난 작은 딸이 장 중첩으로 사경을 헤맸다. 성모병원의 소아과 의사가 손으로 마사지해도 풀리지 않았다. 수술하기 전 한 번 더 마사지를 시도했다. 중첩되었던 장이 고무호스에 물이 들어가듯 풀리는 영상을 보았다. 우리는 와! 하고 환호성을 질렀다. 딸은 속이 편안한지 엄마의 젖을 빨며 작은 미소를 지었다는 내용이다.  
 
그동안 새옹지마를 가지고 씨름하느라고 권투로 치면 그로기한 상태에서 준비한 연설이 '작은 미소'였다. 새옹지마는 집 앞 하와이카이 해변에 나가서 밀려오는 파도를 향하여 목청을 높이어 수천 번 연습했다. 새 스피치는 충분히 연습하지 못한 채 LA로 향했었다.
 
할리우드 유니버설 힐튼 호텔에 투숙했다. 다음 날 아침 잠옷을 벗어 침대 위에 놓았다. 이 촌놈은 침대 위에 옷을 놓으면 세탁해달라는 의미라는 것을 몰랐다. 스피치 대회 전날 밤 잠자리에 들려니 잠옷이 없다. 로비에 전화했더니 세탁이 늦어졌다며 미안하다고 야단이다. 할 수 없이 잠옷을 입지 않고 잤다. 나는 잠자리가 까다로워 잠옷을 입지 않으면 허전해서 잠을 자지 못한다. 미군 부대 하우스보이 출신인 내가 지역에서 올라온 원어민 일류급 연사들과 겨룰 생각을 하니 잠이 오지 않았다. 새벽에 약 두 시간 정도 잤다.
 
정신없이 일어나서 아침을 먹는 둥 마는 둥 커피만 마시고 연단에 섰다. 청중이 잘 보이지 않았다. 집중도 되지 않았다. 정신을 가다듬고 연설했다. 나도 모르게 한마디 말이 헛나갔다. 실언 한마디는 치명적이다. “익스큐즈 미”하고 정정했다.
 
결과는 뻔했다. 1등부터 4등까지 네명을 선발했다. 내 이름은 없었다. 나머지 연사는 등수를 매기지 않았지만 나는 분명히 꼴등이었을 것이다. 하와이에서 1등 그러나 할리우드에서는 꼴등을 한 것이다. 나를 응원하러 왔던 하와이 토스트마스터스 회원들에게 얼굴을 들 수 없었다.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들어가고 싶었다. 그해 나는 영어 스피치의 천당과 지옥을 오락가락했다.  

윤재현 /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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