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막의 별은 도시의 불빛을 벗어나야 제 모습을 드러내듯, 인생에도 비워진 자리에서만 발견할 수 있는 소중한 것들이 있다. 아이들이 자라 부모의 품을 떠나고 나면, 부부에게도 서로를 다시 바라볼 시간이 찾아온다. 독립기념일 연휴, 평소 가깝게 지내던 몇몇 지인 부부가 별을 보러 가자며 캠핑을 제안했다. 얼떨결에 함께하기로 했지만, 아이들 없이 어른끼리 떠나는 캠핑이 과연 어떤 의미가 있을까 내심 걱정이 앞섰다. 아이들이 어릴 때는 연휴만 되면 으레 차에 짐을 가득 싣고 길을 나섰다. 물놀이를 좋아하던 애들을 위해 바닷가나 계곡을 끼고 있는 캠핑장을 찾아 떠나곤 했다. 도심에서 자란 아이들은 자연 속에서 마음껏 뛰놀며 또 다른 배움을 얻었다. 야외에서 즐기던 바비큐와 모닥불에 구워 먹던 고구마와 옥수수, 노릇하게 익어가던 마시멜로는 지금도 선명한 추억으로 남아 있다. 세월은 우리 삶의 모습도 조금씩 바꾸어 놓았다. 미성년의 울타리를 벗어나자, 아이들은 해방이라도 된 듯 부모의 품보다 친구들과 떠나는 여행을 더 즐기는 나이가 되었다. 나 역시 그 시절을 지나왔기에 아이들의 마음을 이해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우리 곁에서 조금씩 멀어져 가는 뒷모습을 바라보는 허전함이 남았다. 이제는 편안한 숙소에 머무는 여행에 더 익숙해졌지만, 돌이켜보면 오래도록 가슴에 남는 것은, 텐트 안에서 추위와 더위를 함께 견디며 서로의 온기로 밤을 지새우던 시간, 함께였기에 불편함마저 추억이 되었던 시간이다. 텐트와 침낭 등 오래 묵은 캠핑 장비를 하나씩 꺼내 챙긴다. 뽀얗게 가라앉은 먼지를 털어내자, 그 안에 고스란히 잠들어 있던 기억들도 함께 깨어난다. 필요한 물품을 수첩에 하나씩 적어 내려가며 빠진 것은 없는지 살피고 짐을 꾸리다 보니, 오래전 아이들과 떠났던 여행의 설렘이 다시 가슴을 두드린다. 그때는 미처 알지 못했다. 평범했던 날들이 가장 소중하게 간직하고픈 추억이 되리라는 것을. 목적지는 조슈아 트리 국립공원이다. 물이 귀한 사막이라며 남편은 세숫물까지 커다란 드럼통 두 개에 가득 채운다. 조슈아 트리의 한낮은 뜨겁고 메말라 있었다. 오랜 시간 거친 바람과 풍파에 깎인 화강암 바위들은, 거대한 조각가의 손길을 거친 듯 둥글고 부드러운 곡선을 이루고 있었다. 황량한 사막 곳곳에는 선인장과 조슈아 나무가 그곳을 지키고 있었다. 성경 속 여호수아에서 유래했다는 조슈아 나무는, 하늘을 향해 뻗은 가지가 마치 간절히 기도하는 사람의 두 팔처럼 보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거친 바람과 뜨거운 햇볕 속에서도 수백 년의 세월을 견뎌온 나무들은 사막이 품은 강인한 생명의 증거였다. 오래 견딘다는 것은 버티는 것이 아니라 제 자리를 묵묵히 지켜내는 일이다. 조슈아 나무는 이민 생활 속에서도 삶의 자리를 지켜 온 우리의 모습을 닮아 있었다. 해가 지자 사막은 순식간에 칠흑 같은 어둠에 잠기고 장엄한 밤하늘이 열린다. 도시의 불빛 아래에서는 숨어 있던 별들이 사방에서 쏟아진다. 하늘은 수많은 빛으로 짜인 거대한 우주였고, 우리는 그 한가운데 서 있다. 그 압도적인 고요 앞에서는 흘러가는 시간도, 세상 걱정도 잠시 멈춘 듯하다. 자녀가 부모의 품을 떠나고 나면 중년에게도 둘만의 온전한 시간을 다시 채워 갈 계절이 찾아온다. 일행 부부들이 서로를 살피며 다정하게 챙기는 모습은 오랜 시간 함께 걸어온 사람들만이 가질 수 있는 편안함이었다. 젊은 날에는 자녀를 위해 앞만 보고 달렸다면, 이제는 서로의 걸음에 보폭을 맞추며 같은 방향을 바라볼 여유가 생긴 것이다. 고개를 들어 올려다본 사막의 별이 밤하늘을 가득 메운다. 지나온 시간만큼 깊어진 우리는 이제 서로의 곁에서 남은 계절을 천천히 함께 채워 갈 것이다. 김윤희 / 수필가문예마당 수필 조슈아 나무 조슈아 트리 사막 곳곳
2026.09.03. 18:22
외출했다 집에 와 공부방에 들어갔더니 그 안에서 노인 냄새가 나는 것이 아닌가. 나는 화들짝 놀라서 킁킁거리며 창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아침, 저녁으로 매일 두 번씩 샤워하는데도 내 체취가 배어서 풍기는 꼰대 냄새였다. 어느새 내가 이렇게 되었단 말인가. 갑자기 서글퍼졌다. 하지만, 내 나이 70대가 되었으니…. 나이가 들면 몸에서 특유의 냄새가 나는 것은 노화로 인한 신체 변화 때문이라고 어디선가 읽은 기억이 있다. 좀 더 자세히 알고 싶어 찾아봤더니 노인 냄새는 자연적으로 생기는 것으로 남녀 불문 피할 수 없다는 것이다. 40대 이후부터 체내에서 ‘노넨알데하이드’가 생성되기 시작하며 나이가 더 들수록 점점 많이 생기게 된다고 한다. 쉽게 말하자면, 신체의 노화로 인한 것인데 이 물질이 노인성 냄새의 주범이라고 한다. 중,고등학교 학창 시절에 학생들 사이에서 어른이나 부모 또는 스승을 비하하는 은어가 있었는데 그것이 ‘꼰대’였다. 중학교 졸업을 서너 달 남겨 둔 어느 날 우리집에서 하숙을 하던 친구가 나보고 누가 오는지 망을 보라고 부탁을 하고는 학교 근처 골목에 숨어서 담배를 피웠다. 내가 한눈을 파는 사이 퇴근길의 선생님 두 분이 나타났다. 다급한 나머지 나도 모르게 “꼰대다~” 하고 외마디 고함이 튀어나왔다. 내 비명에 너무 놀란 친구는 엉겁결에 피우던 담배를 바지 주머니 속에 재빨리 숨겼다. 선생님이 그 친구 앞을 지나쳐 가려는 찰나 그 친구는 “앗 뜨거워, 뜨거워”하며 연거푸 비명을 지르고 펄쩍펄쩍 뛰었다. 아뿔싸! 하필이면 교내에서 가장 무서운 훈육 주임 선생님에게 흡연을 들킨 것이다. 그 선생님은 친구 뺨을 사정없이 여러 차례 때렸고, 친구의 입안에선 피까지 흘렀다. “너, 내일 아버지 모시고 훈육실로 와.” 화가 단단히 나신 선생님의 다음 타깃은 나였다. “너, 이 녀석, 우리 보고 꼰대라고?” 나는 뺨을 두 차례 맞는 것으로 무마 되었지만 친구의 행실은 교장 선생님에게까지 보고 됐고, 결국 퇴학 처분이라는 중징계가 결정됐다. 이 사실을 알게 된 나의 어머니는 교장실로 찾아가 다짜고짜로 무릎을 꿇고 두 손을 비비며 용서를 구했다. “이 녀석도 제 자식입니다. 용서해 주세요. 이 못난 어미가 이렇게 빕니다.” 우리 집은 중학교 정문 바로 앞에 있었다. 그런 까닭에 어머니와 교장 선생님은 학교 앞에서 자주 마주쳤고, 서로 인사를 나누는 사이였다. 교장 선생님은 입장이 난처해졌다. “어머니, 인제 그만 일어나세요.” 난감한 처지에 놓인 교장 선생님은 무릎을 꿇고 있던 친구를 불러 세웠다. “이 어머니를 봐서 용서한다. 너를 낳아 준 어머니만 어머니가 아니다. 너를 돌봐 준 분도 어머니이시다. 평생 이 어머니의 은공을 잊지 말고 살 거라.” 청소년기의 위기를 이렇게 넘긴 그 친구는 지금 나와 함께 캘리포니아의 하늘 아래에서 숨을 쉬고 있다. 꼰대의 어원은 프랑스어로 백작을 지칭하는 ‘콩테’라는 단어가 일본식 발음으로 변한 것이라고 한다. 일본인 지인인 미찌꼬상에게 “꼰대가 무슨 뜻이냐”고 물었더니 일본에서는 교육이나 훈련을 뜻하는 좋은 용어로 사용된다고 한다. 한국에서는 요즘도 젊은 세대 사이에서는 꼰대라는 은어가 사용되고 있다고 한다. 그들이 말하는 꼰대란 낡은 사고방식과 권위적인 태도를 가진 사람을 지칭하는 것이리라. ‘우리 때는 말이야’를 들먹이며 자신의 경험을 기준으로 강요하거나 새로운 사고나 문화를 무시하는 사람을 일컫는 말이 아닐까. 또 나이나 지위를 이용해 타인을 통제하려 드는 사람을 가리키는 은어라고 여겨진다. 그리고 젊은 세대의 가치관을 이해하지 못하거나 “요즘 애들은”이라며 젊은 층을 얕잡아 보는 사람도 꼰대일 것이다. 세월이 흘러 나도 어쩔 수 없이 꼰대가 되었다. 신체적으로는 꼰대가 되었을망정 정신적으로 꼰대가 되지 않으리라 다짐해 보는 수밖에…. 그 누가 흐르는 이 세월을 붙잡아 줄 수 없나요. 이진용 / 수필가문예마당 수필 교장 선생님 노인성 냄새 나신 선생님
2026.08.27. 18:51
뒷마당 한편에서 30년 넘는 세월을 함께해 온 복숭아나무가 올해는 서서히 힘을 잃어가는 듯하다. 봄이면 어김없이 연분홍 꽃으로 가득 덮였고, 6월 말이면 달콤한 열매를 풍성하게 맺어 이웃들에게 나누어 주던 나무였는데, 이제는 열매도 몇 개만 달리고 가지 끝마다 예전 같은 생기가 보이지 않는다. 오랜 세월 함께해 온 나무의 마른 가지를 바라보노라면, 나 또한 언젠가는 이 세상을 떠나야 할 존재임을 새삼 느끼게 된다. 그리고 ‘남은 시간을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좋은 삶일까?’ 조용히 생각해 보게 된다. 그런 마음속에서 마하트마 간디의 말이 떠올랐다. “Live as if you were to die tomorrow. Learn as if you were to live forever.(내일 죽을 것처럼 살고, 영원히 살 것처럼 배우라.)” 짧은 문장이지만 그 안에는 삶과 배움에 대한 깊은 통찰이 담겨 있는 듯하다. 특히 ‘무엇을, 그리고 어떻게 배워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차분히 생각하게 된다. 우리가 살아가며 배우는 것들은 크게 지식, 학문, 그리고 지혜로 나눌 수 있다. 지식이란 배우고 경험하며 얻는 사실과 정보, 그리고 그것을 이해하는 것을 말한다. 우리는 역사와 과학, 문학 등 다양한 학문을 공부하면서 지식을 쌓아 간다. 그러나 배움은 학교나 책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주변 사람들이 무엇을 원하고, 무엇 때문에 힘들어하는지를 이해하려는 마음, 곧 다른 사람을 배려하는 마음 또한 소중한 배움이다. 학문(學問)이란 인류가 쌓아온 지식을 배우고(學), 끊임없이 질문하며(問) 삶의 진리와 지혜를 찾아가는 끝없는 여정이다. 그래서 학문은 인문학과 철학, 물리학, 신학, 의학 등 다양한 분야를 깊이 이해하려는 노력일 뿐만 아니라 진리와 원리를 체계적으로 탐구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끝으로 지혜란 지식과 학문, 그리고 경험을 바탕으로 무엇이 옳고 중요한지를 분별하며, 사랑과 절제, 포용의 마음으로 겸손하게 살아가는 능력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지혜는 지식과 학문을 삶 속에서 바르게 실천하는 힘이며, 올바른 삶으로 이끄는 나침반과도 같다. “지식은 머리를 채우고, 학문은 생각을 깊게 하며, 지혜는 사람의 삶과 영혼을 성숙하게 한다”는 말이 있다. 결국 지식은 ‘아는 것’이고, 학문은 ‘탐구하는 것’이며, 지혜는 ‘바르게 살아가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진정한 배움은 지식을 쌓는 데서 끝나지 않고, 학문을 통해 진리를 탐구하며, 마침내 지혜로운 삶으로 이어질 때 비로소 완성된다. 나이가 들수록 몸만 늙는 것이 아니라 생각도 쉽게 멈추곤 한다. 그래서 좋은 정신과 지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끊임없는 배움과 새로운 자극이 필요하다. 또한 우리의 삶은 결코 혼자 걸어가는 길이 아니라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살아가는 것이다. 진실한 대화 속에서 위로를 얻고, 내 마음의 일부가 상대방 안에 스며들며, 상대의 마음 또한 내 안에 들어오는 정서적 교감을 경험하게 된다. 이러한 만남과 대화는 사람과 사람을 더욱 가깝게 이어주고, 서로의 삶을 따뜻하게 변화시킨다. 언젠가 나 역시 저 한 그루의 나무처럼 조용히 삶의 계절을 마치고 자연으로 돌아갈 것이다. 그러나 그날이 오기 전까지 하루하루를 소중히 살아가고 영원히 살 것처럼 배움의 끈도 놓지 않을 생각이다. 조금 더 따뜻한 마음으로, 조금 더 깊은 이해로, 조금 더 넓은 사랑과 지혜를 품으며 살아가기 위해서다. 탈무드에 “진정으로 훌륭한 사람은 다른 사람보다 뛰어난 사람이 아니라, 어제의 자신보다 조금 더 성숙한 사람이다”라는 지혜로운 이야기가 전해진다. 인생의 참된 가치는 남보다 높아지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어제의 나보다 조금 더 성장한 사람이 되는 데 있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다짐해본다. 내일 떠날 사람처럼 하루를 소중히 살아가되, 영원히 살 것처럼 배우며 살아가자. 그리고 조금 더 따뜻한 마음으로, 조금 더 깊은 이해로, 조금 더 지혜로운 사람으로 성장하자. 이러한 삶이 마지막 순간까지 우리를 살아 있게 하는 가장 아름다운 배움의 길인지도 모른다. 올겨울에 복숭아나무 한 그루를 다시 심으려 한다. 나는 비록 그 나무가 맺을 열매를 오랫동안 보지 못하더라도, 누군가는 그 나무 그늘에서 쉬고, 그 열매를 맛보게 될 것이기에. 배움도, 사랑도, 희망도 모두 그런 것이 아닐까? 이명렬 / 경영학 박사문예마당 복숭아나무 수필 지식 학문 나무 그늘 마하트마 간디
2026.08.27. 18:50
2026 FIFA 북중미 월드컵이 한창이던 지난 6월 18일 아침, 신문 1면에 실린 리오넬 메시의 대문짝만한 사진이 눈에 확 들어왔다. 바로 전날 39세의 메시가 알제리와의 예선 1차전에서 해트트릭을 기록하며 전 세계 축구 팬들에게 놀라움과 감동을 선사한 순간이었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것을 여실히 증명하는 듯했다. 아르헨티나에서 메시는 축구선수를 넘어 신과 같은 존재다. 그의 말 한마디, 행동 하나가 국가적인 이슈가 될 만큼 그의 영향력은 상상을 초월한다. 그런 그가 2016년 코파 아메리카 칠레와의 결승전 승부차기에서 실축해 아르헨티나가 패배했다. 아르헨티나의 첫 번째 키커로 나선 그가 슛을 골대 위로 넘겨버린 것이다. 팬들의 엄청난 비난과 죄책감 때문에 자포자기 상태에 빠진 그는 대표팀 은퇴선언을 했다. 당시 비하인드 스토리가 있다. 그의 조국 아르헨티나의 조그만 시골 마을의 초등학교 여교사가 메시에게 보낸 편지다. “리오넬 메시에게; … 아이들에게 인생의 목적은 이기는 것만이 우선이고 유일한 가치라는 선례를 남겨서는 안 됩니다. 당신이 어린 시절부터 어떤 어려움을 이겨내며 오늘의 메시가 되었는지를 잘 압니다. 성장호르몬 결핍이라는 희귀병을 앓은 당신이 어린 나이에 고통스러운 주사를 얼마나 맞으며 자랐는지를 우리 모두 알고 있습니다. 지금 당신이 은퇴하면 이 나라 아이들은 당신에게 배웠던 노력의 가치를 더 이상 배우지 못합니다. 지금 당신처럼 단지 졌다는 이유만으로 포기한다면 오늘도 하루하루를 어렵게 살아가는 이 나라의 많은 사람은 인생의 가치를 잃어버릴 수 있습니다. 저는 학생들에게 당신을 얘기할 때 당신이 얼마나 멋지게 축구를 하는지를 얘기하지 않습니다. 단 한 골을 넣기 위해 당신이 같은 장면을 수천번이나 연습한다는 사실을 알려줍니다. 제발 우리 학생들에게 2위는 패배라고, 경기에서 지는 것이 영광을 잃게 되는 일이라는 선례를 남기지 말아 주세요….” 그 편지는 순식간에 아르헨티나는 물론 전 세계로 퍼져 나가 감동을 주었다. 결국 메시는 마음을 돌려 6주 만에 대표팀 복귀를 선언했다. 어려서 우리 집은 비원 근처인 종로구 원서동에 있었다. 당시 한국 제일의 부자인 화신 백화점 사장 집이 가회동에 있었는데, 그 집을 지나 조금 더 걸어가면 우리집이었다. 그 후 6·25 전쟁으로 피난을 갔다 온 후 어찌 된 일인지 왕십리에 살게 되었다. 그곳에서 초등학교를 마치고 중학교에 들어갔다. 그 학교에는 부잣집, 권력자의 집 딸들이 많았다. 그들은 모든 분야에서 빼어나고 자신만만했다. 그들을 보며 나는 마치 패배자처럼 느껴졌다. 초등학교 때는 공부 잘한다는 소리도 듣고 나름대로 자부심이 있었는데, 주눅이 들어서 학교에 가기 싫었다. 월~토요일까지 시간표에 따라 책가방을 다르게 싸야 하는데 매일 똑같은 교과서를 책가방에 넣고 다녔다. 수업시간에는 책상 위에 아무 책이나 펴 놓고 멍하니 창밖만 바라보곤 했다. 한동안 그렇게 지내다 보니 어느 과목 선생님인지 눈치를 채고 담임 선생님에게 일렀다. 하루는 담임선생님이 교무실로 오라고 해서 갔더니 다짜고짜 여러 선생님이 보는 앞에서 나의 뺨을 때리셨다. 너무 창피하고 분해서 더욱더 학교에 다니기 싫었다. 그렇다고 당장 학교를 그만둘 용기도 없었다. 병든 닭처럼 비실거리며 마지못해 학교에 다니는 나를 보고 안 됐는지 한 친구가 나에게 말했다. “광자야, 자신감을 가져 봐. 너는 대한민국 최고의 실력자야.” 근거 없는 그 친구의 말에 갑자기 어깨가 쭉 펴지고 고개가 번쩍 들렸다. 오기 때문인지 그 후 누구보다 열심히 학교생활에 충실했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니, 만약 그때 학업을 포기했다면 지금쯤 내 인생이 어떻게 됐을까? 아찔하다. 실의에 찬 사람을 다시 일으키는 힘은 거창한 것이 아니다. 인정해 주는 말, 절대로 포기하지 말라는 격려의 말에서 나온다. 이번 월드컵 개막식에서 안드레아 보첼리와 이재가 함께 공식 주제가를 불렀다. 특히 이재는 가사 가운데 ‘또 넘어져도, 또다시 일어나’라는 부분을 한국어로 불러 큰 화제를 모았다. 이 노랫말의 배경은 자신의 경험과도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수많은 도전과 시련을 겪으면서도 포기하지 않고 다시 일어셨던 그의 삶이 노래의 메시지와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한국을 방문했던 젠슨 황 엔비디아 CEO가 한 TV 프로그램에 출연해 창업 초기 겪었던 어려움을 털어놨다. 그는 당시 한국의 용산 전자 상가를 찾아 상인들에게 명함을 건네며 영업을 한 경험이 있다고 회고했다. 그의 성공은 현장을 발로 뛰며 쌓아 올린 노력의 결과였다. 황 CEO는 파산위기에 몰렸던 당시를 회상하며 “성공보다 실패에 대한 두려움이 자신을 움직이는 원동력이었다. 실패는 성장의 과정이며, 위대해지기 위해선 고난이 필요하다”는 묵직한 메시지를 전했다. 바닥에 쓰러졌을 때를 자신을 단련하는 기회로 삼으라는 조언이다. “또다시 일어나라. 끝날 때까지는 끝난 것이 아니다.” 패배로 힘들어하는 모든 이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다. 배광자 수필가문예마당 용기 수필 초등학교 여교사 조국 아르헨티나 리오넬 메시
2026.08.20. 18:14
아들의 결혼을 앞두고 남편의 빈자리가 다시금 떠오른다. 청첩장을 건네며 지긋한 미소를 지어 보이는 아들의 모습에서 남편의 젊은 날이 스쳤다. 이제 한 여자의 남편이 되어 삶을 함께 떠받쳐야 할 아이. 돌아서 걷는 어깨 위로 가장의 무게가 내려앉고 있었다. 나는 남편과의 행복했던 추억보다, 내 삶을 지탱해 주었던 그의 품성을 먼저 떠올리고 있었다. 살아 있었다면 아들에게 어떤 말을 해주었을까. 질문 앞에서, 평생 아내의 자리를 믿음으로 지켜주던 남편이 떠올랐다. 그 기억은 결혼식 전날 모자 둘이 마주 앉은 자리에서 오래 묻어 두었던 이야기로 이어졌다. “결혼을 앞둔 네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가 있단다. ‘엄마의 어느 하루’ 속에서 아빠를 만나보게 될 거야.” 아들이 초등학생이던 시절이었다. 지금으로부터 사십여 년 전, 나는 서른을 갓 넘긴 젊은 엄마였다. 다시 공부를 시작한 남편과 어린 두 아이, 그리고 낯선 타국 생활은 쉼 없이 나를 다음 일정으로 떠밀었다. 삶은 빠듯했고, 우리는 가진 것보다 견뎌야 할 것이 더 많은 시절을 지나고 있었다. 그날도 일터에서 LA 타임스를 펼쳐 들다가 한 전면 광고에 눈길이 붙들렸다. 브로드웨이 백화점에서 그날 하루 ‘백 투 스쿨 세일’을 연다는 내용이었다. ‘Up to 70% Sale’. 아이들 개학이 다가오고 있었다. 세일 품목을 찾아다니며 형편껏 준비해 주던 터라, 이 기회에 아이들에게 조금 더 좋은 것을 마련해 주고 싶었다. 마음이 앞서 하던 일을 서둘러 마치고 백화점으로 향했다. 매장은 사람들로 북적였다. 백팩과 필통, 아이들이 좋아할 학용품들을 카트에 담았다. 긴 계산줄 끝에 서서 차례를 기다리던 중, 바로 옆 진열대에 물건 하나가 눈에 띄었다. 줄을 벗어나지 않으려고 한 손으로 카트를 잡은 채, 걸음을 한 발짝 내디뎌 그것을 집어 들었다.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때였다. “Next!” 계산원이 내 뒤를 향해 손짓하며 불렀다. 순간 어리둥절했다. 분명 내가 맨 앞에 서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제가 다음인데요.” 그러나 그녀는 내 말을 듣지 못한 사람처럼 다시 뒤쪽 손님을 불렀다. 내게는 시선조차 주지 않고 결국 그 손님을 계산대로 맞아들였다. 붐비는 사람들 속에서 나는 거의 유일한 동양인이었고, 허름한 일복 차림에 발에는 슬리퍼까지 신고 있었다. 그제야 알 것 같았다. 아, 이런 것이 차별이구나. 얼굴이 화끈거렸다. 억울함과 수치심이 한꺼번에 밀려왔지만, 그 감정을 제대로 꺼내 놓을 영어 문장은 떠오르지 않았다. 나는 계산대 앞으로 다가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당신 이름이 뭐죠?” 겨우 그 말부터 꺼냈다. “다시 와서 이 문제를 분명히 짚고 넘어갈 겁니다.” 잊지 말라는 듯 또박또박 말하고 돌아섰지만, 후들거리는 다리로 정신없이 백화점을 나서자 벤치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모욕을 견딜 언어도, 기댈 곳도 없는 막막함에 휩싸여 있었다. 세상에 혼자 남겨진 기분이었다. 일터로 돌아오자마자 오랫동안 가게 일을 도와오던 매니저에게 방금 있었던 일을 숨차게 털어놓았다. 함께 분노해 주기 바랐다. 적어도 내 감정에 공감해 주리라 기대했다. 그러나 돌아온 반응은 의외로 덤덤했다. “그런 일이 있었군요.” 대수롭지 않게 한마디를 흘리며 하던 일을 계속했다. 서운함은 더 큰 외로움이 되어 가슴에 차올랐다. 같은 말을 쓰는 동료에게서조차 닿지 않는 공감 앞에서, 마음 둘 자리마저 사라진 듯했다. 실망은 곧 슬픔으로 바뀌었고 눈물이 고였다. 그때 가게 문이 열리며 남편이 들어섰다. 수업이 일찍 끝나 가게를 둘러볼 겸 들른 길이었다. 나는 백화점에서의 사건을 더는 말하고 싶지 않았다. 반가움과는 별개로 또 한 번의 실망을 겪게 될까 두려웠다. 그런데 남편이 먼저 입을 열었다. “영아, 무슨 일 있었지? 자, 다 이야기해 봐. 네 얘기 들으려고 내가 빨리 오게 된 것 같네.” 그 말에 마음의 경계가 무너졌다. ‘들어주겠다’는 한마디가 내 속에 웅크리고 있던 외로움을 스르르 풀어냈다. 나는 백화점에서 있었던 일을 차근차근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말하는 동안 신기하게도 마음이 차분히 가라앉았다. 잠잠한 눈길로 끝까지 귀담아 들어주는 것만으로도 이미 충분한 위로였다. 이야기를 다 듣고 난 뒤 그는 내 어깨를 감싸며 말했다. “많이 힘들었겠네. 자, 우리 다시 백화점으로 가자.” 잘했느니 못했느니 어떤 판단도 보태지 않았다. 그저 말없이 내 편이 되어 앞장서는 그의 어깨가 그날따라 유난히 든든해 보였다. 어린 시절 엄마 뒤에 서 있으면 세상이 덜 무서웠던 아이처럼, 어느새 나는 힘찬 걸음으로 그의 뒤를 따라 걷고 있었다. 백화점에 도착했을 때 문제의 계산원은 이미 자리를 떠난 뒤였다. 남편은 침착한 목소리로 매니저를 불러 달라고 했다. 잠시 후 우리는 총 매니저실로 안내되었다. “누구의 잘잘못을 따지러 온 것이 아닙니다. 아내가 오해했을 수도 있고, 직원이 실수했을 수도 있겠지요. 저도 장사를 하는 사람으로서, 장사의 기본은 손님을 존중하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는 단 한마디를 듣고 싶습니다. ‘미안합니다’라는 말입니다.” 잠시 후 담당 직원이 불려와 고개 숙여 사과했다. 그 순간 내 안에서 들끓던 감정이 제자리를 찾아 편안해졌다. 매니저는 내가 골랐던 학용품들을 가리키며 모두 선물로 주겠다고 말했다. 속으로 환호의 마음이 일었다. 이것이야말로 백화점다운 보상이라 생각되었다. 그러나 남편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괜찮습니다.” 그 한마디는 그날의 일을 가장 품위 있게 마무리하는 결정적인 순간이었다. 우리는 선물로 주려던 물건들을 그대로 둔 채 빈손으로 백화점을 나섰다. 손에 아무것도 들려 있지 않았지만, 발걸음에는 모든 것을 얻은 듯한 당당함이 실려 있었다. 그날 나는 배웠다. 존엄은 그저 받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지켜낼 때 비로소 주어진다는 것을. 이야기를 끝까지 듣고 있던 아들이 눈시울이 젖은 얼굴로 말했다. “아, 아빠가 그런 사람이었구나. 우리 아빠, 정말 멋진 사람이네.” 그 자리에서 이번에는 엄마로서 해주고 싶은 말을 아들에게 글로 전했다. ‘아들아, 언젠가 네가 물었지. 엄마같이 헌신하는 아내를 어떻게 만날 수 있을까, 하고. 기억하렴. 어떤 상황에서든 아빠처럼 아내를 전적으로 믿어 주는 남편이 되면 된단다. 잘잘못을 가리기 전에 먼저 아내의 편에 서 주고, 그 마음의 자리에 함께 있어 주는 것. 아내는 그런 남편 곁을 기꺼이 따르고 싶어지게 마련이란다. 서로에 대한 믿음이 부부 행복의 토대이고, 네 아내의 행복이 곧 너의 행복이 되어 줄 거야.’ 결혼 후 어느 날, 아들이 말했다. “어떤 문제 앞에 설 때마다 ‘아빠라면 어떻게 했을까’를 생각해 봐.” 그 말을 듣는 순간, 백화점에서 돌아오던 길 묵묵히 앞서 걷던 남편의 등이 떠올랐다. 내가 믿음으로 따라 걸었던 그 등이, 이제는 아들의 길잡이가 되어 주고 있었다. 아빠는 지금도 아들의 삶 속에서 ‘자랑스러운 본(本)’으로 살아 있다. 이영신 / 수필가문예마당 아빠 수필 브로드웨이 백화점 순간 백화점 우리 아빠
2026.08.06. 17:52
로스앤젤레스 타임스의 인기 칼럼 ‘Dear Abby’에서 읽은 글이다. 어느 시어머니가 세상을 떠났다. 며느리가 고인의 유품을 정리하다가 옷장 깊숙한 곳에서 상자 하나를 발견했다. 이것을 열어보고 며느리는 큰 충격을 받았다. 그 상자 안에는 며느리가 평생 시어머니에게 보낸 선물과 편지, 생일 축하 카드 등이 하나도 개봉되지 않은 채 쌓여 있었다. 정확한 의도는 알 길이 없지만, 시어머니는 그렇게 미움의 흔적을 남겼다. 남편은 대학노트로 이십여 권이나 되는 삶의 기록을 남겼다. 나는 몇 년이 지나도록 그것을 읽지 않고 있다. 어쩌면 끝내 읽지 못할 수도 있다. 읽을 용기가 없어서다. 그에게서 어떤 해명이나 변명의 말도 들을 수 없게 된 지금 내 마음에 작은 상처가 될 내용이라도 적혀 있을지 두려운 것이다. 개인의 흔적은 일생이라는 이름으로, 국가나 인류의 흔적은 역사라는 이름으로 남는다. 그 가운데는 길이 남기고 싶은 훌륭한 흔적도 있고, 두 번 다시 되풀이되어서는 안 될 수치스러운 자취도 있다. 이런 남기고 싶지 않은 흔적을 가진 개인이나 국가는, 그것을 혹 감추거나 지워버리기 위해 모든 수단을 동원해 보지만 항상 성공할 수는 없다. 과거 한국 사회를 떠들썩하게 했던 어느 유명 큐레이터의 가짜 학위 소동은, 본인의 몰락으로 끝날 수도 있는 사건이었다. 그러나 ‘인터넷은 죽지 않는다. 다만 숨어 있을 뿐이다’라는 유행어까지 만들어 낸 이 사건은, 서로의 이메일에 남긴 당사자들의 밀어 흔적들이 움직일 수 없는 증거가 되어서 큐레이터 주위 여러 사람의 파멸을 몰고 왔다. 그런가 하면 역사에는 국가적인 재난으로 인해 개인이 받은 고난이나 상처를 보듬고 그 치유에 지혜를 모았던 일도 있다. 조선조 인조 때 청나라의 침략으로 시작된 병자호란이 끝나자 포로로 끌려갔던 사람들이 조선으로 돌아오기 시작했다. 그중에는 많은 부녀자가 포함되어 있었는데, 이들의 육체적 순결이 사회적으로 문제가 되었다. 이에 인조는 한양 북쪽에 큰 목욕탕을 지어 놓고 거기서 몸을 씻고 성안으로 들어오는 귀환 포로는 모두 깨끗하니 문제 삼지 말라는 명을 내렸다 한다. 인조는 민생도 외교도 모두 실패한 왕이었지만, 상처 입은 흔적을 덮어 주는 일에는 왕다운 지혜를 보였던 셈이다. 사람은 가도 그가 남긴 글이나 훌륭한 작품은 영원히 남는다. 예술가들은 누구나 예외 없이 후세에 길이 남을 작품을 남기기 원한다. 과학자는 인류에 이바지할 위대한 문명의 이기를 발명하기를 꿈꾼다. 국가는 자국의 영토를 확장한다거나 민주주의 같은 좋은 제도를 세우려고 또 노력한다. 그러나 좋은 흔적이란 반드시 이런 위대한 업적이나 훌륭한 걸작품만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모든 사람이 페니실린을 발명한다거나 ‘안나 카레니나’ 같은 불후의 명작을 남길 수는 없다. 평범한 일생을 살다 가는 대부분의 사람에게 그런 일은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우리네 잔잔한 일상의 흔적들도 그런대로 이어지고 또 후세에 남길 만한 이유와 가치가 있다. 일본 작가 오자키 가즈오는 “곤한 인생 속에도 반드시 둘도 없는 이야기의 결정(結晶) 같은 것이 숨어 있다.”고 했다. 유형의 흔적이거나 무형의 그림자거나, 비범하거나 평범하거나 간에 사람들은 뒤에 남은 사람들에게 무언가 흔적을 남기고 간다. 그것은 평소의 생활이나 일기로도 남고, 생전의 그에 관한 타인의 기록이나, 비문이나 요즘은 인터넷에도 남는다. 아름다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나는 이 아름다운 세상에 아름다운 흔적을 남기고 떠나고 싶다. 내 삶이 고스란히 담긴 책을 남겼으면 한다. 자랑스러웠던 일들을 기록한 자서전이 아니고 나의 평생의 사랑과 삶이 배어 있는, 진실이 묻어나는 그런 글을 말이다. 찰스 램의 “도시와 시골의 모든 소리를 포함한 인생의 소리 중에서 문 두드리는 소리보다 더 듣기 좋은 것은 없다”고 할 때의 그런 느낌의 소리로 기억되고 싶다. 내 자손들이 큰 잔치를 치를 때마다 반드시 펴보는 레시피(recipe) 책 한 권쯤도 써 두고 갔으면 한다. 마음에 상처로 남는 기억이 아닌, 따뜻하고 좋은 자취를 남기고 싶다. 이러한 자취들을 하루아침에 만들어지지 않는다. 인생의 끝 무렵에 다다라서 급조할 수 있는 일은 더더욱 아니다. 그 일은 오늘 삶의 뜰에서 쌓아야 한다. 지금 있는 이 자리에서 매 순간, 하루하루 날줄과 씨줄로 엮어가야 하리라. 한 땀 또 한 땀 정성 들여 수 놓아야 할 인생의 대명제다. 그렇게 순간순간 남은 삶의 궤적을 그려 가고 싶다. 박유니스 / 수필가문예마당 수필 무언가 흔적 밀어 흔적들 조선조 인조
2026.06.25. 18:31
지난겨울은 어느 해보다 비바람과 폭풍이 유난했다. 겨울의 혹한이 심할수록 다시 찾아오는 파란 봄 하늘은 더 큰 환희와 희망을 준다. 뒷산 골짜기에서 피어오르는 아침 안개는 긴 겨울잠에 빠져있던 생태계를 일깨우는 창조주의 숨결 같고, 오솔길 옆의 노란 민들레꽃은 창조의 경이로움 그 자체다. 이런 신비로운 생성의 원리를 맞이할 때면, 인간도 창조주의 섭리에 따라 크고 넓은 어머니의 품에서 태어나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한 생명이 태어나 성장할 때까지 어머니의 품은 한없는 우주이고 존재의 모두였을 것이다. 우주를 형성하고 있는 삼라만상은 항상 제 자리를 지키고 있다. 먼 옛날 여행자들은 밤하늘의 별을 보며 목적지의 방향을 찾았다고 한다. 어린아이가 성장하며 삶의 방향을 잃을 때면, 어머니의 모습과 음성을 생각하며 삶의 방향을 찾을 것이다. 어린 시절에는 어머니의 말씀이나 행동이 삶의 나침반이 되었고, 성장 후에도 이런 어머니의 잔상이 초심(初心)으로 살아가게 하는 삶의 이정표가 되었다. 초심이란 태어날 때의 순수하고 겸손한 마음, 어린아이와 같은 맑은 마음의 상태를 유지하는 힘이며, 한때 좌절해도 다시 시작할 수 있는 원동력의 마중물이 되었다. 어린아이는 성장하면서 점차 초심을 잃고 물질적 욕망과 명예욕을 추구하며 일생을 보낸다. 대부분의 삶을 ‘세상 놀이’에 집중하며 세월을 보내고 정신적, 육체적으로 한계가 다다른 후에야 비로소 삶의 유한성을 인정하고 지나온 길을 돌아보게 된다. 젊은 시절이 가능성을 확신하고 성취를 갈망하는 시간이었다면, 노년기는 한계를 수용하고 남은 삶을 정리하며 인생의 본질로 관심이 이동하는 시기일 것이다. ‘명상록’의 저자로 로마의 황제이자 철학자인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자연이 주는 것을 사랑하라”고 했다. 즉, 노년의 신체적 변화, 기억력 감소, 관계의 상실들과 같은 현상을 저항의 문제가 아니라 수용의 문제로 보았다. 젊을 때는 죽음이 추상적인 개념이지만, 노년에는 그것이 구체적 현상이라고 생각했다. 죽음을 의식할 때 비로소 진정한 자기의 삶을 살고 가장 진실한 초심으로 돌아간다고 생각했다. 작가 헤르만 헤세는 “삶이란 어머니의 요람에서 시작하여 우주의 원리에 따라 마지막으로 우주의 거대한 요람으로 돌아가는 것”이라 했다. 육체의 욕구가 빠지면 욕망의 소음이 줄어들고 영혼의 빛이 더욱 투명한 초심으로 돌아간다는 것이 작가의 논리다. 바람이 불면 나뭇가지가 흔들리듯이 인간의 결심이 흔들리는 것도 자연스러운 본성으로 인정했다. 자책보다 다시 시작하는 깨달음으로, 초심을 찾으려 노력하는 인간 내면의 마음가짐이 훌륭한 삶의 과정이라고 한다. 젊음은 무엇을 가질 것인가의 시간이라면, 노년은 “나는 무엇인가”를 묻고 어떻게 내려놓을 것인가를 생각하는 시간이라는 것이다. 인류 역사는 초심을 잃게 되면 혹독한 시련이 따른다는 것을 보여준다. 국민과 한 약속을 잊은 지도자의 독선, 사랑으로 맺어진 부부의 이혼, 창조주에게 헌신과 믿음을 약속한 성직자의 일탈, 사회봉사를 약속한 인사들의 배신 등 모두 초심을 잃어 나타나는 모습이다. 그리고 그 결과는 개인적 비극, 혹은 국가와 사회적 재앙을 초래하기도 한다. 인생의 마라톤에서 생의 종착점이 희미하게 보이는 지점에 있는 세대에게는 영국의 극작가 버나드 쇼의 묘비명에 있는 말이 가슴에 와 닿는다. 그의 묘비명에는 ‘I knew if I waited around long enough, something like this would happen’이라는 문구가 쓰여 있다. 조금 편안한 해석이지만 ‘우물쭈물 살다가 결국 이렇게 될 줄 알았다’라는 말이다. 이는 인생의 유한성 속에서 초심으로 돌아가 살지 못하는 어리석은 삶을 후회하는 글이다. 우리 모두 아름다운 이 세상에서의 즐거운 소풍을 마치고 창조주의 품으로 돌아갈 때까지 초심(初心)으로 살 수 있기를 기원해 본다. 이영송 / 한미문화교류재단 회장문예마당 초심 수필 모두 초심 이혼 창조주 마음 어린아이
2026.06.11. 19:47
남편에게는 여러 명의 절친이 있다. 고등학교 시절 만나 사십 년을 함께해 온 친구들이다. 그중 한 명이 나의 작은 오빠다. 친구가 매제가 되었으니 두 사람의 인연은 더욱 각별해졌다. 무엇보다 미국에 사는 우리를 대신해 남편의 빈자리를 살뜰히 채워 주는 오래된 벗이자 든든한 버팀목이다. 지난 주말, 한국에서 걸려온 오빠의 전화에 남편은 한동안 말을 잇지 못한 채 눈가가 붉어졌다. 놀라 다가서자, 수화기 너머로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조용히 새어 나왔다. “ㅇㅇ야, 지난달에 ㅇㅇ 사십구재 지냈어.” 믿기 어려운 비보였다. 고교 시절부터 우리 집을 드나들던 그였기에 나 또한 쉽게 받아들일 수 없었다. 넉넉지 않은 형편 속에서도 부모님께 공부로 보답하겠다던 그는, 고교 삼 년 내내 전교 최상위권을 지켜냈다. 누구보다 반듯하고 성실한 사람이었다. 작년 가을, 남편과 함께 한국을 방문했을 때 처음 그의 투병 소식을 들었다. 몇 해 전 대장암이 발견되었지만 수술은 성공적이었고, 한때 건강을 되찾는 듯했다. 삶에 대한 의지가 강했던 그는 힘겨운 항암 치료를 열두 차례나 견뎌냈고, 회사 복직을 준비하던 중 암세포가 폐로 전이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미국에서 온 친구들에게 아픈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다며, 건강한 모습으로 다시 만나자며 다음을 기약했었다. 그러나 결국 더 이상의 치료가 어렵다는 의사의 소견 앞에서 그는 손을 놓았고, 그 약속이 이렇게 끝날 줄은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다. 세속을 벗어나 마지막을 스스로 정리하고 싶었던 걸까. 그는 지리산의 한 사찰에 머물며 템플스테이로 시간을 보냈다. 바쁜 와중에도 오빠는 사흘 내내 그의 곁을 지켰다. 놀라울 만큼 담담했고, 죽음을 앞둔 사람이라고는 믿기 어려울 만큼 평온했다고 한다. 어쩌면 운명을 밀어내기보다 받아들이는 쪽을 택했는지도 모른다. 모든 것을 내려놓은 자리에서, 비로소 평안을 얻은 사람처럼 보였다. 그리고 끝내, 자기 삶의 방향을 스스로 정한 듯했다. 지리산에서 돌아온 뒤, 그는 조용히 이별을 준비했다. 삶의 흔적을 하나둘 덜어낸 뒤 그가 향한 곳은 스위스였다. 가족과 함께한 마지막 여행. 특별할 것 없는 하루들이었지만 그에게는 무엇보다 소중했을 것이다. 사랑하는 이들이 곁에 있는 자리에서 삶의 마침표를 찍었다. 남겨질 사람들을 뒤로한 채 걸어야 했던 길, 그 발걸음의 무게를 어찌 다 헤아릴 수 있을까. 어쩌면 그것은 그가 선택한 가장 고독한 사랑이었을지도 모른다. 유해는 스위스 어딘가에 뿌려졌다. 정확한 지명 대신 위도와 경도만이 기록처럼 전해졌다. 우리는 오랫동안 그의 선택을 이해하려 애썼다. 머리로는 이해한다고 말하면서도, 가슴은 끝내 따라오지 못했다. 존엄한 죽음이란 무엇일까. 살아 있음은 끝까지 붙들어야 하는 것인가. 고통을 멈추는 선택은 과연 비인간적인가. 그 질문들 앞에서 누구도 쉽게 답할 수 없다. 다만 남겨진 사람들의 슬픔만은 어떤 논쟁으로도 쉽게 위로 되지 않는다. 친구들이 마음을 모았다. 그가 가장 좋아하던 백일홍을 마지막으로 머물렀던 지리산 사찰 앞마당에 심기로 했다. 차가운 좌표로만 남겨 둘 수 없어, 고국의 흙과 계절 속에 다시 피워 두고 싶어서다. 뜨거운 햇살에도 쉬이 시들지 않는 백일홍처럼, 그는 오래도록 친구들 곁에 머물 것이다. 예순을 채우지 못한 그의 시간은 해마다 돌아오는 꽃잎이 되어, 못다 한 우정을 다시 피우리라. 바람이 스치면 꽃잎이 가볍게 흔들리겠지. 그때마다 그가 보내온 안부가 풍경 소리처럼 우리 곁을 맴돌 것만 같다. 떠난다는 것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다른 모습으로 머무는 일인지도 모른다. 우리는 그렇게 보이지 않는 자리에서 서로를 오래 기억하며 살아갈 것이다. 김윤희 / 수필가문예마당 우정 수필 지리산 사찰 항암 치료 전교 최상위권
2026.05.21. 19:46
나는 무슨 일이건 마지막까지 미루는 좋지 않은 습관을 갖고 있다. 더는 미룰 수 없는 순간이 되어야 일의 능률이 최대치에 다다른다. 반전을 향해 가는 셜록 홈스처럼, 최후의 스퍼트를 남겨둔 운동선수처럼 매사에 뜸을 들이다가 마지막 순간에 해치운다. 시간적 여유가 조금이라도 있으면 도무지 능률이 오르지 않는다. 몇 해 전 4월, 세 번이나 마감일에 쫓겼다. 첫 번은 12일의 재산세 납부를 마지막 날인 12일까지 미루었다. 두 번째는 15일의 소득세(Income Tax) 신고 마감이었고, 마지막으로는 16일의 2020 센서스 등록이었다. 입안이 타들어 가도록 마감 시간에 맞추느라 이리 뛰고 저리 뛰다가 몸살까지 호되게 앓았다. 자신의 삶이 언제 끝나는지 모른다는 것은 신의 배려이지 싶다. 무슨 일이건 마지막까지 미루는 사람에게 이 세상을 떠나는 날이 얼마나 분주할 것인가 생각하면 생의 마감일을 모르는 것은 신의 은총임이 분명하다. 독일 문호 괴테는 임종의 순간에, “More light, more light!”라고 말했다고 한다. 준비 없이 마지막을 맞을 나는 틀림없이 “More time, more time!” 외칠 것 같다. 그리되면 내게 줄 시간을 더는 갖고 있지 않은 신께서는 얼마나 곤란하실까? 나는 ‘급한 일’보다는 ‘중요한 일’을 항상 먼저 처리하는 편이다. 그런데 학창 시절 시험 하루 전의 ‘전날 치기’ 저녁이 되면 내 알량한 삶의 철학은 중대한 도전에 직면하곤 했다. ‘프리어리떼’와 ‘앵뽀르땅스’가 내 속에서 충돌한다. 전자는 따뜻한 이불 속으로 발을 넣어버리는 것이고 후자는 좋게 받아야 할 시험 성적 결과다. 한 번도 확실한 선택을 못 한 채 그럭저럭 대한민국 교육부의 혜택을 모두 받았으니 나는 행운아 중의 행운아인 셈이다. 남편은 우선순위를 정해놓고 철저히 지키는 사람이었다. 아침에 출근할 때면 손목시계를 오른팔에 차고 있는데 그 이유가 그날 처리해야 할 일의 우선순위를 잊어버리지 않기 위한 표식이라고 했다. 매사가 흐릿한 내 습관을 당연히 못 견뎌 했다. 6·25 전란 때 우리 가족은 미처 남으로 피난을 떠나지 못해서 북한군 치하의 서울에서 석 달을 지냈다. 처음 얼마 동안은 집에 있던 식량으로 그럭저럭 버텼지만 점차 양식 구하기가 어려워졌다. 9·28 서울 수복이 가까웠던 그 날도 아버지는 한강 남쪽 농가로 쌀을 구하려고 물물교환할 물건들을 준비해서 집을 나섰다. 이런저런 준비와 어머니의 늑장으로 다른 날보다 반 시간가량 늦어서 광나루에 도착하셨다. 그런데 바로 그 자리에 30분 전에 미군의 폭격이 있었다. 광나루 다리는 흔적도 없이 무너져 내렸고, 주변은 아수라장이 되어 있었다. 리더십에 관한 세계적인 권위자 스티븐 코비 교수는 성공하려면 ‘당장 급한 일보다는 멀리 보아 중요한 일에 몰두하라’고 권한다. 여기서 성공이란 ‘소소하고 일시적인 성공’이 아니라 ‘원대하고 근본적인 성공’을 말한다. 내가 지키려는 ‘중요한 일 우선주의’는 이런 차원 높은 성공 철학에서 비롯된 것은 아니다. 나는 일찍부터 짧은 성공과 승리의 덧없음을 맛봤다. 6·25 전란 중 벽촌의 조그만 피난 초등학교에 다니던 나는 학급 자치회장에 당선되면서 들로, 산으로, 절집으로 함께 쏘다니던 피난지의 둘도 없는 친구를 잃었다. 그 친구는 자치회장 투표에서 나보다 한 표를 적게 얻었다. 그 일은 지금도 내 몸속 어딘가에 가시처럼 박혀 아픔을 준다. ‘불가근불가원’이라는 말이 있다. 나는 불가해한 인생과 앞으로 ‘불가속불가서(不可速不可徐)’로 경주할 생각이다. 인생이란 예측불허이며 어떤 노력으로도 손에 넣을 수 없는 거대한 신의 놀이터이다. 요즘 그것을 더욱 절절히 느낀다. 회사 일이건 집안일이건 마지막까지 뭉그적거리다가 일이 커지고 나면 남편의 기색이 심상치 않게 변했다. “원소는 장강을 너무 일찍 건넜기 때문에 조조에게 패한 것이다”라고 내가 눙치면 남편은 “시저가 갈리아에서 귀환할 때 루비콘강을 건너지 않았으면 그때 폼페이우스에게 당했다”고 반박했다. 그는 인생의 강도 그렇게 건넜다. 수술 후 나온 남편의 병리 보고서(Pathology Report)는 ‘완치는 어렵지만 컨트롤은 가능하다(not curable, but controllable)였다. 얼마 후 그는 루비콘강을 건넜다. 신의 놀이터는 인생의 강에도 있었다. 박유니스 / 수필가문예마당 놀이터 수필 성공 철학 회사 일이건 마감 시간
2026.04.30. 17:49
무슨 거창한 문화적 충돌은 아니라 해도 갑자기 낯선 땅으로 떠밀려와서 이민자로 살아간다는 것은 그 자체가 충격일 수밖에 없다. 천사의 도시라는 로스앤젤레스에서 세탁소부터 시작하기로 했다. 부족한 영어뿐만 아니라 주일이면 교회에 갈 수 있다고 했으니 솔깃했다. 그렇게 용감하게 출발은 했지만 어깨너머로 익힌 기술이 온전할 리가 없다. 거기에다 무슨 매상의 강박관념까지 있었으니 매일 일어나는 내 실수는 어쩌면 당연했는지도 모른다. 세탁소 문을 연 첫날부터 나는 어느 백인 손님 넥타이에 큰 구멍을 내고 말았다. 좀 더 잘해주려 했던 것인데 그런 형편이었으니 세탁비는커녕 손님에게 백배사죄를 하고 새것 값으로 물어 주어야 했다. 그리고 새벽부터 보일러를 켜고는 우람한 세탁 기계를 돌려야 하는 일인데, 솔벤트의 역한 냄새는 숨쉬기도 어려울 지경이다. 더구나 그런 중에 있던 큰 사고는 옷 주머니에 볼펜이 있는 줄 모르고 기계를 돌린 바람에 그만 모든 손님 옷은 잉크 범벅이 되고 말았다. “이제 이 일을 어쩌지…. ” 저절로 나온 내 탄식에 아내는 기가 막혔던지 평소 하던 잔소리조차 유보하고 있었다. 그런 뒤에 손님들은 하나같이 새것이라고 우겨댔으므로 그나마 손님이 떨어질세라 아내는 억지 미소를 지어가며 새 옷값으로 변상해야 했다. 또 못된 손님 때문에 법원까지 가는 일이 가끔 있었다. 경직된 분위기 속에 옷의 색이 달라졌다며 사진을 내밀면 재판장은 코메리칸의 어설픈 말은 들어보지도 않고 무조건 변상하라는 판결을 내린다. 억울하기 짝이 없는 일인데 미리 사진까지 찍어두었다는 수상한 정황은 아예 고려되지 않는다. 그런 속에서도 일 년이 금세 지나갔다. 그동안 나도 열심히 했지만 무엇보다 아내가 큰 역할을 했다. 그리고 몇 안 되는 직원들도 최선을 다해 주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다. 카운터 아가씨가 갑자기 놀란 목소리로 나를 찾는다. 조금 전에 세탁 양복 한 벌 찾아갔던 손님이 크게 찢어진 옷을 들고 다시 왔다는 것이다. “아니 뭐라고? 잘 세탁해서 다림질까지 해준 양복이 찢겨있다니…. ” 도무지 있을 수 없는 일인데, 그 손님은 ‘이제 너희들이 어쩔 것이냐?’ 하는 표정으로 버티고 있었다. 나는 급히 양복부터 살펴보았다. 윗도리에는 한 뼘 정도 칼로 그어진 부분이 있었다. 한 눈으로 봐도 자작극이 분명했다. 세탁 기계는 옷을 찢을 만한 곳이 없을 뿐만 아니라 또 최소 다섯 사람의 손을 거쳐야 하는 과정에서 아무도 보지 못할 리가 없기 때문이다. 옷을 들고 나간 그 몇 분 사이에 저지른 짓이 분명했다. 하지만 심증 외에는 아무런 물증이 없으니 결국 6달러짜리 일 해주고 그 100배의 날벼락을 맞게 된 것이다. 두 눈 뜨고 당하는 일에 더욱 분통 터진다. 나는 우선 시간을 벌기 위해 3일 뒤에 다시 오라고 했다. 그는 성공의 확신을 잡았던 모양이다. 희죽 웃으며 나가는 발걸음조차 당당하다. 그렇다고 질 것이 뻔한 재판정은 기대도 하지 말아야 한다. 나는 찢긴 양복을 앞에 걸어놓고 이리저리 생각에 잠겼다. “어찌 되든 본인의 짓을 증명하면 되는 것이 아닌가.” 논리야 쉽지만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다는 것은 언제나 현실문제다. 나는 곰곰이 생각 끝에 명탐정 ‘셜록 홈스’ 흉내를 내기로 했다. 그렇게 조심스럽게 옷을 관찰하니 양복 안감까지 잘려있어서 옷을 차 문에 걸어놓고 바깥쪽에서 칼로 그은 것이 틀림없었다. 그런 잠시 뒤였다. 그만 나도 모르게 큰소리를 치고 말았다. “옳거니 바로 이것이다.” 드디어 약속했던 날이다. 그는 새 양복을 얻는 기대 때문인지 휘파람을 불며 우리 앞에 나타났다. 그러니 이제부터 창과 방패의 대결이 시작된 셈이다. 이번에는 내가 먼저 너스레를 떨었다. “손님 잠깐 앉으십시오. 양복 찢은 범인을 잡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비닐 포장지에서 범인의 지문을 찾았다는 경찰서 전화가 방금 왔습니다.” 바로 그때였다. 아직 내 말이 채 끝나지도 않았는데 그는 ‘후다닥’ 뒤도 돌아보지 않고 뺑소니치고 있었다. 그야말로 전광석화 같은 재빠름이다. 그러자 모두 “와, 하하하” 하는 큰 웃음보가 합창처럼 터져 나왔다. 처음부터 이 일을 걱정스럽게 보던 우리 직원들이 함께 터트린 웃음이었는데, 그 유쾌한 웃음 속에는 긴 여운이 담겨 있었다. 이걸남 / 수필가문예마당 세탁소 수필 세탁 양복 세탁 기계 양복 안감
2026.04.30. 17:48
태평양 연안 주립공원으로 5일간 캠핑을 다녀왔다. 해안 언덕 위 키 큰 유칼립투스 나무 우거진 캠프 사이트의 풍광이 아름다운 곳이었다. 바다를 바라보면서 아침 먹고, 저녁 준비하면서 바다에 눈길 주고. 세상천지가 나의 정원이 됐다. 해풍에 빛바랜 투박한 목재 캠프 테이블에 휴대용 버너를 올리고 압력냄비에 쌀을 안쳤다. 야외에선 바람에 불길이 흩어지니 빈 물 박스를 거꾸로 엎어 바람막이를 만들었다. 건너편 자리 캠퍼가 수돗가에 물을 받으러 양동이를 흔들며 다가오더니 “하이” 하고 인사를 하고 자기 이름이 “로이”라고 밝힌다. 솔뱅에서 왔단다. 우물쭈물하더니 그가 말했다. 방울뱀을 키우냐고. 깜짝 놀라 “왜 내가 방울뱀을?”이라고 했더니 그가 손가락으로 물 박스를 가리켰다. “소리 나잖아 쉿 쉿 쉿”. 그 말에 나는 빵 터졌다. 압력냄비의 압력 추 돌아가는 소리가 멀리선 방울뱀 소리 같았나 보다. 가까이 와보라고 해서 압력 추 돌아가는 것을 보여줬더니 계면쩍게 웃으며 밥 냄새가 구수하단다. 접시에 갓 지은 윤기 나는 하얀 쌀밥에 소금간하고 참기름, 깨소금 뿌려 조미김과 함께 맛보라고 나눠줬더니 “까만 바다풀에 싸 먹는 밥이 맛있다”고 웃었다. 솔뱅에서 온 아저씨 둘이 앞뒤로 바나나보트를 머리에 뒤집어쓰고 언덕을 내려갔다. 바다에서 종일 놀다 해 질 녘에 토마토같이 빨갛게 익어 돌아와선 살아서 파닥거리는 팔뚝만 한 생선을 나눠줬다. 남편은 신이 났다. 캠프파이어 화덕에 장작을 태워 숯이 되어갈 즈음 생선을 구우니 숯불에 떨어지는 생선 기름 냄새가 고소하다. 소금만 뿌린 구운 생선 맛이 기가 막히다. 솔뱅아저씨들은 중년 남자 다섯에 사춘기 청년도 몇 보였다. “부인들은 어디 계세요?” “처음엔 따라오더니 집에서 여자들끼리 놀겠대요.” 일주일 동안 여자들만의 휴가라서 더 좋아한단다. 청년들은 함께 못 온 친구의 아이들이고, 자기 아들들은 파트타임 일 하느라고 못 왔단다. 아버지 친구들을 삼촌 따라오듯함께 올 수 있는 그들은 공동체 속에 살아서 마음이 안정돼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보기 좋아 보였다. 며칠을 가까이서 지내다 보니 오가며 이야기를 나눴다. 22피트짜리 캠핑 트레일러에 모터홈, 밴 트럭 등 주차된 차량 다섯 대를 보며 캠핑 다닐 준비가 잘 되었다고 했더니 가까이 가서 보면 다 고물 수준이란다. 아버지 친구들이 더는 필요 없게 돼서 거저 얻다시피 다들 한 대씩 장만했고, 재산목록 1호는 오토바이보다 작은 신품 전기 자전거뿐이란다. 잔디밭에 전기 자전거 8대가 누워있다. 한낮에 삼촌과 조카들이 함께 자전거로 씽씽 달리는 모습이 평화롭다. 그들은 솔뱅에서 나고 자라 같은 학교에 다녔고 몇몇은 도시로 나가 부대껴 봤지만 복잡하고 소란스러워 매일 스트레스를 받았다고 했다. 그렇다고 돈이 모이는 것도 아니어서 고향으로 돌아왔단다. 작은 도시 솔뱅에서 사니 생활비도 적게 들고 집과 일터, 생활반경이 모퉁이만 몇 번 돌면 되는 손바닥 안이라 자동차를 탈 일도 많지 않아 웬만한 곳은 자전거로도 충분하다고 했다. 자동차 정비소도 친구가 하고 빵 가게도 철물점도 다 아는 사람이 하니 편리한 점이 많단다. 사는데 많은 돈도 필요하지 않고 서로 잘 아는 사이라 뻐길 일도 없으니 쉬운 일 하면서 적게 벌고 마음 편히 살아서 고향이 좋다고 한다. 하루키의 산문집 ‘링켈한스섬의 오후’에 나오는 소확행이 바로 이들이 사는 삶이 아닐까? 실현 가능한 소소한 일상의 행복. 해가 지고 하늘엔 별이 총총이다. 장작 타는 불꽃을 보는 것도 타닥타닥 옹이가 타는 소리도 듣기 좋다. 라디오에서 빌리 조엘의 피아노맨이 흘러나온다. “오늘 밤 우리에게 노래를 불러주게. 우린 모두 멜로디에 흠뻑 빠질 준비가 돼 있다네‘ 솔뱅아저씨들이 따라 부른다. 박자 음정 다 틀려도 끝까지. 'la la la di da da~~la la di da da dum~~' 나는 좋아하는 빌리 조엘의 노래를 저들처럼 따라부르지 못해 아쉽다. '돌아와요 부산항에'라면 나도 잘 따라 부를 수 있는데. 김정희 / 독자문예마당 로이 수필 방울뱀 소리 전기 자전거 아버지 친구들
2026.04.16. 18:39
어릴 때부터 영화를 좋아했다. 사람 이야기를 다룬 영화에 점점 흥미를 가지게 되었다. 대부분 영화는 감동적이지만 소설처럼 허구다. 올림픽에는 진짜 휴먼스토리가 넘쳐난다. ‘2026년 25회 동계 올림픽(Milano Cortina 2026)’에도 감동적인 사연들이 있었다. 지난 2월 6일 있었던 개막식은 이탈리아 밀라노가 패션의 중심이라는 것을 세계에 알리는 데 손색이 없었다. 참가국 93개국, 빙상종목은 밀라노에서, 나머지 종목은 코르티나와 그 주변 지역에서 동시에 진행되었다. 나는 매일 저녁 8시부터 TV 채널을 올림픽 경기에 맞춰 놓았다. 경기를 보느라 다른 일을 미룰 정도였다. 올림픽 중계 채널에서는 각 종목에 출전할 메달 후보 선수들을 상세히 보도했다. 본선 경기를 앞둔 며칠 전부터 TV 화면을 통해 차곡차곡 이 순간을 준비한 그들의 긴 여정을 시청자들에게 알리는 것이다. 특별한 사연들이다. 이들의 고생담은 다음 단계가 어떻게 펼쳐질지 궁금함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이번에도 놀라운 사건들이 있었다. 브라질 스키 선수가 브라질 최초의 동계 올림픽 금메달을 따냈다. 브라질은 물론 주변의 열대 나라들도 삼바 축제에 빠졌다. 또 사상 처음으로 일본 남녀 혼성 피겨 스케이트 팀이 금메달을 땄다. 그런데 파트너 남자 선수의 눈이 사시(斜視)였다. 카메라에 잡힌 그의 눈동자는 평행이 아니었다. 금메달이 확정되자 그는 다른 선수보다 더 많은 눈물을 흘렸다. 내가 사람 이야기에 감격하고 눈을 떼지 못하는 이유다. 선수가 되기까지, 메달을 따기까지, 상상할 수 없는 부담감을 뛰어넘은 그들의 도전정신은 정말 놀랍다. 거기에는 가족의 따뜻한 사랑과 격려가 함께 있었다. 유난히 내 시선을 끈 선수가 있었다. 바로 미국 봅슬레이 대표선수 일라나 마이어스 테일러다. 전에 나는 봅슬레이는 물론 그녀에 대해 아는 것이 없었다. 그녀는 내가 사는 캘리포니아주 오션사이드에서 태어나 조지아주 더그라스빌이라는 곳에서 자랐다. 프로 축구선수였던 아버지의 영향으로 일찍부터 운동을 시작했다고 한다. 일라나는 2007년부터 올림픽에 출전해 메달을 땄지만 금메달은 없었다. 방송에서는 그녀가 이번에는 금메달을 거머쥘 것인가를 조명하고 있었다. 그녀의 경기가 시작되기 전날, 그녀의 일상이 TV 화면을 통해 전국에 소개되었다. 올해 마흔한 살인 그녀에게 다섯 살 난 아들 니코와 세 살인 노아, 두 아들이 있었다. 화면에 비친 아이들은 엄마의 메달들을 목에 걸며 놀고 있었다. 일라나가 옆에서 따뜻한 눈길로 아이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두 아이가 그녀와 수화로 대화를 시작했다. 순간 가슴이 쿵 하고 내려앉는 것 같았다. 일라나는 세 살, 다섯 살 된 아이들이 있기는 좀 늦은 감이 있어 보였다. 그녀는 2014년, 코치이자 동료 봅슬레이 선수인 닉 테일러와 결혼했다. 7년 후 첫아들이 장애를 가지고 태어났다. 그런데 둘째도 같은 장애를 가졌다. 일라나는 독실한 기독교인이라고 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녀에게 말 못하는 청각장애를 가진 아들을, 하나도 아닌 둘을 안겨주었다. 그녀를 대신해 내가 신을 향해 원망을 터뜨렸다. 왜 이런 가혹한 일이 세상에 존재하느냐고 하늘을 향해 소리라도 치고 싶었다. 그런데, 그런 와중에 화면 속 아이들은 웃고 있었다. 고개를 들고 엄마의 얼굴을 바라보며 아이들이 손가락으로 엄마와 소통하고 있었다. 소리는 없었다. 서로를 바라보는 따뜻한 눈빛만 있었다. 다음 날 아침 그녀의 소식이 전해졌다. 그녀가 금메달을 따냈단다. 나는 그녀의 경기를 보기 위해 일찌감치 저녁을 먹고 TV 앞에 앉았다. 그녀에게 축하를 보내야 했다. 그녀의 경기가 시작되었다. 얼음 트랙의 전체 길이는 1445m, 시속 150km를 넘나드는 속력으로 봅슬레이가 달렸다. 메달은 0.01 초의 간격으로 금과 은으로 달라진다. 경기가 끝났다. 그녀가 금메달을 획득했다는 소식이 전광판에 떴을 때, 그녀는 아이들을 끌어안고 환호했다. 한 여성이 달려와 그녀와 아이들을 끌어안았다.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러내렸다. 금메달을 목에 건 일라나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남편, 그리고 두 아들과 자신의 아이들을 보살피는 유모, 메이시에게 영광을 돌린다고. 일라나와 메이시에게 카메라 플래시 세례가 쏟아졌다. 바쁜 선수 생활을 하는 그녀가 아이들을 맡길 믿을만한 유모를 찾는 일은 쉽지 않았을 것이다. 직업을 가지고 있는 엄마들의 어려움이다. 청각장애를 가진 아이들과 엄마의 무거운 마음을 유모 메이시가 헤아렸으리라는 것을 짐작하고도 남는다. 나는 두 여자의 끈끈한 관계를, 서로를 향한 사랑과 신뢰를 느꼈다. 그들이 함께 아이들을 돌보았을 힘든 세월을 그려 볼 수 있었다. 누구의 인생이든 가장 빛나는 순간이 있다. 별처럼 ‘반짝’하는 순간이. 봅슬레이 미국 대표선수, 일라나 마이어스 테일러는 2026년 동계 올림픽에서 생애 처음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오랫동안 기다렸던 그녀만의 빛나는 순간이었다. 그녀가 빛을 발할 때 나는 우연히 그 자리에 있었다. 어떤 엄마에게 아낌없는 갈채를 보낸 순간을 나 또한 잊지 못할 것이다. 마야 정 / 수필가문예마당 수필 봅슬레이 대표선수 올림픽 경기 동계 올림픽
2026.04.09. 18:23
인천공항 출국 게이트 밖에 눈이 내린다. 3층 출국장 끝, 대형 유리창 밖 하늘에 흰 눈발이 분분히 부딪혀 흩어진다. K와 걷던 이화동 골목길에 내리던 눈발과 닮았다는 생각을 한다. 아니 그 길에서 찾아 들어간 어느 찻집 유리창에 부서지던 그 눈발이다. 며칠 전 동창 모임에서 K가 캐나다 토론토에서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들었다. “탑승객 여러분, 눈 때문에 탑승이 지연되겠습니다.” 탑승객들은 별 동요 없이 눈 내리는 창밖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다. 봄가을에만 찾던 한국을 처음으로 초겨울에 갔다. 서울의 멋진 설경을 기대했지만 11월이 다 가도록 눈 소식이 없더니 떠나는 오늘 새벽부터 눈이 내린다. 서울에서의 마지막 날 내리는 첫눈! ‘눈은 푹푹 날리고 나는 혼자 쓸쓸히 앉아 소주를 마신다. 소주를 마시며 생각한다. 나타샤와 나는 눈이 푹푹 쌓이는 밤, 흰 당나귀를 타고 시골로 가자. 마가리로 가자.’ 백석이 나타샤와 가려고 했던 마가리는 어디쯤일까. 대학에 입학하던 해, 과 신입생 오리엔테이션에서 K를 처음 만났다. 전공과 교양 과목 여러 강의를 함께 들었지만 마주칠 때마다 서로 목례만 하고 지나치곤 했다. 1학년을 마치고 K는 소문도 없이 사라졌다. 군대에 갔다고 했다. 몇 마디 나눠 본 적도 없는데 강의실이 텅 빈 것 같았다. 다시 개강하고 교정의 개나리 가지마다 노란 봉오리가 막 터질 무렵, 학교로 보내온 그의 편지를 받았다. 첫 휴가를 기다린다고. 무척 보고 싶다고. 휴가 중 많은 시간을 함께하고 싶다고 했다. 3학년 가을 학기가 시작되어 교정의 단풍나무잎이 조금씩 붉어지기 시작할 때 K는 학교로 돌아왔다. 한 번 끊긴 지식의 광맥을 다시 이어가기가 쉽지 않은 듯 했지만 그는 시간을 내어 나와 자주 만났다. ‘사랑하는 친구들이여, 내가 죽은 후에 내 무덤가에 한 그루 버드나무를 심어주오. 그 부드러운 낙엽들과 내가 잠든 땅 위의 가벼운 그늘을 나는 사랑할 것이오.’ 알프레드 뮈세의 에피타프(Epitaph, 묘비명)를 주고받으며 먼 훗날 파리 페르 라셰즈에 있는 그의 무덤에 함께 가기로 약속했다. 도서실에서, 늦가을 오후의 교정을 걸으며 우리의 학문과 사랑은 익어 갔다. 졸업하고 도미 준비로 바쁜 날들을 보내는 동안 그도 졸업 후의 거취와 장래 문제를 고민하며 자주 만나지 못하는 사이, 빠르게 날들이 지나갔고 이곳 대학원 개강에 맞춰 나는 도미했다. 시간이 흘러 K도 졸업했고 그 얼마 후, 그는 파리로 유학을 떠난다는 소식을 보내왔다. 기숙사 창문으로 보이는 샌타모니카 바다에 낙조가 내려앉고 있었다. 그를 기다렸던가. 한국 바다와 닿아 있는 그 바다를 그 저녁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몇 년이 지난 후, 그가 프랑스 여성과 결혼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여러 해가 지난 어느 날, 뜻밖에 그의 전화를 받았다. 캐나다 밴쿠버로 이주했다고 한다. 반가웠다. 세월이 많이 흘렀어도 우리는 서먹했던 것도 잠시, 어제인 듯 친밀하게 대화를 나눴다. 그동안 지내 온 얘기, 친구들 소식, 미국과 프랑스, 캐나다의 역사와 현재 상황 등 긴 대화를 이어갔지만, 대화 가운데 이미 뮈세나 아폴리네르는 없었다. 그는 유럽의 진보 정권들에 염증을 느끼고 프랑스에 대한 환상도 많이 옅어진 듯했다. 우리 대화는 자주 끊기고 때로는 의견 충돌로 말다툼하기도 했다. 그는 곧 있을 미국 대선에서 민주당이 집권하면 캘리포니아 쪽 태평양은 쳐다보지도 않을 것이고 나를 보러 LA로 내려오려던 계획도 취소한다고 했다. “우린 만나기 어렵겠네. 누가 대통령이 되든 캘리포니아는 민주당 텃밭이거든. 나는 심지어 투표도 하지 않아. 내가 어느 후보를 선택하든 캘리포니아는 민주당이 가져가니까.” “와이프가 언어 문제로 많이 힘들어해. 자꾸 토론토로 옮겨 가자고 하네. 그쪽은 프랑스어가 더 많이 통용되니까.” 언제부터였던가, 어렴풋이 너의 신변에 이상이 생긴 듯한 느낌이 들었어. 토론토로 이주한 후부터 연락이 뜸해졌고 그 후, 너의 와병 소식을 풍문으로 들었지. K, 너는 또 홀연히 가 버렸네. 통보도 없이, 이건 반칙이야, 세 번째의. 처음 입대했을 때, 결혼했을 때 그리고 이번까지. ‘그리운 K, 세상은 어수선해. 대통령이 이웃의 동맹국을 미국의 51번째 주가 되라고 하고 그 총리를 ’거버너 아무개‘라고 불러서 놀라는 중이야. 너희 총리에 대한 우리 대통령의 무례를 어떻게 설명할까. 한국의 대통령이 낙마한 다음 날부터 이곳에서도 대통령 반대 시위가 시작됐어. 한국 사태에 고무된 것일까, 그러나 미국은 잘못이 명백하게 밝혀진 고작 한 사람, 닉슨 대통령을 아주 점잖게 물러나게 한 미미한(?) 경력밖에 없지. 그에 비해 한국은 대통령을 외국으로 추방해 버리고 총탄으로 쓰러뜨리고 바위에서 뛰어 내리도록 코너로 몰아가고 줄줄이 감옥에 보내 버리고 5년 임기는 간데없이 2년이 지나면 탄핵해 버리는 대단한 민족이지. 진보는 진군하고 있고 보수는 보푸라기처럼 흩어졌어. 진보는 진행 중이고 보수는 보세 창고에 보관 중이야. 세상이 바뀌니까 우리 친구들도 당당해졌어. 오랜 세월 동안 간헐적으로 진보 인사들의 글을 소개하고 조심스레 동기들의 반응을 살피던 P가 며칠 전, 뜨뜻미지근한 친구들에게 강펀치를 날렸어. “우리는 S대 출신이고 4·19 데모에도 참여했다. 노인이 되면서 보수가 되는 것은 자기 재교육이 미진했다는 증거다”라고. 우리가 4·19에 참여했던 것이 어떤 이데올로기에 경도되어서였던가? 오로지 독재에 대한 저항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때부터 진보도 보수도 아니었던 나는, 그러니까 노인이 되면서 자기 재교육이 미진해진 것이 아니고 애초에 미진했던 존재네. 지금까지 그렇듯 분명한 진영 논리를 구사하는 노인들이 신기해. 이 나이까지 그토록 명료한 사고를 할 수 있는 친구들이 한편으로는 고맙고.’ 서울을 떠나던 날, 비행기에 탑승한 후에도 세 시간 가까이 더 기내에 갇혀 있었다. 한 대가 빠져나가면 그새 활주로에 쌓인 눈을 다시 쓸어 내고 나서야 다음 비행기가 뜰 수 있었다. 활주로 옆에 차례를 기다리는 여러 나라의 비행기가 장사진을 쳤다. 비행기에 갇힌 지 두 시간쯤 지나자, 불문율을 깨고 승객들이 자리에서 일어나서 기내를 활보하기 시작했다. 여기저기서 스트레칭을 하고 커피도 심지어 라면도 주문했다. 떠나 온 설국이 그립다. 떠나보낸 건 모두 그리워. K도 고국도 그리고 우리의 젊음도. 박 유니스 / 수필가문예마당 설국 수필 프랑스 캐나다 캐나다 토론토 한국 바다
2026.03.19. 19:32
작년 연말, 카카오톡이 업데이트되면서 내 생일이 1월 1일로 잘못 바뀐 모양이다. 새해 첫날, 신년 인사와 함께 뜻밖의 생일 축하 메시지가 잇따라 도착했다. “새해 첫날 태어났으면 매스컴도 탔겠네요.” 그렇게 말하며 신기해하는 이도 있었다. 내 진짜 생일은 신록이 눈부신 오월이다. “오늘 제 생일 아니에요.” 웃으며 고마운 마음을 담아 일일이 답장을 보냈다. 어느새 나이테가 늘듯, 숫자가 더해지는 것이 그리 달갑지 않은 나이가 되었다. 세월이 쌓일수록 여러 의미를 덧입히게 되니, 예전의 기대와 설렘보다 왠지 서글픔이 먼저 다가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축하 메시지를 읽는 동안만큼은 인연이 남긴 따스함이 잔잔히 퍼져왔다. 누군가의 기억 속에 아직 지워지지 않은 이름으로 남아 있다는 사실, 그 사소한 확인만으로도 희미해졌던 내 존재의 테두리가 또렷해지는 듯했다. 오류가 만들어 낸 엉뚱한 생일 덕분인지, 올해는 축하받을 일이 많으려나 하는 작은 기대만으로도 마음이 몽글해진다. 살다 보면 뜻하지 않은 순간을 마주할 때가 있다. 어떤 날은 황당한 사고로 낭패를 보기도 하고, 또 어떤 날은 전혀 계산되지 않은 감동이 불쑥 다가오기도 한다. 얼마 전, 트레이더 조(Trader Joe's)에서 우유와 치즈 등 유제품 몇 가지를 들고 계산대 앞에 섰을 때였다. 낯선 히스패닉 할머니가 다가오더니 내 물건값을 대신 지불해 주겠다는 것이었다. 손사래를 치며 괜찮다고 거절했지만, 영어를 못하는 그녀와 스페인어를 전혀 알아듣지 못하는 나는 끝내 소통하지 못했다. 다행히 히스패닉 캐셔가 통역을 도와주었는데, 그녀의 대답은 의외로 단순했다. “이유는 없어요. 그냥 그러고 싶어요.” 내 뒤로 줄 서 있던 손님들도 황당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쩔 줄 몰라 당황하는 나에게 캐셔가 말했다. “기다리는 사람이 많으니 그냥 받으세요.” 더 지체할 수 없어 나는 “그라시아스(Gracias)”라며 감사의 인사를 했다. 그녀는 환한 얼굴로 손을 흔들며 사라졌다. 큰 금액은 아니었지만 그녀가 왜 처음 본 나에게 그런 호의를 베풀었는지는 여전히 물음표로 남아 있다. 혹시 한국 사람에게 크게 신세를 진 적이 있었을까. 그저 짐작만 해 볼 뿐이다. 지인 댁을 방문하러 가던 길이었다. 과일 한 박스를 사서 계산을 마치고 출구를 나서는데, 전도지를 나눠 주던 젊은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예수님을 믿으세요? 저희 교회에 한 번 방문해 주세요.” 건네받은 초대장에 적힌 교회 이름과 위치를 보니, 개척교회 목사님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영혼 구원이라는 사명을 품고 선택한 길이겠지만, 홀로 노방전도를 하고 있는 그를 그냥 지나칠 수는 없었다. “목사님, 수고가 많으십니다. 저는 교회에 다니고 있어요.” 나는 카트에 실린 과일 박스를 불쑥 내밀었다. 뜻밖의 행동에 그는 잠시 망설이다가, “감사합니다. 축복합니다.” 하며 마음을 받아 주었다. 그 순간, 몇 달 전 누군가에게 받았던 호의가 문득 떠올랐다. 나 역시 특별한 이유는 없었다. 아마도 기독교인으로서 목회자를 향한 존경의 마음이었을 것이다. 우리는 관계를 맺는 일에서도 '득과 실'을 먼저 계산한다. 이익이 되지 않거나 감정 소모가 클 것 같은 관계는 애초에 걸러내는 것이 현명하다고 믿었다. 상처받지 않기 위해 마음의 문을 닫고, 손해 보지 않기 위해 거리를 조절하는 일은 당연하게 여겼다. 그렇게 효율과 손익의 잣대는 인간의 마음마저 저울 위에 올려놓는다. 이름 모를 히스패닉 할머니의 호의에도, 목사님께 건넨 과일 박스 한 상자에도 어떤 계산도 없었다. 만약 그 순간 서로의 이해관계를 먼저 따졌더라면, 낯선 이가 건넨 손길을 선뜻 받아들이지 못했을 것이다. 인생은 뜻한 대로 흘러가지 않지만, 계산 없는 마음은 오래도록 빛으로 남는다. 이유 없는 온기가 이 삭막한 세상의 온도를 아주 조금, 1도쯤은 올려놓지 않았을까. 김윤희 / 수필가문예마당 온도 수필 히스패닉 할머니 히스패닉 캐셔 과일 박스
2026.03.12. 21:19
나의 살던 고향은 경기도 파주시 한 시골 마을. 집 뒤에는 심학산, 앞에는 한강 하구가 있다. 물건너 동네가 강물에 거꾸로 비춰 흐르는 곳에서 해방 두 달 전 태어났다. 비록 일제강점기에 태어나긴 했지만 일본제국의 만행은 자라면서 부모님을 비롯해 주위 어른들로부터 들은 이야기가 전부다. 초등학생이 되어서야 많은 친척이 있는 것도 알게 되었고 방학이 되면 친척들 방문하는 것 또한 늘 기다려지던 시기다. 아직도 많은 추억이 남아 있는 곳은 큰 고모님 댁. 큰 고모님은 강 건너로 출가하셨다. 그래서 고모님 댁을 가려면 언제나 깊고 푸른 강을 건너야 했다. 어머님은 친척 집 다니러 갈 땐 언제나 보호자요, 가이드 역할을 해주셨다. 그런 탓에 어머님과 함께 하지 않는 고모님 댁 방문은 생각할 수 없는 일이었다. 당시 친척집 방문은 지금처럼 전화로 약소을 하고 가는 것이 아니고 대부분 무작정 가는 것이었다. 혹시 큰 일(결혼, 초상, 제사, 사고)로 가는 경우엔 미리 연락을 하거나 어머님의 명석한 기억력에 의존했다. 그러던 어느날 어머님과 함께 법곶 나루터를 향해 십여리 길을 걸어 가니 강을 건너려는 몇몇 사람만 기다릴 뿐, 정작 배와 뱃사공은 보이지 않았다. 한참을 기다리니 강 건너편에서 조각배 한 척이 오는 모습이 보였고, 그 후 1시간이나 지나서야 6,7명의 손님을 태운 나룻배가 힘겹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뱃사공은 한잔했는지 구슬픈 노랫가락으로 빠르게 흐르는 강물을 토닥이며 노를 저었다. 그렇게 강을 건너고 다시 십여리를 더 걸어 마침내 고모님 댁에 도착했다. 강에는 또 다른 의미가 있다. 이 땅에 태어나는 모든 사람들이 반드시 건너야 하는 ‘인생의 강(the river of life)’, 혹은 ‘영적 죄의 강(the spiritual sin river)’이다. 불교에서는 고달픈 인생 길을 고해(苦海), 즉 ‘깊은 바다(deep sea)’에 비유한다. 그 강은 어떤 강이고 왜 건너야 하는지, 그리고 그 강을 건너 어디로 가야 하는지, 그 목적지(예수 그리스도)를 기록하고 안내하는 책이 바로 성경이다. 성경이 말하는 ‘인생의 강’ 혹은 ‘영적 죄의 강’ 은 고통과 괴로움의 강, 아픔과 슬픔의 강, 가난과 빈곤의 강, 고뇌와 절망의 강, 탐욕과 탐심의 강, 경쟁심과 이기심의 강, 사망과 죽음의 강 등으로 묘사된다. 그럼 왜 그 강을 건너야 할까? 모든 사람은 본인의 ‘자유의지(free will)’와 상관없이 그 죄의 강에서 태어난다. 아담과 하와는 본인들의 ‘자유의지’로 선악과를 택했다고 하는데 그들의 후손은 자신의 ‘자유의지’와 상관없이 죄악의 강에서 태어나 그 강에서 살다가 죽는다는 것이 성경을 연구하는 많은 이들의 설명이다. 그 강을 건너주겠다고 하는 미국 선교사 한 분을 60여년 전인 1965년 5월 16일, 서울 종로예식장에서 만났다. 그때 들려준 전도설교 내용의 일부를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 그는 슬픔과 아픔을 기쁨으로, 궁핍을 부요함으로, 절망을 희망으로, 역경과 수고를 승리로, 탐욕에서 자족함으로, 이기심에서 이타심으로, 사망의 길에서 생명의 길로 또는 영생의 길로 인도해 주실 분(예수 그리스도)을 만나기 위해 그 강을 건너야 한다고 했다. 그런데 언제 그 강을 건너 예수 그리스도(목적지)와(에) 상봉(도착)할 수 있을까? 그 미국 선교사는 내가 ‘영적 죄의 강’을 건너는데 도움을 주는 ‘영적 배(the spiritual boat)’의 선장이었다. 그 후 선장이 바뀌어 한국분을 만났다. 그런데 지난 60여년 간 내가 탄 배(교회)의 많은 선장들은 배 위로 승선하는 사람들에게만 관심이 있지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예수(히12:2)”님을 만나기 위해 배에서 내리려는 사람들에겐 관심이 없는 것 같았다. 많은 교리와 자의적 성경 해석을 통해 배에서 내리면 안된다고 가르치고 심지어 경고까지 한다. 아마도 강을 건너는 목적을 모르고 배를 운영하는 것 같다. 우리 항해의 목적이 ‘영적 배’를 타고 ‘죄의 강’을 건너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는 일일텐데... 지금 내가 탄 배(교회)의 선장은 나를 그 목적지까지 인도해 줄 수 있을까? 언제,이 고달픈 ‘죄의 강’ 을 건너 예수 그리스도를 만날 수 있을까? 지금이라도 배에서 뛰어내려 니고데모가 그랬던 것처럼 강 건너 저 ‘변화산(The Mount of the Transfiguration)’ 기슭에서 기다리고 있을 예수님을 찾아가 만나고 싶다. 어릴 적 뱃전에 올라 바라보던 강 건너 고향 마을은 아직도 나를 기다고 있을까? 바카빌(Vacaville)의 어둔 밤이 고요히 깊어 간다. 남영한 / 은퇴 치과 의사문예마당 인생 수필 예수 그리스 어느날 어머님과 건너 예수
2026.03.05. 19:10
새벽은 아름답다. 캄캄하고 신비스럽다. 내가 사는 로스앤젤레스의 겨울 새벽은 춥지 않고 선선하다. 정적을 깨는 아침 새들의 대화가 시작되려면 어둠이 얇아진 후까지 좀 기다려야 한다. 물론 야밤에 노래하는 부엉이도 있고, 신경질적으로 소리 질러 소견을 전달하는 새가 있기는 하지만, 새벽은 침묵하고 있다. 오늘 아침의 하늘은 어둠 속에 짙푸른 가운데, 반달과 오리온 좌가 총기(聰氣) 바랜 흐린 빛을 보내준다. 나는 새벽에 관한 것들에 익숙하다. 새벽 시간, 새벽 소리, 새벽바람, 새벽하늘, 새벽 별자리, 새벽을 열며 일하러 가는 사람들, 그들의 헤드라이트 행렬, 새벽에 올리는 분심(分心)으로 갈리어진 나의 묵주기도까지…. 그리고 새벽에 일하는 나 자신에도 익숙하다. 나는 새벽에 글을 쓰고 많은 행정적인 일도 한다. 글을 쓰기 전에 제일 먼저 하는 일은 앞마당을 걸으면서 묵주기도 (?珠祈禱, Rosary)를 하는 것이다. 묵주기도란 불교에서 염주를 돌리며 하는 기도처럼 구슬을 이용해서 예수의 생애를 기억하며 주의 기도, 성모송, 영광송을 반복하면서 묵상하는 방식의 기도이다. 되풀이하는 기도라, 잡념이 들기 십상이다. 이 기도는 가톨릭 신자들이 많이 애호하는 기도이다. 이 기도 방식의 원천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는데, 가장 많이 믿고 있는 내용은 이렇다. 글을 읽을 줄 모르던 초기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성서를 읽지 못했고, 따라서 성서에 준 한 기도를 할 수 없었다. 그래서 단순하고 간단한 기도를 반복해서 하는 방식을 전수하게 되었다고 한다. 한국에서는 묵주기도를 ‘구슬을 굴리면서 묵상하는 기도’라는 뜻에서 그리 부르고, 서구권에서는 ‘로자리(rosary), 글쓴이 주: rosarium(장미라는 뜻의 라틴어)’이라고 한다. 이 ‘로자리’에 대한 설도 많다. 예수의 생모인 성모 마리아를 아름답고 순수한 장미로 표현한 것에서 나왔다는 설이 있다. 또 종교탄압으로 그리스도교인들을 공공장소, 주로 콜로세움 같은 운동장에서 처형하면서 생기게 된 것이라고도 한다. 굶은 사자를 풀어 신자들이 잡혀서 먹히도록 했는데, 그들은 머리에 장미로 만든 화관을 쓰고 광장으로 행진했다고 한다. 인체는 먹히고 장미 화관은 남겼다는 것이다. 새벽에 일을 많이 하지만, 나보다 더 일찍 하루를 시작하는 사람들이 주위에 많다. 새벽에 일터로 향해 가는 사람들도 그들 중 하나다. 우리 집 앞마당에서는 캘리포니아의 중요한 동맥 역할을 하는 405번 프리웨이가 약 반 마일 정도 보인다. 405 프리웨이는 5번에서 파생한 고속도로로, 북서쪽을 커버해 주는 약 72마일 구간이다. 미국 내에서 가장 많은 차가 오가는 고속도로로 북쪽 실마(Sylmar)와 남쪽 엘토로 와이(El Toro Y) 사이를 연결한다. 이 길을 따라 깜깜한 새벽에, 남쪽으로, 북쪽으로 헤드라이트, 백라이트들이 줄지어 움직인다. 일터를 향해 가는 새벽 사람들이다. 또 앞마당에는 이미 신문들이 도착해 있다. 신문 배달원은 도대체 몇 시에 우리 집에 다녀간 것일까? 그는 신문을 배달하고 또 다른 직장을 향해 서둘러 갔을지도 모른다. 신문 배달로 버는 돈만으로는 생활이 어렵다는 걸 누구나 안다. 신문 배달원뿐만 아니라, 나와 남편이 젊었을 때 그랬던 것처럼, 큰딸도 어둠을 헤치고 환자를 돌보러 병원으로 향한다. 또 이런 시간에, 한국어 진흥재단 사무총장은 교회에 가서 새벽기도를 올리고 있을 것이다. 우리 모두를 위해서. 철이 없고 세상을 몰랐던 나는 처음으로 ‘산다는 것은, 일(노동)이나 공부를 떠나서 엄숙한 것이다…’라는 삶의 심오한 뜻을 깨달았던 때가 있었다. 나를 일깨웠던 것은 가난도 아니고, 전쟁의 상흔도 아니었다. 당시 나는 10대 끄트머리의 소녀시기를 지나 여성으로 성숙해지는 길에 첫발을 내디뎠던 때였다. 사르트르, 톨스토이, 카뮈 등등의 꽤 어두운 작가들의 글을 읽고 친구들과 ‘개똥철학’을 토론하던 때이기도 했다. 사회의 부조리함, 어두움을 논하던 나의 눈에 강의실 곳곳을 열심히, 성실하게 닦고 있던 청소부 아저씨의 맑고, 진지하고, 겸손하고 평화로운 얼굴이 들어왔다. 그리고 그 아저씨의 존재가 나를 일깨웠던 것이었다. 가난과 노동과 그로부터 받는 엄청난 긍정적이고 부정적인 대가는 우리의 행복이나 희망과는 별 개라는 것을 깨달았다고나 할까? 나는 ‘노동의 숭고함’이라는 사치스럽고 아이러니한 문구를 기억한다. ‘일’과 ‘노동’을 구분하는 현대 사회이다. 산업혁명 (18세기 후반)이후, 당시 6억이었던 세계 인구는 2024년에 82억으로 늘었고, 세계 총생산은 199배가 늘어난 173조 달러라고 한다. 빈부의 차이는 극(極)에 이르렀다. 그 중년의 청소부 아저씨는 노동의 숭고함에 신경을 쓰며 일했을까? 자식들을 키우느라 수고하셨던 아버지, 어머니들은 그 ‘노동의 숭고함’이라는 이상을 갖고 일을 하고, 품을 팔지는 않으셨을 것이다. 누군가의 말대로, 우리는 노동을 정당화하고 미화하고 있을지 모른다. 새벽을 가르는 현대인들처럼. 류모니카, M.D. 미국 종양방사선학 전문의·미국 한국어진흥재단 명예이사장문예마당 새벽 수필 소리 새벽바람 새벽 시간 새벽 별자리
2026.02.19. 19:10
2026년 병오년(丙午年)이다. 60년 만에 돌아오는 화(火)의 년(年)으로 ‘태양과 말’의 해라고 한다. 갑·을·병·정…등 10개의 천간(天干)과 자·축·인·묘…같은 12개의 십이지(十二支)를 조합해서 만든 60개의 단위가 육십갑자(六十甲子)인데, 여기에 근거한 새해에 대한 해석은 두 종류의 불이 만나는 강렬한 불의 한 해로 기대된다는 것이다. 좋은 의미에서 보면, 빠른 속도로 변화가 이루어지는 시대가 될 수 있다는 뜻이란다. 나는 신문이나 잡지에서 ‘오늘의 운세’라던가, ‘한해의 기(氣)’ 같은 칼럼이 흥미로워서 읽곤 하지만, 사실 점성학이나 점술학에는 문외한이다. 들여다보면, 육십갑자는 우리 한민족에게 익숙한 풍습인 것 같다. 지금까지도 분리되지도 제거되지도 않으면서 우리 몸 깊숙이 뼛속까지 배어 있다. 그래서 그런지 육십갑자 예상치는 어떤 이들에는 간접적으로, 또 어떤 이들에게는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치고 있어 보인다. 또 나처럼 상관하지 않는 그룹도 있다. 육십갑자에 대한 지식은 없지만, 을사년(乙巳年)이었던 2025년 연초에 공개되었던 예측이 어느 정도는 맞았던 것 같다. 그저 우연일 수도 있겠다. 변화해 왔던 세상을 볼 수 있도록 한 을사년이었다면, 어긋났던 예상은 아니었다는 뜻이다. 나의 모국 한국은 세계 무역전쟁, 산불, 윤석열 대통령 탄핵, 울산화력발전소 붕괴 같은 어마어마한 일들을 겪었다. 디아스포라 미국인으로 살고 있는 나에게도 여러 이벤트가 있었다. 새해를 시작하면서 캘리포니아 바닷가에 자리한 도시 퍼시픽 팰리세이즈에 불이 나면서, LA는 혼돈에 빠졌다. 이 불과 상관없이 이곳에서 동쪽으로 주행거리 약 32마일 떨어져 있는 샌게이브리얼(San Gabriel) 밸리에도 산불이 났다. 동시다발적 산불이었다. 샌타애나 바람이 불씨를 빠른 속도로 주변 여러 곳으로 퍼뜨리었다. 우리 동네 같은 길에 사는 가정들 모두가 경찰과 주방위군이 지키는 가운데 대피 명령에 따라서 모든 것을 두고, 집을 떠났다. 화재 영향을 받지 않은 다른 LA 지역의 호텔 방들은 이미 만원이었고, 같은 동네에 사는 조카도 갈 곳이 없었다. 우리들은 자동차로 13시간 걸리는 약 800마일 떨어져 있는 뉴멕시코 큰 딸네로 향했다. 이때 ‘우리 삶에 진정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 고심해 보았다. 아무것도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렇게 시작된 2025년이었다. 산불이 잦아들고, 귀가하고 얼마 안 있어 법원에서 오라는 통고를 받았다. 미국의 시민은 배심원으로 소환이 되었을 때 이 의무를 수행해야 한다. 평소에 배심원 통보를 받은 적이 여러 번 있었어도 채택되지 않고 지나갔는데, 이번에는 좋아해야 할지, 재수 없다고 불평해야 할지 배심원으로 뽑히게 되었다. 법정에 두 달 반 동안 금요일만 빼고, 매일 출근하였다. 일곱 살짜리 여아 살인 사건으로, 피고는 생모와 생모의 남자 친구 두 명이었다. 배심원들은 검사가 제출한 영상과 증빙서류를 이해하여야 했다. 증인들의 진술을 들었다. 드라마에서 보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 일곱 살…일 년을 365일로 칠 때, 이 아이는 겨우 2555일을 이 땅에서 숨 쉬었다. 그동안, 매 맞고, 벗겨진 채로, 욕실에 감금되고, 콧구멍을 통해서 기도의 반대 방향으로 물과 스리라차 소스(매운 고추 소스)로 고문을 당했다. 나는 지금도 밤잠을 설칠 때가 많다. 그리고 스리라차 양념을 먹지 않는다. 육십갑자는 육갑, 60년마다 반복되는 사이클이므로, 5000년 한국 역사에는 을사년이 많았을 게다. 근대사에서 가장 심각하고 우울하였던 사건은 120 년 전 1905년에 맺었던 일본과의 을사늑약으로 한국의 외교권이 일본에 박탈당했던 사건이다. 일제 강점기의 시작이었다. 이보다 120년 전인 1785년에는 ‘명례방 사건’이라고도 불리는 ‘을사추조적발(乙巳秋曹摘發)’ 사건이 있었다. 정조 9년 때, 지금의 명동 지역에서 신앙집회를 열던 천주교도들이 적발된 것으로 조선의 성리학적 윤리 체계를 파괴한다는 죄목으로 신자들이 처형당했던 일이다. 이 사건이 벌어진 113년 후에 이 자리에 한국 천주교의 대표적이며 상징적인 명동 성당이 건립되었다. 만약 이때, 조선이 서학을 받아들이고, 개혁에 앞장섰다면, 한국의 역사는 많이 달라지지 않았을까. 을사년에 나쁜 일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을사늑약 60년 후인 1965년에는 한일 기본 조약과 월남파병 준비로 경제개발의 본격화가 시작되었다. 내가 대학 입시 준비를 하고 있던 때이었다. 베트남에 파병되어 인천항을 떠나던 젊은 군인 무리 중에, 사촌오빠가 있었고 나는 오빠를 배웅하러 나갔었다. 여러 번에 거쳐 파병된 누계가 32만 명에 달한다고 한다. 이 젊은이 중에는 전사하여 돌아오지 못한 사람들이 5000여 명이고, 1만1000명이 부상하였다고 한다. 어수선하게 시작된 을사년 2025년이었지만, 좋은 일도 많았다. 9년 만에, 나의 두 번째 책을 출판하였다. 이 책의 출판 기념회를 한국에서는 나의 모교 이화여대 의과대학 부속병원 안에 친구의 이름으로 명명된 이영주 홀에서 가졌고, 미국에서는 한국어진흥재단 세종홀에서 가졌다. 또 한국 창원대학에 초대되어 강의도 했다. 이러한 활동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내 삶의 여정에 도반(道伴)의 친지가 함께해 주었기 때문이다. 빠른 속도의 변화를 예상한다는 2026년 병오년은 별 탈 없이 지나가려나. 일 년 후인 2027년 이맘때, 육십갑자의 예측이 어떠했는지 알게 되기를 바란다. 모니카 류 / 미국 종양방사선학 전문의·전한국어 진흥재단 이사장문예마당 별일 수필 육십갑자 예상치 한국 역사 모국 한국
2026.01.22. 18:50
영주권자인 남편은 지금 미국과 한국을 오간다. 영주권자는 6개월 이상 해외에 나가 있을 경우 재입국에 리스크가 크다. 하지만 정당한 이유가 있다면 허가를 받아 최장 2년간 해외에 머물 수가 있다. 최근에 남편이 재입국 허가서를 발급받기 위해 생체 정보 확인차 이민국에 가서 얼굴 사진을 찍었다. 그런데 이민국 직원이 남편의 눈이 작아 동공이 안 보인다며 눈을 크게 뜨라고 했단다. 남편은 크게 떴는데도 몇 번이나 크게 뜨라고 해서 민망했다고 한다. 남편의 눈 크기는 보통 한국 사람과 비슷하다. 나이가 먹으니 눈이 처져서, 그 직원의 눈에는 눈을 뜨지 않은 것처럼 보였던 모양이다. 그가 악의적으로 말한 것은 아니기에 우리는 웃고 말았다. 서양 사람들에게 동양인의 얼굴은 어떻게 보일까. 동양인이 처음 서양인 얼굴을 보면 차이를 못 느낀다. 마찬가지로 서양 사람들은 동양인의 얼굴을 모두 비슷하게 보는 것 같다. 그래서 한국인인지, 중국인인지, 일본 인인지 구별을 못 하고 심지어는 갑과 을을 구별하지 못하기도 한단다. 그런데 서양 사람들 눈에 동양 사람들 눈은 찢어진 것처럼 보이나 보다. 서구 사회에서는 동양인을 조롱하거나 비하하는 인종차별적 표현으로 눈을 찢는 제스처를 한다. 손흥민 선수가 토트넘 시절 인종차별 논란을 겪었다. 관중석의 한 팬이 손흥민을 향해 자신의 눈을 양 옆으로 찢는 제스처를 취했다. 중계화면에 이 모습이 포착돼 영국 소셜미디어에 퍼졌다. 이 관객은 인종차별 행위를 했다는 이유로 3년간 경기장 출입 금지 처분을 받았다. 다음해, 손흥민이 토트넘의 주장으로 있을 때도 인종차별 논란이 있었다. 그가 방송에 출연했을 때였다. 진행자가 ‘손흥민의 유니폼을 구해달라’는 요청을 누구로부터 받았다고 하자 팀동료이자 절친인 벤탄쿠르가 “손흥민 사촌 유니폼을 가져다 줘도 모를 것이다. 손흥민이나 그의 사촌이나 똑같이 생겼다”고 말했다. 동양인은 모두 똑같이 생겼다는, 개성도 매력도 없다는, 인종차별적 인식이 무의식적으로 드러난 발언이었다. 벤탄쿠르는 아차 했는지 즉각 사과했다. 그는 자신의 SNS를 통해 “쏘니, 일어난 모든 일에 미안하다. 그건 나쁜 농담이었다. 절대 널 무시하거나 다치게 하려 한 게 아니라는 걸 알지 않나”라고 했다. 그러나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잉글랜드 축구협회는 벤탄쿠르에게 7경기 출전 정지에 벌금 10만 파운드의 중징계를 내렸다. 얼마 전 아침에 뉴스를 보다가 멈춰 서게 한 사진 한 장이 있었다. 핀란드 미인대회 우승자 사라 자프체가 '중국인과 식사 중'이라는 설명과 함께 SNS에 올린 '눈찢기' 사진 때문이었다. 논란이 일자 현지 정치인들이 그녀를 옹호했다. “내가 자프체다”라며 눈찢기 챌린지를 하는 사진을 올려 논란을 더 키웠다. 자프체는 이후 현지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저녁 식사 중 두통과 눈의 압박감 때문에 무심코 한 행동이었다”며 변명했지만 논란은 가라앉지 않았다. 결국 자프체는 인종차별 논란 끝에 왕관을 박탈당했다. 자프체는 사과문을 통해 “이번 일로 상처받은 모든 분께 사과드린다”며 고개를 숙였다. 뉴스는 짧았지만, 그 사진은 오래 내 마음에 남았다. 아무렇지 않게 올린 웃고 있는 자프체의 사진은, 장난이었는지는 알 수 없다. 정치인들도 무심코 따라 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누군가에게는 웃음이 아니라 큰 상처가 되었을 지도 모른다. 서양사회에서는 인종차별을 개인의 실수로 가볍게 넘기지 않는다. 그들은 어린 시절부터 인종차별이 나쁘다는 사실을 반복해서 배우며 자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시안 인종자별은 여전히 사소한 장난처럼 넘겨버린다. 이솝우화에 '무심코 던진 돌에 개구리가 맞아 죽는다'는 이야기가 있다. 무심히 장난삼아 던지는 말이 당사자에게는 뼈저린 상처로 남을 수 있다. 요즘은 많은 사람들이 돌이 아닌 말과 글로 누군가를 단죄하고 심한 경우 죽음에 이르게 한다. 악성 댓글로 극단적 선택을 한 배우 최진실이 한 예이다. 항상 입장을 바꿔 생각해 봐야겠다. 아시안 인종차별은 전부터 있어 오긴 했지만, 2020년대 초반 '우한'이 코로나 발생지로 알려지자, 중국에 대한 혐오로 더욱 심해졌다. 그 혐오가 중국을 넘어 차츰 아시안 전반에 퍼졌다. 미국에 사는 우리는 일상생활에서 아는 듯 모르는 듯 미묘한 차별을 느낄 때가 종종 있다. 대놓고 미워하지는 않지만 상대를 하나의 개인이 아니라 아시안이라는 틀 속에 넣어 버린다. 어떤 차별은 칭찬의 옷을 입고 다가온다. 예를 들면 “아시안들은 다 공부를 잘하잖아”라는 말 속에는 개인의 노력은 배제한 채, 은근한 비꼼과 거리 두기가 담겨 있다. 인종차별은 분명 잘못된 일이다. 하지만 콤플렉스로 확대해 받아들일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자프체와 벤탄쿠르, 두 사람의 경우를 보고 독자들은 어떤 느낌이 들었는지 모르겠다. 솔직히 나는 그 두 사람이 저지른 단순한 실수라고 생각한다. 그런 정도는 그냥 흘려버리는 관용이랄까, 너그러움이랄까 그런 마음 가짐도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런 해프닝이 생길 때 인종차별 운운하면서 발끈하는 것은 어쩌면 그들의 차별 공격 의도에 우리가 넘어가는 것은 아닐까. 두순자 사건에서 보듯 흑인에 대한 편견과 인종차별이 엄청난 비극을 낳았다는 기억을 갖고 있다. 로드니 킹 사건에서 한인 커뮤니티가 크게 피해를 입은 것도 그런 결과를 낳았다는 것이 중론이다. 우리의 인종차별도 백인들에 못지 않다고 생각한다. 한인사회에서 라티노에 대한 하대도 마찬가지다. 그들에 대한 반말은 일상적인 말투가 됐다. 하다못해 같은 동양인이면서 동남아인에 대한 멸시는 또 어떤가. 이런 인종차별 의식을 극복함으로써 우리에 대한 인종차별적 대우도 극복할 수 있다고 본다. 이제 누가 우리를 향해서 눈찢기 제스처를 하면, 우리도 당당히 눈찢기로 응대하는 여유를 갖자. 배광자 / 수필가문예마당 대응 수필 인종차별 논란 인종차별적 표현 인종차별적 인식
2026.01.15. 18:28
요즘 한국에서는 혼밥을 둘러싼 갈등이 종종 온라인 커뮤니티에 올라와 논란이 일고 있다. 최근 ‘외로움은 팔지 않는다’며 혼밥 손님을 거부하는 식당 안내문이 온라인에서 논쟁을 일으켰다. 한 네티즌은 어느 짜장면집 출입문에 붙어 있던 안내문을 보고 발길을 돌렸다며, 안내문 사진을 온라인 커뮤니티에 올렸다. 사진 속 안내문에는 “혼자서 드실 땐 2인분 값을 쓴다, 2인분을 다 먹는다, 친구를 부른다, 다음에 아내와 온다”라는 문구와 함께 “외로움은 팔지 않습니다. 혼자 오지 마세요”라고 적혀 있었다. 이를 본 네티즌들은 “왜 혼자 먹으러 가는 사람을 외로운 사람으로 치부하는 거냐” “요즘 세상에 혼밥족이 얼마나 많은데 이런 생각을 하나”등의 거센 반응을 보였다고 한다. 나 역시 “외로움은 팔지 않습니다” 라는 말이 처음에는 장난스럽고 좀 생뚱맞게 느껴졌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말이 오랫동안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이에 앞서 지난 여름에는 한 여성 유튜버가 홀로 2인분을 시켜 식사를 하고 있는데 빨리 먹으라고 식당 주인이 면박을 주는 영상이 공개돼 사회적 공분을 일으켰다. 유튜버는 여수의 한 유명 맛집을 방문, 2인분을 주문하고 식사 중이었으나 식당 주인은 “아가씨 하나만 오는 데가 아니거든” “얼른 먹어야 한다, 예약 손님을 앉혀야 하거든” 등 식사를 재촉하는 발언을 했다. 이에 유튜버가 항의 하자 주인은 “고작 2만원 가지고” “그냥 가면 되지 왜 저러는 거야”라고 말하며 면박을 주기도 했다. 며칠 전 남편과 한인타운에 볼일이 있어 나갔다가 점심때가 되어 식당에 들렸다. 아침을 늦게 먹어 1인분만 시켜서 둘이 먹어도 되는데 눈치가 보여 2인분을 시켜서 하나는 집에 가져왔다. 한국도 아니고, 식당 주인이 뭐라고 한 것도 아닌데, 아마도 한국에서의 논란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리라. 외국에서는 업주가 손님을 거부할 권리를 법적으로 인정하기도 한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손님은 왕’이라는 오래된 관념 때문에 손님을 거절하는 일 자체가 금기처럼 여겨진다. 그 식당 주인은 그런 낯선 방식 때문에 온라인에서 불친절로 뭇매를 맞은 것이다. 우리는 오랫동안 ‘식사는 누군가와 함께 한다’는 문화 속에서 살아왔다. 혼밥은 식사라 하지 않았다. 밥상은 밥상머리 교육의 자리였고, 가족간의 대화의 자리였다. 외식은 가족의 특별한 날의 행사이거나 교제의 수단이었다. 지금은 시대가 바뀌었다. 이제는 식당에서 혼자 밥을 먹는 것은 흔한 일이고 누구도 이상하게 보지 않는다. 일반인이나, 직장인, 여행자 등 너무 자연스러운 문화이다. 그저 평범한 풍경일 뿐이다. 그렇지만 묘하게도 우리는 그 자유로운 풍경 속에서 자주 외로움의 그림자를 발견한다. 그래서 짜장면집 식당 주인도 단순히 ‘혼밥은 외로움’으로 단정 지었을 것이다. 식사는 음식보다 누군가와 대화하는 시간일 수도 있다. 군중 속의 고독이라는 말이 있다. 식당 안은 사람들로 붐비고 웃고 떠드는 소리로 가득한데 그 안에서 혼자 밥을 먹고 있는 나는 지금 혼자이다. 손에는 스마트폰이 있고, 메신저 알림은 끊임없이 울린다. 하지만 마음을 터놓고 진정한 대화를 나눌 상대가 앞에 없다. 지금은 1인 가구가 많은 시대다. 통계청에 따르면 한국 1인 가구 비율은 지난해 기준으로 전체 가구의 33%를 훌쩍 넘겼다. 서울에서는 절반 가까운 사람들이 혼자 산다. 혼밥은 더 이상 어색하지 않다. 하지만 스스로 선택한 혼밥이 아니라면, 그건 외로움의 상징이다. 그렇다고 혼자 밥을 먹는다는 사실 자체가 외로움을 뜻하는 건 아니다. 정호승 시인의 시 ‘수선화’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울지 마라 / 외로우니까 사람이다 / 살아간다는 것은 외로움을 견디는 일이다.” 혼자 밥을 먹으며 느끼는 쓸쓸함도, 사람이기에 느끼는 인간의 본성이다. 외로움을 느낀다는 건 마음이 살아 있고 누군가를 그리워한다는 자연스러운 감정이다. 외로움을 인간만의 감정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동물들도 외로움을 느낀다는 연구가 있다. 그들 역시 각자의 방식으로 고독을 견디고 표현한다고 한다. 긴 세월 사람과 함께 살아온 개는 주인이 집을 비우는 시간이 길어지면 우울과 분리불안을 겪고, 코끼리가 짝을 잃으면 그 자리를 떠나지 못하고 몇 날 며칠을 서성인다는 이야기는 유명하다. 고래, 침팬지 같은 사회적 동물도 무리에서 떨어지면 식사량이 줄고 행동이 무기력해지는 변화가 나타난다고 한다. 그런 모습들을 보면 외로움은 인간에게만 주어진 감정이 아니라 사회성을 가진 생명들에게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본능인지도 모르겠다. 요즘 시대를 ‘고독의 시대’라고들 말한다. 영국에서는 아예 ‘외로움 장관’이 있을 정도다. 외로움은 더 이상 개인이 혼자서 조용히 감당해야 하는 감정이 아니라 사회 전체가 다루어야 할 문제로 확장되었다. 외로움은 고독사 등 다른 사회문제와도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살다보면 누구나 외로움을 완전히 피하며 살 수는 없다. 강인한 사람도, 밝아보이는 사람도, 늘 곁에 사람들로 북적이는 이도 어떤 순간에는 고독을 마주하게 된다. 외로움은 개인마다 다른 방식으로 다가오기 때문에 각자의 방식으로 해소된다. 어떤 사람은 음악으로, 또 다른 사람은 독서로, 견디고 달래고 때에 따라 외면하면서 넘길 뿐이다. 독서광인 오바마 대통령은 퇴임 1주일 전 마지막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보통 사람들이 상상하기 힘든 무거운 책임감과 외로움을 독서로 이겨냈다. 백악관 8년을 버틴 비결은 독서였다”고 밝혔다. 오바마 전대통령처럼 홀로 풀 수 있는 외로움도 있지만 홀로는 결코 풀리지 않는 외로움도 있다. 그런 외로움은 누군가의 도움이 반드시 필요하다. 누군가 곁에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큰 위로가 된다고 한다. 영국처럼 사회가 함께 책임져야 하는 감정이라고 생각한다. 혼밥은 손님과 식당 주인의 문제뿐만 아니라 건강과도 관련이 있다. 흔히 혼밥이라면, 그냥 한끼를 배만 채우면 된다는 생각에 대충 때운다. 그러나 건강을 생각해서 혼밥을 하더라도 영양을 생각해 이것저것 챙겨야 하겠다. 요즘 식당 주인들 중에는 손님을 사람보다 ‘돈’으로 바라보는 경우도 있다. 물론 자영업의 현실이 그만큼 팍팍하기 때문이라는 것을 이해는 하지만 너무 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짜장면집 주인에게 말한다. “외로움은 누군가가 돈으로 사고파는 감정도 아니고, 다른 사람이 마음대로 ‘외로움’이라고 규정해 버릴 수 있는 감정도 아닙니다.” 배광자 / 수필가문예마당 외로움 수필 식당 안내문 짜장면집 식당 온라인 커뮤니티
2025.12.11. 18:13
비행기가 구름을 뚫고 내려앉자, 굵은 빗방울이 창문을 두드린다. 고국 땅에 발을 딛자 비님이 마중 나와 나를 반겨주는 듯하다. 비가 드문 LA의 건조함과는 달리, 오랜만에 듣는 빗소리가 가슴 깊은 곳까지 스며든다. 쉴 새 없이 떨어지는 빗물은 오랫동안 잊고 지냈던 감정의 문을 두드리는 듯했고, 비 냄새 속에는 내가 떠나보냈던 지난 시간들이 조용히 되살아나는 듯했다. 창덕궁 비원을 거니는 중, 천둥과 번개를 몰고 온 장대비가 느닷없이 쏟아졌다. 사람들은 처마 밑으로 몸을 숨기며 빗줄기가 잦아들길 기다렸다. 나는 손바닥을 내밀어 빗방울을 받으며 차갑게 스며드는 촉감을 오롯이 느꼈다. 빗속의 비원은 다른 시대로 잠시 이동한 듯 고요하고 신비로웠다. 뜰 옆으로 흘러드는 물이 도랑을 이루는 모습을 바라보니 오래전 고무대야 보트에 올랐던 풍경이 아련히 떠올랐다. 어린 시절, 동네에는 변변한 놀이시설은 없었지만 골목 전체가 놀이터였다. 해질 무렵까지 아이들은 몸을 부딪치며 뛰놀았고 그곳에는 웃음소리가 끊임없이 흘러넘쳤다. 그중에서도 가장 선명하게 남은 것은 비 오는 날의 기억이다. 빗줄기가 흙길을 두드릴 때마다 빗방울이 튀어 오르고, 어린 우리들의 마음도 함께 들떴다. 우리 집은 약간 높은 지대에 있어 비가 아무리 퍼부어도 물이 들지 않았지만 바로 아래 골목은 장대비가 몇 시간만 내려도 금세 물이 차올랐다. 그 순간 골목은 어느새 우리들만의 또 다른 세상으로 변했다. 물이 흐르는 방향에 따라 골목은 다르게 보였고, 밋밋하던 길은 새로운 모험의 공간으로 탈바꿈했다. 큰오빠는 김장철 배추를 절이던 큼직한 고무대야를 꺼내 와 나를 태웠다. 허벅지까지 차오른 물속에서 대야를 끌며 골목을 헤쳐나갔다. 나는 언니의 쪼리 슬리퍼를 양손에 쥐고 노처럼 저었다. 둥둥 떠 있던 그 순간만큼은 어느 호화 유람선도 부럽지 않았다. 물살을 스치는 고무대야의 둔탁한 소리와 내 웃음이 뒤섞여 빗속 골목을 울렸다. 고무대야는 언제나 위태로웠다. 균형을 조금만 잃어도 금세 뒤집혔고, 나는 흙탕물 속에서 허우적거리곤 했다. 젖은 채 집으로 돌아오면 엄마는 위험하게 논다며 꾸짖다가도 이내 따뜻한 물로 씻겨주고 마른 수건으로 감싸주셨다. 꾸중 뒤에 이어지는 엄마의 손길엔 걱정과 사랑이 따듯하게 묻어 있었다. 장마가 지나면 어김없이 방역차가 나타났다. 붕붕거리는 엔진 소리와 함께 골목마다 하얀 연기를 토해냈다. 얼굴조차 분간할 수 없는 희뿌연 연기 속에서 아이들은 서로의 이름을 부르며 뛰어다녔다. 보이지 않는 얼굴들 사이로 터져 나오는 웃음은 허공을 타고 메아리처럼 번져갔다. 안개에 잠긴 듯한 그 세상은 꿈결처럼 몽롱했다. 지금 그 골목은 카페와 공용주차장으로 변했다. 더 이상 물이 차오를 염려도, 대야를 띄울 자리도 사라졌다. 하지만 젖은 옷깃의 물비린내, 희뿌연 연기 속에서 터져 나오던 웃음소리, 젖은 몸을 닦아주던 엄마의 손길까지, 이 모든 것들은 유년의 한켠에서 여전히 살아 숨 쉬고 있다. 세월이 흐르며 모습을 바꿨지만, 마음속 골목은 여전히 그 시절의 빗물을 머금은 채 고요하게 자리 잡고 있다. 삶은 때때로 물살에 흔들리는 고무대야처럼 예측할 수 없지만 그 출렁임 속에서 나는 중심을 잡는 법을 배워간다. 흔들림은 어쩌면 나를 단련하고 성숙하게 만들기 위한 과정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흘러 쌓인 시간들은 기억이 되어 마음의 온도에 따라 각기 다른 빛으로 삶을 비추는 거울이 된다. 때로는 따뜻하고, 때로는 서늘하게, 그 기억들은 내 삶을 천천히 감싸 안아 준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도 비가 내린다. 창가를 타고 흐르는 빗줄기를 바라보며 머물렀던 시간을 반추해 본다. 빗속의 고국 풍경이 잔잔히 내 안으로 스며들고 오래된 기억이 새 물결처럼 일렁인다. 새로 내리는 비는 오래된 기억 위에 겹겹이 쌓이며 또 하나의 풍경을 만들어낸다. 비는 나에게 귀향의 징표이자 추억을 적셔 다시 채워주는 선물이다. 세월이 흘러 많은 것이 변했지만 비가 내릴 때마다 나는 그때의 어린 소녀로 돌아간다. 고무대야가 뒤집혀 흙탕물 속에서도 웃음을 잃지 않던 아이처럼, 오늘도 나는 내 삶의 물결 속에서 천천히 중심을 찾아간다. 김윤희 / 수필가문예마당 고무대야 수필 오래전 고무대야 마음속 골목 빗속 골목
2025.12.04. 18:4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