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한국에서는 혼밥을 둘러싼 갈등이 종종 온라인 커뮤니티에 올라와 논란이 일고 있다. 최근 ‘외로움은 팔지 않는다’며 혼밥 손님을 거부하는 식당 안내문이 온라인에서 논쟁을 일으켰다. 한 네티즌은 어느 짜장면집 출입문에 붙어 있던 안내문을 보고 발길을 돌렸다며, 안내문 사진을 온라인 커뮤니티에 올렸다. 사진 속 안내문에는 “혼자서 드실 땐 2인분 값을 쓴다, 2인분을 다 먹는다, 친구를 부른다, 다음에 아내와 온다”라는 문구와 함께 “외로움은 팔지 않습니다. 혼자 오지 마세요”라고 적혀 있었다. 이를 본 네티즌들은 “왜 혼자 먹으러 가는 사람을 외로운 사람으로 치부하는 거냐” “요즘 세상에 혼밥족이 얼마나 많은데 이런 생각을 하나”등의 거센 반응을 보였다고 한다. 나 역시 “외로움은 팔지 않습니다” 라는 말이 처음에는 장난스럽고 좀 생뚱맞게 느껴졌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말이 오랫동안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이에 앞서 지난 여름에는 한 여성 유튜버가 홀로 2인분을 시켜 식사를 하고 있는데 빨리 먹으라고 식당 주인이 면박을 주는 영상이 공개돼 사회적 공분을 일으켰다. 유튜버는 여수의 한 유명 맛집을 방문, 2인분을 주문하고 식사 중이었으나 식당 주인은 “아가씨 하나만 오는 데가 아니거든” “얼른 먹어야 한다, 예약 손님을 앉혀야 하거든” 등 식사를 재촉하는 발언을 했다. 이에 유튜버가 항의 하자 주인은 “고작 2만원 가지고” “그냥 가면 되지 왜 저러는 거야”라고 말하며 면박을 주기도 했다. 며칠 전 남편과 한인타운에 볼일이 있어 나갔다가 점심때가 되어 식당에 들렸다. 아침을 늦게 먹어 1인분만 시켜서 둘이 먹어도 되는데 눈치가 보여 2인분을 시켜서 하나는 집에 가져왔다. 한국도 아니고, 식당 주인이 뭐라고 한 것도 아닌데, 아마도 한국에서의 논란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리라. 외국에서는 업주가 손님을 거부할 권리를 법적으로 인정하기도 한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손님은 왕’이라는 오래된 관념 때문에 손님을 거절하는 일 자체가 금기처럼 여겨진다. 그 식당 주인은 그런 낯선 방식 때문에 온라인에서 불친절로 뭇매를 맞은 것이다. 우리는 오랫동안 ‘식사는 누군가와 함께 한다’는 문화 속에서 살아왔다. 혼밥은 식사라 하지 않았다. 밥상은 밥상머리 교육의 자리였고, 가족간의 대화의 자리였다. 외식은 가족의 특별한 날의 행사이거나 교제의 수단이었다. 지금은 시대가 바뀌었다. 이제는 식당에서 혼자 밥을 먹는 것은 흔한 일이고 누구도 이상하게 보지 않는다. 일반인이나, 직장인, 여행자 등 너무 자연스러운 문화이다. 그저 평범한 풍경일 뿐이다. 그렇지만 묘하게도 우리는 그 자유로운 풍경 속에서 자주 외로움의 그림자를 발견한다. 그래서 짜장면집 식당 주인도 단순히 ‘혼밥은 외로움’으로 단정 지었을 것이다. 식사는 음식보다 누군가와 대화하는 시간일 수도 있다. 군중 속의 고독이라는 말이 있다. 식당 안은 사람들로 붐비고 웃고 떠드는 소리로 가득한데 그 안에서 혼자 밥을 먹고 있는 나는 지금 혼자이다. 손에는 스마트폰이 있고, 메신저 알림은 끊임없이 울린다. 하지만 마음을 터놓고 진정한 대화를 나눌 상대가 앞에 없다. 지금은 1인 가구가 많은 시대다. 통계청에 따르면 한국 1인 가구 비율은 지난해 기준으로 전체 가구의 33%를 훌쩍 넘겼다. 서울에서는 절반 가까운 사람들이 혼자 산다. 혼밥은 더 이상 어색하지 않다. 하지만 스스로 선택한 혼밥이 아니라면, 그건 외로움의 상징이다. 그렇다고 혼자 밥을 먹는다는 사실 자체가 외로움을 뜻하는 건 아니다. 정호승 시인의 시 ‘수선화’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울지 마라 / 외로우니까 사람이다 / 살아간다는 것은 외로움을 견디는 일이다.” 혼자 밥을 먹으며 느끼는 쓸쓸함도, 사람이기에 느끼는 인간의 본성이다. 외로움을 느낀다는 건 마음이 살아 있고 누군가를 그리워한다는 자연스러운 감정이다. 외로움을 인간만의 감정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동물들도 외로움을 느낀다는 연구가 있다. 그들 역시 각자의 방식으로 고독을 견디고 표현한다고 한다. 긴 세월 사람과 함께 살아온 개는 주인이 집을 비우는 시간이 길어지면 우울과 분리불안을 겪고, 코끼리가 짝을 잃으면 그 자리를 떠나지 못하고 몇 날 며칠을 서성인다는 이야기는 유명하다. 고래, 침팬지 같은 사회적 동물도 무리에서 떨어지면 식사량이 줄고 행동이 무기력해지는 변화가 나타난다고 한다. 그런 모습들을 보면 외로움은 인간에게만 주어진 감정이 아니라 사회성을 가진 생명들에게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본능인지도 모르겠다. 요즘 시대를 ‘고독의 시대’라고들 말한다. 영국에서는 아예 ‘외로움 장관’이 있을 정도다. 외로움은 더 이상 개인이 혼자서 조용히 감당해야 하는 감정이 아니라 사회 전체가 다루어야 할 문제로 확장되었다. 외로움은 고독사 등 다른 사회문제와도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살다보면 누구나 외로움을 완전히 피하며 살 수는 없다. 강인한 사람도, 밝아보이는 사람도, 늘 곁에 사람들로 북적이는 이도 어떤 순간에는 고독을 마주하게 된다. 외로움은 개인마다 다른 방식으로 다가오기 때문에 각자의 방식으로 해소된다. 어떤 사람은 음악으로, 또 다른 사람은 독서로, 견디고 달래고 때에 따라 외면하면서 넘길 뿐이다. 독서광인 오바마 대통령은 퇴임 1주일 전 마지막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보통 사람들이 상상하기 힘든 무거운 책임감과 외로움을 독서로 이겨냈다. 백악관 8년을 버틴 비결은 독서였다”고 밝혔다. 오바마 전대통령처럼 홀로 풀 수 있는 외로움도 있지만 홀로는 결코 풀리지 않는 외로움도 있다. 그런 외로움은 누군가의 도움이 반드시 필요하다. 누군가 곁에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큰 위로가 된다고 한다. 영국처럼 사회가 함께 책임져야 하는 감정이라고 생각한다. 혼밥은 손님과 식당 주인의 문제뿐만 아니라 건강과도 관련이 있다. 흔히 혼밥이라면, 그냥 한끼를 배만 채우면 된다는 생각에 대충 때운다. 그러나 건강을 생각해서 혼밥을 하더라도 영양을 생각해 이것저것 챙겨야 하겠다. 요즘 식당 주인들 중에는 손님을 사람보다 ‘돈’으로 바라보는 경우도 있다. 물론 자영업의 현실이 그만큼 팍팍하기 때문이라는 것을 이해는 하지만 너무 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짜장면집 주인에게 말한다. “외로움은 누군가가 돈으로 사고파는 감정도 아니고, 다른 사람이 마음대로 ‘외로움’이라고 규정해 버릴 수 있는 감정도 아닙니다.” 배광자 / 수필가문예마당 외로움 수필 식당 안내문 짜장면집 식당 온라인 커뮤니티
2025.12.11. 18:13
비행기가 구름을 뚫고 내려앉자, 굵은 빗방울이 창문을 두드린다. 고국 땅에 발을 딛자 비님이 마중 나와 나를 반겨주는 듯하다. 비가 드문 LA의 건조함과는 달리, 오랜만에 듣는 빗소리가 가슴 깊은 곳까지 스며든다. 쉴 새 없이 떨어지는 빗물은 오랫동안 잊고 지냈던 감정의 문을 두드리는 듯했고, 비 냄새 속에는 내가 떠나보냈던 지난 시간들이 조용히 되살아나는 듯했다. 창덕궁 비원을 거니는 중, 천둥과 번개를 몰고 온 장대비가 느닷없이 쏟아졌다. 사람들은 처마 밑으로 몸을 숨기며 빗줄기가 잦아들길 기다렸다. 나는 손바닥을 내밀어 빗방울을 받으며 차갑게 스며드는 촉감을 오롯이 느꼈다. 빗속의 비원은 다른 시대로 잠시 이동한 듯 고요하고 신비로웠다. 뜰 옆으로 흘러드는 물이 도랑을 이루는 모습을 바라보니 오래전 고무대야 보트에 올랐던 풍경이 아련히 떠올랐다. 어린 시절, 동네에는 변변한 놀이시설은 없었지만 골목 전체가 놀이터였다. 해질 무렵까지 아이들은 몸을 부딪치며 뛰놀았고 그곳에는 웃음소리가 끊임없이 흘러넘쳤다. 그중에서도 가장 선명하게 남은 것은 비 오는 날의 기억이다. 빗줄기가 흙길을 두드릴 때마다 빗방울이 튀어 오르고, 어린 우리들의 마음도 함께 들떴다. 우리 집은 약간 높은 지대에 있어 비가 아무리 퍼부어도 물이 들지 않았지만 바로 아래 골목은 장대비가 몇 시간만 내려도 금세 물이 차올랐다. 그 순간 골목은 어느새 우리들만의 또 다른 세상으로 변했다. 물이 흐르는 방향에 따라 골목은 다르게 보였고, 밋밋하던 길은 새로운 모험의 공간으로 탈바꿈했다. 큰오빠는 김장철 배추를 절이던 큼직한 고무대야를 꺼내 와 나를 태웠다. 허벅지까지 차오른 물속에서 대야를 끌며 골목을 헤쳐나갔다. 나는 언니의 쪼리 슬리퍼를 양손에 쥐고 노처럼 저었다. 둥둥 떠 있던 그 순간만큼은 어느 호화 유람선도 부럽지 않았다. 물살을 스치는 고무대야의 둔탁한 소리와 내 웃음이 뒤섞여 빗속 골목을 울렸다. 고무대야는 언제나 위태로웠다. 균형을 조금만 잃어도 금세 뒤집혔고, 나는 흙탕물 속에서 허우적거리곤 했다. 젖은 채 집으로 돌아오면 엄마는 위험하게 논다며 꾸짖다가도 이내 따뜻한 물로 씻겨주고 마른 수건으로 감싸주셨다. 꾸중 뒤에 이어지는 엄마의 손길엔 걱정과 사랑이 따듯하게 묻어 있었다. 장마가 지나면 어김없이 방역차가 나타났다. 붕붕거리는 엔진 소리와 함께 골목마다 하얀 연기를 토해냈다. 얼굴조차 분간할 수 없는 희뿌연 연기 속에서 아이들은 서로의 이름을 부르며 뛰어다녔다. 보이지 않는 얼굴들 사이로 터져 나오는 웃음은 허공을 타고 메아리처럼 번져갔다. 안개에 잠긴 듯한 그 세상은 꿈결처럼 몽롱했다. 지금 그 골목은 카페와 공용주차장으로 변했다. 더 이상 물이 차오를 염려도, 대야를 띄울 자리도 사라졌다. 하지만 젖은 옷깃의 물비린내, 희뿌연 연기 속에서 터져 나오던 웃음소리, 젖은 몸을 닦아주던 엄마의 손길까지, 이 모든 것들은 유년의 한켠에서 여전히 살아 숨 쉬고 있다. 세월이 흐르며 모습을 바꿨지만, 마음속 골목은 여전히 그 시절의 빗물을 머금은 채 고요하게 자리 잡고 있다. 삶은 때때로 물살에 흔들리는 고무대야처럼 예측할 수 없지만 그 출렁임 속에서 나는 중심을 잡는 법을 배워간다. 흔들림은 어쩌면 나를 단련하고 성숙하게 만들기 위한 과정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흘러 쌓인 시간들은 기억이 되어 마음의 온도에 따라 각기 다른 빛으로 삶을 비추는 거울이 된다. 때로는 따뜻하고, 때로는 서늘하게, 그 기억들은 내 삶을 천천히 감싸 안아 준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도 비가 내린다. 창가를 타고 흐르는 빗줄기를 바라보며 머물렀던 시간을 반추해 본다. 빗속의 고국 풍경이 잔잔히 내 안으로 스며들고 오래된 기억이 새 물결처럼 일렁인다. 새로 내리는 비는 오래된 기억 위에 겹겹이 쌓이며 또 하나의 풍경을 만들어낸다. 비는 나에게 귀향의 징표이자 추억을 적셔 다시 채워주는 선물이다. 세월이 흘러 많은 것이 변했지만 비가 내릴 때마다 나는 그때의 어린 소녀로 돌아간다. 고무대야가 뒤집혀 흙탕물 속에서도 웃음을 잃지 않던 아이처럼, 오늘도 나는 내 삶의 물결 속에서 천천히 중심을 찾아간다. 김윤희 / 수필가문예마당 고무대야 수필 오래전 고무대야 마음속 골목 빗속 골목
2025.12.04. 18:48
잭키와 빅키는 시댁 조카 수잔이 입양한 딸 쌍둥이 이름이다. 20년 전 만났던 두 아이가 벌써 대학을 졸업했단다. 나는 지금 그들을 만나러 센디에이고 큰댁에 가는 길이다. 동부에 사는 수잔 가족을 샌디에이고 큰댁에서 초대한 모양이다. 쌍둥이 아이들을 처음 만났던 날이 떠오른다. 친척 간의 모임이 잦은 히스패닉 가족의 일원이 되고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다. 이모 아들인 조카 대니얼이 중국에서 입양한 아이를 가족에게 소개한다는 날이었다. 이모댁에 도착하니 집안은 사람들로 가득했다. 서투른 영어로 낯선 얼굴들과 마주하는 일이 서먹했지만 극복해야 할 일이기에 사람 속에서 머뭇거리던 시절이었다. 잠시 후, 백인 여자가 연약한 동양 여자 쌍둥이를 앞세우며 나타났다. 사촌 대니얼의 아내 수잔이라고 남편이 말했다. 모인 사람들의 눈은 두 아이에게 쏠렸다. 수잔은 웃으며 잭키와 빅키라며 쌍둥이를 소개했다. 곧 두 번째 생일을 맞이한다는 딸 쌍둥이의 검은 머리칼은 셀 수 있을 정도로 듬성듬성했다. 윤기 없이 거무튀튀한 피부에 바짝 마른 모습이 안쓰러웠다. 한 아이는 무뚝뚝한 표정으로 사람을 살피고, 다른 한 아이는 입을 굳게 다물고 사람들과 눈을 맞추려 하지 않았다. 나이 오십이 되어 만난 남자의 가족을 처음 마주하던 날 긴장했던 내 모습이 되살아났다. 아기들이 낯선 사람들의 관심과 인사를 받으며 불편해질 마음이 헤아려졌다. 녀석들이 보아왔던 익숙한 얼굴 모습인 내가 있어 마음이 좀 놓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언니인 잭키와 동생인 빅키를 마음에 담고 그들의 앞날이 밝고 평안하기를 기원했다. 수잔은 결혼 15년이 되도록 아이가 생기지 않은 채 사십을 넘기고 있었다. 그녀는 NBC 경제 프로그램을 맡은 기자로 중국 출장 중 길가를 헤매는 고아 실상을 들었단다. 집에 돌아와 남편과 이야기를 나눈 후 입양을 결정했다. 까다로운 입양 절차 중 수잔은 임신 증세를 느꼈단다. 입양자의 임신이 확인되면 허가는 무효가 된다. 수잔은 임신 사실을 숨기고 입양을 진전시켰고 두 아이는 무사히 미국에 올 수 있었다. 수잔 부부는 영양실조가 초래한 쌍둥이의 신체 발육을 위해 병원 출입이 잦다고 했다. 아이들 머리카락이 자라도록 물리 치료를 받고 있다는 소식과 함께 남자아이 출생 사실도 전해졌다. 남자아이는 면역성이 없는 상태로 태어났다. 일 년 사이에 수잔 부부는 세 아이의 부모가 되었다. 몇 해가 지난 어느 날, 시어머니가 마켓에 가게 되면 ‘Sunset’ 잡지를 사보라고 했다. 수잔 스토리가 실렸단다. 즉시 마켓에 들러 잡지를 샀다. 여러 내용과 함께 수잔 아들에 대한 언급이 있었다. 아들은 쌍둥이로 잉태되었지만 한 아이가 태아 상태로 유산이 되어 혼자 태어났다. 그런 이유 때문이었을까, 무면역 증세로 태어난 아기의 방은 몇 해 동안 무균 상태를 유지해야 했다. 누구든 집 바깥에서 있다 집 안에 드는 사람은 즉시 샤워를 하고 옷을 갈아입어야 한다는 사실은 가족 친척 간에 잘 알려져 있었다. 학교에 들어간 아들은 외부 음식은 절대 삼가며 집에서 준비한 음식만 먹는다는 이야기 등, 쌍둥이 안부를 가끔 들으며 시간이 흘렀다. 어느 해 봄, 딸들이 가주에 있는 대학 견학을 원해 샌디에이고에서 한 달 살기를 하고 있으니 시간 나면 다녀가라고 수잔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어느새 대학생이 된다는 잭키와 빅키를 만날 생각에 가슴이 벅찼다. 수잔 가족이 머무는 집에 도착해 문을 노크했다. 안경 쓴 아가씨가 문을 열어 반겼다. 어릴 때 만난 쌍둥이 중 하나였다. 집안으로 들어서니 수잔이 반겼다. 아이들 키우느라 애쓴 때문인지 수척해 보였으나 지적이고 고운 얼굴 분위기는 그대로였다. 무릎 관절이 아파 걷는 일이 힘들다며 수술 후에는 괜찮을 거라 했다. 다행히 카메라 앞에서 행하는 직무는 말하는 모습만 담아내니 화장을 하면 아직 쓸만하다는 말에 우리는 웃었다. 곧 현직을 은퇴하지만 딸들의 대학 생활을 지원해야 한다며 강연이나 컨설팅, 칼럼 기고 등으로 수입을 만들 예정이라 했다. 쌍둥이 형제를 배 속에서 잃고 태어난 제이도 건강한 소년이 되었다. 엄마의 파란 눈과 하얀 피부, 아빠의 검은색 머리를 닮은 모습이 핸섬했다. 제이는 토론을 좋아하고 잭키는 수학에 천재라며 어느 대학이든 입학이 가능할 것이라고 수잔이 자랑스럽게 전했다. 빅키는 빙긋이 웃으며 자신은 문학과 역사를 공부할 예정이라고 했다. 이번 만남은 4년 만이다. 다시 만날 두 아이 생각에 빠져있던 사이 어느새 큰댁에 도착했다. 대가족이라 오랜만에 만나 시끌벅적했다. 수잔과 눈이 마주쳤다. 나를 향해 손을 흔든다. 사람들과 어울려 이야기를 나누는 두 동양 아가씨의 자신감 넘치는 모습이 보기에 좋았다. 잭키는 동부에 있는 어느 과학 연구소에서 일을 시작한단다. 빅키는 대학원에서 중국 역사를 공부할 예정이라며 중국 남자친구가 있다고 했다. 톰보이 같은 잭키와 다르게 머리를 예쁘게 다듬고 엷은 화장을 한 빅키는 막 피어난 꽃처럼 예뻤다. 임신 사실을 알았을 때 혹시 입양을 망설였을까, 궁금해 수잔에게 물었다. 이미 가슴으로 품은 두 아이를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했다. 딸들에게 그들의 뿌리를 이해시키며 키워 왔단다. 두 딸이 있어 든든하다고 했다. 피는 언제나 물보다 진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입양아로 살아가며 양부모로부터 받은 사랑의 추억이 피보다 진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 가깝게 지내는 서양 친구가 한국인 입양 조카를 챙기는 모습을 볼 때면 입양에 대한 편견을 가졌던 내가 참 부끄러워진다. 살펴보니 중국 정부는 계속되는 인구 감소로 2024년부터 자국 아동의 해외 입양을 중단시켰단다. 한국도 이제 해외 입양을 지속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되지만 아직도 입양이 이루어지고 있는 모양이다. 두 아이 입양을 선택했던 수잔 부부의 바다 같은 삶이 세상을 밝히는 빛이 아닐까. 잭키와 빅키가 있어 더 평화롭고 아름다운 그들의 가족 풍경을 다시 떠올린다. 이정숙 / 수필가문예마당 수필 수잔 가족 입양 절차 수잔 아들
2025.11.20. 18:42
“글을 쓰게 된 나의 이야기, 시간은 2분 드리겠습니다.” 문학회 야외 워크숍에서 사회자가 던진 화두였다. 눈앞에 펼쳐진 바다는 하늘에서 감아내린 무지갯빛 타래를 풀어내며 고요히 반짝였다. 저편 등대 불빛이 오랜 기억의 장을 비추고 그 속에서 나를 바라보시던 한 분, 선생님을 떠올렸다. 그 시절은 한국전쟁의 상흔이 아직 삶 곳곳에 남아 있던 때였다. 가난했지만 사람들의 마음은 골짜기 돌 틈에서 스며나오는 샘물처럼 맑고 따스했다. 그 해 여름, 초등학교 3학년이던 나는 ‘선생님께 편지 쓰기’라는 방학 숙제를 받았다. 누군가에게 편지를 쓴다는 건 어린 마음에 신기한 일이었다. 더구나 그 대상이 선생님이라니 가슴이 더욱 두근거렸다. 어떻게 써야 할지 몰라 한참을 망설였지만, 알 수 없는 설렘에 마음을 얹어 한 자 한 자 써내려갔다. 돌이켜보면 그것이 내 생애 첫 글쓰기였다. 편지를 다 쓰고 난 뒤엔 어떻게 보내야 할지 몰라 학습장 갈피에 꼭 끼워두었다가 개학 날 함께 제출했다. 며칠 뒤 선생님께서 내 이름을 부르셨다. “얘들아 방학 숙제로 선생님께 편지를 써온 친구는 전교에서 김영신 한 명뿐이란다. 그 편지가 얼마나 예쁘고 감동적인지, 선생님은 읽으며 참 기뻤단다. 지금 너희에게 읽어주려고 해.” 낭낭한 목소리가 교실 가득 울려 퍼질 때 내 가슴에 감동이 파문처럼 번졌다. ‘내 글이 아름답다니.’ 처음 들어본 칭찬이 자긍심에 심지를 세우고 불을 지펴 주었다. “이 글은 전교에 돌려 읽힐 거예요. 모두에게 큰 배움이 될 거예요.” 그날 선생님은 방과 후 교실에 남으라고 하셨다. 수업이 끝난 뒤 혼자 앉아 있던 내 책상 위에 선생님은 하얀 묶음지 한 권을 내미셨다. “영신이 글 솜씨는 참 특별하구나. 오늘부터 이 노트에 매일 글을 써보자. 편지를 썼듯이, 네 마음을 글로 옮겨보는 거야.” 그 말씀은 내가 알지 못했던 세계로의 초대장이었다. 책이라곤 교과서뿐이던 내게 ‘글을 쓴다’는 건 생소하기만 한 일이었다. 멍하니 연필만 쥔 나를 보며 선생님은 다정히 일러주셨다. “편지를 처음 써봤다고 했지? 그게 바로 글이란다. 네 마음속 이야기를 꺼내 적어보렴. 너의 글에는 특별한 감성이 있어.” 그날부터 나는 방과 후 교실에 남아 글을 쓰기 시작했다. 선생님은 한 번도 글의 방향을 지시하거나 잘못을 지적하지 않으셨다. 그저 창가 책상에 앉아 자신의 일을 하며 내가 글을 마칠 때까지 말없이 기다려 주셨다. 이제는 안다. 그 침묵 속에 한 아이를 향한 믿음과 애정, 인내와 격려가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는 것을. 햇살이 가득하던 창가, 두 사람만의 고요한 시간 속에서 내 안의 작은 우주가 돌기 시작했다. 나는 글을 배우기 전에 ‘듣는 법, 느끼는 법, 기다리는 법’을 먼저 배웠다. 그때 쓴 글 중 하나는 선생님이 공모전에 내주셔서 상을 받았다. 하지만 내게 가장 빛나는 상은 따로 있었다. 바로 방과 후의 시간 그리고 선생님이 내어주신 마음의 자리였다. 그건 마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가 토끼굴을 지나 처음 내디딘 새로운 세상처럼, 내 안의 가능성을 찾아가는 경이로운 첫 여정이었다. 그 시간이 더 오래 지속하였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반 학기가 지나 이사를 하게 되어 전학을 갔다. 새 학교에서의 첫 작문 시간, 담임 선생님이 내 글을 반 친구들 앞에서 읽어 주셨다. 잘 쓴 글이라는 칭찬의 말이 이어질 때, 창가에서 미소 짓던 옛 선생님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건 그리움의 반향이었을까, 아니면 말로 다 하지 못한 감사의 투영이었을까. 이후 중고교 시절 전국 백일장에 참가해 상을 받기도 했고, 대학에서는 학보사 기자로 글쓰기를 이어갔다. 그러나 결혼과 함께 미국으로 이주하면서 글은 삶의 뒤안길로 물러났다. 생계와 자녀 양육, 낯선 땅에서의 삶은 고되고 숨가빴다. 그렇게 반세기가 넘는 세월이 흘렀다. 이제 일흔을 훌쩍 넘긴 나는 다시 펜을 들었다. 살기에만 바빴던 이민의 세월 끝에 비로소 ‘나’를 마주하게 된 지금, 나를 찾아 글을 쓰기 시작했다. 그렇게 쓴 첫 글이 등단이라는 포상으로 돌아왔고, 내 이름 앞에는 ‘문인’이라는 두 글자가 더해졌다. 한 편의 글을 써낸다는 것은 고통이자 눈부신 기쁨의 과정이다. 늦은 나이에 이 길로 들어설 수 있었던 건, 그 첫 불씨를 밝혀주신 선생님 덕분이다. 오늘도 나는 선생님께 드렸던 첫 편지를 쓰는 마음으로 글을 쓴다. 선생님께서 내어주셨던 방과 후 시간처럼 내 인생의 방과 후에 펜을 들었다. 내 마음이 글이 되기까지 기다려주셨던 그분을 생각하며. 들판에 막 움튼 새싹을 찾아내어 살피고 돌보시던 분. 평범한 한 아이에게 정성을 다해주셨던 그 헌신은 오늘도 내 길을 비추는 등대 불빛처럼 반짝인다. 글을 쓰기 전에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삶으로 보여주셨던 분. 내게 세상을 향한 따스한 시선이 있다면 그 뿌리는 당신에게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내 인생에 일찍이 선생님을 만난 일은 한 생애를 비추는 보배로운 축복이었다. 이제, 오래도록 마무리하지 못했던 편지의 끝말을 올린다. “선생님, 감사합니다. 제 안에 심어주신 불씨가 긴 세월을 돌아 이제 제 인생의 방과 후를 밝히고 있습니다.” 이영신 / 수필가문예마당 인생 수필 그날 선생님 마음속 이야기 편지 쓰기
2025.11.13. 18:47
나는 오늘도 편지를 쓴다. 마음으로 쓰는 편지이다. 숙이, 60년째 내 가슴에 담고 놓지 못하고 있는 이름이다. 꽃샘 추위가 옷깃을 여미게 하던 삼월 어느 날, 산골 초등학교 운동장에 큰 트럭 한 대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들이닥쳤다. 교실에서 공부하던 우리들은 우르르 창가로 몰려가 운동장을 바라보았다. 트럭 안에는 수십 명 아이들이 타고 있었고 한 명 한 명 내려서 운동장에 줄을 서고 있었다. 그들은 거의 맨발이었고, 나중에 보니 발은 동상에 걸린 듯 붉은빛으로 변하여 퉁퉁 부어 있었다. 얼굴은 상처투성이고 몇 날이나 씻지 않았는지 까만 얼굴에 눈만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전쟁고아들이라 했다. 우리 동네 가까운 곳에 있는 고아원에 살게 되었고 우리 학교에 다닐 거라 했다. 무서웠다. 트럭에서 내린 아이 중 하나였던 숙이. 짧은 단발머리 안에 부스럼이 봉긋봉긋 솟아 있고 꼬질꼬질 더러운 옷을 입고 있던 꼬마 아이. 그가 내 짝이 되었다. 초등학교 2학년인 내 인생 첫 시련이었다. 깡마른 몸, 버짐이 피어 있는 얼굴, 땟국물이 흐르는 애가 나는 싫었다. 그렇지만 거부할 수 없었다. 수업 시간 내내 책상에 엎드려 잠만 자는 아이의 모습이 조금은 애처롭게 느껴지기도 했다. 그 지역에서 가장 오지였던 우리 마을은 학교에서 십 리도 넘게 떨어져 있었다. 오가는 길에 징검다리가 있는 개울을 두 개나 건너야 했다. 비만 오면 물이 넘쳐 다리가 사라져 버렸기에 자연스레 학교를 쉬었다. 그런 날이면 고학년 언니들은 산을 넘어 학교에 다녔다. 유난히 작고 어린 나에게 학교 가는 길은 고행길이었다. 숙이가 그 길을 동행해 주기 시작했다. 우리 집 가는 길목에 있는 고아원이 숙이의 새 보금자리였다. 시간이 흐르면서 숙이의 얼굴에 살이 오르기 시작했고 옷도 깨끗해졌다. 이제는 더 이상 무서운 숙이가 아니라 늘 함께 붙어다니는 짝꿍이었다. 등굣길에 숙이는 내가 올 때까지 징검다리에 앉아 기다려 주었고 하굣길에는 다리를 건너기 전에 헤어졌다. 혼자 집에 갈 때 사람만 나타나도 무서웠던 시골길이 둘이 되자 마냥 웃고 떠드는 즐거운 길이 되었다. 가끔 고아원 남자 아이들이 괴롭히기도 했지만 그런 것쯤은 숙이랑 함께 있을 땐 문제가 되지 않았다. 전쟁의 상흔이 채 아물지 않았던 60년대, 당시 내 고향 영산은 6월이면 보릿고개를 넘어야 했다. 햇보리도 아직 타작을 못했고 쌀은 구경조차 하기 어려웠다. 어머니가 감자 농사를 지어서 그 시기에는 도시락도 주로 감자를 삶아 싸 주었다. 어느 날 청소 시간에 숙이가 다가와 네 도시락 뚜껑이 열려 있다고 말했다. 확인해 보니 도시락이 텅 비어 있었다. 누군가가 점심으로 먹을 하지 감자를 다 먹어버린 것이다. 나는 울음을 터트렸다. 아이들이 몰려들었다. 한 친구가 숙이가 가져다 먹는 걸 봤다고 말했다. 나는 설마 하며 숙이를 바라보았다. 숙이는 아니라고 소리 질렀다. 그런데 나는 이미 숙이가 범인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어떤 변명을 해도 듣지 않고 경멸의 눈으로 바라보며 도둑년이라고 소리 질렀다. 자기가 저질러놓고 나에게 시치미 뚝 떼고 도시락 뚜껑이 열렸다고 말하는 얌체 같은 계집애라고 퍼부어 댔다. 그러자 숙이는 갑자기 돌변하여 나를 때리기 시작했다. 얼마나 맞았는지 그대로 정신을 잃어버렸고 깨어났을 때는 집에 누워있었다. 엄마는 자초지종을 아는 듯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그날 이후 3일 동안 나는 학교에 가지 못했다. 다시 학교에 갔다. 숙이는 보이지 않았다. 그 일이 있고 난 다음날부터 나오지 않았다고 했다. 학교에서 징계했는지 숙이가 스스로 학교를 그만두었는지 알 수 없었다. 그때부터 내 옆자리는 비어 있었다. 날이 갈수록 숙이의 빈자리는 커져만 갔다. 등하굣길에 함께 다니며 조잘대던 친구가 사라졌다. 늘 징검다리에서 기다리다가 나를 보며 환하게 웃어주던 숙이는 더 이상 만나볼 수 없었다. 겨우 3개월 남짓 그녀와 함께했었다. 그동안 날마다 십리 길을 함께 오가며 쌓은 정이 아니든가, 그제야 내가 숙이에게 어떤 상처를 주었는지 실감이 나기 시작하였다. 전쟁고아였던 숙이, 나는 한 번도 그 아이에게 가족 얘기를 묻지 않았다. 그동안 어디서 어떻게 살았느냐고 묻지도 않았다. 세상에서 제일 좋은 엄마도 없이 얼마나 외롭고 힘들었느냐고 위로해 주지도 못했다. 더럽고 초라한 몰골로 트럭에서 내렸던 아이, 고아원에 사는 불쌍한 아이라는 편견을 짝꿍이며 등 하굣길 함께하는 소중한 친구라는 이유로 덮어 버리기에는 너무 어린 나이였는지 모른다. 그 뒤로 나는 숙이의 소식을 듣고 싶어 몇 번이나 고아원에 찾아갔다. 어디로 갔는지 모르니 다시 찾아오지 말라던 아저씨의 눈은 ‘너 때문에 떠났는데 왜 찾아오니’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그때부터 내 머릿속 한구석에 화두처럼 박힌 질문이 떠나질 않았다. 감자 몇 개가 뭐라고 그렇게 몰아붙였을까, 숙이가 정말 먹지 않았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왜 못했을까, 설사 먹었다 하더라도 배고픈 친구의 마음을 왜 살피지 못했을까. 문득문득 그녀가 보고 싶을 때 같은 내용의 편지를 썼다. 매번 보낼 곳을 알지 못해 허공에 날릴 뿐이었다. 이듬해 우리 가족은 고향을 떠나 도회지로 이사를 했다. 10년 뒤 고향을 찾았을 때 친구들에게 숙이의 소식을 물었다.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었다. 떠난 이후 그녀는 고향을 한 번도 찾지 않았던 모양이다. 정말 바람처럼 흔적 없이 사라져 버린 것이다. 내 친구 숙이, 그녀는 한 번도 변한 적이 없는 단발머리 소녀로 내 마음속에 남아있다. 지금도 감자를 먹을 때면 숙이가 생각나곤 한다. 어딘가에서 살고 있을 그녀가 건강하고 행복하기를 기도한다. 유년 시절 짧은 만남 후 아프게 헤어진 한 소녀를 60년 세월 동안 애타게 그리워하는 것은 그녀에게 꼭 할 말이 있기 때문이다. 미안하다고, 정말 미안하다고 말하고 싶기 때문이다. 이정길 / 원불교 교무·수필가문예마당 편지 수필 산골 초등학교 우리 학교 고아원 남자
2025.10.23. 17:34
동네를 산책하다 보면 까마귀를 종종 마주하게 된다. 지붕 위에도 올라가 있고 길바닥에서 뒤뚱거리며 걷기도 한다. 그냥 가만히만 있어도 보기 싫은데 거친 목청으로 “까~악 까~악 깍” 울어 조용한 동네를 시끄럽게 하기 일쑤다. 가끔 쓰레기통을 뒤져 길바닥을 어지럽히기도 하니 더욱 밉다. 우리 동네에 사는 까마귀는 보통 까마귀(Crow)가 아니고 ‘레이븐(Raven)’이라는 큰 까마귀여서 무섭기도 하다.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온몸이 짙은 검은색으로 덮여 있다. 어딘 가에 눈이 있을 텐데, 그것조차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더 섬뜩하게 느껴진다. 마주칠 때마다 미워하며 어서 우리 동네를 떠나기 바랐다. 우리 동네에는 반려견을 기르는 사람들이 많다. 평소에는 사람 그림자도 안 보이다가 이른 아침에는 개를 데리고 나와 잔디에다가 변을 보게 한다. 그러는 동안 이웃끼리 서로 잡담도 하고, 코요테가 동네에 나타났다는 등 소식도 전한다. 옆집에는 60대 중반의 백인 여자가 혼자 산다. 웰시 코기 종의 개를 온갖 정성을 다해서 돌본다. 몇 살이냐고 물으니 15살이라며 슬픈듯한 표정을 짓는다. 어느 날 갑자기 까마귀 떼들이 우리집 근처에 몰려들었다. 그날은 평소와 달랐다. 집 담장 밖, 커다란 소나무 부근에서 미친 듯이 울부짖고, 날개를 푸드덕거리며 난동을 부렸다. 마치 누군가를 부르는 듯, 아니면 무언가를 알리는 듯한 소리였다. ‘사고가 났나? 아니면 누가 죽었나?’ 별별 생각이 다 들었다. 그날의 광경은 머릿속에서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불길한 기운과 이상함이 느껴졌다. 혹시 옆집 개가…? 얼마 후, 한동안 보이지 않던 옆집 여자를 만났다. 늘 데리고 다니던 웰시 코기 반려견이 보이지 않았다. 웬일이냐고 물으니 얼마 전에 죽었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나이가 많아 죽을 때가 되긴 했지만 더 살기를 바랐는데…”라며 말을 잇지 못했다. 나는 속으로 ‘아! 그 까마귀 떼들이 그래서 그랬었구나!’하고 생각했다. 그날 까마귀 떼의 울음은 어쩌면 옆집 여자를 대신한 애도였는지도 모르겠다. 신기했다. 까마귀는 옆집 개가 죽는다는 것을 어떻게 알았을까? 사람은 모르는 감정, 기운, 예감 등을 까마귀는 아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본 그날의 장면은 단순히 까마귀가 이상하게 굴었다는 수준을 넘어서 어쩌면 삶과 죽음 사이의 문턱을 엿본 순간으로 느껴졌다. 그날 일을 계기로 까마귀에 대해서 많은 관심을 갖게 됐고, 문헌을 찾아보고 많은 것을 알게 됐다. 까마귀는 동물의 죽음을 알아차릴 수 있고, 그에 대해 무리 지어 반응할 수 있다고 한다. 단순한 본능이 아니라, 지능적으로 무엇인가 이상하다, 사라졌다, 죽었다는 것을 인식하고 행동한다는 것이다. 까마귀는 여러 문화권에서 불길한 징조로 등장한다. 죽음의 전조, 또는 그 너머 세계와 연결된 존재로 여겨져 왔다. 영화, 문학, 신화 등에서 큰 까마귀는 종종 죽음, 지혜, 예언의 상징으로 등장한다. 애드거 앨런 포의 시 ‘까마귀(The Raven)’에서는 절망과 광기를 상징하기도 한다. 하지만 모든 문화에서 항상 나쁜 의미로만 쓰이진 않는다. 북유럽 신화에서는 까마귀는 길조가 되기도 한다. 지혜와 예지의 상징으로 세상을 날아다니며 정보를 가져오는 존재로 등장한다. 또한 한국, 중국, 일본 등 동아시아의 설화에서는 하늘과 인간 세계를 잇는 ‘삼족오’ 라는, 태양과 관련된 신화적 존재이다. 어떤 문화냐에 따라 까마귀의 상징이 달라진다. 성경에서도 까마귀가 나온다. 선지자 엘리야와 까마귀 이야기다. 하나님은 선지자 엘리야에게 아합 왕의 죄악을 꾸짖게 하시고, 이후 그를 숨기기 위해 요단 동쪽의 그릿 시냇가로 보내신다. 그곳은 물 한 모금 마시기도 어려운 광야다. 엘리야를 챙겨주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런데 끼니때마다 놀랍게도 어디선가 까마귀가 떡과 고기를 입에 물고 날아왔다. 엘리야는 광야에 혼자 있으면서 까마귀를 통해 하나님을 더욱 깊이 신뢰하게 된다는 이야기다. 어릴 적부터 듣던 말이 있다. “까마귀 고기를 먹었나?” 뭔가를 잊어버릴 때마다 어른들은 그렇게 말했다. 하지만 까마귀는 오히려 잊지 않는 새라는 것을 알게 됐다. 어쩌면 까마귀는 인간보다 더 많이 기억하는 새인지도 모른다. 조류 학자들 얘기로는 까마귀는 새 중에서 가장 똑똑한 측에 속한다. 기억력이 좋고, 도구를 만들어 사용하며, 의사소통 능력까지 인정받고 있다. 실험실에서는 퍼즐도 풀고 문제 해결 능력이 뛰어나다. 무리를 지어 생활하며 협동하는 행동을 보인다. 또한 사람 얼굴을 기억하고, 매우 적응력 있는 동물이라 인간 사회에 깊이 섞여 살고 있는 존재라고 한다. 우리는 까마귀의 모습을 흉하게 여기고 까마귀를 재수없는 존재쯤으로 넘겨버린다. 그러나 사람의 시선이 닿지 않는 곳에서, 죽음을 마주한 까마귀는 더 이상 단순한 새가 아니다. 그 순간, 무언가를 알고 있는 영험한 존재가 된다고 한다. 그들은 ‘죽음’ 그 자체에 반응한다. 죽은 동료를 보면 소리치며 모여든다. 어떤 이는 이를 ‘경고’라고 해석하고 어떤 이는 ‘장례’라고 말한다. 하지만 그 의미는 아무도 정확히 모른다. 그렇게 모여든 후 죽은 동료를 바라보며 긴 침묵에 잠긴다. 그 자리에 남아 지키며 떠나지 않는다. 우리 인간은 알 수 없다. 그 침묵이 애도인지, 혹은 의식인지. 나는 까마귀의 생김새나, 시끄러운 울음 소리, 그리고 나쁜 이미지 때문에 미워하고 싫어했다. 그러나 까마귀에 대해 알고 난 후로 아무런 해도 끼치지 않는 우리 동내 까마귀들을 나쁘게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모든 새는 나름대로 생존의 의미가 있고, 권리가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농부는 참새를 미워하지 않는다. 다만 수확기에 내쫓을 뿐이다. 중국에서 곡식을 축내는 참새떼를 거국적으로 박멸에 나섰더니 오히려 해충의 피해가 더 많았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이 세상 모든 새들은 독수리나 갈매기나 참새나 까마귀나 그들 나름대로 가치 있는 생명이다. 지금 산책 길에 보이는 까마귀는, 예전 같으면 그냥 지나쳤을 존재들이지만 그날 이후로 까마귀를 예사로이 볼 수 없다. 까마귀를 바라보는 나의 시선이 달라졌다. 이제는 동네 까마귀를 좋은 이웃처럼 대하고 더불어 살기로 했다. 배광자 / 수필가문예마당 수필 까마귀 고기 보통 까마귀 까마귀 떼들
2025.10.16. 18:43
내 이름은 이윤희다. 결혼 후 남편 성을 따라 김윤희로 살아온 세월이 길다 보니 이제는 이윤희보다 김윤희가 더 자연스럽고 익숙하게 들린다. ‘진실 윤’ ‘바랄 희’ 진실만 바라며 살라는 부모님의 염원이 담긴 이름은 아버지께서 지어 주셨다. 우리나라는 문중의 항렬과 사주를 고려한 한자 이름이 일반적이었지만 2000년대 초부터 순우리말이 유행하기 시작했다. 요즘처럼 국제화된 시대에는 영문 표기와 발음이 쉬운 받침 없는 이름을 선호한다고 한다. 이름에도 시대의 흐름과 트렌드가 있다는 말이 실감난다. 아버지가 지어 준 ‘진희, 주희, 윤희’ 우리 세 자매의 이름은 반세기가 훌쩍 지난 지금도 촌스럽지 않다는 말을 자주 듣는다. ‘희야’는 우리 집안 여자들의 공용 호칭이었다. 넓은 잔디밭과 정원 가장자리에 한옥과 양옥이 기역자 형태로 배치된 집에서 조부모님과 부모님, 두 언니와 두 오빠, 엄마의 살림을 도와주던 순자 언니, 그리고 막내인 나까지 열 명이 함께 대가족으로 살았다. 식사를 제외한 대부분의 시간을 주로 한옥에서 보내셨던 할아버지 할머니는 조그마한 일에도 우리를 자주 호출하셨다. “희야”하고 부르면 엄마와 세 자매는 합창하듯 “예” 하고 대답했지만 결국엔 막내인 내가 떠밀려 심부름을 도맡게 되었다. 그래도 몰래 챙겨주시던 용돈 받는 재미에 두 분의 기침 소리만 들려도 전광석화처럼 달려가곤 했다. 언니 오빠들은 슬쩍 눈치를 보며 딴청을 피웠지만, 그 심부름 끝에 주어지는 달콤한 사탕이나 빳빳한 지폐의 유혹은 막내인 내가 결코 외면할 수 없는 보상이었다. 우리 식구들은 나를 ‘막둥이’라고 불렀다. 여고생이 되기 전까지는 집안의 자잘한 심부름은 거의 내 몫이었다. 그래서 동생 있는 친구들이 무척이나 부러웠다. 막내의 설움을 운운하며 투덜대기도 했지만, 돌이켜보면 막내라는 이유로 받은 특혜와 내리사랑은 늘 변함없이 이어져 왔다. 열 손가락 깨물어 안 아픈 손가락이 어디 있겠느냐 마는 세상 부모들이 막내를 더 애틋하게 여기는 건 그 자식과의 인연이 상대적으로 짧을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형평성에 맞지 않는 상황에도 묵묵히 이해해주던 형제자매들에게 한때나마 품었던 불만이 괜스레 미안해진다. 사촌의 출산 소식을 듣고 병원으로 달려갔다. 산모 병실을 확인하기 위해 안내 데스크로 다가가자 간호사는 “무엇을 도와드릴까요?”하고 묻는다. 엄마 안 공(Ahn S Kong), 아빠 상 공(Sang S Kong), 아기 조이스 공(Joyce Kong)을 만나러 왔다고 하니 금방 찾아 준다. 동양인이 드문 병원이라 금세 눈에 띄었나 보다. “‘앤 콩, 생 콩, 조 콩’은 203호 입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한글 이름을 영어로 소리 나는 대로 표기하다 보면 예기치 않게 벌어지는 흔한 해프닝이었지만, 콩 콩 콩이라니. 간호사에게 이 웃음의 의미를 설명해주려 했지만, 언어의 장벽을 넘어 그 미묘한 어감의 재미를 전달하기란 불가능에 가까웠다. 간호사는 무슨 일인지 영문을 몰라 갸우뚱거리며 그저 따라 웃을 뿐이었다. 그날 이후 우리 가족에게 ‘앤 콩, 생 콩, 조 콩’은 한동안 박장대소의 화제가 되었고, 아직도 그때를 떠올리면 웃음이 절로 난다. 특별한 추억을 남겨준 그 간호사는 지금도 어딘가에서 또 하나의 ‘웃기는 한국 이름’을 작명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이름은 운명이라고 할 만큼 인생에 큰 영향을 주기도 한다. 삶에 굴곡이 많은 이들 중에는 운세를 바꾸기 위해 개명을 하고, 무명 생활이 길어진 연예인은 예명으로 재기의 발판을 삼는다. 그 효력이 과학적으로 검증된 바는 없지만 실제로 성공 사례는 종종 들려온다. 개명 사유 중에는 이름의 어감이 좋지 않거나 놀림감이 된다는 것이 가장 많다는 통계를 보았다. ‘송 아지’나 ‘방 귀남’처럼 성과 이름의 부조화로 놀림을 당하는 경우도 적잖게 볼 수 있다. 평생 불릴 이름이 자신에게 열등감을 느끼게 한다면 개명을 통해 자존감을 회복하는 것도 하나의 좋은 해결책이 아닐까. 새로운 이름으로 새 인생을 시작하려는 이들의 마음은 단순히 운을 바꾸려는 시도를 넘어, 온전한 자신으로 존중받고 싶은 간절한 소망일지 모른다. 유대인의 경전 ‘탈무드’에 따르면 사람은 세 가지 이름을 갖는다고 한다. 첫 번째는 태어났을 때 부모님이 지어주신 이름, 두 번째는 살면서 가까운 사람들이 애정을 담아 붙여준 별명 또는 애칭, 세 번째는 삶이 끝났을 때 지인들이 기억하는 이름이다. 득과 실에 너무 연연하지 말고 남보다 조금 손해 보며 살라는 부모님의 가르침을 마음에 새기며 나는 인생의 후반기를 그렇게 걸어 가려 한다. 인생의 시작은 이름에서 출발한다. 그렇다면 부르기 좋고, 듣기 좋고, 의미 있는 이름을 선물 받은 내 인생의 시작은 꽤 괜찮은 편이다. 삶의 여정 속에서 마주할 장애물 앞에서도, 정직하게 살아가길 바랐던 부모님의 당부. 그 뜻을 내 이름에 담아 주셨음을 이제야 깊이 느낀다. 앞으로 누군가 내게 ‘윤희’의 뜻을 묻는다면 나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부모님의 사랑입니다.” 김윤희 / 수필가수필 이름 한자 이름 한글 이름 성과 이름
2025.10.09. 19:33
요즘, 목걸이 하기가 싫어졌다는 친구가 있다. 눈만 뜨면 매스컴에서 목걸이 얘기고, 똑같은 목걸이 사진을 하도 많이 봐서 그렇단다. “좋은 말도 세 번이면 듣기 싫고, 아무리 예뻐도 자꾸 보면 질리는데, 뭔 좋은 거라고….” 친구는 피곤하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 목걸이라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이미지는 반짝임과 우아함이다. 여성의 얼굴과 옷차림을 더 섬세하고 눈에 띄게 한다. 작은 물건이지만, 거기에는 욕망, 허영심, 계급의식 등이 응축되어 있다. 또한 목걸이는 단순한 장신구를 넘어서, 많은 이야기와 상징 등 생각할 거리가 담겨있어 문학 작품에서도 사랑받는 소재가 되기도 한다. 예를 들면 모파상의 단편 〈목걸이〉에서는 단순한 목걸이 하나가 한 여인의 인생을 완전히 망가뜨린다. 주인공 마틸드는 매우 사치스럽고 허영심이 많은 여자이다. 항상 상류층의 삶을 동경했고, 그들처럼 폼나게 살아보고 싶었으나 그녀의 남편은 하급 공무원이었으므로 그녀의 욕망을 채워줄 수 없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의 남편이 무도회 초대장을 들고 온다. 뛸 듯이 기쁘지만 입을 옷과 장신구가 없어 괴로워한다, 예쁘게 치장하고 갈 형편이 안 되는 그녀는 친구에게 값비싸 보이는 목걸이를 빌려 무도회에 참석해 사람들의 주목을 받는다. 하지만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그 목걸이를 잃어버리고 만다. 결국 많은 빚을 내어 잃어버린 목걸이와 비슷한 것을 사서 친구에게 돌려준다. 그녀는 빚을 갚기 위해 10년간 극심한 노동과 절약을 하며 살아간다. 그 과정에서 그녀의 손은 거칠어지고, 외모도 몰라보게 변한다. 10년 후, 마틸드는 우연히 그 친구를 만나 사실을 털어놓았더니, 그 친구가 하는 말이 “그 목걸이는 가짜였어.” 순간 마틸드는 10년의 삶 전체가 무너지는 충격을 받는다. 허영심과 외면적인 허세가 가져온 비극이다. 서머셋 몸의 〈진주 목걸이〉도 있다. 가정부 미스 로빈슨에 관한 이야기이다. 그녀가 모조품인 줄 알고 싼값에 산 목걸이가 실은 수만 파운드에 달하는 진품 진주라는 보석 감정사의 말에 그녀의 인생이 역전한다. 우연히 귀중한 목걸이를 소유하게 된 사실 하나로, 사회는 그녀를 다르게 대하기 시작한다. 진주가 갑자기 빛나기 시작한 것이 아니라 세상이 그녀를 새로운 눈으로 보기 시작한 것이다. 진짜 진주 목걸이로 인해 그녀는 완전히 다른 신분이 된다. 그리고 또 하나의 문학 작품, F. 스콧 피츠제럴드의 〈위대한 개츠비〉가 생각난다. 개츠비와 데이지는 과거 사랑했던 사이다. 개츠비가 전쟁에 나가면서 이별했고 그 사이 데이지는 부유한 남자 톰 브캐넌과 결혼하기로 한다. 결혼식 전날 밤 데이지는 개츠비에게서 받은 편지를 읽고 큰 혼란에 빠진다. 그녀는 술에 취해 울면서, 톰에게서 받은 진주 목걸이를 집어던지며 그 결혼을 망설인다. 하지만 결국엔 다음날 톰과 결혼한다. 데이지는 사랑보다는 부와 안정, 그 상징으로서 비싼 진주 목걸이를 택한 것이다. 개츠비는 오직 데이지를 다시 만나기 위해 부를 쌓는다. 그녀의 집 근처에 집을 짓고, 그녀가 나타나길 기다리며 호화로운 파티를 자주 연다. 드디어 개츠비는 데이지와 재회를 하고 가까워진다. 어느 날 데이지가 개츠비의 차를 운전하다 여자를 치어죽이는 큰 사고를 낸다. 개츠비는 데이지를 보호하기 위해 자신이 운전했다고 거짓말을 한다. 개츠비는 죽은 여인의 남편 총격에 의해 허망하게 죽는다. 그러나 데이지는 개츠비의 장례식에도 참석하지 않고,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남편 팔짱을 끼고 그 도시를 떠난다. 개츠비는 사랑할 가치도 없는 여자를 위해, 또 과거에 집착한 나머지 현실을 망치고 만 것이다. 모파상의 마틸드는 가짜 목걸이로 진짜 인생을 잃었고, 서머셋 몸의 가정부는 진짜 목걸이로 가짜 인생을 얻었다. 그리고 위대한 개츠비의 데이지는 사랑보다 무거운 목걸이를 택했다. 현실로 돌아와 다시 목걸이 앞에 서 있다. 2022년 6월, 스페인 마드리드의 왕궁 만찬장에 윤석열 전 대통령과 함께 나토(NATO) 정상회의에 참석한 김건희 씨의 목에서 클로버 문양의 목걸이가 반짝이는 자태를 뽐냈다. 이 목걸이는 프랑스 명풍 ‘반 클리프 아펠’의 ‘알함브라’ 컬렉션으로 한국내에서 시가가 6000만원을 호가하는 제품이다. 3년 뒤 ‘판도라의 상자’를 여는 기폭제가 됐고, 김건희씨 구속 사유 중 하나로 주목받았다. 한때 우아함과 고급스러움을 상징하던 목걸이가 이제는 진품이니, 모조품이니, 뇌물이니 하는 부정적인 상징물로 전락했다. 그리고 그 목걸이에서 사람들은 수많은 이야기들을 뽑아내고 있다. 마치 목걸이 하나로 그녀의 삶을, 가치관을, 정치적 위치를 대변할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언론에는 연일 그 목걸이에 관한 보도가 이어졌다. 어떤 날은 그 가격이, 어떤 날은 브랜드가 어디였는지, 또 어떤 날은 과연 그것이 적절했는지, 영부인답지 않다는 비판이 줄을 이었다. 목걸이 하나가 이토록 많은 말을 낳는다는 게 기이하면서도, 어쩐지 익숙할 정도였다. 우리는 김건희씨가 착용한 그 목걸이에 왜 이토록 민감한가. 그것이 비싼 것이라서? 그것이 권력의 손에 쥐여졌기 때문에? 아니면, 그 목걸이 뒤에 숨겨진 어떤 의미를, 어떤 속내를 읽어내고 싶어서일까? 이 모든 질문은 목걸이 자체가 아니라, 그 목걸이를 보는 우리의 시선을 말해 주는 것 같다. 문득 ‘목걸이는 무슨 죄가 있을까?’는 생각이 든다. 장신구는 말이 없다. 그것을 바라보는 사람의 시선이 때로는 탐욕이 되며, 미움이 되고, 비판이 되기도 한다. 도대체 왜 사람들은 죄를 물건에 덮어씌우는 것일까. 목걸이는 말을 하지 않는다. 그 목걸이가 비난받는 이유는 단지 그것이 비싼 다이아몬드이어서가 아니라, 그것을 누가, 언제, 어떤 상황에서 걸었느냐 때문이다. 목걸이를 보는 우리의 시선이야말로 의미를 결정한다. 모든 여인은 인생에서 한 번쯤 목걸이를 두른다. 그것이 진주이든, 유리이든, 감추고 싶은 상처이든, 드러내고 싶은 존재이든. 오늘도 사람들 사이에서 빛나는 목걸이를 본다. 이름 모를 여인이 착용한 진주 목걸이를, SNS 속 셀럽이 드러낸 목의 윤곽과 금줄, 쇼윈도에 놓여 누군가를 기다리는 아름다운 목걸이를. 만약 김건희씨가 당당하게 우리 전통 장신구를 착용했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그리고 요즘 목걸이 하기가 싫어졌다는 친구에게 말한다. “친구야, 목걸이는 죄가 없다. 죄가 있다면 그걸 그렇게 사용한 사람이다”라고. 배광자 / 수필가문예마당 목걸이 수필 가짜 목걸이로 진주 목걸이 진짜 목걸이로
2025.10.02. 18:56
학생들의 행동 패턴을 보고, 그 부모의 직업을 대략 유추해 볼 수 있다고 하면 지나친 말일까? 내가 대학에서 영어과목을 가르칠 때의 일이다. 나는 매학기 첫 주에 A4 용지 1장 분량의 자기 소개서를 영문으로 써내라는 과제를 학생들에게 주었다. 그 과제를 주는 이유는, 첫째, 학생들의 영어 실력을 파악할 수 있고, 둘째, 수업에 임하는 학생들의 성실도를 가늠할 수 있고, 마지막 셋째. 그 두 가지 정보를 바탕으로, 강의 내용의 강도를 조절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여러 학기를 반복하다가, 나는 우연히 의도하지 않은 데이터를 얻게 되었다. 한국의 학생들은 집단주의 문화의 영향으로, 자기 소개서에 본인에 관한 것보다는, 주로 가족이나, 본인이 속한 조직, 친구, 또는 사는 동네에 관해 진술한다. 그래서 자연히 그들의 배경에 대해서 알게 된다. 특히 학생들은 자기 소개서에 부모의 직업에 관해서 꼭 기술한다. 그런데 놀랍게도 부모의 직업이 자녀의 행동 패턴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내가 기술할 이 내용은 과학적 실험을 토대로 한 것이 아니므로, 그저 한 개인의 재미있는 경험담으로 이해해주면 좋겠다. 학생들 중에 여하간 상냥한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모두에게 상냥하고, 여간해선 불쾌감을 드러내지 않는다. 또, 그들은 상대방의 말에 장단을 잘 맞춘다. “아,” “그래?” “정말,” “하하,” 사교계에서 매우 인기 높을 성격들이다. 그들의 부모는 대개 동네 장사를 한다. 예를 들어, 아파트 단지의 마켓이나, 꽃가게, 선물가게, 약국, 문방구, 식당, 등. 동네에서 인심을 잃으면 안 되는 직업이다. 그들의 상냥함은 작은 꽃 같이 참 예뻤다. 학기 내내 지각을 한 번도 안 하고, 먼저 와서 기다리고, 결석은 더더구나 안 하는 학생들이 있다. 그들은 수업이 끝나기 전에 먼저 강의실을 떠나는 법도 없다. 이 학생들에게는 특이한 성실감이 있는데 바로 ‘시간엄수’이다. 일단 그 시간에 그 자리에 와있어야 한다. 그에 덧붙여 노트정리를 잘한다. 이들의 부모들은 대개 공무원이다. 칼 출근, 칼 퇴근. 아주 간혹 연장근무 하는 공무원들에게 감사하며 이 글을 쓴다. 융통성이 좋은 학생들이 있다. 갑자기 예기치 않은 일이 닥치면, 대학 1·2학년 18살짜리들은 대개 경직되거나, 우왕좌왕하게 마련이다. 그런데 전혀 당황하는 기색 없이, 서둘러 문제를 해결하려는 태도를 보이는 학생들이 있다. 뛰어난 임기응변을 보이는 이 학생들은 사업하는 집의 자녀들이다. 사업을 하다 보면, 언제나 불쑥불쑥 변수가 튀어나오게 마련인데, 그때마다 놀라 자빠지면 어떻게 사업을 하겠는가! 돈이 제때에 들어오지 않는 경우도 다반사일 것이고, 엉뚱한 데에서 사고가 나거나, 예기치 않은 비용이 갑자기 발생하는 날도 얼마나 많을까. 사업하는 집의 자녀들은 웬만해선 놀라지 않는다. 학생들이 돈을 쓸 때도, 부모의 직업이 드러난다. 크게 두 부류로 나뉜다. 즉흥적인 그룹과 신중한 그룹. 즉흥적인 행동을 보이는 학생들은 자영업을 하는 집들이고, 대부분 현금이 매일 들어오는 비즈니스이다. 이들은 그때 그때 필요한 비용을 그냥 호주머니에서 주먹 꺼내듯이 소비하고, 돈 계산을 뭉치고 합산해서 큰 단위로 한다. 반면, (학생 수준에서의) 목돈을 사용해야 할 때, 작게 잘라서 날짜를 따져가며 쓰는 학생들은 월급받는 집의 자녀다. 이들은 회비를 내야 한다면, 미리 약간씩 몇 번에 나누어 저축해서 내고 특히 충동적인 소비를 하지 않는 편이다. 특이하게도, 기말고사를 준비하는 기간인데, 중간고사 이전 부분에 궁금한 점이 생겨 질문을 하는 학생들이 있다. 누구라고 할 것 없이 기말고사가 코앞인데, 시험 범위에 포함되지도 않는 이미 지나간 부분을 다시 들추어 보는 학생은 매우 드물다. 이 드문 학생들의 부모는 교수이거나 연구원이다. 연구하는 부모를 둔 학생들은, 시험에 상관없이, 자신이 갖고 있던 기존의 지식과 새로 입력되는 지식 사이에서 비교, 대조, 검증하는 습관이 있다. 선생을 어려워하지 않는 학생들이 있다. 대부분의 사람은 어렸을 때, 선생님들은 화장실도 안 가는 걸로 오해했던 경험이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 정도는 아니더라도 간혹 선생을 존경은커녕, 그냥 많은 인간들 중의 하나임을 아는 학생들이 있다. 말할 것도 없이 그들의 부모는 교사다. 그 학생들은 어렸을 때부터 선생인 아빠가 집에서 엄마한테 매일 혼나는 것을 보면서 컸을 것이고, 또는 선생인 엄마가 비이성적인 잔소리를 줄곧 하거나 쩨쩨하게 행동하는 것을 목도했을 것이다. 그러니 강단 위에 서 있는 저 선생도 흠 많은 인간 중의 하나라는 것을 아주 일찍 깨달았음에 틀림없다. 그런 학생에게 어설피 위엄을 세우려다가 오히려 아주 우스워질 수 있다. 어느 날, 새로운 종이 나타났다. 못 보던 부류의 학생들이 나타난 것이다. 그들의 특징은 지나치게 당당하다는 것이다. 한국에는 지각하는 학생들이 보여주는 공통된 행동패턴이 있다. 일단 강의실의 뒷문을 빠끔히 열고, 안의 분위기를 확인한다. 예를 들어, 교수가 호통을 치고 있거나, 돌발 시험을 보고 있는 등, 분위기가 경직되어 있는 것 같으면, 아예 포기하고 결석해 버린다. 강의실 분위기가 별문제 없는 것 같으면, 지각생은 일단 빈자리를 파악한다. 그리고 문을 열고 들어와 90도로 인사하고, 등을 숙인 채로 잽싸게 빈자리로 가서 앉는다. 그런데 그런 절차 없이 당당하게 문을 활짝 열고 들어와 시찰하듯 한 바퀴 쭉 둘러본 뒤, 고개를 ‘빳빳이’ 들고 마음에 드는 자리에 가서 착석하는 학생이 어느 날 나타났다. 나는 처음에 참 특이한 ‘싸가지’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런 학생들이 이후로 종종 나타났다. 이런 태도의 학생은 다른 학생들의 눈에도 놀라움이었다. 그런 류의 지각 학생이 처음 나타났을 때, 같은 강의실에 앉아 있던 모든 학생들의 뜨악한 표정을 나는 기억 한다: “쟤는 뭐지?” 그들은 군인의 아들딸들이다. 군인은 어떠한 일이 있어도 사기가 떨어져서는 안 된다. 당당함은 그들의 생명이다. 비록 적군의 포로가 되더라도, 비굴해서는 안 된다. 잘못해서 벌을 받을지언정, 군인은 주눅 들어서는 안 된다. 바로 학교 근처로 육해공 삼사의 대학원과 군 시설이 옮겨왔고, 군인의 자녀들이 내가 근무하던 학교에 입학했던 해였다. 마지막으로 하나 더 희귀한 종이 있었다. 처음에는 나도 종잡을 수 없었는데, 매우 희귀한 직업군이라 숫자가 많지 않아서였다. 학생들은 자기가 좋아하는 교수에게 작은 선물을 하곤 한다. 커피 한 잔일 수도 있고, 시집이나, 예쁜 책갈피, 또는 초콜릿, 꽃 한 송이 등이다. 그런 선물을 줄 때는 강의 시간 전에 몰래 교탁 위에 올려놓거나, 아니면 강의 끝나고 수줍게 ‘바치는’ 모습으로 주는 것이 보통이다. 그런데 마치 ‘하사하듯이’ 주는 학생들이 있다. 나는 요거트 한 개나 커피 캔 하나를 ‘의문의 권위’를 가진 학생으로부터 하사받았다. 그들은 성직자의 자녀이다. 신도 아닌 것이 인간도 아닌 것이, 하늘과 땅 사이 어느 중간에서 살면서, 인간을 계도하느라 몸에 밴 태도인 것 같았다. 하나님의 은총이 함께 하기를! 이 글을 마칠 즈음, 갑자기 도둑의 자녀는 어떤 태도를 갖고 있는지 궁금해졌다. 그러고 보니, 나는 도둑의 자녀를 만나 본 적이 없다. 아, 하나가 빠졌다. 농부의 자녀! 그들은 대단히 정직하다. 그들의 뚝심은 쉬이 흔들리지 않는다. 농부의 아들이 한 번 아니라고 하면 그것은 진짜 아닌 것이다. 콩 심은데 팥 안 나는 것 맞다. 이 세상, 각자의 직업에서 열심인 모든 젊은이들, ‘화이팅!’ 마리 송 / 시인문예마당 수필 지각 학생 학생 수준 강의실 분위기
2025.09.04. 18:52
배우 선우용여가 최근 자신의 유튜브 채널에서, 매일 아침 벤츠차를 직접 운전해 호텔로 가서 조식 뷔페를 먹는 모습을 공개해 화제가 됐다. 그녀의 나이는 81세다. 그녀는 “돈 아끼면 뭐해. 집에서 혼자 궁상맞게 있는 것보다 아침 먹으러 가면서 화장도 하고 옷도 차려 입고 나서면 스스로 힐링이 된다. 식당에 있는 사람들과 눈인사를 나누는 것이 너무 즐겁다”고 했다. 그녀는 아침 식사로 호텔 조식을 선택한 이유에 대해 “남편이 있을 땐 가족들 밥을 해줘야 했다. 남편이 돌아가시고 애들은 다 시집 장가 가고, 이제는 내 자신을 위해 살아야 한다. 내 몸을 위한 돈을 아끼면 뭐 하나. 남은 돈, 이고 지고 가나? 그래서 나를 위해 투자를 한다”고 했다. 요즘 나를 위해 지갑을 여는 중장년층이 늘어난다고 한다. 인생 2막을 당당하고 즐겁게 살기 위해 자신에게 투자하는 것이다. 그런 세태에 맞춰 ‘액티브 시니어’ 산업이 뜨고 있다. 액티브 시니어란 빠른 고령화와 함께 건강하고 활동적인 중장년층을 칭한다. 액티브 시니어 세대는 이전 부모 세대와는 마음 가짐 자체가 다르다. ‘아끼면 뭐해, 즐겁게 살자’ 이런 마인드로 바뀌고 있다. 돈은 다시 벌면 되지만, 오늘은 다시 오지 않는다. 오늘 하루, 커피 한 잔이라도 내가 즐겁게 마신다면 충분히 가치가 있다. 자신에 충실한 삶을 살자는 것이다. 노년에 돈은 많이 벌어 놨지만 건강을 잃고, 살날이 얼마 남지 않다면 인생이 너무 허망하지 않은가. 평생 안 먹고 안 쓰며 모은 돈이 무슨 소용이란 말인 가. 내 대학 동기 중에는 젊어서 미국 와, 부부가 열심히 일한 덕에 쇼핑 몰을 몇 개나 갖고 있고 여러 개의 비즈니스를 운영하는 친구가 있었다. 그러나 비즈니스에 매여 여행 한 번 제대로 못해보고 일만 했다. 집 안의 소파와 안락의자는 단지 남에게 보여주기 위한 가구일 뿐, 평소에는 그것들이 닳지 않도록 커버를 씌워 놓았다가 손님이 와야만 벗겼다. 은퇴 후 좋아하는 골프도 치며 인생을 즐기려던 차에 당뇨 합병증으로 눈이 안 보이게 됐다. 나중에는 병원 침대에 누어서 오랜 세월 남편과 간호하는 분의 도움이 없이는 자기 몸도 가누지 못하다가 세상을 떴다. 얼마나 허무한 인생인가. 돈을 버는 이유가 삶을 즐기기 위해서였는데, 정작 그걸 제대로 누려보지 못하고 가다니. 쇼핑몰이 여러 개인들 그게 무슨 소용이란 말인 가. 최근에 출간된 베스트셀러 한 권을 읽었다. 미국의 투자자 빌 퍼킨스가 쓴 책으로 원제는 ‘Die With Zero’ 인데 한글 제목은 ‘역전하는 법’이다. 이 책의 핵심은 ‘우리의 삶이란 우리가 경험하는 것들의 총합이다. 즐겁고 의미 있는 경험을 위해 죽을 때 통장의 잔고가 제로가 되게 하라’로 요약된다. 즉 ‘가진 돈을 다 쓰고 죽어라’다. 인생의 진정한 가치를 경험과 추억을 통해 찾아라. 그러기 위해 ‘다 쓰고 죽기’를 목표로 삼으라. 평생 하고 싶었지만 생업에 매여 못했던 것들을 생전에 원없이 해보라고 권한다. “그럼 자식들은요” “그렇게 살면 너무 이기적이지 않냐요”라고 생각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다 쓰고 죽으라는 말은 자녀들에게 남겨줄 돈 한푼 없이 전부 쓰고, 빈털터리로 죽으라는 뜻이 아니다. 다 쓰고 죽기를 위한 계획에는 자녀도 포함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생전에 자녀 몫으로 떼어 놓고 당신이 가진 돈을 죽기 전에 전부 쓰라는 것이다. 자녀들에게 유산을 물려주는 일도, 기부도 살아생전에 해서 그 감동을 맛볼 것을 작가는 조언한다. 자신의 시간과 돈을 활용하기 위해서는 타이밍이 중요하다. 오직 특정 시기에만 즐길 수 있는 경험도 있기 때문이다. 아무리 돈이 많아도, 늙어서 할 수 없는 경험들이 많다. 돈 낭비라는 두려움 때문에 시기를 놓치면 인생이 헐값 된다. 돈이 아까워서 끌어안고 있다가 죽음을 맞는 어리석음을 피하라고 한다. 요즘 세대와 달리 우리 때는 결혼 전에 돈에 대해서 너무 순진했다. 결혼 전에 오빠가 남편의 가족 사항 등 이것저것 물어보더니 “너희들은 연애하며 셰익스피어만 얘기하니?”라고 핀잔을 줬다. 당시 아버님은 경제 활동이 없으셨고 남편은 말단 기자였다. 게다가 부모님에, 여동생 넷, 남동생 하나, 미국에 계신 손위 누님이 맡긴 조카까지 대가족의 맏아들이었다. 오빠가 보기에 결혼 후 우리가 경제적으로 힘들 것은 불 보듯 뻔했기 때문이었다. 결혼 후, 장로님이신 아버님께서 걱정말라는 의미인지는 몰라도 성경 책을 펼쳐 놓으시고 ‘공중의 새와 들의 백합’ 비유를 말씀해 주셨다. 아버님의 말씀처럼, 또 ‘사람은 다 자기 먹을 것을 가지고 태어난다’는 속담처럼 하나님께서 내게 맏며느리 역할을 잘 감당하게 해 주셨다. 지금은 그때의 힘들었던 상황을 훈장처럼 가슴에 달고 산다. 석인성시(惜吝成屎)라는 사자성어가 있다. 아끼고 아끼다가 똥이 된다는 말이다. 돈이 아무리 중요해도 돈은 써야 가치가 있는 법이다. 열심히 노력해서 번 돈을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는 일에 써야 한다. 젊은 시절, 미국 와서 주위 여자들과 예쁘고 값비싼 그릇 모으기에 열을 올렸다. 너무 아까워서 나중에 귀한 손님이 올 때 쓰려고 진열장에 넣어두고 평소에는 저렴한 그릇만 썼다. 나이 먹어 자식들에게 물려주려 하나 그런 그릇 불편해서 거저 줘도 싫다고 한다. 이런 애물단지가 없다.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다. 그때 그때 즐겨야 한다. “나중에, 나중에”하다 보면 그 나중은 오지 않을 수도 있다. 지금 누리지 못한 오늘은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잘 산 삶은 은행잔고가 아니라 경험이 결정한다. 심리학 연구를 통해 ‘물질에 돈을 쓸 때보다 경험에 돈을 쓸 때 더 행복감을 느낀다는 것이 입증되었다. 경험은 추억을 남긴다. 사람은 인생에서 은퇴하면 추억을 연금처럼 받게 된다. 다른 것들은 대체할 수 있지만 추억은 값을 매길 수 없을 만큼 소중하다. 더 늦기 전에 즐겁고 의미 있는 경험을 많이 해봐야겠다. 우리는 늘 열심히 살아야 한다고 배웠다. 하지만 열심히 사는 것과 제대로 사는 것의 간극, 그 틈은 때때로 전 생애를 갈라 놓기도 한다. 돈 버는 것 못지않게 지혜롭게 잘 쓰는 걸 익혀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돈 계산 그만하고 가진 돈을 최대한 잘 쓸 계획을 세워야겠다. 배광자 / 수필가문예마당 수필 액티브 시니어 인생 2막 세월 남편
2025.08.14. 19:11
안정이 되지 않는 오후다. 세상은 공평하지 않다는 생각에 사로잡혀서 집안을 서성거리다가, 일찌감치 저녁 준비나 해야 하겠다고 부엌에 들어섰다. ‘알렉사’ 설치가 되어 있어서, “알렉사야, 바흐의 샤콘 틀어줘” 했더니, 친절하게 작곡한 해, 악보 넘버랑, 바이올린 연주자 이름을 가르쳐 주고, 이어서 샤콘 곡이 흘러나왔다. 이 곡을 쓸 때, 바흐가 지금의 나같이 어수선하고 좀 아프고, 화나는 마음이었을까? 어떻든 내 기분은 꿀꿀하다. 어쩌면 세기적인 작곡가 바흐의 슬픔은 세기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질 것 같은데, 여기에 감히 내가 편승하는 것은 무례할 것이다. 그래도 왠지 나의 이 찜찜하고, 슬픔에 가까운 아픔과 정리되지 않는 분노를 그는 그리고 세상 사람들은 용서해 줄 것 같다. 증명된 이야기는 아니지만, 바흐는 18세기 초에 레오폴드 왕자와 타지로 며칠 출장을 갔다고 한다. 귀가했을 때, 그는 일곱 명 아이의 엄마인 그의 아내가 죽었고, 이미 땅에 묻혔다는 비보를 접했다고 한다. 급작스러운 죽음이 실제로 이해되지 않았을 것이고 슬퍼하거나 그립다는 정서적 세계에 있지 않았을 것 같다. 시간이 걸리면서 차츰 상황을 이해하고, 아플 능력도 생겼을 것이다. 어쩌면 그는 하느님을 원망하였을지도 모른다. 샤콘은 바흐가 1717년부터 작곡을 시작해서 1720년에 완성했던 바로크 춤곡, ‘바이올린을 위한 파티다 2번’ 다섯 곡 중 제일 마지막 것으로, 아내 마리아 바버라 바흐의 죽음을 접한 후에 썼다고 한다. 바흐의 샤콘의 초입 부분은 그의 영적인 갈등, 감성적인 아픔과 분노를 느끼게 한다. 그런데 이 음악의 마지막 부분에 도달하면 평화로움, 인간이 줄 수 없는 평안을 허락하는 것이 의아스럽다. 바흐에게는 공평하지 않았을 마리아 바버라 바흐의 죽음이었다. 그렇다, 세상은 공평하지 않다. 나에게 세상이 공평하다고 가르친 사람은 없다. 내가 어렸을 때, 밥상머리에서 부모님과 형제들은 세상사를 놓고, 여러 가지 토론을 하곤 하셨다. 어렸던 나는 의견을 내세울 처지는 아니었지만, 세상은 공평하지 않다는 것, 그래서 전쟁도 나고, 시스템의 실패로 쿠데타도 일어날 수 있고, 숱한 젊은이들이 목숨을 잃게 된다는 것을 이해했었다. 어쩌면, 그 철학은 지금의 나를 만드는 데 한 역할을 했을지도 모르겠다. 세상이 공평했으면 좋겠다는 바람은 누구에게나 있다. 역으로 말하자면, 사회는 공평하지 못하다는 것을 암시한다. 지난 두 달 반 동안, 세상이 불공평하고, 사회정의는 빛 좋은 개살구같이 화려하게 장식되는 단어에 불과하다는 생각을 자주 했다. 나는 배심원 의무를 이행하고 있었던 터였다. 배심원 의무는 영주권자가 아닌 시민권자에게만 주어지는 것이다. 미국 시민이나 영주권자들은 납세, 국방, 법률 준수의 공동의무가 있다. 이 사건은 아동 학대에서 시작하여 살해까지 도달한 범죄의 형사재판이었다. 피고인은 아이의 생모와 생모의 남자 친구로 두 명이었다. 양측의 변호인단으로는 캘리포니아 주민을 대표한 검사 두 명과 피고인 측은 피고인 한 명에 관선 변호사 2명씩 종합 4명이었다. 배심원 후보들은 개인 신상 조사서를 문서로 작성하였다. 자신의 ID를 오픈하지 않는 요즘, 생물학적 정보 이외에도 소속기관, 학력, 경력, 관심 분야 등의 내용을 기재하고, 은퇴하였다면 어떤 직종을 어디에서 몇 년 종사하였는지를 써야 했다. 배우자나 자식들에 관해서도 같은 질문에 답해야 했다. 이 과정은, 배심원들이 한쪽에 치우치지 않고 공정할 수 있는가를 가늠하는 중심적인 분석의 시작이자 끝이라 보였다. 이 과정에서 법치 국가의 의미를 확인했다. 제출된 부검(剖檢) 내용 사진과 영상, 그리고 퍼킨스 에이전트를 이용해서, 범인으로 검거된 아이 엄마의 자백을 녹취한 내용, 증인들의 협력으로 배심원 전원이 범행의 심각성과 그들이 범한 여러 가지의 죄목을 이해하였다. 증거자료로 제출된 것 중에는 전화 통화 내용뿐 아니라, 전화를 건 시간, 통화가 오간 지역 등도 모두 제출되었다. 세상에 비밀은 없다. 모든 것은 시간이 걸리지만, 그 흔적을 찾을 수가 있다. 이 아이가 세상을 하직하는 데 7년이 걸렸다. 죽음의 문턱을 넘는 마지막 반년 동안, 아이는 사회와의 철저한 격리 중에, 수갑이 발목에 채워진 채 감금되어서, 정신적 육체적 학대를 받았던 것이었다. 주위 사람들은 뭘 했을까? 학교 교사, 동네 사람들, 친척들, 소셜 워커는 어디에 있었나? 나는 지금도 밤잠을 설친다. 미국 의협 소아학 저널(Vol 177, No 2)은 1999년부터 2020년까지 2년 동안 집계된 아동 살해 통계를 분석하여 발표하였다. 통계는 미국 질병 통제 예방 센터(US Centers for Disease Control & Prevention)의 레베카 윌슨 박사 보고를 바탕으로 한 것이다. 신생아부터 17세까지 살해된 3만8362명 중 눈에 띄는 숫자는 70%가 남자아이, 신생아부터 다섯 살까지가 40%, 흑인 아동이 46%, 남부지역에서 42%가 살해되었다는 것이다. 누가 죽였을까? 친부모가 죽인 경우가 42%나 되고, 생모의 남자 친구가 죽인 경우가 15.5%이었다. 그렇다면 한국은 어떨까. 한국의 국가통계포털 (KOSIS) 2022년 통계에 의하면, 2만7971명의 학대가 접수됐다. 약 1/3이 중복적 학대이었고, 10% 정도는 방임하여 돌보지 않은 종류의 학대이었다고 한다. 2023년 검찰청은 801건의 살인 범죄를 보고했다. 그중 아동 학대 살인, 영아 살인이 각각 0.6%로 총 1.2%(9.6명)이었다고 한다. 아이를 포기하고, 기관에 보내거나 친척에게 맡기어도 될 일을, 장시간에 걸쳐, 학대하고 살해에 이르는 우매하고 아프고 부당한 처사가 어디 있겠느냐 싶다. 세상 사람들 누구도 자기 뜻에 따라 태어난 예는 없다. 그렇게 세상에 도달한 우리들은 집 밖에서 공평을 이룩하려 애쓰기 전에, 나 자신과 가족, 주위 친구들에게 공평한, 정의로운 대우를 해 주고 있는지 숙고해 보자. 공평하지 않은 세상을 알기에, 공평하도록 노력해 보는 것이다. 모니카 류 / 종양방사선학전문의·미국한국어진흥재단이사장문예마당 공평 수필 작곡가 바흐 아동 학대 배심원 의무
2025.08.07. 18:25
미주문단에 몸을 담고 살아온 지 어언 이십 년이 넘었다. 오래전 신문기사로 문학단체들이 하나 둘 창간하는 소식을 들으며 깊은 관심을 갖곤 했다. 내 글쓰기는 대학에서 수필을 좋아해 학보신문에 글을 발표하며 시작되었다. 집안에서는 오빠와 언니가 벌써 시를 쓰기 시작했고, 부모님도 늘 무엇인가 쓰셨다. 결혼 후에는 중앙지 신문에 독자투고를 했고, 대구에서는 주부수상에 자주 나왔다. 그런 소중한 인연으로 만난 전모 논설위원님. 우리가 모르는 개개인의 삶의 일정은 묘하기도 신비롭다. 어느 날 직장에 다니던 딸아이가 내가 쉬지 않고 여태 써온 글들 모아보면 어떻겠느냐고 물었다. 책 한 권이 될 터인데 출판비를 선물할 테니 출간하시란다. 꿈에도 생각해 본 적이 없던 말을 딸이 나에게 툭 던진 것이다. 그러면서 어머니인 나의 일생이 너무 아깝다는 것이다. 미국에 이민 와 파트타임일을 하다 그만두고 전업주부로 사는 내가 늘 안타깝다는 그 애의 생각이었다. 그렇게 나는 책을 출간키로 작정하고 원고를 3년 동안 준비하며 등단을 고려하고 있는데, 두 사람의 인연이 또 나타났던 것이다. 처음 나간 나의 고국방문 길에 곡성 성륜사의 청화스님의 장례식에서 국문과 교수이고 고향 문학지의 편집 주간으로 있는 동창을 우연히 만난 것이다. 만 명이 넘는 사람들 속에서 흐느끼며 땅만 쳐다보고 걷는 나를 바로 앞에서 친구가 내 이름을 불렀다. 여고 졸업 후 보는 친구였다. 또 우연히 샌디에이고에서 만난 정모 시인이 수필가협회의 회장에게 연락해 박모 회장이 회원으로 들어오라고 다정한 전화가 걸려왔기에 협회에 가입했다. 그런 후 LA의 문학회 행사에 다니기 시작했는데 한 회원이 등단연도를 물어 고국의 친구와 의논했다. 그때야 등단하면 문학지를 사주어야 하는 절차가 있다는 걸 알았다. 그 후 미국에 문학 강사로 온 분이 모임에서 우연히 ‘수필시대’라는 격월간지 책을 선물 받으며 그분을 통해 같은 해에 중앙지로 등단했다. 하지만 주변사람들로부터 들려오는 요구 사항들을 나는 모두 거절했다. 영어회화가 어렵고 문화가 다른 이민생활이 힘들다는 것도 주위의 한국인들을 보며 배워야했다. 교회에 다니지 않으니 사람교류가 거의 없었지만, 라디오, 신문과 방송을 통해 사회를 접했다. 집에서 나름대로 경전을 읽으며 삶의 고통을 이겨내려고 애를 썼다. 취미인 쓰기는 잠을 자는 시간을 줄여서라도 한 번 도 중단하지 않고 공책에 정리하며 발표도 했다. LA에서 열리던 불교행사에도 꼬박꼬박 참석했다. 여러 사람이 내 글을 읽었다며 인사를 건네오기도 했다. 나의 이마에 붙은 재미수필가. 등단한 후로는 한국에서 발행하는 문학지들을 구입해 읽으며 치열하게 수필공부를 했다. 과연 좋은 수필은 어떤 글일까를 고민하면서…. 시인도 소설가도 아무나 모두 덤벼들어 잡탕 글이라며 착각하고 비하하는 사람들의 모욕적인 말들이 정말 나는 싫었다. 문학적인 글에 대하여 무엇인가를 좀 배우고 싶어서 LA의 문학 행사에 다니곤 했다. 때론 먼길 가는 나를 걱정해 남편으로부터 지독한 말로 야단을 맞으면서도 바람난 여자처럼 운전대를 잡았다. 저녁 늦게 행사가 끝나면 자정이 되어서 들어오는 일이 보통이었기에, 종종 그이도 따라나섰다. 평회원으로 회비를 내기도 했지만 후원해주고픈 단체장이 나올 때는 이사로도 잠시 참여했다. 돌아보니 부끄러운 일도 있다. 문학상을 받아본 적이 없는 내가 너무 경력이 없었기에 행여나 기대를 했었나 보다. 수필가협회에서는 상을 만들어 놓고 수년 동안 수상자가 없다는 말에 화가 나 내가 응모한 적도 있었다. 그런데 사진과 함께 신문지상에 기사로 나온 심사위원이 상을 받은 것이다. 문학상을 만들어 놓은 회장에게 문의하니 세 사람이 추천을 했기에 주었다는 것이다. 모 씨가 심사위원직을 내려놓고 상을 받은 것이다. 그때까지도 나는 그분을 문학선배라며 존경했는데 허무했다. 또한 회장들의 열정도 계속 이어지지 않고 아예 문단을 떠나버린 사람도 여럿이다. 회장 중에는 공금을 분명하게 밝히지 않고 사용하는 일들도 많아 여기저기 말들이 많았다. 내가 한번 이사회에 참석해 보니 그렇게 느껴졌다. 물론 그런 사람들은 떠나야 마땅하다. 오래전 일이다. 무슨 자기들이 무슨 문학의 대부나 대모처럼 행사하며 등단의 줄을 만들기도 하는 일들도 많아 당한 사람들이 억울해 알려주며 말해주었다. 그래서 고국에 사시던 나의 국어 선생님께서 오래전부터 예술계(음악, 문학, 미술)가 너무 썩어 문드러졌으니, 등단하지 말라고 하셨던가. 늘 평소의 맑은 마음에서 좋은 글이 우러난다며 격려해주시던 은사님. 솔직히 나는 학창시절 워낙 뛰어난 시인 친구들이 여럿이라 문학이라는 말을 음미해 본 적도 없었다. 영양가 있는 끼니도 어려웠던 환경에서 도서실에 가 겨우 책들을 읽어보던 지난날이었다. 성인이 되어 수필을 쓰며 문학과를 나온 친구들이 한 때는 부러웠었다. 그런 친구들 중에 여고에서 영어교사로 정년퇴직한 송옥은 지금도 내 수필을 좋아해 내가 글을 계속 쓸 수 있도록 힘이 나게 해주는 몇 마디를 자주 보내주곤 한다. 한 번도 뵌 적 없는 기자님의 초청으로 10년 넘게 칼럼을 쓰며 태평양 건너 원고를 띄워 보낸다. 자랑스러워 했던 나라도 시끄럽지만, 양심도 없는 문인들의 다양한 추태를 종종 보면서 글쓰기를 그만 둘까하고 망설이다가 또 세월을 보낸다. 뭐 그리 경력이 중요하다고 문학상 기웃거리며 응모했던 부끄러운 지난날의 일도 후회한다. 인생 마감하는 날 아무 가치도 없는 일인데 말이다. 문인이야말로 정말 가슴에 손을 얹고 올바르게 살면서 우리 사회에 맑은 목탁소리의 울림으로 남아야 할 것이 아닐지. 참으로 내 자신이 부끄러운 일이다. 최미자 / 수필가문예마당 후회 수필 문학회 행사 문학 행사 오래전 신문기사
2025.07.24. 19:20
서른아홉 살 노총각 조카가 드디어 장가를 간다. 연애 10년 만의 결실이다. 예비 시어머니인 큰언니의 반대로 이별과 재회를 반복했던 연인이었지만, 마침내 결혼 승낙을 받았다며 조카에게서 연락이 왔다. ‘고슴도치도 제 새끼가 제일 예쁘다’는 말처럼, 부모가 자식을 최고로 여기는 마음은 본능이다. 재력, 학벌, 직업, 외모까지 두루 갖춘 조카는 누가 봐도 손색없는 일등 신랑감이다. 아들에 비해 아가씨의 조건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언니는 그녀를 달가워하지 않았다. 그러는 사이 형을 제치고 네 살 아래 남동생이 먼저 결혼식을 올렸다. 사랑과 이별의 갈림길에서 오랜 시간을 힘겹게 버틴 두 사람은 어느덧 결혼 적령기도 지나버렸다. 평소 온순하고 효자로 소문난 조카가 처음으로 부모에게 반기를들었다. “어머니가 주선한 여자와 맞선도 보고, 새로운 인연을 만나보려 노력해 봤지만, 전혀 마음이 움직이질 않네요. 그냥 혼자 살겠습니다.”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더니, 조카의 진심 앞에 언니는 결국 백기를 들었다. 어느 날, 딸아이가 조심스럽게 귀띔해 주었다. “오빠에게 여자친구가 생겼는데 일본 아가씨야.” 아들의 연애사는 거의 다 알고 있을 만큼 비밀이 없는 모자였기에 말을 안 한 이유가 궁금하긴 했지만 짐작은 갔다. “친구는 다양할수록 좋지만, 배우자만큼은 한국 사람이었으면 좋겠다”는 말을 평소에 자주 했기에, 아들도 고민이 많았던 모양이다. 우리 아이들은 법적으론 미국인이지만, 그들이 민족의 뿌리를 잊지 않기를 바랐다. 문화가 다르면 함께 살아가는 일상에서 부딪히는 일이 많을 것 같았다. 명절 풍습, 집안 행사, 식습관처럼 사소한 것들이 때로는 결혼 생활에 걸림돌이 되지 않을까 걱정이 앞섰다. 그래서 그 연애가 조용히 끝나기를, 은근히 바라며 나는 모른 척하고 있었다. 어느 주말 저녁 , 아들이 빨간 장미꽃 한 다발과 케이크를 사들고 왔다. “오늘 사귄 지 1년 되는 날이에요.” 처음으로 여자 친구 이야기를 꺼냈다. 궁금한 건 산더미였지만, 다 묻기도 전에 데이트 약속이 있다며 들뜬 얼굴로 집을 나서는 아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는데, 마음 한켠이 허전해졌다. 결혼 얘기를 한 것도 아닌데, 왠지 모르게 서운한 감정이 밀려왔다. 헤어지라고 말하자니 납득할 만한 이유가 없고, 모른 척하자니 서글픔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그제야 큰언니가 조카의 결혼을 반대했던 심정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부모가 자녀의 결혼 상대의 조건을 따지는 이유는 자식이 조금이라도 더 안정적이고 행복하길 바라는 마음 때문이다. 하지만 그 조건이 과연 누구를 위한 것인지, 부모도 자식도 정답을 알지 못한 채 서로 마음을 아프게 할 때가 있다. 지나친 사랑은 오해로 번지고 자식과의 갈등이 되어 가슴 깊은 골로 남기도 한다. 답답한 마음에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자초지종을 털어놨다. “며느릿감으로 일본 여자도 괜찮아. 한국과 문화도 비슷해서 큰 문제는 없을 거야.” “모든 의사소통은 영어로 해야 하는데 내 실력으로 속깊은 대화는 제대로 할 수 있을까.” 그러자 친구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게 더 좋은 거지! 며느리와 말이 안 통하면 괜한 고부갈등도 안 생길거잖아.” 시어머니와 나는 속 깊은 대화를 자주 하는 편이다. 내가 한국을 방문하거나, 어머님이 미국에 오시면 늘 같은 방을 쓰며 밤늦도록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눈다. 남편 흉을 보거나, 고쳐줬으면 하는 생활 습관, 살면서 나에게 서운했던 일들을 어머님께 고자질하듯 털어놓는다. 다음날, 어김없이 어머님은 내 편이 되어 주신다. 아들을 따끔하게 꾸짖으시고, 고쳐야 할 점은 분명히 짚어주신다. 신혼 초부터 지금까지 시어머니는 늘 든든한 지원군이셨고, 가장 확실한 내 편이셨다. 나도 그런 시어머니가 되고 싶다. 며느리의 말에 먼저 귀 기울이고, 마음의 여백을 함께 채워주는 어른. 말로 다 표현하지 못하는 감정들까지도 안아주는, 따뜻한 존재가 되고 싶다. 누군가의 편이 된다는 건 단순한 감정을 넘어서, 깊은 이해와 용기가 필요한 일임을 이제야 조금씩 깨닫는다. 아들이 어떤 여자의 손을 잡고 결혼식장에 입장할지는 아직 모르지만, 한 가지는 분명하다. 아들의 선택을 존중하고, 그 만남을 진심으로 축복해 주기로 마음을 굳혔다. 한평생 함께할 반려자인 만큼, 본인이 가장 사랑하는 사람과 살아가는 것이 가장 올바른 선택일 것이다. 화사한 봄날 야외에서 찍은 사진 몇 장이 담긴 조카의 모바일 청첩장이 도착했다. 반대를 딛고 이룬 사랑이라 더욱 고귀하게 느껴진다. 두 사람이 앞으로 살아가며 맞닥뜨릴 어려운 순간마다, 지금의 이 마음을 떠올리며 잘 이겨내리라 믿는다. 눈부신 조카 부부가 함께 걸어갈 꽃길을 생각하다 나도 모르게 입고 갈 하객 옷차림을 고민하게 된다. 가을 초입의 결혼식, 따사로운 햇살 아래서 웃고 있을 그들을 상상하니, 마음이 따뜻해진다. 나의 편이 되어 주셨던 시어머니처럼, 언젠가는 나도 그렇게 누군가의 마음을 안아줄 수 있을까. 그렇게 나는 또 하나의 삶을 배워간다. 김윤희 / 수필가문예마당 수필 마음 한켠 노총각 조카 여자 친구
2025.07.10. 18:37
미주지역 교무들이 뉴욕 원달마 센터에 모여 일주일 동안 모임을 가졌다. 마치던 날 훈련 모습을 동영상에 담아 보여주었다. 만남의 순간부터 과정 과정을 찍어 하나의 작품으로 만들었다. 기록을 위한 사진도 있었지만 대부분 찍힌 지도 모르는 순간 포착된 사진들이 다양하게 들어있었다. 웃고 울며 함께했던 시간이 되살아나 춤을 추는 그 영상에는 우리 모두가 주인공이었다. 삼십 중반에 나는 TV 프로에 주인공으로 출연한 적이 있다. ‘인간시대’라는 MBC 교양프로그램이었다. 1986년 강원도 동해시 작은 바닷가 마을에서 개척교화를 하고 있을 때였다. 여름이 시작되는 어느 날 서울에서 손님이 왔다. MBC 방송국 PD라고 소개하며 머리 좀 식힐 겸 놀러 왔다면서 우리 교당에서 머물게 해 달라고 했다. 오는 손님 마다할 수 있겠는가, 그는 며칠 동안 교당스태이를 했다. 우리 교당 청년들은 법회를 마치고 깊은 밤까지 교당 잔디밭에 앉아 기타치고 노래하는 게 일상이었다. 그 청소년들의 맑은 모습에 자신의 영혼도 맑아진다며 행복해하던 그가 돌아가겠다고 하면서 나에게 고백을 했다. 당시 월요일마다 방영 중이던 교양프로 인간시대 제작 PD였던 그는 우연히 기차 안에서 원불교 교무를 만나 얘기를 나누게 되었단다. 조금은 생소한 교무의 삶을 인간시대를 통해 조명해 보고 싶어졌다고 했다. 교단에서는 공영방송의 출연 제안에 수락하고 수백 명의 교무 중에서 열 명의 교무를 추천해 주었다. 그중 막내였고 바닷가 마을에서 ‘등대’라는 불우이웃 돕기 모임을 이끌며 청소년 교화를 하고 있는 내가 선정되었다고 했다. 그래서 미리 상황파악을 하기 위해 손님인 척 교당 스태이를 자처하여 나의 삶을 지켜보았노라고 털어놓으며 계면쩍은 미소를 지었다. 도저히 수락할 수 없었다. 내가 TV출연이라니, 더군다나 원불교 교무라는 상징성을 띠고 공영방송에 출연한다는 것은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나는 새내기 교화자이며 초급 수행자인 설익은 과일 같은 존재였다. 예쁘지도 않고 내어놓을 것도 없는 사람이었다. 있는 그대로 내 삶의 모습을 촬영한다 해도 불특정 다수에게 보여주는 프로가 아닌가, 연기력도 없고 아주 평범한 교무인 내가 인간시대 주인공이라니 안될 일이었다. 두려움도 컸다. 완강한 나를 설득하지 못하고 그는 떠났다. 며칠 뒤, 여섯 명 촬영팀이 다시 찾아왔다. 포기한 줄 알았던 그는 교단 본부에 요청했고 공식적인 교단의 명을 거부할 수 없었다. 그렇게 나는 인간시대 주인공이 되었다. 새벽 5시, 기도로 시작하는 나의 일상을 담기 위해 4시부터 카메라를 설치하고 일거수일투족을 찍기 시작했다. 원불교 교무로서의 나의 삶이 적나라하게 필름 속으로 흘러들어 갔다. PD는 어떤 요구도 하지 않았다. 늘 해오던 원불교 교무로서 교화하며 사는 삶, 등대의 리더로서 청년 회원들과 어려운 곳 찾아다니며 도와드리는 일들, 짬이 나면 도반들과 바닷가에 나가 담소도 나누고 참선을 하는 모습을 소리없이 따라다니며 카메라에 담을 뿐이었다. 하루하루 지나면서 그의 얼굴에 난색이 드리워지더니 조심스럽게 말을 건넸다. “교무님, 우리는 지금 원불교 홍보 영상을 찍는 게 아닙니다. 자연스럽게 교무님의 일상이 찍혀야 대중이 공감하고 그 안에 원불교가 드러나는 것입니다. 지금쯤은 교무라는 생각을 놓을 때도 되지 않았습니까 언제까지 교무라는 생각에 갇혀 있을 겁니까. 이러면 작품이 되지 않습니다.” 대개 사람은 이틀 정도 찍으면 자연스럽게 동화되어 인간 본래 모습 그대로 나오게 된다고 한다. 그런데 나는 종교인이라는 틀에 갇혀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내 의지로 어찌할 수 없는 것이었다. 나는 원불교 교무가 아닌가. 좋은 모습 훌륭한 일을 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싶은 마음은 인지상정 아니겠는가, 그러니 한순간도 마음을 놓을 수 없었다. 항변도 해보았지만 은근히 걱정되기도 했다. 시간은 흘러 촬영은 종반을 달리고 있었다. 몸에 맞지 않는 옷을 입고 통으로 노출하며 순간을 이어가던 나는 급기야 쓰러져 버렸다. 덕분에 하루를 쉬면서 영양주사까지 맞게 되었다. 교양프로를 시청률 1위로 끌어올리는 명 PD였던 그는 나의 개인 정보도 찾아내어 가족들까지 촬영에 동참시켰다. 그때부터 그의 얼굴에 끼었던 어둠의 그림자가 서서히 걷히기 시작했다. 어머니는 교단 산업기관 교무로 재직하던 아버지를 도와 복숭아 재배를 하고 있었다. 마침 수확철이 되어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시간을 보내던 중이었다. 제작진들이 어머니를 찍겠다고 했을 때 걱정이 되었다. 유난히 꾸밈도 없고 소박한 시골 아낙네인 어머니가 감당하실 수 있을까, 그것은 기우였다. 촬영팀들이 들이닥쳤을 때 어머니는 늘 밭일하러 다니던 그 모습이었다. 웃음이 나왔다 내가 뭘 기대했던가. “엄마, 텔레비전에 나올 건 게 이쁘게 준비하고 계셔.” “오메 벨소리 다 듣것네 생긴 대로 허제 뭔 준비를 한다냐, 글고 지금 나 무지 바빠야 그럴 시간 없는디 안 오면 안 되것냐.” “꼭 가야 된다는디 어떡혀 그럼 낼 보게.” 이렇게 전화로 연락을 했으니 미장원에라도 다녀오지 않을까 내심 기대를 했었다. 꿈도 야무졌다. 어머니를 만난 제작진들은 가뭄에 단비 만난 듯했다. 어머니는 옥색 티셔츠에 꽃무늬 몸뻬를 입고 챙 넓은 모자를 쓴 채 이 나무 저 나무로 옮겨다니며 복숭아 따는 손을 멈추지 않았다. 연신 카메라를 들이대며 모습을 찍었지만 관심조차 두지 않았다. PD는 순박하고 가식 없는 어머니의 모습을 따라다니며 끊임없이 질문을 했고 솔직 담백한 어머니의 응수에 빠져 들어가는 듯했다. 출가하여 교무로 살아가는 딸이 당신 최고의 선물이며 행복이라고 주저 없이 말하는 어머니가 진정한 인간시대 주인공이라고 그는 말하였다. 열흘 동안의 촬영을 마친 몇 주 후 내 이야기는 MBC 인간시대 프로에 ‘출가’라는 제목으로 55분 동안 방영되었다. 사람들의 관심은 상상 이상이었다. 하얀 저고리 까만 치마 쪽진 머리를 한 신생 종교 성직자의 삶이 세상에 드러났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어떤 모습을 하고 있어도 알아보고 아는 체를 하였다. 그런데 사람들은 꼭 어머니의 안부를 물었다. 그로부터 30년이 지난 오늘, 우리는 스스로 동영상을 만들어 유튜브에 올리기도 하고 저장해 놓고 보기도 한다. 모두가 주인공인 세상에서 살고 있는 것이다. 격세지감을 느낀다. “텔레비전에 내가 나왔으면 정말 좋겠네”하고 노래 부르던 그 시절에 나는 인간시대 주인공으로서 내 삶의 한 페이지를 장식했었다. 모두가 주인공으로 살 수 있는 이 세상! 나는 어떤 삶의 주인공으로 살아가고 있는가. 이정길 / 원불교 교무·수필가문예마당 주인공 수필 인간시대 주인공 원불교 교무 교양프로 인간시대
2025.07.03. 17:49
미국으로 이민온 지 15년 만에 고국을 방문했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고 했던가 어디를 가나 어리둥절할 정도로 너무 많이 발전했다. 20일 일정으로 한국에 와서 모든 용무를 마치고 출국할 날이 일주일 정도 남았다. 이 기간 중에 첫 사랑의 여인 영이를 만나 보고 싶었다. 어디서 무엇을 하며 살고 있는지 그녀의 소식이 무척 궁금하였다. 그녀를 찾으려고 백방으로 수소문하며 다닌 끝에 영등포에서 아담한 칼국수 식당을 운영하는 그녀의 언니를 만날 수 있었다. 언니는 35년 만에 만나는 나를 한눈에 알아보았다. “아니~ 이민 간 걸로 아는데 조카님이 어떻게 여길….” 언니의 음성은 흥분으로 떨리고 있었다. 그곳에서 영이의 소식을 접한 순간 나는 머리를 한 대 맞은 듯 ‘띵’해지며 현기증을 느껴 식탁의자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우리 어머니와 먼 친척뻘인 영이는 나보다 두 살 어린 아리따운 처녀였다. 내 어머니를 언니라 부르기에 나는 그녀를 ‘아줌마’라 칭하였고 영이는 나를 ‘조카님’이란 존칭으로 대하였다. 영이와 언니 두 자매는 충청도에서 상경하여 우리집에서 한 칸 짜리 방을 얻어 자취하며 제과 공장에 다녔다. 그 당시 나는 22세였다. 가정 형편이 어려워 상급학교를 제때에 진학하지 못하고 뒤늦게 야간 고등학교에 입학한 2학년 학생이었다. 한 집에 기거했지만 일요일에나 어쩌다 마주 칠 수 있었다. 그럴 때면 영이는 두 볼이 발그레 상기되어 눈을 아래로 깔고 무척 수줍어하곤 했다. 나는 그런 영이의 모습이 참으로 보기 좋았고 가슴이 설렜다. 어느샌가 우리는 서로 이성으로 대하고 있었다. 쉬는 날이면 몰래 외출하여 영화 관람도 하고 짜장면도 사먹곤 했다. 영이의 고향은 서산이었는데 바다 가까이 살았으면서도 바다 구경을 한 번도 한 적이 없다고 했다. 벼르고 별러 안면도로 1박 2일 여행을 했다. 용산터미널에서 버스를 타고 6시간이 걸려 섬에 도착하여 민박집에 여장을 풀었다. “어쩌면 색시가 저리도 이쁘고 고울까 원앙이 따로 없지….” 주인 아주머니의 칭찬에 나는 신이 나서 어깨가 저절로 으쓱거렸다. 민박집 주위에는 이름 모를 꽃들이 만발하여 아름다움을 드러내고 있었고 주변의 논은 이미 황금색 누런 벌판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바닷가로 향하는 오솔길을 걷자니 기다란 코스모스가 하늘거렸다. 코끝을 스치는 그 진한 향기는 영이의 냄새와도 같았다. 우리는 백사장에 앉았다. 밀물 때인지라 바닷물이 밀려오고 있었다. 갈매기 한 쌍이 백사장에 내려앉아 부리로 먹이를 찾다가 바닷물이 밀려 오면 뒤로 물러서고 있었다. 내가 작은 돌멩이 한 개를 들어 그쪽으로 던지려 하니 영이가 말렸다. “자기야 ! 그러지마. 저 새들도 우리처럼 다정하잖아.” 영이는 어디서 주워 왔는지 예쁜 자갈 두 개를 손에 쥐고 있었다. “이 돌멩이 하나는 자기이고 하나는 나야” 그녀는 손수건을 꺼내 돌멩이 둘을 합쳐 묶었다. “우리 이 돌처럼 헤어지지 말고 꼭 붙어 살자.” 우리는 일어섰다. 하루를 지켜 온 해는 뉘엿뉘엿 지평선 너머로 조금씩 넘어가고 있었고 주변 하늘과 바다는 온통 핏빛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영이가 쥐어 주는 돌멩이 묶음을 나는 있는 힘을 다해 바다 쪽으로 던지며 이것처럼 우리가 헤어지지 않게 해 주십사 빌었다. “영이야! 사랑해. 영원한 사랑을 맹세할게.” 영이의 긴 머리카락이 바닷바람에 얼굴을 덮고 있는 것을 이마 위로 밀어 주며 말했다. “정말?” 영이는 새끼 손가락을 내밀었다. 우리는 손가락을 건 후 마주 보고 서서 입맞춤을 하였다. 집에 돌아와 보니 집안이 발칵 뒤집어있었다. 어머니는 노발대발하였다. “이 얼빠진 놈아!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어디를 싸돌아 다닌 거냐. 네놈이 이 어미 죽는 꼴 보고 싶으냐.” 어머니는 영이에게도 노기를 터뜨리고 말았다. 당신의 자식이 뭐 대단한 사람인 냥 “네가 감히 내 자식을 넘보다니….” 영이 언니는 “언니! 잘못했어요” 대신 용서를 빌었고 영이는 머리를 푹 숙이고 흐느끼고 있었다. 그 두 자매는 일주일 후에 이삿짐을 쌌다. 36살에 청상과부가 되어 8남매를 거느리고 자식 잘 되기만을 바라며 살아온 어머니의 의지를 아무도 꺾을 수 없었다. 나는 괴로운 나날을 보내다가 군에 입대했고 그 후론 영이의 소식을 알지 못하였다. 영이는 27세에 트럭 운전사와 결혼했는데 그 남자는 술 주정뱅이였다고 한다. 설상가상으로 의처증까지 있어 장거리 운행을 끝내고 돌아오면 자기가 없는 사이 어떤 놈하고 바람 피웠느냐고 때렸단다. 수많은 날들을 고통 속에서 살아온 영이는 33세에 두 어린 남매와 연탄불을 피워 놓고 극단적 선택을 했다. “내 새끼 내가 데리고 가니, 같이 화장해서 안면도 앞 바다에 뿌려 달라”는 유서를 남겼단다. 나는 영이의 넋을 위로하고자 안면도로 차를 몰았다. 그녀는 죽음을 맞이하면서도 우리의 옛 추억을 잊지 못하고 간직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바다를 넋을 잃고 바라보았다. 모든 것은 내 잘못이었다. 그녀와 약속한 바다의 맹세를 지키지 못한 내 죄가 컸다. 그녀를 보호해 주지 못한 것이 한스러웠다. 무거운 바위가 내 가슴을 짓눌렀고, 철썩철썩 밀려 오는 파도는 내 뺨을 때리고 있었다. 나는 첫사랑 영이를 큰 소리로 부르며 울부짖었다. 그리고 영이의 혼이 고통이 없는 저 세상에서 편안한 안식을 누릴 수 있기를 빌었다. 바다는 아무 말이 없었고 그때처럼 낙조가 붉게 타오르고 있었다. 이진용 / 수필가문예마당 첫사랑 수필 돌멩이 묶음 우리 어머니 돌멩이 하나
2025.06.12. 18:24
만물이 소생하는 봄이 왔다. 온 천지에 봄기운이 완연하다. 세상은 시끄럽고 요동치건만 한 편에선 자연의 질서 속에 생명력이 넘친다. 햇살이 부드럽고 공기 속에 온기와 생기가 충만하다. 모든 것이 새롭게 시작되는 느낌이다. 그런데, 이 좋은 봄날에 방구석에 틀어박힌 채 스마트폰에 매달려 전전긍긍하는 내가 한심하게 느껴진다. 얼마 전까지도 잘 보지 않던 유튜브였는데 한국과 미국의 정치 상황이 요란해지면서 자꾸 클릭하게 됐다. 보다 보면 손에서 스마트폰을 놓지 못한다. 특히 숏폼 영상은 짧고 자극적이다. 알고리즘은 내가 무엇에 관심이 있는지 나보다 더 잘 안다. 보다 보면 관련된 다음 영상이 자동으로 나오니까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계속 보게 된다. 자기 전에 보는 바람에 잠도 제대로 못잤는데도 아침에 눈 뜨자마자 또 찾게 된다. 중독성이 있어 끊기가 매우 힘들다. 처음엔 정보가 궁금해서였지만 이젠 그냥 습관이 됐다. 생각해보니 그 중심엔 내가 지지하는 정치인, 정당이 있었다. 마음을 쏟는 만큼, 그들이 공격당하면 나도 같이 상처를 입는다. 그래서 더 자주 찾아보고, 지켜주고 싶은 마음에 열을 올린다. 그렇게 하루에도 몇 번씩 한국과 미국의 뉴스 속으로 빠져드니, 어느새 마음이 지치고 만다. 점점 나 자신을 잃어가는 기분이다. 유튜브는 자극적인 제목으로 사람을 끌어들인다. 하지만 막상 보다보면 내용이 부풀려졌거나, 심지어 전혀 다른 이야기인 경우가 많다. 제목이 호기심 나서 보면 내용은 딴판이다. 조회 수만 올리면 돈이 되니까, 사실보다 감정을 자극하는 제목을 붙인다. 그걸 잘 알면서도 끌려가는 내가 바보다. 인터넷 중독에서 벗어나야 하겠다고 생각은 하지만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 얼마 전 “와이파이 왜 꺼?”라며 친모에 흉기를 들이댄 10대 세 딸에 관한 뉴스가 미국 사회를 발칵 뒤집어 놓았었다. 보도에 따르면 14, 15, 16세의 세 자매는 엄마가 와이파이를 차단하자 인터넷에 접속이 안된데 격분해 주방에서 식칼을 들고 엄마를 위협했다. 엄마가 도망가자 세 자매는 뒤쫓아가 찌르려고 했으며, 자매 중 한 명은 벽돌을 던져 엄마를 맞혔다. 이 과정에서 아이들의 할머니도 다쳤다. 다행히 자매의 엄마와 할머니는 심각한 부상을 입지는 않았다고 한다. 인터넷 중독이 얼마나 무서운지를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최근 한국에서도 20대 여성이 자기의 반려견을 창밖에 던져 죽인 아버지를 경찰관이 보는 앞에서 흉기로 찔러 살해하려 한 사건이 발생했다. 뉴스에서 이런 소식을 접한 사람들의 반응은 “말세다 말세야. 세상이 어떻게 되려고…쯧쯧”하며 혀를 찼다. ‘말세’란 옛날부터 어른들이 젊은이를 보고 많이 하던 소리이긴 한데, 세상에 워낙 끔찍한 소식이 많이 들려서 인지 요즘은 나이가 그리 많지 않은 사람들 입에서도 심심찮게 들린다. 예전부터 지구 종말론이 거론되기도 하지만 최근엔 세상이 혼란스럽고 도덕이나 풍속이 아주 타락한 상황에서 말세라는 표현을 쓰기도 한다. 그러고 보면 어느 때 건 말세 소리는 항상 있었던 것 같다. 말세라는 개념 자체는 시대와 종교에 따라 다르게 해석되고 있다. 성경에서는 말세라는 표현이 자주 등장한다. 전쟁과 기근, 지진, 거짓 선지자 등 도덕적 타락 등이 말세의 징조로 언급되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이 시대를 말세 현상이 나타나는 때라고 얘기하는 경우가 많다. 최근 자주 일어나는 땅꺼짐, 지진, 홍수, 전쟁, 자연재해와 이상기후, 대형 산불, 이런 현상들은 성경에서 말하는 말세의 징조와 맞아떨어진다. 현대에는 종교적 의미뿐만 아니라 사회적, 도덕적 타락 등이 있을 때 “세상이 말세”라는 표현을 자주 쓴다. 요즘 나타나는 말세 현상으로는 사이버 폭력과 가짜뉴스 확산, 악성 댓글로 인한 인신 공격, 마약, 묻지마 범죄 등이 있다. 특히 성전환 수술로 남녀의 성이 바뀌는 현상 등도 이에 해당된다. SNS와 온라인 문화가 발전하면서 서로에 대한 관심보다는 개인주의가 더욱 강해지고 있다. AI의 등장으로 아이들은 모르는 게 있으면 부모나 선생님에게 묻지 않고 AI 에게 묻는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어느 예능 프로그램에서는 멀쩡하게 잘난 남자 연예인이 사람 대신 AI 여자친구와 사랑을 나누고 외로움을 달래는 이야기가 소개되기도 했다. AI는 비난하지 않고 늘 반응해 주고, 사람처럼 떠나거나 상처주지 않는다. 외로운 시간에 함께 있다는 느낌만으로도 큰 위로가 돼서 인지도 모르겠다. 진짜 사랑이 사라져 가는 시대의 증거 같아서 씁쓸하고 점점 인간성이 무너져 가는 모습이 안타깝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마저 AI로 대체되는 세상, 사랑조차 인공적인 위로로 채워지는 현실이 말세의 또 하나의 징조처럼 느껴졌다. 인공지능의 발전이 앞으로 어디까지 확장될 것인지 알 수 없지만 우리는 계속 감탄하고 놀라고 무섭기도 할 것이다. 아무리 딥페이크의 시대라 할지라도 인간만은 진짜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세계적인 석학인 유발 하라리 교수는 “사람끼리 서로 믿으면 사람이 AI를 통제할 수 있다. 하지만 서로 믿지 못한다면 곧 AI가 인간을 통제하는 날이 올 것이다”라는 절박한 메시지를 낸 바 있다. 이 시대가 말세 같아 보이긴 하지만 사람 안엔 여전히 사랑과 선함이 살아있고, 판도라 상자 밑바닥에 남아 있던 작은 희망의 불씨는 어디에나 있다고 생각한다. 남편은 늘 잔소리처럼 말한다. “컴퓨터 앞에 너무 오래 앉아 있지마라” “나가서 햇볕을 쬐며 걸어라” “이 좋은 날씨에 사람들과 어울리며 자연을 즐기라”고. 유튜브에 매몰된 나에게는 그런 소리가 귀담아 들릴 리가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외출했다가 집에 들어오는 길에 마치 신부처럼 화사해진 우리 동네를 보고 깜짝 놀랐다. 집집마다 집 앞에 큰 나무 한 그루와 아담한 화단이 있는데, 나무에는 푸른 잎이 무성하고 화단에는 ‘핑크 레이디’라는 연분홍 꽃들이 일제히 만발했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세상은 소란스럽고 사람들은 분노에 고함치지만 봄은 늘 그랬듯이 제때에 오고, 초목은 철을 따라 소리없이 꽃을 피우는구나.’ 나도 이젠 다시 삶에 접속해야겠다. 지금 내 곁엔 흐드러지게 핀 봄꽃과 살랑이는 바람과 햇살이 있다. 그들을 보고 느끼며 세파에 찌든 내 마음이 맑게 닦이기를 원한다. 만물이 소생하는 이 봄에 나 또한 새롭게 소생하기를 기대해 본다. 배광자 / 수필가문예마당 유튜브 수필 뉴스 속으로 말세 현상 말세 소리
2025.04.24. 18:05
예상은 빗나가지 않았다. 도널드 트럼프가 다시 대통령이 되자 ‘미국 우선주의’가 더욱 강하게 돌아왔다. 세계가 뒤흔들리기 시작했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3년간 우크라이나의 운명을 짊어진 지도자 볼로디미르 젤렌스키는 원치 않는 ‘굴욕 휴전’의 압박을 미국으로부터 받고 있다. 지난 2월 28일 젤렌스키와 트럼프는 우크라이나의 광물 협정에 서명할 예정이었으나 종전 방안을 둘러싼 두 정상의 의견 충돌로 협정 서명은 무산됐다. 이 협정은 그간 미국이 우크라이나를 지원해 준 대가로 우크라이나에 매장된 희토류 등 광물자원 이익의 절반을 내놓으라는 것이다. 젤렌스키는 “종전 논의는 공정하게 이뤄져야 한다”며 안전 보장 없는 협정에 반대했다. 미국이 우크라이나가 절실히 필요로 하는 안보 보장을 제공할 수 없다고 선을 그었기 때문이다. 젤렌스키는 고성이 오간 설전에서 트럼프 대통령과 JD 밴스 부통령의 협공에 유연하게 대처하지 못했다. 격한 감정에 사로잡혀 트럼프에게 도를 넘는 반응을 보였다. “미국도 대서양과 태평양만 믿고 안주할 수만은 없다. 전쟁이 나면 그 누구도 안전하지 않다”며 트럼프를 자극했다. 트럼프는 “무례하다”며 “미국은 우크라이나에 수천억 달러를 썼는데, 이게 미국 국민에 대한 감사의 표시인 가?” “당신은 우리한테 고마워 해야한다” “당신은 이제 카드가 없다”며 괘씸하다는 반응을 보였다. 그는 또 젤렌스키 면전에서 “멍청한 대통령이 돈을 그냥 줬잖아!”라고 했다. 유럽연합은 대출을 해 준 거였고 미국은 그냥 무상으로 돈을 줬으니 트럼프로서는 화가 날만도 했겠다. 정상회담에서 이런 험악한 설전이 생방송으로 나가자 세계는 경악했다. 예정된 오찬도, 기자회견도 취소되고 젤렌스키는 백악관에서 쫓겨나다시피 나왔다. 백악관 회담이 파국으로 끝나자 트럼프는 즉각 우크라이나의 군사지원을 끊었다. 자신의 종전 구상에 이의를 제기하는 젤렌스키에게 “협상에 나설 생각이 전혀 없는 지도자가 우크라이나를 이끈다면 전쟁은 종식되지 않을 것이다. 그 사람은 오래 남아 있지 못할 것이다”라면서 정권교체 필요성까지 언급했다. 약소국의 현실을 소름 끼칠 정도로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우크라이나 처지를 보며 남의 나라 이야기 같지가 않았다. 6.25 당시 우리나라도 똑같이 미국의 원조를 받는 조건으로 조기 휴전을 압박받았고 그때 이승만 대통령도 젤렌스키보다 심하면 심했지 결코 그보다 덜하지 않은 수모를 받았다. 당시 미국은 휴전 반대를 하는 이승만 대통령을 부담스러워 했다. 골칫거리 이승만 대통령을 축출하려 했다. 나라가 힘이 없으니 겪는 설움이었다. 회담은 시작부터 심상치 않았다. 젤렌스키는 군복 스타일의 옷을 입고 워싱턴 DC 백악관을 찾았다. 그는 전쟁 중인 군인들에 대한 연대를 보여주기 위해 그간 공식 행사에서 비슷한 복장을 입어왔다. 트럼프는 젤렌스키가 백악관에 도착하자 비꼬듯 “오늘 잘 차려입었다”고 말했다. 어느 기자는 “왜 정장을 입지 않느냐”, “정장이 있기는 한 건가”라며 젤렌스키를 조롱했다. 밴스 부통령을 비롯한 회담 배석자들은 웃음을 터트렸다. 젤렌스키는 불편한 심기를 참으며 “전쟁이 끝난 후에 정장을 입겠다”고 답했다. 우크라이나인들은 자기네 대통령이 당한 수모에 분노했다. 외무부는 “우크라이나 인들에겐 우리만의 정장이 있다”면서 군장을 착용한 군인, 피 묻은 수술복 입은 의사 등 사진을 올리며 반격에 나섰다. 또 “무례하다고요? 백악관에 젤렌스키를 불러놓고 트럼프가 한 행동을 보세요”라고 항변했다. 미국내 우크라이나인들은 조국의 자존심을 지켜야 한다는 다짐과 그렇다고 세계 최강국인 미국을 적으로 돌릴 수 없다는 부담감이 교차했다. 젤렌스키가 당한 모욕을 보며 러시아가 얼마나 재미있었겠나. 그들은 젤렌스키가 트럼프에 터무니없이 무례했다며 트럼프와 밴스가 젤렌스키 뺨을 때리지 않은 것이 기적이라며 약을 올렸다. 굴욕을 당한 젤렌스키는 하루 만에 유럽에서 위로를 받았다. 백악관 해프닝에 국제 사회에선 유럽을 중심으로 우려가 커졌다. 유럽을 중심으로 한 정치인들이 젤렌스키를 응원하며 결집했다. 가브리엘 아탈 전 프랑스 총리는 “우크라이나 전쟁의 책임은 전적으로 러시아에 있는데 트럼프가 우방의 대통령을 잔혹하게 망신 줬다. 오늘밤 미국은 자유세계의 리더라 말할 자격을 잃었다”고 강도 높게 비난했다. 영국 의회는 트럼프에게 전한 찰스 3세의 국빈초청을 철회해야 한다는 주장까지 나왔다. 트럼프는 러·우 전쟁 종전 협상에서 “유럽의 안보는 유럽이 책임져야 한다”는 입장을 명확하게 밝혔다. 동맹국들이 안보에 무임 승차하며 미국에 손해를 끼치는 걸 더 이상 두고 보지 않겠다는 뜻이다. 유럽 정상들은 런던에 모여 유럽이 미국의 영향력에서 벗어나 독자적 생존을 해야한다는 ‘자강론’을 펼쳤다. 우방을 무시한 채 ‘미국 우선주의’를 외치는 트럼프가 자국 이익과 안보를 최우선으로 내세우고, 패권을 추구하자 각자도생을 해야 하는 새로운 국제 질서가 꿈틀대는 것 같다. 젤렌스키는 회담 파국 나흘만에 “우크라이나의 평화 협상 의지와 미국과의 광물 협정에 사인할 준비가 됐다”는 의사를 트럼프에게 전했다. 또한 미국이 우크라이나를 지원해 준 것에 대해 깊이 감사한다고도 했다. 일종의 반성문으로 젤렌스키가 트럼프에 백기를 든 것이다. 힘의 논리가 지배하는 약소국과 강대국의 대전을 보며 어쩔 수 없는 약소국의 비애가 느껴졌다. 고대 그리스 시대, 투키디데스의 ‘펠로폰네소스 전쟁사’에는 ‘멜로스의 대화’ 편이 있다. 강대국 아테네가 작은 도시국가 멜로스를 공격했을 때 벌어진 아테네 사절단과 멜로스 지도자들 간의 대화 중 하나이다. “강자는 할 수 있는 것을 당연히 할 수 있고 약자는 무슨 일을 당하든 견뎌야 한다.” 정의는 오직 동등한 힘을 가진 관계에서만 가능하다는 것이다. 국제정치에서 ‘힘이 곧 정의’라는, 현실주의 사례로 자주 인용되고 있다. 젤렌스키는 이전에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과 영국 총리가 트럼프를 어떻게 다루었는지 미리 공부했어야 했다. 그들은 하나같이 줄기찬 칭찬과 경의로 트럼프의 비위를 맞춰줬다. 만약 젤렌스키가 자국의 이익을 덜 잃기 위해서 자존심을 굽히고 트럼프의 비위를 맞췄으면 어땠을까. 또 트럼프가 강자의 아량을 조금이나마 보여줬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우방도 적도 없는 미국 우선주의가 이렇게 가다가 혹시 자유세계의 우방들이 등을 돌리고 반미 감정이라도 품게 된다면 미국인들은 밖에서 호감을 받을 수 있을까 걱정이 된다. 또 앞으로 우리 조국 한국은 미국과의 관계에서 어떤 대접을 받을까. 우크라이나 사례에 답이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배광자 / 수필가문예마당 반성문 수필 트럼프 대통령 우크라이나 침공 우크라이나 처지
2025.04.10. 18:38
둘째 큰오빠가 1960년대에 미국에서 학부를 졸업하고 귀국하자마자, 막내였던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미국 대학에서는 한국이 중국의 속국이었다고 가르치더라.” 나는 깜짝 놀라 되물었다. “정말?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하지만 사실이었다. 조선 왕조는 500년 이상 중국의 속국으로, 조공을 바치는 ‘조공체제(Tribute System)’ 아래에 있었다. 국가의 중대한 결정마다 중국의 윤허를 받아야 했으며, 명나라와 청나라를 상전으로 삼아야 했다. 당시 중국은 조선뿐만 아니라 베트남, 티베트, 동남아시아 여러 나라의 정치와 문물에도 깊이 개입하고 있었다. 조선은 계유정난을 시작으로 갑신정변에 이르기까지 15차례에 걸친 내란과 외란을 겪으며 태평성대를 이루지 못했다. 신분제가 엄격했던 조선 사회에서 양반 계층은 혈통을 세습하며 부를 독점했고, 이에 대한 저항으로 크고 작은 반란이 끊이지 않았다. 교육 시스템도 철저히 양반 중심으로 운영되어, 서민들에게는 배움의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았다. 다만, 조선이 남긴 가장 위대한 유산 중 하나는 한글 창제였다. 1894년 청일전쟁에서 청나라가 일본에 패하면서 조선은 더 이상 중국에 조공을 바치지 않아도 되었지만, 1876년 제물포 조약으로 일본은 교묘히 조선을 침식하기 시작했다. 서서히 왕권은 박탈되고, 따라서 국민은 보호막이 될 나라가 없어지게 된다. 일본은 러시아와의 싸움이 시작될 때, 영국과 미국의 지지를 얻어내고, 1905년 포츠머스 조약에서 러시아로부터 한국지배권과 만주 남부 철도부설권을 양도받는다. 강대국 간의 싸움터는 한반도였다. 일본은 1945년 패망할 때까지 동아시아 24개국을 침략하며 식민지로 삼았다. 조선, 만주, 중국 본토, 홍콩, 대만, 동남아시아를 포함해 일본의 영토는 광대했다. 일본 제국주의 아래 놓인 나라들은 강제 징병, 위안부 동원 등 이루 말할 수 없는 참혹한 희생을 겪어야 했다. 김상웅 전 독립기념관장의 보고에 따르면, 일본 식민 통치 아래에서 조선인 희생자가 800만 명에 이른다고 한다. 김 전 관장은 일본의 침략이 1910년 한일병합조약이 아니라 1876년 개항 때부터 시작되었으며, 70년간 지속되었다고 분석했다. 며칠 전, 106돌 삼일절을 맞이했다. 삼일절이 되면 떠오르는 이름들이 있다. 안중근, 유관순, 윤봉길, 윤동주…. 그러나 오늘은 이름 없이 희생된 수많은 소년, 소녀, 그리고 어르신들을 기억하고 싶다. 당시 사진을 보면, 소녀들은 남루한 흰 저고리에 검은 치마를 입고 두 손을 번쩍 들고 만세를 외치고 있다. 청년들은 짧게 깎인 머리에 수인번호가 적힌 죄수복을 입고, 푸석한 얼굴로 카메라를 응시하고 있다. 그들의 굳게 다문 입매와 날카로운 눈빛이 모든 것을 말해준다. 만세운동은 평양, 진남포, 안주, 의주, 원산뿐만 아니라 만주, 일본에서도 일어났다. 각지에서 독립선언문이 발표됐다. 1918년 만주 길림에서 조소앙 선생이 작성한 ‘무오독립선언서’, 이듬해 1919년 2월 8일 일본 YWCA, 조선기독교청년회관 앞에서 이광수 선생이 작성하고 영문으로 번역하여 해외까지 보내었다는 ‘2·8 독립선언서’에 이어서, 같은 해 3월 1일 최남선 선생이 작성하고 15명의 천도교 대표, 16명 기독교, 2명의 불교 대표 총 33명의 민족대표가 서명하고 7개의 도시에서 낭독된 ‘기미독립선언’이 있다. 기미독립선언서는 원래 탑골공원에서 낭독될 예정이었으나, 민족대표 33인이 경찰에 연행될 것을 우려해 태화관에서 선언식을 조용히 치렀다. 이후 그들은 스스로 자수했다. 교육자인 정재용 선생은 2만1000부의 독립선언서를 받아 탑골공원으로 갔고, 민족대표들이 나타나지 않자 직접 선언서를 낭독했다고 한다. 수많은 젊은이들이 독립을 외치다가 투옥되었고, 일부는 끝내 돌아오지 못했다. 살아남은 이들조차 고문과 수형 생활의 후유증으로 평생을 고통 속에 살아야 했다. 이들의 희생을 기록한 문서는 광복 8년 후 이승만 대통령의 특명으로 정리되었다. 총 67권에 이르는 책자로, 독립운동가들의 이름, 생년월일, 주소가 상세히 기록되어 있었다. 이는 한일회담 당시 협상 자료로 사용된 것으로 보이며, 이후 분실되었다가 2013년 주한 일본대사관을 이전하는 과정에서 극적으로 발견되었다. 여기에 유관순 열사의 기록도 남아 있는데, 그녀의 주소는 ‘천안군’, 순국 장소는 ‘서대문 경찰서’로 명시되어 있다. 광복 이후에도 한국은 많은 아픈 고비를 넘겼다. 2009년, 일제강점기 친일 행적을 남긴 4000여 명의 명단이 공개되었는데, 그중에는 ‘2·8 독립선언서’를 작성한 이광수, ‘기미독립선언서’를 쓴 최남선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들은 왜 독립운동을 하다가 친일의 길을 선택했을까. 그들과 같은 운명을 겪은 이들이 많았을 것이다. 독립운동을 했음에도 기록에서 누락된 이들, 반대로 친일을 했으나 유명하지 않아 조용히 잊힌 이들. 역사 속에서 보이지 않을 뿐,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닐 것이다. 한국 정부는 늦었지만 독립운동가를 발굴해 훈장을 수여하고, 생존자와 유가족을 지원하고 있다. 남편의 외조부 한순회 선생도 그중 한 명이었다. 동학을 계승해 만들어진 천도교의 광주교구장으로 활동하며 독립운동을 하다 투옥되었고, 사후 30년이 지나 대통령 표창을 받았다. 106돌 삼일절, 한국에서는 윤석열 대통령 탄핵 찬반 시위가 열렸다. 남가주 LA와 오랜지 카운티 곳곳에서는 한인사회가 삼일절 기념행사가 치러졌다. 대부분 대형 교회에서 진행되었다. 고마운 일이다. 교인뿐만 아니라 총영사, 교육자, 원로들이 함께했다고 한다. 재개발이 추진되고 있는 LA총영사관이 완공되면, 디아스포라 한인들이 그곳에 모여 다 함께 삼일절을 기념하고, 일제강점기 희생된 800만 선조들을 기릴 수 있기를 바란다. 반드시 그렇게 될 것이라 믿는다. 모니카 류 / 종양방사선학전문의·한국어진흥재단이사장문예마당 수필 조선인 희생자 한국지배권과 만주 최남선 선생
2025.03.20. 18:21
나는 항상 배가 고팠다. 나는 음식을 회피하는 거식증이 있거나, 음식에 욕심을 부리는 성격은 아니다. 또 충동적으로 먹지도 않는다. 그런데 언제부터이었을까. 나는 늘 허기가 지었던 것 같다. 6.25 전쟁 중에, 그리고 그 후에 한국의 모든 국민이 힘들고 가난했던 때에도 우리 식구들은 끼니를 거른 적은 없었다. 집이 부유해서 그랬던 것이 아니라, 쪼들리는 살림 중에도 엄마의 지혜로운 가정 행정의 운영 덕분이 아니었을까 싶다. 그때에는 배고파 한 적이 없었다. 그랬던 내가 배가 고팠다. 집을 떠났을 때부터였다는 것을 요즘에야 깨달았다. 그러니까 내가 성인이 된 이후부터라고 생각된다. 형체를 구별하기 어려운 무엇인가가 촌스러울지언정 단순하고 상큼했던 엄마의 밥상을 텅 빈 벌판으로 밀어낸 형국이다. 회오리바람이 그곳을 휘젓고 지나갔던가. 인턴이 되었을 때 나는 부모님의 집을 떠났다. 오십 여년 전 한국의 인턴들은 당직 숙소에 기거해야 했다. 하루 건너서 당직이므로, 당직을 선 시간과 낮 근무까지 합쳐서 24시간 일하고, 그 다음날 정규 일과를 계속해야 했던 때라 인턴 숙소에서 일 년간 살았다면 과언이 아니다. 지금은 인권, 노동법, 의료 수련의 법 위반이라 그리하지 못한다. 어떻든 나는 그때부터, 부모님을 가끔 방문하던 손님이 되어 버렸다. 그와 함께, 나를 안아주실 때 풍기던 익숙하고 따뜻한 체취, 반찬 냄새가 배어있는 엄마의 남루한 옷자락이 엄마가 끓이신 된장찌개와 풋김치가 올려진 단순하고 가난했던 밥상과 함께 멀어져 갔다. 엄마의 가슴과 나 사이에 있던 사랑과 희생이라는 이름의 구름다리 밑에도 그녀의 남루한 옷, 가난했던 밥상, 신선한 풋김치가 더는 자리하고 있지 않았다. 인턴 생활이 전공의 삶으로 이어지면서, 미국에 왔고, 나는 부모님을 방문하기에는 너무 먼, 수천 마일 떨어진 곳에서 살게 되었다. 불쑥 엄마에게 달려가, ‘엄마, 나 배고파!’ 말하던 삶의 한 단편은 이미 지나고 난 후였다. 그래서 나는 나의 허기를 엄마와 연결하여 본다. 구질구질하고 쩨쩨한 이야기일지 모르겠지만, 내가 엄마에게 할애하는 기억은 불공평하다. 당신은 전쟁·최루탄 연기·남루함 안에서 표정을 잃은 창백하고 주름진 얼굴로 세상을 보고 있다. 그 시대의 단 한 장 남은 흑백 가족사진 속에 있는 그녀는 슬프다. 그 사진 속에 그녀의 큰아들은 없다. 아들의 아내도 없고, 아들의 큰딸이 나와 함께 앞줄에 웃지 않고 서있다. 그녀의 눈동자와 입매가 엄하다. 한때는 빛났을 당신의 젊음과 웃음을 떠나보내고, 기뻐하여도 된다는 전능하신 분의 자비를 용서하지 못하고 있다. 어쩌면 나의 엄마는 그 시대 어머니들의 모상(母像)을 대표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일제 강점기에 태어나 1970년대에 도미하실 때까지, 40여 개의 전쟁으로 점철된 땅에서 사셨다. 일본의 속국인 나라 잃은 국민에게 일본이 관련되었던 크고 작은 모든 전쟁은 조선인들의 전쟁이 아니었던가. 여러 전쟁을 겪을 때 엄마와 함께했던 나의 손위 형제들과는 달리, 나는 그 시대를 알지 못한다. 대신, 아버지 목마를 타고 피난 길에 올랐던 한국전쟁의 참상을 구경했을 터이다. 그러나 기억하지는 못한다. 그 전쟁의 잔재인 가난 속에서 자랐다. 중학교 입학 후에 목격하였던 학생혁명과 이어서 발발한 군사혁명으로 한국 사회는 급격히 변하기 시작했다. 새마을 운동이 그중 하나이었다. 쌀 생산량에 비해서 인구가 많았던 한국은 일주일에 하루는 밥 대신 식빵을 먹을 것을 장려했고, 매가지 없는 월남 쌀을 수입하여 국민의 배를 채워야 했다. 출생률이 너무 높다고 판단되었던 때라서 시골 보건소에서는 피임약을 집집마다 다니며 나누어 주었던 때였다. 그러했던 격동기에, 엄마는 말이 없으셨다. 세상에 아무것도 중요한 것이 없는 듯 보였다. 나의 배고픔은 허기(虛飢)가 아닌 허기(虛氣)가 아니었을까? 허기라는 두 글자는 한문으로 달리 쓰이고 뜻이 다르다. 허기(虛飢)란 실제 굶어서 생기는 배고픈 증세를 뜻하고, 내가 겪어온 것은 허기(虛氣)가 맞는다. 내가 말하는 배고프다는 것은, 정신적, 감성적 허기이다. 의학에서는 배고픈 이유를 당뇨, 저혈당, 스트레스, 저 단백질 음식 섭취, 갑상샘 기능 결핍, 수면 부족, 임신 등 열 가지 정도로 설명한다. 그 외에 질병의 이름이 붙여지는 ‘먹는 상황’과 관련된 예도 있다. 음식을 섭취하고자 하는 욕망, 음식을 회피하는 거식증 등 정신적인 또 감성적인 뇌의 기능과 관련된 질병들이다. 나의 갈증(渴症)을 유발하는 것들은 무엇인가. 또 내가 갈구(渴求)하고 있는 것들은 무엇이고 어디에서 왔는지 다시 생각해 본다. 그것은 바로 엄마의 실질적인 부재(不在)와 영적인 부재에서 온 것이다. 엄마와 관련된 모든 것들이 존재하지 않은 지 오래되었다. 반찬 냄새가 밴 당신이 없다. 먼 곳을 바라보시던 절망과 단념의 눈동자도 찾을 수 없다. 내가 가졌던 엄마에 대한 연민은 머지않아 내가 이승을 떠날 때 대(代)가 끊길 것이다. 이 사이클은 계속되지 않기를 바란다. 그래서 나의 아이들은 배고프지 않았으면 좋겠다. 모니카 류 / 수필가·한국어진흥재단 이사장문예마당 수필 단백질 음식 인턴 숙소 당직 숙소
2025.02.13. 19:42
새해를 새 마음으로 시작하기는 애초부터 글렀다. 지난 연말부터 한국에서 들려온 방탄, 탄핵, 비상 계엄 등 무시무시한 말들로 뒤숭숭하더니 급기야 최악의 제주항공 참사로 179명이나 되는 희생자가 숨졌다. LA에서는 역대 최악의 산불이 LA 곳곳을 휩쓸며 황폐화시켰다. 한국의 지인이 문자를 보냈다. “지금 한국 사람들은 이래서 아프고 저래서 아프고, 땅도 하늘도 모두 아픕니다.” 나도 댓글을 보냈다. “지금 LA도 이래서 힘들고 저래서 힘들고 모두 사는 게 힘듭니다.” 옛말에 ‘복은 겹쳐 오지 않고 화는 홀로 오지 않는다’고 하더니 나쁜 소식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정초에는 덕담을 주고받으며 희망찬 한 해를 설계하는 게 보통인데 올해는 어쩐지 떠오른 해가 밝게만 느껴지지 않는다. 지금 한국은 불신과 반목, 가짜뉴스, 유언비어에 음모론까지 판을 친다.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정국이다. 대통령 권한대행의 대행을 비롯해서 대행이 많다 보니 ‘대행민국’이라는 말까지 나돈다. 헌정사상 초유의 사태가 매일같이 벌어지고 있다. 무정부 상태와 다름없다. 연말연시 파티로 즐겁게 북적일 시기에 한남동 대통령 관저 인근과 광화문에선 탄핵 찬반 시위로 진영이 둘로 쪼개져 목청이 터져라 외쳐대고 있다. 한겨울 맹추위에 철야 농성을 이어 가니 안타깝다. 백골단까지 등장하며 준 내전상태다. 국가 기관끼리 맞부딪치는 일촉즉발의 위기 상황으로 치닫고 있다. 언제 끝날 것인가. 뉴스를 보고 있으면 부글부글 화가 치민다. 행여 무슨 일이 일어날 까 불안하다. 한국의 지인들은 요즘 이념 양극화로 정치 성향이 다른 사람과는 밥도 같이 먹기 싫다고 한다. 사람마다 생각이 다 달라 일상에서 자연스럽게 정치 이야기를 하지 못한다. 모임에서 정치 이야기는 하지 않는 게 암묵적 규칙이다. 정치 위기는 정치로 풀어야 하는데 정치는 없고 모든 것을 법에 의존한다. 아전인수격으로 법을 따지지만 법은 딱 떨어지지 않는다. 기억에 남는 법에 대한 얘기가 있다. “법을 무시하는 난동은 최악이고, ‘법대로 하라’며 따지는 세상도 결코 좋은 세상은 아니다. 예로서 질서를 지키고 악으로써 화합하여 ‘법 없이도 사는 세상이 가장 좋은 세상’이다.” 정치도 품격이 있다. 화합과 타협 속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독일 재상 비스마르크는 “정치는 정확한 과학이 아니다. 정치는 가능성의 예술”이라고 말했다. 타협의 예술, 타협의 기술이란 뜻이다. 타협은 없고 대결만 있는 지금의 한국 정치에서 곱씹어 봐야할 말이다. TV가 없던 시절, 아버지는 라디오를 끼고 사셨다. 매시간 뉴스를 경청하셨다. 내가 보기엔 똑같은 뉴스 같은데 이해할 수 없었다. 요즘 내가 그렇다. 아침에 눈 뜨자마자 신문을 읽고 낮엔 같은 뉴스를 계속 본다. 스트레스를 받으면서도, 화가 나면서도 보고 또 본다. 그러다 보니 내용을 꿰뚫고 있다. 그런 나에게 남편은 “정치 평론가 수준인데”라고 놀린다. 예전에는 대다수의 여성들이 정치에 관심이 없었다. 정치는 원래 남자들의 전유물처럼 여겼다. 요즘은 여자들이 더 정치에 관심이 많다. ‘개딸’이나 ‘태극기 부대’를 보면 여자들이 더 적극적이다. 원래부터 정치나 뉴스에 관심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한국 방문을 자주하게 되고부터 하도 시끄럽게 정치문제가 사회 전체를 삼키다 보니 나도 모르는 사이에 그리 된 것이다. LA에서도 거의 실시간으로 한국 뉴스를 접할 수 있어 마찬가지다. 한국 정치는 나 뿐만 아니라 모든 국민을 정치에 함몰시킨다. 나라의 앞날 걱정에 잠을 설치니 남편은 “신경 꺼”라며 신경질적으로 말한다. 남편은 스트레스 받는다며 아예 한국 뉴스를 외면한다. 초야에 묻힌 선비처럼 집에서 책만 읽고 있다. 요즘은 에드워드 기번의 ‘로마제국 쇠망사’를 읽고 있다. 지금 한국의 모양새가 포용과 보편성은 사라지고 혐오와 독선이 판치는 멸망 직전의 로마제국을 보는 것 같기 때문일까. 한국인의 정치 관심도는 세계 최고 수준이라고 한다. 정치에 대한 높은 관심은 민주주의 사회에서 중요한 가치이자 높은 시민 의식을 반영하는 긍정적인 면이 있다. 하지만 지나친 몰입은 정치적 극단화와 사회 분열을 심화하는 부정적인 경향이 있다. 결국 계엄 사태 43일 만에 윤대통령이 체포됐다. 온 나라를 뒤집어 놓은 불안감은 일단 해소됐다. 그래서 대통령의 미래는, 한국의 앞날은 어찌 될 것인가? 어수선한 조국을 바라보며 한국 근무를 마친 필립 골드버그 주한 미국대사가 떠나며 한 말을 생각한다. “지금 한국은 매우 어려운 순간이지만 이겨낼 것이다.” 한국은 저력이 있는 나라니까 희망을 가져 본다. 누구의 말 대로 ‘희망은 힘이 세니까’ 그 말을 믿어본다. 정초에 한국이 정치적 소용돌이 속에서 혼란스러웠다면 LA에서는 역사상 최악의 산불로 비상상태가 선포됐다. 주택 등 1만여 채의 건물이 전소됐고, 수만 명에게 긴급 대피령이 내려졌다. LA 인근 지역 곳곳에서 동시 다발적으로 일어난 산불은 건조한 날씨와 악마의 바람이라는 ‘샌타애나’ 강풍으로 급속히 번져나갔다. 투명하도록 맑고 파랗던 LA하늘은 온통 잿빛 연기로 뒤덮였다. 우리 집도 예외는 아니었다. 한밤중에 ‘삐익 삐익’ 급박한 소리와 함께 대피하라는 경고문자를 세 번이나 받았다. 난감했다. 한국 같으면 염치 불구하고 친척 집이라도 간다지만 캄캄한 밤중에 어디로 대피한단 말인 가. 불안하지만 꼬박 밤을 새며 버텼다. 다음날 또 대피 경고를 받았다. 일단 집을 떠날 때는 최악의 상황을 가정하기에 가지고 나갈 물건을 챙기는데 무엇을 챙겨야 할지 몰랐다. 산이 가까운 LA 북쪽에 살면서 대형 산불을 여러 번 경험했지만 당황하기는 매번 마찬가지였다. ID와 신용 카드, 여권과 중요한 서류, 먹는 약만 챙겼다. 가족 사진을 가지고 나오지 않은 게 마음에 걸렸다. 단출하게 짐을 챙겨 밖에 나가보니 좀 떨어진 거리가 시커먼 연기 속에 묻혀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다행히 바람과 연기가 우리집과 다른 방향으로 향하는 걸 본 후 안심이 되어 집으로 돌아왔다. 사방에서 염려하는 전화가 왔다. 특히 한국에서 “괜찮으냐”는 전화가 많이 왔다.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은 귀중품이 아니라 힘들 때 나를 생각해 주는 사람들의 정이라는 것, 재난속에서 얻은 귀한 깨달음이었다. 나훈아가 부른 노래 중에 “테스형, 세상이 왜 이래, 왜 이렇게 힘들어” 라는 노래 가사가 떠올랐다. 정말 세상이 왜 이런지 모르겠다. 혼돈과 슬픔에 빠진 한국 사회와 대형 산불로 큰 피해를 입은 LA에 평화가 깃들기를 바란다. 배광자 / 수필가문예마당 이래 수필 한국 정치 정치 이야기 정치 위기
2025.01.23. 18: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