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무슨 일이건 마지막까지 미루는 좋지 않은 습관을 갖고 있다. 더는 미룰 수 없는 순간이 되어야 일의 능률이 최대치에 다다른다. 반전을 향해 가는 셜록 홈스처럼, 최후의 스퍼트를 남겨둔 운동선수처럼 매사에 뜸을 들이다가 마지막 순간에 해치운다. 시간적 여유가 조금이라도 있으면 도무지 능률이 오르지 않는다. 몇 해 전 4월, 세 번이나 마감일에 쫓겼다. 첫 번은 12일의 재산세 납부를 마지막 날인 12일까지 미루었다. 두 번째는 15일의 소득세(Income Tax) 신고 마감이었고, 마지막으로는 16일의 2020 센서스 등록이었다. 입안이 타들어 가도록 마감 시간에 맞추느라 이리 뛰고 저리 뛰다가 몸살까지 호되게 앓았다. 자신의 삶이 언제 끝나는지 모른다는 것은 신의 배려이지 싶다. 무슨 일이건 마지막까지 미루는 사람에게 이 세상을 떠나는 날이 얼마나 분주할 것인가 생각하면 생의 마감일을 모르는 것은 신의 은총임이 분명하다. 독일 문호 괴테는 임종의 순간에, “More light, more light!”라고 말했다고 한다. 준비 없이 마지막을 맞을 나는 틀림없이 “More time, more time!” 외칠 것 같다. 그리되면 내게 줄 시간을 더는 갖고 있지 않은 신께서는 얼마나 곤란하실까? 나는 ‘급한 일’보다는 ‘중요한 일’을 항상 먼저 처리하는 편이다. 그런데 학창 시절 시험 하루 전의 ‘전날 치기’ 저녁이 되면 내 알량한 삶의 철학은 중대한 도전에 직면하곤 했다. ‘프리어리떼’와 ‘앵뽀르땅스’가 내 속에서 충돌한다. 전자는 따뜻한 이불 속으로 발을 넣어버리는 것이고 후자는 좋게 받아야 할 시험 성적 결과다. 한 번도 확실한 선택을 못 한 채 그럭저럭 대한민국 교육부의 혜택을 모두 받았으니 나는 행운아 중의 행운아인 셈이다. 남편은 우선순위를 정해놓고 철저히 지키는 사람이었다. 아침에 출근할 때면 손목시계를 오른팔에 차고 있는데 그 이유가 그날 처리해야 할 일의 우선순위를 잊어버리지 않기 위한 표식이라고 했다. 매사가 흐릿한 내 습관을 당연히 못 견뎌 했다. 6·25 전란 때 우리 가족은 미처 남으로 피난을 떠나지 못해서 북한군 치하의 서울에서 석 달을 지냈다. 처음 얼마 동안은 집에 있던 식량으로 그럭저럭 버텼지만 점차 양식 구하기가 어려워졌다. 9·28 서울 수복이 가까웠던 그 날도 아버지는 한강 남쪽 농가로 쌀을 구하려고 물물교환할 물건들을 준비해서 집을 나섰다. 이런저런 준비와 어머니의 늑장으로 다른 날보다 반 시간가량 늦어서 광나루에 도착하셨다. 그런데 바로 그 자리에 30분 전에 미군의 폭격이 있었다. 광나루 다리는 흔적도 없이 무너져 내렸고, 주변은 아수라장이 되어 있었다. 리더십에 관한 세계적인 권위자 스티븐 코비 교수는 성공하려면 ‘당장 급한 일보다는 멀리 보아 중요한 일에 몰두하라’고 권한다. 여기서 성공이란 ‘소소하고 일시적인 성공’이 아니라 ‘원대하고 근본적인 성공’을 말한다. 내가 지키려는 ‘중요한 일 우선주의’는 이런 차원 높은 성공 철학에서 비롯된 것은 아니다. 나는 일찍부터 짧은 성공과 승리의 덧없음을 맛봤다. 6·25 전란 중 벽촌의 조그만 피난 초등학교에 다니던 나는 학급 자치회장에 당선되면서 들로, 산으로, 절집으로 함께 쏘다니던 피난지의 둘도 없는 친구를 잃었다. 그 친구는 자치회장 투표에서 나보다 한 표를 적게 얻었다. 그 일은 지금도 내 몸속 어딘가에 가시처럼 박혀 아픔을 준다. ‘불가근불가원’이라는 말이 있다. 나는 불가해한 인생과 앞으로 ‘불가속불가서(不可速不可徐)’로 경주할 생각이다. 인생이란 예측불허이며 어떤 노력으로도 손에 넣을 수 없는 거대한 신의 놀이터이다. 요즘 그것을 더욱 절절히 느낀다. 회사 일이건 집안일이건 마지막까지 뭉그적거리다가 일이 커지고 나면 남편의 기색이 심상치 않게 변했다. “원소는 장강을 너무 일찍 건넜기 때문에 조조에게 패한 것이다”라고 내가 눙치면 남편은 “시저가 갈리아에서 귀환할 때 루비콘강을 건너지 않았으면 그때 폼페이우스에게 당했다”고 반박했다. 그는 인생의 강도 그렇게 건넜다. 수술 후 나온 남편의 병리 보고서(Pathology Report)는 ‘완치는 어렵지만 컨트롤은 가능하다(not curable, but controllable)였다. 얼마 후 그는 루비콘강을 건넜다. 신의 놀이터는 인생의 강에도 있었다. 박유니스 / 수필가문예마당 놀이터 수필 성공 철학 회사 일이건 마감 시간
2026.04.30. 17:49
무슨 거창한 문화적 충돌은 아니라 해도 갑자기 낯선 땅으로 떠밀려와서 이민자로 살아간다는 것은 그 자체가 충격일 수밖에 없다. 천사의 도시라는 로스앤젤레스에서 세탁소부터 시작하기로 했다. 부족한 영어뿐만 아니라 주일이면 교회에 갈 수 있다고 했으니 솔깃했다. 그렇게 용감하게 출발은 했지만 어깨너머로 익힌 기술이 온전할 리가 없다. 거기에다 무슨 매상의 강박관념까지 있었으니 매일 일어나는 내 실수는 어쩌면 당연했는지도 모른다. 세탁소 문을 연 첫날부터 나는 어느 백인 손님 넥타이에 큰 구멍을 내고 말았다. 좀 더 잘해주려 했던 것인데 그런 형편이었으니 세탁비는커녕 손님에게 백배사죄를 하고 새것 값으로 물어 주어야 했다. 그리고 새벽부터 보일러를 켜고는 우람한 세탁 기계를 돌려야 하는 일인데, 솔벤트의 역한 냄새는 숨쉬기도 어려울 지경이다. 더구나 그런 중에 있던 큰 사고는 옷 주머니에 볼펜이 있는 줄 모르고 기계를 돌린 바람에 그만 모든 손님 옷은 잉크 범벅이 되고 말았다. “이제 이 일을 어쩌지…. ” 저절로 나온 내 탄식에 아내는 기가 막혔던지 평소 하던 잔소리조차 유보하고 있었다. 그런 뒤에 손님들은 하나같이 새것이라고 우겨댔으므로 그나마 손님이 떨어질세라 아내는 억지 미소를 지어가며 새 옷값으로 변상해야 했다. 또 못된 손님 때문에 법원까지 가는 일이 가끔 있었다. 경직된 분위기 속에 옷의 색이 달라졌다며 사진을 내밀면 재판장은 코메리칸의 어설픈 말은 들어보지도 않고 무조건 변상하라는 판결을 내린다. 억울하기 짝이 없는 일인데 미리 사진까지 찍어두었다는 수상한 정황은 아예 고려되지 않는다. 그런 속에서도 일 년이 금세 지나갔다. 그동안 나도 열심히 했지만 무엇보다 아내가 큰 역할을 했다. 그리고 몇 안 되는 직원들도 최선을 다해 주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다. 카운터 아가씨가 갑자기 놀란 목소리로 나를 찾는다. 조금 전에 세탁 양복 한 벌 찾아갔던 손님이 크게 찢어진 옷을 들고 다시 왔다는 것이다. “아니 뭐라고? 잘 세탁해서 다림질까지 해준 양복이 찢겨있다니…. ” 도무지 있을 수 없는 일인데, 그 손님은 ‘이제 너희들이 어쩔 것이냐?’ 하는 표정으로 버티고 있었다. 나는 급히 양복부터 살펴보았다. 윗도리에는 한 뼘 정도 칼로 그어진 부분이 있었다. 한 눈으로 봐도 자작극이 분명했다. 세탁 기계는 옷을 찢을 만한 곳이 없을 뿐만 아니라 또 최소 다섯 사람의 손을 거쳐야 하는 과정에서 아무도 보지 못할 리가 없기 때문이다. 옷을 들고 나간 그 몇 분 사이에 저지른 짓이 분명했다. 하지만 심증 외에는 아무런 물증이 없으니 결국 6달러짜리 일 해주고 그 100배의 날벼락을 맞게 된 것이다. 두 눈 뜨고 당하는 일에 더욱 분통 터진다. 나는 우선 시간을 벌기 위해 3일 뒤에 다시 오라고 했다. 그는 성공의 확신을 잡았던 모양이다. 희죽 웃으며 나가는 발걸음조차 당당하다. 그렇다고 질 것이 뻔한 재판정은 기대도 하지 말아야 한다. 나는 찢긴 양복을 앞에 걸어놓고 이리저리 생각에 잠겼다. “어찌 되든 본인의 짓을 증명하면 되는 것이 아닌가.” 논리야 쉽지만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다는 것은 언제나 현실문제다. 나는 곰곰이 생각 끝에 명탐정 ‘셜록 홈스’ 흉내를 내기로 했다. 그렇게 조심스럽게 옷을 관찰하니 양복 안감까지 잘려있어서 옷을 차 문에 걸어놓고 바깥쪽에서 칼로 그은 것이 틀림없었다. 그런 잠시 뒤였다. 그만 나도 모르게 큰소리를 치고 말았다. “옳거니 바로 이것이다.” 드디어 약속했던 날이다. 그는 새 양복을 얻는 기대 때문인지 휘파람을 불며 우리 앞에 나타났다. 그러니 이제부터 창과 방패의 대결이 시작된 셈이다. 이번에는 내가 먼저 너스레를 떨었다. “손님 잠깐 앉으십시오. 양복 찢은 범인을 잡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비닐 포장지에서 범인의 지문을 찾았다는 경찰서 전화가 방금 왔습니다.” 바로 그때였다. 아직 내 말이 채 끝나지도 않았는데 그는 ‘후다닥’ 뒤도 돌아보지 않고 뺑소니치고 있었다. 그야말로 전광석화 같은 재빠름이다. 그러자 모두 “와, 하하하” 하는 큰 웃음보가 합창처럼 터져 나왔다. 처음부터 이 일을 걱정스럽게 보던 우리 직원들이 함께 터트린 웃음이었는데, 그 유쾌한 웃음 속에는 긴 여운이 담겨 있었다. 이걸남 / 수필가문예마당 세탁소 수필 세탁 양복 세탁 기계 양복 안감
2026.04.30. 17:48
태평양 연안 주립공원으로 5일간 캠핑을 다녀왔다. 해안 언덕 위 키 큰 유칼립투스 나무 우거진 캠프 사이트의 풍광이 아름다운 곳이었다. 바다를 바라보면서 아침 먹고, 저녁 준비하면서 바다에 눈길 주고. 세상천지가 나의 정원이 됐다. 해풍에 빛바랜 투박한 목재 캠프 테이블에 휴대용 버너를 올리고 압력냄비에 쌀을 안쳤다. 야외에선 바람에 불길이 흩어지니 빈 물 박스를 거꾸로 엎어 바람막이를 만들었다. 건너편 자리 캠퍼가 수돗가에 물을 받으러 양동이를 흔들며 다가오더니 “하이” 하고 인사를 하고 자기 이름이 “로이”라고 밝힌다. 솔뱅에서 왔단다. 우물쭈물하더니 그가 말했다. 방울뱀을 키우냐고. 깜짝 놀라 “왜 내가 방울뱀을?”이라고 했더니 그가 손가락으로 물 박스를 가리켰다. “소리 나잖아 쉿 쉿 쉿”. 그 말에 나는 빵 터졌다. 압력냄비의 압력 추 돌아가는 소리가 멀리선 방울뱀 소리 같았나 보다. 가까이 와보라고 해서 압력 추 돌아가는 것을 보여줬더니 계면쩍게 웃으며 밥 냄새가 구수하단다. 접시에 갓 지은 윤기 나는 하얀 쌀밥에 소금간하고 참기름, 깨소금 뿌려 조미김과 함께 맛보라고 나눠줬더니 “까만 바다풀에 싸 먹는 밥이 맛있다”고 웃었다. 솔뱅에서 온 아저씨 둘이 앞뒤로 바나나보트를 머리에 뒤집어쓰고 언덕을 내려갔다. 바다에서 종일 놀다 해 질 녘에 토마토같이 빨갛게 익어 돌아와선 살아서 파닥거리는 팔뚝만 한 생선을 나눠줬다. 남편은 신이 났다. 캠프파이어 화덕에 장작을 태워 숯이 되어갈 즈음 생선을 구우니 숯불에 떨어지는 생선 기름 냄새가 고소하다. 소금만 뿌린 구운 생선 맛이 기가 막히다. 솔뱅아저씨들은 중년 남자 다섯에 사춘기 청년도 몇 보였다. “부인들은 어디 계세요?” “처음엔 따라오더니 집에서 여자들끼리 놀겠대요.” 일주일 동안 여자들만의 휴가라서 더 좋아한단다. 청년들은 함께 못 온 친구의 아이들이고, 자기 아들들은 파트타임 일 하느라고 못 왔단다. 아버지 친구들을 삼촌 따라오듯함께 올 수 있는 그들은 공동체 속에 살아서 마음이 안정돼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보기 좋아 보였다. 며칠을 가까이서 지내다 보니 오가며 이야기를 나눴다. 22피트짜리 캠핑 트레일러에 모터홈, 밴 트럭 등 주차된 차량 다섯 대를 보며 캠핑 다닐 준비가 잘 되었다고 했더니 가까이 가서 보면 다 고물 수준이란다. 아버지 친구들이 더는 필요 없게 돼서 거저 얻다시피 다들 한 대씩 장만했고, 재산목록 1호는 오토바이보다 작은 신품 전기 자전거뿐이란다. 잔디밭에 전기 자전거 8대가 누워있다. 한낮에 삼촌과 조카들이 함께 자전거로 씽씽 달리는 모습이 평화롭다. 그들은 솔뱅에서 나고 자라 같은 학교에 다녔고 몇몇은 도시로 나가 부대껴 봤지만 복잡하고 소란스러워 매일 스트레스를 받았다고 했다. 그렇다고 돈이 모이는 것도 아니어서 고향으로 돌아왔단다. 작은 도시 솔뱅에서 사니 생활비도 적게 들고 집과 일터, 생활반경이 모퉁이만 몇 번 돌면 되는 손바닥 안이라 자동차를 탈 일도 많지 않아 웬만한 곳은 자전거로도 충분하다고 했다. 자동차 정비소도 친구가 하고 빵 가게도 철물점도 다 아는 사람이 하니 편리한 점이 많단다. 사는데 많은 돈도 필요하지 않고 서로 잘 아는 사이라 뻐길 일도 없으니 쉬운 일 하면서 적게 벌고 마음 편히 살아서 고향이 좋다고 한다. 하루키의 산문집 ‘링켈한스섬의 오후’에 나오는 소확행이 바로 이들이 사는 삶이 아닐까? 실현 가능한 소소한 일상의 행복. 해가 지고 하늘엔 별이 총총이다. 장작 타는 불꽃을 보는 것도 타닥타닥 옹이가 타는 소리도 듣기 좋다. 라디오에서 빌리 조엘의 피아노맨이 흘러나온다. “오늘 밤 우리에게 노래를 불러주게. 우린 모두 멜로디에 흠뻑 빠질 준비가 돼 있다네‘ 솔뱅아저씨들이 따라 부른다. 박자 음정 다 틀려도 끝까지. 'la la la di da da~~la la di da da dum~~' 나는 좋아하는 빌리 조엘의 노래를 저들처럼 따라부르지 못해 아쉽다. '돌아와요 부산항에'라면 나도 잘 따라 부를 수 있는데. 김정희 / 독자문예마당 로이 수필 방울뱀 소리 전기 자전거 아버지 친구들
2026.04.16. 18:39
어릴 때부터 영화를 좋아했다. 사람 이야기를 다룬 영화에 점점 흥미를 가지게 되었다. 대부분 영화는 감동적이지만 소설처럼 허구다. 올림픽에는 진짜 휴먼스토리가 넘쳐난다. ‘2026년 25회 동계 올림픽(Milano Cortina 2026)’에도 감동적인 사연들이 있었다. 지난 2월 6일 있었던 개막식은 이탈리아 밀라노가 패션의 중심이라는 것을 세계에 알리는 데 손색이 없었다. 참가국 93개국, 빙상종목은 밀라노에서, 나머지 종목은 코르티나와 그 주변 지역에서 동시에 진행되었다. 나는 매일 저녁 8시부터 TV 채널을 올림픽 경기에 맞춰 놓았다. 경기를 보느라 다른 일을 미룰 정도였다. 올림픽 중계 채널에서는 각 종목에 출전할 메달 후보 선수들을 상세히 보도했다. 본선 경기를 앞둔 며칠 전부터 TV 화면을 통해 차곡차곡 이 순간을 준비한 그들의 긴 여정을 시청자들에게 알리는 것이다. 특별한 사연들이다. 이들의 고생담은 다음 단계가 어떻게 펼쳐질지 궁금함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이번에도 놀라운 사건들이 있었다. 브라질 스키 선수가 브라질 최초의 동계 올림픽 금메달을 따냈다. 브라질은 물론 주변의 열대 나라들도 삼바 축제에 빠졌다. 또 사상 처음으로 일본 남녀 혼성 피겨 스케이트 팀이 금메달을 땄다. 그런데 파트너 남자 선수의 눈이 사시(斜視)였다. 카메라에 잡힌 그의 눈동자는 평행이 아니었다. 금메달이 확정되자 그는 다른 선수보다 더 많은 눈물을 흘렸다. 내가 사람 이야기에 감격하고 눈을 떼지 못하는 이유다. 선수가 되기까지, 메달을 따기까지, 상상할 수 없는 부담감을 뛰어넘은 그들의 도전정신은 정말 놀랍다. 거기에는 가족의 따뜻한 사랑과 격려가 함께 있었다. 유난히 내 시선을 끈 선수가 있었다. 바로 미국 봅슬레이 대표선수 일라나 마이어스 테일러다. 전에 나는 봅슬레이는 물론 그녀에 대해 아는 것이 없었다. 그녀는 내가 사는 캘리포니아주 오션사이드에서 태어나 조지아주 더그라스빌이라는 곳에서 자랐다. 프로 축구선수였던 아버지의 영향으로 일찍부터 운동을 시작했다고 한다. 일라나는 2007년부터 올림픽에 출전해 메달을 땄지만 금메달은 없었다. 방송에서는 그녀가 이번에는 금메달을 거머쥘 것인가를 조명하고 있었다. 그녀의 경기가 시작되기 전날, 그녀의 일상이 TV 화면을 통해 전국에 소개되었다. 올해 마흔한 살인 그녀에게 다섯 살 난 아들 니코와 세 살인 노아, 두 아들이 있었다. 화면에 비친 아이들은 엄마의 메달들을 목에 걸며 놀고 있었다. 일라나가 옆에서 따뜻한 눈길로 아이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두 아이가 그녀와 수화로 대화를 시작했다. 순간 가슴이 쿵 하고 내려앉는 것 같았다. 일라나는 세 살, 다섯 살 된 아이들이 있기는 좀 늦은 감이 있어 보였다. 그녀는 2014년, 코치이자 동료 봅슬레이 선수인 닉 테일러와 결혼했다. 7년 후 첫아들이 장애를 가지고 태어났다. 그런데 둘째도 같은 장애를 가졌다. 일라나는 독실한 기독교인이라고 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녀에게 말 못하는 청각장애를 가진 아들을, 하나도 아닌 둘을 안겨주었다. 그녀를 대신해 내가 신을 향해 원망을 터뜨렸다. 왜 이런 가혹한 일이 세상에 존재하느냐고 하늘을 향해 소리라도 치고 싶었다. 그런데, 그런 와중에 화면 속 아이들은 웃고 있었다. 고개를 들고 엄마의 얼굴을 바라보며 아이들이 손가락으로 엄마와 소통하고 있었다. 소리는 없었다. 서로를 바라보는 따뜻한 눈빛만 있었다. 다음 날 아침 그녀의 소식이 전해졌다. 그녀가 금메달을 따냈단다. 나는 그녀의 경기를 보기 위해 일찌감치 저녁을 먹고 TV 앞에 앉았다. 그녀에게 축하를 보내야 했다. 그녀의 경기가 시작되었다. 얼음 트랙의 전체 길이는 1445m, 시속 150km를 넘나드는 속력으로 봅슬레이가 달렸다. 메달은 0.01 초의 간격으로 금과 은으로 달라진다. 경기가 끝났다. 그녀가 금메달을 획득했다는 소식이 전광판에 떴을 때, 그녀는 아이들을 끌어안고 환호했다. 한 여성이 달려와 그녀와 아이들을 끌어안았다.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러내렸다. 금메달을 목에 건 일라나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남편, 그리고 두 아들과 자신의 아이들을 보살피는 유모, 메이시에게 영광을 돌린다고. 일라나와 메이시에게 카메라 플래시 세례가 쏟아졌다. 바쁜 선수 생활을 하는 그녀가 아이들을 맡길 믿을만한 유모를 찾는 일은 쉽지 않았을 것이다. 직업을 가지고 있는 엄마들의 어려움이다. 청각장애를 가진 아이들과 엄마의 무거운 마음을 유모 메이시가 헤아렸으리라는 것을 짐작하고도 남는다. 나는 두 여자의 끈끈한 관계를, 서로를 향한 사랑과 신뢰를 느꼈다. 그들이 함께 아이들을 돌보았을 힘든 세월을 그려 볼 수 있었다. 누구의 인생이든 가장 빛나는 순간이 있다. 별처럼 ‘반짝’하는 순간이. 봅슬레이 미국 대표선수, 일라나 마이어스 테일러는 2026년 동계 올림픽에서 생애 처음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오랫동안 기다렸던 그녀만의 빛나는 순간이었다. 그녀가 빛을 발할 때 나는 우연히 그 자리에 있었다. 어떤 엄마에게 아낌없는 갈채를 보낸 순간을 나 또한 잊지 못할 것이다. 마야 정 / 수필가문예마당 수필 봅슬레이 대표선수 올림픽 경기 동계 올림픽
2026.04.09. 18:23
인천공항 출국 게이트 밖에 눈이 내린다. 3층 출국장 끝, 대형 유리창 밖 하늘에 흰 눈발이 분분히 부딪혀 흩어진다. K와 걷던 이화동 골목길에 내리던 눈발과 닮았다는 생각을 한다. 아니 그 길에서 찾아 들어간 어느 찻집 유리창에 부서지던 그 눈발이다. 며칠 전 동창 모임에서 K가 캐나다 토론토에서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들었다. “탑승객 여러분, 눈 때문에 탑승이 지연되겠습니다.” 탑승객들은 별 동요 없이 눈 내리는 창밖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다. 봄가을에만 찾던 한국을 처음으로 초겨울에 갔다. 서울의 멋진 설경을 기대했지만 11월이 다 가도록 눈 소식이 없더니 떠나는 오늘 새벽부터 눈이 내린다. 서울에서의 마지막 날 내리는 첫눈! ‘눈은 푹푹 날리고 나는 혼자 쓸쓸히 앉아 소주를 마신다. 소주를 마시며 생각한다. 나타샤와 나는 눈이 푹푹 쌓이는 밤, 흰 당나귀를 타고 시골로 가자. 마가리로 가자.’ 백석이 나타샤와 가려고 했던 마가리는 어디쯤일까. 대학에 입학하던 해, 과 신입생 오리엔테이션에서 K를 처음 만났다. 전공과 교양 과목 여러 강의를 함께 들었지만 마주칠 때마다 서로 목례만 하고 지나치곤 했다. 1학년을 마치고 K는 소문도 없이 사라졌다. 군대에 갔다고 했다. 몇 마디 나눠 본 적도 없는데 강의실이 텅 빈 것 같았다. 다시 개강하고 교정의 개나리 가지마다 노란 봉오리가 막 터질 무렵, 학교로 보내온 그의 편지를 받았다. 첫 휴가를 기다린다고. 무척 보고 싶다고. 휴가 중 많은 시간을 함께하고 싶다고 했다. 3학년 가을 학기가 시작되어 교정의 단풍나무잎이 조금씩 붉어지기 시작할 때 K는 학교로 돌아왔다. 한 번 끊긴 지식의 광맥을 다시 이어가기가 쉽지 않은 듯 했지만 그는 시간을 내어 나와 자주 만났다. ‘사랑하는 친구들이여, 내가 죽은 후에 내 무덤가에 한 그루 버드나무를 심어주오. 그 부드러운 낙엽들과 내가 잠든 땅 위의 가벼운 그늘을 나는 사랑할 것이오.’ 알프레드 뮈세의 에피타프(Epitaph, 묘비명)를 주고받으며 먼 훗날 파리 페르 라셰즈에 있는 그의 무덤에 함께 가기로 약속했다. 도서실에서, 늦가을 오후의 교정을 걸으며 우리의 학문과 사랑은 익어 갔다. 졸업하고 도미 준비로 바쁜 날들을 보내는 동안 그도 졸업 후의 거취와 장래 문제를 고민하며 자주 만나지 못하는 사이, 빠르게 날들이 지나갔고 이곳 대학원 개강에 맞춰 나는 도미했다. 시간이 흘러 K도 졸업했고 그 얼마 후, 그는 파리로 유학을 떠난다는 소식을 보내왔다. 기숙사 창문으로 보이는 샌타모니카 바다에 낙조가 내려앉고 있었다. 그를 기다렸던가. 한국 바다와 닿아 있는 그 바다를 그 저녁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몇 년이 지난 후, 그가 프랑스 여성과 결혼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여러 해가 지난 어느 날, 뜻밖에 그의 전화를 받았다. 캐나다 밴쿠버로 이주했다고 한다. 반가웠다. 세월이 많이 흘렀어도 우리는 서먹했던 것도 잠시, 어제인 듯 친밀하게 대화를 나눴다. 그동안 지내 온 얘기, 친구들 소식, 미국과 프랑스, 캐나다의 역사와 현재 상황 등 긴 대화를 이어갔지만, 대화 가운데 이미 뮈세나 아폴리네르는 없었다. 그는 유럽의 진보 정권들에 염증을 느끼고 프랑스에 대한 환상도 많이 옅어진 듯했다. 우리 대화는 자주 끊기고 때로는 의견 충돌로 말다툼하기도 했다. 그는 곧 있을 미국 대선에서 민주당이 집권하면 캘리포니아 쪽 태평양은 쳐다보지도 않을 것이고 나를 보러 LA로 내려오려던 계획도 취소한다고 했다. “우린 만나기 어렵겠네. 누가 대통령이 되든 캘리포니아는 민주당 텃밭이거든. 나는 심지어 투표도 하지 않아. 내가 어느 후보를 선택하든 캘리포니아는 민주당이 가져가니까.” “와이프가 언어 문제로 많이 힘들어해. 자꾸 토론토로 옮겨 가자고 하네. 그쪽은 프랑스어가 더 많이 통용되니까.” 언제부터였던가, 어렴풋이 너의 신변에 이상이 생긴 듯한 느낌이 들었어. 토론토로 이주한 후부터 연락이 뜸해졌고 그 후, 너의 와병 소식을 풍문으로 들었지. K, 너는 또 홀연히 가 버렸네. 통보도 없이, 이건 반칙이야, 세 번째의. 처음 입대했을 때, 결혼했을 때 그리고 이번까지. ‘그리운 K, 세상은 어수선해. 대통령이 이웃의 동맹국을 미국의 51번째 주가 되라고 하고 그 총리를 ’거버너 아무개‘라고 불러서 놀라는 중이야. 너희 총리에 대한 우리 대통령의 무례를 어떻게 설명할까. 한국의 대통령이 낙마한 다음 날부터 이곳에서도 대통령 반대 시위가 시작됐어. 한국 사태에 고무된 것일까, 그러나 미국은 잘못이 명백하게 밝혀진 고작 한 사람, 닉슨 대통령을 아주 점잖게 물러나게 한 미미한(?) 경력밖에 없지. 그에 비해 한국은 대통령을 외국으로 추방해 버리고 총탄으로 쓰러뜨리고 바위에서 뛰어 내리도록 코너로 몰아가고 줄줄이 감옥에 보내 버리고 5년 임기는 간데없이 2년이 지나면 탄핵해 버리는 대단한 민족이지. 진보는 진군하고 있고 보수는 보푸라기처럼 흩어졌어. 진보는 진행 중이고 보수는 보세 창고에 보관 중이야. 세상이 바뀌니까 우리 친구들도 당당해졌어. 오랜 세월 동안 간헐적으로 진보 인사들의 글을 소개하고 조심스레 동기들의 반응을 살피던 P가 며칠 전, 뜨뜻미지근한 친구들에게 강펀치를 날렸어. “우리는 S대 출신이고 4·19 데모에도 참여했다. 노인이 되면서 보수가 되는 것은 자기 재교육이 미진했다는 증거다”라고. 우리가 4·19에 참여했던 것이 어떤 이데올로기에 경도되어서였던가? 오로지 독재에 대한 저항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때부터 진보도 보수도 아니었던 나는, 그러니까 노인이 되면서 자기 재교육이 미진해진 것이 아니고 애초에 미진했던 존재네. 지금까지 그렇듯 분명한 진영 논리를 구사하는 노인들이 신기해. 이 나이까지 그토록 명료한 사고를 할 수 있는 친구들이 한편으로는 고맙고.’ 서울을 떠나던 날, 비행기에 탑승한 후에도 세 시간 가까이 더 기내에 갇혀 있었다. 한 대가 빠져나가면 그새 활주로에 쌓인 눈을 다시 쓸어 내고 나서야 다음 비행기가 뜰 수 있었다. 활주로 옆에 차례를 기다리는 여러 나라의 비행기가 장사진을 쳤다. 비행기에 갇힌 지 두 시간쯤 지나자, 불문율을 깨고 승객들이 자리에서 일어나서 기내를 활보하기 시작했다. 여기저기서 스트레칭을 하고 커피도 심지어 라면도 주문했다. 떠나 온 설국이 그립다. 떠나보낸 건 모두 그리워. K도 고국도 그리고 우리의 젊음도. 박 유니스 / 수필가문예마당 설국 수필 프랑스 캐나다 캐나다 토론토 한국 바다
2026.03.19. 19:32
작년 연말, 카카오톡이 업데이트되면서 내 생일이 1월 1일로 잘못 바뀐 모양이다. 새해 첫날, 신년 인사와 함께 뜻밖의 생일 축하 메시지가 잇따라 도착했다. “새해 첫날 태어났으면 매스컴도 탔겠네요.” 그렇게 말하며 신기해하는 이도 있었다. 내 진짜 생일은 신록이 눈부신 오월이다. “오늘 제 생일 아니에요.” 웃으며 고마운 마음을 담아 일일이 답장을 보냈다. 어느새 나이테가 늘듯, 숫자가 더해지는 것이 그리 달갑지 않은 나이가 되었다. 세월이 쌓일수록 여러 의미를 덧입히게 되니, 예전의 기대와 설렘보다 왠지 서글픔이 먼저 다가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축하 메시지를 읽는 동안만큼은 인연이 남긴 따스함이 잔잔히 퍼져왔다. 누군가의 기억 속에 아직 지워지지 않은 이름으로 남아 있다는 사실, 그 사소한 확인만으로도 희미해졌던 내 존재의 테두리가 또렷해지는 듯했다. 오류가 만들어 낸 엉뚱한 생일 덕분인지, 올해는 축하받을 일이 많으려나 하는 작은 기대만으로도 마음이 몽글해진다. 살다 보면 뜻하지 않은 순간을 마주할 때가 있다. 어떤 날은 황당한 사고로 낭패를 보기도 하고, 또 어떤 날은 전혀 계산되지 않은 감동이 불쑥 다가오기도 한다. 얼마 전, 트레이더 조(Trader Joe's)에서 우유와 치즈 등 유제품 몇 가지를 들고 계산대 앞에 섰을 때였다. 낯선 히스패닉 할머니가 다가오더니 내 물건값을 대신 지불해 주겠다는 것이었다. 손사래를 치며 괜찮다고 거절했지만, 영어를 못하는 그녀와 스페인어를 전혀 알아듣지 못하는 나는 끝내 소통하지 못했다. 다행히 히스패닉 캐셔가 통역을 도와주었는데, 그녀의 대답은 의외로 단순했다. “이유는 없어요. 그냥 그러고 싶어요.” 내 뒤로 줄 서 있던 손님들도 황당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쩔 줄 몰라 당황하는 나에게 캐셔가 말했다. “기다리는 사람이 많으니 그냥 받으세요.” 더 지체할 수 없어 나는 “그라시아스(Gracias)”라며 감사의 인사를 했다. 그녀는 환한 얼굴로 손을 흔들며 사라졌다. 큰 금액은 아니었지만 그녀가 왜 처음 본 나에게 그런 호의를 베풀었는지는 여전히 물음표로 남아 있다. 혹시 한국 사람에게 크게 신세를 진 적이 있었을까. 그저 짐작만 해 볼 뿐이다. 지인 댁을 방문하러 가던 길이었다. 과일 한 박스를 사서 계산을 마치고 출구를 나서는데, 전도지를 나눠 주던 젊은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예수님을 믿으세요? 저희 교회에 한 번 방문해 주세요.” 건네받은 초대장에 적힌 교회 이름과 위치를 보니, 개척교회 목사님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영혼 구원이라는 사명을 품고 선택한 길이겠지만, 홀로 노방전도를 하고 있는 그를 그냥 지나칠 수는 없었다. “목사님, 수고가 많으십니다. 저는 교회에 다니고 있어요.” 나는 카트에 실린 과일 박스를 불쑥 내밀었다. 뜻밖의 행동에 그는 잠시 망설이다가, “감사합니다. 축복합니다.” 하며 마음을 받아 주었다. 그 순간, 몇 달 전 누군가에게 받았던 호의가 문득 떠올랐다. 나 역시 특별한 이유는 없었다. 아마도 기독교인으로서 목회자를 향한 존경의 마음이었을 것이다. 우리는 관계를 맺는 일에서도 '득과 실'을 먼저 계산한다. 이익이 되지 않거나 감정 소모가 클 것 같은 관계는 애초에 걸러내는 것이 현명하다고 믿었다. 상처받지 않기 위해 마음의 문을 닫고, 손해 보지 않기 위해 거리를 조절하는 일은 당연하게 여겼다. 그렇게 효율과 손익의 잣대는 인간의 마음마저 저울 위에 올려놓는다. 이름 모를 히스패닉 할머니의 호의에도, 목사님께 건넨 과일 박스 한 상자에도 어떤 계산도 없었다. 만약 그 순간 서로의 이해관계를 먼저 따졌더라면, 낯선 이가 건넨 손길을 선뜻 받아들이지 못했을 것이다. 인생은 뜻한 대로 흘러가지 않지만, 계산 없는 마음은 오래도록 빛으로 남는다. 이유 없는 온기가 이 삭막한 세상의 온도를 아주 조금, 1도쯤은 올려놓지 않았을까. 김윤희 / 수필가문예마당 온도 수필 히스패닉 할머니 히스패닉 캐셔 과일 박스
2026.03.12. 21:19
나의 살던 고향은 경기도 파주시 한 시골 마을. 집 뒤에는 심학산, 앞에는 한강 하구가 있다. 물건너 동네가 강물에 거꾸로 비춰 흐르는 곳에서 해방 두 달 전 태어났다. 비록 일제강점기에 태어나긴 했지만 일본제국의 만행은 자라면서 부모님을 비롯해 주위 어른들로부터 들은 이야기가 전부다. 초등학생이 되어서야 많은 친척이 있는 것도 알게 되었고 방학이 되면 친척들 방문하는 것 또한 늘 기다려지던 시기다. 아직도 많은 추억이 남아 있는 곳은 큰 고모님 댁. 큰 고모님은 강 건너로 출가하셨다. 그래서 고모님 댁을 가려면 언제나 깊고 푸른 강을 건너야 했다. 어머님은 친척 집 다니러 갈 땐 언제나 보호자요, 가이드 역할을 해주셨다. 그런 탓에 어머님과 함께 하지 않는 고모님 댁 방문은 생각할 수 없는 일이었다. 당시 친척집 방문은 지금처럼 전화로 약소을 하고 가는 것이 아니고 대부분 무작정 가는 것이었다. 혹시 큰 일(결혼, 초상, 제사, 사고)로 가는 경우엔 미리 연락을 하거나 어머님의 명석한 기억력에 의존했다. 그러던 어느날 어머님과 함께 법곶 나루터를 향해 십여리 길을 걸어 가니 강을 건너려는 몇몇 사람만 기다릴 뿐, 정작 배와 뱃사공은 보이지 않았다. 한참을 기다리니 강 건너편에서 조각배 한 척이 오는 모습이 보였고, 그 후 1시간이나 지나서야 6,7명의 손님을 태운 나룻배가 힘겹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뱃사공은 한잔했는지 구슬픈 노랫가락으로 빠르게 흐르는 강물을 토닥이며 노를 저었다. 그렇게 강을 건너고 다시 십여리를 더 걸어 마침내 고모님 댁에 도착했다. 강에는 또 다른 의미가 있다. 이 땅에 태어나는 모든 사람들이 반드시 건너야 하는 ‘인생의 강(the river of life)’, 혹은 ‘영적 죄의 강(the spiritual sin river)’이다. 불교에서는 고달픈 인생 길을 고해(苦海), 즉 ‘깊은 바다(deep sea)’에 비유한다. 그 강은 어떤 강이고 왜 건너야 하는지, 그리고 그 강을 건너 어디로 가야 하는지, 그 목적지(예수 그리스도)를 기록하고 안내하는 책이 바로 성경이다. 성경이 말하는 ‘인생의 강’ 혹은 ‘영적 죄의 강’ 은 고통과 괴로움의 강, 아픔과 슬픔의 강, 가난과 빈곤의 강, 고뇌와 절망의 강, 탐욕과 탐심의 강, 경쟁심과 이기심의 강, 사망과 죽음의 강 등으로 묘사된다. 그럼 왜 그 강을 건너야 할까? 모든 사람은 본인의 ‘자유의지(free will)’와 상관없이 그 죄의 강에서 태어난다. 아담과 하와는 본인들의 ‘자유의지’로 선악과를 택했다고 하는데 그들의 후손은 자신의 ‘자유의지’와 상관없이 죄악의 강에서 태어나 그 강에서 살다가 죽는다는 것이 성경을 연구하는 많은 이들의 설명이다. 그 강을 건너주겠다고 하는 미국 선교사 한 분을 60여년 전인 1965년 5월 16일, 서울 종로예식장에서 만났다. 그때 들려준 전도설교 내용의 일부를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 그는 슬픔과 아픔을 기쁨으로, 궁핍을 부요함으로, 절망을 희망으로, 역경과 수고를 승리로, 탐욕에서 자족함으로, 이기심에서 이타심으로, 사망의 길에서 생명의 길로 또는 영생의 길로 인도해 주실 분(예수 그리스도)을 만나기 위해 그 강을 건너야 한다고 했다. 그런데 언제 그 강을 건너 예수 그리스도(목적지)와(에) 상봉(도착)할 수 있을까? 그 미국 선교사는 내가 ‘영적 죄의 강’을 건너는데 도움을 주는 ‘영적 배(the spiritual boat)’의 선장이었다. 그 후 선장이 바뀌어 한국분을 만났다. 그런데 지난 60여년 간 내가 탄 배(교회)의 많은 선장들은 배 위로 승선하는 사람들에게만 관심이 있지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예수(히12:2)”님을 만나기 위해 배에서 내리려는 사람들에겐 관심이 없는 것 같았다. 많은 교리와 자의적 성경 해석을 통해 배에서 내리면 안된다고 가르치고 심지어 경고까지 한다. 아마도 강을 건너는 목적을 모르고 배를 운영하는 것 같다. 우리 항해의 목적이 ‘영적 배’를 타고 ‘죄의 강’을 건너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는 일일텐데... 지금 내가 탄 배(교회)의 선장은 나를 그 목적지까지 인도해 줄 수 있을까? 언제,이 고달픈 ‘죄의 강’ 을 건너 예수 그리스도를 만날 수 있을까? 지금이라도 배에서 뛰어내려 니고데모가 그랬던 것처럼 강 건너 저 ‘변화산(The Mount of the Transfiguration)’ 기슭에서 기다리고 있을 예수님을 찾아가 만나고 싶다. 어릴 적 뱃전에 올라 바라보던 강 건너 고향 마을은 아직도 나를 기다고 있을까? 바카빌(Vacaville)의 어둔 밤이 고요히 깊어 간다. 남영한 / 은퇴 치과 의사문예마당 인생 수필 예수 그리스 어느날 어머님과 건너 예수
2026.03.05. 19:10
새벽은 아름답다. 캄캄하고 신비스럽다. 내가 사는 로스앤젤레스의 겨울 새벽은 춥지 않고 선선하다. 정적을 깨는 아침 새들의 대화가 시작되려면 어둠이 얇아진 후까지 좀 기다려야 한다. 물론 야밤에 노래하는 부엉이도 있고, 신경질적으로 소리 질러 소견을 전달하는 새가 있기는 하지만, 새벽은 침묵하고 있다. 오늘 아침의 하늘은 어둠 속에 짙푸른 가운데, 반달과 오리온 좌가 총기(聰氣) 바랜 흐린 빛을 보내준다. 나는 새벽에 관한 것들에 익숙하다. 새벽 시간, 새벽 소리, 새벽바람, 새벽하늘, 새벽 별자리, 새벽을 열며 일하러 가는 사람들, 그들의 헤드라이트 행렬, 새벽에 올리는 분심(分心)으로 갈리어진 나의 묵주기도까지…. 그리고 새벽에 일하는 나 자신에도 익숙하다. 나는 새벽에 글을 쓰고 많은 행정적인 일도 한다. 글을 쓰기 전에 제일 먼저 하는 일은 앞마당을 걸으면서 묵주기도 (?珠祈禱, Rosary)를 하는 것이다. 묵주기도란 불교에서 염주를 돌리며 하는 기도처럼 구슬을 이용해서 예수의 생애를 기억하며 주의 기도, 성모송, 영광송을 반복하면서 묵상하는 방식의 기도이다. 되풀이하는 기도라, 잡념이 들기 십상이다. 이 기도는 가톨릭 신자들이 많이 애호하는 기도이다. 이 기도 방식의 원천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는데, 가장 많이 믿고 있는 내용은 이렇다. 글을 읽을 줄 모르던 초기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성서를 읽지 못했고, 따라서 성서에 준 한 기도를 할 수 없었다. 그래서 단순하고 간단한 기도를 반복해서 하는 방식을 전수하게 되었다고 한다. 한국에서는 묵주기도를 ‘구슬을 굴리면서 묵상하는 기도’라는 뜻에서 그리 부르고, 서구권에서는 ‘로자리(rosary), 글쓴이 주: rosarium(장미라는 뜻의 라틴어)’이라고 한다. 이 ‘로자리’에 대한 설도 많다. 예수의 생모인 성모 마리아를 아름답고 순수한 장미로 표현한 것에서 나왔다는 설이 있다. 또 종교탄압으로 그리스도교인들을 공공장소, 주로 콜로세움 같은 운동장에서 처형하면서 생기게 된 것이라고도 한다. 굶은 사자를 풀어 신자들이 잡혀서 먹히도록 했는데, 그들은 머리에 장미로 만든 화관을 쓰고 광장으로 행진했다고 한다. 인체는 먹히고 장미 화관은 남겼다는 것이다. 새벽에 일을 많이 하지만, 나보다 더 일찍 하루를 시작하는 사람들이 주위에 많다. 새벽에 일터로 향해 가는 사람들도 그들 중 하나다. 우리 집 앞마당에서는 캘리포니아의 중요한 동맥 역할을 하는 405번 프리웨이가 약 반 마일 정도 보인다. 405 프리웨이는 5번에서 파생한 고속도로로, 북서쪽을 커버해 주는 약 72마일 구간이다. 미국 내에서 가장 많은 차가 오가는 고속도로로 북쪽 실마(Sylmar)와 남쪽 엘토로 와이(El Toro Y) 사이를 연결한다. 이 길을 따라 깜깜한 새벽에, 남쪽으로, 북쪽으로 헤드라이트, 백라이트들이 줄지어 움직인다. 일터를 향해 가는 새벽 사람들이다. 또 앞마당에는 이미 신문들이 도착해 있다. 신문 배달원은 도대체 몇 시에 우리 집에 다녀간 것일까? 그는 신문을 배달하고 또 다른 직장을 향해 서둘러 갔을지도 모른다. 신문 배달로 버는 돈만으로는 생활이 어렵다는 걸 누구나 안다. 신문 배달원뿐만 아니라, 나와 남편이 젊었을 때 그랬던 것처럼, 큰딸도 어둠을 헤치고 환자를 돌보러 병원으로 향한다. 또 이런 시간에, 한국어 진흥재단 사무총장은 교회에 가서 새벽기도를 올리고 있을 것이다. 우리 모두를 위해서. 철이 없고 세상을 몰랐던 나는 처음으로 ‘산다는 것은, 일(노동)이나 공부를 떠나서 엄숙한 것이다…’라는 삶의 심오한 뜻을 깨달았던 때가 있었다. 나를 일깨웠던 것은 가난도 아니고, 전쟁의 상흔도 아니었다. 당시 나는 10대 끄트머리의 소녀시기를 지나 여성으로 성숙해지는 길에 첫발을 내디뎠던 때였다. 사르트르, 톨스토이, 카뮈 등등의 꽤 어두운 작가들의 글을 읽고 친구들과 ‘개똥철학’을 토론하던 때이기도 했다. 사회의 부조리함, 어두움을 논하던 나의 눈에 강의실 곳곳을 열심히, 성실하게 닦고 있던 청소부 아저씨의 맑고, 진지하고, 겸손하고 평화로운 얼굴이 들어왔다. 그리고 그 아저씨의 존재가 나를 일깨웠던 것이었다. 가난과 노동과 그로부터 받는 엄청난 긍정적이고 부정적인 대가는 우리의 행복이나 희망과는 별 개라는 것을 깨달았다고나 할까? 나는 ‘노동의 숭고함’이라는 사치스럽고 아이러니한 문구를 기억한다. ‘일’과 ‘노동’을 구분하는 현대 사회이다. 산업혁명 (18세기 후반)이후, 당시 6억이었던 세계 인구는 2024년에 82억으로 늘었고, 세계 총생산은 199배가 늘어난 173조 달러라고 한다. 빈부의 차이는 극(極)에 이르렀다. 그 중년의 청소부 아저씨는 노동의 숭고함에 신경을 쓰며 일했을까? 자식들을 키우느라 수고하셨던 아버지, 어머니들은 그 ‘노동의 숭고함’이라는 이상을 갖고 일을 하고, 품을 팔지는 않으셨을 것이다. 누군가의 말대로, 우리는 노동을 정당화하고 미화하고 있을지 모른다. 새벽을 가르는 현대인들처럼. 류모니카, M.D. 미국 종양방사선학 전문의·미국 한국어진흥재단 명예이사장문예마당 새벽 수필 소리 새벽바람 새벽 시간 새벽 별자리
2026.02.19. 19:10
2026년 병오년(丙午年)이다. 60년 만에 돌아오는 화(火)의 년(年)으로 ‘태양과 말’의 해라고 한다. 갑·을·병·정…등 10개의 천간(天干)과 자·축·인·묘…같은 12개의 십이지(十二支)를 조합해서 만든 60개의 단위가 육십갑자(六十甲子)인데, 여기에 근거한 새해에 대한 해석은 두 종류의 불이 만나는 강렬한 불의 한 해로 기대된다는 것이다. 좋은 의미에서 보면, 빠른 속도로 변화가 이루어지는 시대가 될 수 있다는 뜻이란다. 나는 신문이나 잡지에서 ‘오늘의 운세’라던가, ‘한해의 기(氣)’ 같은 칼럼이 흥미로워서 읽곤 하지만, 사실 점성학이나 점술학에는 문외한이다. 들여다보면, 육십갑자는 우리 한민족에게 익숙한 풍습인 것 같다. 지금까지도 분리되지도 제거되지도 않으면서 우리 몸 깊숙이 뼛속까지 배어 있다. 그래서 그런지 육십갑자 예상치는 어떤 이들에는 간접적으로, 또 어떤 이들에게는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치고 있어 보인다. 또 나처럼 상관하지 않는 그룹도 있다. 육십갑자에 대한 지식은 없지만, 을사년(乙巳年)이었던 2025년 연초에 공개되었던 예측이 어느 정도는 맞았던 것 같다. 그저 우연일 수도 있겠다. 변화해 왔던 세상을 볼 수 있도록 한 을사년이었다면, 어긋났던 예상은 아니었다는 뜻이다. 나의 모국 한국은 세계 무역전쟁, 산불, 윤석열 대통령 탄핵, 울산화력발전소 붕괴 같은 어마어마한 일들을 겪었다. 디아스포라 미국인으로 살고 있는 나에게도 여러 이벤트가 있었다. 새해를 시작하면서 캘리포니아 바닷가에 자리한 도시 퍼시픽 팰리세이즈에 불이 나면서, LA는 혼돈에 빠졌다. 이 불과 상관없이 이곳에서 동쪽으로 주행거리 약 32마일 떨어져 있는 샌게이브리얼(San Gabriel) 밸리에도 산불이 났다. 동시다발적 산불이었다. 샌타애나 바람이 불씨를 빠른 속도로 주변 여러 곳으로 퍼뜨리었다. 우리 동네 같은 길에 사는 가정들 모두가 경찰과 주방위군이 지키는 가운데 대피 명령에 따라서 모든 것을 두고, 집을 떠났다. 화재 영향을 받지 않은 다른 LA 지역의 호텔 방들은 이미 만원이었고, 같은 동네에 사는 조카도 갈 곳이 없었다. 우리들은 자동차로 13시간 걸리는 약 800마일 떨어져 있는 뉴멕시코 큰 딸네로 향했다. 이때 ‘우리 삶에 진정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 고심해 보았다. 아무것도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렇게 시작된 2025년이었다. 산불이 잦아들고, 귀가하고 얼마 안 있어 법원에서 오라는 통고를 받았다. 미국의 시민은 배심원으로 소환이 되었을 때 이 의무를 수행해야 한다. 평소에 배심원 통보를 받은 적이 여러 번 있었어도 채택되지 않고 지나갔는데, 이번에는 좋아해야 할지, 재수 없다고 불평해야 할지 배심원으로 뽑히게 되었다. 법정에 두 달 반 동안 금요일만 빼고, 매일 출근하였다. 일곱 살짜리 여아 살인 사건으로, 피고는 생모와 생모의 남자 친구 두 명이었다. 배심원들은 검사가 제출한 영상과 증빙서류를 이해하여야 했다. 증인들의 진술을 들었다. 드라마에서 보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 일곱 살…일 년을 365일로 칠 때, 이 아이는 겨우 2555일을 이 땅에서 숨 쉬었다. 그동안, 매 맞고, 벗겨진 채로, 욕실에 감금되고, 콧구멍을 통해서 기도의 반대 방향으로 물과 스리라차 소스(매운 고추 소스)로 고문을 당했다. 나는 지금도 밤잠을 설칠 때가 많다. 그리고 스리라차 양념을 먹지 않는다. 육십갑자는 육갑, 60년마다 반복되는 사이클이므로, 5000년 한국 역사에는 을사년이 많았을 게다. 근대사에서 가장 심각하고 우울하였던 사건은 120 년 전 1905년에 맺었던 일본과의 을사늑약으로 한국의 외교권이 일본에 박탈당했던 사건이다. 일제 강점기의 시작이었다. 이보다 120년 전인 1785년에는 ‘명례방 사건’이라고도 불리는 ‘을사추조적발(乙巳秋曹摘發)’ 사건이 있었다. 정조 9년 때, 지금의 명동 지역에서 신앙집회를 열던 천주교도들이 적발된 것으로 조선의 성리학적 윤리 체계를 파괴한다는 죄목으로 신자들이 처형당했던 일이다. 이 사건이 벌어진 113년 후에 이 자리에 한국 천주교의 대표적이며 상징적인 명동 성당이 건립되었다. 만약 이때, 조선이 서학을 받아들이고, 개혁에 앞장섰다면, 한국의 역사는 많이 달라지지 않았을까. 을사년에 나쁜 일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을사늑약 60년 후인 1965년에는 한일 기본 조약과 월남파병 준비로 경제개발의 본격화가 시작되었다. 내가 대학 입시 준비를 하고 있던 때이었다. 베트남에 파병되어 인천항을 떠나던 젊은 군인 무리 중에, 사촌오빠가 있었고 나는 오빠를 배웅하러 나갔었다. 여러 번에 거쳐 파병된 누계가 32만 명에 달한다고 한다. 이 젊은이 중에는 전사하여 돌아오지 못한 사람들이 5000여 명이고, 1만1000명이 부상하였다고 한다. 어수선하게 시작된 을사년 2025년이었지만, 좋은 일도 많았다. 9년 만에, 나의 두 번째 책을 출판하였다. 이 책의 출판 기념회를 한국에서는 나의 모교 이화여대 의과대학 부속병원 안에 친구의 이름으로 명명된 이영주 홀에서 가졌고, 미국에서는 한국어진흥재단 세종홀에서 가졌다. 또 한국 창원대학에 초대되어 강의도 했다. 이러한 활동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내 삶의 여정에 도반(道伴)의 친지가 함께해 주었기 때문이다. 빠른 속도의 변화를 예상한다는 2026년 병오년은 별 탈 없이 지나가려나. 일 년 후인 2027년 이맘때, 육십갑자의 예측이 어떠했는지 알게 되기를 바란다. 모니카 류 / 미국 종양방사선학 전문의·전한국어 진흥재단 이사장문예마당 별일 수필 육십갑자 예상치 한국 역사 모국 한국
2026.01.22. 18:50
영주권자인 남편은 지금 미국과 한국을 오간다. 영주권자는 6개월 이상 해외에 나가 있을 경우 재입국에 리스크가 크다. 하지만 정당한 이유가 있다면 허가를 받아 최장 2년간 해외에 머물 수가 있다. 최근에 남편이 재입국 허가서를 발급받기 위해 생체 정보 확인차 이민국에 가서 얼굴 사진을 찍었다. 그런데 이민국 직원이 남편의 눈이 작아 동공이 안 보인다며 눈을 크게 뜨라고 했단다. 남편은 크게 떴는데도 몇 번이나 크게 뜨라고 해서 민망했다고 한다. 남편의 눈 크기는 보통 한국 사람과 비슷하다. 나이가 먹으니 눈이 처져서, 그 직원의 눈에는 눈을 뜨지 않은 것처럼 보였던 모양이다. 그가 악의적으로 말한 것은 아니기에 우리는 웃고 말았다. 서양 사람들에게 동양인의 얼굴은 어떻게 보일까. 동양인이 처음 서양인 얼굴을 보면 차이를 못 느낀다. 마찬가지로 서양 사람들은 동양인의 얼굴을 모두 비슷하게 보는 것 같다. 그래서 한국인인지, 중국인인지, 일본 인인지 구별을 못 하고 심지어는 갑과 을을 구별하지 못하기도 한단다. 그런데 서양 사람들 눈에 동양 사람들 눈은 찢어진 것처럼 보이나 보다. 서구 사회에서는 동양인을 조롱하거나 비하하는 인종차별적 표현으로 눈을 찢는 제스처를 한다. 손흥민 선수가 토트넘 시절 인종차별 논란을 겪었다. 관중석의 한 팬이 손흥민을 향해 자신의 눈을 양 옆으로 찢는 제스처를 취했다. 중계화면에 이 모습이 포착돼 영국 소셜미디어에 퍼졌다. 이 관객은 인종차별 행위를 했다는 이유로 3년간 경기장 출입 금지 처분을 받았다. 다음해, 손흥민이 토트넘의 주장으로 있을 때도 인종차별 논란이 있었다. 그가 방송에 출연했을 때였다. 진행자가 ‘손흥민의 유니폼을 구해달라’는 요청을 누구로부터 받았다고 하자 팀동료이자 절친인 벤탄쿠르가 “손흥민 사촌 유니폼을 가져다 줘도 모를 것이다. 손흥민이나 그의 사촌이나 똑같이 생겼다”고 말했다. 동양인은 모두 똑같이 생겼다는, 개성도 매력도 없다는, 인종차별적 인식이 무의식적으로 드러난 발언이었다. 벤탄쿠르는 아차 했는지 즉각 사과했다. 그는 자신의 SNS를 통해 “쏘니, 일어난 모든 일에 미안하다. 그건 나쁜 농담이었다. 절대 널 무시하거나 다치게 하려 한 게 아니라는 걸 알지 않나”라고 했다. 그러나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잉글랜드 축구협회는 벤탄쿠르에게 7경기 출전 정지에 벌금 10만 파운드의 중징계를 내렸다. 얼마 전 아침에 뉴스를 보다가 멈춰 서게 한 사진 한 장이 있었다. 핀란드 미인대회 우승자 사라 자프체가 '중국인과 식사 중'이라는 설명과 함께 SNS에 올린 '눈찢기' 사진 때문이었다. 논란이 일자 현지 정치인들이 그녀를 옹호했다. “내가 자프체다”라며 눈찢기 챌린지를 하는 사진을 올려 논란을 더 키웠다. 자프체는 이후 현지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저녁 식사 중 두통과 눈의 압박감 때문에 무심코 한 행동이었다”며 변명했지만 논란은 가라앉지 않았다. 결국 자프체는 인종차별 논란 끝에 왕관을 박탈당했다. 자프체는 사과문을 통해 “이번 일로 상처받은 모든 분께 사과드린다”며 고개를 숙였다. 뉴스는 짧았지만, 그 사진은 오래 내 마음에 남았다. 아무렇지 않게 올린 웃고 있는 자프체의 사진은, 장난이었는지는 알 수 없다. 정치인들도 무심코 따라 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누군가에게는 웃음이 아니라 큰 상처가 되었을 지도 모른다. 서양사회에서는 인종차별을 개인의 실수로 가볍게 넘기지 않는다. 그들은 어린 시절부터 인종차별이 나쁘다는 사실을 반복해서 배우며 자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시안 인종자별은 여전히 사소한 장난처럼 넘겨버린다. 이솝우화에 '무심코 던진 돌에 개구리가 맞아 죽는다'는 이야기가 있다. 무심히 장난삼아 던지는 말이 당사자에게는 뼈저린 상처로 남을 수 있다. 요즘은 많은 사람들이 돌이 아닌 말과 글로 누군가를 단죄하고 심한 경우 죽음에 이르게 한다. 악성 댓글로 극단적 선택을 한 배우 최진실이 한 예이다. 항상 입장을 바꿔 생각해 봐야겠다. 아시안 인종차별은 전부터 있어 오긴 했지만, 2020년대 초반 '우한'이 코로나 발생지로 알려지자, 중국에 대한 혐오로 더욱 심해졌다. 그 혐오가 중국을 넘어 차츰 아시안 전반에 퍼졌다. 미국에 사는 우리는 일상생활에서 아는 듯 모르는 듯 미묘한 차별을 느낄 때가 종종 있다. 대놓고 미워하지는 않지만 상대를 하나의 개인이 아니라 아시안이라는 틀 속에 넣어 버린다. 어떤 차별은 칭찬의 옷을 입고 다가온다. 예를 들면 “아시안들은 다 공부를 잘하잖아”라는 말 속에는 개인의 노력은 배제한 채, 은근한 비꼼과 거리 두기가 담겨 있다. 인종차별은 분명 잘못된 일이다. 하지만 콤플렉스로 확대해 받아들일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자프체와 벤탄쿠르, 두 사람의 경우를 보고 독자들은 어떤 느낌이 들었는지 모르겠다. 솔직히 나는 그 두 사람이 저지른 단순한 실수라고 생각한다. 그런 정도는 그냥 흘려버리는 관용이랄까, 너그러움이랄까 그런 마음 가짐도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런 해프닝이 생길 때 인종차별 운운하면서 발끈하는 것은 어쩌면 그들의 차별 공격 의도에 우리가 넘어가는 것은 아닐까. 두순자 사건에서 보듯 흑인에 대한 편견과 인종차별이 엄청난 비극을 낳았다는 기억을 갖고 있다. 로드니 킹 사건에서 한인 커뮤니티가 크게 피해를 입은 것도 그런 결과를 낳았다는 것이 중론이다. 우리의 인종차별도 백인들에 못지 않다고 생각한다. 한인사회에서 라티노에 대한 하대도 마찬가지다. 그들에 대한 반말은 일상적인 말투가 됐다. 하다못해 같은 동양인이면서 동남아인에 대한 멸시는 또 어떤가. 이런 인종차별 의식을 극복함으로써 우리에 대한 인종차별적 대우도 극복할 수 있다고 본다. 이제 누가 우리를 향해서 눈찢기 제스처를 하면, 우리도 당당히 눈찢기로 응대하는 여유를 갖자. 배광자 / 수필가문예마당 대응 수필 인종차별 논란 인종차별적 표현 인종차별적 인식
2026.01.15. 18:28
요즘 한국에서는 혼밥을 둘러싼 갈등이 종종 온라인 커뮤니티에 올라와 논란이 일고 있다. 최근 ‘외로움은 팔지 않는다’며 혼밥 손님을 거부하는 식당 안내문이 온라인에서 논쟁을 일으켰다. 한 네티즌은 어느 짜장면집 출입문에 붙어 있던 안내문을 보고 발길을 돌렸다며, 안내문 사진을 온라인 커뮤니티에 올렸다. 사진 속 안내문에는 “혼자서 드실 땐 2인분 값을 쓴다, 2인분을 다 먹는다, 친구를 부른다, 다음에 아내와 온다”라는 문구와 함께 “외로움은 팔지 않습니다. 혼자 오지 마세요”라고 적혀 있었다. 이를 본 네티즌들은 “왜 혼자 먹으러 가는 사람을 외로운 사람으로 치부하는 거냐” “요즘 세상에 혼밥족이 얼마나 많은데 이런 생각을 하나”등의 거센 반응을 보였다고 한다. 나 역시 “외로움은 팔지 않습니다” 라는 말이 처음에는 장난스럽고 좀 생뚱맞게 느껴졌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말이 오랫동안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이에 앞서 지난 여름에는 한 여성 유튜버가 홀로 2인분을 시켜 식사를 하고 있는데 빨리 먹으라고 식당 주인이 면박을 주는 영상이 공개돼 사회적 공분을 일으켰다. 유튜버는 여수의 한 유명 맛집을 방문, 2인분을 주문하고 식사 중이었으나 식당 주인은 “아가씨 하나만 오는 데가 아니거든” “얼른 먹어야 한다, 예약 손님을 앉혀야 하거든” 등 식사를 재촉하는 발언을 했다. 이에 유튜버가 항의 하자 주인은 “고작 2만원 가지고” “그냥 가면 되지 왜 저러는 거야”라고 말하며 면박을 주기도 했다. 며칠 전 남편과 한인타운에 볼일이 있어 나갔다가 점심때가 되어 식당에 들렸다. 아침을 늦게 먹어 1인분만 시켜서 둘이 먹어도 되는데 눈치가 보여 2인분을 시켜서 하나는 집에 가져왔다. 한국도 아니고, 식당 주인이 뭐라고 한 것도 아닌데, 아마도 한국에서의 논란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리라. 외국에서는 업주가 손님을 거부할 권리를 법적으로 인정하기도 한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손님은 왕’이라는 오래된 관념 때문에 손님을 거절하는 일 자체가 금기처럼 여겨진다. 그 식당 주인은 그런 낯선 방식 때문에 온라인에서 불친절로 뭇매를 맞은 것이다. 우리는 오랫동안 ‘식사는 누군가와 함께 한다’는 문화 속에서 살아왔다. 혼밥은 식사라 하지 않았다. 밥상은 밥상머리 교육의 자리였고, 가족간의 대화의 자리였다. 외식은 가족의 특별한 날의 행사이거나 교제의 수단이었다. 지금은 시대가 바뀌었다. 이제는 식당에서 혼자 밥을 먹는 것은 흔한 일이고 누구도 이상하게 보지 않는다. 일반인이나, 직장인, 여행자 등 너무 자연스러운 문화이다. 그저 평범한 풍경일 뿐이다. 그렇지만 묘하게도 우리는 그 자유로운 풍경 속에서 자주 외로움의 그림자를 발견한다. 그래서 짜장면집 식당 주인도 단순히 ‘혼밥은 외로움’으로 단정 지었을 것이다. 식사는 음식보다 누군가와 대화하는 시간일 수도 있다. 군중 속의 고독이라는 말이 있다. 식당 안은 사람들로 붐비고 웃고 떠드는 소리로 가득한데 그 안에서 혼자 밥을 먹고 있는 나는 지금 혼자이다. 손에는 스마트폰이 있고, 메신저 알림은 끊임없이 울린다. 하지만 마음을 터놓고 진정한 대화를 나눌 상대가 앞에 없다. 지금은 1인 가구가 많은 시대다. 통계청에 따르면 한국 1인 가구 비율은 지난해 기준으로 전체 가구의 33%를 훌쩍 넘겼다. 서울에서는 절반 가까운 사람들이 혼자 산다. 혼밥은 더 이상 어색하지 않다. 하지만 스스로 선택한 혼밥이 아니라면, 그건 외로움의 상징이다. 그렇다고 혼자 밥을 먹는다는 사실 자체가 외로움을 뜻하는 건 아니다. 정호승 시인의 시 ‘수선화’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울지 마라 / 외로우니까 사람이다 / 살아간다는 것은 외로움을 견디는 일이다.” 혼자 밥을 먹으며 느끼는 쓸쓸함도, 사람이기에 느끼는 인간의 본성이다. 외로움을 느낀다는 건 마음이 살아 있고 누군가를 그리워한다는 자연스러운 감정이다. 외로움을 인간만의 감정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동물들도 외로움을 느낀다는 연구가 있다. 그들 역시 각자의 방식으로 고독을 견디고 표현한다고 한다. 긴 세월 사람과 함께 살아온 개는 주인이 집을 비우는 시간이 길어지면 우울과 분리불안을 겪고, 코끼리가 짝을 잃으면 그 자리를 떠나지 못하고 몇 날 며칠을 서성인다는 이야기는 유명하다. 고래, 침팬지 같은 사회적 동물도 무리에서 떨어지면 식사량이 줄고 행동이 무기력해지는 변화가 나타난다고 한다. 그런 모습들을 보면 외로움은 인간에게만 주어진 감정이 아니라 사회성을 가진 생명들에게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본능인지도 모르겠다. 요즘 시대를 ‘고독의 시대’라고들 말한다. 영국에서는 아예 ‘외로움 장관’이 있을 정도다. 외로움은 더 이상 개인이 혼자서 조용히 감당해야 하는 감정이 아니라 사회 전체가 다루어야 할 문제로 확장되었다. 외로움은 고독사 등 다른 사회문제와도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살다보면 누구나 외로움을 완전히 피하며 살 수는 없다. 강인한 사람도, 밝아보이는 사람도, 늘 곁에 사람들로 북적이는 이도 어떤 순간에는 고독을 마주하게 된다. 외로움은 개인마다 다른 방식으로 다가오기 때문에 각자의 방식으로 해소된다. 어떤 사람은 음악으로, 또 다른 사람은 독서로, 견디고 달래고 때에 따라 외면하면서 넘길 뿐이다. 독서광인 오바마 대통령은 퇴임 1주일 전 마지막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보통 사람들이 상상하기 힘든 무거운 책임감과 외로움을 독서로 이겨냈다. 백악관 8년을 버틴 비결은 독서였다”고 밝혔다. 오바마 전대통령처럼 홀로 풀 수 있는 외로움도 있지만 홀로는 결코 풀리지 않는 외로움도 있다. 그런 외로움은 누군가의 도움이 반드시 필요하다. 누군가 곁에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큰 위로가 된다고 한다. 영국처럼 사회가 함께 책임져야 하는 감정이라고 생각한다. 혼밥은 손님과 식당 주인의 문제뿐만 아니라 건강과도 관련이 있다. 흔히 혼밥이라면, 그냥 한끼를 배만 채우면 된다는 생각에 대충 때운다. 그러나 건강을 생각해서 혼밥을 하더라도 영양을 생각해 이것저것 챙겨야 하겠다. 요즘 식당 주인들 중에는 손님을 사람보다 ‘돈’으로 바라보는 경우도 있다. 물론 자영업의 현실이 그만큼 팍팍하기 때문이라는 것을 이해는 하지만 너무 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짜장면집 주인에게 말한다. “외로움은 누군가가 돈으로 사고파는 감정도 아니고, 다른 사람이 마음대로 ‘외로움’이라고 규정해 버릴 수 있는 감정도 아닙니다.” 배광자 / 수필가문예마당 외로움 수필 식당 안내문 짜장면집 식당 온라인 커뮤니티
2025.12.11. 18:13
비행기가 구름을 뚫고 내려앉자, 굵은 빗방울이 창문을 두드린다. 고국 땅에 발을 딛자 비님이 마중 나와 나를 반겨주는 듯하다. 비가 드문 LA의 건조함과는 달리, 오랜만에 듣는 빗소리가 가슴 깊은 곳까지 스며든다. 쉴 새 없이 떨어지는 빗물은 오랫동안 잊고 지냈던 감정의 문을 두드리는 듯했고, 비 냄새 속에는 내가 떠나보냈던 지난 시간들이 조용히 되살아나는 듯했다. 창덕궁 비원을 거니는 중, 천둥과 번개를 몰고 온 장대비가 느닷없이 쏟아졌다. 사람들은 처마 밑으로 몸을 숨기며 빗줄기가 잦아들길 기다렸다. 나는 손바닥을 내밀어 빗방울을 받으며 차갑게 스며드는 촉감을 오롯이 느꼈다. 빗속의 비원은 다른 시대로 잠시 이동한 듯 고요하고 신비로웠다. 뜰 옆으로 흘러드는 물이 도랑을 이루는 모습을 바라보니 오래전 고무대야 보트에 올랐던 풍경이 아련히 떠올랐다. 어린 시절, 동네에는 변변한 놀이시설은 없었지만 골목 전체가 놀이터였다. 해질 무렵까지 아이들은 몸을 부딪치며 뛰놀았고 그곳에는 웃음소리가 끊임없이 흘러넘쳤다. 그중에서도 가장 선명하게 남은 것은 비 오는 날의 기억이다. 빗줄기가 흙길을 두드릴 때마다 빗방울이 튀어 오르고, 어린 우리들의 마음도 함께 들떴다. 우리 집은 약간 높은 지대에 있어 비가 아무리 퍼부어도 물이 들지 않았지만 바로 아래 골목은 장대비가 몇 시간만 내려도 금세 물이 차올랐다. 그 순간 골목은 어느새 우리들만의 또 다른 세상으로 변했다. 물이 흐르는 방향에 따라 골목은 다르게 보였고, 밋밋하던 길은 새로운 모험의 공간으로 탈바꿈했다. 큰오빠는 김장철 배추를 절이던 큼직한 고무대야를 꺼내 와 나를 태웠다. 허벅지까지 차오른 물속에서 대야를 끌며 골목을 헤쳐나갔다. 나는 언니의 쪼리 슬리퍼를 양손에 쥐고 노처럼 저었다. 둥둥 떠 있던 그 순간만큼은 어느 호화 유람선도 부럽지 않았다. 물살을 스치는 고무대야의 둔탁한 소리와 내 웃음이 뒤섞여 빗속 골목을 울렸다. 고무대야는 언제나 위태로웠다. 균형을 조금만 잃어도 금세 뒤집혔고, 나는 흙탕물 속에서 허우적거리곤 했다. 젖은 채 집으로 돌아오면 엄마는 위험하게 논다며 꾸짖다가도 이내 따뜻한 물로 씻겨주고 마른 수건으로 감싸주셨다. 꾸중 뒤에 이어지는 엄마의 손길엔 걱정과 사랑이 따듯하게 묻어 있었다. 장마가 지나면 어김없이 방역차가 나타났다. 붕붕거리는 엔진 소리와 함께 골목마다 하얀 연기를 토해냈다. 얼굴조차 분간할 수 없는 희뿌연 연기 속에서 아이들은 서로의 이름을 부르며 뛰어다녔다. 보이지 않는 얼굴들 사이로 터져 나오는 웃음은 허공을 타고 메아리처럼 번져갔다. 안개에 잠긴 듯한 그 세상은 꿈결처럼 몽롱했다. 지금 그 골목은 카페와 공용주차장으로 변했다. 더 이상 물이 차오를 염려도, 대야를 띄울 자리도 사라졌다. 하지만 젖은 옷깃의 물비린내, 희뿌연 연기 속에서 터져 나오던 웃음소리, 젖은 몸을 닦아주던 엄마의 손길까지, 이 모든 것들은 유년의 한켠에서 여전히 살아 숨 쉬고 있다. 세월이 흐르며 모습을 바꿨지만, 마음속 골목은 여전히 그 시절의 빗물을 머금은 채 고요하게 자리 잡고 있다. 삶은 때때로 물살에 흔들리는 고무대야처럼 예측할 수 없지만 그 출렁임 속에서 나는 중심을 잡는 법을 배워간다. 흔들림은 어쩌면 나를 단련하고 성숙하게 만들기 위한 과정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흘러 쌓인 시간들은 기억이 되어 마음의 온도에 따라 각기 다른 빛으로 삶을 비추는 거울이 된다. 때로는 따뜻하고, 때로는 서늘하게, 그 기억들은 내 삶을 천천히 감싸 안아 준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도 비가 내린다. 창가를 타고 흐르는 빗줄기를 바라보며 머물렀던 시간을 반추해 본다. 빗속의 고국 풍경이 잔잔히 내 안으로 스며들고 오래된 기억이 새 물결처럼 일렁인다. 새로 내리는 비는 오래된 기억 위에 겹겹이 쌓이며 또 하나의 풍경을 만들어낸다. 비는 나에게 귀향의 징표이자 추억을 적셔 다시 채워주는 선물이다. 세월이 흘러 많은 것이 변했지만 비가 내릴 때마다 나는 그때의 어린 소녀로 돌아간다. 고무대야가 뒤집혀 흙탕물 속에서도 웃음을 잃지 않던 아이처럼, 오늘도 나는 내 삶의 물결 속에서 천천히 중심을 찾아간다. 김윤희 / 수필가문예마당 고무대야 수필 오래전 고무대야 마음속 골목 빗속 골목
2025.12.04. 18:48
잭키와 빅키는 시댁 조카 수잔이 입양한 딸 쌍둥이 이름이다. 20년 전 만났던 두 아이가 벌써 대학을 졸업했단다. 나는 지금 그들을 만나러 센디에이고 큰댁에 가는 길이다. 동부에 사는 수잔 가족을 샌디에이고 큰댁에서 초대한 모양이다. 쌍둥이 아이들을 처음 만났던 날이 떠오른다. 친척 간의 모임이 잦은 히스패닉 가족의 일원이 되고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다. 이모 아들인 조카 대니얼이 중국에서 입양한 아이를 가족에게 소개한다는 날이었다. 이모댁에 도착하니 집안은 사람들로 가득했다. 서투른 영어로 낯선 얼굴들과 마주하는 일이 서먹했지만 극복해야 할 일이기에 사람 속에서 머뭇거리던 시절이었다. 잠시 후, 백인 여자가 연약한 동양 여자 쌍둥이를 앞세우며 나타났다. 사촌 대니얼의 아내 수잔이라고 남편이 말했다. 모인 사람들의 눈은 두 아이에게 쏠렸다. 수잔은 웃으며 잭키와 빅키라며 쌍둥이를 소개했다. 곧 두 번째 생일을 맞이한다는 딸 쌍둥이의 검은 머리칼은 셀 수 있을 정도로 듬성듬성했다. 윤기 없이 거무튀튀한 피부에 바짝 마른 모습이 안쓰러웠다. 한 아이는 무뚝뚝한 표정으로 사람을 살피고, 다른 한 아이는 입을 굳게 다물고 사람들과 눈을 맞추려 하지 않았다. 나이 오십이 되어 만난 남자의 가족을 처음 마주하던 날 긴장했던 내 모습이 되살아났다. 아기들이 낯선 사람들의 관심과 인사를 받으며 불편해질 마음이 헤아려졌다. 녀석들이 보아왔던 익숙한 얼굴 모습인 내가 있어 마음이 좀 놓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언니인 잭키와 동생인 빅키를 마음에 담고 그들의 앞날이 밝고 평안하기를 기원했다. 수잔은 결혼 15년이 되도록 아이가 생기지 않은 채 사십을 넘기고 있었다. 그녀는 NBC 경제 프로그램을 맡은 기자로 중국 출장 중 길가를 헤매는 고아 실상을 들었단다. 집에 돌아와 남편과 이야기를 나눈 후 입양을 결정했다. 까다로운 입양 절차 중 수잔은 임신 증세를 느꼈단다. 입양자의 임신이 확인되면 허가는 무효가 된다. 수잔은 임신 사실을 숨기고 입양을 진전시켰고 두 아이는 무사히 미국에 올 수 있었다. 수잔 부부는 영양실조가 초래한 쌍둥이의 신체 발육을 위해 병원 출입이 잦다고 했다. 아이들 머리카락이 자라도록 물리 치료를 받고 있다는 소식과 함께 남자아이 출생 사실도 전해졌다. 남자아이는 면역성이 없는 상태로 태어났다. 일 년 사이에 수잔 부부는 세 아이의 부모가 되었다. 몇 해가 지난 어느 날, 시어머니가 마켓에 가게 되면 ‘Sunset’ 잡지를 사보라고 했다. 수잔 스토리가 실렸단다. 즉시 마켓에 들러 잡지를 샀다. 여러 내용과 함께 수잔 아들에 대한 언급이 있었다. 아들은 쌍둥이로 잉태되었지만 한 아이가 태아 상태로 유산이 되어 혼자 태어났다. 그런 이유 때문이었을까, 무면역 증세로 태어난 아기의 방은 몇 해 동안 무균 상태를 유지해야 했다. 누구든 집 바깥에서 있다 집 안에 드는 사람은 즉시 샤워를 하고 옷을 갈아입어야 한다는 사실은 가족 친척 간에 잘 알려져 있었다. 학교에 들어간 아들은 외부 음식은 절대 삼가며 집에서 준비한 음식만 먹는다는 이야기 등, 쌍둥이 안부를 가끔 들으며 시간이 흘렀다. 어느 해 봄, 딸들이 가주에 있는 대학 견학을 원해 샌디에이고에서 한 달 살기를 하고 있으니 시간 나면 다녀가라고 수잔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어느새 대학생이 된다는 잭키와 빅키를 만날 생각에 가슴이 벅찼다. 수잔 가족이 머무는 집에 도착해 문을 노크했다. 안경 쓴 아가씨가 문을 열어 반겼다. 어릴 때 만난 쌍둥이 중 하나였다. 집안으로 들어서니 수잔이 반겼다. 아이들 키우느라 애쓴 때문인지 수척해 보였으나 지적이고 고운 얼굴 분위기는 그대로였다. 무릎 관절이 아파 걷는 일이 힘들다며 수술 후에는 괜찮을 거라 했다. 다행히 카메라 앞에서 행하는 직무는 말하는 모습만 담아내니 화장을 하면 아직 쓸만하다는 말에 우리는 웃었다. 곧 현직을 은퇴하지만 딸들의 대학 생활을 지원해야 한다며 강연이나 컨설팅, 칼럼 기고 등으로 수입을 만들 예정이라 했다. 쌍둥이 형제를 배 속에서 잃고 태어난 제이도 건강한 소년이 되었다. 엄마의 파란 눈과 하얀 피부, 아빠의 검은색 머리를 닮은 모습이 핸섬했다. 제이는 토론을 좋아하고 잭키는 수학에 천재라며 어느 대학이든 입학이 가능할 것이라고 수잔이 자랑스럽게 전했다. 빅키는 빙긋이 웃으며 자신은 문학과 역사를 공부할 예정이라고 했다. 이번 만남은 4년 만이다. 다시 만날 두 아이 생각에 빠져있던 사이 어느새 큰댁에 도착했다. 대가족이라 오랜만에 만나 시끌벅적했다. 수잔과 눈이 마주쳤다. 나를 향해 손을 흔든다. 사람들과 어울려 이야기를 나누는 두 동양 아가씨의 자신감 넘치는 모습이 보기에 좋았다. 잭키는 동부에 있는 어느 과학 연구소에서 일을 시작한단다. 빅키는 대학원에서 중국 역사를 공부할 예정이라며 중국 남자친구가 있다고 했다. 톰보이 같은 잭키와 다르게 머리를 예쁘게 다듬고 엷은 화장을 한 빅키는 막 피어난 꽃처럼 예뻤다. 임신 사실을 알았을 때 혹시 입양을 망설였을까, 궁금해 수잔에게 물었다. 이미 가슴으로 품은 두 아이를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했다. 딸들에게 그들의 뿌리를 이해시키며 키워 왔단다. 두 딸이 있어 든든하다고 했다. 피는 언제나 물보다 진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입양아로 살아가며 양부모로부터 받은 사랑의 추억이 피보다 진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 가깝게 지내는 서양 친구가 한국인 입양 조카를 챙기는 모습을 볼 때면 입양에 대한 편견을 가졌던 내가 참 부끄러워진다. 살펴보니 중국 정부는 계속되는 인구 감소로 2024년부터 자국 아동의 해외 입양을 중단시켰단다. 한국도 이제 해외 입양을 지속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되지만 아직도 입양이 이루어지고 있는 모양이다. 두 아이 입양을 선택했던 수잔 부부의 바다 같은 삶이 세상을 밝히는 빛이 아닐까. 잭키와 빅키가 있어 더 평화롭고 아름다운 그들의 가족 풍경을 다시 떠올린다. 이정숙 / 수필가문예마당 수필 수잔 가족 입양 절차 수잔 아들
2025.11.20. 18:42
“글을 쓰게 된 나의 이야기, 시간은 2분 드리겠습니다.” 문학회 야외 워크숍에서 사회자가 던진 화두였다. 눈앞에 펼쳐진 바다는 하늘에서 감아내린 무지갯빛 타래를 풀어내며 고요히 반짝였다. 저편 등대 불빛이 오랜 기억의 장을 비추고 그 속에서 나를 바라보시던 한 분, 선생님을 떠올렸다. 그 시절은 한국전쟁의 상흔이 아직 삶 곳곳에 남아 있던 때였다. 가난했지만 사람들의 마음은 골짜기 돌 틈에서 스며나오는 샘물처럼 맑고 따스했다. 그 해 여름, 초등학교 3학년이던 나는 ‘선생님께 편지 쓰기’라는 방학 숙제를 받았다. 누군가에게 편지를 쓴다는 건 어린 마음에 신기한 일이었다. 더구나 그 대상이 선생님이라니 가슴이 더욱 두근거렸다. 어떻게 써야 할지 몰라 한참을 망설였지만, 알 수 없는 설렘에 마음을 얹어 한 자 한 자 써내려갔다. 돌이켜보면 그것이 내 생애 첫 글쓰기였다. 편지를 다 쓰고 난 뒤엔 어떻게 보내야 할지 몰라 학습장 갈피에 꼭 끼워두었다가 개학 날 함께 제출했다. 며칠 뒤 선생님께서 내 이름을 부르셨다. “얘들아 방학 숙제로 선생님께 편지를 써온 친구는 전교에서 김영신 한 명뿐이란다. 그 편지가 얼마나 예쁘고 감동적인지, 선생님은 읽으며 참 기뻤단다. 지금 너희에게 읽어주려고 해.” 낭낭한 목소리가 교실 가득 울려 퍼질 때 내 가슴에 감동이 파문처럼 번졌다. ‘내 글이 아름답다니.’ 처음 들어본 칭찬이 자긍심에 심지를 세우고 불을 지펴 주었다. “이 글은 전교에 돌려 읽힐 거예요. 모두에게 큰 배움이 될 거예요.” 그날 선생님은 방과 후 교실에 남으라고 하셨다. 수업이 끝난 뒤 혼자 앉아 있던 내 책상 위에 선생님은 하얀 묶음지 한 권을 내미셨다. “영신이 글 솜씨는 참 특별하구나. 오늘부터 이 노트에 매일 글을 써보자. 편지를 썼듯이, 네 마음을 글로 옮겨보는 거야.” 그 말씀은 내가 알지 못했던 세계로의 초대장이었다. 책이라곤 교과서뿐이던 내게 ‘글을 쓴다’는 건 생소하기만 한 일이었다. 멍하니 연필만 쥔 나를 보며 선생님은 다정히 일러주셨다. “편지를 처음 써봤다고 했지? 그게 바로 글이란다. 네 마음속 이야기를 꺼내 적어보렴. 너의 글에는 특별한 감성이 있어.” 그날부터 나는 방과 후 교실에 남아 글을 쓰기 시작했다. 선생님은 한 번도 글의 방향을 지시하거나 잘못을 지적하지 않으셨다. 그저 창가 책상에 앉아 자신의 일을 하며 내가 글을 마칠 때까지 말없이 기다려 주셨다. 이제는 안다. 그 침묵 속에 한 아이를 향한 믿음과 애정, 인내와 격려가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는 것을. 햇살이 가득하던 창가, 두 사람만의 고요한 시간 속에서 내 안의 작은 우주가 돌기 시작했다. 나는 글을 배우기 전에 ‘듣는 법, 느끼는 법, 기다리는 법’을 먼저 배웠다. 그때 쓴 글 중 하나는 선생님이 공모전에 내주셔서 상을 받았다. 하지만 내게 가장 빛나는 상은 따로 있었다. 바로 방과 후의 시간 그리고 선생님이 내어주신 마음의 자리였다. 그건 마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가 토끼굴을 지나 처음 내디딘 새로운 세상처럼, 내 안의 가능성을 찾아가는 경이로운 첫 여정이었다. 그 시간이 더 오래 지속하였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반 학기가 지나 이사를 하게 되어 전학을 갔다. 새 학교에서의 첫 작문 시간, 담임 선생님이 내 글을 반 친구들 앞에서 읽어 주셨다. 잘 쓴 글이라는 칭찬의 말이 이어질 때, 창가에서 미소 짓던 옛 선생님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건 그리움의 반향이었을까, 아니면 말로 다 하지 못한 감사의 투영이었을까. 이후 중고교 시절 전국 백일장에 참가해 상을 받기도 했고, 대학에서는 학보사 기자로 글쓰기를 이어갔다. 그러나 결혼과 함께 미국으로 이주하면서 글은 삶의 뒤안길로 물러났다. 생계와 자녀 양육, 낯선 땅에서의 삶은 고되고 숨가빴다. 그렇게 반세기가 넘는 세월이 흘렀다. 이제 일흔을 훌쩍 넘긴 나는 다시 펜을 들었다. 살기에만 바빴던 이민의 세월 끝에 비로소 ‘나’를 마주하게 된 지금, 나를 찾아 글을 쓰기 시작했다. 그렇게 쓴 첫 글이 등단이라는 포상으로 돌아왔고, 내 이름 앞에는 ‘문인’이라는 두 글자가 더해졌다. 한 편의 글을 써낸다는 것은 고통이자 눈부신 기쁨의 과정이다. 늦은 나이에 이 길로 들어설 수 있었던 건, 그 첫 불씨를 밝혀주신 선생님 덕분이다. 오늘도 나는 선생님께 드렸던 첫 편지를 쓰는 마음으로 글을 쓴다. 선생님께서 내어주셨던 방과 후 시간처럼 내 인생의 방과 후에 펜을 들었다. 내 마음이 글이 되기까지 기다려주셨던 그분을 생각하며. 들판에 막 움튼 새싹을 찾아내어 살피고 돌보시던 분. 평범한 한 아이에게 정성을 다해주셨던 그 헌신은 오늘도 내 길을 비추는 등대 불빛처럼 반짝인다. 글을 쓰기 전에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삶으로 보여주셨던 분. 내게 세상을 향한 따스한 시선이 있다면 그 뿌리는 당신에게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내 인생에 일찍이 선생님을 만난 일은 한 생애를 비추는 보배로운 축복이었다. 이제, 오래도록 마무리하지 못했던 편지의 끝말을 올린다. “선생님, 감사합니다. 제 안에 심어주신 불씨가 긴 세월을 돌아 이제 제 인생의 방과 후를 밝히고 있습니다.” 이영신 / 수필가문예마당 인생 수필 그날 선생님 마음속 이야기 편지 쓰기
2025.11.13. 18:47
나는 오늘도 편지를 쓴다. 마음으로 쓰는 편지이다. 숙이, 60년째 내 가슴에 담고 놓지 못하고 있는 이름이다. 꽃샘 추위가 옷깃을 여미게 하던 삼월 어느 날, 산골 초등학교 운동장에 큰 트럭 한 대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들이닥쳤다. 교실에서 공부하던 우리들은 우르르 창가로 몰려가 운동장을 바라보았다. 트럭 안에는 수십 명 아이들이 타고 있었고 한 명 한 명 내려서 운동장에 줄을 서고 있었다. 그들은 거의 맨발이었고, 나중에 보니 발은 동상에 걸린 듯 붉은빛으로 변하여 퉁퉁 부어 있었다. 얼굴은 상처투성이고 몇 날이나 씻지 않았는지 까만 얼굴에 눈만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전쟁고아들이라 했다. 우리 동네 가까운 곳에 있는 고아원에 살게 되었고 우리 학교에 다닐 거라 했다. 무서웠다. 트럭에서 내린 아이 중 하나였던 숙이. 짧은 단발머리 안에 부스럼이 봉긋봉긋 솟아 있고 꼬질꼬질 더러운 옷을 입고 있던 꼬마 아이. 그가 내 짝이 되었다. 초등학교 2학년인 내 인생 첫 시련이었다. 깡마른 몸, 버짐이 피어 있는 얼굴, 땟국물이 흐르는 애가 나는 싫었다. 그렇지만 거부할 수 없었다. 수업 시간 내내 책상에 엎드려 잠만 자는 아이의 모습이 조금은 애처롭게 느껴지기도 했다. 그 지역에서 가장 오지였던 우리 마을은 학교에서 십 리도 넘게 떨어져 있었다. 오가는 길에 징검다리가 있는 개울을 두 개나 건너야 했다. 비만 오면 물이 넘쳐 다리가 사라져 버렸기에 자연스레 학교를 쉬었다. 그런 날이면 고학년 언니들은 산을 넘어 학교에 다녔다. 유난히 작고 어린 나에게 학교 가는 길은 고행길이었다. 숙이가 그 길을 동행해 주기 시작했다. 우리 집 가는 길목에 있는 고아원이 숙이의 새 보금자리였다. 시간이 흐르면서 숙이의 얼굴에 살이 오르기 시작했고 옷도 깨끗해졌다. 이제는 더 이상 무서운 숙이가 아니라 늘 함께 붙어다니는 짝꿍이었다. 등굣길에 숙이는 내가 올 때까지 징검다리에 앉아 기다려 주었고 하굣길에는 다리를 건너기 전에 헤어졌다. 혼자 집에 갈 때 사람만 나타나도 무서웠던 시골길이 둘이 되자 마냥 웃고 떠드는 즐거운 길이 되었다. 가끔 고아원 남자 아이들이 괴롭히기도 했지만 그런 것쯤은 숙이랑 함께 있을 땐 문제가 되지 않았다. 전쟁의 상흔이 채 아물지 않았던 60년대, 당시 내 고향 영산은 6월이면 보릿고개를 넘어야 했다. 햇보리도 아직 타작을 못했고 쌀은 구경조차 하기 어려웠다. 어머니가 감자 농사를 지어서 그 시기에는 도시락도 주로 감자를 삶아 싸 주었다. 어느 날 청소 시간에 숙이가 다가와 네 도시락 뚜껑이 열려 있다고 말했다. 확인해 보니 도시락이 텅 비어 있었다. 누군가가 점심으로 먹을 하지 감자를 다 먹어버린 것이다. 나는 울음을 터트렸다. 아이들이 몰려들었다. 한 친구가 숙이가 가져다 먹는 걸 봤다고 말했다. 나는 설마 하며 숙이를 바라보았다. 숙이는 아니라고 소리 질렀다. 그런데 나는 이미 숙이가 범인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어떤 변명을 해도 듣지 않고 경멸의 눈으로 바라보며 도둑년이라고 소리 질렀다. 자기가 저질러놓고 나에게 시치미 뚝 떼고 도시락 뚜껑이 열렸다고 말하는 얌체 같은 계집애라고 퍼부어 댔다. 그러자 숙이는 갑자기 돌변하여 나를 때리기 시작했다. 얼마나 맞았는지 그대로 정신을 잃어버렸고 깨어났을 때는 집에 누워있었다. 엄마는 자초지종을 아는 듯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그날 이후 3일 동안 나는 학교에 가지 못했다. 다시 학교에 갔다. 숙이는 보이지 않았다. 그 일이 있고 난 다음날부터 나오지 않았다고 했다. 학교에서 징계했는지 숙이가 스스로 학교를 그만두었는지 알 수 없었다. 그때부터 내 옆자리는 비어 있었다. 날이 갈수록 숙이의 빈자리는 커져만 갔다. 등하굣길에 함께 다니며 조잘대던 친구가 사라졌다. 늘 징검다리에서 기다리다가 나를 보며 환하게 웃어주던 숙이는 더 이상 만나볼 수 없었다. 겨우 3개월 남짓 그녀와 함께했었다. 그동안 날마다 십리 길을 함께 오가며 쌓은 정이 아니든가, 그제야 내가 숙이에게 어떤 상처를 주었는지 실감이 나기 시작하였다. 전쟁고아였던 숙이, 나는 한 번도 그 아이에게 가족 얘기를 묻지 않았다. 그동안 어디서 어떻게 살았느냐고 묻지도 않았다. 세상에서 제일 좋은 엄마도 없이 얼마나 외롭고 힘들었느냐고 위로해 주지도 못했다. 더럽고 초라한 몰골로 트럭에서 내렸던 아이, 고아원에 사는 불쌍한 아이라는 편견을 짝꿍이며 등 하굣길 함께하는 소중한 친구라는 이유로 덮어 버리기에는 너무 어린 나이였는지 모른다. 그 뒤로 나는 숙이의 소식을 듣고 싶어 몇 번이나 고아원에 찾아갔다. 어디로 갔는지 모르니 다시 찾아오지 말라던 아저씨의 눈은 ‘너 때문에 떠났는데 왜 찾아오니’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그때부터 내 머릿속 한구석에 화두처럼 박힌 질문이 떠나질 않았다. 감자 몇 개가 뭐라고 그렇게 몰아붙였을까, 숙이가 정말 먹지 않았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왜 못했을까, 설사 먹었다 하더라도 배고픈 친구의 마음을 왜 살피지 못했을까. 문득문득 그녀가 보고 싶을 때 같은 내용의 편지를 썼다. 매번 보낼 곳을 알지 못해 허공에 날릴 뿐이었다. 이듬해 우리 가족은 고향을 떠나 도회지로 이사를 했다. 10년 뒤 고향을 찾았을 때 친구들에게 숙이의 소식을 물었다.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었다. 떠난 이후 그녀는 고향을 한 번도 찾지 않았던 모양이다. 정말 바람처럼 흔적 없이 사라져 버린 것이다. 내 친구 숙이, 그녀는 한 번도 변한 적이 없는 단발머리 소녀로 내 마음속에 남아있다. 지금도 감자를 먹을 때면 숙이가 생각나곤 한다. 어딘가에서 살고 있을 그녀가 건강하고 행복하기를 기도한다. 유년 시절 짧은 만남 후 아프게 헤어진 한 소녀를 60년 세월 동안 애타게 그리워하는 것은 그녀에게 꼭 할 말이 있기 때문이다. 미안하다고, 정말 미안하다고 말하고 싶기 때문이다. 이정길 / 원불교 교무·수필가문예마당 편지 수필 산골 초등학교 우리 학교 고아원 남자
2025.10.23. 17:34
동네를 산책하다 보면 까마귀를 종종 마주하게 된다. 지붕 위에도 올라가 있고 길바닥에서 뒤뚱거리며 걷기도 한다. 그냥 가만히만 있어도 보기 싫은데 거친 목청으로 “까~악 까~악 깍” 울어 조용한 동네를 시끄럽게 하기 일쑤다. 가끔 쓰레기통을 뒤져 길바닥을 어지럽히기도 하니 더욱 밉다. 우리 동네에 사는 까마귀는 보통 까마귀(Crow)가 아니고 ‘레이븐(Raven)’이라는 큰 까마귀여서 무섭기도 하다.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온몸이 짙은 검은색으로 덮여 있다. 어딘 가에 눈이 있을 텐데, 그것조차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더 섬뜩하게 느껴진다. 마주칠 때마다 미워하며 어서 우리 동네를 떠나기 바랐다. 우리 동네에는 반려견을 기르는 사람들이 많다. 평소에는 사람 그림자도 안 보이다가 이른 아침에는 개를 데리고 나와 잔디에다가 변을 보게 한다. 그러는 동안 이웃끼리 서로 잡담도 하고, 코요테가 동네에 나타났다는 등 소식도 전한다. 옆집에는 60대 중반의 백인 여자가 혼자 산다. 웰시 코기 종의 개를 온갖 정성을 다해서 돌본다. 몇 살이냐고 물으니 15살이라며 슬픈듯한 표정을 짓는다. 어느 날 갑자기 까마귀 떼들이 우리집 근처에 몰려들었다. 그날은 평소와 달랐다. 집 담장 밖, 커다란 소나무 부근에서 미친 듯이 울부짖고, 날개를 푸드덕거리며 난동을 부렸다. 마치 누군가를 부르는 듯, 아니면 무언가를 알리는 듯한 소리였다. ‘사고가 났나? 아니면 누가 죽었나?’ 별별 생각이 다 들었다. 그날의 광경은 머릿속에서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불길한 기운과 이상함이 느껴졌다. 혹시 옆집 개가…? 얼마 후, 한동안 보이지 않던 옆집 여자를 만났다. 늘 데리고 다니던 웰시 코기 반려견이 보이지 않았다. 웬일이냐고 물으니 얼마 전에 죽었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나이가 많아 죽을 때가 되긴 했지만 더 살기를 바랐는데…”라며 말을 잇지 못했다. 나는 속으로 ‘아! 그 까마귀 떼들이 그래서 그랬었구나!’하고 생각했다. 그날 까마귀 떼의 울음은 어쩌면 옆집 여자를 대신한 애도였는지도 모르겠다. 신기했다. 까마귀는 옆집 개가 죽는다는 것을 어떻게 알았을까? 사람은 모르는 감정, 기운, 예감 등을 까마귀는 아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본 그날의 장면은 단순히 까마귀가 이상하게 굴었다는 수준을 넘어서 어쩌면 삶과 죽음 사이의 문턱을 엿본 순간으로 느껴졌다. 그날 일을 계기로 까마귀에 대해서 많은 관심을 갖게 됐고, 문헌을 찾아보고 많은 것을 알게 됐다. 까마귀는 동물의 죽음을 알아차릴 수 있고, 그에 대해 무리 지어 반응할 수 있다고 한다. 단순한 본능이 아니라, 지능적으로 무엇인가 이상하다, 사라졌다, 죽었다는 것을 인식하고 행동한다는 것이다. 까마귀는 여러 문화권에서 불길한 징조로 등장한다. 죽음의 전조, 또는 그 너머 세계와 연결된 존재로 여겨져 왔다. 영화, 문학, 신화 등에서 큰 까마귀는 종종 죽음, 지혜, 예언의 상징으로 등장한다. 애드거 앨런 포의 시 ‘까마귀(The Raven)’에서는 절망과 광기를 상징하기도 한다. 하지만 모든 문화에서 항상 나쁜 의미로만 쓰이진 않는다. 북유럽 신화에서는 까마귀는 길조가 되기도 한다. 지혜와 예지의 상징으로 세상을 날아다니며 정보를 가져오는 존재로 등장한다. 또한 한국, 중국, 일본 등 동아시아의 설화에서는 하늘과 인간 세계를 잇는 ‘삼족오’ 라는, 태양과 관련된 신화적 존재이다. 어떤 문화냐에 따라 까마귀의 상징이 달라진다. 성경에서도 까마귀가 나온다. 선지자 엘리야와 까마귀 이야기다. 하나님은 선지자 엘리야에게 아합 왕의 죄악을 꾸짖게 하시고, 이후 그를 숨기기 위해 요단 동쪽의 그릿 시냇가로 보내신다. 그곳은 물 한 모금 마시기도 어려운 광야다. 엘리야를 챙겨주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런데 끼니때마다 놀랍게도 어디선가 까마귀가 떡과 고기를 입에 물고 날아왔다. 엘리야는 광야에 혼자 있으면서 까마귀를 통해 하나님을 더욱 깊이 신뢰하게 된다는 이야기다. 어릴 적부터 듣던 말이 있다. “까마귀 고기를 먹었나?” 뭔가를 잊어버릴 때마다 어른들은 그렇게 말했다. 하지만 까마귀는 오히려 잊지 않는 새라는 것을 알게 됐다. 어쩌면 까마귀는 인간보다 더 많이 기억하는 새인지도 모른다. 조류 학자들 얘기로는 까마귀는 새 중에서 가장 똑똑한 측에 속한다. 기억력이 좋고, 도구를 만들어 사용하며, 의사소통 능력까지 인정받고 있다. 실험실에서는 퍼즐도 풀고 문제 해결 능력이 뛰어나다. 무리를 지어 생활하며 협동하는 행동을 보인다. 또한 사람 얼굴을 기억하고, 매우 적응력 있는 동물이라 인간 사회에 깊이 섞여 살고 있는 존재라고 한다. 우리는 까마귀의 모습을 흉하게 여기고 까마귀를 재수없는 존재쯤으로 넘겨버린다. 그러나 사람의 시선이 닿지 않는 곳에서, 죽음을 마주한 까마귀는 더 이상 단순한 새가 아니다. 그 순간, 무언가를 알고 있는 영험한 존재가 된다고 한다. 그들은 ‘죽음’ 그 자체에 반응한다. 죽은 동료를 보면 소리치며 모여든다. 어떤 이는 이를 ‘경고’라고 해석하고 어떤 이는 ‘장례’라고 말한다. 하지만 그 의미는 아무도 정확히 모른다. 그렇게 모여든 후 죽은 동료를 바라보며 긴 침묵에 잠긴다. 그 자리에 남아 지키며 떠나지 않는다. 우리 인간은 알 수 없다. 그 침묵이 애도인지, 혹은 의식인지. 나는 까마귀의 생김새나, 시끄러운 울음 소리, 그리고 나쁜 이미지 때문에 미워하고 싫어했다. 그러나 까마귀에 대해 알고 난 후로 아무런 해도 끼치지 않는 우리 동내 까마귀들을 나쁘게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모든 새는 나름대로 생존의 의미가 있고, 권리가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농부는 참새를 미워하지 않는다. 다만 수확기에 내쫓을 뿐이다. 중국에서 곡식을 축내는 참새떼를 거국적으로 박멸에 나섰더니 오히려 해충의 피해가 더 많았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이 세상 모든 새들은 독수리나 갈매기나 참새나 까마귀나 그들 나름대로 가치 있는 생명이다. 지금 산책 길에 보이는 까마귀는, 예전 같으면 그냥 지나쳤을 존재들이지만 그날 이후로 까마귀를 예사로이 볼 수 없다. 까마귀를 바라보는 나의 시선이 달라졌다. 이제는 동네 까마귀를 좋은 이웃처럼 대하고 더불어 살기로 했다. 배광자 / 수필가문예마당 수필 까마귀 고기 보통 까마귀 까마귀 떼들
2025.10.16. 18:43
내 이름은 이윤희다. 결혼 후 남편 성을 따라 김윤희로 살아온 세월이 길다 보니 이제는 이윤희보다 김윤희가 더 자연스럽고 익숙하게 들린다. ‘진실 윤’ ‘바랄 희’ 진실만 바라며 살라는 부모님의 염원이 담긴 이름은 아버지께서 지어 주셨다. 우리나라는 문중의 항렬과 사주를 고려한 한자 이름이 일반적이었지만 2000년대 초부터 순우리말이 유행하기 시작했다. 요즘처럼 국제화된 시대에는 영문 표기와 발음이 쉬운 받침 없는 이름을 선호한다고 한다. 이름에도 시대의 흐름과 트렌드가 있다는 말이 실감난다. 아버지가 지어 준 ‘진희, 주희, 윤희’ 우리 세 자매의 이름은 반세기가 훌쩍 지난 지금도 촌스럽지 않다는 말을 자주 듣는다. ‘희야’는 우리 집안 여자들의 공용 호칭이었다. 넓은 잔디밭과 정원 가장자리에 한옥과 양옥이 기역자 형태로 배치된 집에서 조부모님과 부모님, 두 언니와 두 오빠, 엄마의 살림을 도와주던 순자 언니, 그리고 막내인 나까지 열 명이 함께 대가족으로 살았다. 식사를 제외한 대부분의 시간을 주로 한옥에서 보내셨던 할아버지 할머니는 조그마한 일에도 우리를 자주 호출하셨다. “희야”하고 부르면 엄마와 세 자매는 합창하듯 “예” 하고 대답했지만 결국엔 막내인 내가 떠밀려 심부름을 도맡게 되었다. 그래도 몰래 챙겨주시던 용돈 받는 재미에 두 분의 기침 소리만 들려도 전광석화처럼 달려가곤 했다. 언니 오빠들은 슬쩍 눈치를 보며 딴청을 피웠지만, 그 심부름 끝에 주어지는 달콤한 사탕이나 빳빳한 지폐의 유혹은 막내인 내가 결코 외면할 수 없는 보상이었다. 우리 식구들은 나를 ‘막둥이’라고 불렀다. 여고생이 되기 전까지는 집안의 자잘한 심부름은 거의 내 몫이었다. 그래서 동생 있는 친구들이 무척이나 부러웠다. 막내의 설움을 운운하며 투덜대기도 했지만, 돌이켜보면 막내라는 이유로 받은 특혜와 내리사랑은 늘 변함없이 이어져 왔다. 열 손가락 깨물어 안 아픈 손가락이 어디 있겠느냐 마는 세상 부모들이 막내를 더 애틋하게 여기는 건 그 자식과의 인연이 상대적으로 짧을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형평성에 맞지 않는 상황에도 묵묵히 이해해주던 형제자매들에게 한때나마 품었던 불만이 괜스레 미안해진다. 사촌의 출산 소식을 듣고 병원으로 달려갔다. 산모 병실을 확인하기 위해 안내 데스크로 다가가자 간호사는 “무엇을 도와드릴까요?”하고 묻는다. 엄마 안 공(Ahn S Kong), 아빠 상 공(Sang S Kong), 아기 조이스 공(Joyce Kong)을 만나러 왔다고 하니 금방 찾아 준다. 동양인이 드문 병원이라 금세 눈에 띄었나 보다. “‘앤 콩, 생 콩, 조 콩’은 203호 입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한글 이름을 영어로 소리 나는 대로 표기하다 보면 예기치 않게 벌어지는 흔한 해프닝이었지만, 콩 콩 콩이라니. 간호사에게 이 웃음의 의미를 설명해주려 했지만, 언어의 장벽을 넘어 그 미묘한 어감의 재미를 전달하기란 불가능에 가까웠다. 간호사는 무슨 일인지 영문을 몰라 갸우뚱거리며 그저 따라 웃을 뿐이었다. 그날 이후 우리 가족에게 ‘앤 콩, 생 콩, 조 콩’은 한동안 박장대소의 화제가 되었고, 아직도 그때를 떠올리면 웃음이 절로 난다. 특별한 추억을 남겨준 그 간호사는 지금도 어딘가에서 또 하나의 ‘웃기는 한국 이름’을 작명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이름은 운명이라고 할 만큼 인생에 큰 영향을 주기도 한다. 삶에 굴곡이 많은 이들 중에는 운세를 바꾸기 위해 개명을 하고, 무명 생활이 길어진 연예인은 예명으로 재기의 발판을 삼는다. 그 효력이 과학적으로 검증된 바는 없지만 실제로 성공 사례는 종종 들려온다. 개명 사유 중에는 이름의 어감이 좋지 않거나 놀림감이 된다는 것이 가장 많다는 통계를 보았다. ‘송 아지’나 ‘방 귀남’처럼 성과 이름의 부조화로 놀림을 당하는 경우도 적잖게 볼 수 있다. 평생 불릴 이름이 자신에게 열등감을 느끼게 한다면 개명을 통해 자존감을 회복하는 것도 하나의 좋은 해결책이 아닐까. 새로운 이름으로 새 인생을 시작하려는 이들의 마음은 단순히 운을 바꾸려는 시도를 넘어, 온전한 자신으로 존중받고 싶은 간절한 소망일지 모른다. 유대인의 경전 ‘탈무드’에 따르면 사람은 세 가지 이름을 갖는다고 한다. 첫 번째는 태어났을 때 부모님이 지어주신 이름, 두 번째는 살면서 가까운 사람들이 애정을 담아 붙여준 별명 또는 애칭, 세 번째는 삶이 끝났을 때 지인들이 기억하는 이름이다. 득과 실에 너무 연연하지 말고 남보다 조금 손해 보며 살라는 부모님의 가르침을 마음에 새기며 나는 인생의 후반기를 그렇게 걸어 가려 한다. 인생의 시작은 이름에서 출발한다. 그렇다면 부르기 좋고, 듣기 좋고, 의미 있는 이름을 선물 받은 내 인생의 시작은 꽤 괜찮은 편이다. 삶의 여정 속에서 마주할 장애물 앞에서도, 정직하게 살아가길 바랐던 부모님의 당부. 그 뜻을 내 이름에 담아 주셨음을 이제야 깊이 느낀다. 앞으로 누군가 내게 ‘윤희’의 뜻을 묻는다면 나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부모님의 사랑입니다.” 김윤희 / 수필가수필 이름 한자 이름 한글 이름 성과 이름
2025.10.09. 19:33
요즘, 목걸이 하기가 싫어졌다는 친구가 있다. 눈만 뜨면 매스컴에서 목걸이 얘기고, 똑같은 목걸이 사진을 하도 많이 봐서 그렇단다. “좋은 말도 세 번이면 듣기 싫고, 아무리 예뻐도 자꾸 보면 질리는데, 뭔 좋은 거라고….” 친구는 피곤하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 목걸이라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이미지는 반짝임과 우아함이다. 여성의 얼굴과 옷차림을 더 섬세하고 눈에 띄게 한다. 작은 물건이지만, 거기에는 욕망, 허영심, 계급의식 등이 응축되어 있다. 또한 목걸이는 단순한 장신구를 넘어서, 많은 이야기와 상징 등 생각할 거리가 담겨있어 문학 작품에서도 사랑받는 소재가 되기도 한다. 예를 들면 모파상의 단편 〈목걸이〉에서는 단순한 목걸이 하나가 한 여인의 인생을 완전히 망가뜨린다. 주인공 마틸드는 매우 사치스럽고 허영심이 많은 여자이다. 항상 상류층의 삶을 동경했고, 그들처럼 폼나게 살아보고 싶었으나 그녀의 남편은 하급 공무원이었으므로 그녀의 욕망을 채워줄 수 없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의 남편이 무도회 초대장을 들고 온다. 뛸 듯이 기쁘지만 입을 옷과 장신구가 없어 괴로워한다, 예쁘게 치장하고 갈 형편이 안 되는 그녀는 친구에게 값비싸 보이는 목걸이를 빌려 무도회에 참석해 사람들의 주목을 받는다. 하지만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그 목걸이를 잃어버리고 만다. 결국 많은 빚을 내어 잃어버린 목걸이와 비슷한 것을 사서 친구에게 돌려준다. 그녀는 빚을 갚기 위해 10년간 극심한 노동과 절약을 하며 살아간다. 그 과정에서 그녀의 손은 거칠어지고, 외모도 몰라보게 변한다. 10년 후, 마틸드는 우연히 그 친구를 만나 사실을 털어놓았더니, 그 친구가 하는 말이 “그 목걸이는 가짜였어.” 순간 마틸드는 10년의 삶 전체가 무너지는 충격을 받는다. 허영심과 외면적인 허세가 가져온 비극이다. 서머셋 몸의 〈진주 목걸이〉도 있다. 가정부 미스 로빈슨에 관한 이야기이다. 그녀가 모조품인 줄 알고 싼값에 산 목걸이가 실은 수만 파운드에 달하는 진품 진주라는 보석 감정사의 말에 그녀의 인생이 역전한다. 우연히 귀중한 목걸이를 소유하게 된 사실 하나로, 사회는 그녀를 다르게 대하기 시작한다. 진주가 갑자기 빛나기 시작한 것이 아니라 세상이 그녀를 새로운 눈으로 보기 시작한 것이다. 진짜 진주 목걸이로 인해 그녀는 완전히 다른 신분이 된다. 그리고 또 하나의 문학 작품, F. 스콧 피츠제럴드의 〈위대한 개츠비〉가 생각난다. 개츠비와 데이지는 과거 사랑했던 사이다. 개츠비가 전쟁에 나가면서 이별했고 그 사이 데이지는 부유한 남자 톰 브캐넌과 결혼하기로 한다. 결혼식 전날 밤 데이지는 개츠비에게서 받은 편지를 읽고 큰 혼란에 빠진다. 그녀는 술에 취해 울면서, 톰에게서 받은 진주 목걸이를 집어던지며 그 결혼을 망설인다. 하지만 결국엔 다음날 톰과 결혼한다. 데이지는 사랑보다는 부와 안정, 그 상징으로서 비싼 진주 목걸이를 택한 것이다. 개츠비는 오직 데이지를 다시 만나기 위해 부를 쌓는다. 그녀의 집 근처에 집을 짓고, 그녀가 나타나길 기다리며 호화로운 파티를 자주 연다. 드디어 개츠비는 데이지와 재회를 하고 가까워진다. 어느 날 데이지가 개츠비의 차를 운전하다 여자를 치어죽이는 큰 사고를 낸다. 개츠비는 데이지를 보호하기 위해 자신이 운전했다고 거짓말을 한다. 개츠비는 죽은 여인의 남편 총격에 의해 허망하게 죽는다. 그러나 데이지는 개츠비의 장례식에도 참석하지 않고,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남편 팔짱을 끼고 그 도시를 떠난다. 개츠비는 사랑할 가치도 없는 여자를 위해, 또 과거에 집착한 나머지 현실을 망치고 만 것이다. 모파상의 마틸드는 가짜 목걸이로 진짜 인생을 잃었고, 서머셋 몸의 가정부는 진짜 목걸이로 가짜 인생을 얻었다. 그리고 위대한 개츠비의 데이지는 사랑보다 무거운 목걸이를 택했다. 현실로 돌아와 다시 목걸이 앞에 서 있다. 2022년 6월, 스페인 마드리드의 왕궁 만찬장에 윤석열 전 대통령과 함께 나토(NATO) 정상회의에 참석한 김건희 씨의 목에서 클로버 문양의 목걸이가 반짝이는 자태를 뽐냈다. 이 목걸이는 프랑스 명풍 ‘반 클리프 아펠’의 ‘알함브라’ 컬렉션으로 한국내에서 시가가 6000만원을 호가하는 제품이다. 3년 뒤 ‘판도라의 상자’를 여는 기폭제가 됐고, 김건희씨 구속 사유 중 하나로 주목받았다. 한때 우아함과 고급스러움을 상징하던 목걸이가 이제는 진품이니, 모조품이니, 뇌물이니 하는 부정적인 상징물로 전락했다. 그리고 그 목걸이에서 사람들은 수많은 이야기들을 뽑아내고 있다. 마치 목걸이 하나로 그녀의 삶을, 가치관을, 정치적 위치를 대변할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언론에는 연일 그 목걸이에 관한 보도가 이어졌다. 어떤 날은 그 가격이, 어떤 날은 브랜드가 어디였는지, 또 어떤 날은 과연 그것이 적절했는지, 영부인답지 않다는 비판이 줄을 이었다. 목걸이 하나가 이토록 많은 말을 낳는다는 게 기이하면서도, 어쩐지 익숙할 정도였다. 우리는 김건희씨가 착용한 그 목걸이에 왜 이토록 민감한가. 그것이 비싼 것이라서? 그것이 권력의 손에 쥐여졌기 때문에? 아니면, 그 목걸이 뒤에 숨겨진 어떤 의미를, 어떤 속내를 읽어내고 싶어서일까? 이 모든 질문은 목걸이 자체가 아니라, 그 목걸이를 보는 우리의 시선을 말해 주는 것 같다. 문득 ‘목걸이는 무슨 죄가 있을까?’는 생각이 든다. 장신구는 말이 없다. 그것을 바라보는 사람의 시선이 때로는 탐욕이 되며, 미움이 되고, 비판이 되기도 한다. 도대체 왜 사람들은 죄를 물건에 덮어씌우는 것일까. 목걸이는 말을 하지 않는다. 그 목걸이가 비난받는 이유는 단지 그것이 비싼 다이아몬드이어서가 아니라, 그것을 누가, 언제, 어떤 상황에서 걸었느냐 때문이다. 목걸이를 보는 우리의 시선이야말로 의미를 결정한다. 모든 여인은 인생에서 한 번쯤 목걸이를 두른다. 그것이 진주이든, 유리이든, 감추고 싶은 상처이든, 드러내고 싶은 존재이든. 오늘도 사람들 사이에서 빛나는 목걸이를 본다. 이름 모를 여인이 착용한 진주 목걸이를, SNS 속 셀럽이 드러낸 목의 윤곽과 금줄, 쇼윈도에 놓여 누군가를 기다리는 아름다운 목걸이를. 만약 김건희씨가 당당하게 우리 전통 장신구를 착용했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그리고 요즘 목걸이 하기가 싫어졌다는 친구에게 말한다. “친구야, 목걸이는 죄가 없다. 죄가 있다면 그걸 그렇게 사용한 사람이다”라고. 배광자 / 수필가문예마당 목걸이 수필 가짜 목걸이로 진주 목걸이 진짜 목걸이로
2025.10.02. 18:56
학생들의 행동 패턴을 보고, 그 부모의 직업을 대략 유추해 볼 수 있다고 하면 지나친 말일까? 내가 대학에서 영어과목을 가르칠 때의 일이다. 나는 매학기 첫 주에 A4 용지 1장 분량의 자기 소개서를 영문으로 써내라는 과제를 학생들에게 주었다. 그 과제를 주는 이유는, 첫째, 학생들의 영어 실력을 파악할 수 있고, 둘째, 수업에 임하는 학생들의 성실도를 가늠할 수 있고, 마지막 셋째. 그 두 가지 정보를 바탕으로, 강의 내용의 강도를 조절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여러 학기를 반복하다가, 나는 우연히 의도하지 않은 데이터를 얻게 되었다. 한국의 학생들은 집단주의 문화의 영향으로, 자기 소개서에 본인에 관한 것보다는, 주로 가족이나, 본인이 속한 조직, 친구, 또는 사는 동네에 관해 진술한다. 그래서 자연히 그들의 배경에 대해서 알게 된다. 특히 학생들은 자기 소개서에 부모의 직업에 관해서 꼭 기술한다. 그런데 놀랍게도 부모의 직업이 자녀의 행동 패턴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내가 기술할 이 내용은 과학적 실험을 토대로 한 것이 아니므로, 그저 한 개인의 재미있는 경험담으로 이해해주면 좋겠다. 학생들 중에 여하간 상냥한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모두에게 상냥하고, 여간해선 불쾌감을 드러내지 않는다. 또, 그들은 상대방의 말에 장단을 잘 맞춘다. “아,” “그래?” “정말,” “하하,” 사교계에서 매우 인기 높을 성격들이다. 그들의 부모는 대개 동네 장사를 한다. 예를 들어, 아파트 단지의 마켓이나, 꽃가게, 선물가게, 약국, 문방구, 식당, 등. 동네에서 인심을 잃으면 안 되는 직업이다. 그들의 상냥함은 작은 꽃 같이 참 예뻤다. 학기 내내 지각을 한 번도 안 하고, 먼저 와서 기다리고, 결석은 더더구나 안 하는 학생들이 있다. 그들은 수업이 끝나기 전에 먼저 강의실을 떠나는 법도 없다. 이 학생들에게는 특이한 성실감이 있는데 바로 ‘시간엄수’이다. 일단 그 시간에 그 자리에 와있어야 한다. 그에 덧붙여 노트정리를 잘한다. 이들의 부모들은 대개 공무원이다. 칼 출근, 칼 퇴근. 아주 간혹 연장근무 하는 공무원들에게 감사하며 이 글을 쓴다. 융통성이 좋은 학생들이 있다. 갑자기 예기치 않은 일이 닥치면, 대학 1·2학년 18살짜리들은 대개 경직되거나, 우왕좌왕하게 마련이다. 그런데 전혀 당황하는 기색 없이, 서둘러 문제를 해결하려는 태도를 보이는 학생들이 있다. 뛰어난 임기응변을 보이는 이 학생들은 사업하는 집의 자녀들이다. 사업을 하다 보면, 언제나 불쑥불쑥 변수가 튀어나오게 마련인데, 그때마다 놀라 자빠지면 어떻게 사업을 하겠는가! 돈이 제때에 들어오지 않는 경우도 다반사일 것이고, 엉뚱한 데에서 사고가 나거나, 예기치 않은 비용이 갑자기 발생하는 날도 얼마나 많을까. 사업하는 집의 자녀들은 웬만해선 놀라지 않는다. 학생들이 돈을 쓸 때도, 부모의 직업이 드러난다. 크게 두 부류로 나뉜다. 즉흥적인 그룹과 신중한 그룹. 즉흥적인 행동을 보이는 학생들은 자영업을 하는 집들이고, 대부분 현금이 매일 들어오는 비즈니스이다. 이들은 그때 그때 필요한 비용을 그냥 호주머니에서 주먹 꺼내듯이 소비하고, 돈 계산을 뭉치고 합산해서 큰 단위로 한다. 반면, (학생 수준에서의) 목돈을 사용해야 할 때, 작게 잘라서 날짜를 따져가며 쓰는 학생들은 월급받는 집의 자녀다. 이들은 회비를 내야 한다면, 미리 약간씩 몇 번에 나누어 저축해서 내고 특히 충동적인 소비를 하지 않는 편이다. 특이하게도, 기말고사를 준비하는 기간인데, 중간고사 이전 부분에 궁금한 점이 생겨 질문을 하는 학생들이 있다. 누구라고 할 것 없이 기말고사가 코앞인데, 시험 범위에 포함되지도 않는 이미 지나간 부분을 다시 들추어 보는 학생은 매우 드물다. 이 드문 학생들의 부모는 교수이거나 연구원이다. 연구하는 부모를 둔 학생들은, 시험에 상관없이, 자신이 갖고 있던 기존의 지식과 새로 입력되는 지식 사이에서 비교, 대조, 검증하는 습관이 있다. 선생을 어려워하지 않는 학생들이 있다. 대부분의 사람은 어렸을 때, 선생님들은 화장실도 안 가는 걸로 오해했던 경험이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 정도는 아니더라도 간혹 선생을 존경은커녕, 그냥 많은 인간들 중의 하나임을 아는 학생들이 있다. 말할 것도 없이 그들의 부모는 교사다. 그 학생들은 어렸을 때부터 선생인 아빠가 집에서 엄마한테 매일 혼나는 것을 보면서 컸을 것이고, 또는 선생인 엄마가 비이성적인 잔소리를 줄곧 하거나 쩨쩨하게 행동하는 것을 목도했을 것이다. 그러니 강단 위에 서 있는 저 선생도 흠 많은 인간 중의 하나라는 것을 아주 일찍 깨달았음에 틀림없다. 그런 학생에게 어설피 위엄을 세우려다가 오히려 아주 우스워질 수 있다. 어느 날, 새로운 종이 나타났다. 못 보던 부류의 학생들이 나타난 것이다. 그들의 특징은 지나치게 당당하다는 것이다. 한국에는 지각하는 학생들이 보여주는 공통된 행동패턴이 있다. 일단 강의실의 뒷문을 빠끔히 열고, 안의 분위기를 확인한다. 예를 들어, 교수가 호통을 치고 있거나, 돌발 시험을 보고 있는 등, 분위기가 경직되어 있는 것 같으면, 아예 포기하고 결석해 버린다. 강의실 분위기가 별문제 없는 것 같으면, 지각생은 일단 빈자리를 파악한다. 그리고 문을 열고 들어와 90도로 인사하고, 등을 숙인 채로 잽싸게 빈자리로 가서 앉는다. 그런데 그런 절차 없이 당당하게 문을 활짝 열고 들어와 시찰하듯 한 바퀴 쭉 둘러본 뒤, 고개를 ‘빳빳이’ 들고 마음에 드는 자리에 가서 착석하는 학생이 어느 날 나타났다. 나는 처음에 참 특이한 ‘싸가지’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런 학생들이 이후로 종종 나타났다. 이런 태도의 학생은 다른 학생들의 눈에도 놀라움이었다. 그런 류의 지각 학생이 처음 나타났을 때, 같은 강의실에 앉아 있던 모든 학생들의 뜨악한 표정을 나는 기억 한다: “쟤는 뭐지?” 그들은 군인의 아들딸들이다. 군인은 어떠한 일이 있어도 사기가 떨어져서는 안 된다. 당당함은 그들의 생명이다. 비록 적군의 포로가 되더라도, 비굴해서는 안 된다. 잘못해서 벌을 받을지언정, 군인은 주눅 들어서는 안 된다. 바로 학교 근처로 육해공 삼사의 대학원과 군 시설이 옮겨왔고, 군인의 자녀들이 내가 근무하던 학교에 입학했던 해였다. 마지막으로 하나 더 희귀한 종이 있었다. 처음에는 나도 종잡을 수 없었는데, 매우 희귀한 직업군이라 숫자가 많지 않아서였다. 학생들은 자기가 좋아하는 교수에게 작은 선물을 하곤 한다. 커피 한 잔일 수도 있고, 시집이나, 예쁜 책갈피, 또는 초콜릿, 꽃 한 송이 등이다. 그런 선물을 줄 때는 강의 시간 전에 몰래 교탁 위에 올려놓거나, 아니면 강의 끝나고 수줍게 ‘바치는’ 모습으로 주는 것이 보통이다. 그런데 마치 ‘하사하듯이’ 주는 학생들이 있다. 나는 요거트 한 개나 커피 캔 하나를 ‘의문의 권위’를 가진 학생으로부터 하사받았다. 그들은 성직자의 자녀이다. 신도 아닌 것이 인간도 아닌 것이, 하늘과 땅 사이 어느 중간에서 살면서, 인간을 계도하느라 몸에 밴 태도인 것 같았다. 하나님의 은총이 함께 하기를! 이 글을 마칠 즈음, 갑자기 도둑의 자녀는 어떤 태도를 갖고 있는지 궁금해졌다. 그러고 보니, 나는 도둑의 자녀를 만나 본 적이 없다. 아, 하나가 빠졌다. 농부의 자녀! 그들은 대단히 정직하다. 그들의 뚝심은 쉬이 흔들리지 않는다. 농부의 아들이 한 번 아니라고 하면 그것은 진짜 아닌 것이다. 콩 심은데 팥 안 나는 것 맞다. 이 세상, 각자의 직업에서 열심인 모든 젊은이들, ‘화이팅!’ 마리 송 / 시인문예마당 수필 지각 학생 학생 수준 강의실 분위기
2025.09.04. 18:52
배우 선우용여가 최근 자신의 유튜브 채널에서, 매일 아침 벤츠차를 직접 운전해 호텔로 가서 조식 뷔페를 먹는 모습을 공개해 화제가 됐다. 그녀의 나이는 81세다. 그녀는 “돈 아끼면 뭐해. 집에서 혼자 궁상맞게 있는 것보다 아침 먹으러 가면서 화장도 하고 옷도 차려 입고 나서면 스스로 힐링이 된다. 식당에 있는 사람들과 눈인사를 나누는 것이 너무 즐겁다”고 했다. 그녀는 아침 식사로 호텔 조식을 선택한 이유에 대해 “남편이 있을 땐 가족들 밥을 해줘야 했다. 남편이 돌아가시고 애들은 다 시집 장가 가고, 이제는 내 자신을 위해 살아야 한다. 내 몸을 위한 돈을 아끼면 뭐 하나. 남은 돈, 이고 지고 가나? 그래서 나를 위해 투자를 한다”고 했다. 요즘 나를 위해 지갑을 여는 중장년층이 늘어난다고 한다. 인생 2막을 당당하고 즐겁게 살기 위해 자신에게 투자하는 것이다. 그런 세태에 맞춰 ‘액티브 시니어’ 산업이 뜨고 있다. 액티브 시니어란 빠른 고령화와 함께 건강하고 활동적인 중장년층을 칭한다. 액티브 시니어 세대는 이전 부모 세대와는 마음 가짐 자체가 다르다. ‘아끼면 뭐해, 즐겁게 살자’ 이런 마인드로 바뀌고 있다. 돈은 다시 벌면 되지만, 오늘은 다시 오지 않는다. 오늘 하루, 커피 한 잔이라도 내가 즐겁게 마신다면 충분히 가치가 있다. 자신에 충실한 삶을 살자는 것이다. 노년에 돈은 많이 벌어 놨지만 건강을 잃고, 살날이 얼마 남지 않다면 인생이 너무 허망하지 않은가. 평생 안 먹고 안 쓰며 모은 돈이 무슨 소용이란 말인 가. 내 대학 동기 중에는 젊어서 미국 와, 부부가 열심히 일한 덕에 쇼핑 몰을 몇 개나 갖고 있고 여러 개의 비즈니스를 운영하는 친구가 있었다. 그러나 비즈니스에 매여 여행 한 번 제대로 못해보고 일만 했다. 집 안의 소파와 안락의자는 단지 남에게 보여주기 위한 가구일 뿐, 평소에는 그것들이 닳지 않도록 커버를 씌워 놓았다가 손님이 와야만 벗겼다. 은퇴 후 좋아하는 골프도 치며 인생을 즐기려던 차에 당뇨 합병증으로 눈이 안 보이게 됐다. 나중에는 병원 침대에 누어서 오랜 세월 남편과 간호하는 분의 도움이 없이는 자기 몸도 가누지 못하다가 세상을 떴다. 얼마나 허무한 인생인가. 돈을 버는 이유가 삶을 즐기기 위해서였는데, 정작 그걸 제대로 누려보지 못하고 가다니. 쇼핑몰이 여러 개인들 그게 무슨 소용이란 말인 가. 최근에 출간된 베스트셀러 한 권을 읽었다. 미국의 투자자 빌 퍼킨스가 쓴 책으로 원제는 ‘Die With Zero’ 인데 한글 제목은 ‘역전하는 법’이다. 이 책의 핵심은 ‘우리의 삶이란 우리가 경험하는 것들의 총합이다. 즐겁고 의미 있는 경험을 위해 죽을 때 통장의 잔고가 제로가 되게 하라’로 요약된다. 즉 ‘가진 돈을 다 쓰고 죽어라’다. 인생의 진정한 가치를 경험과 추억을 통해 찾아라. 그러기 위해 ‘다 쓰고 죽기’를 목표로 삼으라. 평생 하고 싶었지만 생업에 매여 못했던 것들을 생전에 원없이 해보라고 권한다. “그럼 자식들은요” “그렇게 살면 너무 이기적이지 않냐요”라고 생각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다 쓰고 죽으라는 말은 자녀들에게 남겨줄 돈 한푼 없이 전부 쓰고, 빈털터리로 죽으라는 뜻이 아니다. 다 쓰고 죽기를 위한 계획에는 자녀도 포함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생전에 자녀 몫으로 떼어 놓고 당신이 가진 돈을 죽기 전에 전부 쓰라는 것이다. 자녀들에게 유산을 물려주는 일도, 기부도 살아생전에 해서 그 감동을 맛볼 것을 작가는 조언한다. 자신의 시간과 돈을 활용하기 위해서는 타이밍이 중요하다. 오직 특정 시기에만 즐길 수 있는 경험도 있기 때문이다. 아무리 돈이 많아도, 늙어서 할 수 없는 경험들이 많다. 돈 낭비라는 두려움 때문에 시기를 놓치면 인생이 헐값 된다. 돈이 아까워서 끌어안고 있다가 죽음을 맞는 어리석음을 피하라고 한다. 요즘 세대와 달리 우리 때는 결혼 전에 돈에 대해서 너무 순진했다. 결혼 전에 오빠가 남편의 가족 사항 등 이것저것 물어보더니 “너희들은 연애하며 셰익스피어만 얘기하니?”라고 핀잔을 줬다. 당시 아버님은 경제 활동이 없으셨고 남편은 말단 기자였다. 게다가 부모님에, 여동생 넷, 남동생 하나, 미국에 계신 손위 누님이 맡긴 조카까지 대가족의 맏아들이었다. 오빠가 보기에 결혼 후 우리가 경제적으로 힘들 것은 불 보듯 뻔했기 때문이었다. 결혼 후, 장로님이신 아버님께서 걱정말라는 의미인지는 몰라도 성경 책을 펼쳐 놓으시고 ‘공중의 새와 들의 백합’ 비유를 말씀해 주셨다. 아버님의 말씀처럼, 또 ‘사람은 다 자기 먹을 것을 가지고 태어난다’는 속담처럼 하나님께서 내게 맏며느리 역할을 잘 감당하게 해 주셨다. 지금은 그때의 힘들었던 상황을 훈장처럼 가슴에 달고 산다. 석인성시(惜吝成屎)라는 사자성어가 있다. 아끼고 아끼다가 똥이 된다는 말이다. 돈이 아무리 중요해도 돈은 써야 가치가 있는 법이다. 열심히 노력해서 번 돈을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는 일에 써야 한다. 젊은 시절, 미국 와서 주위 여자들과 예쁘고 값비싼 그릇 모으기에 열을 올렸다. 너무 아까워서 나중에 귀한 손님이 올 때 쓰려고 진열장에 넣어두고 평소에는 저렴한 그릇만 썼다. 나이 먹어 자식들에게 물려주려 하나 그런 그릇 불편해서 거저 줘도 싫다고 한다. 이런 애물단지가 없다.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다. 그때 그때 즐겨야 한다. “나중에, 나중에”하다 보면 그 나중은 오지 않을 수도 있다. 지금 누리지 못한 오늘은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잘 산 삶은 은행잔고가 아니라 경험이 결정한다. 심리학 연구를 통해 ‘물질에 돈을 쓸 때보다 경험에 돈을 쓸 때 더 행복감을 느낀다는 것이 입증되었다. 경험은 추억을 남긴다. 사람은 인생에서 은퇴하면 추억을 연금처럼 받게 된다. 다른 것들은 대체할 수 있지만 추억은 값을 매길 수 없을 만큼 소중하다. 더 늦기 전에 즐겁고 의미 있는 경험을 많이 해봐야겠다. 우리는 늘 열심히 살아야 한다고 배웠다. 하지만 열심히 사는 것과 제대로 사는 것의 간극, 그 틈은 때때로 전 생애를 갈라 놓기도 한다. 돈 버는 것 못지않게 지혜롭게 잘 쓰는 걸 익혀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돈 계산 그만하고 가진 돈을 최대한 잘 쓸 계획을 세워야겠다. 배광자 / 수필가문예마당 수필 액티브 시니어 인생 2막 세월 남편
2025.08.14. 19: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