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이름은 이윤희다. 결혼 후 남편 성을 따라 김윤희로 살아온 세월이 길다 보니 이제는 이윤희보다 김윤희가 더 자연스럽고 익숙하게 들린다. ‘진실 윤’ ‘바랄 희’ 진실만 바라며 살라는 부모님의 염원이 담긴 이름은 아버지께서 지어 주셨다.
우리나라는 문중의 항렬과 사주를 고려한 한자 이름이 일반적이었지만 2000년대 초부터 순우리말이 유행하기 시작했다. 요즘처럼 국제화된 시대에는 영문 표기와 발음이 쉬운 받침 없는 이름을 선호한다고 한다. 이름에도 시대의 흐름과 트렌드가 있다는 말이 실감난다. 아버지가 지어 준 ‘진희, 주희, 윤희’ 우리 세 자매의 이름은 반세기가 훌쩍 지난 지금도 촌스럽지 않다는 말을 자주 듣는다.
‘희야’는 우리 집안 여자들의 공용 호칭이었다. 넓은 잔디밭과 정원 가장자리에 한옥과 양옥이 기역자 형태로 배치된 집에서 조부모님과 부모님, 두 언니와 두 오빠, 엄마의 살림을 도와주던 순자 언니, 그리고 막내인 나까지 열 명이 함께 대가족으로 살았다. 식사를 제외한 대부분의 시간을 주로 한옥에서 보내셨던 할아버지 할머니는 조그마한 일에도 우리를 자주 호출하셨다. “희야”하고 부르면 엄마와 세 자매는 합창하듯 “예” 하고 대답했지만 결국엔 막내인 내가 떠밀려 심부름을 도맡게 되었다. 그래도 몰래 챙겨주시던 용돈 받는 재미에 두 분의 기침 소리만 들려도 전광석화처럼 달려가곤 했다. 언니 오빠들은 슬쩍 눈치를 보며 딴청을 피웠지만, 그 심부름 끝에 주어지는 달콤한 사탕이나 빳빳한 지폐의 유혹은 막내인 내가 결코 외면할 수 없는 보상이었다.
우리 식구들은 나를 ‘막둥이’라고 불렀다. 여고생이 되기 전까지는 집안의 자잘한 심부름은 거의 내 몫이었다. 그래서 동생 있는 친구들이 무척이나 부러웠다. 막내의 설움을 운운하며 투덜대기도 했지만, 돌이켜보면 막내라는 이유로 받은 특혜와 내리사랑은 늘 변함없이 이어져 왔다. 열 손가락 깨물어 안 아픈 손가락이 어디 있겠느냐 마는 세상 부모들이 막내를 더 애틋하게 여기는 건 그 자식과의 인연이 상대적으로 짧을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형평성에 맞지 않는 상황에도 묵묵히 이해해주던 형제자매들에게 한때나마 품었던 불만이 괜스레 미안해진다.
사촌의 출산 소식을 듣고 병원으로 달려갔다. 산모 병실을 확인하기 위해 안내 데스크로 다가가자 간호사는 “무엇을 도와드릴까요?”하고 묻는다.
엄마 안 공(Ahn S Kong), 아빠 상 공(Sang S Kong), 아기 조이스 공(Joyce Kong)을 만나러 왔다고 하니 금방 찾아 준다. 동양인이 드문 병원이라 금세 눈에 띄었나 보다. “‘앤 콩, 생 콩, 조 콩’은 203호 입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한글 이름을 영어로 소리 나는 대로 표기하다 보면 예기치 않게 벌어지는 흔한 해프닝이었지만, 콩 콩 콩이라니. 간호사에게 이 웃음의 의미를 설명해주려 했지만, 언어의 장벽을 넘어 그 미묘한 어감의 재미를 전달하기란 불가능에 가까웠다. 간호사는 무슨 일인지 영문을 몰라 갸우뚱거리며 그저 따라 웃을 뿐이었다.
그날 이후 우리 가족에게 ‘앤 콩, 생 콩, 조 콩’은 한동안 박장대소의 화제가 되었고, 아직도 그때를 떠올리면 웃음이 절로 난다. 특별한 추억을 남겨준 그 간호사는 지금도 어딘가에서 또 하나의 ‘웃기는 한국 이름’을 작명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이름은 운명이라고 할 만큼 인생에 큰 영향을 주기도 한다. 삶에 굴곡이 많은 이들 중에는 운세를 바꾸기 위해 개명을 하고, 무명 생활이 길어진 연예인은 예명으로 재기의 발판을 삼는다.
그 효력이 과학적으로 검증된 바는 없지만 실제로 성공 사례는 종종 들려온다. 개명 사유 중에는 이름의 어감이 좋지 않거나 놀림감이 된다는 것이 가장 많다는 통계를 보았다.
‘송 아지’나 ‘방 귀남’처럼 성과 이름의 부조화로 놀림을 당하는 경우도 적잖게 볼 수 있다. 평생 불릴 이름이 자신에게 열등감을 느끼게 한다면 개명을 통해 자존감을 회복하는 것도 하나의 좋은 해결책이 아닐까. 새로운 이름으로 새 인생을 시작하려는 이들의 마음은 단순히 운을 바꾸려는 시도를 넘어, 온전한 자신으로 존중받고 싶은 간절한 소망일지 모른다.
유대인의 경전 ‘탈무드’에 따르면 사람은 세 가지 이름을 갖는다고 한다. 첫 번째는 태어났을 때 부모님이 지어주신 이름, 두 번째는 살면서 가까운 사람들이 애정을 담아 붙여준 별명 또는 애칭, 세 번째는 삶이 끝났을 때 지인들이 기억하는 이름이다.
득과 실에 너무 연연하지 말고 남보다 조금 손해 보며 살라는 부모님의 가르침을 마음에 새기며 나는 인생의 후반기를 그렇게 걸어 가려 한다.
인생의 시작은 이름에서 출발한다. 그렇다면 부르기 좋고, 듣기 좋고, 의미 있는 이름을 선물 받은 내 인생의 시작은 꽤 괜찮은 편이다. 삶의 여정 속에서 마주할 장애물 앞에서도, 정직하게 살아가길 바랐던 부모님의 당부. 그 뜻을 내 이름에 담아 주셨음을 이제야 깊이 느낀다. 앞으로 누군가 내게 ‘윤희’의 뜻을 묻는다면 나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