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회 야외 워크숍에서 사회자가 던진 화두였다. 눈앞에 펼쳐진 바다는 하늘에서 감아내린 무지갯빛 타래를 풀어내며 고요히 반짝였다. 저편 등대 불빛이 오랜 기억의 장을 비추고 그 속에서 나를 바라보시던 한 분, 선생님을 떠올렸다.
그 시절은 한국전쟁의 상흔이 아직 삶 곳곳에 남아 있던 때였다. 가난했지만 사람들의 마음은 골짜기 돌 틈에서 스며나오는 샘물처럼 맑고 따스했다.
그 해 여름, 초등학교 3학년이던 나는 ‘선생님께 편지 쓰기’라는 방학 숙제를 받았다. 누군가에게 편지를 쓴다는 건 어린 마음에 신기한 일이었다. 더구나 그 대상이 선생님이라니 가슴이 더욱 두근거렸다. 어떻게 써야 할지 몰라 한참을 망설였지만, 알 수 없는 설렘에 마음을 얹어 한 자 한 자 써내려갔다.
돌이켜보면 그것이 내 생애 첫 글쓰기였다. 편지를 다 쓰고 난 뒤엔 어떻게 보내야 할지 몰라 학습장 갈피에 꼭 끼워두었다가 개학 날 함께 제출했다.
며칠 뒤 선생님께서 내 이름을 부르셨다. “얘들아 방학 숙제로 선생님께 편지를 써온 친구는 전교에서 김영신 한 명뿐이란다. 그 편지가 얼마나 예쁘고 감동적인지, 선생님은 읽으며 참 기뻤단다. 지금 너희에게 읽어주려고 해.”
낭낭한 목소리가 교실 가득 울려 퍼질 때 내 가슴에 감동이 파문처럼 번졌다. ‘내 글이 아름답다니.’ 처음 들어본 칭찬이 자긍심에 심지를 세우고 불을 지펴 주었다.
“이 글은 전교에 돌려 읽힐 거예요. 모두에게 큰 배움이 될 거예요.”
그날 선생님은 방과 후 교실에 남으라고 하셨다. 수업이 끝난 뒤 혼자 앉아 있던 내 책상 위에 선생님은 하얀 묶음지 한 권을 내미셨다.
“영신이 글 솜씨는 참 특별하구나. 오늘부터 이 노트에 매일 글을 써보자. 편지를 썼듯이, 네 마음을 글로 옮겨보는 거야.”
그 말씀은 내가 알지 못했던 세계로의 초대장이었다.
책이라곤 교과서뿐이던 내게 ‘글을 쓴다’는 건 생소하기만 한 일이었다. 멍하니 연필만 쥔 나를 보며 선생님은 다정히 일러주셨다.
“편지를 처음 써봤다고 했지? 그게 바로 글이란다. 네 마음속 이야기를 꺼내 적어보렴. 너의 글에는 특별한 감성이 있어.”
그날부터 나는 방과 후 교실에 남아 글을 쓰기 시작했다. 선생님은 한 번도 글의 방향을 지시하거나 잘못을 지적하지 않으셨다. 그저 창가 책상에 앉아 자신의 일을 하며 내가 글을 마칠 때까지 말없이 기다려 주셨다.
이제는 안다. 그 침묵 속에 한 아이를 향한 믿음과 애정, 인내와 격려가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는 것을. 햇살이 가득하던 창가, 두 사람만의 고요한 시간 속에서 내 안의 작은 우주가 돌기 시작했다.
나는 글을 배우기 전에 ‘듣는 법, 느끼는 법, 기다리는 법’을 먼저 배웠다.
그때 쓴 글 중 하나는 선생님이 공모전에 내주셔서 상을 받았다. 하지만 내게 가장 빛나는 상은 따로 있었다. 바로 방과 후의 시간 그리고 선생님이 내어주신 마음의 자리였다. 그건 마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가 토끼굴을 지나 처음 내디딘 새로운 세상처럼, 내 안의 가능성을 찾아가는 경이로운 첫 여정이었다.
그 시간이 더 오래 지속하였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반 학기가 지나 이사를 하게 되어 전학을 갔다. 새 학교에서의 첫 작문 시간, 담임 선생님이 내 글을 반 친구들 앞에서 읽어 주셨다. 잘 쓴 글이라는 칭찬의 말이 이어질 때, 창가에서 미소 짓던 옛 선생님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건 그리움의 반향이었을까, 아니면 말로 다 하지 못한 감사의 투영이었을까.
이후 중고교 시절 전국 백일장에 참가해 상을 받기도 했고, 대학에서는 학보사 기자로 글쓰기를 이어갔다.
그러나 결혼과 함께 미국으로 이주하면서 글은 삶의 뒤안길로 물러났다. 생계와 자녀 양육, 낯선 땅에서의 삶은 고되고 숨가빴다. 그렇게 반세기가 넘는 세월이 흘렀다.
이제 일흔을 훌쩍 넘긴 나는 다시 펜을 들었다. 살기에만 바빴던 이민의 세월 끝에 비로소 ‘나’를 마주하게 된 지금, 나를 찾아 글을 쓰기 시작했다. 그렇게 쓴 첫 글이 등단이라는 포상으로 돌아왔고, 내 이름 앞에는 ‘문인’이라는 두 글자가 더해졌다.
한 편의 글을 써낸다는 것은 고통이자 눈부신 기쁨의 과정이다. 늦은 나이에 이 길로 들어설 수 있었던 건, 그 첫 불씨를 밝혀주신 선생님 덕분이다.
오늘도 나는 선생님께 드렸던 첫 편지를 쓰는 마음으로 글을 쓴다. 선생님께서 내어주셨던 방과 후 시간처럼 내 인생의 방과 후에 펜을 들었다. 내 마음이 글이 되기까지 기다려주셨던 그분을 생각하며.
들판에 막 움튼 새싹을 찾아내어 살피고 돌보시던 분. 평범한 한 아이에게 정성을 다해주셨던 그 헌신은 오늘도 내 길을 비추는 등대 불빛처럼 반짝인다. 글을 쓰기 전에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삶으로 보여주셨던 분. 내게 세상을 향한 따스한 시선이 있다면 그 뿌리는 당신에게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내 인생에 일찍이 선생님을 만난 일은 한 생애를 비추는 보배로운 축복이었다. 이제, 오래도록 마무리하지 못했던 편지의 끝말을 올린다.
“선생님, 감사합니다. 제 안에 심어주신 불씨가 긴 세월을 돌아 이제 제 인생의 방과 후를 밝히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