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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예마당] 불빛은 꺼지고 마음은 켜지고

빛이 사라졌다. 동네는 숨을 죽인 듯, 순식간에 어둠 속으로 잠겼다. 다행히 낮 동안 햇빛을 머금은 썬라이트가 현관 앞을 은은히 밝힌다. 집 안의 불빛과 기계음이 모두 멎자 고요가 스며들고, 주변은 깊은 정적 속으로 가라앉았다. 문명에 기대어 살아온 우리의 일상은 전기가 멈추는 순간 속절없이 무너졌다. 조금 전까지 열기를 내뿜던 히터가 꺼지자 찬 공기가 집 안 구석까지 파고든다. 휴대폰 배터리가 바닥을 드러내자 마음도 덩달아 불안해졌다   갑작스러운 정전 속에서 가족들은 본능처럼 한곳으로 모였다.   “다들 괜찮아? 조심해.”   짧게 오가는 말 한마디가 어둠 속에서 작은 등불처럼 마음을 밝혔다. 빛이 사라지자 손으로 주변을 더듬고 귀를 기울이다 보니, 청각과 촉각은 한층 더 예민해졌다. 빛 한 점 남지 않은 집 안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건, 손전등과 초를 찾아 작은 불빛을 밝히는 것뿐이었다.   전류가 멈추자 집 안의 전자제품들도 일제히 침묵했다. 가사를 도와주던 청소기와 세탁기, 나의 메신저가 되어 주던 컴퓨터, 세상 돌아가는 소식을 전해주던 TV까지 모두 무용지물이 되었다. 익숙하던 생활의 소리가 사라진 자리에 묵직한 정적만이 감돈다.     그 틈으로 창밖에서 그동안 들리지 않던 생명의 숨결이  흘러들어왔다. 이름 모를 풀벌레의 울음, 스치는 나뭇잎의 속삭임, 멀리서 들려오는 아이들의 웃음소리까지. 기계음에 가려 잊고 있던 소리들이 조용히 귓가에 스며든다.   서너 개의 촛불이 가까스로 어둠을 밀어낸다. 거실에 희미한 불빛이 번지자 벽에는 아련한 그림자가 어른거렸다. 불꽃이 흔들릴 때마다 그림자는 춤을 추고, 그곳은 작은 극장이 된다. 아들과 딸은 손으로 새와 나비를 만들어 벽과 천장에 날려 보내고, 작은 불꽃은 벽을 캔버스 삼아 이야기를 그려낸다. 어둠은 반드시 불편함만을 남기지는 않았다. 빛이 사라진 공간은 오히려 마음이 모이는 자리로 바뀌었고, 각자의 일상을 잠시 내려놓은 우리는 한곳에 모여 예고 없이 찾아온 시간을 또 하나의 소중한 추억으로 새겼다.   어린 시절, 정전은 낯설지 않았다. 온 동네에 어둠이 내려앉으면 아버지는 마당에 모닥불을 피우셨고, 우리 형제들은 평상에 둘러앉아 아버지가 가리키는 별자리를 바라보며 그 유래와 전설을 듣곤 했다. 둥근 달을 올려다보며 달 속에서 토끼가 방아를 찧고 있는 형체를 발견하고는 정말 그곳에 토끼가 살고 있다고 믿었던 시절이었다. 어머니가 토끼에게 소원을 말하면 들어준다고 하자 언니들 따라 “부모님이 오래오래 건강하시길” 빌었던 기억이 아직도 선명하다   몇 시간이 지났을까. 윙― 하는 소리와 함께 캄캄했던 집안이 다시 빛으로 채워졌다. 냉장고는 낮은 숨을 고르고, 시계는 잃었던 박동을 되찾았다. 그러나 일상으로 돌아온 안도감 속에서도 어둠이 남긴 여운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환해진 거실의 물건들은 하나같이 낯설게 다가왔다. 잠시 멈춰 섰던 시간은  내가 얼마나 많은 것들을 당연히 여기며 살아왔는지를 돌아보게 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곁에 있는 것들의 소중함을 자주 잊는다. 늘 옆에 머물러 주는 사람들, 영원할 것만 같던 건강과 시간, 그리고 아무 일 없어 보이던 일상까지도. 누릴 때는 미처 깨닫지 못하다가 사라지고 나서야 비로소 그 가치를 알게 된다. 어쩌면 우리에게도 잠시 멈춰 서서 삶을 돌아볼 시간이 필요한지도 모른다.     쉼 없이 흘러가는 일상 속에서 무엇을 놓치고 있는지, 어디를 향해 달려가고 있는지 스스로에게 묻는다.     이 아침, 그날의 어둠을 떠올리며 평범했던 하루를  다시 마음에 담아본다. 김윤희 / 수필가문예마당 불빛 마음 불빛과 기계음 휴대폰 배터리 시절 정전

2026.01.29. 18:30

[문예마당] 새해 설날에 겨울비를 맞으며

병오년 새해를 맞이하여     말처럼 뛰어다니는 올 한 해가 된다면   참 좋겠습니다       88  미수를 맞이하여   꿈도 많고 감회가 벅차지만   마음처럼 몸이 따라주지 않을 것 같아   걱정이 앞섭니다       팔팔하게 살자는 구호처럼   신나고 씩씩하게 살 수만 있다면   내 생애 최고의 해가 될 것 같습니다       송구영신 예배를 드리고   새해 벽두에 비를 맞으며 집으로 왔습니다   주룩주룩 하염없이 내리는 비가     잔잔한 호수 같은 내 마음에 파문을 그리며     찾아와 나를 술렁이게 하고     돌아가신 큰 오라버니의 해맑은 얼굴을 떠올리게 합니다   주저앉지 말고 말처럼 일어서서 뛰어 보라는   그의 음성이 귓전을 두드립니다       오라버니는 말띠여서     평생 뛰어다니며   우리나라 항결핵 사업에 평생을 바치신 거인       하나님께서 그에게 새 힘을 주셨듯   내 마음 밭에도 꽃씨를 심어주시고   꽃피울 꿈을 환히 안겨다 줄 봄을   이만치 성큼 다가오게 해 주셔요. 김수영 / 시인문예마당 겨울비 새해 새해 설날 새해 벽두 송구영신 예배

2026.01.29. 18:30

[문예마당] 남쪽 캘리포니아의 봄

여기선 애타게 봄을 기다릴 일 없다   겨울이 없는 이곳에선   늦가을인 듯 초봄인 듯   그렇게 한 계절이 바뀐다   지구촌 북반구가 온통   눈과 얼음으로 뒤덮여도   여긴 떨어지지 않은 단풍잎 사이로   새 꽃들이 얼굴을 내민다       멀지 않은 마운트 볼디 산정엔   하얀 눈빛 모자 선명한데   돌배 꽃 가로수는 참지 못하고   돌아서서 하얀 웃음 터뜨린다   아직 1월이 한참 남았는데   아침 산책길 철쭉꽃 자목련   빵긋 웃고 인사를 한다       일 년 내내 골프 칠 수 있는 곳   거위털자켓 필요 없는 곳   눈 속에 파묻힌 마을들   빙판길 갇힌 차 행렬   뉴스 시간에 보면서   남쪽 캘리포니아 주민인 우리   남몰래 행복의 가슴 쓸어내린다.  강언덕 / 시인문예마당 캘리포니아 남쪽 남쪽 캘리포니아 지구촌 북반구가 뉴스 시간

2026.01.29. 18:30

[문예마당] 내가 세운 새해 설계

새해엔 이런 계획을.....   숲 속 새들조차 새벽길로 나를 유혹하는데   굿모닝 인사하는 맑음의 요정들     여윈 잠 털어내며     요술 부리는 동쪽 붉은 하늘 바라보면서 걷는     활기찬 사람들 웃으며 손짓하는 곳     이것은 빛을 품어내는 만남입니다       풀어지듯 흩어지는 구름 바라보며     이마를 간지르는 바람 속을   난 행복해 하며 내 삶을 키워봅니다   하늘빛 빙하 물인 저 하늘 보며 개발하는 중이지요   아픔이 없는 세상 슬픔이 없는 세상이기를     읊조리며 간구합니다       기분 좋은 약속 받아 쥐고     고난의 짐 짊어진 채 층계를 오르고 자갈길을 걸으며     나만의 전설을 만드는 중입니다     손을 높이 들고 만끽해 보는 일     이 골목 저 골목 들여다 보는 재미가 쏠쏠합니다     수렁으로 내려가는 걸 막아야 하지 않을까요     세속의 고민을 싹 다 잊을 것 같습니다       푸르게 일어서는 솔 향기 듬뿍 마시며     구불구불 언덕을 넘고     꼬부랑 길 돌아 시름을 모두 씻어주는   자연의 소리 벗 삼아 오롯이 즐기며     지푸라기라도 잡는다는 맘 안고     바람과 햇살 새소리로 단련하면서     갈색 낙엽 길을 맹약관화 라지만     동산 바치로 살자 다짐합니다  엄경춘 / 시인문예마당 새해 설계 새해 설계 하늘빛 빙하 햇살 새소리

2026.01.22. 18:52

[문예마당] 바람의 그림자

지난 세월은 한바탕 바람이었다   큰바람, 작은 바람   바람에 넘어졌다가 일어섰고   큰 상처를 입기도 했다       광풍에 쓰러져 영영     일어나지 못한 가족도 있다       바람이 지나간 자리에     그림자가 깊게 드리우고 있다   상처뿐인 얼굴에   어두운 그림자가 패어있다     바람의 그림자 지울 수 없다     항상 따라다닌다       다시 바람 앞에 서 있다   지나간 바람보다 무섭다   조금만 불어도 넘어질 것 같다   받쳐줄 힘이 없다       바닷가에 나가     바람에 도전한다   모래 위에 엎드려     온몸으로 막는다   바람이 지나간다   나를 그냥 두고       바람의 그림자를 붙잡고 일어난다   그림자와 떨어질 수 없다 최복림 / 시인문예마당 그림자 지난 세월

2026.01.22. 18:51

[문예마당] 2026년에는 별일 없으려나

2026년 병오년(丙午年)이다. 60년 만에 돌아오는 화(火)의 년(年)으로 ‘태양과 말’의 해라고 한다. 갑·을·병·정…등 10개의 천간(天干)과 자·축·인·묘…같은 12개의 십이지(十二支)를 조합해서 만든 60개의 단위가 육십갑자(六十甲子)인데, 여기에 근거한 새해에 대한 해석은 두 종류의 불이 만나는 강렬한 불의 한 해로 기대된다는 것이다.     좋은 의미에서 보면, 빠른 속도로 변화가 이루어지는 시대가 될 수 있다는 뜻이란다. 나는 신문이나 잡지에서 ‘오늘의 운세’라던가, ‘한해의 기(氣)’ 같은 칼럼이 흥미로워서 읽곤 하지만, 사실 점성학이나 점술학에는 문외한이다.   들여다보면, 육십갑자는 우리 한민족에게 익숙한 풍습인 것 같다. 지금까지도 분리되지도 제거되지도 않으면서 우리 몸 깊숙이 뼛속까지 배어 있다. 그래서 그런지 육십갑자 예상치는 어떤 이들에는 간접적으로, 또 어떤 이들에게는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치고 있어 보인다. 또 나처럼 상관하지 않는 그룹도 있다.   육십갑자에 대한 지식은 없지만, 을사년(乙巳年)이었던 2025년 연초에 공개되었던 예측이 어느 정도는 맞았던 것 같다. 그저 우연일 수도 있겠다. 변화해 왔던 세상을 볼 수 있도록 한 을사년이었다면, 어긋났던 예상은 아니었다는 뜻이다.     나의 모국 한국은 세계 무역전쟁, 산불, 윤석열 대통령 탄핵, 울산화력발전소 붕괴 같은 어마어마한 일들을 겪었다. 디아스포라 미국인으로 살고 있는 나에게도 여러 이벤트가 있었다.   새해를 시작하면서 캘리포니아 바닷가에 자리한 도시 퍼시픽 팰리세이즈에 불이 나면서, LA는 혼돈에 빠졌다. 이 불과 상관없이 이곳에서 동쪽으로 주행거리 약 32마일 떨어져 있는 샌게이브리얼(San Gabriel) 밸리에도 산불이 났다. 동시다발적 산불이었다. 샌타애나 바람이 불씨를 빠른 속도로 주변 여러 곳으로 퍼뜨리었다.     우리 동네 같은 길에 사는 가정들 모두가 경찰과 주방위군이 지키는 가운데 대피 명령에 따라서 모든 것을 두고, 집을 떠났다. 화재 영향을 받지 않은 다른  LA 지역의 호텔 방들은 이미 만원이었고, 같은 동네에 사는 조카도 갈 곳이 없었다.     우리들은 자동차로 13시간 걸리는 약 800마일 떨어져 있는 뉴멕시코 큰 딸네로 향했다. 이때 ‘우리 삶에 진정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 고심해 보았다. 아무것도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렇게 시작된 2025년이었다.   산불이 잦아들고, 귀가하고 얼마 안 있어 법원에서 오라는 통고를 받았다. 미국의 시민은 배심원으로 소환이 되었을 때 이 의무를 수행해야 한다. 평소에 배심원 통보를 받은 적이 여러 번 있었어도 채택되지 않고 지나갔는데, 이번에는 좋아해야 할지, 재수 없다고 불평해야 할지 배심원으로 뽑히게 되었다.     법정에 두 달 반 동안 금요일만 빼고, 매일 출근하였다. 일곱 살짜리 여아 살인 사건으로, 피고는 생모와 생모의 남자 친구 두 명이었다. 배심원들은 검사가 제출한 영상과 증빙서류를 이해하여야 했다. 증인들의 진술을 들었다. 드라마에서 보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 일곱 살…일 년을 365일로 칠 때, 이 아이는 겨우 2555일을 이 땅에서 숨 쉬었다.     그동안, 매 맞고, 벗겨진 채로, 욕실에 감금되고, 콧구멍을 통해서 기도의 반대 방향으로 물과 스리라차 소스(매운 고추 소스)로 고문을 당했다. 나는 지금도 밤잠을 설칠 때가 많다. 그리고 스리라차 양념을 먹지 않는다.   육십갑자는 육갑, 60년마다 반복되는 사이클이므로, 5000년 한국 역사에는 을사년이 많았을 게다. 근대사에서 가장 심각하고 우울하였던 사건은 120 년 전 1905년에 맺었던 일본과의 을사늑약으로 한국의 외교권이 일본에 박탈당했던 사건이다. 일제 강점기의 시작이었다.     이보다 120년 전인 1785년에는 ‘명례방 사건’이라고도 불리는 ‘을사추조적발(乙巳秋曹摘發)’ 사건이 있었다. 정조 9년 때, 지금의 명동 지역에서 신앙집회를 열던 천주교도들이 적발된 것으로 조선의 성리학적 윤리 체계를 파괴한다는 죄목으로 신자들이 처형당했던 일이다.     이 사건이 벌어진 113년 후에 이 자리에 한국 천주교의 대표적이며 상징적인 명동 성당이 건립되었다. 만약 이때, 조선이 서학을 받아들이고, 개혁에 앞장섰다면, 한국의 역사는 많이 달라지지 않았을까.   을사년에 나쁜 일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을사늑약 60년 후인 1965년에는 한일 기본 조약과 월남파병 준비로 경제개발의 본격화가 시작되었다. 내가 대학 입시 준비를 하고 있던 때이었다. 베트남에 파병되어 인천항을 떠나던 젊은 군인 무리 중에, 사촌오빠가 있었고 나는 오빠를 배웅하러 나갔었다. 여러 번에 거쳐 파병된 누계가 32만 명에 달한다고 한다. 이 젊은이 중에는 전사하여 돌아오지 못한 사람들이 5000여 명이고, 1만1000명이 부상하였다고 한다.   어수선하게 시작된 을사년 2025년이었지만, 좋은 일도 많았다. 9년 만에, 나의 두 번째 책을 출판하였다. 이 책의 출판 기념회를 한국에서는 나의 모교 이화여대 의과대학 부속병원 안에 친구의 이름으로 명명된 이영주 홀에서 가졌고, 미국에서는 한국어진흥재단 세종홀에서 가졌다. 또 한국 창원대학에 초대되어 강의도 했다. 이러한 활동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내 삶의 여정에 도반(道伴)의 친지가 함께해 주었기 때문이다.   빠른 속도의 변화를 예상한다는 2026년 병오년은 별 탈 없이 지나가려나. 일 년 후인 2027년 이맘때, 육십갑자의 예측이 어떠했는지 알게 되기를 바란다. 모니카 류 / 미국 종양방사선학 전문의·전한국어 진흥재단 이사장문예마당 별일 수필 육십갑자 예상치 한국 역사 모국 한국

2026.01.22. 18:50

[문예마당] 악마가 진단하다 -데스벨리에서

능선 멀찍이 굽이치는 어둠, 묵화 속인 듯     소리없이 들끓고 있는 침묵 때문인가     어느 날 운석처럼 날아들어     몸 안에서 격동하고 들썩이며 번쩍이는 조각들   드디어 재촉하는 바람 따라 타관 땅으로 나선다         하늘이 파랗게 내려오는     악마만이 들어간다는 골프 코스, 까마득한 돌밭   변두리까지 진격해 가는 큰 돌들의 숨결 거칠다.     억겁의 햇빛 속에서 부풀고 줄어들며   묵직한 소금 돌들의 혈관 터지는 소리들     바람은 갑자기 행선지를 잃어버리고   악마의 그림자 내 발목을 휘감는다         허공인 듯 지평인 듯 찰나를 후려치는 소리   금빛으로 튀어 오르고   내 환부를 향해 날아드는 속공     깊은 파장의 통증이 증발하기 전에   불발된 빛 덩어리를 사산(死産)한다.     힘을 빼라 힘을 빼거라   악마는 비장(秘藏)의 처방문을 전한다  권정순 / 시인문예마당 데스벨리 악마 소리들 바람 어둠 묵화 소금 돌들

2026.01.15. 18:30

[문예마당] 겨울 하늘

잿빛 구름 아래   겨울 하늘   흰 눈 가득 이고   산 넘어 물 건너   바람 따라 날아오고…       낙엽 떨어진     나무 숲 사이로   겨울 하늘     더 춥고 더 낮은   바람 몰고 달려온다       나뭇가지 내려다보는   겨울 잿빛 하늘   찬바람 휘몰아   성한 가지 죽은 가지   골라내고…       세상 모든 사람이 바라보는   시련(試鍊)의 겨울 하늘   준비(準備)된 사람만이   극복(克服)할 수 있는   혹한(酷寒)의 바람…       몰아오고 있다  남영한 / 시인문예마당 겨울 하늘 겨울 하늘 겨울 잿빛

2026.01.15. 18:28

[문예마당] 눈찢기에 대응하는 법

영주권자인 남편은 지금 미국과 한국을 오간다. 영주권자는 6개월 이상 해외에 나가 있을 경우 재입국에 리스크가 크다. 하지만 정당한 이유가 있다면 허가를 받아 최장 2년간 해외에 머물 수가 있다. 최근에 남편이 재입국 허가서를 발급받기 위해 생체 정보 확인차 이민국에 가서 얼굴 사진을 찍었다.   그런데 이민국 직원이 남편의 눈이 작아 동공이 안 보인다며 눈을 크게 뜨라고 했단다. 남편은 크게 떴는데도 몇 번이나 크게 뜨라고 해서 민망했다고 한다. 남편의 눈 크기는 보통 한국 사람과 비슷하다. 나이가 먹으니 눈이 처져서, 그 직원의 눈에는 눈을 뜨지 않은 것처럼 보였던 모양이다. 그가 악의적으로 말한 것은 아니기에 우리는 웃고 말았다.   서양 사람들에게 동양인의 얼굴은 어떻게 보일까. 동양인이 처음 서양인 얼굴을 보면 차이를 못 느낀다. 마찬가지로 서양 사람들은 동양인의 얼굴을 모두 비슷하게 보는 것 같다. 그래서 한국인인지, 중국인인지, 일본 인인지 구별을 못 하고 심지어는 갑과 을을 구별하지 못하기도 한단다.   그런데 서양 사람들 눈에 동양 사람들 눈은 찢어진 것처럼 보이나 보다. 서구 사회에서는 동양인을 조롱하거나 비하하는 인종차별적 표현으로 눈을 찢는 제스처를 한다.   손흥민 선수가 토트넘 시절 인종차별 논란을 겪었다. 관중석의 한 팬이 손흥민을 향해 자신의 눈을 양 옆으로 찢는 제스처를 취했다. 중계화면에 이 모습이 포착돼 영국 소셜미디어에 퍼졌다. 이 관객은 인종차별 행위를 했다는 이유로 3년간 경기장 출입 금지 처분을 받았다.   다음해, 손흥민이 토트넘의 주장으로 있을 때도 인종차별 논란이 있었다. 그가 방송에 출연했을 때였다. 진행자가 ‘손흥민의 유니폼을 구해달라’는 요청을 누구로부터 받았다고 하자 팀동료이자 절친인 벤탄쿠르가 “손흥민 사촌 유니폼을 가져다 줘도 모를 것이다. 손흥민이나 그의 사촌이나 똑같이 생겼다”고 말했다.  동양인은 모두 똑같이 생겼다는, 개성도 매력도 없다는, 인종차별적 인식이 무의식적으로 드러난 발언이었다.   벤탄쿠르는 아차 했는지 즉각 사과했다. 그는 자신의 SNS를 통해 “쏘니, 일어난 모든 일에 미안하다. 그건 나쁜 농담이었다. 절대 널 무시하거나 다치게 하려 한 게 아니라는 걸 알지 않나”라고 했다. 그러나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잉글랜드 축구협회는 벤탄쿠르에게 7경기 출전 정지에 벌금 10만 파운드의 중징계를 내렸다.   얼마 전 아침에 뉴스를 보다가 멈춰 서게 한 사진 한 장이 있었다. 핀란드 미인대회 우승자 사라 자프체가  '중국인과 식사 중'이라는 설명과 함께 SNS에 올린 '눈찢기' 사진 때문이었다.   논란이 일자 현지 정치인들이 그녀를 옹호했다. “내가 자프체다”라며 눈찢기 챌린지를 하는 사진을 올려 논란을 더 키웠다.   자프체는 이후 현지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저녁 식사 중 두통과 눈의 압박감 때문에 무심코 한 행동이었다”며 변명했지만 논란은 가라앉지 않았다. 결국 자프체는 인종차별 논란 끝에 왕관을 박탈당했다. 자프체는 사과문을 통해 “이번 일로 상처받은 모든 분께 사과드린다”며 고개를 숙였다.   뉴스는 짧았지만, 그 사진은 오래 내 마음에 남았다.  아무렇지 않게 올린 웃고 있는 자프체의 사진은, 장난이었는지는 알 수 없다. 정치인들도 무심코 따라 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누군가에게는 웃음이 아니라 큰 상처가 되었을 지도 모른다.   서양사회에서는 인종차별을 개인의 실수로 가볍게 넘기지 않는다. 그들은 어린 시절부터 인종차별이 나쁘다는 사실을 반복해서 배우며 자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시안 인종자별은 여전히 사소한 장난처럼 넘겨버린다.   이솝우화에 '무심코 던진 돌에 개구리가 맞아 죽는다'는 이야기가 있다. 무심히 장난삼아 던지는 말이 당사자에게는 뼈저린 상처로 남을 수 있다.   요즘은 많은 사람들이 돌이 아닌 말과 글로 누군가를 단죄하고 심한 경우 죽음에 이르게 한다. 악성 댓글로 극단적 선택을 한 배우 최진실이 한 예이다. 항상 입장을 바꿔 생각해 봐야겠다.   아시안 인종차별은 전부터 있어 오긴 했지만, 2020년대 초반 '우한'이 코로나 발생지로 알려지자, 중국에 대한 혐오로 더욱 심해졌다. 그 혐오가 중국을 넘어 차츰 아시안 전반에 퍼졌다.   미국에 사는 우리는 일상생활에서 아는 듯 모르는 듯 미묘한 차별을 느낄 때가 종종 있다. 대놓고 미워하지는 않지만 상대를 하나의 개인이 아니라 아시안이라는 틀 속에 넣어 버린다. 어떤 차별은 칭찬의 옷을 입고 다가온다. 예를 들면 “아시안들은 다 공부를 잘하잖아”라는 말 속에는 개인의 노력은 배제한 채, 은근한 비꼼과 거리 두기가 담겨 있다.   인종차별은 분명 잘못된 일이다. 하지만 콤플렉스로 확대해 받아들일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자프체와 벤탄쿠르, 두 사람의 경우를 보고 독자들은 어떤 느낌이 들었는지 모르겠다. 솔직히 나는 그 두 사람이 저지른 단순한 실수라고 생각한다. 그런 정도는 그냥 흘려버리는 관용이랄까, 너그러움이랄까 그런 마음 가짐도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런 해프닝이 생길 때 인종차별 운운하면서 발끈하는 것은 어쩌면 그들의 차별 공격 의도에 우리가 넘어가는 것은 아닐까.   두순자 사건에서 보듯 흑인에 대한 편견과 인종차별이 엄청난 비극을 낳았다는 기억을 갖고 있다. 로드니 킹 사건에서 한인 커뮤니티가 크게 피해를 입은 것도 그런 결과를 낳았다는 것이 중론이다.   우리의 인종차별도 백인들에 못지 않다고 생각한다. 한인사회에서 라티노에 대한 하대도 마찬가지다. 그들에 대한 반말은 일상적인 말투가 됐다. 하다못해 같은 동양인이면서 동남아인에 대한 멸시는 또 어떤가.   이런 인종차별 의식을 극복함으로써 우리에 대한 인종차별적 대우도 극복할 수 있다고 본다. 이제 누가 우리를 향해서 눈찢기 제스처를 하면, 우리도 당당히 눈찢기로 응대하는 여유를 갖자. 배광자 / 수필가문예마당 대응 수필 인종차별 논란 인종차별적 표현 인종차별적 인식

2026.01.15. 18:28

[문예마당] 사랑으로 남은 바느질

1977년 내가 헌팅턴 비치로 이사를 하면서 우연히 현이엄마를 알게됐다. 아이들을 데리고 동네 수영장에 갈 때마다 그녀도 늘 거기 있었다. 수영장이 그녀 집 가까이에 있어서 아이들이 먼저 친구가 되었다. 그녀는 아이들이 수영을 마치면 집으로 데리고 가 핫도그를 만들어 먹이곤 했다. 그녀의 세 자녀와 우리 아이 셋은 또래여서 더욱 정답게 지냈다.   7월의 무더운 어느 날, 현이 엄마가 겨우 남편의 허락을 받아 다 같이 아이들을 데리고 해변에 갔다. 그녀는 이상하리만큼 쓸쓸해 보였다. 우리는 햇볕이 내리쬐는 모래사장에 앉았다. 그녀는 순간 내 손을 잡으며 “처음 만난 날부터 의지하고 싶은 사람이라고 느꼈어요. 우리 아이들과 함께 웃고 뛰노는 모습이 저에게는 큰 위로가 되었어요.”라고 했다.   그녀는 처음으로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녀의 삶은 쉽지 않았다. 외동딸로 자란 어린 시절, 친정어머니는 한복을 지어 생계를 유지했다. 홀어머니와 늘 이사해야 했고 학교 공납금을 제때 내본 적이 없을 만큼 형편이 어려웠다. 그래도 그녀는 한국무용을 배웠고 힘들게 해외 순방 공연단에 들어갔다.   그러던 어느 날 일본 공연 중 출장을 온 남자를 만났고 나중에 미국 공연에서 또 만나게 됐다. 남자의 끈질긴 구애와 넘치는 선물 공세가 집요해 망설였지만 결국 결혼을 했다. 하지만 결혼 생활은 그녀가 꿈꾸던 행복과는 거리가 멀었다. 남편의 의처증은 그녀의 삶을 송두리째 무너뜨렸다. 직업도 갖지 못하게 했고 운전도 배우지 못하게 했다. 외출마저 허락을 받아야 했다.   혹시 아이들이 학교 친구와 동네 피자 가게에 가게 되어 같이 다녀오기라도 하면 남편은 그녀가 다른 남자를 만났다고 의심했다. 의심은 곧 폭력으로 이어졌고, 폭행 뒤에는 좋은 식당에 가서 외식을 시켜주거나 새 옷과 보석을 사주었다.   수년 동안 가정폭력과 성폭력에 시달리며 살아온 그녀에게 자유는 허락되지 않았다. 한국 마켓에 가는 일조차 남편이 퇴근한 뒤에야 가능했고, 하루의 대부분을 남편의 통제 아래 보내야 했다. 그럼에도 그녀는 아이들만큼은 부족함 없이 키우고 싶었다. 피아노 선생님이 집으로 와서 레슨도 하고, 우리 아이들과 함께 집 옆에 있는 태권도 도장에도 보냈다. 아이들을 훌륭하게 키우겠다는 소망만이 그녀가 견딜 수 있었던 이유였다.   그 소망은 바느질로 이어졌다. 그녀는 틈을 내어 아이들 옷을 직접 만들었다. 남편의 허락을 받아 내가 그녀를 데리고 원단 가게에 가서 예쁜 천을 고를 때면 그녀의 눈빛이 환해졌다. 패턴을 사서 재단하고 한 땀 한 땀 옷을 꿰맸다. 분홍 꽃무늬 원단은 큰딸의 원피스로, 노란색 천은 둘째딸 원피스로, 푸른 줄무늬 천은 아들의 셔츠로 만들었다.   그녀가 만든 옷들은 사는 옷보다 예뻤다. 아이들이 옷을 입고 기뻐할 모습을 떠올리며 밤늦도록 바느질을 했다고 한다. 새 옷을 입고 환하게 웃던 아이들의 모습, 그것이 그녀의 삶을 견디게 한 힘이었다.   1993년, 내가 처음으로 가정폭력 쉼터 일을 시작하면서 비로소 그것이 가정폭력이었음을 깨달았다. 그전까지 나는 남의 집 사정이라 생각하며 지나쳤으니 돌이켜보면 참으로 세상 물정 모르는 사람이었다. 나의 무지가 그녀에게는 또 하나의 외로움이었을지도 모른다.   이따금 그녀가 떠오르면 마음 한편이 아프다. 가까이 살면서도 폭행을 당한 뒤 눈물로 고통을 얘기할 때 전문가에게 안내하여 상담을 받도록 해주지 못했던 미안함이 세월이 흘러도 지워지지 않는다.   그녀가 리버사이드로 이사 가면서 우리는 자연스럽게 소원해졌다가 암으로 투병중이라는 연락이 와서 병원으로 찾아가 만났다. 손을 꼭 쥐었을 때 그녀는 아무 말도 못했지만, 눈빛은 그동안 라이드를 자주 해주어서 고맙다고 말하는 듯했다. 그녀는 그렇게 55세에 내 곁을 떠났다.   그 후로 지금까지 그녀는 조용한 숨결처럼 내 마음 한구석에 살아 있다. 나란히 앉아 바느질 이야기를 나누던 그 시간이 그립다.   한 땀 한 땀 바느질한 사랑이 결실을 맺은 것일까. 그녀의 자녀들은 훌륭히 성장했다. 큰딸은 디자이너가 되었고, 아들은 큰 무역 회사의 중역으로 일하고 있다. 그녀가 세상을 떠난 뒤 막내딸은 아버지를 돌보며 건축 회사에서 자신의 길을 묵묵히 걸어가고 있다.   오늘 SNS에서 그녀의 세 자녀들이 쓴 엄마를 추도하는 글을 읽으면서 문득 그녀가 떠오른다. 바늘을 잡고 조용히 미소 짓던 그 모습이 한 폭의 그림처럼 눈앞에 나타났다가 사라지곤 한다. 그녀의 삶은 불행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녀가 아이들에게 남긴 것은 옷 한 벌이 아니라 깊고 넓은 사랑이었다. 아이들에겐 어쩌면 그 사랑이 세상을 살아갈 힘이 되었을 것이다.   그녀는 떠났지만, 어머니의 손길을 기억하는 아이들의 마음속에는 그 온기가 여전히 남아 있을 것이다. 나 역시 그녀의 사랑을 잊지 못한다. 그녀는 지금도 내 마음 한구석에 조용히 살아 있다. 엄영아 / 수필가문예마당 바느질 사랑 가정폭력 쉼터 동네 수영장 마음 한구석

2026.01.08. 18:10

[문예마당] 빚진자

우리 시 공부 동아리 ‘수아반’   제일 연로하신 어른으로   함께 수년 동안 시 공부를 해온   문우였는데   일 년여 투병하시다가   소천하셨다는 소식에   억장이 무너집니다       얼마 전   우리 문우들이 보고 싶다며   발병 후 처음 줌으로 만나 뵈었는데   너무나 모두가 기뻐했는데   앞으로 종종 뵙겠다며 좋아하셨는데   이렇게 갑자기 가시다니   인생의 무상함을 느낍니다       교회에서 ‘전도 폭발’ 세미나에 참석해   많은 은혜 받으셨다며 좋아하시며   믿음으로 늘 본이 되어주셨는데   우리 곁을 떠나시다니   안 계시니 너무나 빈자리가 큽니다       제가 문학 대상을 받았을 때   축하하시면서   북창동 순두부집에 초대하셔서   순두부와 갈비를 맛있게 먹고   얼마나 많은 칭찬하시며 흐뭇해하셨는데       답례로 식당에 모셔 음식 대접하겠디고   여러 번 권유했으나 바쁘시다며   사양하신 겸손에 눈물이 납니다       나는 당신의 사랑에 빚진 자입니다   주님을 뜨겁게 사랑하신 놀라운 믿음으로   늘 본이 되어 주신 당신을 그리면서   눈물이 맺힙니다   부디 주님 품 안에서   평안히 쉬시기를 기도드립니다   언제가 뵐 날을 기대하면서   마음의 위로를 받습니다.   “사랑합니다. 유순자 선생님”  김수영 / 시인문예마당 빚진자 북창동 순두부집 공부 동아리 유순자 선생님

2026.01.08. 18:09

[문예마당] 내 청춘!

네 청춘이라 했나   거품에 날린 인생     젊음 탐욕 속절 없다     갈망 채우려 욕심 겨워     황혼 길 잃었다네…         젊음이 무엇인지     탕진한 오늘 바라보는 눈빛     애처롭다 그 심정     울부짖어 우는 마음…         어이 하다, 막연 골목   물어본다 가엾은 인생   청천벽력 우왕 천둥   허겁지겁 돌아본다   내 청춘인가!       청춘은 먼 망상의 꿈   역겨운 세상사 삶에 겨워   매미처럼 맴돈 인생     낭만 찾아 날아 보자     서경 불꽃 어두컴컴 지기 전에! 하세종 / 시인문예마당 청춘 인생 젊음 인생 낭만 서경 불꽃

2026.01.08. 18:08

[문예마당] 변동의 새해, 바위처럼

2026년, 새해의 태양이 떠올랐다. 밝은 햇살이 온 누리에 스며들었다. 새해의 첫 순간은 누구나 똑같이 맞으며, 모든 사람이 다시 시작할 기회를 갖는다. 새해는 잘난 사람이나 못난 사람 차별 없이 찾아왔다. 새로운 시간이 모든 생명들에게 공평하게 주어졌다.   삶은 늘 변하고 흔들리지만, 그 속에서도 시간은 모든 이에게 공평하게 흘러간다. 그래서 새해는 단순한 시간의 시작이 아니라 모두에게 주어진 기회이자 가능성이다. 마음을 새롭게 하고 다시 출발할 수 있는 축복이다.   새해 첫날은 누구나 새로워지고 싶어한다. 하지만 정작 삶을 바꾸는 힘은 거창한 첫날이 아니다.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지나가는 평범한 하루하루 속에 숨어 있다.   ‘하루를 새롭게 하려거든, 날마다 새롭게 하고, 또 날마다 새롭게 하라’는 오래된 고전문장이 있다. ‘나날이 새롭게’하라는 것이다. 새로워지고 싶다면 지속해야 한다고 말한다. 새해를 맞은 나에게 가장 절실한 말처럼 들린다.   삶이 바뀌는 순간은 끈기에서 피어난다. 작심삼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매일 조금씩 쌓아가는 과정이다. 내공이 필요하다. 남들이 알아채지 못해도 나 스스로 느낄 수 있다면 이미 새로워졌기 때문이다.   하루를 새롭게 한다는 말은 큰 결심이나 대단한 계획을 세우라는 것이 아니다. 어제보다 한걸음 더 나아가려는 작은 마음, 조금 더 나아지는 마음이다. 새해가 주는 의미도 결국 이 문장에 담겨 있다. 변화는 반복되는 하루에서 시작된다.   새해는 해마다 되풀이하지만, 뭔가 부풀어 오르는 기대감으로 인해 언제나 희망으로 다가온다. 새로운 목표를 세우고 달라질 자신을 상상하며 크게 움직여야만 새해를 맞는 것 같은 착각을 한다.   문득 반칠환 시인의 시 ‘새해의 기적’ 한 구절이 나를 멈춰 세운다. “바위는 앉은 채로 도착해 있었다.”   시의 전체 내용은 “황새는 날아서, 말은 뛰어서, 거북이는 걸어서, 달팽이는 기어서, 굼벵이는 굴렀는데, 한날 한시 새해 첫날에 도착했다. 바위는 앉은 채로 도착해 있었다”이다.   날고, 뛰고, 걷고, 기고, 구르는 것들이 ‘한날 한시 새해 첫날에 도착했다’는 것은 속도가 다른 모두가 공평하게 새해 첫날을 맞았단 얘기다. 황새를 포함해서 바위까지 각기 제 방식으로 최선을 다해 한 해를 보내고 새로운 출발점에 섰다는 뜻이다.   재미있는 것은 ‘바위는 앉은 채로 도착해 있었다’는 구절이다. 겉으로 보기에 바위는 움직이지 않고, 변화가 없는 존재처럼, 늘 같아 보인다. 그런 바위가 앉은 채로 도착해 있었다는 것은 이미 매일 매일을 ‘새롭게’ 살고 있었던 것이다.   겉으로는 아무 변화 없어 보이지만 하루도 같은 날은 없었다. 바위의 안쪽에서는 장석주 시인의 ‘대추 한 알’에서. “대추가 저절로 붉어 질리는 없다. 저 안에 태풍 몇 개, 천둥 몇 개, 벼락 몇 개 …”처럼 바위 안에서 시간이 익어가고 있었다.     바위의 의연함은 하루 아침에 생긴 것이 아니다. 대추 한 알 속에 태풍, 천둥, 벼락 몇 개가 들어 있듯, 바위 안에 수많은 날들이 응축된 결과였다. 하루하루를 말없이 품으며 새로워지고 있었던 것이다.   손오공이 아무리 날고뛰어 봤자 부처님 손바닥을 벗어나지 못하듯, 새해는 누구도 앞서서 도착할 수 없는 시간이다. 더 빨리 달린 사람도, 잠시 멈춰선 사람도, 같은 시각에 똑같이 새해 앞에 선다.   우리는 종종 삶을 경주처럼 여기며 누가 먼저 가는지에 마음을 빼앗기지만, 시간은 늘 같은 속도로 모두를 데려간다. 한 해를 어떻게 살았든 새해는 예외없이 공평하게 열리고 같은 출발점에서 시작한다.   지난 2025년, 교수신문이 꼽은 사자성어는 주역에 실린 ‘변동불거(變動不居)’였다. 세상이 잠시도 멈추지 않고 끊임없이 흘러가면서 변한다는 뜻이다.     새해에도 변화는 멈춤 없이 계속되겠지만 더 빨리 가겠다는 욕심보다, 더 많이 이루겠다는 조급함보다, 중요한 것은 변동 속에서도 중심을 잃지 않고 바위처럼 자기 자리를 지키는 일일 것이다.   지난 한해를 돌아보니 후회와 아쉬움이 많이 남는다. 말을 아꼈어야 할 순간도 있었고, 붙잡았어야 할 마음을 놓친 적도 있다. 어려운 사람들 앞에서 자주 망설였다. 도와야 한다는 마음은 있었지만 내 사정부터 헤아리느라고 손을 내밀지 못하고 모른 척 지나쳤다.   부모님 생전에 좀 더 이해하고 잘해 드리지 못했다는 죄송함이 사무친다. 늘 그 자리에 계실 줄 알고 미루다 보니 시간만 앞서 갔다. 손 한번 더 잡아드리는 일이 그렇게 어려운 줄 그땐 몰랐다. 항상 바쁘다는 말로 효도를 대신했다.   자식들에 대해 생각하면 미안한 마음이 앞선다. 아이들이 잘되기를 바라며 묵묵히 지켜봐 줘야 했는데 사랑보다 잔소리가 먼저 튀어나왔다. 걱정이라는 이름으로 마음을 다치게 하진 않았는지.  자식을 향한 어미의 기대와 바람 때문에 아이들이 느꼈을 중압감을 그때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게 자식 사랑인 줄 착각했다.   하지만 지난날에 연연해 오늘을 놓치고 싶진 않다. 그런 것들이 있었기에 지금의 내가 여기까지 걸어올 수 있었다고 생각하자. 후회하면서도 다시 하루를 살아내는 일이고 아쉬움을 품은 채로 누군가를 이해하려 애쓰는 마음이다. 그래서 오늘은 어제보다 조금 더 잘 살아보려 한다.   2026년, 누구에게나 똑같이 공평하게 주어진 365일, 이제 우리는 모두 그 출발선에 서 있다. 날아가듯 빠르게 가든지, 기어가듯 아주 느리게 가든지, 그것은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바위는 앉아만 있었는데도 한날 한시에 새해 첫날을 맞이했으니 말이다.   박완서 작가는 허리를 다치고나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땅 위를 걷는 것쯤은 당연한 일인 줄 알고 있다.”   기적은 하늘을 날거나 바다 위를 걷는 것이 아니라 땅에서 걸어 다니는 것이라는 중국 속담이 있다. 우리는 하늘을 날고 물 위를 걷는 기적을 이루고 싶어 안달하며 무리를 한다. 하지만 기적은 그렇게 요란하지 않다. 아무 탈 없이 하루를 살아내고 버텨내는 일상 자체가 기적이다.   새해의 공평함은 단순히 시간의 교체가 아니라, 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 희망을 선사한다. 아주 작고 일상적인 사건들과 오늘을 무사히 살아낸 것만으로도 우리는 이미 기적 한가운데에 있다. 감사하며 바위처럼 살고 싶다.  배광자 / 수필가문예마당 변동 새해 새해 바위 한시 새해 새해 첫날

2026.01.01. 17:00

[문예마당] 낭만의 한 수

인생사 낭만이란 한 수   참으로 웅장한 거울 속   한 점의 빛이 아닌가 한다       그 한 점의 빛! 기우는   저울 추 무게에 따라   우리 인생사 어깨가 기운다       네 발로 엉금엉금 자전거에서   힘찬 두 발로 달리듯   다가서는 병오년 ‘붉은 말의 해’를     맞이하여   우리 알찬 낭만을 새워   힘차게 달려보세! 하세종 / 시인문예마당 낭만 우리 인생사

2026.01.01. 17:00

[문예마당] 90고개서 뒤 돌아보니

구절양장 지내온 세월   잠시 허리 펴고 뒤 돌아본다   아무 선택권이 없었다, 나는   태어난 장소와 탄생시킨 부모는   철이 들어선 늘 만족할 수 없었다   낮은 편을 보면 위로가 되고   높은 쪽을 보면 한숨이 나왔다   마음대로 안되는 게 부부의 인연   운명은 이미 정해졌는데   발버둥친 젊은 날이 아쉽다   얼마나 어리석었나   자식의 미래를 홀로 짊어지려던 후회   그래도 빈 가슴 채워주던 한 말씀   세상은 날 위해 있고   나는 세상을 위해 일한다   80 넘으면 마음도 함께 늙는 줄 알았다   이렇게 눈만 감으면   초등학교 시절도 훤히 보이는데   미수(88세)를 지나니   늦가을 낙엽처럼 싱싱하던 친구들   소리없이 떠나고   고독이 어떤 건지 등골이 시리다   젊었을 땐 세월을 끌고 갔는데   이젠 세월에 끌려가는 내가 서글프다   한 편의 영화처럼   살아온 인생 뒤돌아보니   모두가 허무한 꿈길이지만   살아있는 오늘이 뜨겁게   감사하다 이 세상 모두에게   마지막 순간도 아름다운 노을로 지고 싶다  강언덕 / 시인문예마당 고개 늦가을 낙엽 초등학교 시절

2026.01.01. 17:00

[문예마당] 겨울 하늘

잿빛 구름 아래   겨울 하늘   흰 눈 가득 이고   산 넘어 물 건너   바람 따라 날아오고…       낙엽 떨어진     나무 숲 사이로   겨울 하늘     더 춥고 더 낮은   바람 몰고 달려온다       나뭇가지 내려다보는   겨울 잿빛 하늘   찬바람 휘몰아   성한 가지 죽은 가지   골라내고…       세상 모든 사람이 바라보는   시련(試鍊)의 겨울 하늘   준비(準備)된 사람만이   극복(克服)할 수 있는   혹한(酷寒)의 바람…       몰아오고 있다 남영한 / 시인문예마당 겨울 하늘 겨울 하늘 겨울 잿빛

2025.12.25. 17:30

[문예마당] 작은 오라버니의 기일

오라버니가 돌아가신지도 어언 5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2020년 12월15일 기일을 맞이하여 감회가 무척 새롭다. 12월은 크리스마스가 다가오기 때문에 희비가 엇갈리는 달이기도 하다. 그해에 나는 한영문 수필집 ‘잊을 수 없는 스코필드 박사와 에델바이스의 추억’이란 수필집 출간을 준비하고 있었다. 오라버니는 축사를 써주시고 갑자기 영면하셨다. 마음이 너무 아팠고 슬펐다.   돌아가시기 며칠 전 통화에서 오라버니는 스코필드 박사님에 대한 수필을 출간하게 되어 매우 기쁘시다며 흐뭇해 하셨다. 오라버니가 미국 유학의 장도에 오르셔서 김포 공항에 마중을 나가게 되었을 때 스코필드 박사님이 김포공항까지 환송하시겠다며 마중 나오셔서 너무나 기뻐하셨다. 그때에 함께 찍은 사진을 기념으로 나의 책에 올리게 되었다.   오라버니는 계시지 않지만, 대한민국 학술원 도서관에 스코필드 박사님에 관한 나의 책 ‘잊을 수 없는 스코필드 박사와 에델바이스의 추억’을 기증하게 되었다.   다음 글은 2018년 7월 20일 문화일보 이민종 기자가 쓴 오라버니에 대한 글을 이곳에 올려 본다.   올해 창립 64주년을 맞은 대한민국학술원은 학술 발전에 공적이 있는 학자를 국가 차원에서 우대 및 지원하는 기능을 맡고 있다. 대한민국학술원법에 따라 설립된 간판 국가학술기관으로 인문, 사회, 자연과학 분야에서 내로라하는 150명의 석학이 망라돼 있다. 기초학문 종사자들에게는 최고 명예직이자 학술인 명예의 전당으로 꼽힌다.   2년간의 부회장직을 거쳐 지난 3월 제37대 회장에 선출된 김동기 회장은 학술원사에 새 기록을 세웠다. 학술원 최초의 경영학자 출신 회장이자 1호 고려대 출신 회장이다. 찬반 개표 결과는 112명 투표에 찬성 89표(79.5%).   김 회장은 청년 시절부터 경영학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전교 수석으로 합격했던 고려대 상과대 상학과를 1958년 졸업한 후 미국 뉴욕대 경영대학원을 마치고 귀국한 게 1964년 서른 살 때다. 이때 펴낸 첫 저서 '현대 마케팅원론'은 단숨에 마케팅 분야의 베스트셀러로 주목받았다. 1960년대 시장론·판매론이 대세일 정도로 마케팅 불모지였던 국내에 미국식 마케팅을 도입했다.   그가 일찍부터 뛰어난 두뇌와 전문성을 인정받았음을 보여주는 이야기 하나. 뉴욕대 경영대학원 박사과정에 입학해, 한 학기를 다녔는데, 당시 고려대 학장이던 정수영 교수로부터 초청 제의가 왔다. 고려대가 한국 최초의 미국식 경영대학원을 설립하려 하는데 조교수로 임용할 테니 설립을 도와달라는 내용이었다. 김 회장은 막 박사과정에 들어갔는데 어렵다고 했다. 이번엔 유진오(1906∼1987) 고려대 총장이 직접 나서서 '삼고초려(三顧草廬)' 친필 편지를 보내왔다. 대선배, 어른들의 여러 차례 요청을 더는 거절할 수 없어 귀국해 설립을 마무리했다. 그 후 다시 유학을 가려고 유 총장의 후임 총장에게 말했더니 이번엔 미국에 가지 말고 우리 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으라고 강력히 권유했다.   그가 1974년 고려대 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배경이다. 2016년 석좌교수로 퇴직할 때까지 그는 고려대에서 봉사했다.   김 회장은 국내 최초로 미국식 물류관리(PDM)도 소개했다. 상공부 유통근대화 추진위원회의 핵심 멤버로 한국 최초의 슈퍼마켓, 할인판매점, 편의점, 쇼핑몰 및 대규모 물류단지 개설, 백화점 직영체제 및 상품권 발행, 소비자보호법 제정 및 소비자 신용카드 제도 도입 등 국내 유통근대화 정책 및 실행계획 수립에서도 주도적 역할을 했다. 국내 물류 혁신과 유통현대화를 거론할 때 김 회장을 빼놓을 수 없다. 이런 공로로 대통령 표창도 받았다.   ▶1934년 경북 안동 출생 ▶고려대 상학과, 미 뉴욕대 경영대학원 경영학 석사, Harvard대학교 대학원 박사과정 수료, 고려대 경제학 박사 ▶고려대 경영대학장, 국제대학원장, 국제 교류 위원장, 국제대학원 석좌교수, 일본 와세다(早稻田)대 교환교수 ▶한국경영학회장, 대한민국학술원 부회장 ▶세계 인명사전 '마르퀴즈 후즈 후' 등재 ▶고려대 학술상, 올해의 교수상 수상.’   오라버니는 원래 시인이 되고자 했다. 안동고등학교 2학년 때 그 당시 문학 월간지로 유명했던 ‘학원’ 문예지가 개최한 시 경연대회에서 전국 최우수상으로 시 ‘기(Flag)’가 뽑혔었다. 한국전쟁 때 아버님이 돌아가셔서 큰 오라버니와 함께 작은 오라버니는 나의 문학 멘토가 되어 주셨고 오늘에 이르기까지 인격을 도야시킨 훌륭한 스승이자 지도자였다.   오라버니를 그리면서 시 한 수를 썼다.   종소리 되어         청천벽력처럼   나의 가슴을 후벼 판 말 한마디   “오빠 돌아가셨어!”   너무나 급작스레 떠나시다니   며칠 전에 안부 전화 올렸는데….   나의 새 책에   축사를 써 주셨는데 유언처럼 되다니   오빠의 맑은 음성이 호수에 파문을 그리듯   내 가슴 깊은 곳에 여울져 오네   아버지 대신 훈육하시고   스승처럼 문학의 꿈을 심어주신 나의 멘토   대한민국 학술원 회장을 두 번이나 연임하신   자랑스런 오라버니   나의 정신적 지주가 무너져 내린 날   통곡하고 오열해도   맨눈으로 다시 뵐 수 없으니   어이하리 갈기갈기 찢어진 이 아픈 가슴   눈 감으면 떠오르는 오빠의 얼굴 아른거려   오빠는 나를 위하여 종을 울리고 떠나간 사람   그 종소리가 내 마음속에 여운(餘韻)으로 감도네   그 여운 하늘길로 이어져   그 언젠가 그곳에서 뵈오리 김수영 / 수필가문예마당 오라버니 기일 스코필드 박사님 오라버니가 유학 뉴욕대 경영대학원

2025.12.25. 17:30

[문예마당] 바람이 오는 소리

매일을 검은 구름 가득 하늘 덮더니   더위를 몰고간 비들의 행렬로   대지의 풀잎은 메말랐던     온몸의 먼지를 닦고 춤을 춘다   바람이 살아 숨 쉬는 숲   사그락 경쾌한 리듬에 빠져서   평화롭게 뒤섞여 들려오는     풀벌레들의 화음 듣고 있지   매우 아름다운 노을     그 놀매 만나고 있는 중이다       흐르는 개울물까지 사랑스러운 길   맑음으로 자라주는     포근포근 잔디밭에서   오늘은 가시버시 꿈을 키우는 중이다   노랗게 빨갛게 바람의 날리며     그림을 그리는 낙엽   사그락 경쾌한 리듬에 빠져     온아한 숲길로   짊어진 짐 점검하며     목마름으로 살아왔던 생을   맑음으로 자라주는 나무 사이     풍성한 잔디밭 길에서   짙은 바다 빛으로 손뼉치는     푸른 솔잎 아래   반짝이는 맨 마루     사랑 꽃피라고 바람이 오는 소리   숲속에서 듣는다 엄경춘 / 시인문예마당 바람 소리 마루 사랑 솔잎 아래 나무 사이

2025.12.25. 17:30

[문예마당] 흰 눈, 그 위에

하늘 높은 곳에서     흰 북소리 둥둥, 첫눈이 내릴 때       땅의 어떤 이들은 이루지 못한 소원을     빈 입술에 되뇌이며     창에 촛불 리스(Wreath)를 걸고 불을 켠다         그 불 속으로 푹푹 내리는 눈, 눈의 향기로   세계는 소리 없는 은빛       나는 차가운 눈 속을 따듯하게 걸어     그들 곁에 다가가   눈이 풍년이 아니냐고   묵은해를 보내는 위로 인사를 하고       아직 발 디뎌보지 못한 미지의 시간       하늘이 축복처럼 쏟아지며 쌓이는     흰 눈, 그 위에         내 뜨거운 두 발, 새로운 발자국을 새기리라  이용언 / 시인문예마당 촛불 리스

2025.12.18. 19:12

[문예마당] 계단

사랑한다는 것은   지울 수 없는 마음의 계단을   층층이 오르는 일이다       등에 업은 사람과 그 계단     지르밟고 올라가   별빛을 마시며 황홀경에 드는 일이다       돌아올 길의 헤아림도 없이   겹겹이 올랐다가       바람의 시새움으로     그 사람, 허공에 떨구고       홀로 내려오며   눈물로 그 계단을 적시는     기나긴 여정을 우리는,     그리움이라 부른다 박시걸 / 시인문예마당 계단 사람 허공

2025.12.18. 1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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