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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예마당] 싱싱한 과일이 넘쳐나는 계절

초여름 날씨가 예사롭지 않다   계절의 변화와 발맞춰   자라나는     열매의 빛깔이 푸른 하늘을 떠다닌다       이른 봄     쌀쌀한 밤하늘 별들 바라보며   피어난 여리고 어린 꽃망울들   그 속에서 잉태된 작은 열매   잎사귀에 가려   새들도 모르게 커갔다       태고적 정해진 종류대로   땅에 씨 덮고 뿌리내려   계절 따라 잎 피고 꽃피어 향기 발하니   벌들의 행렬이 이어지고   역할 다한 꽃잎 떨어져   깨알보다 작은 열매     봄을 맞는다       왕성하게 자란 나뭇잎 하늘 가리고   낮에 모은 태양열 모으고 모아   저녁 되자 나뭇잎 속   세포들 분주해진다       태양 열에너지 공기 중 탄산가스 뿌리로 뽑아 올린 물로   탄수화물 포도당 지방 단백질   소리없이 만들고...       우리집 살구나무   풍성한 열매로 6월의 푸른 들판   흔들어 갈 때   어린 열매 우수수 떨어져   나뭇가지 볼 때마다   안타깝던   그   바람   또 불어 온다       점점 더워지는 햇볕 따라   초록색 살구 먹음직 스럽게 커가더니   어느새 분홍으로 바뀌어   볼그스름   14살 소녀의 볼이   여기저기 걸려있다 남영한 / 시인문예마당 과일 계절 나뭇잎 하늘 우리집 살구나무 밤하늘 별들

2025.07.03. 17:50

[문예마당] 모두가 주인공인 세상

미주지역 교무들이 뉴욕 원달마 센터에 모여 일주일 동안 모임을 가졌다. 마치던 날 훈련 모습을 동영상에 담아 보여주었다. 만남의 순간부터 과정 과정을 찍어 하나의 작품으로 만들었다. 기록을 위한 사진도 있었지만 대부분 찍힌 지도 모르는 순간 포착된 사진들이 다양하게 들어있었다. 웃고 울며 함께했던 시간이 되살아나 춤을 추는 그 영상에는 우리 모두가 주인공이었다.   삼십 중반에 나는 TV 프로에 주인공으로 출연한 적이 있다. ‘인간시대’라는 MBC 교양프로그램이었다. 1986년 강원도 동해시 작은 바닷가 마을에서 개척교화를 하고 있을 때였다. 여름이 시작되는 어느 날 서울에서 손님이 왔다. MBC 방송국 PD라고 소개하며 머리 좀 식힐 겸 놀러 왔다면서 우리 교당에서 머물게 해 달라고 했다. 오는 손님 마다할 수 있겠는가, 그는 며칠 동안 교당스태이를 했다. 우리 교당 청년들은 법회를 마치고 깊은 밤까지 교당 잔디밭에 앉아 기타치고 노래하는 게 일상이었다. 그 청소년들의 맑은 모습에 자신의 영혼도 맑아진다며 행복해하던 그가 돌아가겠다고 하면서 나에게 고백을 했다.   당시 월요일마다 방영 중이던 교양프로 인간시대 제작 PD였던 그는 우연히 기차 안에서 원불교 교무를 만나 얘기를 나누게 되었단다. 조금은 생소한 교무의 삶을 인간시대를 통해 조명해 보고 싶어졌다고 했다. 교단에서는 공영방송의 출연 제안에 수락하고 수백 명의 교무 중에서 열 명의 교무를 추천해 주었다. 그중 막내였고 바닷가 마을에서 ‘등대’라는 불우이웃 돕기 모임을 이끌며 청소년 교화를 하고 있는 내가 선정되었다고 했다. 그래서 미리 상황파악을 하기 위해 손님인 척 교당 스태이를 자처하여 나의 삶을 지켜보았노라고 털어놓으며 계면쩍은 미소를 지었다.   도저히 수락할 수 없었다. 내가 TV출연이라니, 더군다나 원불교 교무라는 상징성을 띠고 공영방송에 출연한다는 것은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나는 새내기 교화자이며 초급 수행자인 설익은 과일 같은 존재였다. 예쁘지도 않고 내어놓을 것도 없는 사람이었다. 있는 그대로 내 삶의 모습을 촬영한다 해도 불특정 다수에게 보여주는 프로가 아닌가, 연기력도 없고 아주 평범한 교무인 내가 인간시대 주인공이라니 안될 일이었다. 두려움도 컸다. 완강한 나를 설득하지 못하고 그는 떠났다.   며칠 뒤, 여섯 명 촬영팀이 다시 찾아왔다. 포기한 줄 알았던 그는 교단 본부에 요청했고 공식적인 교단의 명을 거부할 수 없었다. 그렇게 나는 인간시대 주인공이 되었다. 새벽 5시, 기도로 시작하는 나의 일상을 담기 위해 4시부터 카메라를 설치하고 일거수일투족을 찍기 시작했다. 원불교 교무로서의 나의 삶이 적나라하게 필름 속으로 흘러들어 갔다. PD는 어떤 요구도 하지 않았다. 늘 해오던 원불교 교무로서 교화하며 사는 삶, 등대의 리더로서 청년 회원들과 어려운 곳 찾아다니며 도와드리는 일들, 짬이 나면 도반들과 바닷가에 나가 담소도 나누고 참선을 하는 모습을 소리없이 따라다니며 카메라에 담을 뿐이었다.   하루하루 지나면서 그의 얼굴에 난색이 드리워지더니 조심스럽게 말을 건넸다. “교무님, 우리는 지금 원불교 홍보 영상을 찍는 게 아닙니다. 자연스럽게 교무님의 일상이 찍혀야 대중이 공감하고 그 안에 원불교가 드러나는 것입니다. 지금쯤은 교무라는 생각을 놓을 때도 되지 않았습니까 언제까지 교무라는 생각에 갇혀 있을 겁니까. 이러면 작품이 되지 않습니다.”     대개 사람은 이틀 정도 찍으면 자연스럽게 동화되어 인간 본래 모습 그대로 나오게 된다고 한다. 그런데 나는 종교인이라는 틀에 갇혀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내 의지로 어찌할 수 없는 것이었다. 나는 원불교 교무가 아닌가. 좋은 모습 훌륭한 일을 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싶은 마음은 인지상정 아니겠는가, 그러니 한순간도 마음을 놓을 수 없었다. 항변도 해보았지만 은근히 걱정되기도 했다. 시간은 흘러 촬영은 종반을 달리고 있었다.     몸에 맞지 않는 옷을 입고 통으로 노출하며 순간을 이어가던 나는 급기야 쓰러져 버렸다. 덕분에 하루를 쉬면서 영양주사까지 맞게 되었다. 교양프로를 시청률 1위로 끌어올리는 명 PD였던 그는 나의 개인 정보도 찾아내어 가족들까지 촬영에 동참시켰다. 그때부터 그의 얼굴에 끼었던 어둠의 그림자가 서서히 걷히기 시작했다.   어머니는 교단 산업기관 교무로 재직하던 아버지를 도와 복숭아 재배를 하고 있었다. 마침 수확철이 되어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시간을 보내던 중이었다. 제작진들이 어머니를 찍겠다고 했을 때 걱정이 되었다. 유난히 꾸밈도 없고 소박한 시골 아낙네인 어머니가 감당하실 수 있을까, 그것은 기우였다. 촬영팀들이 들이닥쳤을 때 어머니는 늘 밭일하러 다니던 그 모습이었다. 웃음이 나왔다 내가 뭘 기대했던가.     “엄마, 텔레비전에 나올 건 게 이쁘게 준비하고 계셔.” “오메 벨소리 다 듣것네 생긴 대로 허제 뭔 준비를 한다냐, 글고 지금 나 무지 바빠야 그럴 시간 없는디 안 오면 안 되것냐.” “꼭 가야 된다는디 어떡혀 그럼 낼 보게.” 이렇게 전화로 연락을 했으니 미장원에라도 다녀오지 않을까 내심 기대를 했었다. 꿈도 야무졌다.   어머니를 만난 제작진들은 가뭄에 단비 만난 듯했다. 어머니는 옥색 티셔츠에 꽃무늬 몸뻬를 입고 챙 넓은 모자를 쓴 채 이 나무 저 나무로 옮겨다니며 복숭아 따는 손을 멈추지 않았다.     연신 카메라를 들이대며 모습을 찍었지만 관심조차 두지 않았다. PD는 순박하고 가식 없는 어머니의 모습을 따라다니며 끊임없이 질문을 했고 솔직 담백한 어머니의 응수에 빠져 들어가는 듯했다. 출가하여 교무로 살아가는 딸이 당신 최고의 선물이며 행복이라고 주저 없이 말하는 어머니가 진정한 인간시대 주인공이라고 그는 말하였다.   열흘 동안의 촬영을 마친 몇 주 후 내 이야기는 MBC 인간시대 프로에 ‘출가’라는 제목으로 55분 동안 방영되었다. 사람들의 관심은 상상 이상이었다. 하얀 저고리 까만 치마 쪽진 머리를 한 신생 종교 성직자의 삶이 세상에 드러났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어떤 모습을 하고 있어도 알아보고 아는 체를 하였다. 그런데 사람들은 꼭 어머니의 안부를 물었다.   그로부터 30년이 지난 오늘, 우리는 스스로 동영상을 만들어 유튜브에 올리기도 하고 저장해 놓고 보기도 한다. 모두가 주인공인 세상에서 살고 있는 것이다. 격세지감을 느낀다.     “텔레비전에 내가 나왔으면 정말 좋겠네”하고 노래 부르던 그 시절에 나는 인간시대 주인공으로서 내 삶의 한 페이지를 장식했었다. 모두가 주인공으로 살 수 있는 이 세상! 나는 어떤 삶의 주인공으로 살아가고 있는가. 이정길 / 원불교 교무·수필가문예마당 주인공 수필 인간시대 주인공 원불교 교무 교양프로 인간시대

2025.07.03. 17:49

[문예마당] 자유의 어머니

그대여, 묻노니   무명의 별 아래 잠든 그 소년의 이름을 아는가       그는 먼 땅,   지도에도 낯선 나라   그 이름 ‘코리아’를 듣고서   조용히 부츠 끈을 당겼다       “어머니, 기도는 나를 위해 하지 마세요.   제 옆에 선 참전 용사들   그들의 무사 귀환을 위해 기도해 주세요”   지미, 너는 그렇게 말했지   그리고 돌아오지 못했지….   전장의 흙을 안은 편지 한 장   눈물로 번진 글씨 속   그대의 사랑이, 피 흘린 자유가   이 땅에 뿌리 내려   민주의 꽃으로 피어났다       아이젠하워의 아들   워커 장군의 아들   그 많은 참전 용사들이   하늘로 난 길 위에서   그들은 더 이상 ‘누구의 아들’이 아니었다   그들은 ‘자유의 형제’였다       한 송이 십자가 아래   어머니는 무릎을 꿇고   아들의 군복을 끌어안는다   그 입술이 속삭이는 건 한 마디   사랑한다, 그리고 보고 싶다       그 희생이 없었다면   어찌 우리가 오늘   이 봄 햇살 아래 웃을 수 있었겠느냐   그들의 참전, 자유의 승리를 부정하는 자   그 피를 잊는 사람이여!   너는 결코 평화를 말해서는 안 된다       지금도 울린다   태평양을 넘어   자유를 위해 울던 어머니의 기도   그 기도는 들판을 적시고   산천을 감싸안아   이 나라를 지켜낸다       오, 자유여   그대는 피로 쓰인 시   그대는 어머니의 눈물과 기도로 피어난 꽃   우리 후세는 맹세하노니   그대를 영원히 잊지 않으리 조성우 / 시인문예마당 어머니 자유 어머니 기도 참전 자유 참전 용사들

2025.06.26. 20:59

[문예마당] 아들과의 약속

‘좋은 약을 먹는 것보다는 좋은 음식이 낫고, 음식을 먹는 것보다는 걷기가 더 낫다.’  -허준   노인들의 최대 관심사는 건강이다. 하루에도 몇 개씩이나 건강에 대한 정보를 문자로 받는다. 특히 ‘걸으면 살고, 누우면 죽는다. 최고의 약은 걷는 것이다’ 등 걷기에 대한 좋은 말이 많다.   걷기가 건강에 좋다는 것은 잘 알고 있다. 그런데 머리로는 알지만. 막상 몸을 움직이기가 쉽지 않다. 걸으려고 하면 핑계가 많아진다. 피곤하고 기운이 없을 땐 더더욱 그렇다. 그럴 때면 스스로 ‘나는 왜 이렇게 의지가 약할까’하고 심하게 자책하게 된다.   이런 버릇은 집 밖에 나가기 싫어하는 오랜 습관에서 비롯됐다. 어려서부터 집에서 조용히 혼자 있기를 좋아했다. 학교 다닐 때는 방학이 30일이면, 30일 동안 거의 신발 신을 기회가 없을 정도로 집안에만 있었다.   대학교 3학년 방학 때였다. 집에서 꼼짝 않고 있는 나를 답답하게 여긴 친구가 강제로 ‘대학생 근로 봉사대’에 참여시켰다.   지도교수 1명에 각 대학에서 한두 명씩 모인 남녀 학생 수가 30여 명이 됐다. 북제주군 애월면에 가서 30일간 봉사활동을 하고 온 적이 있다.   배를 타고 제주도로 떠난 지 보름쯤 되던 어느 날, 전체 봉사자들이 다 모인 자리에서, 한 짓궂은 남학생이 나를 지적하며 “홍광자씨, 혹시 말이라는 것을 할 줄 아십니까?” 라고 하니 모든 봉사자들의 시선이 나에게 쏠렸다. 부끄러움에 얼굴이 새빨개져 어쩔 줄 몰라 했다. 몸을 움직이기 싫어할 뿐만 아니라 먹을 때 외에는 입도 잘 안 열 때의 일이었다.   봉사활동을 마치고 이틀에 걸쳐 제주에서 시작해서 한라산을 넘어 서귀포로 내려왔던 기억이 새롭다. 힘들었지만 지금 생각하니 그때가 아련한 추억으로 남았다.   대학 졸업 후 직장에 다니고, 결혼하고, 미국에 오게 되고 하는 수십 년 동안 운동은 생각도 못하고 어영부영 지냈다.     그러다 다 늦게 동네 친구를 따라 일주일에 세 번 가까운 곳에 있는 커뮤니티 센터에 가서 에어로빅과 타이치도 했는데, 팬데믹 시기 문을 닫는 바람에 3년 쉬었다. 동네 친구도 남편이 돌아 가신 후 딸네 근처로 이사를 했다. 그 후로 운동과는 또 거리가 멀어졌다.   남편은 한번 TV앞에 앉으면 하루 종일 꼼짝 않는 나를 이해하지 못한다. 나중에 운동부족으로 여러 가지 건강문제를 일으킨다며 제발 걸으라고 성화다. 성화를 넘어 애원을 하다가, 최근엔 고집불통이라며 화까지 낸다. 그래도 나는 요지부동이다. 몸이 움직이지 않는다. 그러나 마음 한 켠에는 ‘걸어야지’ 라는 생각이 늘 머물고 있다.   샌프란시스코에 사는 큰아들은 일주일에 한 번씩 부모에게 꼭 안부 전화를 한다. 그때마다 남편은 “엄마는 집에서 늘 TV만 보고, 컴퓨터만 한다”며 아들에게 하소연한다. 아들은 엄마를 바꿔 달라며 “어머니, 아버지가 엄마 요즘 안 걷는다고 하시는데 걸으셔야 돼요. 나가서 꼭 걸으세요” 라고 부탁 아닌 부탁을 한다.   그럴 때마다 “그래, 걸을 게”라고 말한 다음 “엄마는 TV를 보면서도 도리도리 목운동도 하고, 가끔 일어나 까치발도 들고 때로는 스쿼드도 한다. 그런데 너는 살 좀 뺐니?”라고 물으면 “빼야죠, 그런데 잘 안 빠져요” 라고 말하며 겸연쩍게 웃는다. 아들이 젊은 나이에 배까지 나왔기 때문이다. 그와 같은 유쾌하지 않은 대화가 남편과 아들과 나의 일상이 됐다.   지난 5월 초 남편이 한국으로 떠나며 신신 당부했다. 밤 늦게까지 TV 보지 말고,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 걸어야 한다고. 규칙적인 생활을 해야지 그러다 큰일난다고 했다. “그럴게요” 대답은 쉽게 했지만 걷지 못했다.   남편이 한국 간 후 큰아들이 남편보다 더 심하게 걸으라는 잔소리를 해댄다. 자식이 장성하니 어려워서 함부로 신경질도 못 부린다.   과체중의 아들은 나로부터 체중을 줄이라는 잔소리를 늘 들어왔고, 컴퓨터 앞에서 꼼짝 않는 나는 남편과 아들로부터 걸으라는 잔소리를 끊임없이 들어왔다. 서로에 대한 잔소리가 임계점에 도달했을 때 아들이 전화로 또 같은 잔소리를 해왔다.   비위 거스르지 않으려고 조심스럽게 말하다가 “너나 살 좀 빼라” 고 반격을 했다. 아들이 “그럼 우리 약속해요. 엄마가 하루에 30분 걸으면, 저도 한 달에 3파운드씩 뺄게요.” “그래, 약속하자.”   아들이 전화할 때가 다가왔다. 약속 안 지키는 엄마가 되기는 싫었다.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주섬주섬 채비를 하고 밖으로 나갔다.   집을 나서자 싱그러운 공기와 부드러운 햇빛, 티없이 맑은 파란 하늘이 나를 반겨줬다. 새소리가 들리고, 눈앞에서 다람쥐가 분주하게 왔다갔다, 차를 타고다닐 때와는 전혀 다른 느낌이었다.   아, 이렇게 좋을 수가! 걷는 동안 조용히 스치는 바람과 햇살이 말을 걸어왔다. “잘하고 있다”고.   동네 주변을 둘러보며 30분간 걸었다. 얼마 전 까지만 해도 화사하게 피었던 핑크 레이디 분홍 꽃은 어느새 지고, 곳곳에 탐스러운 새하얀 백장미가 눈길을 사로잡았다. 은은한 향기가 온 동네에 퍼졌다.   붉은 장미, 노랑 장미와 달리 백장미는 흔하지 않아 귀해 보인다. 붉은 장미가 화려하고 유혹적인데 비해 백장미는 순수하고, 품위 있고 고상해 보인다. 그래서인지 꽃말이 ‘존경과 순결’이란다.   상쾌한 기분을 안고 집으로 돌아왔다. 시작이 반이라더니, 정말 그런 것 같다. 한 번 걸어보니 기분도 좋고 앞으로도 자연스럽게 걷게 될 것 같은 느낌이다. 이제는 몸도 마음도 조금씩 그 리듬에 익숙해질 것 같다.   나는 무슨 일을 시작하기 전 뜸들이는 시간이 너무 길다. 막상 마음먹고 시작하면 의외로 오래 지속한다. 발동이 걸리는데 시간이 걸리는 만큼 일단 시작하면 꾸준하게 이어간다.   오후에 큰아들한테서 전화가 왔다. “어머니, 걸으셨어요?” “그럼, 걸었지” 당당하게 말했다. “너는?” “저도 식사량을 좀 줄이고, 노력했어요.” 남편에게도 전화로 “오늘 동네 세 바퀴 돌았어요”라고 자랑을 했다. “자~알 했어. 꾀부리지 말고 계속 해요.” 전과 달리 이렇게 화기애애한 대화가 우리 가족 사이에 이어졌다. 그게 뭐라고!   걷기가 노년의 건강을 돕고 하루의 리듬을 좋게 만들어 준다는 사실은 누구나 다 안다. 느리게 시작해도 괜찮다. 시작만 하면 이미 반은 성공이다. 중요한 건, 포기하지 않는 마음이 아닐까.   나에게 ‘걷기’란, 남편 말을 듣는 것이고 아들과의 약속을 지키는 것이며, 가족간의 정서적인 유대감을 이어가는 길이다.  더구나 치매예방에 무엇보다 좋은 것은 걷기운동이라고 한다.   결국 아들과의 약속은 나와의 약속이었고 나를 위한 약속이었다. “아들아, 너의 체중 줄이기, 성공 바란다.” 배광자 / 수필가문예마당 아들 약속 동네 친구 대학생 근로 안부 전화

2025.06.26. 20:58

[문예마당] 보랏빛 노을

우린     저 하늘에 그려진   청춘의 색     붉음도 푸름도 아닌 보랏빛 노을입니다       검은 나무들이 새 옷 입은 5월!   마을 회관 잔치 마당에 보랏빛 노을이     한 가득 이네요   떠난 지 오랜 고향 생각일랑 버리시고   웃음 바다에 빠져 봅시다       깃털 하얀 잔디가 손짓하는 길에서     사랑에 굶주린 낙엽들 주름을 펴세요       예쁘고 행복하라고 만들어진 설레는 잔치   아픔 고통 잊으시고 덩실덩실     흐르는 음악 소리 맞추어 손 흔들어 춤을 추세요   삶을 마음껏 즐기세요         다이아몬드가 뚝 뚝 떨어지는 오동나무 그늘 아래     예쁜 꽃들이 우리들인 걸 잊지 마세요       때 이른 코스모스가 손짓하는 5월   아픔일랑 털어내시고 크게 웃으세요   외로움의 소굴을 탈출하세요   광옥 같던 얼굴에 검 버섯도 좋아서 웃을 겁니다       파랑새 뛰노는 길에서   보랏빛 노을들!     모여 모여 크게 웃으며 살아요 우리 엄경춘 / 시인문예마당 보랏빛 노을 보랏빛 노을들 오동나무 그늘 아픔 고통

2025.06.19. 19:00

[문예마당] 흥부의 박돌

노란 유채 보랏빛   수많은 들꽃 갈대숲 이루고   마태호수 지나서   비포장 길 산 능선       뾰족 뾰족  울퉁불퉁 솟아나   돌기둥 이루고   석양에 뭉클한 선율에 놀라움   착한 행실 하아얀 박 속에도   마음 보석 담겨 있다         베풂에 손 내미는 사랑   어찌 말하리   내딛는 발자국 애틋한 물결 이루어   앞 뒷산 호박돌 집성촌 만든다   거친 돌 되지말고     디딤돌이 되리라 권온자 / 시인문예마당 흥부 유채 보랏빛 들꽃 갈대숲 뒷산 호박돌

2025.06.19. 19:00

[문예마당] 자연에서 우리 부부를 만났다

샌타애나 리버 오솔길을 따라 남편과 함께 걸었다. 우리가 걷는 왼쪽은 아스팔트 길인데 유모차, 자전거, 롤러스케이트, 스쿠터가 달린다. 오른쪽은 아주 작은 돌 섞인 모래가 깔려 있는데 그곳은 승마를 위한 길로 말이 다닌다. 그 길 너머는 깊은 숲 속이다. 그 아래로는 물이 흐르는 소리가 들린다.   숲 속과 모래길 사이에 기다란 사각형 모양의 하얀 플라스틱 울타리가 두 줄로 처져 있다. 그 울타리 바로 밑 모래땅에 물방울무늬가 같은 간격으로 둥근 도장을 찍어 놓은 것처럼 새겨져 있다.   자세히 보니 양옆에 밤새 매달려 있던 이슬방울이 모래땅을 뚫었나 보다. 자연 현상은 인간의 생각이 미치지 못할 만큼 정교하다. 울타리에 전력을 다해 매달렸던 방울들. 그것이 모래땅에 뛰어내려 남긴 가지런한 무늬처럼 나의 일상도 그렇게 정돈되고 평온해지기를 희망해 본다.   커다란 사냥개 목줄을 잡고 달리기를 하는 사람, 햇빛 가리개가 있는 유모차를 미는 젊은 여인, 무언가를 적으면서 주위를 살피며 걷는 젊은이, 세발자전거를 타는 손자 뒤를 힘겹게 따라가는 노부부, 롤러스케이트를 타고 춤추듯이 미끄러지는 학생, 스쿠터를 타고 날쌔게 달리는 청년을 보았다.   모두가 나름대로 목표가 있어서 노력하는 중이었다. 나는 당뇨가 있는 남편을 위해 정해진 시간에 나가 함께 걸었다. 그곳에 나온 사람들은 운동하며 몸을 단련했다. 우리는 신선한 공기를 가슴 깊이 들이마시며 자연의 숨결을 온몸으로 느꼈다.     매일 걷는 산책로에서 모서리를 돌면 늪지대가 있다.   그곳에 청둥오리 한 쌍이 보였다. 자유롭게 하늘을 날아 이곳까지 날아왔나 보다. 우리처럼 둘이 꼭 붙어다닌다. 수컷이 암컷을 졸졸 따라다닌다. 암컷은 지푸라기 같은 수초들 사이에서 잘 보이지 않는다. 수컷은 둥근 머리에 녹색 광택이 번쩍거려 한눈에 들어온다. 그 윤기가 빛 물결처럼 흘러 녹색 입자가 떠간다. 놀라지 않게 살그머니 손을 뻗어 사진을 찍었다. 수컷은 노란 부리와 짙은 녹색의 머리, 하얀 줄이 목걸이처럼 둘러 있다. 암컷은 어두운 황색이 섞인 부리를 가졌고 몸은 갈색과 베이지색이 섞인 얼룩무늬다. 이 얼룩무늬가 보호색 역할을 한다고 남편이 알려준다.   둘이 물 위를 떠다니며 가끔 고개를 돌리고 한 마리가 방향을 바꾸면 그 길을 주저 없이 따른다. 오랜 세월을 함께 살아온 한 쌍의 모습 같다. 청둥오리는 대부분 평생을 짝과 함께한다. 봄이 되면 그 짝을 찾아 서로 지켜 주고 가을이 되어 떠날 때도 함께 떠나겠지. 이 청둥오리 한 쌍의 인연이 강물처럼 오래도록 흐르고 고요한 평화 속에 머물기를 빌어본다.   청둥오리 앞에 머물러 한참을 바라보다가 다시 남편 손을 잡고 걷는다. 그는 이십 대 후반에 나를 만나 가정을 꾸리고 무역회사에 다니면서 온 세계를 누비고 다녔다. 유럽, 중동, 인도, 남아메리카 등 곳곳에 자수 원단을 팔러 샘플을 들고나갔다.     출장에서 돌아온 후, 늦은 퇴근길 교통사고로 목발 짚고 집으로 들어와 나를 놀라게 했던 적이 있었다. 지금도 그날 밤의 기억이 선명하다. 자기 일에 묵묵히 분투하며 가족을 보살피느라 온 힘을 다했던 시절이 아련히 떠오른다. 자수 무역회사를 그만두고 이민 길에 올라 낯선 이국 땅에서 언어와 문화의 장벽을 허물고자 안간힘을 썼다. 이곳에서 남편은 다시 원단 장사를 시작하였다. 한편, 이곳에 정착하기 위해 우체국 시험을 치르고, 의료기구 만드는 회사에서 납땜 연기를 맡으며 케이블을 연결하던 내 모습도 떠올랐다. 캘리포니아주 교사 자격증을 받으려 여러 번 영작문 시험에 도전하며 조마조마했던 그 시절도 생각났다.     우리 부부는 새로운 삶을 일구며 자리 잡았다. 그 후에 남편에게 갑자기 찾아온 갑상선암으로 수술 후 방사선 치료를 받으며 힘든 시기를 잘 견디고 은퇴했다.   남편은 은퇴 후 텃밭을 가꾸며 농사를 짓는다. 그는 부엌 창문 앞에 난초, 납풀, 장미꽃, 금불초, 제라늄, 부겐빌레아를 심어 내 마음과 눈을 즐겁게 해준다. 나를 위해 부엌 창문 앞에 다양한 꽃을 심는다. 흰 꽃, 보라색 꽃, 빨강 꽃, 노랑 꽃, 연분홍 꽃이 어우러져 창밖을 내다볼 때마다 눈과 마음을 환하게 밝힌다. 바람에 살랑이는 꽃잎을 보고 있으면 기분까지 가벼워진다. 그는 사시사철 나에게 변함없는 마음을 보내고 있다.   물 위를 나란히 떠가는 청둥오리를 바라보며 세월 속에 흘러온 우리 부부를 떠올린다. 물 위를 미끄러지듯 유유히 떠도는 청둥오리 모습이 평화롭다. 자연의 품 안에서 조화롭게 살아가는 그들의 모습이 우리 삶과 겹쳐 보인다. 지금까지 걸어온 길이 얼마나 소중한지 다시 깨닫는다. 남은 세월도 한결같은 사랑으로 감싸안으며 함께 나아가길 소망해 본다. 이현인 / 수필가문예마당 자연 부부 노부부 롤러스케이트 자연 현상 자수 무역회사

2025.06.19. 19:00

[문예마당] 보랏빛으로 오는 연가

나는 은연중 보랏빛만   떠오르면 가슴이 설렌다   알듯 모를 듯   슬픔이 일렁이고   애잔한 무언가가   눈물 주위를 서성거리는 것은   보랏빛 그 아득한   여운 때문인지       요즈음 길에 나서면   5월의 융단바닥을   눈부시게 뒤덮고 있는   자카란다 보석 꽃잎이   나를 설레게 한다   좀더 머물러 있지않고 왜 서둘러 가려는지   바닥에 처연히 누워있는   그 모습은 애틋하다   보랏빛 자카란다 꽃잎이여   어찌하다 떨어져   슬피 우는가       나도 같이   통곡이라도 해야할 것 같은   자카란다   내년 이맘때까지 그리움   한 섶을 가슴에 안고       자카란다 꽃   이제 이별과 마주한 채로   보랏빛 눈부신 자태는   영영히   내 안에 서성대고 있는데… 장정자 / 시인문예마당 보랏빛 연가 보석 꽃잎 내년 이맘때 눈물 주위

2025.06.12. 18:27

[문예마당] 노년이란 화살

90평생 들어보지 못한     노년이란 화살     엄동 설한 얼어 붙은 창가에   벼락같이 날아든다       날아든 화살 틈새로 보인 설한     노익장을 과시하는 나의 백발이   아닌가 기울여 본다       엊그제 펄펄 날린 활기는     일장춘몽 사라지고     이제 힘없는 백발이란     그림자만     사막 아지랑이처럼 출렁인다       과거란 활력   이제 얼마나 끈끈할지   조석 문 풍자 바람에   물어본다       바람은 말한다   세월 속 멍든 화살이지만     오늘의 알찬 희망이 아닌가   힘차게 활짝 펼쳐 보라고     이 순간 환상을 위해 하세종 / 시인문예마당 노년 화살 화살 틈새 엄동 설한 사막 아지랑이

2025.06.12. 18:26

[문예마당] 첫사랑 영이

미국으로 이민온 지 15년 만에 고국을 방문했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고 했던가 어디를 가나 어리둥절할 정도로 너무 많이 발전했다. 20일 일정으로 한국에 와서 모든 용무를 마치고 출국할 날이 일주일 정도 남았다. 이 기간 중에 첫 사랑의 여인 영이를 만나 보고 싶었다. 어디서 무엇을 하며 살고 있는지 그녀의 소식이 무척 궁금하였다.   그녀를 찾으려고 백방으로 수소문하며 다닌 끝에 영등포에서 아담한 칼국수 식당을 운영하는 그녀의 언니를 만날 수 있었다. 언니는 35년 만에 만나는 나를 한눈에 알아보았다.     “아니~ 이민 간 걸로 아는데 조카님이 어떻게 여길….” 언니의 음성은 흥분으로 떨리고 있었다. 그곳에서 영이의 소식을 접한 순간 나는 머리를 한 대 맞은 듯 ‘띵’해지며 현기증을 느껴 식탁의자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우리 어머니와 먼 친척뻘인 영이는 나보다 두 살 어린 아리따운 처녀였다. 내 어머니를 언니라 부르기에 나는 그녀를 ‘아줌마’라 칭하였고 영이는 나를 ‘조카님’이란 존칭으로 대하였다. 영이와 언니 두 자매는 충청도에서 상경하여 우리집에서 한 칸 짜리 방을 얻어 자취하며 제과 공장에 다녔다.     그 당시 나는 22세였다. 가정 형편이 어려워 상급학교를 제때에 진학하지 못하고 뒤늦게 야간 고등학교에 입학한 2학년 학생이었다. 한 집에 기거했지만 일요일에나 어쩌다 마주 칠 수 있었다. 그럴 때면 영이는 두 볼이 발그레 상기되어 눈을 아래로 깔고 무척 수줍어하곤 했다. 나는 그런 영이의 모습이 참으로 보기 좋았고 가슴이 설렜다. 어느샌가 우리는 서로 이성으로 대하고 있었다. 쉬는 날이면 몰래 외출하여 영화 관람도 하고 짜장면도 사먹곤 했다.   영이의 고향은 서산이었는데 바다 가까이 살았으면서도 바다 구경을 한 번도 한 적이 없다고 했다. 벼르고 별러 안면도로 1박 2일 여행을 했다. 용산터미널에서 버스를 타고 6시간이 걸려 섬에 도착하여 민박집에 여장을 풀었다.     “어쩌면 색시가 저리도 이쁘고 고울까 원앙이 따로 없지….” 주인 아주머니의 칭찬에 나는 신이 나서 어깨가 저절로 으쓱거렸다.     민박집 주위에는 이름 모를 꽃들이 만발하여 아름다움을 드러내고 있었고 주변의 논은 이미 황금색 누런 벌판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바닷가로 향하는 오솔길을 걷자니 기다란 코스모스가 하늘거렸다. 코끝을 스치는 그 진한 향기는 영이의 냄새와도 같았다.   우리는 백사장에 앉았다. 밀물 때인지라 바닷물이 밀려오고 있었다. 갈매기 한 쌍이 백사장에 내려앉아 부리로 먹이를 찾다가 바닷물이 밀려 오면 뒤로 물러서고 있었다. 내가 작은 돌멩이 한 개를 들어 그쪽으로 던지려 하니 영이가 말렸다.     “자기야 ! 그러지마. 저 새들도 우리처럼 다정하잖아.”   영이는 어디서 주워 왔는지 예쁜 자갈 두 개를 손에 쥐고 있었다. “이 돌멩이 하나는 자기이고 하나는 나야” 그녀는 손수건을 꺼내 돌멩이 둘을 합쳐 묶었다. “우리 이 돌처럼 헤어지지 말고 꼭 붙어 살자.”     우리는 일어섰다. 하루를 지켜 온 해는 뉘엿뉘엿 지평선 너머로 조금씩 넘어가고 있었고 주변 하늘과 바다는 온통 핏빛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영이가 쥐어 주는 돌멩이 묶음을 나는 있는 힘을 다해 바다 쪽으로 던지며 이것처럼 우리가 헤어지지 않게 해 주십사 빌었다.   “영이야! 사랑해. 영원한 사랑을 맹세할게.”   영이의 긴 머리카락이 바닷바람에 얼굴을 덮고 있는 것을 이마 위로 밀어 주며 말했다. “정말?” 영이는 새끼 손가락을 내밀었다. 우리는 손가락을 건 후 마주 보고 서서 입맞춤을 하였다.   집에 돌아와 보니 집안이 발칵 뒤집어있었다. 어머니는 노발대발하였다. “이 얼빠진 놈아!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어디를 싸돌아 다닌 거냐. 네놈이 이 어미 죽는 꼴 보고 싶으냐.”     어머니는 영이에게도 노기를 터뜨리고 말았다. 당신의 자식이 뭐 대단한 사람인 냥 “네가 감히 내 자식을 넘보다니….”   영이 언니는 “언니! 잘못했어요” 대신 용서를 빌었고 영이는 머리를 푹 숙이고 흐느끼고 있었다. 그 두 자매는 일주일 후에 이삿짐을 쌌다. 36살에 청상과부가 되어 8남매를 거느리고 자식 잘 되기만을 바라며 살아온 어머니의 의지를 아무도 꺾을 수 없었다. 나는 괴로운 나날을 보내다가 군에 입대했고 그 후론 영이의 소식을 알지 못하였다.   영이는 27세에 트럭 운전사와 결혼했는데 그 남자는 술 주정뱅이였다고 한다. 설상가상으로 의처증까지 있어 장거리 운행을 끝내고 돌아오면 자기가 없는 사이 어떤 놈하고 바람 피웠느냐고 때렸단다. 수많은 날들을 고통 속에서 살아온 영이는 33세에 두 어린 남매와 연탄불을 피워 놓고 극단적 선택을 했다. “내 새끼 내가 데리고 가니, 같이 화장해서 안면도 앞 바다에 뿌려 달라”는 유서를 남겼단다.   나는 영이의 넋을 위로하고자 안면도로 차를 몰았다. 그녀는 죽음을 맞이하면서도 우리의 옛 추억을 잊지 못하고 간직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바다를 넋을 잃고 바라보았다. 모든 것은 내 잘못이었다. 그녀와 약속한 바다의 맹세를 지키지 못한 내 죄가 컸다. 그녀를 보호해 주지 못한 것이 한스러웠다. 무거운 바위가 내 가슴을 짓눌렀고, 철썩철썩 밀려 오는 파도는 내 뺨을 때리고 있었다.   나는 첫사랑 영이를 큰 소리로 부르며 울부짖었다. 그리고 영이의 혼이 고통이 없는 저 세상에서 편안한 안식을 누릴 수 있기를 빌었다.     바다는 아무 말이 없었고 그때처럼 낙조가 붉게 타오르고 있었다. 이진용 / 수필가문예마당 첫사랑 수필 돌멩이 묶음 우리 어머니 돌멩이 하나

2025.06.12. 18:24

[문예마당] 꿈속의 꿈

꿈속의 꿈   꿈속에서 꿈을 꾼다   XX씨 X시에 사망하셨습니다   가족이 ㄱㄴㄷㄹ으로 구겨진다   서로서로 접힌다     간혹 히스테리가 터진다       방금 몸에서 빠져나온 혼이 천장에 붙어   내 침대를 둘러싸고 늘어져 있는     가족을 내려다본다       나는 이토록 가뿐한데   무겁게 늘어진 가족을     어떻게 위로하지!       미안한데 나 방금 죽었거든   고통을 느끼는 몸을 작게 둥글게 말아     꼭꼭 접어서     심장박동 틈새로     비집고 들어가야 했거든       너무 슬퍼 말아요     너무 아파하지도 말아요   심장이 멈추면   가슴이 멈추면   혀가 멈추면       고통이 없어져요   몸이 없어져요 정명숙 / 시인문예마당 꿈속 심장박동 틈새

2025.06.05. 18:53

[문예마당] 바다 갈매기

동트는 새벽   은빛으로 일렁이는 모래사장   바다 갈매기   외 다리로 서 있거나   동그마니 앉아   분홍빛으로 자신의 존재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석상처럼 고요합니다   우주의 무한한 평화   하얗게 하얗게 내려앉습니다       가끔씩 들려오는   날개 치는 소리   홀로 빛나는…       잠시 잠깐 새가 되고 싶었던   그 이른 새벽의     겨울 바다 이춘희 / 시인문예마당 갈매기 겨울 바다

2025.06.05. 18:53

[문예마당] ‘부실이’와 어머니

타주로 이사하는 친구가 키우던 산세비에리아 화분 두 개를 주고 갔다. 밤에 호흡하며 산소를 많이 내뿜으니, 실내에 두면 건강에 좋을 것이라고 했다. 간혹 꽃을 피워 올리기도 한다는데 꽃대는 흔적도 없고 잎대뿐이었다. 두 화분 중의 하나는 잎이 모두 곧고 키도 가지런했고 나머지 하나는 상태가 그리 좋아 보이지 않았다. 싱싱한 화분을 침실에 들여놓고, 부실한 쪽을 양지바른 거실에 자리를 잡아 주었다.   며칠이 지나자, ‘부실이’가 놀랍게도 생기를 띠기 시작했다. 휘어졌던 잎새가 여물어지고 하루하루 눈에 띄게 윤기를 머금었다. 역시 햇볕은 최고의 자양분인가. 정성을 다해 돌보기 시작했다. 자주 물을 주고 시간 따라, 햇볕의 각도에 맞춰 화분의 방향을 틀어 주자 부실이는 하루가 다르게 움쑥 자라며 모양을 냈다.     한 달 후에 분갈이하려다가 깜짝 놀랐다. 그동안 키가 조금밖에 크지 않은 튼실이의 뿌리는 단단한데, 부실이는 잎대만 무성할 뿐 뿌리는 거의 썩었다. 이 지경이 되도록 까맣게 모르다니! 지나친 햇볕과 감당할 수 없는 물공급이 부실이를 뿌리부터 상하게 한 것이다.   어머니도 그렇게 쓰러지셨다. 그때까지 자식들은 깊이 감춰진 어머니의 연약함을 모르고 건강한 젊은 날의 어머니로만 생각했다. 딸만 다섯을 둔 어머니의 한과 필요 이상으로 자신을 강하게 포장했던 어머니의 가슴 속 서러움을 헤아리지 못했다.     “늙어도 딸들 신세는 안 진다”라고 하시던 어머니가 혼자가 되었지만 어느 딸도 어머니를 모실 생각을 하지 않았다. 자식이 부모를 온전히 이해하려면 부모의 나이가 되어야 한다고 한다. 그때의 어머니의 외로움을 지금 비로소 절절히 느낀다.   어릴 때, 어머니가 외출하시는 날은 온종일 쓸쓸했다. 어머니의 모습이 골목을 돌아 점점 작아지고 세모시 옥색 치맛자락이 가물가물해질 때까지, 어머니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집에 오실 즈음이 되면, 경학원(지금의 성균관대) 뜰이 내려다보이는 창경궁 담장에 기대어 앉아 노래를 불렀다.     “임자 없는 대궐 안에 무궁화는 피고 또 피어~~” 어머니가 안 계신 집안은 내겐 망국(亡國)의 대궐처럼 휑한 빈터였다. 노래 부르기도 지친 아슴푸레한 저녁 무렵이 되어 날 찾는 어머니 목소리가 들리면 구르듯 달려 내려가 어머니에게 안겼다.     대학을 졸업하던 해, 군사정권에서는 그해 대학 졸업 예정자들에게 학사 고시라는 것을 실시했다. 대학 졸업 자격시험이었다. 겨울방학이 끝날 무렵에 시험이 있었다. 입학시험처럼 여러 과목에 걸친 시험을 마치고 나오는데 교문 밖에 뜻밖에도 어머니가 와 계셨다. 교정에서 친구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급히 어머니의 팔을 잡아끌며 짜증을 부렸다.     “엄만, 뭐 하러 오셨어요?”     “우리 딸이 국가고시를 보는데 엄마가 와야지.”     그날 교문 밖 찬바람 속에 어머니는 시험이 끝나도록 오래 서 계셨다. 그 바람은 지난 22년 동안 내가 크고 작은 시험을 치를 때마다 어머니가 맞으시던 바람이다. 마지막이 된 칼바람 속의 어머니를 뿌리쳤던 그날의 기억이 세월이 가도 잊히지 않는다.   유학길에 오르며 처음으로 어머니 품을 떠났다. 학교 기숙사 창문으로 샌타모니카 해변이 보였다. 어스름 녘이면 해변으로 달려가서 먼바다 끝을 오래도록 보았다. 그 바다는 부산에 계신 어머니의 바다와 이어져 있었다. 파도는 끊임없이 밀려오고 밀려나갔다. 밀려오고 밀려나가는 파도를 따라 내 마음도 한국과 미국을 오갔다. 달무리 지는 저녁이면 파도는 엄청난 기세로 해안을 향해 달려오다가 흰 거품이 되어 스러지곤 했다. 그래도 파도는 어머니처럼 내게 다가오기를 멈추지 않는다. 저만치 다가왔다가 미진하게 바다로 밀려나가는가 하면 때로는 발밑까지 치고 올라와 차디찬 각성으로 나를 흔들었다. 그럴 때면 서둘러 일어나 모래를 털고 학교로 돌아갔다.   결혼 5년 만에 어머니를 미국에 초청했다. 어머니를 만나러 가는 66번 국도가에는 노란 들꽃들이 내 마음처럼 바람에 설레고 있었다. 짙은 물빛 원피스를 입고 세인트루이스 공항에 내린 어머니는 출구로 걸어 나오다가 기다리고 있던 셋째 딸과 처음 만나는 딸 가족들의 환영을 받았다. 집까지 두 시간 넘어 달리는 동안에도 어머니 얼굴에는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까르륵 애교가 넘치는 세 살이 된 손자의 재롱에 푹 빠지셨고 카시트에서 말없이 할머니를 지켜보고 있는 돌배기 손녀와 눈이 마주치면, 어머니와 띠동갑 손녀라며 귀여워하셨다.   집에서 어머니는 늘 성경을 보셨는데, 남편은 퇴근해서 집에 오면 짐짓 눈을 크게 뜨고, “아니 어머니, 그 책 아직도 다 못 읽으셨어요?” 하며 놀란 시늉을 해서 어머니를 뒤로 넘어가게 했다.     남편이 재직하던 미주리 대학은 오자크 산맥에서 흘러내리는 물길이 도심 곳곳에 바닥까지 들여다보이는 맑은 자갈 개울들을 만들어 놓은 아름다운 도시에 있었다.     개울물에 발을 담그며 어머니와 함께 그곳에서 지낸 두 달이 결혼 후, 어머니와 가장 오래 보낸 시간이었고 행복한 나날이었다. 해마다 이맘때면 어머니가 유독 그립다. 유니스 박 / 수필가문예마당 어머니 부실 어머니 목소리 어머니 얼굴 대학 졸업

2025.06.05. 18:52

[문예마당] 바다가 보낸 초대장

일등관람석은 내 몫   때로는 곁에 누운 그이와 함께   침실 발코니의 유리창 너머로   밤낮없이 펼쳐지는 바다의 공연에 취한다       낮에는 춤사위, 밤이면 끝없는 열창   눈부신 별무리와 더불어 신바람이 난 바다도   때로는 하늘의 통곡은 달래지 못해   쏟아지는 장대비에 신음하던 유람선       함께 지내며 다정해진 인연인가?   바다가 손짓한다   내미는 초대장, ‘유람선’   마음 내키는 대로 스물네시간을 즐길 수 있다니… 김소향 / 시인문예마당 초대장 바다 침실 발코니

2025.05.29. 18:16

[문예마당] 친구에게

세월에 긁히고   아픔에 찔리고   슬픔에 털리고   기쁨에 말렸다       젖은 가슴   쥐어짜며   머리카락   쥐어뜯고       못 본 척     모른 척   그렇게   살았다네       지나보니   그렇더군   인생살이   별거 아녀       그냥   그러고 살어 이강민 / 시인문예마당 친구

2025.05.29. 18:15

[문예마당] 몽골 평원서 선사시대를 만나다

“몽골에 또 간다고? 네가 우리보다 몽골에 더 자주 간다.” 캘리포니아에 거주하는 나의 몽골 친구들이 웃으며 하는 말이다. 사실이다. 나는 몽골에 자주 가고, 갈 때마다 한 달씩 머무른다. 나는 이제 내 몽골 친구들보다 더 구석구석 몽골의 각 지방에 대해서 안다. 나는 왜 몽골과 사랑에 빠졌을까.   세상의 모든 지역에는 독특한 아름다움, 특색, 그리고 얽힌 역사가 있다. 런던의 성숙한 빅 벤과 템즈 강, 파리의 세느 강변과 예술가들, 워싱턴 D.C.의 독수리 같은 위엄과 질서, 도쿄의 차분한 휘황찬란함, 서울의 밤낮 구분이 없는 활기와 분주함, 캘리포니아의 항구와 서퍼들, 그리고 라스베이거스의 화려한 흥분.   특히 문명이 발달한 지역에는 공통분모가 있다. 예를 들어, 가치를 환산할 수조차 없는 미술관, 수만 년 역사를 소장한 박물관, 전 세계의 데이터를 모아 놓은 도서관, 신나는 놀이 공원, 뜨거운 함성으로 들썩이는 스타디움, 미슐랭 음식점, 젊은 두뇌들이 밤을 지새우는 대학들 등등.   몽골에는 이러한 것들이 없다. 울란바토르는 몽골의 수도이며, 제일 큰 도시이다. 그 외에 몇 소도시가 있는데, 그저 마을에 지나지 않는다. 행정상 도시라고 하니까, 그렇게 불러 주는 것이다.     몽골의 전체 인구가 약 300만 명인데, 그 중 절반이 넘는 170만 정도가 울란바토르에 몰려있다. 울란바토르는 그냥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는 곳일 뿐, 우리가 기대할 수 있는 현대 도시의 격은 없다. 몽골은 세계에서 19번째로 큰 나라이다. 미국의 알래스카와 비슷한 규모의 큰 영토를 소유했으나, 인구가 매우 적고, 오랫동안 유목생활을 이어왔기 때문에 문명의 발전과 축적이 이루어지지 못했다. 몽골인들이 하는 우스갯소리가 있다. “사람보다 가축이 더 많다.” 사실이다.     그러나 몽골에만 있는 것이 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울란바토르로부터 멀어지면 찾을 수 있는 것이 있다. 바로 ‘선사시대’다. 서쪽으로, 서쪽으로 지프를 달리면, 스테프(Steppe), 즉, 광활하고 건조한 평원에 만 년 전의 세상이 존재한다.     그곳에 도착하면 마치 타임머신에서 내리듯, 눈이 휘둥그레져 지프에서 내리게 된다. 과거의 발자취를 구경하는 것이 아니라, 살아 숨 쉬는 선사시대를 만나게 된다. 이 21세기의 선사시대는 몽골의 서쪽 마지막 소도시, 울기를 지나, 알타이 산맥까지 펼쳐진다. 그곳은 지프나 트럭이 아니면 갈 수 없다.   그 선사시대에 들어서면 구약에 등장하는 목동들의 삶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양떼와 함께 푸른 초장을 찾아 이동하고, 수개월 만에 혹 다른 목자를 만나게 되면 반갑다. 각자가 본 지방의 소식을 나누고, 우물을 두고 싸우고, 강도를 만나 양떼를 빼앗기는 그들의 모습을 그려볼 수 있다. 교과서에 나오는 만 년 전에 살았던 사람들의 수렵채집 생활을 목격하게 된다. 거기에는 길이 없고, 이정표도 없고, 어떤 건물도 없고, 차도 없고, 심지어 나무도 없고, 공해도 없고, 어떠한 문명의 그림자도 드리워져 있지 않다. 아무것도 없다. 오로지 듬성듬성 난 풀뿐이다.   몽골의 스테프는, 사방이 뻥 뚫려 있어서, 육안으로 거리를 가늠하기 어렵다. 무슨 말인가 선뜻 이해가 안 될 수도 있는데, 우리가 사는 도시에서는 어떤 기준이 있어서 거리를 대략 짐작할 수 있다. 예를 들자면, 8차선 도로라든가, 10블록 떨어져 있다든가, 어느 건물을 지나 얼마 정도 가야 한다든지 등이다. 아무것도 없는, 끝이 보이지 않는 지평에서는 거리를 가늠하기 어렵다.     하루 종일 지프를 달리다 행여 멀리 점이 하나 보이면, 그건 양 떼와 염소 떼 수백 마리와 함께 걷고 있는 어떤 사람이다. 그 사람도 이쪽을 발견하고 멈춘다. 우리는 차로 한 참을 그 사람을 향해 달린다. 그곳에서는 타인을 만나기란 너무도 희귀한 일이라서, 서로 만나면 각자의 지방 소식을 주고받는다. 그리고 어느 쪽으로 가야 목적지로 쉽게 갈 수 있는지 알려준다.     예를 들면, 어디 강물이 불어서 건널 수 없다든지, 어느 계곡에는 눈이 아직 녹지 않았다든지, 어디로 돌아가야 덜 추운지, 어디 초장을 향해 가고 있다든지, 혹은 어느 쪽으로 가야 몽골인이 거주하는 천막, ‘게르’를 만날 수 있는지 등을 알려준다.     몽골 유목민들은 풀밭을 찾아 1년에 4번, 계절마다 옮겨다닌다. 봄, 여름, 가을에 건초를 만들어 가축들이 겨울을 날 수 있게 대비한다. 그들은 게르를 세우는데 2시간, 접는데 1시간이면 충분하단다.     그들은 야채를 먹지 않는다. 농사를 짓지 않기 때문이다. 소금도 귀하다. 바다가 없는 내륙 국가이기 때문이다. 양념이 없는데, 그 흔한 후추도 없다. 그냥 말, 낙타, 야크, 양, 염소 등의 고기를 물에 푹 삶아 먹는다. 가축의 똥을 말려서 연료로 사용한다. 그들은 신석기인들이 남긴 암벽화 가까이에서 염소에게 풀을 뜯긴다. 신석기인들과 한 공간에서 호흡하는 선사시대의 일부이다.   내가 몽골에 자주 가는 이유는 그 선사시대가 주는 힐링이 있기 때문이다. 그곳에는 타인이 만들어 놓은 길이 없다. 내가 발을 내딛는 곳이 길이 된다. 문명사회의 복잡한 구조와 관계망에 나를 끼워 맞춰야 하는 의무가 사라진다. 무엇이 되어야 한다는 강요나 압력에서 자유로워진다. 그래서 나 자체로 존재하는 법을 배우게 된다.   그곳에서는 별과 가까워진다. 밤하늘에 별 사탕을 뿌려 놓은 듯, 총총 빽빽한 별들을 보면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의 가망성을 마주한다. 별에 아름다운 이름을 붙이다 보면, 영혼이 깨끗해짐을 느낀다. 뿌리가 어디인지도 모르던 서러움과 억울함이 녹아 사라진다. 그곳에는 문명의 병든 외로움이 아닌, 건강한 고독이 있다.   시계 없이, 사방천지 누구의 발자국도 닿지 않은 광야를 홀로 걷다 보면, 오랫동안 숨죽이고 있던 내 영혼의 목소리를 듣게 된다. 그 세밀하고 내밀한 나의 영혼의 소리는 나의 색깔이 무엇인지, 내가 무엇을 원하고 있는지, 나의 가치가 어떤 것인지를 깨닫게 해준다. 아무도 없는 광야에서 나는 진정한 나 자신과 마주한다.   친구! 힐링이 필요하면, 몽골의 선사시대로 건너가 봐. 송마리 / 시인문예마당 선사시대 몽골 몽골 친구들 구석구석 몽골 몽골 유목민들

2025.05.29. 18:14

[문예마당] 궁전을 이고 다니다

700년 된 거대한 성을 머리에 이고 다닌다   트라카이 궁전, 리투아니아의 옛 수도   성은 여러 깊은 호수 한가운데에 있다   성 주변에는 나라 잃은 유대인들의 집단촌이 있었다   폴란드가 이 요새를 여러 번 공략하려다 실패했다고 한다       2년 전 10월 하순   발틱의 겨울은 뉴욕보다 빨리 왔다   트라카이 궁전에는 찬비가 내렸다   시즌 마지막 관광객들은 비바람에 벌벌 떨었다   강가의 작은 유람선은 갈매기 승객 몇 명을 태우고   술에 취해 온몸을 가누지 못하고 있었다   너무 춥고, 외로워 독주를 마신 것 같다       비에 쫓겨 기념품 가게에서 모자를 만지작거리는 나에게   점원은 말했다   이 오래된 성을 싸게 드립니다   머리에 지고 다니면서 세상 사람들에게 알려주세요   리투아니아는 잘 알려지지 않은 발틱 소국이지만   가을 하늘이 무척 아름답고, 좋은 천연 버섯과 블루베리가 흔한   평화를 사랑하는 민족이 사는 나라라고 최복림 / 시인문예마당 궁전 궁전 리투아니아 기념품 가게 갈매기 승객

2025.05.22. 19:08

[문예마당] 인생 나이에도 바람이 분다

푸른 오월 들판 위로   바람이 분다   과일 나무마다   휘어져 무거운데   바람에 지쳐   떨어지는 낙과소리   과수원집   한숨소리가     들판 위로 울려온다       몇 그루 안 되는   우리집 나무도   덩달아   바람에 매달려   휘어진 가지가지   무슨 잘못이라도 했는지   고개 숙여   싹싹 비벼대는 소리   바람 속에 실려간다       어제 아이들과 조카들이   한자리에 모여   생일축하 대접을 받았다       어느새     날아가는 세월 따라   할아버님 아버님 모습으로     변해버린   30대 40대 50대의     내 모습이   아이들 조카들   이야기 속에   얼굴에     숨어있다       인생 나이에도   바람이 분다 남영한 / 은퇴 치과전문의문예마당 인생 나이 인생 나이 우리집 나무 할아버님 아버님

2025.05.22. 19:08

[문예마당] 인연은 필연인가 우연인가

문단에 등단한 지도 어언 17년이 되었다. 그동안 시집 2권과 수필집 2권, 영문 수필집 1권을 출간했다. 요즘 독자들은 인터넷을 통해 작가의 작품을 접할 때가 많다. 며칠 전에 한 독자가 재미 수필가협회 웹 사이트에 실린 나의 수필을 읽고 댓글을 달아 놓았다. 그 내용인 즉 다음과 같다.   ‘안녕하세요, 저는 고 최돈원 할아버지의 외손녀인 이정민이라고 합니다. 처음 인사드립니다. 할아버지의 흔적을 찾아 구글링 하던 중에 우연히 작성하신 글을 보게 되었습니다. 너무 짧은 인생을 살다 가신 할아버지에 대해 상상해 볼 때마다 정보가 부족해서 항상 갈증이 있었는데, 이렇게 귀중한 글 덕분에 처음으로 많이 알게 되었습니다. 정말 감사드립니다. 바쁘시겠지만 혹시 한국에 계신다면, 괜찮으시다면 저희 부모님과 함께 꼭 한번 뵙고 감사의 인사를 직접 드리고 싶습니다. 정말 감사드립니다. 제 이메일은 ****@gmail.com입니다.’   그러니까 63년 전 일이다. 당시 나는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영어과를 졸업하고 미국 컬럼비아 대학교 대학원 석사 과정 수속을 밟고 있었다. 5명의 교수의 추천서가 필요해 피천득 교수님, 장왕록 교수님, 정병조 교수님, 스코필드 박사님, 사범대학 학장님이시고 영문학자이던 이종수 교수님에게서 추천서를 받아 제출했다. 얼마 후 컬럼비아 대학에서 합격 통지서를 받고는 뛸 듯이 기뻤다.   당시에는 유학 가려면 신체검사가 필수 조건이었다. 대학에서는 합격 통지서를 받았지만 신체검사에서 불합격 결과가 나왔다. 너무나 놀라 아연실색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의사의 진단서에는 내가 폐결핵을 앓고 있다고 적혀있었다. 23세 곱디고운 젊은 나이에 청천벽력과 같은 사형선고를 받은 기분이었다. 그 당시 동생 김영교 시인은 먼저 미국에 유학와서 컬럼비아 대학 대학원에 다니고 있었고 대한민국학술원 원장이셨던 오라버니도 뉴욕대학교 대학원에서 경영학을 전공하고 계셨다.   나는 모든 꿈이 무너진 현실에 좌절과 슬픔 속에서도  큰 오라버니 소개로 인천 송도 적십자 결핵 요양소에 입원하게 됐다. 입원하기 전 제일 먼저 이 사실을 알렸던 스코필드 박사님은 기도와 함께 성경책과 기독교 책을 몇 권 주시면서 위로해 주셨다. 힘겨운 투병 생활을 하면서도 하나님께서 치료해 주시라고 믿고 늘 기도했다.   전심전력으로 투병 생활을 한 결과 완치가 되어 퇴원하게 됐다. 나는 다시 미국유학을 도전하고 싶었지만 주치의가 재발 위험이 있으니 유학은 포기하는 것이 좋겠다고 조언을 했다. 고등학교 2급 영어 정교사 자격증을 갖고 있었지만, 교편생활도 분필가루가 폐에 절대적으로 해롭기 때문에 적극적으로 주치의가 반대했다.   결핵을 앓았던 터라 결핵에 관심이 많았던 나는 보건사회부에서 WHO(세계보건기구) 결핵 고문관이었던 유진 로우 박사(Dr. Eugine Low)의 비서로 일하게 되었다.     보건사회부 장관 명의로, 영문으로 나가는 모든 영문 서류는 내가 작성해 다시 장관의 결재를 받아 외국으로 발송했다. 그리고 로우 박사의 영문편지도 타이핑해서 세계보건기구로 발송하는 업무를 담당했다.   그 당시 방역과장으로 계셨던 최돈원 박사는 나에게 잊을 수 없는 은인이었다. 이분이 바로 나의 수필에 댓글을 달아 준 이정민씨의 외할아버지다.     재미 수필가협회 웹사이트에 실린 나의 수필은 ‘아름다운 야망’이었다. 그 수필 속에 실린 최 박사에 관한 내용을 다시 되새겨 본다.   ‘…보사부 방역과장이던 최 박사는 큰 오라버니 친구로 서울대 의대를 졸업하고 보사부에 의무관으로 근무하고 있었다. 그는 내 영어 실력이 대단하다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고 나를 동생처럼 사랑해 주었다. 나는 오라버니처럼 그를 따르고 존경했다. 그는 늘 슈바이처 박사가 위대한 인물이라며 그를 존경하고 그의 삶에 감동한다고 말했다. 친구 의사들은 졸업 후 대개 개업을 하거나 학교에 남았지만 최 박사는 박봉의 월급쟁이 공무원의 길을 택했다. 그는 외모가 케네디 전 대통령을 많이 닮아 나는 ’닥터 케네디‘란 별명을 지어 주었다.   그러던 어느 날 콜레라가 창궐했고, 그 기세는 꺾이지 않고 확산했다. 최 박사는 콜레라 발생지역인 마산에 내려가 최일선에서 방역 대책을 진두지휘하면서 뜬눈으로 밤을 며칠 계속 지새우다 과로로 그만 쓰러졌다. 쓰러지면서 각혈하다가 핏덩어리가 기도를 막아 숨이 막혀 그만 질식사하고 말았다. 평소 아주 건강하게 보였던 그가 아무도 모르게 지병(폐결핵)을 앓고 있었다는 사실을 그분이 돌아가신 뒤에야 모두가 알게 되었다.     자기의 건강을 돌보지 않고 열심히 일했던 그의 소식에 주위 사람들은 더욱 감동해 눈시울을 적셨다. 젊디젊은 삼 십대 초반의 나이에 요절해 슬픔은 더 컸다.   짧은 인생이지만 멋있고 고귀한 삶을 살다가 간 최 박사는 나에게 귀중한 꿈을 심어주고 간 분이었다.     최 박사의 별세를 계기로 나는 인생을 바라보는 눈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삶을 비관하고 꿈을 잃었던 내가 옛 허물을 벗으면서 서서히 탈바꿈하고 있었다. 병을 비관만 하고 자학만 해왔던 나와 달리 최 박사는 자기 몸을 돌보지 않고 국민의 건강을 위해 일하다가 순직했다.     우리 두 사람은 차원이 다른 세계에서 각각 정반대의 명암의 길을 걷고 있었다는 사실을 발견했을 때 나 자신이 한없이 부끄럽게 생각되었다.   슬픔 속에 머무르던 나는 마치 개구리가 깊은 겨울잠에서 깨어난 것처럼 기지개를 켜며 인생의 새봄을 맞이할 수 있었다. 최 박사가 돌아가신 후 나는 내가 입원했던 송도에 있는 적십자 결핵 요양소를 다시 찾아갔다. 봄철이라 만발한 철쭉꽃이 나를 반기는 듯 함박웃음으로 활짝 피어서 하늘을 향해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저녁노을이 빨갛게 하늘과 바다를 물들이면서 최 박사의 못다 핀 청춘의 꿈이 그곳에서 활짝 핀 꽃으로 눈부시게 피어 오르는 듯 했다.’   63년 전에 만났던 최 박사의 후손 이정민씨가 외할아버지의 발자취를 인터넷을 통하여 찾다가 내 수필을 읽고 할아버지에 대한 많은 정보를 입수했다며 나에게 댓글을 달아준 사실은 도저히 믿기지 않는 기적이었다.     이정민씨의 온 가족은 나를 꼭 만나고 싶다며 고맙다는 말을 연거푸 했다. 내년에 한국에 나가 만나기로 약속했다. 그들과 만나면 최 박사 생각에 감회가 북받쳐 엉엉 울 것 같다. 김수영 / 수필가문예마당 인연 필연 오라버니도 뉴욕대학교 스코필드 박사님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2025.05.22. 19:06

[문예마당] 나의 것들

다시 오리라 믿는 어리석음   나의 것과 함께   가버린 오늘은 아름다웠다       고요가 잠든 밤     새날의 사선을 넘는 둥지가 보인다       그때   그건 다   내 것이 아닌 사실을 모른 꽃밭이야기들이었다       하늘의 별들   환희의 눈물   다   지나가는 바람 속에   잠시 세상이란 무대를 만났다       영원이란   나의 것과 너의 것도 아닌   어디에도 다시는 없다 오광운 / 시인문예마당

2025.05.15. 18: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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