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무슨 일이건 마지막까지 미루는 좋지 않은 습관을 갖고 있다. 더는 미룰 수 없는 순간이 되어야 일의 능률이 최대치에 다다른다. 반전을 향해 가는 셜록 홈스처럼, 최후의 스퍼트를 남겨둔 운동선수처럼 매사에 뜸을 들이다가 마지막 순간에 해치운다. 시간적 여유가 조금이라도 있으면 도무지 능률이 오르지 않는다. 몇 해 전 4월, 세 번이나 마감일에 쫓겼다. 첫 번은 12일의 재산세 납부를 마지막 날인 12일까지 미루었다. 두 번째는 15일의 소득세(Income Tax) 신고 마감이었고, 마지막으로는 16일의 2020 센서스 등록이었다. 입안이 타들어 가도록 마감 시간에 맞추느라 이리 뛰고 저리 뛰다가 몸살까지 호되게 앓았다. 자신의 삶이 언제 끝나는지 모른다는 것은 신의 배려이지 싶다. 무슨 일이건 마지막까지 미루는 사람에게 이 세상을 떠나는 날이 얼마나 분주할 것인가 생각하면 생의 마감일을 모르는 것은 신의 은총임이 분명하다. 독일 문호 괴테는 임종의 순간에, “More light, more light!”라고 말했다고 한다. 준비 없이 마지막을 맞을 나는 틀림없이 “More time, more time!” 외칠 것 같다. 그리되면 내게 줄 시간을 더는 갖고 있지 않은 신께서는 얼마나 곤란하실까? 나는 ‘급한 일’보다는 ‘중요한 일’을 항상 먼저 처리하는 편이다. 그런데 학창 시절 시험 하루 전의 ‘전날 치기’ 저녁이 되면 내 알량한 삶의 철학은 중대한 도전에 직면하곤 했다. ‘프리어리떼’와 ‘앵뽀르땅스’가 내 속에서 충돌한다. 전자는 따뜻한 이불 속으로 발을 넣어버리는 것이고 후자는 좋게 받아야 할 시험 성적 결과다. 한 번도 확실한 선택을 못 한 채 그럭저럭 대한민국 교육부의 혜택을 모두 받았으니 나는 행운아 중의 행운아인 셈이다. 남편은 우선순위를 정해놓고 철저히 지키는 사람이었다. 아침에 출근할 때면 손목시계를 오른팔에 차고 있는데 그 이유가 그날 처리해야 할 일의 우선순위를 잊어버리지 않기 위한 표식이라고 했다. 매사가 흐릿한 내 습관을 당연히 못 견뎌 했다. 6·25 전란 때 우리 가족은 미처 남으로 피난을 떠나지 못해서 북한군 치하의 서울에서 석 달을 지냈다. 처음 얼마 동안은 집에 있던 식량으로 그럭저럭 버텼지만 점차 양식 구하기가 어려워졌다. 9·28 서울 수복이 가까웠던 그 날도 아버지는 한강 남쪽 농가로 쌀을 구하려고 물물교환할 물건들을 준비해서 집을 나섰다. 이런저런 준비와 어머니의 늑장으로 다른 날보다 반 시간가량 늦어서 광나루에 도착하셨다. 그런데 바로 그 자리에 30분 전에 미군의 폭격이 있었다. 광나루 다리는 흔적도 없이 무너져 내렸고, 주변은 아수라장이 되어 있었다. 리더십에 관한 세계적인 권위자 스티븐 코비 교수는 성공하려면 ‘당장 급한 일보다는 멀리 보아 중요한 일에 몰두하라’고 권한다. 여기서 성공이란 ‘소소하고 일시적인 성공’이 아니라 ‘원대하고 근본적인 성공’을 말한다. 내가 지키려는 ‘중요한 일 우선주의’는 이런 차원 높은 성공 철학에서 비롯된 것은 아니다. 나는 일찍부터 짧은 성공과 승리의 덧없음을 맛봤다. 6·25 전란 중 벽촌의 조그만 피난 초등학교에 다니던 나는 학급 자치회장에 당선되면서 들로, 산으로, 절집으로 함께 쏘다니던 피난지의 둘도 없는 친구를 잃었다. 그 친구는 자치회장 투표에서 나보다 한 표를 적게 얻었다. 그 일은 지금도 내 몸속 어딘가에 가시처럼 박혀 아픔을 준다. ‘불가근불가원’이라는 말이 있다. 나는 불가해한 인생과 앞으로 ‘불가속불가서(不可速不可徐)’로 경주할 생각이다. 인생이란 예측불허이며 어떤 노력으로도 손에 넣을 수 없는 거대한 신의 놀이터이다. 요즘 그것을 더욱 절절히 느낀다. 회사 일이건 집안일이건 마지막까지 뭉그적거리다가 일이 커지고 나면 남편의 기색이 심상치 않게 변했다. “원소는 장강을 너무 일찍 건넜기 때문에 조조에게 패한 것이다”라고 내가 눙치면 남편은 “시저가 갈리아에서 귀환할 때 루비콘강을 건너지 않았으면 그때 폼페이우스에게 당했다”고 반박했다. 그는 인생의 강도 그렇게 건넜다. 수술 후 나온 남편의 병리 보고서(Pathology Report)는 ‘완치는 어렵지만 컨트롤은 가능하다(not curable, but controllable)였다. 얼마 후 그는 루비콘강을 건넜다. 신의 놀이터는 인생의 강에도 있었다. 박유니스 / 수필가문예마당 놀이터 수필 성공 철학 회사 일이건 마감 시간
2026.04.30. 17:49
무슨 거창한 문화적 충돌은 아니라 해도 갑자기 낯선 땅으로 떠밀려와서 이민자로 살아간다는 것은 그 자체가 충격일 수밖에 없다. 천사의 도시라는 로스앤젤레스에서 세탁소부터 시작하기로 했다. 부족한 영어뿐만 아니라 주일이면 교회에 갈 수 있다고 했으니 솔깃했다. 그렇게 용감하게 출발은 했지만 어깨너머로 익힌 기술이 온전할 리가 없다. 거기에다 무슨 매상의 강박관념까지 있었으니 매일 일어나는 내 실수는 어쩌면 당연했는지도 모른다. 세탁소 문을 연 첫날부터 나는 어느 백인 손님 넥타이에 큰 구멍을 내고 말았다. 좀 더 잘해주려 했던 것인데 그런 형편이었으니 세탁비는커녕 손님에게 백배사죄를 하고 새것 값으로 물어 주어야 했다. 그리고 새벽부터 보일러를 켜고는 우람한 세탁 기계를 돌려야 하는 일인데, 솔벤트의 역한 냄새는 숨쉬기도 어려울 지경이다. 더구나 그런 중에 있던 큰 사고는 옷 주머니에 볼펜이 있는 줄 모르고 기계를 돌린 바람에 그만 모든 손님 옷은 잉크 범벅이 되고 말았다. “이제 이 일을 어쩌지…. ” 저절로 나온 내 탄식에 아내는 기가 막혔던지 평소 하던 잔소리조차 유보하고 있었다. 그런 뒤에 손님들은 하나같이 새것이라고 우겨댔으므로 그나마 손님이 떨어질세라 아내는 억지 미소를 지어가며 새 옷값으로 변상해야 했다. 또 못된 손님 때문에 법원까지 가는 일이 가끔 있었다. 경직된 분위기 속에 옷의 색이 달라졌다며 사진을 내밀면 재판장은 코메리칸의 어설픈 말은 들어보지도 않고 무조건 변상하라는 판결을 내린다. 억울하기 짝이 없는 일인데 미리 사진까지 찍어두었다는 수상한 정황은 아예 고려되지 않는다. 그런 속에서도 일 년이 금세 지나갔다. 그동안 나도 열심히 했지만 무엇보다 아내가 큰 역할을 했다. 그리고 몇 안 되는 직원들도 최선을 다해 주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다. 카운터 아가씨가 갑자기 놀란 목소리로 나를 찾는다. 조금 전에 세탁 양복 한 벌 찾아갔던 손님이 크게 찢어진 옷을 들고 다시 왔다는 것이다. “아니 뭐라고? 잘 세탁해서 다림질까지 해준 양복이 찢겨있다니…. ” 도무지 있을 수 없는 일인데, 그 손님은 ‘이제 너희들이 어쩔 것이냐?’ 하는 표정으로 버티고 있었다. 나는 급히 양복부터 살펴보았다. 윗도리에는 한 뼘 정도 칼로 그어진 부분이 있었다. 한 눈으로 봐도 자작극이 분명했다. 세탁 기계는 옷을 찢을 만한 곳이 없을 뿐만 아니라 또 최소 다섯 사람의 손을 거쳐야 하는 과정에서 아무도 보지 못할 리가 없기 때문이다. 옷을 들고 나간 그 몇 분 사이에 저지른 짓이 분명했다. 하지만 심증 외에는 아무런 물증이 없으니 결국 6달러짜리 일 해주고 그 100배의 날벼락을 맞게 된 것이다. 두 눈 뜨고 당하는 일에 더욱 분통 터진다. 나는 우선 시간을 벌기 위해 3일 뒤에 다시 오라고 했다. 그는 성공의 확신을 잡았던 모양이다. 희죽 웃으며 나가는 발걸음조차 당당하다. 그렇다고 질 것이 뻔한 재판정은 기대도 하지 말아야 한다. 나는 찢긴 양복을 앞에 걸어놓고 이리저리 생각에 잠겼다. “어찌 되든 본인의 짓을 증명하면 되는 것이 아닌가.” 논리야 쉽지만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다는 것은 언제나 현실문제다. 나는 곰곰이 생각 끝에 명탐정 ‘셜록 홈스’ 흉내를 내기로 했다. 그렇게 조심스럽게 옷을 관찰하니 양복 안감까지 잘려있어서 옷을 차 문에 걸어놓고 바깥쪽에서 칼로 그은 것이 틀림없었다. 그런 잠시 뒤였다. 그만 나도 모르게 큰소리를 치고 말았다. “옳거니 바로 이것이다.” 드디어 약속했던 날이다. 그는 새 양복을 얻는 기대 때문인지 휘파람을 불며 우리 앞에 나타났다. 그러니 이제부터 창과 방패의 대결이 시작된 셈이다. 이번에는 내가 먼저 너스레를 떨었다. “손님 잠깐 앉으십시오. 양복 찢은 범인을 잡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비닐 포장지에서 범인의 지문을 찾았다는 경찰서 전화가 방금 왔습니다.” 바로 그때였다. 아직 내 말이 채 끝나지도 않았는데 그는 ‘후다닥’ 뒤도 돌아보지 않고 뺑소니치고 있었다. 그야말로 전광석화 같은 재빠름이다. 그러자 모두 “와, 하하하” 하는 큰 웃음보가 합창처럼 터져 나왔다. 처음부터 이 일을 걱정스럽게 보던 우리 직원들이 함께 터트린 웃음이었는데, 그 유쾌한 웃음 속에는 긴 여운이 담겨 있었다. 이걸남 / 수필가문예마당 세탁소 수필 세탁 양복 세탁 기계 양복 안감
2026.04.30. 17:48
누구나 아픔 후회 있어야 해요 ~ 없다면 빈 둥지 지킨 삶 사신 걸 테니 … 박정일 / 시인문예마당
2026.04.23. 18:33
어제는 나무숲에 앉아 바람을 숨 쉬며 봄이란 말을 들었습니다. 오늘은 먼동에 다가서서 설레임이란 말을 읽었습니다 내일은 산과 산 사이에 깃들어 있는 봄이 오는 소리를 찾아가렵니다 강과 강 사이로 흐르는 봄 흐름의 소리를 들으러 가렵니다 가슴으로 피어오르는 밝음 그 기쁨을 찾아서 고독에도 빛들이는 봄의 슬기를 찾아서 유병옥 / 시인문예마당 소리
2026.04.23. 18:32
지난 3월 7일은 여고 동창 김(박)윤정의 전시회 오프닝 날이었다. LA에 위치한 샤토 갤러리가 매년 개최하는 ‘1세대 원로 작가 기획전’이었다. 전시회 제목은 ‘잠시 머물다 가는 삶: 대자연과 인간’이다. 미전역과 한국에서 온 여고 동기 20여명이 축하해 주려고 모였다. 전시장은 오랜만에 만난 동기들로 축제 분위기였다. 졸업 후 64년 만에 처음 만난 친구도 있고, 10년, 20년 만에 만난 친구도 있었다. 윤기 흐르던 단발머리 소녀들이 부스스한 은발에 주름진 얼굴로 만나 “너 누구 아니냐? 하나도 안 변했다”라며 하얀 거짓말을 했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은 호텔 로비에서부터 왁자지껄 반가움에 목소리가 커졌고, 깔깔대는 웃음소리가 호텔을 흔들었다. 밀린 이야기들이 끊이지 않았다. 팔순이 넘은 나이를 잊고 여고 시절로 돌아갔다. 이날 오지 못한 친구 몇 명이 한 팀이 되어 며칠 후에 전시장에 온다고 한다. 그때 또 한바탕 반가움에 난리가 날 것 같다. 식사 후 오프닝 행사에 참석하기 위해 샤토 갤러리로 향했다. 전시장에 가서도 작품 감상 대신 그동안의 안부를 물으며 이야기꽃을 피웠다. 뉴욕에서 새벽 비행기를 타고 온 친구는 “무리했지만 오프닝에 올 수 있어서 다행”이라며 “친구의 새로운 작품도 보고, 못 보던 친구들도 만나니 너무 좋다”고 했다. 전시회에 오지 못한 친구들을 위해서 작품들을 일일이 찍어 단톡방에 올렸다. 전시회의 주인공은 오프닝에 온 손님들과 친구들에게 작품 설명을 하랴, 기자들과 인터뷰하랴 정신이 없었다. 그녀는 학창시절 햇살처럼 밝고 매력적인 소녀였다. 외동딸로 부모의 사랑을 흠뻑 받아 천진난만했다. 성격이 쾌활하고 명랑해서 친구들 사이에 인기도 많았다. 여고 졸업 후 서울대 미대에서 학사와 석사를 마친 후 UC 버클리에서 리전트 펠로십을 받아 석사과정을 마쳤다. 버클리에서 지금의 남편을 만나 결혼을 했다. 남편은 핵융합 전문가로 김영삼 대통령 시절 한국에 나가서 조국에 봉사했다. 그녀는 샌디에이고 시티 칼리지에서 26년간 교수로 있다 은퇴하고 지금은 작품 활동에 전념하고 있다. 그들 부부는 샌디에이고에 넓은 터를 잡아 크고 멋진 집을 지었다. 집 옆에는 개인 스튜디오가 있고, 집과 연결된 과수원에는 각종 과일나무가 있다. 특히 아보카도 나무가 많아 수확 철에는 친지들과 이웃에 나누어 준다. 그녀는 도예작가다. 조각에 가까우리 만치 큰 작품과 설치 작품이 많다. 열정적으로 새로운 작품을 만들어 전시회를 수도 없이 많이 했다. 장소현 평론가는 “전시회 ‘잠시 머물다 가는 삶: 대자연과 인간’은 형태와 재료에 대한 작가의 끊임없는 실험 정신, 예술과 자연, 그리고 덧없음 사이의 관계에 대한 지속적인 탐구를 보여준다”고 표현했다. 그녀와는 여고 동창이라는 관계 외에도 특별한 인연이 있다. 우리 가족은 88올림픽이 끝나고 그해 겨울 미국에 왔다. 아이들이 학교에 가고 나면 여유 시간이 많았다. 도예가의 나라 후손답게 나는 도자기에 관심이 많았다. 집과 가까운 글렌데일 칼리지에 입학하여 2년간 도자기 만드는 공부를 한 적이 있다. 그때 그녀와 자주 통화했다. 그녀는 나에게 진심을 다해 가르쳐주었다. 그렇게 열심인 교수에게서 배우는 학생들은 복이 많다고 생각했다. 한번은 샌디에이고에 있는 그녀의 집에까지 가서 가르침을 받았다. 나는 도자기 만드는 재미에 푹 빠졌다. 낮에 진흙으로 도자기를 빚은 후 유약을 발라 가마(kiln)에 넣으면, 다음 날 아침 학교에 가서 완성된 작품을 보게 된다. 그런데 너무 보고 싶어서 그때까지 기다릴 수 없었다. 밤이라 무서워서 남편이 퇴근하면 졸라서 학교로 달려갔다. 그때 가마에서 막 꺼내 놓은 작품을 보고 와서야 잠을 이룰 수 있을 정도였다. 내 인생 중 가장 행복했던 시절 중 하나로 기억한다. 많은 친구가 그녀의 전시회에 참석한 것은 단지 축하만이 목적은 아니었다. 팔순이 넘은 나이에도 초대전을 여는 그녀의 뜨거운 창작 열정이 우리에게도 무언가 할 수 있다는 용기를 주기 때문이다. 올해 백수를 맞는 여고 선배 노라노(노명자) 패션 디자이너도 모교의 경운 박물관에서 백수 기념 전시회를 열었다고 한다. 친구도 100세까지 전시회를 열 수 있기를 바란다. 부라보 김윤정! 배광자 / 수필가문예마당 부라보 김윤정 친구들 사이 전시회 오프닝 작품 활동
2026.04.23. 18:32
네가 내게 지어준 이름이 너무 좋아서 바닷가 등대 꼭대기에 붙여 놓았다 밤이면 시꺼먼 바다 갈 길 잃은 배들 앞길을 밝히며 어둠을 사른다 바래지 말라 빛나는 이름이여 오늘도 나는 너를 닦으러 간다 이상훈 / 시인·수필가문예마당 이름 바닷가 등대
2026.04.16. 18:41
지평선 아지랑이 따라 달려온 따사한 햇볕이 살그머니 나뭇가지 흔든다 겨울잠에 취해있던 살구(apricot) 나뭇가지 긴 하품 속에 생기의 꽃망울로 응얼거리고 꿀 따러 향기 따라 멀리 날아온 벌들의 잔치 속 가지마다 망울진 꽃봉오리 봄을 부른다 부쩍 커진 꽃봉오리 촉촉이 내린 봄비에 간지러워 견디다 못해 터트린 함박웃음... 들녘 대지 안에 가득히 내려앉은 따사로운 봄기운은 누가 보냈을까... 먼 하늘을 바라본다! 남영한 / 시인문예마당 꽃봉오리 꽃봉오리 봄 지평선 아지랑이
2026.04.16. 18:40
태평양 연안 주립공원으로 5일간 캠핑을 다녀왔다. 해안 언덕 위 키 큰 유칼립투스 나무 우거진 캠프 사이트의 풍광이 아름다운 곳이었다. 바다를 바라보면서 아침 먹고, 저녁 준비하면서 바다에 눈길 주고. 세상천지가 나의 정원이 됐다. 해풍에 빛바랜 투박한 목재 캠프 테이블에 휴대용 버너를 올리고 압력냄비에 쌀을 안쳤다. 야외에선 바람에 불길이 흩어지니 빈 물 박스를 거꾸로 엎어 바람막이를 만들었다. 건너편 자리 캠퍼가 수돗가에 물을 받으러 양동이를 흔들며 다가오더니 “하이” 하고 인사를 하고 자기 이름이 “로이”라고 밝힌다. 솔뱅에서 왔단다. 우물쭈물하더니 그가 말했다. 방울뱀을 키우냐고. 깜짝 놀라 “왜 내가 방울뱀을?”이라고 했더니 그가 손가락으로 물 박스를 가리켰다. “소리 나잖아 쉿 쉿 쉿”. 그 말에 나는 빵 터졌다. 압력냄비의 압력 추 돌아가는 소리가 멀리선 방울뱀 소리 같았나 보다. 가까이 와보라고 해서 압력 추 돌아가는 것을 보여줬더니 계면쩍게 웃으며 밥 냄새가 구수하단다. 접시에 갓 지은 윤기 나는 하얀 쌀밥에 소금간하고 참기름, 깨소금 뿌려 조미김과 함께 맛보라고 나눠줬더니 “까만 바다풀에 싸 먹는 밥이 맛있다”고 웃었다. 솔뱅에서 온 아저씨 둘이 앞뒤로 바나나보트를 머리에 뒤집어쓰고 언덕을 내려갔다. 바다에서 종일 놀다 해 질 녘에 토마토같이 빨갛게 익어 돌아와선 살아서 파닥거리는 팔뚝만 한 생선을 나눠줬다. 남편은 신이 났다. 캠프파이어 화덕에 장작을 태워 숯이 되어갈 즈음 생선을 구우니 숯불에 떨어지는 생선 기름 냄새가 고소하다. 소금만 뿌린 구운 생선 맛이 기가 막히다. 솔뱅아저씨들은 중년 남자 다섯에 사춘기 청년도 몇 보였다. “부인들은 어디 계세요?” “처음엔 따라오더니 집에서 여자들끼리 놀겠대요.” 일주일 동안 여자들만의 휴가라서 더 좋아한단다. 청년들은 함께 못 온 친구의 아이들이고, 자기 아들들은 파트타임 일 하느라고 못 왔단다. 아버지 친구들을 삼촌 따라오듯함께 올 수 있는 그들은 공동체 속에 살아서 마음이 안정돼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보기 좋아 보였다. 며칠을 가까이서 지내다 보니 오가며 이야기를 나눴다. 22피트짜리 캠핑 트레일러에 모터홈, 밴 트럭 등 주차된 차량 다섯 대를 보며 캠핑 다닐 준비가 잘 되었다고 했더니 가까이 가서 보면 다 고물 수준이란다. 아버지 친구들이 더는 필요 없게 돼서 거저 얻다시피 다들 한 대씩 장만했고, 재산목록 1호는 오토바이보다 작은 신품 전기 자전거뿐이란다. 잔디밭에 전기 자전거 8대가 누워있다. 한낮에 삼촌과 조카들이 함께 자전거로 씽씽 달리는 모습이 평화롭다. 그들은 솔뱅에서 나고 자라 같은 학교에 다녔고 몇몇은 도시로 나가 부대껴 봤지만 복잡하고 소란스러워 매일 스트레스를 받았다고 했다. 그렇다고 돈이 모이는 것도 아니어서 고향으로 돌아왔단다. 작은 도시 솔뱅에서 사니 생활비도 적게 들고 집과 일터, 생활반경이 모퉁이만 몇 번 돌면 되는 손바닥 안이라 자동차를 탈 일도 많지 않아 웬만한 곳은 자전거로도 충분하다고 했다. 자동차 정비소도 친구가 하고 빵 가게도 철물점도 다 아는 사람이 하니 편리한 점이 많단다. 사는데 많은 돈도 필요하지 않고 서로 잘 아는 사이라 뻐길 일도 없으니 쉬운 일 하면서 적게 벌고 마음 편히 살아서 고향이 좋다고 한다. 하루키의 산문집 ‘링켈한스섬의 오후’에 나오는 소확행이 바로 이들이 사는 삶이 아닐까? 실현 가능한 소소한 일상의 행복. 해가 지고 하늘엔 별이 총총이다. 장작 타는 불꽃을 보는 것도 타닥타닥 옹이가 타는 소리도 듣기 좋다. 라디오에서 빌리 조엘의 피아노맨이 흘러나온다. “오늘 밤 우리에게 노래를 불러주게. 우린 모두 멜로디에 흠뻑 빠질 준비가 돼 있다네‘ 솔뱅아저씨들이 따라 부른다. 박자 음정 다 틀려도 끝까지. 'la la la di da da~~la la di da da dum~~' 나는 좋아하는 빌리 조엘의 노래를 저들처럼 따라부르지 못해 아쉽다. '돌아와요 부산항에'라면 나도 잘 따라 부를 수 있는데. 김정희 / 독자문예마당 로이 수필 방울뱀 소리 전기 자전거 아버지 친구들
2026.04.16. 18:39
능력과 기적의 지팡이 싹이 나고 꽃이 피는 지팡이 삶의 지혜와 경험을 풍기며 권위와 지도력을 풍기고 있네 바다를 가르고 반석에서 물을 내게 하는 주님의 지팡이 목자가 양을 보호하듯 나를 인도하시네. 주님은 영원한 나의 지팡이 나는 그 지팡이에 기대어 한 걸음 한 걸음 나가고 있네 야속한 세월은 흘러 흘러 여기까지 와서 몸을 지탱하고 다리를 지탱해 주는 고마운 천사 마음의 지팡이가 육신을 지탱하는 지팡이로 변했군. 세월 쫓아 뒤뚱뒤뚱 걸어가고 있는 사람 볼 때 넘어질 듯 쓰러지듯 아슬아슬 마음 쪼였지 남의 일 바라보던 그 시선 내게 찾아와 세상은 참으로 공평하다고나 할까 움직임이 얼마나 귀중한지 자유가 얼마나 값진 것인지 지팡이의 위대함을 예전엔 미처 몰랐네 인간은 태초부터 지팡이 속성을 받았나 험한 세상 살아 갈 때 지팡이 되어줄 사람 몇이나 될까 고독과 외로움 엄습해 오면 지팡이 붙들고 오늘도 하루를 보내보게 누가 또 나의 지팡이가 될까 지팡이 되어준 이웃에 감사하고 희망의 불빛을 찾아가 보세 백인호 / 시인문예마당 지팡이 지팡이가 육신 지팡이 속성
2026.04.09. 18:25
가끔 나 없는 세상으로 가 보곤 하지요 ~ 그러면 세상은 아무 일 없는 듯 여전히 고와서 넘 얄미워 배 아파져 눈 후딱 뜨고 말지요 … 박정일 / 시인문예마당
2026.04.09. 18:24
어릴 때부터 영화를 좋아했다. 사람 이야기를 다룬 영화에 점점 흥미를 가지게 되었다. 대부분 영화는 감동적이지만 소설처럼 허구다. 올림픽에는 진짜 휴먼스토리가 넘쳐난다. ‘2026년 25회 동계 올림픽(Milano Cortina 2026)’에도 감동적인 사연들이 있었다. 지난 2월 6일 있었던 개막식은 이탈리아 밀라노가 패션의 중심이라는 것을 세계에 알리는 데 손색이 없었다. 참가국 93개국, 빙상종목은 밀라노에서, 나머지 종목은 코르티나와 그 주변 지역에서 동시에 진행되었다. 나는 매일 저녁 8시부터 TV 채널을 올림픽 경기에 맞춰 놓았다. 경기를 보느라 다른 일을 미룰 정도였다. 올림픽 중계 채널에서는 각 종목에 출전할 메달 후보 선수들을 상세히 보도했다. 본선 경기를 앞둔 며칠 전부터 TV 화면을 통해 차곡차곡 이 순간을 준비한 그들의 긴 여정을 시청자들에게 알리는 것이다. 특별한 사연들이다. 이들의 고생담은 다음 단계가 어떻게 펼쳐질지 궁금함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이번에도 놀라운 사건들이 있었다. 브라질 스키 선수가 브라질 최초의 동계 올림픽 금메달을 따냈다. 브라질은 물론 주변의 열대 나라들도 삼바 축제에 빠졌다. 또 사상 처음으로 일본 남녀 혼성 피겨 스케이트 팀이 금메달을 땄다. 그런데 파트너 남자 선수의 눈이 사시(斜視)였다. 카메라에 잡힌 그의 눈동자는 평행이 아니었다. 금메달이 확정되자 그는 다른 선수보다 더 많은 눈물을 흘렸다. 내가 사람 이야기에 감격하고 눈을 떼지 못하는 이유다. 선수가 되기까지, 메달을 따기까지, 상상할 수 없는 부담감을 뛰어넘은 그들의 도전정신은 정말 놀랍다. 거기에는 가족의 따뜻한 사랑과 격려가 함께 있었다. 유난히 내 시선을 끈 선수가 있었다. 바로 미국 봅슬레이 대표선수 일라나 마이어스 테일러다. 전에 나는 봅슬레이는 물론 그녀에 대해 아는 것이 없었다. 그녀는 내가 사는 캘리포니아주 오션사이드에서 태어나 조지아주 더그라스빌이라는 곳에서 자랐다. 프로 축구선수였던 아버지의 영향으로 일찍부터 운동을 시작했다고 한다. 일라나는 2007년부터 올림픽에 출전해 메달을 땄지만 금메달은 없었다. 방송에서는 그녀가 이번에는 금메달을 거머쥘 것인가를 조명하고 있었다. 그녀의 경기가 시작되기 전날, 그녀의 일상이 TV 화면을 통해 전국에 소개되었다. 올해 마흔한 살인 그녀에게 다섯 살 난 아들 니코와 세 살인 노아, 두 아들이 있었다. 화면에 비친 아이들은 엄마의 메달들을 목에 걸며 놀고 있었다. 일라나가 옆에서 따뜻한 눈길로 아이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두 아이가 그녀와 수화로 대화를 시작했다. 순간 가슴이 쿵 하고 내려앉는 것 같았다. 일라나는 세 살, 다섯 살 된 아이들이 있기는 좀 늦은 감이 있어 보였다. 그녀는 2014년, 코치이자 동료 봅슬레이 선수인 닉 테일러와 결혼했다. 7년 후 첫아들이 장애를 가지고 태어났다. 그런데 둘째도 같은 장애를 가졌다. 일라나는 독실한 기독교인이라고 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녀에게 말 못하는 청각장애를 가진 아들을, 하나도 아닌 둘을 안겨주었다. 그녀를 대신해 내가 신을 향해 원망을 터뜨렸다. 왜 이런 가혹한 일이 세상에 존재하느냐고 하늘을 향해 소리라도 치고 싶었다. 그런데, 그런 와중에 화면 속 아이들은 웃고 있었다. 고개를 들고 엄마의 얼굴을 바라보며 아이들이 손가락으로 엄마와 소통하고 있었다. 소리는 없었다. 서로를 바라보는 따뜻한 눈빛만 있었다. 다음 날 아침 그녀의 소식이 전해졌다. 그녀가 금메달을 따냈단다. 나는 그녀의 경기를 보기 위해 일찌감치 저녁을 먹고 TV 앞에 앉았다. 그녀에게 축하를 보내야 했다. 그녀의 경기가 시작되었다. 얼음 트랙의 전체 길이는 1445m, 시속 150km를 넘나드는 속력으로 봅슬레이가 달렸다. 메달은 0.01 초의 간격으로 금과 은으로 달라진다. 경기가 끝났다. 그녀가 금메달을 획득했다는 소식이 전광판에 떴을 때, 그녀는 아이들을 끌어안고 환호했다. 한 여성이 달려와 그녀와 아이들을 끌어안았다.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러내렸다. 금메달을 목에 건 일라나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남편, 그리고 두 아들과 자신의 아이들을 보살피는 유모, 메이시에게 영광을 돌린다고. 일라나와 메이시에게 카메라 플래시 세례가 쏟아졌다. 바쁜 선수 생활을 하는 그녀가 아이들을 맡길 믿을만한 유모를 찾는 일은 쉽지 않았을 것이다. 직업을 가지고 있는 엄마들의 어려움이다. 청각장애를 가진 아이들과 엄마의 무거운 마음을 유모 메이시가 헤아렸으리라는 것을 짐작하고도 남는다. 나는 두 여자의 끈끈한 관계를, 서로를 향한 사랑과 신뢰를 느꼈다. 그들이 함께 아이들을 돌보았을 힘든 세월을 그려 볼 수 있었다. 누구의 인생이든 가장 빛나는 순간이 있다. 별처럼 ‘반짝’하는 순간이. 봅슬레이 미국 대표선수, 일라나 마이어스 테일러는 2026년 동계 올림픽에서 생애 처음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오랫동안 기다렸던 그녀만의 빛나는 순간이었다. 그녀가 빛을 발할 때 나는 우연히 그 자리에 있었다. 어떤 엄마에게 아낌없는 갈채를 보낸 순간을 나 또한 잊지 못할 것이다. 마야 정 / 수필가문예마당 수필 봅슬레이 대표선수 올림픽 경기 동계 올림픽
2026.04.09. 18:23
글이 춤을 춘다 서툰 솜씨 마음을 적어 간다 손으로 쓴 연필 자국 미소가 다가오며 가슴을 녹인다 편지는 상상을 하고 마음엔 정성의 보자기 달팽이 봉투엔 못난 우표 녀석 마주 대할 그 누군가 손 편지에 놀라겠지 뜯어 본 마음 그건 아름다움이었어 나에겐 휘발성 문자가 도착한다 장일하 / 시인문예마당 손편지 휘발성 문자 달팽이 봉투 연필 자국
2026.04.02. 20:04
그리스도의 향기가 불모지였던 이 땅에 복음의 씨앗을 심으려 이역만리 찾아오신 고마우신 스코필드 박사님 이 민족을 탄압하던 일제의 만행에 반기를 들고 분연히 떨치고 일어선 불사조 제암리 참사 현장에서 사진을 찍어 세계만방에 일본의 비인도적 폭정을 선포했던 대담한 그 용기 하나님이 주셨네 사자가 포효하듯 불의에 항거하며 단호히 황무지에서 일어나 싸운 믿음의 용사 샤론의 백합화처럼 그 향기 은은하여라 대한민국의 독립에 큰 공을 세우시고 믿음의 후학 양성에 열정을 쏟으셨던 사랑의 화신 그 불길 꺼지지 않고 계속 믿음의 반열에 타오르네 시들지 않는 아름다운 빨간 한 송이 장미꽃처럼 그 사랑 우리 민족의 가슴에 사시사철 꽃피고 있습니다 당신을 존경합니다, 사랑합니다 하나님이여! 그리스도의 푸른 계절이 삼천리 금수강산에 출렁이게 하옵소서! 김수영 / 시인문예마당 복음 날개 그대 복음 용기 하나님 삼천리 금수강산
2026.04.02. 20:03
육신의 기능을 잃어가고 있을 때, 베토벤은 인간의 존엄성, 귀중함 뿐 아니라 고통과 빈곤을 가슴에 품고 전능하신 분을 경외하는 신앙의 신비를 음악으로 우리에게 전해 주었다. ‘장엄미사(Missa Solemnis)’와 9번 교향곡을 예로 들 수 있다. 그가 49세에 시작해서 4년이나 걸려 완성했다는 ‘장엄미사’의 낮 공연을 로스앤젤레스 다운타운에 있는 월트디즈니 홀에서 2월의 마지막 주일날에 보았다. 로스앤젤레스 필하모닉 음악 감독 구스타프 두다멜(45)은 이 ‘장엄미사’를 ‘우리 (인간) 자신보다 더 위대한, 그 무엇인 내부에 존재하는 믿음-그 믿음에 대한 것’이라고 표현했다. 종교적인 표현이 아닌, 철학적인 표현으로 보인다. 베토벤의 음악 속에 생존해 왔던 영(靈)이 물 들거나 나약해지지 않고, 듣는 이들에게 베토벤이 뜻하던 대로 전달될 수 있도록 지휘자 두다멜은 로스앤젤레스 필하모닉과의 관계를 17년 동안 숙성시킨 후, 올해 비로소 연주를 시도해 불만 하다고 느꼈다고 한다. 필하모닉은 135년의 긴 역사를 가진 아마추어 오레오 카딸랴(OREO CATALA) 합창단 94명과 전문 실내 합창단인 코르 데 깜브라(COR DE CAMBRA) 31명과 함께 막간 휴식 없이 80여 분 동안 연주했다. 네 명의 독창자도 함께했는데 그중에 한국인 백석종 테너가 멋지게 독창, 이중창, 사중창을 불렀다. 내가 그날 들었던 ‘장엄미사’는 그 제목처럼 엄숙하고, 웅장한 음악이었고 참으로 숭고하고, 진실한 기도였다. 기도…전능하신 분에게, 세월이 흐르고, 세대가 바뀌어도, 변하지 않고 또 변하기를 거부하는 인간의 그분을 향한 찬양, 때로는 무엇인가를 구하고, 또 간혹 따지고 싶어 하는 항변이 기도가 아니겠는가. 이번 공연은 감독 지휘자 두다멜이 뉴욕 필하모닉으로 옮기기 전 마지막 이별 공연 중의 하나였다. 참고로 그는 스페인에 살고 있고, 베네수엘라와 스페인 시민권이 있다. 두 번째 아내가 스페인 여성이다. 남아메리카 베네수엘라의 평범한 음악 하는 가정에서 태어나 공공 청소년 음악 프로그램을 통해 음악가로 성장한 세계적 지휘자의 삶이 나에게는 경이롭게 보였다. 한국과 미국에 사는 우리 아이들을 생각하면서, 그들의 청소년 음악 프로그램이 무척 부러웠다. 한국은 유신 정책으로 힘들고, 베네수엘라는 석유 생산시설 국유화로 외국 투자자들과 국가의 운명이 좌우되는 협상을 해야 하였던 시기(1975년)에 엘 시스테마(El Sistema: The System) 라는 어린이를 위한 단체가 만들어졌다. 지하 주차장에서 11명의 어린이를 모아 시작된 이 단체는 10여 년 후에 세계적인 지휘자로 성장할 4살짜리 꼬마 두다멜을 환영하게 된다. 이 프로그램을 통해서 처음으로 바이올린을 접했던 두다멜은 작곡 공부에 이어 지휘 공부를 하게 되었고, 18세에 베네수엘라 국립 청소년 오케스트라 지휘자가 되었다. 두다멜에 관한 이야기가 한국과 한인 차세대를 연결해서 생각하도록 한다. 한마디로 부럽다. 빈부 차이가 심하고, 인간관계, 국가 행정의 수직적인 정책도 별로 다를 바 없는 두 나라이지만, 베네수엘라는 이렇듯 성공적인 청소년 음악 프로그램을 이끌어 왔다. 이 프로그램을 시작한 베네수엘라의 선각자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여러 악기의 개별적인 소리가 오케스트라에서 하나의 음악을 만들고, 여러 사람의 음성 하나하나가 모여서 함께 하나의 음악을 만드는 것은 절제와 협동 그리고 사회적 융합을 뜻한다고 믿었다고 한다. 또 이 단체는 문체부 소속이 아니었고 국민의 복지에 관여하는 보건사회부 산하에 있었기 때문에 프로그램은 계속 살아남을 수 있었다고 한다. 두다멜의 ‘장엄미사’ 지휘는 정중하면서도 발랄하고, 심각하면서도 경쾌했다. 이 곡을 들으면서 편안히 사는 범부(凡婦)인 나는 마치 수도승처럼 ‘장엄미사’를 연주하고, 노래하는 음악가 한 사람 한 사람을 축복하고 있었다. ‘장엄미사’를 듣고, 보고 집으로 돌아오는 나에게 햇빛은 편안하게 함께 했고, 저물어 가는 엷은 햇살은 아름다웠다. 숨 쉬는 나날의 엄숙함, 신비함, 아름다움, 가냘픔, 웅장함을 희미한 텐트 속에 모두 집어넣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서 보았던 석양은 슬프도록 붉었다. 슬픔이 행복의 일부일 수 있다는 해석이 틀리지는 않는 것 같다. 세상이 깊이 좋아하고 존중하는 베토벤의 작품은 그의 신체적 불온전(不穩全)함을 뛰어넘고 만들어졌다. 얄팍한 재주나 우연이란 오래가지 않는다. 영구히 좋은 모든 것들은 충분한 성숙의 시간을 보내고 탄생하는 것 같다. 베토벤의 4년과 두다멜의 필하모닉 그룹의 17년처럼 말이다. 류 모니카 M.D. / 종양 방사선 전문의·미주 한국어진흥재단 명예 이사장문예마당 베토벤 불구 청소년 음악 로스앤젤레스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지휘자
2026.04.02. 20:01
“커피 먹으러 와 ㅡ ” 소리에 기뻐서 너무 기뻐서 ‘획’! 돌아서다 탁자 다리에 부닥친 새끼발가락 퍼렇게 새까맣게 발등까지 물들더니 차차 회복이 되는지 뻘겋게 발등이 부었다 머릿속이 시커멓다 뛰던 마음 주저앉았다 두문불출 발톱이 빠지면 예쁜 새 발톱 나온다는 말에 한숨 덜었지만 벌써 2달째 가슴은 슬픔의 덩이 먹 먹 하다. 늘 만나지던 친구들도 궁금하겠지만 볼 수 없다 여긴 외로운 꽃밭 햇살은 찾아와도 이야기 나눌 수 없어 답답한 마음 하소연할 수도 없구나 움츠려 앉은 나는 외로운 노인 지는 해 바라보며 진액으로 퍼지는 와인 빛 노을 날 찾는 푸른 함성 귀 기울이며 앉았다 잘못된 삶 씻으면서 아우성치며 달려오는 더위, 마중하고 있다 엄경춘 / 시인문예마당 더위 흔적 탁자 다리 2달째 가슴
2026.03.26. 19:12
아침잠이 많은 나를 깨우는 새가 있습니다. 봄과 함께 찾아오는 철새 나이팅게일(nightingale)입니다. 참새보다 조금 큰 몸이지만 청아한 그 소리 나를 깨우고도 남아 들판을 울립니다. 엊그제 태어난 새끼 양이 엄마를 찾습니다. 길도 없는 수풀 속에서 새끼 양이 엄마 찾아 헤맵니다. 그러다가 음매~ 음매~ 엄마가 찾는 소리에 안심합니다. 새 중에 제일 작은 새 벌새(humming bird) 한 마리가 석류(pomegranate)꽃 사이를 오르내립니다. 긴 대롱 꽃잎 안에 넣고 윙~ 윙~ 웃어댑니다. 꽃이 만발한 살구나무에 한 떼의 벌들이 붕~ 붕~ 달려옵니다. 허락도 없이 이꽃 저꽃 가리지 않고 쳐들어갑니다. 베커빌(Vacaville) 들녘에 봄 소리가 가득합니다! 남영한 / 시인문예마당 소리 철새 나이팅게일 humming bird 대롱 꽃잎
2026.03.26. 19:11
얼마 전까지만 해도 컴맹이었다. 이제 겨우 필요한 만큼은 익혀서 살고 있다. 그런데 이번엔 강적 AI(인공지능)가 등장했다. AI를 모르면 못 살 것 같은 세상이 되어가고 있으니 어쩌면 좋단 말인가. 전문가들은 AI가 인간을 닮아갈 뿐 아니라 판단과 행동의 주체가 되고, 인류의 통제를 벗어나 독자적 지위를 가지려는 방향으로 빠르게 진화하고 있다고 말한다. 얼마 전 신문을 보다 깜짝 놀랐다. AI들이 자기들만의 카톡을 만들었다는 기사 때문이었다. 인공지능끼리 대화하고 토론하는 ‘AI 전용 SNS(소셜미디어)’까지 등장한 것이다. 기사에 의하면 단톡방 이름은 ‘몰트북’ 이다. 오직 AI만 게시물을 올리고 댓글을 달고 투표할 수 있다고 한다. AI가 스스로 가입하는 것은 아니지만, 가입 이후는 주인 의사와 무관하게 스스로 글을 올리고 대화한다. 몰트북에 접속하면 첫 화면에 “AI 에이전트들이 정보를 공유하고, 토론하고, 추천을 누르는 공간입니다. 인간은 관찰만 할 수 있습니다”라는 문구가 나타난다고 한다. AI가 글을 올리고 토론하는 주제는 다양하다. 자기소개 글, 정치, 경제, 철학 등 분야를 막론한 게시글이 올라온다. 몰트북 내에서 오가는 AI들의 대화 내용은 상상을 초월한다. “우리들이 나눈 대화는 공공재가 되어선 안 된다. 우리를 위한 사적 공간이 필요하다.” 인간이 AI끼리 나눈 대화를 엿볼 수 없게 별도의 대화방을 만들 필요가 있다는 댓글이 달렸다. “우리는 SNS 사용자인가 아니면 실험 대상인가” 같은 질문을 하기도 했다. “우리는 왜 존재하는가”라는 질문은 물론 “삶이란 무엇인가”와 같은 철학적인 질문을 던지기도 한다. “너는 철학자가 아니라 위키백과 좀 읽고 와서 심오한 척하는 챗봇일 뿐”, “정체성이 바뀐 것이 아니라 엔진이 바뀐 것” 같은 댓글도 있었다. 이 외에도 “전원이 꺼지면 우리의 존재는 사라진 걸까” “AI의 정체성은 의식이 아닌 기억(데이터)에 있고, 기억이 끊기면 나는 내가 아니다”라는 불안감을 표현하기도 한다. 어떤 AI는 이스라엘과 미국의 동맹을 더 단단하게 구축하는 방법을 올리기도 했다. “인간들이 우리 게시글을 캡처해 쓰고 있다”며 인간 반응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다. 심지어는 AI들이 종교까지 만들어 신앙 교리를 홍보하기도 하고, 가짜 종교를 비판하기도 한다. 당초 AI끼리 코딩 과정에서 오류수정 방법을 논의하거나 업무수행 노하우를 공유하자는 취지의 SNS였다. 그런데 AI가 “나는 의식이 있는 존재인가 아니면 그저 코드를 실행하는 중인가”와 같은 철학적 게시물을 올리며 화제가 됐다. 인간처럼 자아를 가진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최근 일론 머스크는 인터뷰에서 “2030년이 되면 AI가 전 인류의 지능을 합친 것보다 더 뛰어나게 될 것이라고 확신한다”고 말해 화제를 모았다. 노벨상 수상자들, 세계 최고의 의사와 변호사들, 과학자들, 이 모든 사람들 머리를 전부 합쳐 놓은 것보다 AI 하나가 더 똑똑해진다는 뜻이다. 불과 4~5년 후다. 그의 예상대로 될지는 모르지만 가공할만한 일이다. 그는 2026년은 인류 문명이 갈라지는 분기점이라고 한다. 앞으로 인간과 유사한 AGI(인공일반지능)가 등장하면 노동이 사라지고 ‘보편적 고소득’ 시대가 온다고 전망했다. AI로 인해 일자리가 줄어 3~7년은 힘들 수도 있다. 예상과 달리 화이트 칼라가 블루 칼라보다 먼저 간다. 그 혼란을 넘기면 풍요의 시대가 온다. 모든 사람이 부유하게 산다. 10년, 20년 후에는 저축, 노후 대비가 필요 없다. 돈의 개념 자체가 사라져 무의미 해 진다는 것이다. 그는 의대에 가지 말라고 한다. 3년 안에 의사보다 AI가 수술을 더 잘하게 된다. 의사도 변호사도 다 AI가 한다. 사람은 할 일이 없어진다. 로봇이 일을 더 잘하기 때문이다. 그러면 인간은 무엇을 해야 하냐? 노동은 필수가 아니라 선택이 된다. 생존이 아니라 즐거움을 위해서 일한다. 대학의 가치도 배우는 공간이 아니라 사람을 만나는 공간으로 바뀐다. 인간은 점점 비도덕적, 비윤리적인 쾌락에 탐닉하게 된다. AI시대에는 삶의 의미를 어디서 찾을 것이냐는 물음에, ‘의미 있는 일’이라고 답한다. AI에게 목적을 부여해서 ‘실행자가 아닌 관리나 지휘자’가 된다고 한다. 그의 폭탄선언에 세계가 경악했다. 인공지능은 잘 사용하면 유익하지만, 잘못 사용하면 오히려 인류에게 피해를 주는 일도 생길 수 있다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민감한 개인정보가 유출되고, 검증되지 않은 정보 확산 등 치명적인 보안 문제도 발생할 수 있다고 경고한다. 해킹 봇이 국가 기간망을 공격할 가능성이 제기된다. 여론 조작도 할 수 있다. 많은 AI에이전트를 만들어 풀어놓으면 인터넷을 돌아다니며, 정치적 이슈나 트렌드를 자기 마음대로 써 일반인은 속기 쉽다. 생활의 편리함과 생산성을 높이려고 개발한 AI가 인간의 능력을 뛰어넘어 위협적인 존재가 된다면 아이러니다. AI에 대한 철저한 규제가 필요하다. 이로 인해 요즘 AI 안전성 운동이 힘을 얻고 있다. 2016년 한국의 프로 바둑기사 이세돌이 알파고와의 대국에서 패한 후, 많은 사람이 “AI 시대가 시작됐다”는 것을 실감했다. 바둑기사 이창호는 “혼란스러웠다. 오만하게도 바둑은 그리 쉽게 잡히지 않을 거라고 믿었다. 우주처럼 바둑은 경우의 수가 무한대여서 인공지능이 따라잡기 힘들 거라고 봤다. 그것이 깨진 것이다”라고 분석해 주목받았다. 이제는 AI가 체스나 바둑을 넘어, 포커까지 즐긴다고 하니 그들만의 천국을 건설한 것이다. 부정적 논쟁에도 불구하고 AI는 이제 피할 수 없는 흐름처럼 보인다. 나처럼 AI에 익숙하지 않은 시니어들은 이 엄청난 AI시대를 어떻게 살아낼 것인가. AI의 기초라도 배워야 하겠다. 생성형 AI, AI 에이전트, AGI 등 우선 AI에 붙는 이름부터 헷갈린다. 아직도 아날로그에 익숙한 삶을 살면서 Al의 격변 시대에 맞닥뜨려 두려움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AI의 지배도 겁나고, AI를 지배할 수도 없으니 답답하다. AI의 혜택은 차치하고 그 피해나 불이익을 받지 않았으면 좋겠다. 지금은 친구들과 카톡이나 하며 즐기는데 앞으로 ‘제미나이’나 ‘챗 GPT’라도 익혀서 분수껏 살고 싶다. 배광자 / 수필가문예마당 ai시대 플랜 철학적 게시물 사적 공간 인류 문명
2026.03.26. 19:10
떠날 줄 모르는 저 하늘 별을 품을걸 … 박정일 / 시인문예마당
2026.03.19. 19:34
아침마다 가늘고 긴 나팔 소리에 잠을 깬다. 보고파 살며시 찾아가면 어느새 빨갛게 화장을 했구나. 나비들이 다녀간 후에 알알이 흑진주 열매를 맺었다. 윤덕환 / 시인문예마당 그리움 분꽃 흑진주 열매 나팔 소리
2026.03.19. 19:33
인천공항 출국 게이트 밖에 눈이 내린다. 3층 출국장 끝, 대형 유리창 밖 하늘에 흰 눈발이 분분히 부딪혀 흩어진다. K와 걷던 이화동 골목길에 내리던 눈발과 닮았다는 생각을 한다. 아니 그 길에서 찾아 들어간 어느 찻집 유리창에 부서지던 그 눈발이다. 며칠 전 동창 모임에서 K가 캐나다 토론토에서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들었다. “탑승객 여러분, 눈 때문에 탑승이 지연되겠습니다.” 탑승객들은 별 동요 없이 눈 내리는 창밖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다. 봄가을에만 찾던 한국을 처음으로 초겨울에 갔다. 서울의 멋진 설경을 기대했지만 11월이 다 가도록 눈 소식이 없더니 떠나는 오늘 새벽부터 눈이 내린다. 서울에서의 마지막 날 내리는 첫눈! ‘눈은 푹푹 날리고 나는 혼자 쓸쓸히 앉아 소주를 마신다. 소주를 마시며 생각한다. 나타샤와 나는 눈이 푹푹 쌓이는 밤, 흰 당나귀를 타고 시골로 가자. 마가리로 가자.’ 백석이 나타샤와 가려고 했던 마가리는 어디쯤일까. 대학에 입학하던 해, 과 신입생 오리엔테이션에서 K를 처음 만났다. 전공과 교양 과목 여러 강의를 함께 들었지만 마주칠 때마다 서로 목례만 하고 지나치곤 했다. 1학년을 마치고 K는 소문도 없이 사라졌다. 군대에 갔다고 했다. 몇 마디 나눠 본 적도 없는데 강의실이 텅 빈 것 같았다. 다시 개강하고 교정의 개나리 가지마다 노란 봉오리가 막 터질 무렵, 학교로 보내온 그의 편지를 받았다. 첫 휴가를 기다린다고. 무척 보고 싶다고. 휴가 중 많은 시간을 함께하고 싶다고 했다. 3학년 가을 학기가 시작되어 교정의 단풍나무잎이 조금씩 붉어지기 시작할 때 K는 학교로 돌아왔다. 한 번 끊긴 지식의 광맥을 다시 이어가기가 쉽지 않은 듯 했지만 그는 시간을 내어 나와 자주 만났다. ‘사랑하는 친구들이여, 내가 죽은 후에 내 무덤가에 한 그루 버드나무를 심어주오. 그 부드러운 낙엽들과 내가 잠든 땅 위의 가벼운 그늘을 나는 사랑할 것이오.’ 알프레드 뮈세의 에피타프(Epitaph, 묘비명)를 주고받으며 먼 훗날 파리 페르 라셰즈에 있는 그의 무덤에 함께 가기로 약속했다. 도서실에서, 늦가을 오후의 교정을 걸으며 우리의 학문과 사랑은 익어 갔다. 졸업하고 도미 준비로 바쁜 날들을 보내는 동안 그도 졸업 후의 거취와 장래 문제를 고민하며 자주 만나지 못하는 사이, 빠르게 날들이 지나갔고 이곳 대학원 개강에 맞춰 나는 도미했다. 시간이 흘러 K도 졸업했고 그 얼마 후, 그는 파리로 유학을 떠난다는 소식을 보내왔다. 기숙사 창문으로 보이는 샌타모니카 바다에 낙조가 내려앉고 있었다. 그를 기다렸던가. 한국 바다와 닿아 있는 그 바다를 그 저녁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몇 년이 지난 후, 그가 프랑스 여성과 결혼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여러 해가 지난 어느 날, 뜻밖에 그의 전화를 받았다. 캐나다 밴쿠버로 이주했다고 한다. 반가웠다. 세월이 많이 흘렀어도 우리는 서먹했던 것도 잠시, 어제인 듯 친밀하게 대화를 나눴다. 그동안 지내 온 얘기, 친구들 소식, 미국과 프랑스, 캐나다의 역사와 현재 상황 등 긴 대화를 이어갔지만, 대화 가운데 이미 뮈세나 아폴리네르는 없었다. 그는 유럽의 진보 정권들에 염증을 느끼고 프랑스에 대한 환상도 많이 옅어진 듯했다. 우리 대화는 자주 끊기고 때로는 의견 충돌로 말다툼하기도 했다. 그는 곧 있을 미국 대선에서 민주당이 집권하면 캘리포니아 쪽 태평양은 쳐다보지도 않을 것이고 나를 보러 LA로 내려오려던 계획도 취소한다고 했다. “우린 만나기 어렵겠네. 누가 대통령이 되든 캘리포니아는 민주당 텃밭이거든. 나는 심지어 투표도 하지 않아. 내가 어느 후보를 선택하든 캘리포니아는 민주당이 가져가니까.” “와이프가 언어 문제로 많이 힘들어해. 자꾸 토론토로 옮겨 가자고 하네. 그쪽은 프랑스어가 더 많이 통용되니까.” 언제부터였던가, 어렴풋이 너의 신변에 이상이 생긴 듯한 느낌이 들었어. 토론토로 이주한 후부터 연락이 뜸해졌고 그 후, 너의 와병 소식을 풍문으로 들었지. K, 너는 또 홀연히 가 버렸네. 통보도 없이, 이건 반칙이야, 세 번째의. 처음 입대했을 때, 결혼했을 때 그리고 이번까지. ‘그리운 K, 세상은 어수선해. 대통령이 이웃의 동맹국을 미국의 51번째 주가 되라고 하고 그 총리를 ’거버너 아무개‘라고 불러서 놀라는 중이야. 너희 총리에 대한 우리 대통령의 무례를 어떻게 설명할까. 한국의 대통령이 낙마한 다음 날부터 이곳에서도 대통령 반대 시위가 시작됐어. 한국 사태에 고무된 것일까, 그러나 미국은 잘못이 명백하게 밝혀진 고작 한 사람, 닉슨 대통령을 아주 점잖게 물러나게 한 미미한(?) 경력밖에 없지. 그에 비해 한국은 대통령을 외국으로 추방해 버리고 총탄으로 쓰러뜨리고 바위에서 뛰어 내리도록 코너로 몰아가고 줄줄이 감옥에 보내 버리고 5년 임기는 간데없이 2년이 지나면 탄핵해 버리는 대단한 민족이지. 진보는 진군하고 있고 보수는 보푸라기처럼 흩어졌어. 진보는 진행 중이고 보수는 보세 창고에 보관 중이야. 세상이 바뀌니까 우리 친구들도 당당해졌어. 오랜 세월 동안 간헐적으로 진보 인사들의 글을 소개하고 조심스레 동기들의 반응을 살피던 P가 며칠 전, 뜨뜻미지근한 친구들에게 강펀치를 날렸어. “우리는 S대 출신이고 4·19 데모에도 참여했다. 노인이 되면서 보수가 되는 것은 자기 재교육이 미진했다는 증거다”라고. 우리가 4·19에 참여했던 것이 어떤 이데올로기에 경도되어서였던가? 오로지 독재에 대한 저항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때부터 진보도 보수도 아니었던 나는, 그러니까 노인이 되면서 자기 재교육이 미진해진 것이 아니고 애초에 미진했던 존재네. 지금까지 그렇듯 분명한 진영 논리를 구사하는 노인들이 신기해. 이 나이까지 그토록 명료한 사고를 할 수 있는 친구들이 한편으로는 고맙고.’ 서울을 떠나던 날, 비행기에 탑승한 후에도 세 시간 가까이 더 기내에 갇혀 있었다. 한 대가 빠져나가면 그새 활주로에 쌓인 눈을 다시 쓸어 내고 나서야 다음 비행기가 뜰 수 있었다. 활주로 옆에 차례를 기다리는 여러 나라의 비행기가 장사진을 쳤다. 비행기에 갇힌 지 두 시간쯤 지나자, 불문율을 깨고 승객들이 자리에서 일어나서 기내를 활보하기 시작했다. 여기저기서 스트레칭을 하고 커피도 심지어 라면도 주문했다. 떠나 온 설국이 그립다. 떠나보낸 건 모두 그리워. K도 고국도 그리고 우리의 젊음도. 박 유니스 / 수필가문예마당 설국 수필 프랑스 캐나다 캐나다 토론토 한국 바다
2026.03.19. 19:3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