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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예마당] 향기

넌     꽃의 품격         내 숨     머물고 싶은 널     한껏 들이키며         언젠가     너이고 싶은     내 마음         스치는 바람에     네 숨     고였을까?         고이 품고 흔들어     나를 맡아본다   나승희 / 시인문예마당 향기

2026.06.25. 18:33

[문예마당] 해빙기(解氷期)

할아버지 하며     달려오는 손자의 모습에   세상 풍파에 찌든 나의 마음은 녹아내린다       반가운 사람을     약속하고 기다리는 마음에서   나는 설렘을 느끼고       나의 빈자리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한 기도로 채워질 때   나의 마음은 훈훈해진다       주변 사람들로 인하여   그리움과 간절함이 사무칠 때     나에게도 해빙기가 있음을 느끼고         젊은 노인 보다는 노년의 청춘을 갈망하며   진리의 한 조각을 알고는 뿌듯한 마음에서   노년 해빙기의 삶을 즐거이 이어간다       선행이 감사를 앞설 수가 없고   감사가 없는 삶에는 만족이 없으며   감사는 나를 자유롭게 한다       사람을 만나는 건 삶의 한 페이지가 되지만   창조주를 만나는 건 인생의 기적이요   영원한 안식의 약속을 갖게 한다   이창수 / 시인문예마당 해빙기 노년 해빙기 세상 풍파

2026.06.25. 18:32

[문예마당] 내가 떠난 자리

로스앤젤레스 타임스의 인기 칼럼 ‘Dear Abby’에서 읽은 글이다. 어느 시어머니가 세상을 떠났다. 며느리가 고인의 유품을 정리하다가 옷장 깊숙한 곳에서 상자 하나를 발견했다. 이것을 열어보고 며느리는 큰 충격을 받았다. 그 상자 안에는 며느리가 평생 시어머니에게 보낸 선물과 편지, 생일 축하 카드 등이 하나도 개봉되지 않은 채 쌓여 있었다. 정확한 의도는 알 길이 없지만, 시어머니는 그렇게 미움의 흔적을 남겼다.   남편은 대학노트로 이십여 권이나 되는 삶의 기록을 남겼다. 나는 몇 년이 지나도록 그것을 읽지 않고 있다. 어쩌면 끝내 읽지 못할 수도 있다. 읽을 용기가 없어서다. 그에게서 어떤 해명이나 변명의 말도 들을 수 없게 된 지금 내 마음에 작은 상처가 될 내용이라도 적혀 있을지 두려운 것이다.   개인의 흔적은 일생이라는 이름으로, 국가나 인류의 흔적은 역사라는 이름으로 남는다. 그 가운데는 길이 남기고 싶은 훌륭한 흔적도 있고, 두 번 다시 되풀이되어서는 안 될 수치스러운 자취도 있다. 이런 남기고 싶지 않은 흔적을 가진 개인이나 국가는, 그것을 혹 감추거나 지워버리기 위해 모든 수단을 동원해 보지만 항상 성공할 수는 없다.   과거 한국 사회를 떠들썩하게 했던 어느 유명 큐레이터의 가짜 학위 소동은, 본인의 몰락으로 끝날 수도 있는 사건이었다. 그러나 ‘인터넷은 죽지 않는다. 다만 숨어 있을 뿐이다’라는 유행어까지 만들어 낸 이 사건은, 서로의 이메일에 남긴 당사자들의 밀어 흔적들이 움직일 수 없는 증거가 되어서 큐레이터 주위 여러 사람의 파멸을 몰고 왔다.   그런가 하면 역사에는 국가적인 재난으로 인해 개인이 받은 고난이나 상처를 보듬고 그 치유에 지혜를 모았던 일도 있다. 조선조 인조 때 청나라의 침략으로 시작된 병자호란이 끝나자 포로로 끌려갔던 사람들이 조선으로 돌아오기 시작했다. 그중에는 많은 부녀자가 포함되어 있었는데, 이들의 육체적 순결이 사회적으로 문제가 되었다. 이에 인조는 한양 북쪽에 큰 목욕탕을 지어 놓고 거기서 몸을 씻고 성안으로 들어오는 귀환 포로는 모두 깨끗하니 문제 삼지 말라는 명을 내렸다 한다. 인조는 민생도 외교도 모두 실패한 왕이었지만, 상처 입은 흔적을 덮어 주는 일에는 왕다운 지혜를 보였던 셈이다.     사람은 가도 그가 남긴 글이나 훌륭한 작품은 영원히 남는다. 예술가들은 누구나 예외 없이 후세에 길이 남을 작품을 남기기 원한다. 과학자는 인류에 이바지할 위대한 문명의 이기를 발명하기를 꿈꾼다. 국가는 자국의 영토를 확장한다거나 민주주의 같은 좋은 제도를 세우려고 또 노력한다. 그러나 좋은 흔적이란 반드시 이런 위대한 업적이나 훌륭한 걸작품만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모든 사람이 페니실린을 발명한다거나 ‘안나 카레니나’ 같은 불후의 명작을 남길 수는 없다. 평범한 일생을 살다 가는 대부분의 사람에게 그런 일은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우리네 잔잔한 일상의 흔적들도 그런대로 이어지고 또 후세에 남길 만한 이유와 가치가 있다. 일본 작가 오자키 가즈오는 “곤한 인생 속에도 반드시 둘도 없는 이야기의 결정(結晶) 같은 것이 숨어 있다.”고 했다.   유형의 흔적이거나 무형의 그림자거나, 비범하거나 평범하거나 간에 사람들은 뒤에 남은 사람들에게 무언가 흔적을 남기고 간다. 그것은 평소의 생활이나 일기로도 남고, 생전의 그에 관한 타인의 기록이나, 비문이나 요즘은 인터넷에도 남는다.   아름다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나는 이 아름다운 세상에 아름다운 흔적을 남기고 떠나고 싶다. 내 삶이 고스란히 담긴 책을 남겼으면 한다. 자랑스러웠던 일들을 기록한 자서전이 아니고 나의 평생의 사랑과 삶이 배어 있는, 진실이 묻어나는 그런 글을 말이다.     찰스 램의 “도시와 시골의 모든 소리를 포함한 인생의 소리 중에서 문 두드리는 소리보다 더 듣기 좋은 것은 없다”고 할 때의 그런 느낌의 소리로 기억되고 싶다. 내 자손들이 큰 잔치를 치를 때마다 반드시 펴보는 레시피(recipe) 책 한 권쯤도 써 두고 갔으면 한다.   마음에 상처로 남는 기억이 아닌, 따뜻하고 좋은 자취를 남기고 싶다. 이러한 자취들을 하루아침에 만들어지지 않는다. 인생의 끝 무렵에 다다라서 급조할 수 있는 일은 더더욱 아니다. 그 일은 오늘  삶의 뜰에서 쌓아야 한다. 지금 있는 이 자리에서 매 순간, 하루하루 날줄과 씨줄로 엮어가야 하리라. 한 땀 또 한 땀 정성 들여 수 놓아야 할 인생의 대명제다. 그렇게 순간순간 남은 삶의 궤적을 그려 가고 싶다. 박유니스 / 수필가문예마당 수필 무언가 흔적 밀어 흔적들 조선조 인조

2026.06.25. 18:31

[문예마당] 밥상

고려 여인들의   슬기로 이어 온 솜씨   그 정성으로 차려진 밥상 앞에서       고마워라   보이지 않는 손길들       눈을 감으면 떠오르는     두고 온 산 빛도 한 접시 담아놓고   바다 빛도 한 그릇   상큼한 봄나물과     산과 향 가을 한 잔 곁들인   겨레의 마음으로 차려진 밥상       그 앞에 다가앉아   가슴에 빛들이며   잊힌 이야기를 듣는다       아득히 먼 내 나라의 숨소리를   유병옥 / 시인문예마당 고려 여인들

2026.06.18. 19:43

[문예마당] 큰 숲 속에서

국립공원 요세미티 숲에 가면   우리는 어린 아기가 된다   끝이 안 보이는 아름드리 나무들   나이를 물어보기엔 내가 부끄럽다   천 년도 훨씬 넘겼다는   세코야나무 숲   팔구십년 살기도 이렇게 힘겨운데   천 년 넘게 한자리만 지켜온 세월   왜 힘들고 어려운 날 없었으랴   태풍도 지나고 천둥번개도 지내고   긴 가뭄 타는 가슴   한 줌 물 아쉬웠던 날들   불어 닥친 산불 삼도 화상도 견뎌낸 삶       나무는 작아도 기대려 하지 않는다   보다 나은 자리 넘보지도 않는다   팔 벌려 올곧게 서서 위만 보고 산다   하늘과 구름, 밤엔 별을 보며   바람과 빗줄기 속에서도   삶의 지혜를 익히며 사나 보다   세상일 내 마음 같지 않아   가는 길 힘들고 지치는 날엔   저 숲속 우람한 나무를 생각하자. 강언덕 / 시인문예마당 아름드리 나무들 국립공원 요세미티 가면 우리

2026.06.18. 19:42

[문예마당] 알싸한 총각무의 기억

국민학교 6학년이 되던 해, 내 나이 열두 살이었다. 나는 남보다 1년 이른 일곱 살에 입학했다. 내가 똑똑해서 일찍 간 것이 아니다. 시청 호적과에 근무하시던 아버지는 내가 일곱 살 되던 해에 여동생이 태어나자, 엄마를 뺏겨 서운해하는 내 마음을 달래주고 싶으셨던 것 같다. 그렇게 들어간 학교는 어린 나에게 참 버거웠다.   창문 밖의 풍경은 을씨년스러웠다. 학교 운동장 가에 늘어선 커다란 플라타너스 나무들은 계절이 바뀔 때마다 감당하기 힘들 만큼의 낙엽을 떨어뜨렸다. 아이들의 발에 밟힌 잎사귀는 운동장을 뒹굴었다. 나는 키가 작아 맨 앞줄 2번에 앉았다. 덩치 큰 아이들이 운동장에서 고무줄놀이를 하며 힘차게 뛰어놀 때, 몸이 약했던 나는 그 활기 속에 섞이지 못한 채 늘 햇볕이 잘 드는 벽에 기댄 가냘픈 아이였다.   내 유일한 안식처는 등교 전 아버지와 보내는 짧은 시간이었다. 종로 5가 사무실로 출근하시던 아버지는 자가용 뒷좌석에서 늘 내 손을 꼭 잡고 말씀하셨다. “우리 딸은 세상에서 제일 예쁘고 영특한 거 아빠는 다 알지.”   아버지는 일본 출장을 다녀오실 때마다 달콤한 초콜릿과 예쁜 인형을 품에 안겨주셨다. 학교 문 앞까지 나를 안아 데려다주시던 아버지의 넓은 가슴과 양복 깃의 향기는 차가운 교실로 들어가기 전에 마지막으로 충전하는 온기였다.   하지만 교실 문을 여는 순간, 따스한 온기는 사라지고 서늘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담임 선생님은 체격이 씨름 선수처럼 당당한 여성분이었다. 언제나 하얀 저고리에 검은 치마를 입고, 한쪽 손목에는 시계를 차고 손에는 매로 쓰는 긴 나무 자를 들고 다니셨다. 선생님은 워낙 체구가 커서 교실 문을 들어오실 때조차 몸을 비스듬히 틀어야만 했다. 선생님이 걸음을 옮길 때마다 낡은 마룻바닥은 ‘삐걱, 삐걱’ 소리를 냈다.   교실 풍경 또한 시끄러웠다. 겨울이면 교실 한복판에 놓인 난로 위로 아이들의 양은 도시락이 층층이 쌓였다. 시간이 지나면 맨 밑바닥 도시락의 밥이 누렇게 타 들어가며 구수한 냄새를 풍겼고, 가끔은 틈새로 흘러나온 김칫국물이 뜨거운 난로 위에서 ‘치익-’ 소리를 내며 타올랐다. 가방 안 책과 소지품에 밴 김칫국물 냄새는 그 시절 우리들의 지울 수 없는 체취였다.   점심시간이면 선생님은 교탁 앞에 홀로 앉아 도시락을 드셨다. 뚜껑을 여는 순간 진하고 비릿한 젓갈 냄새가 교실을 가득 채웠다. “이건 황석어 젓갈을 듬뿍 넣고 담근 거라 아주 맛있다”며 황석어 한 마리를 꺼내어 보이시며 발갛게 익은 총각김치를 자랑하셨다. 집에서 하얀 백김치만 먹고 자란 나에게 그 시뻘건 무는 선생님의 서슬 퍼런 기세처럼 무서웠다. 아작아작 소리를 내며 매운 무를 씹으시던 선생님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교실 책상은 성적에 따라 다섯 줄로 나뉘었다. 수, 우, 미, 양, 가. 점수가 적힌 성적표대로 자리를 옮겨 앉아야 했다. 나는 창가에 서서 손바닥을 맞던 날을 잊지 못한다. 선생님이 든 나무 자가 공중 높은 곳에서 ‘휙’ 소리를 내며 내려올 때는 정말로 숨이 멎는 것 같았다. 온몸의 피가 발아래로 쏟아져 내리는 듯 머릿속이 하얘졌고, 손가락은 고통으로 기괴하게 오그라들었다. 닭똥 같은 눈물이 먼지 앉은 바닥으로 툭툭 떨어졌다. 나는 입 밖에도 소리도 내지 못한 채 속으로 간절히 ‘엄마’를 불렀다.   공포를 벗어나려면 외워야 했다. 나는 역대 왕들의 이름과 24절기를 주문처럼 외웠다. 신라 왕들의 이름은 아이들에게 난공불락이었으나, 나는 선생님 앞에 서서 당당하게 입을 열었다. “박혁거세, 남해, 유리, 탈해, 파사, 지마, 일성...” 막힘없이 나오는 나의 목소리에 선생님의 미간이 펴지며 만족스러운 미소가 번졌다. 24절기를 줄줄 읊던 날, 선생님은 나무 자를 내려놓고 내 머리를 가만히 쓰다듬어 주셨다. 그 거칠고 투박한 손길은 손바닥의 통증을 씻어준 유일한 온정이었다.   어느 날, 엄마가 과일 바구니와 하얀 봉투를 들고 학교를 찾아오셨다. 평소 그렇게 엄하시던 분이 엄마 앞에서는 수줍은 소녀처럼 공손하게 웃으셨다. 나중에야 엄마에게 들은 선생님의 사연은 어린 내 가슴에도 슬펐다. 선생님은 전쟁 때 처녀의 몸으로 홀로 월남하셨다고 했다. 이북에 두고 온, 잊지 못한 연인이 있어 평생 누구에게도 마음을 주지 못한 채 홀로 늙어 가고 계셨던 것이다. 학교를 집 삼아 사시며 그 고독한 세월을 버티게 한 것은 어쩌면 고향의 맛을 닮은 그 알싸한 총각무뿐이었을지도 모른다.   선생님이 우리를 그토록 혹독하게 가르치셨던 이유를 이제야 알 것 같다. 혈혈단신 내려와 세상을 견디며 지식이 삶을 지키는 유일한 무기임을 뼈저리게 느끼셨을 그분에게, 우리가 외우던 왕들의 이름은 단순한 시험 문제가 아니라 험난한 세상을 살아낼 힘이었으리라. 그때 억지로라도 머릿속에 집어넣던 습관은 훗날 내가 성경 구절을 열심히 외우게 한 귀한 마중물이 되었다. 그 절실함으로 외운 구절들이 전도의 현장에서 거침없이 입술을 타고 흘러나와 타인의 영혼을 적시기도 했다.   그러나 30대 시절에 외웠던 성경 구절도 이제 야속한 세월에 많이 잊었다. 성경의 문장도 하나둘 흐릿해진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 시절 외웠던 역대 왕과 24절기는 기억 속에 그대로 남아있다. 선생님의 도시락에서 풍기던 황석어 젓갈의 알싸한 냄새도 기억 속에 선명하다. 지식은 망각의 강을 건너 사라지지만, 고통 끝에 마주했던 온정은 영혼의 깊은 곳에 화인처럼 남는 모양이다. 나를 울렸던 대나무 자 소리만큼이나 선생님의 총각무 씹는 소리도 외로움이었구나 싶어 그 기억을 다시 가슴에 꼭 안는다.   이제 안다. 무섭기만 했던 큰 체구 뒤에 숨은 선생님의 커다란 외로움이 사실은 사랑을 향한 그리움이었음을. 선생님도 이제 그곳에서 미간을 펴고, 이북에 두고 온 연인과 재회하여 환하게 웃고 계시리라.  엄영아 / 수필가문예마당 총각무 기억 담임 선생님 학교 운동장 밑바닥 도시락

2026.06.18. 19:40

[문예마당] 삶

훗날       그리울 사람   찾아       떠도는    조각배       노가   닳도록 …  박정일 / 시인문예마당

2026.06.11. 19:49

[문예마당] 자카란다

그를 너무 사랑합니다   이 마음 다 전해지지 못하지만   그래도 늘 맴돌고   사랑을 전하려 애씁니다   말을 할까 말까 갸우뚱 고개 흔들면서   나 자신에게 묻고 물으며 과연 사랑해도 괜찮을까     생각도 합니다       어쩌면   계절이 바뀌고 다시 그 모습 볼 수 없어도 끝내   마음 전하고 싶습니다   바람 불어와 몹시 흔들리는 날에도   사랑하겠노라 마음을 전하렵니다   그대 모습에 나는 붙들려   오직 가슴에 안고   살아가고 싶기 때문입니다       자카란다   사랑해 어머니가 사랑했듯이 .   보랏빛 너울   나도나도 사랑하니까   내 사랑  자카란다 엄경춘 / 시인문예마당 보랏빛 너울

2026.06.11. 19:48

[문예마당] 초심(初心)이여 !

지난겨울은 어느 해보다 비바람과 폭풍이 유난했다. 겨울의 혹한이 심할수록 다시 찾아오는 파란 봄 하늘은 더 큰 환희와 희망을 준다. 뒷산 골짜기에서 피어오르는 아침 안개는 긴 겨울잠에 빠져있던 생태계를 일깨우는 창조주의 숨결 같고, 오솔길 옆의 노란 민들레꽃은 창조의 경이로움 그 자체다. 이런 신비로운 생성의 원리를 맞이할 때면, 인간도 창조주의 섭리에 따라 크고 넓은 어머니의 품에서 태어나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한 생명이 태어나 성장할 때까지 어머니의 품은 한없는 우주이고 존재의 모두였을 것이다. 우주를 형성하고 있는 삼라만상은 항상 제 자리를 지키고 있다. 먼 옛날 여행자들은 밤하늘의 별을 보며 목적지의 방향을 찾았다고 한다. 어린아이가 성장하며 삶의 방향을 잃을 때면, 어머니의 모습과 음성을 생각하며 삶의 방향을 찾을 것이다. 어린 시절에는 어머니의 말씀이나 행동이 삶의 나침반이 되었고, 성장 후에도 이런 어머니의 잔상이 초심(初心)으로 살아가게 하는 삶의 이정표가 되었다. 초심이란 태어날 때의 순수하고 겸손한 마음,  어린아이와 같은 맑은 마음의 상태를 유지하는 힘이며, 한때 좌절해도 다시 시작할 수 있는 원동력의 마중물이 되었다.     어린아이는 성장하면서 점차 초심을 잃고 물질적 욕망과 명예욕을 추구하며 일생을 보낸다. 대부분의 삶을 ‘세상 놀이’에 집중하며 세월을 보내고 정신적, 육체적으로 한계가 다다른 후에야  비로소 삶의 유한성을 인정하고 지나온 길을 돌아보게 된다.       젊은 시절이 가능성을 확신하고 성취를 갈망하는 시간이었다면, 노년기는 한계를 수용하고 남은 삶을 정리하며 인생의 본질로 관심이 이동하는 시기일 것이다. ‘명상록’의 저자로 로마의 황제이자 철학자인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자연이 주는 것을 사랑하라”고 했다. 즉, 노년의 신체적 변화, 기억력 감소, 관계의 상실들과 같은 현상을 저항의 문제가 아니라 수용의 문제로 보았다. 젊을 때는 죽음이 추상적인 개념이지만, 노년에는 그것이 구체적 현상이라고 생각했다. 죽음을 의식할 때 비로소 진정한 자기의 삶을 살고 가장 진실한 초심으로 돌아간다고 생각했다.     작가 헤르만 헤세는 “삶이란 어머니의 요람에서 시작하여 우주의 원리에 따라 마지막으로 우주의 거대한 요람으로 돌아가는 것”이라 했다. 육체의 욕구가 빠지면 욕망의 소음이 줄어들고 영혼의 빛이 더욱 투명한 초심으로 돌아간다는 것이 작가의 논리다. 바람이 불면 나뭇가지가 흔들리듯이 인간의 결심이 흔들리는 것도 자연스러운 본성으로 인정했다. 자책보다 다시 시작하는 깨달음으로, 초심을 찾으려 노력하는 인간 내면의 마음가짐이 훌륭한 삶의 과정이라고 한다.  젊음은 무엇을 가질 것인가의 시간이라면, 노년은 “나는 무엇인가”를 묻고 어떻게 내려놓을 것인가를  생각하는 시간이라는 것이다.     인류 역사는 초심을 잃게 되면 혹독한 시련이 따른다는 것을 보여준다. 국민과 한 약속을 잊은 지도자의 독선, 사랑으로 맺어진 부부의 이혼, 창조주에게 헌신과 믿음을 약속한 성직자의 일탈, 사회봉사를 약속한 인사들의 배신 등 모두 초심을 잃어 나타나는 모습이다. 그리고 그 결과는 개인적 비극, 혹은 국가와 사회적 재앙을 초래하기도 한다.   인생의 마라톤에서 생의 종착점이 희미하게 보이는 지점에 있는 세대에게는 영국의 극작가 버나드 쇼의 묘비명에 있는 말이 가슴에 와 닿는다. 그의 묘비명에는 ‘I knew if I waited around long enough, something like this would happen’이라는 문구가 쓰여 있다.  조금 편안한 해석이지만 ‘우물쭈물 살다가 결국 이렇게 될 줄 알았다’라는 말이다. 이는 인생의 유한성 속에서 초심으로 돌아가 살지 못하는 어리석은 삶을 후회하는 글이다.     우리 모두 아름다운 이 세상에서의 즐거운 소풍을 마치고 창조주의 품으로 돌아갈 때까지 초심(初心)으로 살 수 있기를 기원해 본다.   이영송 / 한미문화교류재단 회장문예마당 초심 수필 모두 초심 이혼 창조주 마음 어린아이

2026.06.11. 19:47

[문예마당] 어머니

어머니 가슴은     밤 품은     해         퍼지는  햇살로     밥을 짓고     타오르는  노을로     불 지피시는 엄마         종일이 오롯이     어머니 사랑     그 희생 없인     우주가 사막이네 나승희 / 시인문예마당 어머니 어머니 사랑 어머니 가슴

2026.06.04. 18:42

[문예마당] 유월의 애가

청  모신 물 빛  적삼에   가녀린 몸 감추시고   북녘땅 향할 때   뿌옇게 안개 서리던 눈망울   계신 듯 안 계신 듯   그 입가에 그림자 갇히기 전   먼저 가신 내 할머니       “너희 신의주 고모 한 번만   보고 죽었으면 좋으련만…”   허공을 향해 토해내던   당신의 피맺힌 통곡   오늘도 유월의 하늘을   핏빛으로 붉게 물들인다 유지애 / 시인문예마당 유월 너희 신의주

2026.06.04. 18:42

[문예마당] 내 이름 변천사

사십이 다 된 어머니에게 이미 자식 다섯이 있었다. 그녀에게 내가 들어선 것은 달갑지 않았을 것이다. 맏며느리라 시부모를 모시고 시동생 시누이가 각각 셋이나 있었으니까.   내가 세상에 나오자 아버지가 천덕꾸러기 신세를 면하라는 뜻이었는지 ‘미래’ 라는 이름을 지어 주었다. 아름다울 미(美), 올 래(來).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까지 내 이름은 미래였다.   처음 학교에 갔더니 내 이름이 없었다. 대신 정미애(鄭美愛)라는 이름이 있었다. 동사무소 서기였던 막내 삼촌이 간난 여자아이 이름으로 아름답고(美) 사랑스럽다(愛)가 더 나았는지 마음대로 그 이름을 호적에 올린 것이다. 그 후 나는 학교에서 선생님과 반 친구들이 부르는 이름과 가족이나 동네 친구들이 부르는 두 이름을 가지게 되었다.   중학교 때 이사를 했다. 그 동네를 뜨자 나를 미래로 부르는 사람은 가까운 사람들로 한정되었다. 점점 나는 학교에서 부르는 이름으로 알려졌다. 그런데 정작 나 자신은 ‘미래’라는 이름을 비밀스럽고 숨겨진 보물처럼 여기게 되었다. 친한 친구나 마음에 드는 남자들에게 특혜라도 주듯 은밀하게 그 이름을 알려 주고는 했다. 하지만 나는 그 이름을 지키지 못했다.   일찍 사회로 나가 일하게 된 곳은 호텔이었다. 당시 한국사회는 여성의 이름은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호텔에 들락대는 사람들의 수준에 따라 내 위상도 올라가거나 내려갔다. 서울손님들은 나를 미스 정이라 불렀고 지방에서는 정양으로 불렀다.   서울 조선 호텔 예약부에 입사하자 부장이 ‘아그네스 정’라는 이름을 내게 주었다. 그때 조선 호텔은 미국 프렌차이즈 회사가 운영하고 있었다. 함께 일하던 미국인 이사나 매니저들이 한국 직원들 이름을 기억하기도, 부르기도 힘들어했다. 그렇다고 본인에게 물어보지도 않고 하사하듯 영어이름을 만들어 미국 직원들에게 부르기 쉬우라고 던져 준 부장을 나는 좋아하지 않았다. 우리는 일본 제국이 강요한 창씨개명을 거부하고 민족적 전통을 확립하고자 투쟁한 조선인의 후예가 아닌가. 다행히 그 이름은 오래 가지고 있지 않았다. 퇴사하면서 나와 상관이 없게 되었다. 하지만 왜 부장이 내게 아그네스라는 이름을 붙였는지 아직도 모를 일이다.   한 미국 손님이 명찰에 쓰여 있던 나의 영문 이름, M.I.A.E를 ‘마야’로 읽었다. 또 다른 이름이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운명처럼 나는 그 이름을 덥석 물어 버렸다. 그것이 미국까지 나를 밀어붙인 것인지, 따라 왔는지 모를 일이다. 미국에서 나는 ‘마야’였다.   미국인들은 남의 이름을 자기네들이 부르기 쉽도록 바꾸려 들지 않았다. 그들은 사람의 고유 이름을 기억하고 제대로 부르려 노력한다. 그래서 ‘내가 당신의 이름을 올바르게 발음하고 있느냐’고도 묻는다.   세월은 내게 또 다른 이름을 내밀었다. 미국에서 새로운 직장을 찾아 옮겨야 할 때가 되자 다시 이름이 바뀔 위기가 온 것이다.   부동산 에이전트 라이선스를 따고 새 일에 대한 기대에 부풀어 있었다. 그때는 한국 신문에 에이전트의 사진과 함께 가명으로 부동산 광고를 낼 수 있었다. 얼마 후 광고에 에이전트의 법적 이름을 사용하지 않으면 안 되도록 법이 바뀌었다.   한인 사장이 내게 광고에 낼 이름을 다른 것으로 바꾸라고 했다. 미국에서 15년 넘도록 사용한 내 이름 ‘마야’는 인류에서 망해 사라진 마야 문명의 잔재라고 했다. 그 이름으로는 부동산업계에서 결코 성공할 수 없을 것이란다. 내게 아그네스라는 이름을 던져 주었던 부장을 다시 만난 기분이었다.   나는 무슨 이름으로 바꾸어야 하겠느냐고 그에게 되물었다. 사장이 ‘에이미’라는 이름이 좋을 것 같다고 했다. 나는 또 그 이유가 뭐냐고 물었다. ‘사장의 촉’이라고 했다. 분명 부동산 에이전트로 성공하게 될 것이란다. 나는 단호하게 NO! 라고 대답했다. 그의 촉이라는 것이 찬란했던 마야 문명보다 훨씬 더 형편없게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1986년, 미국에 도착했을 때 내 손에는 한국정부에서 발급해 준 여권이 들려있었다. 그 여권 속에 이미 내 성씨(姓氏)가 ‘애들란드(Edlund)’로 바뀌어져 있었다. 나의 성이 바뀔 것이라고 생각해 본적이 없었다. 나는 가족을 철저히 떠나야 했는지 모른다. 이렇게 멀리 와야 내 지난 허물을 벗을 수 있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인생이란 누구도 예측할 수 없다. 살다보니 이름도 바뀌고 성까지 바뀌었다.   결혼한 한국여자에게 시집 귀신이라는 별명이 붙는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며느리에게 성씨를 내주지 않는다. 한국 며느리들은 친정 성을 가지고 있지만 친정으로 돌아 갈 수도 없었다. 친정 대문은 그녀들에게 다시 열리지 않았다. 결국 그들은 어떤 곳에서도 존재하지 않았다. 떠돌이 같은 한국여성의 운명이었다.   애들란드 가문이 그들의 성씨를 내주며 나를 가족일원으로 맞아 들였다. 나는 더 이상 정양도 아니고 미스 정도 아닌 미시즈 애들란드(Mrs. Miae Edlund)다. 성씨까지 받았으니 진정 이집 귀신이 된 것이다. 이제 나는 죽어 구천을 떠돌지 않아도 된다.   갑자기 내 인생에 아름다운 것이 도착하기를 바란다며 ‘미래’라는 이름을 지어 주었던 아버지가 생각난다. 그 이름은 어떤 서류에도 없다. 이름을 지으며 늦둥이 막내의 얼굴을 보며 미소 지었을 내 아버지. 자신이 지어 준 딸의 이름이 속수무책으로 바뀐 것을 알았을 때 정말 그는 아무렇지 않았을까. 왜 이제야 섭섭했을 아버지의 마음을 달래고 싶어지는 것일까.   “아버지, 제가 비록 ‘미래’라는 이름은 잃어 버렸지만 ‘마야’라는 이름에 당신의 성씨를 붙이겠습니다.”   미국에서 ‘마야’라는 이름 또한 별명이었고 가명이었고 애칭이었다. 나는 ‘마야 정’이라는 이름을 나의 필명으로 정했다. 그는 한국과 미국에서 치열한 삶을 살아 온 이야기를 쓴 인물이다. 나는 그 안에 존재한다. 마야 정 / 수필가문예마당 변천사 이름 영문 이름 법적 이름 고유 이름

2026.06.04. 18:41

[문예마당] 길

세월에 풍상   큰비 지나가고   강물은 물길 따라 휘돌아가고   여름 초록이 인사를 한다       물이 가야 할 곳 찾아가듯   높은 절경 위로 감춰둔 기억 품어낸다   구름도 쉬어가는 오후       마을과 고을 이어지는 길 따라   그리움 품고 살아온 여정       산도 지나고   마을도 지나가다   잠시 길을 멈춘다       마음속 하얀 살결   세찬 바람에 걸려 몰려온 구름 흔적   수정같은 그림 호수에 머물고       믿음에 기적 옥쟁반에 올리워 놓는다   오늘에 고난 내일은 희망 날개 달고   나는 가리라 감사의 길 찾아가리라  권온자 / 시인문예마당 기적 옥쟁반 희망 날개 절경 위로

2026.05.28. 19:53

[문예마당] 꺽지 마시오

뒤뜰 사과나무 가지 끝에     푸른 열매 일곱 개   제 몸무게를 견디며 매달려 있었다     그녀는     그 푸른 껍질 속에     붉은 노을이 차오를 때까지     두어 달을     말없이 기다렸다       누군가 다녀간 후     우리 가을은 통째로 사라졌다     가슴 아파하는 그녀에게     붉은 사과를 사러 가자고 했다         내년에는 이렇게 써 붙여야지     이 나무에는     사람의 마음이 익어 가니     부디     꺽지 마시오 윤덕환 / 시인문예마당 뒤뜰 사과나무 우리 가을

2026.05.28. 19:52

[문예마당] 잃어버림과 되찾음

오래전 급히 출근하려고 허둥지둥 자동차 키를 찾았지만, 도저히 찾을 수가 없었다. 알고 보니 아내가 내 차 키까지 갖고 출근한 것이었다. 잠시 화가 나기도 했지만 다행히 잃어버리지 않았다는 기쁨이 더 컸다.   라스베이거스에 살다 보니 종종 카지노 호텔을 가게 된다. 그런데 돌산 기슭 동네 한가운데 있는 한 카지노에는 유독 시니어들이 많이 모여든다. 그러다 보니 지팡이를 짚고 오는 사람, 쓰러질 듯 비틀대며  걸어 오는 사람, 휠체어를 이용하는 사람, 심지어는 산소통을 달고 오는 사람도 있다. 고독을 해소하고 병마도 잊기 위해 식사를 하고 이야기를 나누고 게임도 즐기는 것 같다. 건강한 사람들이야 어찌 그들의 속마음을  이해 하겠는가.   게임을 하다 보면 어쩌다 약간의 공짜 돈이 생긴다. 그렇게 기분이 좋을 수 없다. 누구나 비슷할 것이다. 잃어버린 것은 생각지 않고 한동안 기분 좋은 시간을 맛본다는 사실을 누가 부정하겠는가. 잃어버렸던 돈을 되찾았다는 기분일지 모르지만 되찾는다는 것은 기쁜 일이 아닐 수 없고, 소중함도 깨우쳐 주는 계기가 아닌가 생각해 본다,   이른 새벽 수술을 위해 딸 내외의 보호를 받으며 자동차로 라스베이거스 집을 출발해  애리조나  피닉스 소재 ‘메이어 크리닉’ 병원으로 향했다. 창밖을 내다보며 머릿속은 이런저런 생각에  착잡했지만 모든 것을 잊으려고 애를 썼다. 스치고 지나가는 창밖을 내다보니 모든 것이 평화로운 풍경이었다. 하지만 수술이 끝나면  내몸의 중요한 장기 하나가 사라진다는 생각을 하니 왠지 불안하고 기분이 언짢았다.       사라진 물건을  다시 찾을 수 있다는 희망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 기대 속에서 지낼 수가 있겠고, 다시 찾는 기쁨을  느낄 기회가 있겠건만  영원히 사라진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아팠다. 한 가지 공포를 버리기 위해 한 가지 중요한 것을 버리는 거야 어쩔 수 없는 노릇이지만 정말 아쉬운 일이었다. 두 가지 다 갖겠다는 것이 욕심이니 한 가지는 버리라는 주님의 뜻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잡념에 싸여 병원 약속 시간을  맞추려고 한참 달리다 보니 속도위반을 한 모양이었다. 경찰 신호에 정차 후 잠시 대화를 나눴지만 어김없이 속도위반 티켓을 주겠다고 했다. 사정을 설명했더니 그나마 가장 벌금이 가벼운 티켓을 받았다.   남의 초조한 마음을 알겠는가. 그것도  다행이라 생각하고 계속 달렸다. 애리조나 피닉스는 라스베이거스보다 1시간이 빠르다. 이른 새벽에 출발했는데도 시간이 촉박했다.     한가로운 피닉스 프리웨이를 달렸다. 양쪽 길가는 낮은 건물들이 옹기종기 있으나  인적은 드물고 자동차만 붐볐다. 길가 건물들 뒤편은 넓고 넓은 들이 한없이 펼쳐져 마음이 확 트이는 기분이었다.   수술은 잘 진행됐다. 깨어나 보니 모든 것이 잘 되었다고 했다. 운전과 안내, 수술 후 일주일간 병원에서 간호까지 한 딸과 사위가 얼마나 고마웠는지 모르겠다.     병원 퇴원 후 집에 돌아왔는데 선글라스를 찾을 길이 없었다. 퇴원할 때 짐을 꼼꼼히 챙겼고 선글라스는  쓰고 돌아온 기억도 나는데….     가방을 샅샅이 뒤져봐도 없고 차 안을 두세 번  찾아봐도 없고, 입고간 재킷 주머니에도 없다. 도대체 어디로 갔을까. 행방불명이다.     선글라스는 두 달 동안 보이지 않았다. 그러다 다른 물건을 찾다 탁자 조그만 박스에서 우연히 발견됐다. 세상에, 언제 여기다 넣었는지 전혀 생각이 안난다. 이럴 수가 있나.   그동안 행방이 묘연한 선글라스 때문에 마음 한편으로 허전하고 섭섭했는데 찾고 보니 얼마나 반가운지 모르겠다. 잃어 버렸을 때의 허전함과 불안한 마음이 한순간에 사라지면서 잃었던 물건에 대한 소중함을 느꼈다.     그렇다. 가진 것들에 대해 늘 곁에 있을 때 그 가치를 모르고  잃어 버린 후에야 그 물건의 중요성과 그 의미를 깨닫는 것이 우리의 삶이 아닌가  생각한다   가수 오승근씨의 노래를 흥얼거려 본다. ‘있을 때 잘해 후회하지 말고.  있을 때 잘해 흔들리지 말고…’ 사랑하는 사람이나 가족이 곁에 있을 때 잘해주지 못하면 후회하니 지금 잘하고 소중히 여기라는  메시지가 아닌가. ‘잃어버림과 되찾음’을 통해 소중함을 아는 법을 체득하게 됐으니 감사한 일이다.   나는 몸의 장기 하나를  잃었다. 그러나 슬퍼하지 않는다. 또 후회하지도 않는다. 다만 내 몸과 내 이웃이, 그리고 주님이 주신 모든 사물에 대해  ‘잃어버림과 되찾음’을 통해 소중함을 깨닫고 감사할  뿐이다. 백인호 / 수필가문예마당 애리조나 피닉스 새벽 수술 병원 퇴원

2026.05.28. 19:51

[문예마당] 오월아! 오월아! 푸르른 오월아!

생명을 움 틔우는 푸르른 오월에   엄마의 자궁을 열고 이 계절에   슬픈 얼굴을 내밀었을   한 작은 아이는     그때부터   온몸으로 밀쳐 내던지는 것을   자연스레 익혀야 했다       왜 오월은 푸르른데   사람들은 검은 얼굴을 하고   내쳐 버리는 걸 반복하는지   그 아이는 어느새   늘 혼자였다       손이 그리운 아이   마음을 토하고 흙을 토하고   배고파 숨을 토해도   손 하나 잡아주는 이 없는   황량한 들판에서 늘 홀로 울었다       쉴 새 없이 오월은 다가 오는데   기댈 계절은 오지 않고   푸르른 오월은 더구나 아니었다   봄과 여름 사이 먹구름 지대한   나날들을 비집고     생채기만 덕지덕지 절규하고 있었다       또 오월은 이제   그렇게 그렇게 푸르른 마음을   펼치려 하는데       아프지 않은 인생 있으랴   눈물 뒤에는 웃을 일도 있는 것을   저 오월이 그래서 푸르다는 걸   알기까지는   기억의 저편에 서서   한 자락의 아름다운 풍경화 그리는 마음으로   가만히 오월을 음미해 보는   자화상으로   오월은 늘 그렇게     저 혼자 울었다.       오월아 오월아 푸르른 오월아. 장정자 / 시인문예마당 여름 사이

2026.05.21. 19:47

[문예마당] 못다 한 우정은 꽃이 되어

남편에게는 여러 명의 절친이 있다. 고등학교 시절 만나 사십 년을 함께해 온 친구들이다. 그중 한 명이 나의 작은 오빠다. 친구가 매제가 되었으니 두 사람의 인연은 더욱 각별해졌다. 무엇보다 미국에 사는 우리를 대신해 남편의 빈자리를 살뜰히 채워 주는 오래된 벗이자 든든한 버팀목이다. 지난 주말, 한국에서 걸려온 오빠의 전화에 남편은 한동안 말을 잇지 못한 채 눈가가 붉어졌다. 놀라 다가서자, 수화기 너머로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조용히 새어 나왔다.   “ㅇㅇ야, 지난달에 ㅇㅇ 사십구재 지냈어.”   믿기 어려운 비보였다. 고교 시절부터 우리 집을 드나들던 그였기에 나 또한 쉽게 받아들일 수 없었다. 넉넉지 않은 형편 속에서도 부모님께 공부로 보답하겠다던 그는, 고교 삼 년 내내 전교 최상위권을 지켜냈다. 누구보다 반듯하고 성실한 사람이었다.   작년 가을, 남편과 함께 한국을 방문했을 때 처음 그의 투병 소식을 들었다. 몇 해 전 대장암이 발견되었지만 수술은 성공적이었고, 한때 건강을 되찾는 듯했다. 삶에 대한 의지가 강했던 그는 힘겨운 항암 치료를 열두 차례나 견뎌냈고, 회사 복직을 준비하던 중 암세포가 폐로 전이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미국에서 온 친구들에게 아픈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다며, 건강한 모습으로 다시 만나자며 다음을 기약했었다. 그러나 결국 더 이상의 치료가 어렵다는 의사의 소견 앞에서 그는 손을 놓았고, 그 약속이 이렇게 끝날 줄은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다.   세속을 벗어나 마지막을 스스로 정리하고 싶었던 걸까. 그는 지리산의 한 사찰에 머물며 템플스테이로 시간을 보냈다. 바쁜 와중에도 오빠는 사흘 내내 그의 곁을 지켰다. 놀라울 만큼 담담했고, 죽음을 앞둔 사람이라고는 믿기 어려울 만큼 평온했다고 한다. 어쩌면 운명을 밀어내기보다 받아들이는 쪽을 택했는지도 모른다. 모든 것을 내려놓은 자리에서, 비로소 평안을 얻은 사람처럼 보였다. 그리고 끝내, 자기 삶의 방향을 스스로 정한 듯했다.   지리산에서 돌아온 뒤, 그는 조용히 이별을 준비했다. 삶의 흔적을 하나둘 덜어낸 뒤 그가 향한 곳은 스위스였다. 가족과 함께한 마지막 여행. 특별할 것 없는 하루들이었지만 그에게는 무엇보다 소중했을 것이다. 사랑하는 이들이 곁에 있는 자리에서 삶의 마침표를 찍었다. 남겨질 사람들을 뒤로한 채 걸어야 했던 길, 그 발걸음의 무게를 어찌 다 헤아릴 수 있을까. 어쩌면 그것은 그가 선택한 가장 고독한 사랑이었을지도 모른다.   유해는 스위스 어딘가에 뿌려졌다. 정확한 지명 대신 위도와 경도만이 기록처럼 전해졌다. 우리는 오랫동안 그의 선택을 이해하려 애썼다. 머리로는 이해한다고 말하면서도, 가슴은 끝내 따라오지 못했다.   존엄한 죽음이란 무엇일까.   살아 있음은 끝까지 붙들어야 하는 것인가.   고통을 멈추는 선택은 과연 비인간적인가.   그 질문들 앞에서 누구도 쉽게 답할 수 없다. 다만 남겨진 사람들의 슬픔만은 어떤 논쟁으로도 쉽게 위로 되지 않는다.   친구들이 마음을 모았다. 그가 가장 좋아하던 백일홍을 마지막으로 머물렀던 지리산 사찰 앞마당에 심기로 했다. 차가운 좌표로만 남겨 둘 수 없어, 고국의 흙과 계절 속에 다시 피워 두고 싶어서다. 뜨거운 햇살에도 쉬이 시들지 않는 백일홍처럼, 그는 오래도록 친구들 곁에 머물 것이다. 예순을 채우지 못한 그의 시간은 해마다 돌아오는 꽃잎이 되어, 못다 한 우정을 다시 피우리라.   바람이 스치면 꽃잎이 가볍게 흔들리겠지. 그때마다 그가 보내온 안부가 풍경 소리처럼 우리 곁을 맴돌 것만 같다. 떠난다는 것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다른 모습으로 머무는 일인지도 모른다. 우리는 그렇게 보이지 않는 자리에서 서로를 오래 기억하며 살아갈 것이다.   김윤희 / 수필가문예마당 우정 수필 지리산 사찰 항암 치료 전교 최상위권

2026.05.21. 19:46

[문예마당] 사 랑

길들이는 일   아닌       서로   물들이는 …       노을       저녁 하늘   잠재우듯 박정일 / 시인문예마당 저녁 하늘

2026.05.14. 18:50

[문예마당] 그리운 어머니

옥빛 모시 치마, 적삼에   날 선 버선 신고   사뿐히 바닷물 위로 걸어오시는   어머니의 환영이 아른거린다       청아한 하늘 아래에서   눈물비를 흘리시는 어머니   그 어머니 품에 안기려   바다 위를 육지처럼 건넨다       언제나 그리운 고향 바다에   어머니 사랑이 파도처럼 넘실거리면   아     어느덧 나는 바다 같은 어머니 품에 안겨   동심의 세계로 나래를 편다       바다와 하늘이 맞닿는     수평선 위에 돛단배 띄워     언제까지나 노 저어 가리라       어머니는 내 마음의 고향   그 품에 안겨 안식하리라       바다   하늘   어머니   하나가 된다 김수영 / 시인문예마당 어머니 어머니 사랑 고향 바다 바닷물 위로

2026.05.14. 18:49

[문예마당] 나의 안식처 ‘데스칸소 가든’

올해 봄, 한 달 새 3번이나 데스칸소 가든에 다녀왔다. 동백꽃을 보기 위해서다. 2월에 비가 많이 와서인지 처음 갔을 때는 동백꽃이 드문드문 피어 있었다. 두번째 갔을 때는 활짝 핀 꽃보다는 꽃봉오리들이 더 많았다. 세 번째 갔을 때야 비로소 만발한 동백꽃을 볼 수 있었다.                     데스칸소 가든은 LA를 넘어 타주에서도 방문하는 관광명소다. LA 다운타운 북쪽 산자락에 있다. 한인이 많이 사는 지역이어서 한인들도 많이 방문한다. 우리 집에서는 차로 10여분 거리라 관광지라기보다 앞마당 같은 느낌이다.               1920년대 초반에는 맨체스터 버디라는 사업가의 개인 소유였다. 그 후 1953년에 LA 카운티에 팔았다고 한다. ‘데스칸소’라는 말은 스페인어로 휴식, 안식이라는 뜻이다.     동백숲, 일본 정원, 장미 정원, 연못, 산책로 등이 잘 조성되어 있다. 중간중간 개울물도 흐르고, 정원 사이사이로 꼬마 기차도 다닌다. 나무 그늘마다 벤치가 있어 한가로이 휴식을 취하기도 한다.  말 그대로 휴식의 공간이자 안식처이다.       데스칸소 가든에서 특히 유명한 것은 동백꽃이다. 4만여 그루의 세계 최대 동백꽃 단지다. 초봄이면 데스칸소 가든과 동백은 어느 쪽이 먼저라 할 것 없이 한 묶음으로 떠오른다. 약 150여 종의 다양한 품종과 빨강, 분홍, 흰색의 동백꽃이 핀다. 성급한 녀석들은 이미 땅바닥에 떨어져 있다.     데스칸소 가든에 동백꽃이 그렇게 많은 이유는 소유주였던 맨체스터 보디의 취향 때문이다. 그는 특히 동백을 좋아해서 전 세계에서 동백을 수집했다고 한다. 일설에는 데스칸소 가든이 개발되기 전, 그곳은 일본인 소유의 동백나무 묘목장이 있었다고 한다. 제2차 세계대전 중 스파이 우려가 있다는 이유로 미국에 거주하는 일본인 강제수용 명령이 떨어졌기 때문에 그는 수용소로 보내지기 전 수십만 그루의 동백나무를 팔았다고 한다. 그때 맨체스터 버디가 시장에 나온 동백나무를 사들여 데스칸소 가든의 기초가 됐다는 슬픈 얘기도 있다.     동백꽃이 지는 모습은 마치 목이 떨어진 듯한 모습으로 느껴진다. 대부분 꽃은 꽃잎이 하나씩 흩어지면서 지는데 동백꽃은 꽃 전체가 통째로 ‘툭’ 떨어진다.     2월 말이나 3월 초에는 다양한 ‘동백꽃 쇼 케이스’가 열린다. 직접 본 적이 있는데 그토록 다양한 모양과 색상의 동백꽃 송이들이 있는 줄 몰랐다.   데스칸소 가든에는 조금씩 다른 산책 코스가 있다. 나는 입구에서 동백숲이 나오는 산책로를 따라 걷는다. 동백숲을 지나 산책로로 연결된 안쪽으로 들어가면 일본 정원이 나온다. 왜 미국 가든에 일본 정원이 있을까 궁금했다. 20세기 초반 남가주에는 많은 일본계 정원사, 조경사들이 활동했다고 한다. 그들이 LA지역 정원 문화에 큰 영향을 미쳤고, 데스칸소 가든에 일본식 정원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졌다는 설이 있다. 일본 정원을 보며 ‘한국식 전통 정원도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라는 부러운 마음이 든다.   일본 정원에서 위쪽으로 더 올라가다 보면 언덕 위에 버디 부부가 거처하던  ‘버디의 집’이 나온다. 그 옆에는 작은 갤러리가 있어 전시회가 열리는데 감상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버디의 집에서 언덕을 내려오다 보면 장미 정원이 나타난다. 약 1600그루의 장미 나무가 있다.  5월에서 6월 사이에는 붉은색, 분홍색, 노란색, 흰색 등 다채로운 색상의 품종이 모여 있어 화려하기 그지없다.  화창한 봄날, 장미 정원 벤치에 앉아 책을 읽는 여인의 모습은 그림 같다. 장미 향이 가득한 정원에서 사진도 찍고 하다 보면 시간 가는 줄 모른다.       데스칸소 가든을 한 바퀴 산책한 후에는 입구에 있는 카페 의자에 앉아 지나다니는 사람들을 바라본다. 모두 표정이 여유롭다. 그들에게는 특별히 시간이 느리게 흐르는 것 같다는 착각이 든다. 테스칸소 가든 특유의 평화로운 분위기가 사람들 얼굴에  그대로 나타나는 것 같다.           1988년 겨울, 미국에 온 후로 두 번 이사했다. 두 번 다 데스칸소 가든과 가까운 지역이었다. 바로 전 살던 집은 걸어서도 갈 수 있는 거리였다. 젊어서는 연 회원권을 사 놓고도 많이 이용하지 못했다. 바빠서라기보다는 자연을 즐길 마음의 여유가 없었던 것이 아닐까.     나이가 들어가며 자연에 대한 관심이 는다. 천천히 걸으며 자연을 감상한다. 자연이 내 삶의 질을 높여주는 것을 느낀다.  젊은 시절에는 일과 인간관계 등에 더 신경을 쓰느라 자연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나이가 들면서는 흙과 풀 냄새를 맡으며 걷는 것이 좋다. 자연의 소리를 듣거나 계절의 변화를 시각적으로 느끼며 걷는 과정을 즐긴다.  세상은 빠르게 변하고 소란스러울 때가 많지만 자연은 때가 되면 어김없이 약속을 지킨다. 잎을 틔우고 꽃이 피는 순리는 한결같다. 변함없는 자연의 모습에서 마음의 위안을 얻게 된다.         요즘은 동네를 천천히 걸으면서 새소리를 듣는다. 다람쥐들이 뒷발로 서서 두 손을 모으고 입을 오물거리는 모습이 너무 귀엽다. 예전에는 그냥 지나쳤던 나무를 눈여겨 보고 길섶의 작은 꽃도 그냥 지나치지 않는다.     앙상했던 가지에서 어느새 연둣빛 싹이 돋고, 화사한 꽃들이 차례대로 피어나는 것이 눈에 보인다. 분홍색 핑크 레이디는 어느새 지고, 동네 곳곳에서 백장미들이 고상한 자태를 뽐낼 준비를 하고 있다. 젊은 시절엔 보이지 않던 미세한 것들이 눈에 들어온다.     ‘내려갈 때 /보았네 /올라갈 때 /보지 못한 그 꽃’.  세월이 흐를수록 고은의 시 ‘그 꽃’ 이  더 큰 울림으로 다가온다. 목표를 향해 바쁘게 올라갈 때는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소중한 가치들이 마음을 비우고 내려오는 길에서야 비로소 눈에 들어온다.       앞만 보고 달려가는 삶 속에서 우리가 놓치고 있는 ‘그 꽃’이 무엇인지 생각하게 한다. 젊은 날, 분주함 속에서 보이지 않던 것들은 항상 우리 곁에 있었던 것임을 깨닫는다. 그 꽃의 존재가 우리 삶의 많은 부분임을 다시 돌아보게 한다. 짧은 시 한 편이 마음속에 조용히 머물다 간다.     데스칸소 가든은 한 번 가보고 마는 곳이 아니다. 일 년 내내 계절마다 바뀌는 꽃들과 나무들이 또 다른 풍경을 만들기 때문이다. 도심의 소란함에서 벗어나 아름답고 평온한 데스칸소 가든과 같은 안식처가 집 가까이 있다는 것은 큰 축복이다. 배광자 / 수필가문예마당 데스칸소 안식처 데스칸소 가든 동백숲 정원 동백꽃 송이들

2026.05.14. 18: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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