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 가슴은 밤 품은 해 퍼지는 햇살로 밥을 짓고 타오르는 노을로 불 지피시는 엄마 종일이 오롯이 어머니 사랑 그 희생 없인 우주가 사막이네 나승희 / 시인문예마당 어머니 어머니 사랑 어머니 가슴
2026.06.04. 18:42
청 모신 물 빛 적삼에 가녀린 몸 감추시고 북녘땅 향할 때 뿌옇게 안개 서리던 눈망울 계신 듯 안 계신 듯 그 입가에 그림자 갇히기 전 먼저 가신 내 할머니 “너희 신의주 고모 한 번만 보고 죽었으면 좋으련만…” 허공을 향해 토해내던 당신의 피맺힌 통곡 오늘도 유월의 하늘을 핏빛으로 붉게 물들인다 유지애 / 시인문예마당 유월 너희 신의주
2026.06.04. 18:42
사십이 다 된 어머니에게 이미 자식 다섯이 있었다. 그녀에게 내가 들어선 것은 달갑지 않았을 것이다. 맏며느리라 시부모를 모시고 시동생 시누이가 각각 셋이나 있었으니까. 내가 세상에 나오자 아버지가 천덕꾸러기 신세를 면하라는 뜻이었는지 ‘미래’ 라는 이름을 지어 주었다. 아름다울 미(美), 올 래(來).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까지 내 이름은 미래였다. 처음 학교에 갔더니 내 이름이 없었다. 대신 정미애(鄭美愛)라는 이름이 있었다. 동사무소 서기였던 막내 삼촌이 간난 여자아이 이름으로 아름답고(美) 사랑스럽다(愛)가 더 나았는지 마음대로 그 이름을 호적에 올린 것이다. 그 후 나는 학교에서 선생님과 반 친구들이 부르는 이름과 가족이나 동네 친구들이 부르는 두 이름을 가지게 되었다. 중학교 때 이사를 했다. 그 동네를 뜨자 나를 미래로 부르는 사람은 가까운 사람들로 한정되었다. 점점 나는 학교에서 부르는 이름으로 알려졌다. 그런데 정작 나 자신은 ‘미래’라는 이름을 비밀스럽고 숨겨진 보물처럼 여기게 되었다. 친한 친구나 마음에 드는 남자들에게 특혜라도 주듯 은밀하게 그 이름을 알려 주고는 했다. 하지만 나는 그 이름을 지키지 못했다. 일찍 사회로 나가 일하게 된 곳은 호텔이었다. 당시 한국사회는 여성의 이름은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호텔에 들락대는 사람들의 수준에 따라 내 위상도 올라가거나 내려갔다. 서울손님들은 나를 미스 정이라 불렀고 지방에서는 정양으로 불렀다. 서울 조선 호텔 예약부에 입사하자 부장이 ‘아그네스 정’라는 이름을 내게 주었다. 그때 조선 호텔은 미국 프렌차이즈 회사가 운영하고 있었다. 함께 일하던 미국인 이사나 매니저들이 한국 직원들 이름을 기억하기도, 부르기도 힘들어했다. 그렇다고 본인에게 물어보지도 않고 하사하듯 영어이름을 만들어 미국 직원들에게 부르기 쉬우라고 던져 준 부장을 나는 좋아하지 않았다. 우리는 일본 제국이 강요한 창씨개명을 거부하고 민족적 전통을 확립하고자 투쟁한 조선인의 후예가 아닌가. 다행히 그 이름은 오래 가지고 있지 않았다. 퇴사하면서 나와 상관이 없게 되었다. 하지만 왜 부장이 내게 아그네스라는 이름을 붙였는지 아직도 모를 일이다. 한 미국 손님이 명찰에 쓰여 있던 나의 영문 이름, M.I.A.E를 ‘마야’로 읽었다. 또 다른 이름이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운명처럼 나는 그 이름을 덥석 물어 버렸다. 그것이 미국까지 나를 밀어붙인 것인지, 따라 왔는지 모를 일이다. 미국에서 나는 ‘마야’였다. 미국인들은 남의 이름을 자기네들이 부르기 쉽도록 바꾸려 들지 않았다. 그들은 사람의 고유 이름을 기억하고 제대로 부르려 노력한다. 그래서 ‘내가 당신의 이름을 올바르게 발음하고 있느냐’고도 묻는다. 세월은 내게 또 다른 이름을 내밀었다. 미국에서 새로운 직장을 찾아 옮겨야 할 때가 되자 다시 이름이 바뀔 위기가 온 것이다. 부동산 에이전트 라이선스를 따고 새 일에 대한 기대에 부풀어 있었다. 그때는 한국 신문에 에이전트의 사진과 함께 가명으로 부동산 광고를 낼 수 있었다. 얼마 후 광고에 에이전트의 법적 이름을 사용하지 않으면 안 되도록 법이 바뀌었다. 한인 사장이 내게 광고에 낼 이름을 다른 것으로 바꾸라고 했다. 미국에서 15년 넘도록 사용한 내 이름 ‘마야’는 인류에서 망해 사라진 마야 문명의 잔재라고 했다. 그 이름으로는 부동산업계에서 결코 성공할 수 없을 것이란다. 내게 아그네스라는 이름을 던져 주었던 부장을 다시 만난 기분이었다. 나는 무슨 이름으로 바꾸어야 하겠느냐고 그에게 되물었다. 사장이 ‘에이미’라는 이름이 좋을 것 같다고 했다. 나는 또 그 이유가 뭐냐고 물었다. ‘사장의 촉’이라고 했다. 분명 부동산 에이전트로 성공하게 될 것이란다. 나는 단호하게 NO! 라고 대답했다. 그의 촉이라는 것이 찬란했던 마야 문명보다 훨씬 더 형편없게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1986년, 미국에 도착했을 때 내 손에는 한국정부에서 발급해 준 여권이 들려있었다. 그 여권 속에 이미 내 성씨(姓氏)가 ‘애들란드(Edlund)’로 바뀌어져 있었다. 나의 성이 바뀔 것이라고 생각해 본적이 없었다. 나는 가족을 철저히 떠나야 했는지 모른다. 이렇게 멀리 와야 내 지난 허물을 벗을 수 있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인생이란 누구도 예측할 수 없다. 살다보니 이름도 바뀌고 성까지 바뀌었다. 결혼한 한국여자에게 시집 귀신이라는 별명이 붙는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며느리에게 성씨를 내주지 않는다. 한국 며느리들은 친정 성을 가지고 있지만 친정으로 돌아 갈 수도 없었다. 친정 대문은 그녀들에게 다시 열리지 않았다. 결국 그들은 어떤 곳에서도 존재하지 않았다. 떠돌이 같은 한국여성의 운명이었다. 애들란드 가문이 그들의 성씨를 내주며 나를 가족일원으로 맞아 들였다. 나는 더 이상 정양도 아니고 미스 정도 아닌 미시즈 애들란드(Mrs. Miae Edlund)다. 성씨까지 받았으니 진정 이집 귀신이 된 것이다. 이제 나는 죽어 구천을 떠돌지 않아도 된다. 갑자기 내 인생에 아름다운 것이 도착하기를 바란다며 ‘미래’라는 이름을 지어 주었던 아버지가 생각난다. 그 이름은 어떤 서류에도 없다. 이름을 지으며 늦둥이 막내의 얼굴을 보며 미소 지었을 내 아버지. 자신이 지어 준 딸의 이름이 속수무책으로 바뀐 것을 알았을 때 정말 그는 아무렇지 않았을까. 왜 이제야 섭섭했을 아버지의 마음을 달래고 싶어지는 것일까. “아버지, 제가 비록 ‘미래’라는 이름은 잃어 버렸지만 ‘마야’라는 이름에 당신의 성씨를 붙이겠습니다.” 미국에서 ‘마야’라는 이름 또한 별명이었고 가명이었고 애칭이었다. 나는 ‘마야 정’이라는 이름을 나의 필명으로 정했다. 그는 한국과 미국에서 치열한 삶을 살아 온 이야기를 쓴 인물이다. 나는 그 안에 존재한다. 마야 정 / 수필가문예마당 변천사 이름 영문 이름 법적 이름 고유 이름
2026.06.04. 18:41
세월에 풍상 큰비 지나가고 강물은 물길 따라 휘돌아가고 여름 초록이 인사를 한다 물이 가야 할 곳 찾아가듯 높은 절경 위로 감춰둔 기억 품어낸다 구름도 쉬어가는 오후 마을과 고을 이어지는 길 따라 그리움 품고 살아온 여정 산도 지나고 마을도 지나가다 잠시 길을 멈춘다 마음속 하얀 살결 세찬 바람에 걸려 몰려온 구름 흔적 수정같은 그림 호수에 머물고 믿음에 기적 옥쟁반에 올리워 놓는다 오늘에 고난 내일은 희망 날개 달고 나는 가리라 감사의 길 찾아가리라 권온자 / 시인문예마당 기적 옥쟁반 희망 날개 절경 위로
2026.05.28. 19:53
뒤뜰 사과나무 가지 끝에 푸른 열매 일곱 개 제 몸무게를 견디며 매달려 있었다 그녀는 그 푸른 껍질 속에 붉은 노을이 차오를 때까지 두어 달을 말없이 기다렸다 누군가 다녀간 후 우리 가을은 통째로 사라졌다 가슴 아파하는 그녀에게 붉은 사과를 사러 가자고 했다 내년에는 이렇게 써 붙여야지 이 나무에는 사람의 마음이 익어 가니 부디 꺽지 마시오 윤덕환 / 시인문예마당 뒤뜰 사과나무 우리 가을
2026.05.28. 19:52
오래전 급히 출근하려고 허둥지둥 자동차 키를 찾았지만, 도저히 찾을 수가 없었다. 알고 보니 아내가 내 차 키까지 갖고 출근한 것이었다. 잠시 화가 나기도 했지만 다행히 잃어버리지 않았다는 기쁨이 더 컸다. 라스베이거스에 살다 보니 종종 카지노 호텔을 가게 된다. 그런데 돌산 기슭 동네 한가운데 있는 한 카지노에는 유독 시니어들이 많이 모여든다. 그러다 보니 지팡이를 짚고 오는 사람, 쓰러질 듯 비틀대며 걸어 오는 사람, 휠체어를 이용하는 사람, 심지어는 산소통을 달고 오는 사람도 있다. 고독을 해소하고 병마도 잊기 위해 식사를 하고 이야기를 나누고 게임도 즐기는 것 같다. 건강한 사람들이야 어찌 그들의 속마음을 이해 하겠는가. 게임을 하다 보면 어쩌다 약간의 공짜 돈이 생긴다. 그렇게 기분이 좋을 수 없다. 누구나 비슷할 것이다. 잃어버린 것은 생각지 않고 한동안 기분 좋은 시간을 맛본다는 사실을 누가 부정하겠는가. 잃어버렸던 돈을 되찾았다는 기분일지 모르지만 되찾는다는 것은 기쁜 일이 아닐 수 없고, 소중함도 깨우쳐 주는 계기가 아닌가 생각해 본다, 이른 새벽 수술을 위해 딸 내외의 보호를 받으며 자동차로 라스베이거스 집을 출발해 애리조나 피닉스 소재 ‘메이어 크리닉’ 병원으로 향했다. 창밖을 내다보며 머릿속은 이런저런 생각에 착잡했지만 모든 것을 잊으려고 애를 썼다. 스치고 지나가는 창밖을 내다보니 모든 것이 평화로운 풍경이었다. 하지만 수술이 끝나면 내몸의 중요한 장기 하나가 사라진다는 생각을 하니 왠지 불안하고 기분이 언짢았다. 사라진 물건을 다시 찾을 수 있다는 희망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 기대 속에서 지낼 수가 있겠고, 다시 찾는 기쁨을 느낄 기회가 있겠건만 영원히 사라진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아팠다. 한 가지 공포를 버리기 위해 한 가지 중요한 것을 버리는 거야 어쩔 수 없는 노릇이지만 정말 아쉬운 일이었다. 두 가지 다 갖겠다는 것이 욕심이니 한 가지는 버리라는 주님의 뜻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잡념에 싸여 병원 약속 시간을 맞추려고 한참 달리다 보니 속도위반을 한 모양이었다. 경찰 신호에 정차 후 잠시 대화를 나눴지만 어김없이 속도위반 티켓을 주겠다고 했다. 사정을 설명했더니 그나마 가장 벌금이 가벼운 티켓을 받았다. 남의 초조한 마음을 알겠는가. 그것도 다행이라 생각하고 계속 달렸다. 애리조나 피닉스는 라스베이거스보다 1시간이 빠르다. 이른 새벽에 출발했는데도 시간이 촉박했다. 한가로운 피닉스 프리웨이를 달렸다. 양쪽 길가는 낮은 건물들이 옹기종기 있으나 인적은 드물고 자동차만 붐볐다. 길가 건물들 뒤편은 넓고 넓은 들이 한없이 펼쳐져 마음이 확 트이는 기분이었다. 수술은 잘 진행됐다. 깨어나 보니 모든 것이 잘 되었다고 했다. 운전과 안내, 수술 후 일주일간 병원에서 간호까지 한 딸과 사위가 얼마나 고마웠는지 모르겠다. 병원 퇴원 후 집에 돌아왔는데 선글라스를 찾을 길이 없었다. 퇴원할 때 짐을 꼼꼼히 챙겼고 선글라스는 쓰고 돌아온 기억도 나는데…. 가방을 샅샅이 뒤져봐도 없고 차 안을 두세 번 찾아봐도 없고, 입고간 재킷 주머니에도 없다. 도대체 어디로 갔을까. 행방불명이다. 선글라스는 두 달 동안 보이지 않았다. 그러다 다른 물건을 찾다 탁자 조그만 박스에서 우연히 발견됐다. 세상에, 언제 여기다 넣었는지 전혀 생각이 안난다. 이럴 수가 있나. 그동안 행방이 묘연한 선글라스 때문에 마음 한편으로 허전하고 섭섭했는데 찾고 보니 얼마나 반가운지 모르겠다. 잃어 버렸을 때의 허전함과 불안한 마음이 한순간에 사라지면서 잃었던 물건에 대한 소중함을 느꼈다. 그렇다. 가진 것들에 대해 늘 곁에 있을 때 그 가치를 모르고 잃어 버린 후에야 그 물건의 중요성과 그 의미를 깨닫는 것이 우리의 삶이 아닌가 생각한다 가수 오승근씨의 노래를 흥얼거려 본다. ‘있을 때 잘해 후회하지 말고. 있을 때 잘해 흔들리지 말고…’ 사랑하는 사람이나 가족이 곁에 있을 때 잘해주지 못하면 후회하니 지금 잘하고 소중히 여기라는 메시지가 아닌가. ‘잃어버림과 되찾음’을 통해 소중함을 아는 법을 체득하게 됐으니 감사한 일이다. 나는 몸의 장기 하나를 잃었다. 그러나 슬퍼하지 않는다. 또 후회하지도 않는다. 다만 내 몸과 내 이웃이, 그리고 주님이 주신 모든 사물에 대해 ‘잃어버림과 되찾음’을 통해 소중함을 깨닫고 감사할 뿐이다. 백인호 / 수필가문예마당 애리조나 피닉스 새벽 수술 병원 퇴원
2026.05.28. 19:51
생명을 움 틔우는 푸르른 오월에 엄마의 자궁을 열고 이 계절에 슬픈 얼굴을 내밀었을 한 작은 아이는 그때부터 온몸으로 밀쳐 내던지는 것을 자연스레 익혀야 했다 왜 오월은 푸르른데 사람들은 검은 얼굴을 하고 내쳐 버리는 걸 반복하는지 그 아이는 어느새 늘 혼자였다 손이 그리운 아이 마음을 토하고 흙을 토하고 배고파 숨을 토해도 손 하나 잡아주는 이 없는 황량한 들판에서 늘 홀로 울었다 쉴 새 없이 오월은 다가 오는데 기댈 계절은 오지 않고 푸르른 오월은 더구나 아니었다 봄과 여름 사이 먹구름 지대한 나날들을 비집고 생채기만 덕지덕지 절규하고 있었다 또 오월은 이제 그렇게 그렇게 푸르른 마음을 펼치려 하는데 아프지 않은 인생 있으랴 눈물 뒤에는 웃을 일도 있는 것을 저 오월이 그래서 푸르다는 걸 알기까지는 기억의 저편에 서서 한 자락의 아름다운 풍경화 그리는 마음으로 가만히 오월을 음미해 보는 자화상으로 오월은 늘 그렇게 저 혼자 울었다. 오월아 오월아 푸르른 오월아. 장정자 / 시인문예마당 여름 사이
2026.05.21. 19:47
남편에게는 여러 명의 절친이 있다. 고등학교 시절 만나 사십 년을 함께해 온 친구들이다. 그중 한 명이 나의 작은 오빠다. 친구가 매제가 되었으니 두 사람의 인연은 더욱 각별해졌다. 무엇보다 미국에 사는 우리를 대신해 남편의 빈자리를 살뜰히 채워 주는 오래된 벗이자 든든한 버팀목이다. 지난 주말, 한국에서 걸려온 오빠의 전화에 남편은 한동안 말을 잇지 못한 채 눈가가 붉어졌다. 놀라 다가서자, 수화기 너머로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조용히 새어 나왔다. “ㅇㅇ야, 지난달에 ㅇㅇ 사십구재 지냈어.” 믿기 어려운 비보였다. 고교 시절부터 우리 집을 드나들던 그였기에 나 또한 쉽게 받아들일 수 없었다. 넉넉지 않은 형편 속에서도 부모님께 공부로 보답하겠다던 그는, 고교 삼 년 내내 전교 최상위권을 지켜냈다. 누구보다 반듯하고 성실한 사람이었다. 작년 가을, 남편과 함께 한국을 방문했을 때 처음 그의 투병 소식을 들었다. 몇 해 전 대장암이 발견되었지만 수술은 성공적이었고, 한때 건강을 되찾는 듯했다. 삶에 대한 의지가 강했던 그는 힘겨운 항암 치료를 열두 차례나 견뎌냈고, 회사 복직을 준비하던 중 암세포가 폐로 전이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미국에서 온 친구들에게 아픈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다며, 건강한 모습으로 다시 만나자며 다음을 기약했었다. 그러나 결국 더 이상의 치료가 어렵다는 의사의 소견 앞에서 그는 손을 놓았고, 그 약속이 이렇게 끝날 줄은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다. 세속을 벗어나 마지막을 스스로 정리하고 싶었던 걸까. 그는 지리산의 한 사찰에 머물며 템플스테이로 시간을 보냈다. 바쁜 와중에도 오빠는 사흘 내내 그의 곁을 지켰다. 놀라울 만큼 담담했고, 죽음을 앞둔 사람이라고는 믿기 어려울 만큼 평온했다고 한다. 어쩌면 운명을 밀어내기보다 받아들이는 쪽을 택했는지도 모른다. 모든 것을 내려놓은 자리에서, 비로소 평안을 얻은 사람처럼 보였다. 그리고 끝내, 자기 삶의 방향을 스스로 정한 듯했다. 지리산에서 돌아온 뒤, 그는 조용히 이별을 준비했다. 삶의 흔적을 하나둘 덜어낸 뒤 그가 향한 곳은 스위스였다. 가족과 함께한 마지막 여행. 특별할 것 없는 하루들이었지만 그에게는 무엇보다 소중했을 것이다. 사랑하는 이들이 곁에 있는 자리에서 삶의 마침표를 찍었다. 남겨질 사람들을 뒤로한 채 걸어야 했던 길, 그 발걸음의 무게를 어찌 다 헤아릴 수 있을까. 어쩌면 그것은 그가 선택한 가장 고독한 사랑이었을지도 모른다. 유해는 스위스 어딘가에 뿌려졌다. 정확한 지명 대신 위도와 경도만이 기록처럼 전해졌다. 우리는 오랫동안 그의 선택을 이해하려 애썼다. 머리로는 이해한다고 말하면서도, 가슴은 끝내 따라오지 못했다. 존엄한 죽음이란 무엇일까. 살아 있음은 끝까지 붙들어야 하는 것인가. 고통을 멈추는 선택은 과연 비인간적인가. 그 질문들 앞에서 누구도 쉽게 답할 수 없다. 다만 남겨진 사람들의 슬픔만은 어떤 논쟁으로도 쉽게 위로 되지 않는다. 친구들이 마음을 모았다. 그가 가장 좋아하던 백일홍을 마지막으로 머물렀던 지리산 사찰 앞마당에 심기로 했다. 차가운 좌표로만 남겨 둘 수 없어, 고국의 흙과 계절 속에 다시 피워 두고 싶어서다. 뜨거운 햇살에도 쉬이 시들지 않는 백일홍처럼, 그는 오래도록 친구들 곁에 머물 것이다. 예순을 채우지 못한 그의 시간은 해마다 돌아오는 꽃잎이 되어, 못다 한 우정을 다시 피우리라. 바람이 스치면 꽃잎이 가볍게 흔들리겠지. 그때마다 그가 보내온 안부가 풍경 소리처럼 우리 곁을 맴돌 것만 같다. 떠난다는 것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다른 모습으로 머무는 일인지도 모른다. 우리는 그렇게 보이지 않는 자리에서 서로를 오래 기억하며 살아갈 것이다. 김윤희 / 수필가문예마당 우정 수필 지리산 사찰 항암 치료 전교 최상위권
2026.05.21. 19:46
길들이는 일 아닌 서로 물들이는 … 노을 저녁 하늘 잠재우듯 박정일 / 시인문예마당 저녁 하늘
2026.05.14. 18:50
옥빛 모시 치마, 적삼에 날 선 버선 신고 사뿐히 바닷물 위로 걸어오시는 어머니의 환영이 아른거린다 청아한 하늘 아래에서 눈물비를 흘리시는 어머니 그 어머니 품에 안기려 바다 위를 육지처럼 건넨다 언제나 그리운 고향 바다에 어머니 사랑이 파도처럼 넘실거리면 아 어느덧 나는 바다 같은 어머니 품에 안겨 동심의 세계로 나래를 편다 바다와 하늘이 맞닿는 수평선 위에 돛단배 띄워 언제까지나 노 저어 가리라 어머니는 내 마음의 고향 그 품에 안겨 안식하리라 바다 하늘 어머니 하나가 된다 김수영 / 시인문예마당 어머니 어머니 사랑 고향 바다 바닷물 위로
2026.05.14. 18:49
올해 봄, 한 달 새 3번이나 데스칸소 가든에 다녀왔다. 동백꽃을 보기 위해서다. 2월에 비가 많이 와서인지 처음 갔을 때는 동백꽃이 드문드문 피어 있었다. 두번째 갔을 때는 활짝 핀 꽃보다는 꽃봉오리들이 더 많았다. 세 번째 갔을 때야 비로소 만발한 동백꽃을 볼 수 있었다. 데스칸소 가든은 LA를 넘어 타주에서도 방문하는 관광명소다. LA 다운타운 북쪽 산자락에 있다. 한인이 많이 사는 지역이어서 한인들도 많이 방문한다. 우리 집에서는 차로 10여분 거리라 관광지라기보다 앞마당 같은 느낌이다. 1920년대 초반에는 맨체스터 버디라는 사업가의 개인 소유였다. 그 후 1953년에 LA 카운티에 팔았다고 한다. ‘데스칸소’라는 말은 스페인어로 휴식, 안식이라는 뜻이다. 동백숲, 일본 정원, 장미 정원, 연못, 산책로 등이 잘 조성되어 있다. 중간중간 개울물도 흐르고, 정원 사이사이로 꼬마 기차도 다닌다. 나무 그늘마다 벤치가 있어 한가로이 휴식을 취하기도 한다. 말 그대로 휴식의 공간이자 안식처이다. 데스칸소 가든에서 특히 유명한 것은 동백꽃이다. 4만여 그루의 세계 최대 동백꽃 단지다. 초봄이면 데스칸소 가든과 동백은 어느 쪽이 먼저라 할 것 없이 한 묶음으로 떠오른다. 약 150여 종의 다양한 품종과 빨강, 분홍, 흰색의 동백꽃이 핀다. 성급한 녀석들은 이미 땅바닥에 떨어져 있다. 데스칸소 가든에 동백꽃이 그렇게 많은 이유는 소유주였던 맨체스터 보디의 취향 때문이다. 그는 특히 동백을 좋아해서 전 세계에서 동백을 수집했다고 한다. 일설에는 데스칸소 가든이 개발되기 전, 그곳은 일본인 소유의 동백나무 묘목장이 있었다고 한다. 제2차 세계대전 중 스파이 우려가 있다는 이유로 미국에 거주하는 일본인 강제수용 명령이 떨어졌기 때문에 그는 수용소로 보내지기 전 수십만 그루의 동백나무를 팔았다고 한다. 그때 맨체스터 버디가 시장에 나온 동백나무를 사들여 데스칸소 가든의 기초가 됐다는 슬픈 얘기도 있다. 동백꽃이 지는 모습은 마치 목이 떨어진 듯한 모습으로 느껴진다. 대부분 꽃은 꽃잎이 하나씩 흩어지면서 지는데 동백꽃은 꽃 전체가 통째로 ‘툭’ 떨어진다. 2월 말이나 3월 초에는 다양한 ‘동백꽃 쇼 케이스’가 열린다. 직접 본 적이 있는데 그토록 다양한 모양과 색상의 동백꽃 송이들이 있는 줄 몰랐다. 데스칸소 가든에는 조금씩 다른 산책 코스가 있다. 나는 입구에서 동백숲이 나오는 산책로를 따라 걷는다. 동백숲을 지나 산책로로 연결된 안쪽으로 들어가면 일본 정원이 나온다. 왜 미국 가든에 일본 정원이 있을까 궁금했다. 20세기 초반 남가주에는 많은 일본계 정원사, 조경사들이 활동했다고 한다. 그들이 LA지역 정원 문화에 큰 영향을 미쳤고, 데스칸소 가든에 일본식 정원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졌다는 설이 있다. 일본 정원을 보며 ‘한국식 전통 정원도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라는 부러운 마음이 든다. 일본 정원에서 위쪽으로 더 올라가다 보면 언덕 위에 버디 부부가 거처하던 ‘버디의 집’이 나온다. 그 옆에는 작은 갤러리가 있어 전시회가 열리는데 감상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버디의 집에서 언덕을 내려오다 보면 장미 정원이 나타난다. 약 1600그루의 장미 나무가 있다. 5월에서 6월 사이에는 붉은색, 분홍색, 노란색, 흰색 등 다채로운 색상의 품종이 모여 있어 화려하기 그지없다. 화창한 봄날, 장미 정원 벤치에 앉아 책을 읽는 여인의 모습은 그림 같다. 장미 향이 가득한 정원에서 사진도 찍고 하다 보면 시간 가는 줄 모른다. 데스칸소 가든을 한 바퀴 산책한 후에는 입구에 있는 카페 의자에 앉아 지나다니는 사람들을 바라본다. 모두 표정이 여유롭다. 그들에게는 특별히 시간이 느리게 흐르는 것 같다는 착각이 든다. 테스칸소 가든 특유의 평화로운 분위기가 사람들 얼굴에 그대로 나타나는 것 같다. 1988년 겨울, 미국에 온 후로 두 번 이사했다. 두 번 다 데스칸소 가든과 가까운 지역이었다. 바로 전 살던 집은 걸어서도 갈 수 있는 거리였다. 젊어서는 연 회원권을 사 놓고도 많이 이용하지 못했다. 바빠서라기보다는 자연을 즐길 마음의 여유가 없었던 것이 아닐까. 나이가 들어가며 자연에 대한 관심이 는다. 천천히 걸으며 자연을 감상한다. 자연이 내 삶의 질을 높여주는 것을 느낀다. 젊은 시절에는 일과 인간관계 등에 더 신경을 쓰느라 자연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나이가 들면서는 흙과 풀 냄새를 맡으며 걷는 것이 좋다. 자연의 소리를 듣거나 계절의 변화를 시각적으로 느끼며 걷는 과정을 즐긴다. 세상은 빠르게 변하고 소란스러울 때가 많지만 자연은 때가 되면 어김없이 약속을 지킨다. 잎을 틔우고 꽃이 피는 순리는 한결같다. 변함없는 자연의 모습에서 마음의 위안을 얻게 된다. 요즘은 동네를 천천히 걸으면서 새소리를 듣는다. 다람쥐들이 뒷발로 서서 두 손을 모으고 입을 오물거리는 모습이 너무 귀엽다. 예전에는 그냥 지나쳤던 나무를 눈여겨 보고 길섶의 작은 꽃도 그냥 지나치지 않는다. 앙상했던 가지에서 어느새 연둣빛 싹이 돋고, 화사한 꽃들이 차례대로 피어나는 것이 눈에 보인다. 분홍색 핑크 레이디는 어느새 지고, 동네 곳곳에서 백장미들이 고상한 자태를 뽐낼 준비를 하고 있다. 젊은 시절엔 보이지 않던 미세한 것들이 눈에 들어온다. ‘내려갈 때 /보았네 /올라갈 때 /보지 못한 그 꽃’. 세월이 흐를수록 고은의 시 ‘그 꽃’ 이 더 큰 울림으로 다가온다. 목표를 향해 바쁘게 올라갈 때는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소중한 가치들이 마음을 비우고 내려오는 길에서야 비로소 눈에 들어온다. 앞만 보고 달려가는 삶 속에서 우리가 놓치고 있는 ‘그 꽃’이 무엇인지 생각하게 한다. 젊은 날, 분주함 속에서 보이지 않던 것들은 항상 우리 곁에 있었던 것임을 깨닫는다. 그 꽃의 존재가 우리 삶의 많은 부분임을 다시 돌아보게 한다. 짧은 시 한 편이 마음속에 조용히 머물다 간다. 데스칸소 가든은 한 번 가보고 마는 곳이 아니다. 일 년 내내 계절마다 바뀌는 꽃들과 나무들이 또 다른 풍경을 만들기 때문이다. 도심의 소란함에서 벗어나 아름답고 평온한 데스칸소 가든과 같은 안식처가 집 가까이 있다는 것은 큰 축복이다. 배광자 / 수필가문예마당 데스칸소 안식처 데스칸소 가든 동백숲 정원 동백꽃 송이들
2026.05.14. 18:48
며칠 전, 붓글씨를 쓰기 위해 사자성어(四字成語) 책을 읽다가 ‘유단취장(有短取長)’이라는 말이 마음에 깊이 와 닿았다. 한문의 네 글자로 이루어진 사자성어 가운데는 역사적 사건, 신화, 철학적 사유가 응축된 것들이 많아 유익하다. ‘유단취장’은 ‘단점이 있더라도 장점을 취한다’는 뜻이다. 인간을 비롯해 세상의 모든 것들은 장단점을 갖고 있지만, 단점만 보고 평가하기보다는 그 속에 있는 장점을 배우면 자신에게 도움이 된다는 가르침의 글이다. 조선 후기 실학자 성호 이익 선생의 일화는 이 말의 의미를 잘 드러낸다. 이익은 사회의 모순을 비판하고 혁신적인 개혁안을 제시해 실학(實學)의 중조(中祖)라 불리는 인물이다. 평생 관직에 나가지 않고 학문에만 전념한 ‘재야의 지식인’이었다. 성호 선생 집 앞마당에는 두 그루의 감나무가 있었다. 한 그루는 열매가 드문드문 열리는 대봉감 나무였고, 다른 한 그루는 열매는 많이 열리지만 맛이 떫은 땡감 나무였다. 게다가 여름이면 그늘이 너무 짙어 마당이 늘 축축하고, 더욱이 장마철이면 햇빛이 들지 않아 늘 젖어 있었다. 성호 선생은 두 나무 모두 마음에 들지 않아 베어 버리려 했다. 그때 부인이 나서 선생을 말리며 말했다. “비록 몇 개 열리지 않아도 대봉감은 제사상에 올리기에 귀한 감이고, 떫은 땡감은 잘 말리면 곶감이나 감 말랭이로 온 식구가 맛있게 먹을 수 있지 않습니까?” 부인의 말을 듣고 보니 누구의 생각이 틀린 것이 아니라, 무엇에 무게를 두느냐의 차이였다. 성호 선생은 나무의 ‘불편함(단점)’을 먼저 보았고, 부인은 나무의 ‘유용함(장점)’을 생각한 것이다. 밉게 보면 못나 보이고 좋게 보면 예뻐 보이듯, 같은 사물이라도 보는 사람의 마음가짐에 따라 그 가치는 천차만별로 달라진다. 우리는 크고 작은 모임에서 서로 다른 성격과 경험을 가진 사람들과 만난다. 어떤 이는 성격이 급하고, 어떤 이는 말이 거칠고, 어떤 이는 나와 생각이 다르다. 그런데 많은 경우 사람의 단점을 먼저 보게 된다. 세상에 단점만 있는 사람은 없다. 단점이 있으면 반드시 장점도 있다. 하지만 장점은 보려 하지 않고, 눈에 띄는 단점만 지적하며 그 사람을 평가하려 한다. 조금만 마음을 낮추어 상대방을 바라보면 그 사람에게도 미처 보지 못했던 장점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남의 허물을 헤아리기보다 그 사람의 장점을 찾으려 할 때, 우리의 마음은 조금 더 넓어지고 삶도 더 깊어진다. 불편함을 베어내려고 도끼를 들었던 조급함을 내려놓고, 쓰임새를 찾아 바구니를 들었던 부인의 마음을 배울 마음의 자세가 필요하다. ‘유단취장’은 남을 위한 예절을 넘어 자기 수양의 과정이기도 하다. 타인의 장점을 인정하는 순간 나의 시야는 넓어지고 마음의 그릇은 더 깊어진다. 상대방의 장점은 나에게 배움이 되고, 서로 좋은 점들이 모여 더 큰 지혜를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이러한 마음은 서로의 관계를 부드럽게 하고, 더 나은 사람으로 성숙시킨다. 남의 장점을 취하고 나의 부족함을 채우려는 겸손한 태도야말로 평생 실천해야 할 삶의 배움이며 지혜다. 구성원들이 이러한 마음을 갖게 된다면 모임의 분위기는 자연스럽게 부드러워지고, 상대방을 존중하는 마음이 싹틀 것이며, 한층 성숙한 모임이 될 것이다. ‘유단취장’의 지혜는 비단 인간관계에만 머물지 않는다. 더 넓게는 사회, 특히 갈등이 끊이지 않는 오늘날의 정치 현실에도 적용이 가능하다고 본다. 정치란 서로 다른 생각과 배경을 지닌 사람들이 모여, 국민을 위한 더 나은 길을 찾기 위해 지혜를 나누는 과정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다양한 의견이 부딪히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지만, 그 속에서 공통의 해답을 찾아가는 것이 정치의 본질일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그 본뜻에서 점점 멀어지고 있는 듯하다. 상대의 약점을 드러내고, 차이를 확대하며, 때로는 갈등을 이용하는 모습들이 눈에 띈다. 서로를 이해하기보다는 이기려 하고, 함께 나아가기보다는 네 편, 내 편 나누려는 태도가 사회의 균열을 더욱 깊게 만들고 있다. 만일 각 정당의 당리당략의 차이를 인정하고 국민을 위한 공동의 이익을 향해 나아간다면 어떨까? 서로의 부족함은 그대로 두되, 각자의 강점을 취해 하나로 모은다면, 그것은 분열이 아닌 조화로 이어질 것이다. 그리고 그 조화는 결국 국민 전체의 행복이라는 결실로 나타나지 않을까? 어쩌면 오늘날 우리 사회가 필요로 하는 것은 더 많은 주장이나 더 강한 목소리가 아니라, 서로의 장점을 발견하고 그것을 함께 키워가는 마음일지도 모른다. 그 마음이 모일 때, 비로소 갈등은 줄어들고 공동의 미래가 열릴 것이다. 오늘도 나는 조용히 내 마음의 뜰을 거닐며 자문해 본다. 나는 오늘 누군가를 향해 도끼를 들었는가, 아니면 장점을 담을 바구니를 들었는가. 사자성어 책을 덮으며, 내 삶의 뜰에도 ‘유단취장’의 향기가 가득하기를 소망해 본다. ‘유한흥국(流汗興國)’은 땀을 흘려 나라를 일으킨다는 뜻이다. 개인의 삶도, 사회의 발전도, 나라의 번영도 결국은 보이지 않는 땀 위에 세워진다. 뜨거운 햇살 아래에서 흘리는 땀, 묵묵히 자기 자리를 지키며 흘리는 땀, 아무도 알아주지 않아도 성실히 이어가는 노력의 땀…. 그런 작은 땀방울들이 모여 세상을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게 한다. 하루하루 정직하게 흘리는 땀은 비록 눈에 띄지 않을지라도 세상을 지탱하는 조용한 힘이 된다. 그러나 세상을 이루는 또 하나의 힘이 있다. 그것은 서로에게서 배우는 마음이다. 이명렬 / 경영학 박사문예마당 바구니 땡감 성호 선생 성호 이익 사자성어 가운데
2026.05.07. 19:06
‘STOP’ 사인 앞에 멈췄다. 도로의 정지 표지는 잠시 숨을 고르는 자리다. 그러나 삶이 건네는 ‘STOP’ 사인은 때로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는, 절벽 앞 선고와 같다. 인간의 의지로는 어찌할 수 없는 불가항력적인 신호이며, 평온하던 일상을 침범하는 불청객이다. 며칠 전, 친구의 전화를 받고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한참을 망연자실하게 서 있는데 가슴 저 밑에서부터 형언할 수 없는 통증이 차올랐다. 아직 인생의 꽃을 한창 피울, 동생 같은 60대 친구의 폐암 소식은 너무도 잔인한 정지 신호였다. 삶의 한 페이지가 날카로운 칼날에 베여 소리도 없이 잘려 버린 것만 같았다. 가족을 위해, 자신의 소명을 위해 쉼 없이 달려온 그녀의 엔진이 강제로 꺼지는 순간, 암이라는 ‘STOP’ 사인은 그녀가 정성껏 설계해온 일상의 지도를 단숨에 지워버렸다. 그녀의 떨리는 목소리를 들으며, 나는 16년 전 내 앞을 가로막았던 ‘STOP’ 사인을 떠올렸다. 대장암이었다. 그건 단순한 건강의 위기가 아니라, 삶의 방향과 속도를 모두 바꾸라는 엄중한 명령이었다. 가쁘게 달려오던 나는 그 자리에서 속수무책으로 멈췄다. 멈춤은 역설적으로 처음으로 내면을 깊이 들여다보게 한 처절하면서도 고귀한 성찰의 시간이었다. 투병하며 나는 ‘살아 있음’ 그 자체의 무게를 다시 배웠다. 당시 나는 가정폭력 피해 여성 사역인 ‘푸른 초장의 집’을 운영하며 하루를 분 단위로 쪼개 현장에서 쓰고 있었다. 쉘터(Shelter)에 들어오는 이들이 넘쳐나 수용 시설이 부족해지면, 정원 외 인원들은 어쩔 수 없이 다른 쉘터로 보내야 했다. 나는 한인 여성들을 찾아가 상담과 교육을 통역하며 그들의 부서진 삶을 보듬느라 내 몸 돌볼 겨를이 없었다. 쉘터의 일상은 늘 살얼음판 같았다. 입주한 가정 중에는 어린 아들이 아빠에게 보고 싶다며 연락하는 바람에 은신처가 노출돼 쫓겨나는 비극도 있었다. 어떤 가정은 안전을 위해 먼 곳의 쉘터로 연결해주었음에도 끈질기게 추적한 남편에게 결국 발각되기도 했다. 쉘터에서 쫓겨난 후 라스베이거스로 끌려가던 중 남편의 총에 맞아 사망했다는 소식이 신문에 크게 보도되던 날, 나는 차가운 활자 앞에서 한동안 숨을 쉴 수 없었다. 가해자의 집착은 늘 상상을 초월했다. 외부 연락을 철저히 금지하는 규칙을 세우고 엄격히 교육했음에도 생사의 갈림길에서 발생하는 불행한 사건들은 늘 영혼에 깊은 생채기를 남겼다. 그토록 치열한 생명의 전장 한복판에서 암이라는 통보를 받았을 때, 나는 하나님 앞에 엎드려 울었다. “하나님, 알고 계시잖아요. 푸른 초장의 집은 어떻게 합니까. 폭력에 시달리는 그 가련한 여성들을 대신해 이 사람 저 사람, 이 기관 저 기관을 찾아다녀야 하잖아요. 구완와사까지 찾아온 이 초라한 얼굴로는 도저히 사람들 앞에 설 수가 없어요.” 나 아니면 안 된다는 교만이었을까. 아니면 남겨진 이들에 대한 절박한 사랑이었을까. 사역의 정점에서 마주한 ‘STOP’ 사인 앞에서 나는 처절하게 고뇌했다. 내가 멈추면 그들의 울타리도 무너질 것만 같아 차마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결국 나는 타인의 생명을 구하겠다는 일념으로 사력을 다해 드나들던 사무실 앞에서 강제로 멈춰 서야 했다. 해결해야 할 산적한 일을 내려놓고 병실에 누웠을 때, 창문 너머로 보이는 세상은 무심할 정도로 빠르게 흘러갔다. 0.1초의 오차도 없이 돌아가는 신호등과 바삐 걸음을 옮기는 행인들을 보며 나는 비로소 깨달았다. 내가 얼마나 위태로운 속도로 엔진을 과열하며 달려왔는지. 내가 없으면 무너질 것 같던 세상도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여전히 흐르고 있음을. 책임감이라는 이름으로 습관처럼 이어오던 발걸음을 멈추고서야, 내가 서야 할 진짜 출발선을 가늠할 수 있었다. 지인들이 위로하며 건넨 말처럼 이것은 인생의 마침표가 아니었다. 더 먼 바다로 나아가기 위해 거친 풍랑을 피해 잠시 항구에 머무는 정박의 시간이었다. 인생의 ‘STOP’ 사인은 반갑지 않다. 우리를 주저앉히고 깊은 절망의 수렁으로 밀어 넣기도 한다. 그러나 멈춰 서서 가쁜 숨을 고르는 동안 비로소 보이지 않던 것들이 선명한 색채로 다가온다. 질병은 삶의 곁가지를 쳐내고 본질만을 남기게 한다. 실패와 좌절은 타인의 시선이 아닌 내면의 깊은 곳을 향해 청진기를 대게 한다. 도로 위의 차들이 멈춤으로써 서로의 안전을 확인하고 사고를 예방하듯 삶의 정지 신호 역시 더 큰 파국으로 치닫지 않게 하는 보호 장치일지 모른다. 지금의 멈춤이 끝이 아니라 더 단단하고 견고한 마음으로 다시 출발하기 위한 ‘축적의 시간’임을 나는 투병의 고통을 통해 절절히 배웠다. 친구는 지금 붉은 신호등 앞에서 잠시 대기하고 있을 뿐이다. 신호가 바뀌고 초록불이 켜지는 순간, 우리는 이전과 전혀 다른 깊은 눈빛과 훨씬 단단한 걸음으로 다시 길을 나설 것이다. 완전히 멈추어 본 뒤에 다시 가속 페달을 밟을 때의 벅찬 감각은 다를 수밖에 없다. 등 떠밀려 가는 주행이 아니라 목적지를 스스로 선택하고 조절하는 진정한 의미의 출발이기 때문이다. 그래서일까. 이제 길 위에서 마주치는 ‘STOP’ 사인이 예전처럼 차갑거나 밉지 않다. 오늘도 나는 그 앞에서 기꺼이, 그리고 아주 정중하게 멈춘다. 삶에 쌓인 조급함의 먼지를 털어내고 다시 나아갈 내일의 에너지를 채운다. 멈춤은 끝이 아니라, 아름다운 주행을 위한 경건한 예식이다. 엄영아 / 수필가문예마당 stop 사인 stop 사인 정지 신호 여성 사역인
2026.05.07. 19:04
나는 무슨 일이건 마지막까지 미루는 좋지 않은 습관을 갖고 있다. 더는 미룰 수 없는 순간이 되어야 일의 능률이 최대치에 다다른다. 반전을 향해 가는 셜록 홈스처럼, 최후의 스퍼트를 남겨둔 운동선수처럼 매사에 뜸을 들이다가 마지막 순간에 해치운다. 시간적 여유가 조금이라도 있으면 도무지 능률이 오르지 않는다. 몇 해 전 4월, 세 번이나 마감일에 쫓겼다. 첫 번은 12일의 재산세 납부를 마지막 날인 12일까지 미루었다. 두 번째는 15일의 소득세(Income Tax) 신고 마감이었고, 마지막으로는 16일의 2020 센서스 등록이었다. 입안이 타들어 가도록 마감 시간에 맞추느라 이리 뛰고 저리 뛰다가 몸살까지 호되게 앓았다. 자신의 삶이 언제 끝나는지 모른다는 것은 신의 배려이지 싶다. 무슨 일이건 마지막까지 미루는 사람에게 이 세상을 떠나는 날이 얼마나 분주할 것인가 생각하면 생의 마감일을 모르는 것은 신의 은총임이 분명하다. 독일 문호 괴테는 임종의 순간에, “More light, more light!”라고 말했다고 한다. 준비 없이 마지막을 맞을 나는 틀림없이 “More time, more time!” 외칠 것 같다. 그리되면 내게 줄 시간을 더는 갖고 있지 않은 신께서는 얼마나 곤란하실까? 나는 ‘급한 일’보다는 ‘중요한 일’을 항상 먼저 처리하는 편이다. 그런데 학창 시절 시험 하루 전의 ‘전날 치기’ 저녁이 되면 내 알량한 삶의 철학은 중대한 도전에 직면하곤 했다. ‘프리어리떼’와 ‘앵뽀르땅스’가 내 속에서 충돌한다. 전자는 따뜻한 이불 속으로 발을 넣어버리는 것이고 후자는 좋게 받아야 할 시험 성적 결과다. 한 번도 확실한 선택을 못 한 채 그럭저럭 대한민국 교육부의 혜택을 모두 받았으니 나는 행운아 중의 행운아인 셈이다. 남편은 우선순위를 정해놓고 철저히 지키는 사람이었다. 아침에 출근할 때면 손목시계를 오른팔에 차고 있는데 그 이유가 그날 처리해야 할 일의 우선순위를 잊어버리지 않기 위한 표식이라고 했다. 매사가 흐릿한 내 습관을 당연히 못 견뎌 했다. 6·25 전란 때 우리 가족은 미처 남으로 피난을 떠나지 못해서 북한군 치하의 서울에서 석 달을 지냈다. 처음 얼마 동안은 집에 있던 식량으로 그럭저럭 버텼지만 점차 양식 구하기가 어려워졌다. 9·28 서울 수복이 가까웠던 그 날도 아버지는 한강 남쪽 농가로 쌀을 구하려고 물물교환할 물건들을 준비해서 집을 나섰다. 이런저런 준비와 어머니의 늑장으로 다른 날보다 반 시간가량 늦어서 광나루에 도착하셨다. 그런데 바로 그 자리에 30분 전에 미군의 폭격이 있었다. 광나루 다리는 흔적도 없이 무너져 내렸고, 주변은 아수라장이 되어 있었다. 리더십에 관한 세계적인 권위자 스티븐 코비 교수는 성공하려면 ‘당장 급한 일보다는 멀리 보아 중요한 일에 몰두하라’고 권한다. 여기서 성공이란 ‘소소하고 일시적인 성공’이 아니라 ‘원대하고 근본적인 성공’을 말한다. 내가 지키려는 ‘중요한 일 우선주의’는 이런 차원 높은 성공 철학에서 비롯된 것은 아니다. 나는 일찍부터 짧은 성공과 승리의 덧없음을 맛봤다. 6·25 전란 중 벽촌의 조그만 피난 초등학교에 다니던 나는 학급 자치회장에 당선되면서 들로, 산으로, 절집으로 함께 쏘다니던 피난지의 둘도 없는 친구를 잃었다. 그 친구는 자치회장 투표에서 나보다 한 표를 적게 얻었다. 그 일은 지금도 내 몸속 어딘가에 가시처럼 박혀 아픔을 준다. ‘불가근불가원’이라는 말이 있다. 나는 불가해한 인생과 앞으로 ‘불가속불가서(不可速不可徐)’로 경주할 생각이다. 인생이란 예측불허이며 어떤 노력으로도 손에 넣을 수 없는 거대한 신의 놀이터이다. 요즘 그것을 더욱 절절히 느낀다. 회사 일이건 집안일이건 마지막까지 뭉그적거리다가 일이 커지고 나면 남편의 기색이 심상치 않게 변했다. “원소는 장강을 너무 일찍 건넜기 때문에 조조에게 패한 것이다”라고 내가 눙치면 남편은 “시저가 갈리아에서 귀환할 때 루비콘강을 건너지 않았으면 그때 폼페이우스에게 당했다”고 반박했다. 그는 인생의 강도 그렇게 건넜다. 수술 후 나온 남편의 병리 보고서(Pathology Report)는 ‘완치는 어렵지만 컨트롤은 가능하다(not curable, but controllable)였다. 얼마 후 그는 루비콘강을 건넜다. 신의 놀이터는 인생의 강에도 있었다. 박유니스 / 수필가문예마당 놀이터 수필 성공 철학 회사 일이건 마감 시간
2026.04.30. 17:49
무슨 거창한 문화적 충돌은 아니라 해도 갑자기 낯선 땅으로 떠밀려와서 이민자로 살아간다는 것은 그 자체가 충격일 수밖에 없다. 천사의 도시라는 로스앤젤레스에서 세탁소부터 시작하기로 했다. 부족한 영어뿐만 아니라 주일이면 교회에 갈 수 있다고 했으니 솔깃했다. 그렇게 용감하게 출발은 했지만 어깨너머로 익힌 기술이 온전할 리가 없다. 거기에다 무슨 매상의 강박관념까지 있었으니 매일 일어나는 내 실수는 어쩌면 당연했는지도 모른다. 세탁소 문을 연 첫날부터 나는 어느 백인 손님 넥타이에 큰 구멍을 내고 말았다. 좀 더 잘해주려 했던 것인데 그런 형편이었으니 세탁비는커녕 손님에게 백배사죄를 하고 새것 값으로 물어 주어야 했다. 그리고 새벽부터 보일러를 켜고는 우람한 세탁 기계를 돌려야 하는 일인데, 솔벤트의 역한 냄새는 숨쉬기도 어려울 지경이다. 더구나 그런 중에 있던 큰 사고는 옷 주머니에 볼펜이 있는 줄 모르고 기계를 돌린 바람에 그만 모든 손님 옷은 잉크 범벅이 되고 말았다. “이제 이 일을 어쩌지…. ” 저절로 나온 내 탄식에 아내는 기가 막혔던지 평소 하던 잔소리조차 유보하고 있었다. 그런 뒤에 손님들은 하나같이 새것이라고 우겨댔으므로 그나마 손님이 떨어질세라 아내는 억지 미소를 지어가며 새 옷값으로 변상해야 했다. 또 못된 손님 때문에 법원까지 가는 일이 가끔 있었다. 경직된 분위기 속에 옷의 색이 달라졌다며 사진을 내밀면 재판장은 코메리칸의 어설픈 말은 들어보지도 않고 무조건 변상하라는 판결을 내린다. 억울하기 짝이 없는 일인데 미리 사진까지 찍어두었다는 수상한 정황은 아예 고려되지 않는다. 그런 속에서도 일 년이 금세 지나갔다. 그동안 나도 열심히 했지만 무엇보다 아내가 큰 역할을 했다. 그리고 몇 안 되는 직원들도 최선을 다해 주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다. 카운터 아가씨가 갑자기 놀란 목소리로 나를 찾는다. 조금 전에 세탁 양복 한 벌 찾아갔던 손님이 크게 찢어진 옷을 들고 다시 왔다는 것이다. “아니 뭐라고? 잘 세탁해서 다림질까지 해준 양복이 찢겨있다니…. ” 도무지 있을 수 없는 일인데, 그 손님은 ‘이제 너희들이 어쩔 것이냐?’ 하는 표정으로 버티고 있었다. 나는 급히 양복부터 살펴보았다. 윗도리에는 한 뼘 정도 칼로 그어진 부분이 있었다. 한 눈으로 봐도 자작극이 분명했다. 세탁 기계는 옷을 찢을 만한 곳이 없을 뿐만 아니라 또 최소 다섯 사람의 손을 거쳐야 하는 과정에서 아무도 보지 못할 리가 없기 때문이다. 옷을 들고 나간 그 몇 분 사이에 저지른 짓이 분명했다. 하지만 심증 외에는 아무런 물증이 없으니 결국 6달러짜리 일 해주고 그 100배의 날벼락을 맞게 된 것이다. 두 눈 뜨고 당하는 일에 더욱 분통 터진다. 나는 우선 시간을 벌기 위해 3일 뒤에 다시 오라고 했다. 그는 성공의 확신을 잡았던 모양이다. 희죽 웃으며 나가는 발걸음조차 당당하다. 그렇다고 질 것이 뻔한 재판정은 기대도 하지 말아야 한다. 나는 찢긴 양복을 앞에 걸어놓고 이리저리 생각에 잠겼다. “어찌 되든 본인의 짓을 증명하면 되는 것이 아닌가.” 논리야 쉽지만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다는 것은 언제나 현실문제다. 나는 곰곰이 생각 끝에 명탐정 ‘셜록 홈스’ 흉내를 내기로 했다. 그렇게 조심스럽게 옷을 관찰하니 양복 안감까지 잘려있어서 옷을 차 문에 걸어놓고 바깥쪽에서 칼로 그은 것이 틀림없었다. 그런 잠시 뒤였다. 그만 나도 모르게 큰소리를 치고 말았다. “옳거니 바로 이것이다.” 드디어 약속했던 날이다. 그는 새 양복을 얻는 기대 때문인지 휘파람을 불며 우리 앞에 나타났다. 그러니 이제부터 창과 방패의 대결이 시작된 셈이다. 이번에는 내가 먼저 너스레를 떨었다. “손님 잠깐 앉으십시오. 양복 찢은 범인을 잡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비닐 포장지에서 범인의 지문을 찾았다는 경찰서 전화가 방금 왔습니다.” 바로 그때였다. 아직 내 말이 채 끝나지도 않았는데 그는 ‘후다닥’ 뒤도 돌아보지 않고 뺑소니치고 있었다. 그야말로 전광석화 같은 재빠름이다. 그러자 모두 “와, 하하하” 하는 큰 웃음보가 합창처럼 터져 나왔다. 처음부터 이 일을 걱정스럽게 보던 우리 직원들이 함께 터트린 웃음이었는데, 그 유쾌한 웃음 속에는 긴 여운이 담겨 있었다. 이걸남 / 수필가문예마당 세탁소 수필 세탁 양복 세탁 기계 양복 안감
2026.04.30. 17:48
누구나 아픔 후회 있어야 해요 ~ 없다면 빈 둥지 지킨 삶 사신 걸 테니 … 박정일 / 시인문예마당
2026.04.23. 18:33
어제는 나무숲에 앉아 바람을 숨 쉬며 봄이란 말을 들었습니다. 오늘은 먼동에 다가서서 설레임이란 말을 읽었습니다 내일은 산과 산 사이에 깃들어 있는 봄이 오는 소리를 찾아가렵니다 강과 강 사이로 흐르는 봄 흐름의 소리를 들으러 가렵니다 가슴으로 피어오르는 밝음 그 기쁨을 찾아서 고독에도 빛들이는 봄의 슬기를 찾아서 유병옥 / 시인문예마당 소리
2026.04.23. 18:32
지난 3월 7일은 여고 동창 김(박)윤정의 전시회 오프닝 날이었다. LA에 위치한 샤토 갤러리가 매년 개최하는 ‘1세대 원로 작가 기획전’이었다. 전시회 제목은 ‘잠시 머물다 가는 삶: 대자연과 인간’이다. 미전역과 한국에서 온 여고 동기 20여명이 축하해 주려고 모였다. 전시장은 오랜만에 만난 동기들로 축제 분위기였다. 졸업 후 64년 만에 처음 만난 친구도 있고, 10년, 20년 만에 만난 친구도 있었다. 윤기 흐르던 단발머리 소녀들이 부스스한 은발에 주름진 얼굴로 만나 “너 누구 아니냐? 하나도 안 변했다”라며 하얀 거짓말을 했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은 호텔 로비에서부터 왁자지껄 반가움에 목소리가 커졌고, 깔깔대는 웃음소리가 호텔을 흔들었다. 밀린 이야기들이 끊이지 않았다. 팔순이 넘은 나이를 잊고 여고 시절로 돌아갔다. 이날 오지 못한 친구 몇 명이 한 팀이 되어 며칠 후에 전시장에 온다고 한다. 그때 또 한바탕 반가움에 난리가 날 것 같다. 식사 후 오프닝 행사에 참석하기 위해 샤토 갤러리로 향했다. 전시장에 가서도 작품 감상 대신 그동안의 안부를 물으며 이야기꽃을 피웠다. 뉴욕에서 새벽 비행기를 타고 온 친구는 “무리했지만 오프닝에 올 수 있어서 다행”이라며 “친구의 새로운 작품도 보고, 못 보던 친구들도 만나니 너무 좋다”고 했다. 전시회에 오지 못한 친구들을 위해서 작품들을 일일이 찍어 단톡방에 올렸다. 전시회의 주인공은 오프닝에 온 손님들과 친구들에게 작품 설명을 하랴, 기자들과 인터뷰하랴 정신이 없었다. 그녀는 학창시절 햇살처럼 밝고 매력적인 소녀였다. 외동딸로 부모의 사랑을 흠뻑 받아 천진난만했다. 성격이 쾌활하고 명랑해서 친구들 사이에 인기도 많았다. 여고 졸업 후 서울대 미대에서 학사와 석사를 마친 후 UC 버클리에서 리전트 펠로십을 받아 석사과정을 마쳤다. 버클리에서 지금의 남편을 만나 결혼을 했다. 남편은 핵융합 전문가로 김영삼 대통령 시절 한국에 나가서 조국에 봉사했다. 그녀는 샌디에이고 시티 칼리지에서 26년간 교수로 있다 은퇴하고 지금은 작품 활동에 전념하고 있다. 그들 부부는 샌디에이고에 넓은 터를 잡아 크고 멋진 집을 지었다. 집 옆에는 개인 스튜디오가 있고, 집과 연결된 과수원에는 각종 과일나무가 있다. 특히 아보카도 나무가 많아 수확 철에는 친지들과 이웃에 나누어 준다. 그녀는 도예작가다. 조각에 가까우리 만치 큰 작품과 설치 작품이 많다. 열정적으로 새로운 작품을 만들어 전시회를 수도 없이 많이 했다. 장소현 평론가는 “전시회 ‘잠시 머물다 가는 삶: 대자연과 인간’은 형태와 재료에 대한 작가의 끊임없는 실험 정신, 예술과 자연, 그리고 덧없음 사이의 관계에 대한 지속적인 탐구를 보여준다”고 표현했다. 그녀와는 여고 동창이라는 관계 외에도 특별한 인연이 있다. 우리 가족은 88올림픽이 끝나고 그해 겨울 미국에 왔다. 아이들이 학교에 가고 나면 여유 시간이 많았다. 도예가의 나라 후손답게 나는 도자기에 관심이 많았다. 집과 가까운 글렌데일 칼리지에 입학하여 2년간 도자기 만드는 공부를 한 적이 있다. 그때 그녀와 자주 통화했다. 그녀는 나에게 진심을 다해 가르쳐주었다. 그렇게 열심인 교수에게서 배우는 학생들은 복이 많다고 생각했다. 한번은 샌디에이고에 있는 그녀의 집에까지 가서 가르침을 받았다. 나는 도자기 만드는 재미에 푹 빠졌다. 낮에 진흙으로 도자기를 빚은 후 유약을 발라 가마(kiln)에 넣으면, 다음 날 아침 학교에 가서 완성된 작품을 보게 된다. 그런데 너무 보고 싶어서 그때까지 기다릴 수 없었다. 밤이라 무서워서 남편이 퇴근하면 졸라서 학교로 달려갔다. 그때 가마에서 막 꺼내 놓은 작품을 보고 와서야 잠을 이룰 수 있을 정도였다. 내 인생 중 가장 행복했던 시절 중 하나로 기억한다. 많은 친구가 그녀의 전시회에 참석한 것은 단지 축하만이 목적은 아니었다. 팔순이 넘은 나이에도 초대전을 여는 그녀의 뜨거운 창작 열정이 우리에게도 무언가 할 수 있다는 용기를 주기 때문이다. 올해 백수를 맞는 여고 선배 노라노(노명자) 패션 디자이너도 모교의 경운 박물관에서 백수 기념 전시회를 열었다고 한다. 친구도 100세까지 전시회를 열 수 있기를 바란다. 부라보 김윤정! 배광자 / 수필가문예마당 부라보 김윤정 친구들 사이 전시회 오프닝 작품 활동
2026.04.23. 18:32
네가 내게 지어준 이름이 너무 좋아서 바닷가 등대 꼭대기에 붙여 놓았다 밤이면 시꺼먼 바다 갈 길 잃은 배들 앞길을 밝히며 어둠을 사른다 바래지 말라 빛나는 이름이여 오늘도 나는 너를 닦으러 간다 이상훈 / 시인·수필가문예마당 이름 바닷가 등대
2026.04.16. 18:41
지평선 아지랑이 따라 달려온 따사한 햇볕이 살그머니 나뭇가지 흔든다 겨울잠에 취해있던 살구(apricot) 나뭇가지 긴 하품 속에 생기의 꽃망울로 응얼거리고 꿀 따러 향기 따라 멀리 날아온 벌들의 잔치 속 가지마다 망울진 꽃봉오리 봄을 부른다 부쩍 커진 꽃봉오리 촉촉이 내린 봄비에 간지러워 견디다 못해 터트린 함박웃음... 들녘 대지 안에 가득히 내려앉은 따사로운 봄기운은 누가 보냈을까... 먼 하늘을 바라본다! 남영한 / 시인문예마당 꽃봉오리 꽃봉오리 봄 지평선 아지랑이
2026.04.16. 18: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