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란 유채 보랏빛 수많은 들꽃 갈대숲 이루고 마태호수 지나서 비포장 길 산 능선 뾰족 뾰족 울퉁불퉁 솟아나 돌기둥 이루고 석양에 뭉클한 선율에 놀라움 착한 행실 하아얀 박 속에도 마음 보석 담겨 있다 베풂에 손 내미는 사랑 어찌 말하리 내딛는 발자국 애틋한 물결 이루어 앞 뒷산 호박돌 집성촌 만든다 거친 돌 되지말고 디딤돌이 되리라 권온자 / 시인문예마당 흥부 유채 보랏빛 들꽃 갈대숲 뒷산 호박돌
2025.06.19. 19:00
우린 저 하늘에 그려진 청춘의 색 붉음도 푸름도 아닌 보랏빛 노을입니다 검은 나무들이 새 옷 입은 5월! 마을 회관 잔치 마당에 보랏빛 노을이 한 가득 이네요 떠난 지 오랜 고향 생각일랑 버리시고 웃음 바다에 빠져 봅시다 깃털 하얀 잔디가 손짓하는 길에서 사랑에 굶주린 낙엽들 주름을 펴세요 예쁘고 행복하라고 만들어진 설레는 잔치 아픔 고통 잊으시고 덩실덩실 흐르는 음악 소리 맞추어 손 흔들어 춤을 추세요 삶을 마음껏 즐기세요 다이아몬드가 뚝 뚝 떨어지는 오동나무 그늘 아래 예쁜 꽃들이 우리들인 걸 잊지 마세요 때 이른 코스모스가 손짓하는 5월 아픔일랑 털어내시고 크게 웃으세요 외로움의 소굴을 탈출하세요 광옥 같던 얼굴에 검 버섯도 좋아서 웃을 겁니다 파랑새 뛰노는 길에서 보랏빛 노을들! 모여 모여 크게 웃으며 살아요 우리 엄경춘 / 시인문예마당 보랏빛 노을 보랏빛 노을들 오동나무 그늘 아픔 고통
2025.06.19. 19:00
샌타애나 리버 오솔길을 따라 남편과 함께 걸었다. 우리가 걷는 왼쪽은 아스팔트 길인데 유모차, 자전거, 롤러스케이트, 스쿠터가 달린다. 오른쪽은 아주 작은 돌 섞인 모래가 깔려 있는데 그곳은 승마를 위한 길로 말이 다닌다. 그 길 너머는 깊은 숲 속이다. 그 아래로는 물이 흐르는 소리가 들린다. 숲 속과 모래길 사이에 기다란 사각형 모양의 하얀 플라스틱 울타리가 두 줄로 처져 있다. 그 울타리 바로 밑 모래땅에 물방울무늬가 같은 간격으로 둥근 도장을 찍어 놓은 것처럼 새겨져 있다. 자세히 보니 양옆에 밤새 매달려 있던 이슬방울이 모래땅을 뚫었나 보다. 자연 현상은 인간의 생각이 미치지 못할 만큼 정교하다. 울타리에 전력을 다해 매달렸던 방울들. 그것이 모래땅에 뛰어내려 남긴 가지런한 무늬처럼 나의 일상도 그렇게 정돈되고 평온해지기를 희망해 본다. 커다란 사냥개 목줄을 잡고 달리기를 하는 사람, 햇빛 가리개가 있는 유모차를 미는 젊은 여인, 무언가를 적으면서 주위를 살피며 걷는 젊은이, 세발자전거를 타는 손자 뒤를 힘겹게 따라가는 노부부, 롤러스케이트를 타고 춤추듯이 미끄러지는 학생, 스쿠터를 타고 날쌔게 달리는 청년을 보았다. 모두가 나름대로 목표가 있어서 노력하는 중이었다. 나는 당뇨가 있는 남편을 위해 정해진 시간에 나가 함께 걸었다. 그곳에 나온 사람들은 운동하며 몸을 단련했다. 우리는 신선한 공기를 가슴 깊이 들이마시며 자연의 숨결을 온몸으로 느꼈다. 매일 걷는 산책로에서 모서리를 돌면 늪지대가 있다. 그곳에 청둥오리 한 쌍이 보였다. 자유롭게 하늘을 날아 이곳까지 날아왔나 보다. 우리처럼 둘이 꼭 붙어다닌다. 수컷이 암컷을 졸졸 따라다닌다. 암컷은 지푸라기 같은 수초들 사이에서 잘 보이지 않는다. 수컷은 둥근 머리에 녹색 광택이 번쩍거려 한눈에 들어온다. 그 윤기가 빛 물결처럼 흘러 녹색 입자가 떠간다. 놀라지 않게 살그머니 손을 뻗어 사진을 찍었다. 수컷은 노란 부리와 짙은 녹색의 머리, 하얀 줄이 목걸이처럼 둘러 있다. 암컷은 어두운 황색이 섞인 부리를 가졌고 몸은 갈색과 베이지색이 섞인 얼룩무늬다. 이 얼룩무늬가 보호색 역할을 한다고 남편이 알려준다. 둘이 물 위를 떠다니며 가끔 고개를 돌리고 한 마리가 방향을 바꾸면 그 길을 주저 없이 따른다. 오랜 세월을 함께 살아온 한 쌍의 모습 같다. 청둥오리는 대부분 평생을 짝과 함께한다. 봄이 되면 그 짝을 찾아 서로 지켜 주고 가을이 되어 떠날 때도 함께 떠나겠지. 이 청둥오리 한 쌍의 인연이 강물처럼 오래도록 흐르고 고요한 평화 속에 머물기를 빌어본다. 청둥오리 앞에 머물러 한참을 바라보다가 다시 남편 손을 잡고 걷는다. 그는 이십 대 후반에 나를 만나 가정을 꾸리고 무역회사에 다니면서 온 세계를 누비고 다녔다. 유럽, 중동, 인도, 남아메리카 등 곳곳에 자수 원단을 팔러 샘플을 들고나갔다. 출장에서 돌아온 후, 늦은 퇴근길 교통사고로 목발 짚고 집으로 들어와 나를 놀라게 했던 적이 있었다. 지금도 그날 밤의 기억이 선명하다. 자기 일에 묵묵히 분투하며 가족을 보살피느라 온 힘을 다했던 시절이 아련히 떠오른다. 자수 무역회사를 그만두고 이민 길에 올라 낯선 이국 땅에서 언어와 문화의 장벽을 허물고자 안간힘을 썼다. 이곳에서 남편은 다시 원단 장사를 시작하였다. 한편, 이곳에 정착하기 위해 우체국 시험을 치르고, 의료기구 만드는 회사에서 납땜 연기를 맡으며 케이블을 연결하던 내 모습도 떠올랐다. 캘리포니아주 교사 자격증을 받으려 여러 번 영작문 시험에 도전하며 조마조마했던 그 시절도 생각났다. 우리 부부는 새로운 삶을 일구며 자리 잡았다. 그 후에 남편에게 갑자기 찾아온 갑상선암으로 수술 후 방사선 치료를 받으며 힘든 시기를 잘 견디고 은퇴했다. 남편은 은퇴 후 텃밭을 가꾸며 농사를 짓는다. 그는 부엌 창문 앞에 난초, 납풀, 장미꽃, 금불초, 제라늄, 부겐빌레아를 심어 내 마음과 눈을 즐겁게 해준다. 나를 위해 부엌 창문 앞에 다양한 꽃을 심는다. 흰 꽃, 보라색 꽃, 빨강 꽃, 노랑 꽃, 연분홍 꽃이 어우러져 창밖을 내다볼 때마다 눈과 마음을 환하게 밝힌다. 바람에 살랑이는 꽃잎을 보고 있으면 기분까지 가벼워진다. 그는 사시사철 나에게 변함없는 마음을 보내고 있다. 물 위를 나란히 떠가는 청둥오리를 바라보며 세월 속에 흘러온 우리 부부를 떠올린다. 물 위를 미끄러지듯 유유히 떠도는 청둥오리 모습이 평화롭다. 자연의 품 안에서 조화롭게 살아가는 그들의 모습이 우리 삶과 겹쳐 보인다. 지금까지 걸어온 길이 얼마나 소중한지 다시 깨닫는다. 남은 세월도 한결같은 사랑으로 감싸안으며 함께 나아가길 소망해 본다. 이현인 / 수필가문예마당 자연 부부 노부부 롤러스케이트 자연 현상 자수 무역회사
2025.06.19. 19:00
나는 은연중 보랏빛만 떠오르면 가슴이 설렌다 알듯 모를 듯 슬픔이 일렁이고 애잔한 무언가가 눈물 주위를 서성거리는 것은 보랏빛 그 아득한 여운 때문인지 요즈음 길에 나서면 5월의 융단바닥을 눈부시게 뒤덮고 있는 자카란다 보석 꽃잎이 나를 설레게 한다 좀더 머물러 있지않고 왜 서둘러 가려는지 바닥에 처연히 누워있는 그 모습은 애틋하다 보랏빛 자카란다 꽃잎이여 어찌하다 떨어져 슬피 우는가 나도 같이 통곡이라도 해야할 것 같은 자카란다 내년 이맘때까지 그리움 한 섶을 가슴에 안고 자카란다 꽃 이제 이별과 마주한 채로 보랏빛 눈부신 자태는 영영히 내 안에 서성대고 있는데… 장정자 / 시인문예마당 보랏빛 연가 보석 꽃잎 내년 이맘때 눈물 주위
2025.06.12. 18:27
90평생 들어보지 못한 노년이란 화살 엄동 설한 얼어 붙은 창가에 벼락같이 날아든다 날아든 화살 틈새로 보인 설한 노익장을 과시하는 나의 백발이 아닌가 기울여 본다 엊그제 펄펄 날린 활기는 일장춘몽 사라지고 이제 힘없는 백발이란 그림자만 사막 아지랑이처럼 출렁인다 과거란 활력 이제 얼마나 끈끈할지 조석 문 풍자 바람에 물어본다 바람은 말한다 세월 속 멍든 화살이지만 오늘의 알찬 희망이 아닌가 힘차게 활짝 펼쳐 보라고 이 순간 환상을 위해 하세종 / 시인문예마당 노년 화살 화살 틈새 엄동 설한 사막 아지랑이
2025.06.12. 18:26
미국으로 이민온 지 15년 만에 고국을 방문했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고 했던가 어디를 가나 어리둥절할 정도로 너무 많이 발전했다. 20일 일정으로 한국에 와서 모든 용무를 마치고 출국할 날이 일주일 정도 남았다. 이 기간 중에 첫 사랑의 여인 영이를 만나 보고 싶었다. 어디서 무엇을 하며 살고 있는지 그녀의 소식이 무척 궁금하였다. 그녀를 찾으려고 백방으로 수소문하며 다닌 끝에 영등포에서 아담한 칼국수 식당을 운영하는 그녀의 언니를 만날 수 있었다. 언니는 35년 만에 만나는 나를 한눈에 알아보았다. “아니~ 이민 간 걸로 아는데 조카님이 어떻게 여길….” 언니의 음성은 흥분으로 떨리고 있었다. 그곳에서 영이의 소식을 접한 순간 나는 머리를 한 대 맞은 듯 ‘띵’해지며 현기증을 느껴 식탁의자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우리 어머니와 먼 친척뻘인 영이는 나보다 두 살 어린 아리따운 처녀였다. 내 어머니를 언니라 부르기에 나는 그녀를 ‘아줌마’라 칭하였고 영이는 나를 ‘조카님’이란 존칭으로 대하였다. 영이와 언니 두 자매는 충청도에서 상경하여 우리집에서 한 칸 짜리 방을 얻어 자취하며 제과 공장에 다녔다. 그 당시 나는 22세였다. 가정 형편이 어려워 상급학교를 제때에 진학하지 못하고 뒤늦게 야간 고등학교에 입학한 2학년 학생이었다. 한 집에 기거했지만 일요일에나 어쩌다 마주 칠 수 있었다. 그럴 때면 영이는 두 볼이 발그레 상기되어 눈을 아래로 깔고 무척 수줍어하곤 했다. 나는 그런 영이의 모습이 참으로 보기 좋았고 가슴이 설렜다. 어느샌가 우리는 서로 이성으로 대하고 있었다. 쉬는 날이면 몰래 외출하여 영화 관람도 하고 짜장면도 사먹곤 했다. 영이의 고향은 서산이었는데 바다 가까이 살았으면서도 바다 구경을 한 번도 한 적이 없다고 했다. 벼르고 별러 안면도로 1박 2일 여행을 했다. 용산터미널에서 버스를 타고 6시간이 걸려 섬에 도착하여 민박집에 여장을 풀었다. “어쩌면 색시가 저리도 이쁘고 고울까 원앙이 따로 없지….” 주인 아주머니의 칭찬에 나는 신이 나서 어깨가 저절로 으쓱거렸다. 민박집 주위에는 이름 모를 꽃들이 만발하여 아름다움을 드러내고 있었고 주변의 논은 이미 황금색 누런 벌판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바닷가로 향하는 오솔길을 걷자니 기다란 코스모스가 하늘거렸다. 코끝을 스치는 그 진한 향기는 영이의 냄새와도 같았다. 우리는 백사장에 앉았다. 밀물 때인지라 바닷물이 밀려오고 있었다. 갈매기 한 쌍이 백사장에 내려앉아 부리로 먹이를 찾다가 바닷물이 밀려 오면 뒤로 물러서고 있었다. 내가 작은 돌멩이 한 개를 들어 그쪽으로 던지려 하니 영이가 말렸다. “자기야 ! 그러지마. 저 새들도 우리처럼 다정하잖아.” 영이는 어디서 주워 왔는지 예쁜 자갈 두 개를 손에 쥐고 있었다. “이 돌멩이 하나는 자기이고 하나는 나야” 그녀는 손수건을 꺼내 돌멩이 둘을 합쳐 묶었다. “우리 이 돌처럼 헤어지지 말고 꼭 붙어 살자.” 우리는 일어섰다. 하루를 지켜 온 해는 뉘엿뉘엿 지평선 너머로 조금씩 넘어가고 있었고 주변 하늘과 바다는 온통 핏빛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영이가 쥐어 주는 돌멩이 묶음을 나는 있는 힘을 다해 바다 쪽으로 던지며 이것처럼 우리가 헤어지지 않게 해 주십사 빌었다. “영이야! 사랑해. 영원한 사랑을 맹세할게.” 영이의 긴 머리카락이 바닷바람에 얼굴을 덮고 있는 것을 이마 위로 밀어 주며 말했다. “정말?” 영이는 새끼 손가락을 내밀었다. 우리는 손가락을 건 후 마주 보고 서서 입맞춤을 하였다. 집에 돌아와 보니 집안이 발칵 뒤집어있었다. 어머니는 노발대발하였다. “이 얼빠진 놈아!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어디를 싸돌아 다닌 거냐. 네놈이 이 어미 죽는 꼴 보고 싶으냐.” 어머니는 영이에게도 노기를 터뜨리고 말았다. 당신의 자식이 뭐 대단한 사람인 냥 “네가 감히 내 자식을 넘보다니….” 영이 언니는 “언니! 잘못했어요” 대신 용서를 빌었고 영이는 머리를 푹 숙이고 흐느끼고 있었다. 그 두 자매는 일주일 후에 이삿짐을 쌌다. 36살에 청상과부가 되어 8남매를 거느리고 자식 잘 되기만을 바라며 살아온 어머니의 의지를 아무도 꺾을 수 없었다. 나는 괴로운 나날을 보내다가 군에 입대했고 그 후론 영이의 소식을 알지 못하였다. 영이는 27세에 트럭 운전사와 결혼했는데 그 남자는 술 주정뱅이였다고 한다. 설상가상으로 의처증까지 있어 장거리 운행을 끝내고 돌아오면 자기가 없는 사이 어떤 놈하고 바람 피웠느냐고 때렸단다. 수많은 날들을 고통 속에서 살아온 영이는 33세에 두 어린 남매와 연탄불을 피워 놓고 극단적 선택을 했다. “내 새끼 내가 데리고 가니, 같이 화장해서 안면도 앞 바다에 뿌려 달라”는 유서를 남겼단다. 나는 영이의 넋을 위로하고자 안면도로 차를 몰았다. 그녀는 죽음을 맞이하면서도 우리의 옛 추억을 잊지 못하고 간직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바다를 넋을 잃고 바라보았다. 모든 것은 내 잘못이었다. 그녀와 약속한 바다의 맹세를 지키지 못한 내 죄가 컸다. 그녀를 보호해 주지 못한 것이 한스러웠다. 무거운 바위가 내 가슴을 짓눌렀고, 철썩철썩 밀려 오는 파도는 내 뺨을 때리고 있었다. 나는 첫사랑 영이를 큰 소리로 부르며 울부짖었다. 그리고 영이의 혼이 고통이 없는 저 세상에서 편안한 안식을 누릴 수 있기를 빌었다. 바다는 아무 말이 없었고 그때처럼 낙조가 붉게 타오르고 있었다. 이진용 / 수필가문예마당 첫사랑 수필 돌멩이 묶음 우리 어머니 돌멩이 하나
2025.06.12. 18:24
꿈속의 꿈 꿈속에서 꿈을 꾼다 XX씨 X시에 사망하셨습니다 가족이 ㄱㄴㄷㄹ으로 구겨진다 서로서로 접힌다 간혹 히스테리가 터진다 방금 몸에서 빠져나온 혼이 천장에 붙어 내 침대를 둘러싸고 늘어져 있는 가족을 내려다본다 나는 이토록 가뿐한데 무겁게 늘어진 가족을 어떻게 위로하지! 미안한데 나 방금 죽었거든 고통을 느끼는 몸을 작게 둥글게 말아 꼭꼭 접어서 심장박동 틈새로 비집고 들어가야 했거든 너무 슬퍼 말아요 너무 아파하지도 말아요 심장이 멈추면 가슴이 멈추면 혀가 멈추면 고통이 없어져요 몸이 없어져요 정명숙 / 시인문예마당 꿈속 심장박동 틈새
2025.06.05. 18:53
동트는 새벽 은빛으로 일렁이는 모래사장 바다 갈매기 외 다리로 서 있거나 동그마니 앉아 분홍빛으로 자신의 존재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석상처럼 고요합니다 우주의 무한한 평화 하얗게 하얗게 내려앉습니다 가끔씩 들려오는 날개 치는 소리 홀로 빛나는… 잠시 잠깐 새가 되고 싶었던 그 이른 새벽의 겨울 바다 이춘희 / 시인문예마당 갈매기 겨울 바다
2025.06.05. 18:53
타주로 이사하는 친구가 키우던 산세비에리아 화분 두 개를 주고 갔다. 밤에 호흡하며 산소를 많이 내뿜으니, 실내에 두면 건강에 좋을 것이라고 했다. 간혹 꽃을 피워 올리기도 한다는데 꽃대는 흔적도 없고 잎대뿐이었다. 두 화분 중의 하나는 잎이 모두 곧고 키도 가지런했고 나머지 하나는 상태가 그리 좋아 보이지 않았다. 싱싱한 화분을 침실에 들여놓고, 부실한 쪽을 양지바른 거실에 자리를 잡아 주었다. 며칠이 지나자, ‘부실이’가 놀랍게도 생기를 띠기 시작했다. 휘어졌던 잎새가 여물어지고 하루하루 눈에 띄게 윤기를 머금었다. 역시 햇볕은 최고의 자양분인가. 정성을 다해 돌보기 시작했다. 자주 물을 주고 시간 따라, 햇볕의 각도에 맞춰 화분의 방향을 틀어 주자 부실이는 하루가 다르게 움쑥 자라며 모양을 냈다. 한 달 후에 분갈이하려다가 깜짝 놀랐다. 그동안 키가 조금밖에 크지 않은 튼실이의 뿌리는 단단한데, 부실이는 잎대만 무성할 뿐 뿌리는 거의 썩었다. 이 지경이 되도록 까맣게 모르다니! 지나친 햇볕과 감당할 수 없는 물공급이 부실이를 뿌리부터 상하게 한 것이다. 어머니도 그렇게 쓰러지셨다. 그때까지 자식들은 깊이 감춰진 어머니의 연약함을 모르고 건강한 젊은 날의 어머니로만 생각했다. 딸만 다섯을 둔 어머니의 한과 필요 이상으로 자신을 강하게 포장했던 어머니의 가슴 속 서러움을 헤아리지 못했다. “늙어도 딸들 신세는 안 진다”라고 하시던 어머니가 혼자가 되었지만 어느 딸도 어머니를 모실 생각을 하지 않았다. 자식이 부모를 온전히 이해하려면 부모의 나이가 되어야 한다고 한다. 그때의 어머니의 외로움을 지금 비로소 절절히 느낀다. 어릴 때, 어머니가 외출하시는 날은 온종일 쓸쓸했다. 어머니의 모습이 골목을 돌아 점점 작아지고 세모시 옥색 치맛자락이 가물가물해질 때까지, 어머니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집에 오실 즈음이 되면, 경학원(지금의 성균관대) 뜰이 내려다보이는 창경궁 담장에 기대어 앉아 노래를 불렀다. “임자 없는 대궐 안에 무궁화는 피고 또 피어~~” 어머니가 안 계신 집안은 내겐 망국(亡國)의 대궐처럼 휑한 빈터였다. 노래 부르기도 지친 아슴푸레한 저녁 무렵이 되어 날 찾는 어머니 목소리가 들리면 구르듯 달려 내려가 어머니에게 안겼다. 대학을 졸업하던 해, 군사정권에서는 그해 대학 졸업 예정자들에게 학사 고시라는 것을 실시했다. 대학 졸업 자격시험이었다. 겨울방학이 끝날 무렵에 시험이 있었다. 입학시험처럼 여러 과목에 걸친 시험을 마치고 나오는데 교문 밖에 뜻밖에도 어머니가 와 계셨다. 교정에서 친구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급히 어머니의 팔을 잡아끌며 짜증을 부렸다. “엄만, 뭐 하러 오셨어요?” “우리 딸이 국가고시를 보는데 엄마가 와야지.” 그날 교문 밖 찬바람 속에 어머니는 시험이 끝나도록 오래 서 계셨다. 그 바람은 지난 22년 동안 내가 크고 작은 시험을 치를 때마다 어머니가 맞으시던 바람이다. 마지막이 된 칼바람 속의 어머니를 뿌리쳤던 그날의 기억이 세월이 가도 잊히지 않는다. 유학길에 오르며 처음으로 어머니 품을 떠났다. 학교 기숙사 창문으로 샌타모니카 해변이 보였다. 어스름 녘이면 해변으로 달려가서 먼바다 끝을 오래도록 보았다. 그 바다는 부산에 계신 어머니의 바다와 이어져 있었다. 파도는 끊임없이 밀려오고 밀려나갔다. 밀려오고 밀려나가는 파도를 따라 내 마음도 한국과 미국을 오갔다. 달무리 지는 저녁이면 파도는 엄청난 기세로 해안을 향해 달려오다가 흰 거품이 되어 스러지곤 했다. 그래도 파도는 어머니처럼 내게 다가오기를 멈추지 않는다. 저만치 다가왔다가 미진하게 바다로 밀려나가는가 하면 때로는 발밑까지 치고 올라와 차디찬 각성으로 나를 흔들었다. 그럴 때면 서둘러 일어나 모래를 털고 학교로 돌아갔다. 결혼 5년 만에 어머니를 미국에 초청했다. 어머니를 만나러 가는 66번 국도가에는 노란 들꽃들이 내 마음처럼 바람에 설레고 있었다. 짙은 물빛 원피스를 입고 세인트루이스 공항에 내린 어머니는 출구로 걸어 나오다가 기다리고 있던 셋째 딸과 처음 만나는 딸 가족들의 환영을 받았다. 집까지 두 시간 넘어 달리는 동안에도 어머니 얼굴에는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까르륵 애교가 넘치는 세 살이 된 손자의 재롱에 푹 빠지셨고 카시트에서 말없이 할머니를 지켜보고 있는 돌배기 손녀와 눈이 마주치면, 어머니와 띠동갑 손녀라며 귀여워하셨다. 집에서 어머니는 늘 성경을 보셨는데, 남편은 퇴근해서 집에 오면 짐짓 눈을 크게 뜨고, “아니 어머니, 그 책 아직도 다 못 읽으셨어요?” 하며 놀란 시늉을 해서 어머니를 뒤로 넘어가게 했다. 남편이 재직하던 미주리 대학은 오자크 산맥에서 흘러내리는 물길이 도심 곳곳에 바닥까지 들여다보이는 맑은 자갈 개울들을 만들어 놓은 아름다운 도시에 있었다. 개울물에 발을 담그며 어머니와 함께 그곳에서 지낸 두 달이 결혼 후, 어머니와 가장 오래 보낸 시간이었고 행복한 나날이었다. 해마다 이맘때면 어머니가 유독 그립다. 유니스 박 / 수필가문예마당 어머니 부실 어머니 목소리 어머니 얼굴 대학 졸업
2025.06.05. 18:52
일등관람석은 내 몫 때로는 곁에 누운 그이와 함께 침실 발코니의 유리창 너머로 밤낮없이 펼쳐지는 바다의 공연에 취한다 낮에는 춤사위, 밤이면 끝없는 열창 눈부신 별무리와 더불어 신바람이 난 바다도 때로는 하늘의 통곡은 달래지 못해 쏟아지는 장대비에 신음하던 유람선 함께 지내며 다정해진 인연인가? 바다가 손짓한다 내미는 초대장, ‘유람선’ 마음 내키는 대로 스물네시간을 즐길 수 있다니… 김소향 / 시인문예마당 초대장 바다 침실 발코니
2025.05.29. 18:16
세월에 긁히고 아픔에 찔리고 슬픔에 털리고 기쁨에 말렸다 젖은 가슴 쥐어짜며 머리카락 쥐어뜯고 못 본 척 모른 척 그렇게 살았다네 지나보니 그렇더군 인생살이 별거 아녀 그냥 그러고 살어 이강민 / 시인문예마당 친구
2025.05.29. 18:15
“몽골에 또 간다고? 네가 우리보다 몽골에 더 자주 간다.” 캘리포니아에 거주하는 나의 몽골 친구들이 웃으며 하는 말이다. 사실이다. 나는 몽골에 자주 가고, 갈 때마다 한 달씩 머무른다. 나는 이제 내 몽골 친구들보다 더 구석구석 몽골의 각 지방에 대해서 안다. 나는 왜 몽골과 사랑에 빠졌을까. 세상의 모든 지역에는 독특한 아름다움, 특색, 그리고 얽힌 역사가 있다. 런던의 성숙한 빅 벤과 템즈 강, 파리의 세느 강변과 예술가들, 워싱턴 D.C.의 독수리 같은 위엄과 질서, 도쿄의 차분한 휘황찬란함, 서울의 밤낮 구분이 없는 활기와 분주함, 캘리포니아의 항구와 서퍼들, 그리고 라스베이거스의 화려한 흥분. 특히 문명이 발달한 지역에는 공통분모가 있다. 예를 들어, 가치를 환산할 수조차 없는 미술관, 수만 년 역사를 소장한 박물관, 전 세계의 데이터를 모아 놓은 도서관, 신나는 놀이 공원, 뜨거운 함성으로 들썩이는 스타디움, 미슐랭 음식점, 젊은 두뇌들이 밤을 지새우는 대학들 등등. 몽골에는 이러한 것들이 없다. 울란바토르는 몽골의 수도이며, 제일 큰 도시이다. 그 외에 몇 소도시가 있는데, 그저 마을에 지나지 않는다. 행정상 도시라고 하니까, 그렇게 불러 주는 것이다. 몽골의 전체 인구가 약 300만 명인데, 그 중 절반이 넘는 170만 정도가 울란바토르에 몰려있다. 울란바토르는 그냥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는 곳일 뿐, 우리가 기대할 수 있는 현대 도시의 격은 없다. 몽골은 세계에서 19번째로 큰 나라이다. 미국의 알래스카와 비슷한 규모의 큰 영토를 소유했으나, 인구가 매우 적고, 오랫동안 유목생활을 이어왔기 때문에 문명의 발전과 축적이 이루어지지 못했다. 몽골인들이 하는 우스갯소리가 있다. “사람보다 가축이 더 많다.” 사실이다. 그러나 몽골에만 있는 것이 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울란바토르로부터 멀어지면 찾을 수 있는 것이 있다. 바로 ‘선사시대’다. 서쪽으로, 서쪽으로 지프를 달리면, 스테프(Steppe), 즉, 광활하고 건조한 평원에 만 년 전의 세상이 존재한다. 그곳에 도착하면 마치 타임머신에서 내리듯, 눈이 휘둥그레져 지프에서 내리게 된다. 과거의 발자취를 구경하는 것이 아니라, 살아 숨 쉬는 선사시대를 만나게 된다. 이 21세기의 선사시대는 몽골의 서쪽 마지막 소도시, 울기를 지나, 알타이 산맥까지 펼쳐진다. 그곳은 지프나 트럭이 아니면 갈 수 없다. 그 선사시대에 들어서면 구약에 등장하는 목동들의 삶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양떼와 함께 푸른 초장을 찾아 이동하고, 수개월 만에 혹 다른 목자를 만나게 되면 반갑다. 각자가 본 지방의 소식을 나누고, 우물을 두고 싸우고, 강도를 만나 양떼를 빼앗기는 그들의 모습을 그려볼 수 있다. 교과서에 나오는 만 년 전에 살았던 사람들의 수렵채집 생활을 목격하게 된다. 거기에는 길이 없고, 이정표도 없고, 어떤 건물도 없고, 차도 없고, 심지어 나무도 없고, 공해도 없고, 어떠한 문명의 그림자도 드리워져 있지 않다. 아무것도 없다. 오로지 듬성듬성 난 풀뿐이다. 몽골의 스테프는, 사방이 뻥 뚫려 있어서, 육안으로 거리를 가늠하기 어렵다. 무슨 말인가 선뜻 이해가 안 될 수도 있는데, 우리가 사는 도시에서는 어떤 기준이 있어서 거리를 대략 짐작할 수 있다. 예를 들자면, 8차선 도로라든가, 10블록 떨어져 있다든가, 어느 건물을 지나 얼마 정도 가야 한다든지 등이다. 아무것도 없는, 끝이 보이지 않는 지평에서는 거리를 가늠하기 어렵다. 하루 종일 지프를 달리다 행여 멀리 점이 하나 보이면, 그건 양 떼와 염소 떼 수백 마리와 함께 걷고 있는 어떤 사람이다. 그 사람도 이쪽을 발견하고 멈춘다. 우리는 차로 한 참을 그 사람을 향해 달린다. 그곳에서는 타인을 만나기란 너무도 희귀한 일이라서, 서로 만나면 각자의 지방 소식을 주고받는다. 그리고 어느 쪽으로 가야 목적지로 쉽게 갈 수 있는지 알려준다. 예를 들면, 어디 강물이 불어서 건널 수 없다든지, 어느 계곡에는 눈이 아직 녹지 않았다든지, 어디로 돌아가야 덜 추운지, 어디 초장을 향해 가고 있다든지, 혹은 어느 쪽으로 가야 몽골인이 거주하는 천막, ‘게르’를 만날 수 있는지 등을 알려준다. 몽골 유목민들은 풀밭을 찾아 1년에 4번, 계절마다 옮겨다닌다. 봄, 여름, 가을에 건초를 만들어 가축들이 겨울을 날 수 있게 대비한다. 그들은 게르를 세우는데 2시간, 접는데 1시간이면 충분하단다. 그들은 야채를 먹지 않는다. 농사를 짓지 않기 때문이다. 소금도 귀하다. 바다가 없는 내륙 국가이기 때문이다. 양념이 없는데, 그 흔한 후추도 없다. 그냥 말, 낙타, 야크, 양, 염소 등의 고기를 물에 푹 삶아 먹는다. 가축의 똥을 말려서 연료로 사용한다. 그들은 신석기인들이 남긴 암벽화 가까이에서 염소에게 풀을 뜯긴다. 신석기인들과 한 공간에서 호흡하는 선사시대의 일부이다. 내가 몽골에 자주 가는 이유는 그 선사시대가 주는 힐링이 있기 때문이다. 그곳에는 타인이 만들어 놓은 길이 없다. 내가 발을 내딛는 곳이 길이 된다. 문명사회의 복잡한 구조와 관계망에 나를 끼워 맞춰야 하는 의무가 사라진다. 무엇이 되어야 한다는 강요나 압력에서 자유로워진다. 그래서 나 자체로 존재하는 법을 배우게 된다. 그곳에서는 별과 가까워진다. 밤하늘에 별 사탕을 뿌려 놓은 듯, 총총 빽빽한 별들을 보면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의 가망성을 마주한다. 별에 아름다운 이름을 붙이다 보면, 영혼이 깨끗해짐을 느낀다. 뿌리가 어디인지도 모르던 서러움과 억울함이 녹아 사라진다. 그곳에는 문명의 병든 외로움이 아닌, 건강한 고독이 있다. 시계 없이, 사방천지 누구의 발자국도 닿지 않은 광야를 홀로 걷다 보면, 오랫동안 숨죽이고 있던 내 영혼의 목소리를 듣게 된다. 그 세밀하고 내밀한 나의 영혼의 소리는 나의 색깔이 무엇인지, 내가 무엇을 원하고 있는지, 나의 가치가 어떤 것인지를 깨닫게 해준다. 아무도 없는 광야에서 나는 진정한 나 자신과 마주한다. 친구! 힐링이 필요하면, 몽골의 선사시대로 건너가 봐. 송마리 / 시인문예마당 선사시대 몽골 몽골 친구들 구석구석 몽골 몽골 유목민들
2025.05.29. 18:14
700년 된 거대한 성을 머리에 이고 다닌다 트라카이 궁전, 리투아니아의 옛 수도 성은 여러 깊은 호수 한가운데에 있다 성 주변에는 나라 잃은 유대인들의 집단촌이 있었다 폴란드가 이 요새를 여러 번 공략하려다 실패했다고 한다 2년 전 10월 하순 발틱의 겨울은 뉴욕보다 빨리 왔다 트라카이 궁전에는 찬비가 내렸다 시즌 마지막 관광객들은 비바람에 벌벌 떨었다 강가의 작은 유람선은 갈매기 승객 몇 명을 태우고 술에 취해 온몸을 가누지 못하고 있었다 너무 춥고, 외로워 독주를 마신 것 같다 비에 쫓겨 기념품 가게에서 모자를 만지작거리는 나에게 점원은 말했다 이 오래된 성을 싸게 드립니다 머리에 지고 다니면서 세상 사람들에게 알려주세요 리투아니아는 잘 알려지지 않은 발틱 소국이지만 가을 하늘이 무척 아름답고, 좋은 천연 버섯과 블루베리가 흔한 평화를 사랑하는 민족이 사는 나라라고 최복림 / 시인문예마당 궁전 궁전 리투아니아 기념품 가게 갈매기 승객
2025.05.22. 19:08
푸른 오월 들판 위로 바람이 분다 과일 나무마다 휘어져 무거운데 바람에 지쳐 떨어지는 낙과소리 과수원집 한숨소리가 들판 위로 울려온다 몇 그루 안 되는 우리집 나무도 덩달아 바람에 매달려 휘어진 가지가지 무슨 잘못이라도 했는지 고개 숙여 싹싹 비벼대는 소리 바람 속에 실려간다 어제 아이들과 조카들이 한자리에 모여 생일축하 대접을 받았다 어느새 날아가는 세월 따라 할아버님 아버님 모습으로 변해버린 30대 40대 50대의 내 모습이 아이들 조카들 이야기 속에 얼굴에 숨어있다 인생 나이에도 바람이 분다 남영한 / 은퇴 치과전문의문예마당 인생 나이 인생 나이 우리집 나무 할아버님 아버님
2025.05.22. 19:08
문단에 등단한 지도 어언 17년이 되었다. 그동안 시집 2권과 수필집 2권, 영문 수필집 1권을 출간했다. 요즘 독자들은 인터넷을 통해 작가의 작품을 접할 때가 많다. 며칠 전에 한 독자가 재미 수필가협회 웹 사이트에 실린 나의 수필을 읽고 댓글을 달아 놓았다. 그 내용인 즉 다음과 같다. ‘안녕하세요, 저는 고 최돈원 할아버지의 외손녀인 이정민이라고 합니다. 처음 인사드립니다. 할아버지의 흔적을 찾아 구글링 하던 중에 우연히 작성하신 글을 보게 되었습니다. 너무 짧은 인생을 살다 가신 할아버지에 대해 상상해 볼 때마다 정보가 부족해서 항상 갈증이 있었는데, 이렇게 귀중한 글 덕분에 처음으로 많이 알게 되었습니다. 정말 감사드립니다. 바쁘시겠지만 혹시 한국에 계신다면, 괜찮으시다면 저희 부모님과 함께 꼭 한번 뵙고 감사의 인사를 직접 드리고 싶습니다. 정말 감사드립니다. 제 이메일은 ****@gmail.com입니다.’ 그러니까 63년 전 일이다. 당시 나는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영어과를 졸업하고 미국 컬럼비아 대학교 대학원 석사 과정 수속을 밟고 있었다. 5명의 교수의 추천서가 필요해 피천득 교수님, 장왕록 교수님, 정병조 교수님, 스코필드 박사님, 사범대학 학장님이시고 영문학자이던 이종수 교수님에게서 추천서를 받아 제출했다. 얼마 후 컬럼비아 대학에서 합격 통지서를 받고는 뛸 듯이 기뻤다. 당시에는 유학 가려면 신체검사가 필수 조건이었다. 대학에서는 합격 통지서를 받았지만 신체검사에서 불합격 결과가 나왔다. 너무나 놀라 아연실색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의사의 진단서에는 내가 폐결핵을 앓고 있다고 적혀있었다. 23세 곱디고운 젊은 나이에 청천벽력과 같은 사형선고를 받은 기분이었다. 그 당시 동생 김영교 시인은 먼저 미국에 유학와서 컬럼비아 대학 대학원에 다니고 있었고 대한민국학술원 원장이셨던 오라버니도 뉴욕대학교 대학원에서 경영학을 전공하고 계셨다. 나는 모든 꿈이 무너진 현실에 좌절과 슬픔 속에서도 큰 오라버니 소개로 인천 송도 적십자 결핵 요양소에 입원하게 됐다. 입원하기 전 제일 먼저 이 사실을 알렸던 스코필드 박사님은 기도와 함께 성경책과 기독교 책을 몇 권 주시면서 위로해 주셨다. 힘겨운 투병 생활을 하면서도 하나님께서 치료해 주시라고 믿고 늘 기도했다. 전심전력으로 투병 생활을 한 결과 완치가 되어 퇴원하게 됐다. 나는 다시 미국유학을 도전하고 싶었지만 주치의가 재발 위험이 있으니 유학은 포기하는 것이 좋겠다고 조언을 했다. 고등학교 2급 영어 정교사 자격증을 갖고 있었지만, 교편생활도 분필가루가 폐에 절대적으로 해롭기 때문에 적극적으로 주치의가 반대했다. 결핵을 앓았던 터라 결핵에 관심이 많았던 나는 보건사회부에서 WHO(세계보건기구) 결핵 고문관이었던 유진 로우 박사(Dr. Eugine Low)의 비서로 일하게 되었다. 보건사회부 장관 명의로, 영문으로 나가는 모든 영문 서류는 내가 작성해 다시 장관의 결재를 받아 외국으로 발송했다. 그리고 로우 박사의 영문편지도 타이핑해서 세계보건기구로 발송하는 업무를 담당했다. 그 당시 방역과장으로 계셨던 최돈원 박사는 나에게 잊을 수 없는 은인이었다. 이분이 바로 나의 수필에 댓글을 달아 준 이정민씨의 외할아버지다. 재미 수필가협회 웹사이트에 실린 나의 수필은 ‘아름다운 야망’이었다. 그 수필 속에 실린 최 박사에 관한 내용을 다시 되새겨 본다. ‘…보사부 방역과장이던 최 박사는 큰 오라버니 친구로 서울대 의대를 졸업하고 보사부에 의무관으로 근무하고 있었다. 그는 내 영어 실력이 대단하다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고 나를 동생처럼 사랑해 주었다. 나는 오라버니처럼 그를 따르고 존경했다. 그는 늘 슈바이처 박사가 위대한 인물이라며 그를 존경하고 그의 삶에 감동한다고 말했다. 친구 의사들은 졸업 후 대개 개업을 하거나 학교에 남았지만 최 박사는 박봉의 월급쟁이 공무원의 길을 택했다. 그는 외모가 케네디 전 대통령을 많이 닮아 나는 ’닥터 케네디‘란 별명을 지어 주었다. 그러던 어느 날 콜레라가 창궐했고, 그 기세는 꺾이지 않고 확산했다. 최 박사는 콜레라 발생지역인 마산에 내려가 최일선에서 방역 대책을 진두지휘하면서 뜬눈으로 밤을 며칠 계속 지새우다 과로로 그만 쓰러졌다. 쓰러지면서 각혈하다가 핏덩어리가 기도를 막아 숨이 막혀 그만 질식사하고 말았다. 평소 아주 건강하게 보였던 그가 아무도 모르게 지병(폐결핵)을 앓고 있었다는 사실을 그분이 돌아가신 뒤에야 모두가 알게 되었다. 자기의 건강을 돌보지 않고 열심히 일했던 그의 소식에 주위 사람들은 더욱 감동해 눈시울을 적셨다. 젊디젊은 삼 십대 초반의 나이에 요절해 슬픔은 더 컸다. 짧은 인생이지만 멋있고 고귀한 삶을 살다가 간 최 박사는 나에게 귀중한 꿈을 심어주고 간 분이었다. 최 박사의 별세를 계기로 나는 인생을 바라보는 눈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삶을 비관하고 꿈을 잃었던 내가 옛 허물을 벗으면서 서서히 탈바꿈하고 있었다. 병을 비관만 하고 자학만 해왔던 나와 달리 최 박사는 자기 몸을 돌보지 않고 국민의 건강을 위해 일하다가 순직했다. 우리 두 사람은 차원이 다른 세계에서 각각 정반대의 명암의 길을 걷고 있었다는 사실을 발견했을 때 나 자신이 한없이 부끄럽게 생각되었다. 슬픔 속에 머무르던 나는 마치 개구리가 깊은 겨울잠에서 깨어난 것처럼 기지개를 켜며 인생의 새봄을 맞이할 수 있었다. 최 박사가 돌아가신 후 나는 내가 입원했던 송도에 있는 적십자 결핵 요양소를 다시 찾아갔다. 봄철이라 만발한 철쭉꽃이 나를 반기는 듯 함박웃음으로 활짝 피어서 하늘을 향해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저녁노을이 빨갛게 하늘과 바다를 물들이면서 최 박사의 못다 핀 청춘의 꿈이 그곳에서 활짝 핀 꽃으로 눈부시게 피어 오르는 듯 했다.’ 63년 전에 만났던 최 박사의 후손 이정민씨가 외할아버지의 발자취를 인터넷을 통하여 찾다가 내 수필을 읽고 할아버지에 대한 많은 정보를 입수했다며 나에게 댓글을 달아준 사실은 도저히 믿기지 않는 기적이었다. 이정민씨의 온 가족은 나를 꼭 만나고 싶다며 고맙다는 말을 연거푸 했다. 내년에 한국에 나가 만나기로 약속했다. 그들과 만나면 최 박사 생각에 감회가 북받쳐 엉엉 울 것 같다. 김수영 / 수필가문예마당 인연 필연 오라버니도 뉴욕대학교 스코필드 박사님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2025.05.22. 19:06
다시 오리라 믿는 어리석음 나의 것과 함께 가버린 오늘은 아름다웠다 고요가 잠든 밤 새날의 사선을 넘는 둥지가 보인다 그때 그건 다 내 것이 아닌 사실을 모른 꽃밭이야기들이었다 하늘의 별들 환희의 눈물 다 지나가는 바람 속에 잠시 세상이란 무대를 만났다 영원이란 나의 것과 너의 것도 아닌 어디에도 다시는 없다 오광운 / 시인문예마당
2025.05.15. 18:53
야트막한 강물 반짝이며 흐르다 역사(驛舍) 앞에서 발버둥이라도 쳤을까 굽이진 철길과 상행선 통일호를 비켜 완행열차가 서 있던 곳을 검은 산은 수척해진 진월사를 품은 채 멀리서 바라보고 있다. 꽃신, 운동화, 흰 고무신과 검정 큰 고무신 손님들을 전송하고 기다리던 분꽃, 다알리아, 개나리, 나팔꽃과 백일홍들 빠르게 지나는 야간열차 안의 도망 보따리 안은 처자들에게 붉은 맨드라미 일행들 어둠 속에서 손 흔들고 있었다 낙동강 물줄기와 동행하는 산발치 따라 고개 넘어 흰 주오 적삼 그림자들 외나무다리 건너는 장날 백사장에 들어서는 양산에 잠자리 날개 한복에 어른거리던 문양들처럼 생떼를 써도 갈 수 없는 플랫폼 변두리 물속에 사라진 세상에서 제일 예쁜 꽃들은 내 원피스에 블라우스에 피어 살랑거리고 있다 권정순 / 시인문예마당 플랫폼 변두리 철길과 상행선 낙동강 물줄기
2025.05.15. 18:52
2023년 4월 10일, 영국에서 도버 해협을 관통하는 기차, 유로스타를 타고 프랑스 북부 릴역에 도착했다. 대형버스가 우리 일행을 기다리고 있었다. 가이드 캐롤은 영국인이었고 나머지 스무 여덟 명은 미국인이었다. 그 중 동양인은 나 혼자였다. 매년 100만 명이 방문한다는 프랑스 북부 브리타니아, 노르망디가 여행 목적지였다. 프랑스의 전형적인 이 시골 지방은 2차 대전 때 상륙작전이 있었던 격전지로 잘 알려진 곳이다. 내게는 노르망디 상륙작전보다 인천상륙작전이 더 익숙했다. 6.25 전쟁 때 있었던 그 일을 생각하면 어김없이 맥아더장군이 떠오른다. 그런데 노르망디 상륙작전이라면 라이언 일병이 떠오르는 걸 보니 나는 미국 시민권자 이지만 이방인임이 분명했다. 노르망디 상륙작전은 2차 대전 중 나치 독일이 점령한 프랑스를 탈환하기 위해 연합군이 공격에 나선 작전이다. D-Day는 1944년 6월6일. 역사상 가장 큰 규모의 상륙작전이었고 연합군의 승리에 크게 기여한 전투로 기록되었다. 미국인들에게 결코 잊을 수 없는 날이며 이곳을 그들이 많이 찾는 이유라고 한다. 프랑스의 시골은 고적했다. 내게는 조금 우울해 보였다. 창밖으로 유채꽃 밭이 서너 시간 동안 끝없이 이어졌다. 이 지방 유채꽃으로 짠 식용유는 질이 좋기로 유명하다고 가이드가 알려 준다. 산등성이까지 펼쳐진 네모난 노란 양탄자들이 끝에 가서는 하늘로 날아오르는 것처럼 보였다. 어마어마한 량의 기름이 나올 듯한 유채꽃 밭이다. 구름 사이를 뚫고 간간이 내리쬐는 햇볕까지도 노란색이었다. 노르망디 해변이 가까워 올수록 창밖으로 내다보이는 검은 하늘이 심상찮아 보였다. 나는 패딩 재킷 위에 방수 재킷을 껴입었다. 주차장에 내리자 강한 비바람이 우산을 날려 버렸고 우리를 떠밀어 광활한 해안으로 안내했다. 과연 프랑스 북부의 날씨는 소문대로였다. 나는 그렇게 차가운 비를 처음 만났다. 얼음물이었다. 노르망디 해안의 길이는 약 50마일, 5개의 해변이 연결돼 있었다. 그 중 유타와 오마하 해변이 격전지로 알려져 있다. 멀리서 보이는 오마하 해변에는 집채만 한 시커먼 시멘트 덩어리가 군데군데 섬처럼 거리를 두고 떠 있었다. 독일군의 방어선이 뚫리자 싣고 온 전쟁 물자를 해안으로 운반하기 위해 연합군이 바닷물 위로 만든 도로였다고 한다. 참혹한 전쟁의 잔해가 거친 풍랑으로 오랜 세월 동안 갈라지고 쪼개져 저렇게 조금씩 서로에게서 멀어져 갔다. D-Day, 한국전쟁에 동원되었던 중공군의 인해전술처럼 스무 살 가량의 병사들이 배에서 내려 독일군이 퍼부어 대는 총알을 몸으로 막으며 해변을 향해 달려갔다. 해변에는 독일군이 모래에 꽂아 둔 사람 다리길이만한 쇠창들과 지뢰와 철조망들이 빽빽하게 깔려 있었다. 그들은 옆에서 뛰던 전우가 포화에 쓰러지자 그의 시신을 급하게 모래로 덮고 머리 쪽에 그의 총을 거꾸로 세웠다. 그리고 개머리판에 군모를 씌워 무덤을 표시 한 후 다시 해변을 향해 달렸다. 그날 하루 1만여명의 미군이 이 해변에서 죽었다고 기록돼 있다. 모래 위에 세운 총에다 군모를 씌운 사진은 나도 어딘가에서 본 적이 있다. 사막에 묻힌 어떤 군인의 사진인 줄 알았다. 그런데 그 모래는 사막의 것이 아니라 여기, 내가 밟고 있는 노르망디해변의 모래였다. 아직도 모래밭에는 피처럼 검붉게 녹슨 쇠창들이 궂은 날씨를 원망하듯 비스듬히 하늘을 올려다보며 서 있었다. 노르망디 미군묘지기념관(the Normandy American Cemetery and Memorial in France)에 도착했다. 여전히 하늘은 시커먼 구름으로 무겁게 덮여 있다. 다행히 바람이 조금 잦아들어 173에이커의 공원묘지는 정갈하고 평온해 보였다. 검색대를 통과해 기념관 안에 들어섰다. 군복을 입은 채 미소 짓는 수많은 어린 병사들의 흑백사진이 전시돼 있었다. 지금과 달리 그들은 징집된 군인들이었다. 낯선 나라 해변에 첫발을 내디디는 순간 죽음이 기다리고 있었을, 그들의 운명에 가슴이 먹먹해 졌다. 묘지에는 프랑스에서 전사한 9387구의 미군 시신이 안장돼 있다고 했다. 1557명의 실종군인 이름도 한 벽에 빼곡히 쓰여 있었다. 프랑스 정부는 프랑스와 프랑스 국민을 위해 목숨을 내준 미군들에게 특별한 감사의 표시로 그들이 묻혀 있는 땅의 명의를 주었다. 이제 아무도 그들을 괴롭히지 않을 것이라는 약속처럼. 고향에 묻히지는 못했어도 그들은 적어도 자신의 땅에 묻혀있었다. 오후 4시30분. 공원을 둘러보던 사람들이 국기 게양대 주위로 몰려들었다. 빗줄기가 굵어지고 있었다. 트럼펫 연주자도 방문자들과 함께 비를 맞으며 서 있었다. 시간이 되자 낭랑한 트럼펫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고개를 들어 위를 쳐다보았다. 미국 젊은이들이 죽어가며 프랑스 땅까지 갖다 놓은 성조기가 매달려 있었다. 그것은 죽은 장병의 또 다른 모습이기도 했다. 순간 목이 메고 가슴이 미어졌다. 결국 나도 노르망디가 목적지였던 미국인 중 하나였다. 우산 위로 둔탁하게 떨어지는 물방울소리가 선명하게 들렸다. 느린 트럼펫소리가 빗줄기 사이로 애잔하게 퍼져나갔다. 천천히 성조기가 내려오며 그들에게 말하고 있는 듯했다. 오늘 또 하루가 저물고 있다고. 과연 밤이 그들의 젊음을 잠재울 수 있었을까. 젊은 그들이었다. 옆에서 남편이 소리없이 울고 있었다. 일행 중 한 사람이 슬픔의 무게를 견디지 못했는지 얼굴을 묻으며 주저앉았다. 여기저기서 흐느낌이 터져 나왔다. 나는 세계 곳곳에서 죽어간, 내 조국 인천 앞바다에서도 죽은 젊은 미군들의 영혼을 생각했다. 그들이 남기고 간 세상은 아직도 전쟁이 끊이지 않고 있다. 우리는 다 한 짐 무거운 빚을 진 사람들이었다. 눈물이 쏟아졌다. 마야 정 / 수필가문예마당 노르망디 눈물 노르망디 미군묘지기념관 노르망디 상륙작전 노르망디 해변
2025.05.15. 18:51
꽃잎을 바라보며 가슴을 활짝 펴니 무기력한 민낯은 꽃잎 속으로 사라지고 밝아 오는 얼굴은 고개를 내밉니다 삶이 힘들고 괴로울 때 어두움과 외로움이 엄습해 오지만 혼자라도 할 수 있다 다짐을 해 보면 희미한 의욕은 부스스 잠에서 깨어 기도하고 춤추고 크게 웃어 봅니다 나를 사랑하고 이웃을 돌아보면 용기와 기쁨이 샘솟듯 솟아나 오늘도 끈질기게 하루를 보냅니다 백인호 / 시인문예마당
2025.05.08. 19:49
과체중 버스기사 아줌마도 범인 잡는 여순경도 골목시장 옷 파는 여인도 실험실 창백한 여직원도 모두 집에 가면 엄마가 된다 자식들 위해 음식 만들고 때론 콧노래 부르고 야단도 치지만 옷가지 빨아 아들 딸 보살피는 그저 평범한 엄마가 된다 어머니 소원은 오직 한 가지 나보다 나은 인생 살라고 자식들 가슴에 품고 산다 사람은 어머니 가슴에 뿌리박은 나무들이다 험난한 날이나 잔잔한 날이나 목숨처럼 지키는 자식의 뿌리 그래서 세월이 가면 어머니가슴은 빈 껍질이 된다 왜 인디언들은 흙을 엄마라 부르는지 오늘은 속이 텅 비어있을 메마른 가슴 엄마만 생각하자 강언덕 / 시인문예마당 어머니날 가슴 엄마 자식들 가슴 어머니 가슴
2025.05.08. 19:4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