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네를 산책하다 보면 까마귀를 종종 마주하게 된다. 지붕 위에도 올라가 있고 길바닥에서 뒤뚱거리며 걷기도 한다. 그냥 가만히만 있어도 보기 싫은데 거친 목청으로 “까~악 까~악 깍” 울어 조용한 동네를 시끄럽게 하기 일쑤다. 가끔 쓰레기통을 뒤져 길바닥을 어지럽히기도 하니 더욱 밉다.
우리 동네에 사는 까마귀는 보통 까마귀(Crow)가 아니고 ‘레이븐(Raven)’이라는 큰 까마귀여서 무섭기도 하다.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온몸이 짙은 검은색으로 덮여 있다. 어딘 가에 눈이 있을 텐데, 그것조차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더 섬뜩하게 느껴진다. 마주칠 때마다 미워하며 어서 우리 동네를 떠나기 바랐다.
우리 동네에는 반려견을 기르는 사람들이 많다. 평소에는 사람 그림자도 안 보이다가 이른 아침에는 개를 데리고 나와 잔디에다가 변을 보게 한다. 그러는 동안 이웃끼리 서로 잡담도 하고, 코요테가 동네에 나타났다는 등 소식도 전한다.
옆집에는 60대 중반의 백인 여자가 혼자 산다. 웰시 코기 종의 개를 온갖 정성을 다해서 돌본다. 몇 살이냐고 물으니 15살이라며 슬픈듯한 표정을 짓는다.
어느 날 갑자기 까마귀 떼들이 우리집 근처에 몰려들었다. 그날은 평소와 달랐다. 집 담장 밖, 커다란 소나무 부근에서 미친 듯이 울부짖고, 날개를 푸드덕거리며 난동을 부렸다. 마치 누군가를 부르는 듯, 아니면 무언가를 알리는 듯한 소리였다. ‘사고가 났나? 아니면 누가 죽었나?’ 별별 생각이 다 들었다.
그날의 광경은 머릿속에서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불길한 기운과 이상함이 느껴졌다. 혹시 옆집 개가…?
얼마 후, 한동안 보이지 않던 옆집 여자를 만났다. 늘 데리고 다니던 웰시 코기 반려견이 보이지 않았다. 웬일이냐고 물으니 얼마 전에 죽었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나이가 많아 죽을 때가 되긴 했지만 더 살기를 바랐는데…”라며 말을 잇지 못했다. 나는 속으로 ‘아! 그 까마귀 떼들이 그래서 그랬었구나!’하고 생각했다.
그날 까마귀 떼의 울음은 어쩌면 옆집 여자를 대신한 애도였는지도 모르겠다. 신기했다. 까마귀는 옆집 개가 죽는다는 것을 어떻게 알았을까? 사람은 모르는 감정, 기운, 예감 등을 까마귀는 아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본 그날의 장면은 단순히 까마귀가 이상하게 굴었다는 수준을 넘어서 어쩌면 삶과 죽음 사이의 문턱을 엿본 순간으로 느껴졌다.
그날 일을 계기로 까마귀에 대해서 많은 관심을 갖게 됐고, 문헌을 찾아보고 많은 것을 알게 됐다. 까마귀는 동물의 죽음을 알아차릴 수 있고, 그에 대해 무리 지어 반응할 수 있다고 한다. 단순한 본능이 아니라, 지능적으로 무엇인가 이상하다, 사라졌다, 죽었다는 것을 인식하고 행동한다는 것이다.
까마귀는 여러 문화권에서 불길한 징조로 등장한다. 죽음의 전조, 또는 그 너머 세계와 연결된 존재로 여겨져 왔다. 영화, 문학, 신화 등에서 큰 까마귀는 종종 죽음, 지혜, 예언의 상징으로 등장한다. 애드거 앨런 포의 시 ‘까마귀(The Raven)’에서는 절망과 광기를 상징하기도 한다.
하지만 모든 문화에서 항상 나쁜 의미로만 쓰이진 않는다. 북유럽 신화에서는 까마귀는 길조가 되기도 한다. 지혜와 예지의 상징으로 세상을 날아다니며 정보를 가져오는 존재로 등장한다. 또한 한국, 중국, 일본 등 동아시아의 설화에서는 하늘과 인간 세계를 잇는 ‘삼족오’ 라는, 태양과 관련된 신화적 존재이다. 어떤 문화냐에 따라 까마귀의 상징이 달라진다.
성경에서도 까마귀가 나온다. 선지자 엘리야와 까마귀 이야기다. 하나님은 선지자 엘리야에게 아합 왕의 죄악을 꾸짖게 하시고, 이후 그를 숨기기 위해 요단 동쪽의 그릿 시냇가로 보내신다. 그곳은 물 한 모금 마시기도 어려운 광야다. 엘리야를 챙겨주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런데 끼니때마다 놀랍게도 어디선가 까마귀가 떡과 고기를 입에 물고 날아왔다. 엘리야는 광야에 혼자 있으면서 까마귀를 통해 하나님을 더욱 깊이 신뢰하게 된다는 이야기다.
어릴 적부터 듣던 말이 있다. “까마귀 고기를 먹었나?” 뭔가를 잊어버릴 때마다 어른들은 그렇게 말했다. 하지만 까마귀는 오히려 잊지 않는 새라는 것을 알게 됐다. 어쩌면 까마귀는 인간보다 더 많이 기억하는 새인지도 모른다.
조류 학자들 얘기로는 까마귀는 새 중에서 가장 똑똑한 측에 속한다. 기억력이 좋고, 도구를 만들어 사용하며, 의사소통 능력까지 인정받고 있다. 실험실에서는 퍼즐도 풀고 문제 해결 능력이 뛰어나다. 무리를 지어 생활하며 협동하는 행동을 보인다. 또한 사람 얼굴을 기억하고, 매우 적응력 있는 동물이라 인간 사회에 깊이 섞여 살고 있는 존재라고 한다.
우리는 까마귀의 모습을 흉하게 여기고 까마귀를 재수없는 존재쯤으로 넘겨버린다. 그러나 사람의 시선이 닿지 않는 곳에서, 죽음을 마주한 까마귀는 더 이상 단순한 새가 아니다. 그 순간, 무언가를 알고 있는 영험한 존재가 된다고 한다.
그들은 ‘죽음’ 그 자체에 반응한다. 죽은 동료를 보면 소리치며 모여든다. 어떤 이는 이를 ‘경고’라고 해석하고 어떤 이는 ‘장례’라고 말한다. 하지만 그 의미는 아무도 정확히 모른다. 그렇게 모여든 후 죽은 동료를 바라보며 긴 침묵에 잠긴다. 그 자리에 남아 지키며 떠나지 않는다. 우리 인간은 알 수 없다. 그 침묵이 애도인지, 혹은 의식인지.
나는 까마귀의 생김새나, 시끄러운 울음 소리, 그리고 나쁜 이미지 때문에 미워하고 싫어했다. 그러나 까마귀에 대해 알고 난 후로 아무런 해도 끼치지 않는 우리 동내 까마귀들을 나쁘게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모든 새는 나름대로 생존의 의미가 있고, 권리가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농부는 참새를 미워하지 않는다. 다만 수확기에 내쫓을 뿐이다. 중국에서 곡식을 축내는 참새떼를 거국적으로 박멸에 나섰더니 오히려 해충의 피해가 더 많았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이 세상 모든 새들은 독수리나 갈매기나 참새나 까마귀나 그들 나름대로 가치 있는 생명이다.
지금 산책 길에 보이는 까마귀는, 예전 같으면 그냥 지나쳤을 존재들이지만 그날 이후로 까마귀를 예사로이 볼 수 없다. 까마귀를 바라보는 나의 시선이 달라졌다. 이제는 동네 까마귀를 좋은 이웃처럼 대하고 더불어 살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