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살던 고향은 경기도 파주시 한 시골 마을. 집 뒤에는 심학산, 앞에는 한강 하구가 있다. 물건너 동네가 강물에 거꾸로 비춰 흐르는 곳에서 해방 두 달 전 태어났다. 비록 일제강점기에 태어나긴 했지만 일본제국의 만행은 자라면서 부모님을 비롯해 주위 어른들로부터 들은 이야기가 전부다.
초등학생이 되어서야 많은 친척이 있는 것도 알게 되었고 방학이 되면 친척들 방문하는 것 또한 늘 기다려지던 시기다. 아직도 많은 추억이 남아 있는 곳은 큰 고모님 댁. 큰 고모님은 강 건너로 출가하셨다. 그래서 고모님 댁을 가려면 언제나 깊고 푸른 강을 건너야 했다.
어머님은 친척 집 다니러 갈 땐 언제나 보호자요, 가이드 역할을 해주셨다. 그런 탓에 어머님과 함께 하지 않는 고모님 댁 방문은 생각할 수 없는 일이었다. 당시 친척집 방문은 지금처럼 전화로 약소을 하고 가는 것이 아니고 대부분 무작정 가는 것이었다. 혹시 큰 일(결혼, 초상, 제사, 사고)로 가는 경우엔 미리 연락을 하거나 어머님의 명석한 기억력에 의존했다.
그러던 어느날 어머님과 함께 법곶 나루터를 향해 십여리 길을 걸어 가니 강을 건너려는 몇몇 사람만 기다릴 뿐, 정작 배와 뱃사공은 보이지 않았다. 한참을 기다리니 강 건너편에서 조각배 한 척이 오는 모습이 보였고, 그 후 1시간이나 지나서야 6,7명의 손님을 태운 나룻배가 힘겹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뱃사공은 한잔했는지 구슬픈 노랫가락으로 빠르게 흐르는 강물을 토닥이며 노를 저었다. 그렇게 강을 건너고 다시 십여리를 더 걸어 마침내 고모님 댁에 도착했다.
강에는 또 다른 의미가 있다. 이 땅에 태어나는 모든 사람들이 반드시 건너야 하는 ‘인생의 강(the river of life)’, 혹은 ‘영적 죄의 강(the spiritual sin river)’이다. 불교에서는 고달픈 인생 길을 고해(苦海), 즉 ‘깊은 바다(deep sea)’에 비유한다.
그 강은 어떤 강이고 왜 건너야 하는지, 그리고 그 강을 건너 어디로 가야 하는지, 그 목적지(예수 그리스도)를 기록하고 안내하는 책이 바로 성경이다. 성경이 말하는 ‘인생의 강’ 혹은 ‘영적 죄의 강’ 은 고통과 괴로움의 강, 아픔과 슬픔의 강, 가난과 빈곤의 강, 고뇌와 절망의 강, 탐욕과 탐심의 강, 경쟁심과 이기심의 강, 사망과 죽음의 강 등으로 묘사된다.
그럼 왜 그 강을 건너야 할까? 모든 사람은 본인의 ‘자유의지(free will)’와 상관없이 그 죄의 강에서 태어난다. 아담과 하와는 본인들의 ‘자유의지’로 선악과를 택했다고 하는데 그들의 후손은 자신의 ‘자유의지’와 상관없이 죄악의 강에서 태어나 그 강에서 살다가 죽는다는 것이 성경을 연구하는 많은 이들의 설명이다.
그 강을 건너주겠다고 하는 미국 선교사 한 분을 60여년 전인 1965년 5월 16일, 서울 종로예식장에서 만났다. 그때 들려준 전도설교 내용의 일부를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 그는 슬픔과 아픔을 기쁨으로, 궁핍을 부요함으로, 절망을 희망으로, 역경과 수고를 승리로, 탐욕에서 자족함으로, 이기심에서 이타심으로, 사망의 길에서 생명의 길로 또는 영생의 길로 인도해 주실 분(예수 그리스도)을 만나기 위해 그 강을 건너야 한다고 했다.
그런데 언제 그 강을 건너 예수 그리스도(목적지)와(에) 상봉(도착)할 수 있을까? 그 미국 선교사는 내가 ‘영적 죄의 강’을 건너는데 도움을 주는 ‘영적 배(the spiritual boat)’의 선장이었다.
그 후 선장이 바뀌어 한국분을 만났다. 그런데 지난 60여년 간 내가 탄 배(교회)의 많은 선장들은 배 위로 승선하는 사람들에게만 관심이 있지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예수(히12:2)”님을 만나기 위해 배에서 내리려는 사람들에겐 관심이 없는 것 같았다. 많은 교리와 자의적 성경 해석을 통해 배에서 내리면 안된다고 가르치고 심지어 경고까지 한다.
아마도 강을 건너는 목적을 모르고 배를 운영하는 것 같다. 우리 항해의 목적이 ‘영적 배’를 타고 ‘죄의 강’을 건너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는 일일텐데...
지금 내가 탄 배(교회)의 선장은 나를 그 목적지까지 인도해 줄 수 있을까? 언제,이 고달픈 ‘죄의 강’ 을 건너 예수 그리스도를 만날 수 있을까? 지금이라도 배에서 뛰어내려 니고데모가 그랬던 것처럼 강 건너 저 ‘변화산(The Mount of the Transfiguration)’ 기슭에서 기다리고 있을 예수님을 찾아가 만나고 싶다.
어릴 적 뱃전에 올라 바라보던 강 건너 고향 마을은 아직도 나를 기다고 있을까? 바카빌(Vacaville)의 어둔 밤이 고요히 깊어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