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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예마당] 1도의 온도

Los Angeles

2026.03.12 2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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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작년 연말, 카카오톡이 업데이트되면서 내 생일이 1월 1일로 잘못 바뀐 모양이다. 새해 첫날, 신년 인사와 함께 뜻밖의 생일 축하 메시지가 잇따라 도착했다.
 
“새해 첫날 태어났으면 매스컴도 탔겠네요.” 그렇게 말하며 신기해하는 이도 있었다. 내 진짜 생일은 신록이 눈부신 오월이다.
 
“오늘 제 생일 아니에요.” 웃으며 고마운 마음을 담아 일일이 답장을 보냈다.
 
어느새 나이테가 늘듯, 숫자가 더해지는 것이 그리 달갑지 않은 나이가 되었다. 세월이 쌓일수록 여러 의미를 덧입히게 되니, 예전의 기대와 설렘보다 왠지 서글픔이 먼저 다가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축하 메시지를 읽는 동안만큼은 인연이 남긴 따스함이 잔잔히 퍼져왔다. 누군가의 기억 속에 아직 지워지지 않은 이름으로 남아 있다는 사실, 그 사소한 확인만으로도 희미해졌던 내 존재의 테두리가 또렷해지는 듯했다. 오류가 만들어 낸 엉뚱한 생일 덕분인지, 올해는 축하받을 일이 많으려나 하는  작은 기대만으로도 마음이 몽글해진다.
 
살다 보면 뜻하지 않은 순간을 마주할 때가 있다. 어떤 날은 황당한 사고로 낭패를 보기도 하고, 또 어떤 날은 전혀 계산되지 않은 감동이 불쑥 다가오기도 한다. 얼마 전, 트레이더 조(Trader Joe's)에서 우유와 치즈 등 유제품 몇 가지를 들고 계산대 앞에 섰을 때였다. 낯선 히스패닉 할머니가 다가오더니 내 물건값을 대신 지불해 주겠다는 것이었다. 손사래를 치며 괜찮다고 거절했지만, 영어를 못하는 그녀와 스페인어를 전혀 알아듣지 못하는 나는 끝내 소통하지 못했다.
 
다행히 히스패닉 캐셔가 통역을 도와주었는데, 그녀의 대답은 의외로 단순했다.
 
“이유는 없어요. 그냥 그러고 싶어요.”
 
내 뒤로 줄 서 있던 손님들도 황당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쩔 줄 몰라 당황하는 나에게 캐셔가 말했다.
 
“기다리는 사람이 많으니 그냥 받으세요.”  
 
더 지체할 수 없어 나는 “그라시아스(Gracias)”라며 감사의 인사를 했다. 그녀는 환한 얼굴로 손을 흔들며 사라졌다. 큰 금액은 아니었지만 그녀가 왜 처음 본 나에게 그런 호의를 베풀었는지는 여전히 물음표로 남아 있다. 혹시 한국 사람에게 크게 신세를 진 적이 있었을까. 그저 짐작만 해 볼 뿐이다.
 
지인 댁을 방문하러 가던 길이었다. 과일 한 박스를 사서 계산을 마치고 출구를 나서는데, 전도지를 나눠 주던 젊은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예수님을 믿으세요? 저희 교회에 한 번 방문해 주세요.”
 
건네받은 초대장에 적힌 교회 이름과 위치를 보니, 개척교회 목사님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영혼 구원이라는 사명을 품고 선택한 길이겠지만, 홀로 노방전도를 하고 있는 그를 그냥 지나칠 수는 없었다.
 
“목사님, 수고가 많으십니다. 저는 교회에 다니고 있어요.”
 
나는 카트에 실린 과일 박스를 불쑥 내밀었다. 뜻밖의 행동에 그는 잠시 망설이다가, “감사합니다. 축복합니다.” 하며 마음을 받아 주었다. 그 순간, 몇 달 전 누군가에게 받았던 호의가 문득 떠올랐다. 나 역시 특별한 이유는 없었다. 아마도 기독교인으로서 목회자를 향한 존경의 마음이었을 것이다.
 
우리는 관계를 맺는 일에서도 '득과 실'을 먼저 계산한다. 이익이 되지 않거나 감정 소모가 클 것 같은 관계는 애초에 걸러내는 것이 현명하다고 믿었다. 상처받지 않기 위해 마음의 문을 닫고, 손해 보지 않기 위해 거리를 조절하는 일은 당연하게 여겼다. 그렇게 효율과 손익의 잣대는 인간의 마음마저 저울 위에 올려놓는다.
 
이름 모를 히스패닉 할머니의 호의에도, 목사님께 건넨 과일 박스 한 상자에도 어떤 계산도 없었다. 만약 그 순간 서로의 이해관계를 먼저 따졌더라면, 낯선 이가 건넨 손길을 선뜻 받아들이지 못했을 것이다. 인생은 뜻한 대로 흘러가지 않지만, 계산 없는 마음은 오래도록 빛으로 남는다.
 
이유 없는 온기가 이 삭막한 세상의 온도를 아주 조금, 1도쯤은 올려놓지 않았을까.

김윤희 /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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