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뜨락에서] 베트남은 용틀임 중
정명숙 / 시인
19세기 말부터 거의 80년 동안 프랑스 지배를 받으며 세워진 유럽풍의 콜로니얼 건축물이 가득해 호찌민을 ‘동양의 파리, 사이공’이라 부르기도 한다. 특히 프랑스식 건축양식을 잘 보여주는 노트르담 대성당, 중앙 우체국, 인민 위원회 정부 청사는 프랑스 식민지 시절의 아픈 역사를 그들의 문화로 잘 승화시킨 느낌을 주기에 충분했다. 파리의 노트르담 성당을 그대로 본떠 지은 이 성당은 지금 대 보수 중이어서 안에 들어가 보지 못했으나 그 당시 물자를 운송하고 유럽과의 통신을 위해 지은 중앙 우체국은 과히 국보급이다. 지금도 한 부분은 우체국의 기능을 하고 있고 나머지는 국가 직영의 기념품 상점들이 즐비해 있다. 그들은 또 잊지 않고 유럽의 정통 문화인 대규모의 광장을 지어 아주 복잡한 시내 한가운데서도 숨을 돌리기 위한 시민들과 관광객들로 붐볐다. 다음으로 방문한 쿠치 터널은 베트콩들이 전쟁 당시 숨어지내며 물자와 무기, 음식을 저장하는 터전이었고 지금도 건재한 모습을 지니고 있다.
마지막으로 베트남 전쟁이 남긴 자취의 박물관을 방문했다. 나는 많은 나라를 방문하면서 꼭 역사박물관에 들른다. 오늘의 그 나라들이 존재하기까지 그들의 선조들이 겪어낸 노력과 희생을 배우면 지금 우리가 누리는 호사에 감사할 수밖에 없다. 이 거대한 박물관은 보는 이에 따라 몇 시간에서 하루 종일도 부족할 정도로 자료가 방대하고 엄청났다. 베트남 전쟁 당시 또 그 결과가 빚은 참혹한 참상을 실물과 영상을 이용하여 솔직하고 거침없이 적나라하게 전시해 놓았다. 특히 이 전쟁 당시 미국이 밀림에 뿌린 제초제는 대외적으로는 말라리아 추방이 목적이었으나 사실은 밀림의 나무들을 고사시킴으로써 숲속에 은신 혹은 매복하던 베트콩의 노출과 식량 보급을 차단하려는 저의가 있었다. 그 제초제의 부작용으로 400만 명 이상이 신체적, 정신적 고통을 겪었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사진과 영상이 그대로 돌아가고 있었다.
어떤 전쟁도 겪어보지 못한 나 자신도 역사 시간에는 하나의 사건으로만 기억하게 된다. 이번, 이 박물관 방문은 그들의 아픔과 고통이 나의 피부 속으로 고스란히 전해왔다. 옆에 서서 함께 영상을 보던 한 미국의 대학생 또한 연민과 고통으로 괴로워하는 모습에 가슴이 철렁했다. 과연 그는 역사 시간에 미국이 패망한 이 전쟁을 어떻게 배웠을까.
정명숙 /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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