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의 눈] 강요된 평등이 만든 불평등

정윤재 사회부 기자
트랜스젠더에 대한 혐오나 조롱은 명백히 잘못된 일이다. 그들의 존재와 고통은 현실이며, 사회가 일정 수준에서 이들을 보호해야 한다는 점에는 이견이 없다. 그러나 그러한 보호가 모든 경계와 기준을 무시해도 된다는 뜻은 아니다. 남성과 여성은 생물학적으로 다르며, 이는 단지 신체적 특성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적 제도 전반을 구성하는 중요한 기준이기도 하다.
우리가 남녀 화장실을 구분하고, 스포츠에서도 남녀 리그를 나누는 이유는 단순한 전통 때문이 아니다. 공정성과 안전, 그리고 현실적인 신체적 차이를 고려한 제도적 조치다.
가주 정부는 이번 AB 에르난데스 사례를 통해 트랜스젠더 학생이 여자부에서 뛰는 것을 허용했을 뿐 아니라, 경기 결과와 관계없이 트랜스젠더 선수가 상위권에 들 경우, 생물학적 여성 선수에게도 같은 메달을 주는 방식을 도입했다.
모두를 배려하려 했겠지만, 결국 누구도 완전히 납득할 수 없는 방식이 됐다. 겉으로는 평등해 보일 수 있으나, 실제로는 경쟁의 본질을 왜곡시켰다. 같은 기준을 적용한다고 해서 그것이 곧 공정함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다. 평등이란 각자의 차이를 무시하고 똑같이 대우하는 것이 아니라, 그 차이를 고려해 사회적으로 조율해 나가는 과정에서 만들어진다.
위스파 사건과 올림퍼스 스파 판결도 같은 질문을 던진다. 어떤 남성이 스스로를 여성이라 느낀다 해도, 다른 사람들 모두가 그를 동일한 여성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건 별개의 문제다.
성별 정정 절차를 거쳤다고 해서, 생물학적 남성이 여성 공간에 나체로 들어가는 일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질 수는 없다. 한국 찜질방 문화처럼 나체가 기본인 공간에서, 13세 소녀와 트랜스젠더 여성이 함께 있어야 한다는 판결이 과연 누구의 입장을 배려한 것인지 되묻게 한다.
특히 위스파 사건의 피고 머레이거는 이미 지난 2002년과 2003년에 성기 노출로 유죄를 선고받은 성범죄 전과자이며, 이후 성범죄자 목록에도 등록됐다. 그가 성별 등록을 여성으로 바꾼 뒤 여성 스파에 나체로 입장한 행위는 단순히 트랜스젠더 권리의 문제로 보기 어렵다. 제도적 허점을 이용해 여성 공간에 접근한 것은 아닌가 하는 합리적 의문이 제기되는 이유다. 개인의 전력을 고려하지 않고 성 정체성 하나만으로 모든 판단을 중단하는 태도는, 오히려 트랜스젠더 전체를 향한 불신과 불만을 키우는 결과를 낳는다.
문제는 ‘트랜스젠더의 권리’만을 일방적으로 주장할 때 발생한다. 개개인의 권리는 충돌할 수 있고, 그 충돌을 조율하는 것이 사회의 역할이다. 여성 전용 공간을 지키려는 여성들의 권리, 공정한 경쟁을 원하는 여성 선수들의 권리도 동일하게 존중받아야 한다.
특정 집단을 보호한다는 이유로 또 다른 집단의 불편과 위험을 외면한다면, 그것은 보호가 아니라 일방적인 강요에 가깝다.
가주 정치권의 다수를 차지하는 진보 진영은 ‘내가 여자라 느끼면 여자다’, ‘느낌대로 대우받아야 한다’는 입장을 취한다. 그러나 이런 태도는 감정에 기반한 주장일 뿐, 공공의 질서와 타인의 권리를 함께 고려한 사회적 해법이라 보기 어렵다. 모든 개인은 자신을 표현할 자유가 있지만, 그 자유는 다른 사람들의 권리와 충돌할 때 반드시 조정되어야 한다.
우리가 트랜스젠더를 진심으로 존중하고자 한다면, 그 출발은 ‘같은 대우’가 아니라 ‘다름의 인정’이어야 한다. 생물학적 차이를 외면한 채 억지로 같은 기준을 적용하면, 오히려 혐오와 반발만 키우게 된다. 차이를 인정하고 그 안에서 공존의 기준을 다시 세울 때, 비로소 존중은 실현된다.
정윤재 / 사회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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