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수정당이 요즘 가장 크게 흔들리는 지점은 이념 그 자체가 아니라 ‘통치의 방식’이다. 극우적 방향성이 선명해지면서 정당이 지켜야 할 최소한의 합리성인 타협과 절차, 책임감은 무너지는 장면이 반복되고 있다. 결국 하나의 딜레마로 귀결된다. 강경 지지층을 붙잡기 위해 오른쪽으로 갈수록 중도층은 멀어지고 통치 역량은 약해진다. 그렇다고 강경 지지층과 거리를 두는 순간, 조직이 흔들린다. 지금 미국과 한국의 보수정당은 이런 딜레마에서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다. 최근 연방의회 세출법안 표결 과정에서 공화당은 결속보다 분열을 방치하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 최장기 연방정부 셧다운 사태를 겪은 뒤 부분적 셧다운만큼은 막아야 한다는 공감대가 있었지만, 지도부는 내부 이견을 정리하지 못했고 결국 지난달 31일 부분적 셧다운이 시작됐다. 하원 공화당 내 일부 의원들은 당론을 거스르며 반대에 나서 상황은 더 꼬였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민주당과의 교착 상황을 풀기 위해 세출법안에 건강보험 관련 개혁안을 덧붙이며 중재를 시도했지만 효과를 보지 못했다. 특히 상원 공화당 원내대표 존 튠은 강경한 입장을 유지하며 민주당과 협상 의지를 보이지 않았다. 여기서 본질적인 질문이 하나 생긴다. 공화당은 왜 스스로 통치 비용을 감수하면서까지 합리적 타협을 회피하는가. 정답은 정치적 양극화 속에서 정당을 움직이는 동력이 중도층이 아니라 극단적 지지층의 결속력으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극우 성향 지지층은 투표장에 더 충성스럽게 나오고, 온라인에서 더 크게 싸우며, 후원금과 정당 재정에도 더 많이 기여한다. 무엇보다 트럼프 대통령의 마가(MAGA) 스탠스는 이 지지층과 정당의 연결고리를 ‘정체성’ 수준으로 만들어버렸다. 공화당이 강경 노선을 완화하는 순간, 이는 정책 조정이 아니라 ‘배신’으로 프레이밍될 가능성이 높다. 이로 인해 로널드 레이건과 조지 W 부시 시대 공화당의 중심이었던 신보수주의자들, 이른바 네오콘은 사실상 비주류로 밀려났고, 한때 공화당의 얼굴이던 ‘합리적 보수’는 오히려 약점이 됐다. 그럼에도 합리성 회복의 필요성은 갈수록 커지고 있다. 강경 지지층 결집은 단기적으로 유리할 수 있지만, 중도층 이탈이 본격화되는 순간 정당의 확장성은 급격히 약화된다. 실제 최근 여론 흐름에서도 중도층이 민주당으로 기우는 양상이 나타나고 있다. 선거의 승패는 결국 막바지에 판단을 내리는 중도층이 좌우하는 만큼, 이 흐름이 굳어질 경우 보수정당은 장기적으로 세력 기반을 잠식당할 수밖에 없다. 이 딜레마는 한국에서도 똑같이 나타난다. 보수정당인 국민의힘은 한동훈 전 대표 제명 이후 당내 분열이 격화되고 있지만, 장동혁 대표 지지자도 많다. 그 이유 중 하나로 “당내 재정을 안정적으로 유지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해석이 나온다. 장동혁 대표 취임 3개월여 만에 매월 1000원 이상 당비를 납부하는 책임당원이 20만 명 이상 늘었고, 지난달 기준 당원 수는 100만 명을 넘겼다. 한국 보수정당 사상 처음 있는 일이다. 하지만 국민의힘은 동시에 위축의 길을 걷고 있다. 계엄 사태의 잘못을 인정한다고 말하면서도 윤석열 전 대통령과의 절연은 명확히 하지 못했다. 이 모호함은 진정성 논란으로 되돌아오고, 당내 소장파는 지도부를 비판하고 있다. 결국 관건은 늘어난 책임당원이 정당의 외연을 넓힌 것인지, 아니면 강성 지지층이 당을 더 좁은 방향으로 묶어버린 것인지다. 만약 후자라면 현 지도부가 합리성으로 선회하기는 더욱 어려워진다. 결국 미국이든 한국이든 보수정당의 현실은 같다. 강경 지지층만 품으면 당장은 버티겠지만, 중도층과는 멀어지고 통치 능력도 약해진다. 반대로 합리성을 회복하려면 극단과는 일정한 선을 그어야 하지만, 그 순간 당내 기반이 흔들릴 수 있다. 그럼에도 장기적 생존을 원한다면 답은 하나다. 보수정당은 극우화의 유혹을 끊고 상식과 정책, 협상이 작동하는 합리적 정당으로 돌아가야 한다. 김경준 / 사회부 기자기자의 눈 보수정당 딜레마 강경 지지층 극단적 지지층 하원 공화당
2026.02.02. 19:35
유튜브 프리미엄 이용료 월 13.99달러, 광고 시청이 포함된 넷플릭스 월 7.99달러, 스포티파이 월 12.99달러, 아마존 프라임 월 13.99달러, 애플 아이클라우드 월 2.99달러…. 매매로 끝났던 기업과 고객의 관계가 이제는 바뀌고 있다. 앱이든 자동차든 한 번 사서 쓰는 물건이 아니라, 매달 결제해야 기능이 유지되는 구독 서비스가 소비자들의 일상이 됐다. 기업들 입장에서도 유료 구독은 인기 수익 모델이다. 가장 최근에는 메타가 인스타그램·페이스북·왓츠앱에서 ‘프리미엄 구독’을 시험하며 가입 시 AI·생산성·크리에이티브 기능을 추가로 활성화하겠다고 밝혔다. 자동차 업계에서는 더 노골적이다. 서비스 하드웨어는 이미 차에 포함되어 있는데, 소프트웨어 잠금 해제 장치에 매달 비용을 내라는 발상이다. 테슬라는 자율주행 기능인 오토파일럿을 월 구독형으로 전환할 방침이라며, 서비스를 일시불로 구매하려면 기한 전까지 서둘러 구매하라는 안내 메일을 고객들에게 보내고 있다. GM은 이미 고속도로 핸즈프리 주행인 ‘수퍼 크루즈’를 월 구독 방식으로 판매하며 고정 수익을 키우고 있다. 최근 이런 트렌드의 원조 격인 스트리밍 플랫폼들은 시청 중 재생하는 광고의 수와 빈도가 크게 늘어났으며, 배달·이동 수단에서도 이제는 유료 멤버십을 이용해야 무료배송과 수수료 할인 혜택을 받을 수 있다. 특히 클라우드 서비스·오피스·디자인 도구들은 사실상 이용료를 내지 않고는 기본 기능조차 쓰기 어려운 구조가 됐다. 기업들은 새로운 수익 모델이라고 반기지만 소비자들은 피로가 쌓이고 있다. 가입은 쉽지만 해지 과정은 번거로워지는 동안, 지갑은 얇아져만 간다. 딜로이트의 2025년 디지털 미디어 트렌드 조사에 따르면, 소비자들은 매년 구독료로 지출하는 비용이 늘고 있으며, 여러 가지 구독을 관리해야 하는 피로감과 함께 가격 인상에 대한 불만도 커진 상태다. 해마다 증가하는 구독료 고정 지출에 대한 피로감은 물론, 하나같이 비슷한 기업들의 태도에 소비자들의 거부감도 늘고 있다. 기능이 쪼개지며 기본적으로 제공하는 플랜이 빈약해졌다는 박탈감. 가격이 슬금슬금 올라가 총액은 불어나는데도 각 서비스는 ‘커피 한 잔 값’이라며 싼 비용이라고 위장한다는 불신. 해지·환불·약관이 불투명해 떠나기 어렵게 만드는 불쾌한 반감. 특히 자동차처럼 고가의 제품을 구입했지만 핵심 기능을 사용하지 못한다면, 그 순간 그것은 편의 기능이 아니라 ‘빛 좋은 개살구’일 뿐이다. BMW가 한때 열선 시트 구독 서비스를 제공했다가 고객들의 거센 반발 끝에 접은 사례가 이 소비자들이 느끼는 피로와 불편을 대변하고 있다. 당분간 구독 경제는 쉽게 사라지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이런 상황에서 소비자들의 다음 시련은 ‘더 많은 구독’이 아니라 ‘더 불편한 구독’이 늘어날지도 모른다는 점이다. 소비자가 바라는 것은 편리함이지 서비스의 제한이 아니다. 최소한의 신뢰 장치가 없다면, 기업이 확보하고 싶어하는 반복 매출은 반복 해지의 부메랑으로 돌아올 것이다. 구독 경제에도 범위를 둘러싼 사회적 합의가 필요한 시점이 됐다. 그렇지 않으면 구독 경제는 혁신이 아니라 기업들의 꼼수로 기억될 것이다. 제대로 된 구독 서비스가 되려면, 매달 결제일마다 떠오르는 감정이 피로가 아니라 납득이어야 할 것이다. 우훈식 / 경제부 기자기자의 눈 구독료 경제 구독 서비스 프리미엄 구독 유료 구독
2026.02.01. 16:32
요즘 우리는 서로에게 너무 쉽게 말한다. 바쁘다, 힘들다, 그래도 열심히 살고 있다고. 나 역시 그렇게 생각해왔다. 하루하루는 피곤했고 스트레스를 받았으며 늘 무언가에 쫓기듯 시간을 보냈다. 바쁜 하루를 보내고 나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최선을 다한 것 같았다. 그러다 문득 이런 질문이 떠올랐다. 나는 하루에 무엇을 이루기 위해 살고 있는 걸까. 지금의 이 바쁨은 정말 내가 원하는 무언가를 향하고 있는 걸까. 질문은 단순했지만, 쉽게 넘길 수는 없었다. 새해가 되면 우리는 저마다 새로운 목표와 지향점을 정비한다. 나 역시 지난 한 해를 돌아보며 스스로를 객관적으로 바라보려 했다. 분명 힘들게 살았고, 스트레스도 많이 받았으며, 나름대로 열심히 살아왔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막상 내가 이루고자 하는 목표를 하나씩 떠올리고, 그 목표를 위해 무엇을 했는지 되짚어보자 마음이 불편해졌다. 애써 버틴 시간에 비해, 목표를 향해 분명하게 움직인 순간은 많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루를 찬찬히 떠올려 보면 나는 분명 많은 일을 하고 있었다. 급한 일에 반응했고, 해야 하니까 하는 일들을 처리했고, 그렇게 하루를 채웠다. 그러나 그 일들 중 상당수는 내가 이루고자 하는 바와 직접적으로 닿아 있지 않았다. 바쁘게 움직였지만 방향은 흐릿했고, 피곤했지만 남는 것은 없었다. 그때 처음으로 ‘열심히 살고 있다는 착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그 착각에는 또 다른 모습이 있었다. 열심히 고민하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노력이라는 믿음이다. 우리는 무언가를 이루고 싶다고 말하면서도, 실제로는 오래 고민하는 데서 안도감을 얻는다. 아직 준비가 덜 됐다는 말, 더 생각이 필요하다는 말은 실행을 미루기에 충분한 이유가 된다. 그렇게 우리는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도, 스스로에게 시간을 벌고 있다고 느낀다. 하지만 고민은 언제나 같은 무게를 가지지는 않는다. 고민은 달려가다가 장애물을 만났을 때 비로소 의미를 가진다. 아직 출발도 하지 않았는데 무엇을 고민할 수 있을까. 해보지도 않고, 부딪혀보지도 않은 상태에서의 고민은 방향을 잡아주기보다 오히려 멈춰 서 있게 만든다. 고민이 깊어질수록 실행은 점점 더 멀어지는 순간도 있다. 이를 떠올리게 하는 장면은 의외로 일상에 많다. 무언가를 해보고 싶다는 생각은 있지만, 막상 시작은 하지 않은 채 방법만 고민하는 순간이다. 무엇을 해야 할지, 어떻게 시작할지, 잘할 수 있을지를 먼저 따지다 보면 하루는 그렇게 지나가 버린다. 반면 아주 작은 행동 하나라도 직접 해보면 상황은 달라진다. 하나의 시도는 생각보다 많은 것을 드러낸다. 내가 무엇을 모르는지, 무엇이 부족한지, 그리고 무엇을 더 해볼 수 있는지가 그제서야 보이기 시작한다. 직접 해보는 과정 속에서 방향이 생기고 기준이 만들어진다. 그제서야 고민은 의미를 갖는다. 이미 그 길을 걷고 있는 사람들이 무엇을 해왔는지 살펴보고, 그 방식을 참고해 실행해보고, 결과를 점검하며 다시 수정하는 과정. 우리가 말하는 노력은 어쩌면 거창한 결심이나 완벽한 계획이 아니라, 이런 작고 반복적인 행동에 더 가까운지도 모른다. 그래서 요즘 나는 ‘열심히 살고 있는가’ 대신 다른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진다. 오늘 나는 무엇을 했는가. 그리고 그 일은 내가 원하는 것을 향한 행동이었는가. 얼마나 피곤했는지가 아니라, 무엇을 하나라도 해보았는지를 기준으로 하루를 바라보려 한다. 하루를 평가하거나 다그치기 위해서가 아니라, 적어도 스스로를 속이지 않기 위해서다. 그래서 이 글을 읽는 당신에게도 묻고 싶다. 당신은 무엇을 이루고 싶은가. 그리고 그것을 위해 오늘 무엇을 했는가. 지금의 그 바쁨과 고민은, 정말로 당신이 원하는 곳을 향하고 있는가. 어쩌면 우리는 열심히 사는 법을 더 고민하기보다, 정확히 원하는 것을 향해 하나라도 해보는 용기가 더 필요한 시점에 서 있는지도 모른다. 정윤재 / 사회부 기자기자의 눈 착각
2026.01.12. 18:12
2026년 새해를 맞아 본지가 지난 1일부터 연재 중인 주요 한인 단체장들의 신년 인터뷰에는 그 어느 때보다 뜨거운 열정과 포부가 담겨 있다. 로버트 안 LA한인회장을 비롯해 이현옥 LA 한인타운 시니어 & 커뮤니티 센터 회장, 빌 로빈슨 윌셔센터-코리아타운 주민의회 의장, 이창엽 올림픽경찰서후원회(OBA) 회장, 송정호 한인타운청소년회관(KYCC) 관장 등 각계 단체 리더들이 밝힌 청사진은 하나같이 고무적이다. 공공 안전 강화, 환경 개선, 세대 통합, 치안 인프라 확충 등 어느 하나 흠잡을 데 없는 과제들이다. 이러한 계획들이 현실이 된다면, 한인타운의 위상은 분명 달라질 것이다. 베벌리힐스나 브렌트우드 같은 인근 부촌과 비교해도 손색없는 명품 거주지로 거듭나는 것은 결코 과장이 아니다. 특히 LA는 올해 북중미 월드컵을 기점으로 오는 2028년 하계 올림픽까지 전 세계의 이목이 쏠리는 국제무대의 중심이 된다. 이 시기에 한인 사회의 내실을 다지겠다는 단체장들 다짐은 단순한 지역 사업을 넘어 한인 사회의 국제적 위상을 결정지을 중요한 약속이다. 하지만 이들의 말이 메아리에 그치지 않고 결과물로 증명될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의구심이 남는다. 우리는 그동안 수많은 단체장이 화려한 수사로 임기를 시작했다가 소리소문없이 사라지는 광경을 숱하게 목격해 왔다. “하겠다”, “추진하겠다”, “최선을 다하겠다”는 말들은 매년 반복됐다. 그러나 그 결과를 체감한 경험은 과연 얼마나 될까. 그 비극적 사례가 바로 한미박물관 건립 사업이다. 지난 2013년 LA시로부터 금싸라기 땅을 사실상 무상으로 50년 장기 임대받으며 기대를 모았던 이 프로젝트는 13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공사 중’이 아닌 ‘계획 중’이다. 디자인 변경에 따른 지연, 물가 상승에 따른 예산 부족 등 변명은 늘 화려했다. 하지만 칼을 뽑았으면 무라도 베어야 할 장재민 이사장은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다. 그렇게 프로젝트는 풀 한 포기 베지 못한 채 표류 중이다. 한인사회의 숙원 사업이 리더십의 부재와 무책임 속에 어떻게 고사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뼈아픈 선례다. 올해 포부를 밝힌 단체장들이 한미박물관처럼 되지 않으리라는 보장은 어디에 있는가. 이들이 내뱉은 공공 안전 심포지엄의 지속성, CCTV 설치를 통한 치안 강화, 세대 통합의 열린 공간 조성 등은 모두 막대한 실행력과 예산, 그리고 정치적 협상력이 뒷받침되어야 하는 과제들이다. 결국 이들의 공약(公約)이 빈껍데기인 공약(空約)으로 전락하지 않게 하는 힘은 한인 개개인의 ‘감시’에서 나온다. 리더들이 약속을 이행하지 않을 때 가장 무서워 해야 할 대상은 시의원이나 시장이 아닌, 바로 자신들을 지켜보는 한인들이어야 한다. 이제 한인들은 구경꾼에 머물러선 안 된다. 단체장들이 밝힌 계획이 실제 예산에 반영되는지, 유관 기관과의 공조는 실질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는지 눈을 부릅뜨고 지켜보는 워치독(Watchdog)이 되어야 한다. 단체장들이 내뱉은 말은 한인 사회와의 엄중한 계약이다. 2026년의 끝자락에서 우리는 이들이 약속한 ‘안전하고 품격 있는 한인타운’의 실체를 확인해야 한다. 약속을 지키지 못하는 리더에게는 엄중한 책임을 묻고, 실행하는 리더에게는 전폭적인 지지를 보내는 건강한 비판 문화가 정착될 때 비로소 한인타운의 발전은 현실이 될 것이다. 김경준 / 사회부 기자기자의 눈 단체장 신년 단체장들 다짐 한인 사회 신년 인터뷰
2026.01.11. 18:00
연말연시가 되면 자연스럽게 기다리던 것이 있었다. 캘리포니아 인디오에서 펼쳐지는 음악 페스티벌 코첼라의 라인업 발표다. 코첼라는 전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축제로 널리 알려져 있고 매년 세계 최고의 슈퍼스타들이 한 무대에 오르는 것으로 유명하다. 음악 팬으로서 항상 동경을 해왔고 10여년 전 취재로 한 번 방문한 적이 있는데 그때의 경험은 여전히 황홀한 추억으로 남아 있다. 당시 헤드라이너였던 래퍼 켄드릭 라마가 화려하게 등장할 때 10여만 명의 관객이 모두 목이 터지라 환호성을 지르던 기억이 생생하다. 모두가 같은 음악을 기다리고, 같은 이름에 반응하던 시절이었다. 하지만 2020년대를 지나오며 분위기는 달라졌다. 이제 음악 팬들은 코첼라 라인업에 큰 기대를 걸지 않는다. 라인업에 슈퍼스타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 가장 큰 이유다. 혹자는 요즘 가수들의 실력이 떨어졌다고 보기도 하지만 내 생각은 좀 다르다. 문제는 개인의 역량이 아니라 구조다. 스타가 ‘모두에게’ 스타로 인식되기 어려운 환경이 된 것이다. 음악을 소비하는 방식부터 달라졌다. 과거에는 음반을 사거나 스트리밍을 하더라도 무엇을 들을지 고르는 시간이 있었다. 음악에 대해서 서로 이야기를 하고 추천해주는 일도 많았다. 차트에 오른 음악이면 모두가 한 번쯤은 들어보곤 했다. 하지만 지금은 많은 사람이 선택 자체를 알고리즘에 맡긴다. 추천은 점점 더 정교해지고, 취향은 지극히 개인화된다. 그 결과 ‘대세’라는 개념은 희미해졌다. 모두가 알고, 모두가 이야기하는 음악은 점점 사라진다. 공유되는 취향이 줄어들면서, 문화는 파편화된다. 이 변화는 음악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세상 대부분의 영역이 비슷한 흐름을 따른다. 사회적 의제 역시 그렇다. 극도로 충격적인 사건이 아닌 이상, 모두가 동시에 토론에 뛰어드는 일은 드물어졌다. 모두가 이야기하게 되는 의제의 수는 줄어들었다. 언론의 영향력이 예전 같지 않다는 평가가 나오는 이유다. 각자가 서로 다른 채널, 서로 다른 알고리즘을 통해 정보를 접하면서 ‘아젠다 세팅’ 자체가 어려워졌기 때문이다. 한때 워터게이트 사건을 통해서 정권을 무너뜨리기도 했던 것이 미국의 언론이었다. 당시 한 여론조사에서 언론을 신뢰한다고 말한 시민의 비율은 70%를 넘겼다. 하지만 이제 이런 위세는 역사 속 장면처럼 느껴진다. 2020년대에 실시된 여론조사에서 언론 신뢰도는 40% 밑으로 추락했다. 문제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공통의 화제가 사라지면서, 사람들은 서로 소통할 기회를 잃어간다. 알고리즘이 보여주는 세계 안에 머무를수록 의견은 강화되고, 타인의 시선은 보이지 않는다. 정치적 양극화가 전 세계적으로 심화하는 이유를 미디어 환경에서 찾는 시각이 늘어나는 것도 이 때문이다. 파편화는 다양성을 키우는 동시에, 고립을 낳는다. 아이러니한 지점도 있다. 언론은 과거와 같은 압도적인 영향력을 갖지 못하지만, 오히려 그 역할의 중요성은 더 커지고 있다. 파편화된 정보 사이에서 맥락을 연결하고, 사실을 검증하며, 서로 다른 세계를 이어주는 기능은 필요할 뿐만 아니라 중요해졌다. 2026년에는 정론직필의 언론이 더 많은 사람에게 좋은 영향력을 행사해야만 한다 생각하는 이유다. 모두를 하나로 묶던 시대는 지나갔을지 모른다. 그러나 흩어진 조각들 사이에서 공통의 언어를 다시 만들어내는 일, 그것이 지금 언론에 주어진 가장 중요한 과제일 것이다. 조원희 / 논설실 기자기자의 눈 파편화 언론 신뢰도 음악 페스티벌 음악 팬들
2026.01.06. 18:56
2025년은 구직자들에게 결코 따뜻한 한 해가 아니었다. 해고는 늘었고, 채용 공고는 줄었으며, 실업률은 4년 만에 최고치를 기록했다. 구직자 수가 일자리 수를 앞지른 것도 4년 만의 일이었다. 지난해가 2020년 이후 가장 부진한 채용의 해가 될 가능성이 높다는 전망도 나온다. 불안정한 경제 전망 속에서 이력서를 고치고, 기한 없는 시간을 견뎌온 이들에게 연말은 위로가 필요한 시기였다. 그러나 많은 구직자는 예상치 못 한 알림을 받았다. 링크드인(LinkedIn)이 올해 처음 도입한 ‘연말 결산(Year in Review)’은 사용자가 플랫폼에 며칠이나 접속했는지, 새로 맺은 인맥은 몇 명인지, 연결된 사람 중 몇 명이 새 직장을 얻었는지 등을 정리해 보여줬다. 연말 정산처럼 한 해를 정리해 주겠다는 취지였겠지만, 현실과의 온도 차는 컸다. 소셜미디어에는 씁쓸한 반응이 쏟아졌다. 한 이용자는 자신의 링크드인 리뷰 화면을 공유하며 “올해 수많은 일자리에 지원했지만, 실제로 얻은 일자리는 0개였다”고 밝혔다. 또 다른 이용자는 “축하합니다. 당신은 실업 상태이고, 지금은 아무도 사람을 안 뽑고 있습니다”라는 문장으로 이 기능을 풍자했다. 숫자로 정리된 한 해는 노력의 크기보다 결과의 부재를 더 또렷하게 보여줬다. 이에 대해 링크드인 측은 “2025년이 많은 구직자에게 어려운 해였다는 점을 알고 있다”며, 연말 리뷰는 단순한 취업 성과가 아니라 학습, 네트워킹, 아이디어 공유 등 ‘직업인으로서의 전체 모습’을 돌아보게 하려는 취지라고 설명했다. 실제로 플랫폼 안에서는 긍정적인 반응도 있었다. 새로 늘어난 인맥 수를 자랑하거나, 가장 많이 교류한 사람을 태그하며 관계의 가치를 강조하는 게시물도 눈에 띄었다. 그러나 이것이 비교의 기준이 되는 순간, 요약은 위로보다 평가에 가깝게 느껴진다. 사실 연말 결산은 링크드인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최근 여러 플랫폼은 앞다퉈 사용자의 한 해를 정리하고, 성취를 기념하려 한다. ‘스포티파이(Spotify)’는 매년 ‘랩드(Wrapped)’를 통해 사용자가 가장 많이 들은 노래와 아티스트를 화려하게 정리해 주고, 인스타그램과 페이스북은 한 해의 추억 사진을 자동으로 묶어 보여준다. 틱톡 역시 시청 시간과 관심 주제를 기반으로 한 연말 리포트를 내놨으며, 심지어는 챗GPT까지 올해 연말 결산 유행에 참여했다. 이 기능들은 대체로 재미와 공유를 전제로 하지만, 어떤 이들에게는 “내가 무엇을 얼마나 소비했고, 무엇을 이루지 못했는지”를 다시 확인시키는 장치가 되기도 한다. 그래서 일부 이용자들은 “이제는 내 인생을 그만 리뷰해 달라”고 말한다. 어떤 한 해는 성취보다 버팀이 중요하고, 기록보다 망각이 필요한 시기일 수도 있다. 숫자와 그래프는 편리하지만, 그 안에 담긴 불안과 좌절, 그리고 아직 오지 않은 가능성까지 담아내지는 못한다. 모든 삶이 요약에 적합한 것은 아니다. 플랫폼의 연말 결산이 한 사람의 한 해를 정의할 수는 없다. 어려웠던 한 해는 견뎌낸 것만으로도 충분히 무게가 있다. 특히 고용 시장이 얼어붙은 지금, 구직자들에게 필요한 것은 ‘몇 번 시도했는지’의 집계가 아니라, 다시 시도할 수 있다는 여지와 존중이다. 화려한 연말 요약보다 더 절실한 것은, 조용히 다음 해로 건너갈 수 있는 작은 숨 쉴 틈일지도 모른다. 우훈식 / 경제부 기자기자의 눈 인생 연말 결산 연말 요약 연말 리뷰
2026.01.04. 18:00
시카고에서 연말을 제대로 즐기기 위해서 해볼 만한 것들이 많다. 널리 알려져 많은 시카고언들로부터 사랑받은 이벤트도 있지만 새롭게 생긴 것들도 많아 연말이 가기 전에 한번쯤 해볼 수 있을 것들을 모아봤다. 첫 번째는 뭐니뭐니 해도 다운타운 크리스마스 점등 행사다. 올해 밀레니엄 파크에 설치된 시카고 크리스마스 트리는 노르웨이 가문비나무로 글렌뷰 주민이 기증했다. 총 3만9250개의 점등이 설치된 이 나무는 1월11일까지 밀레니엄 파크에서 주민들과 만나게 된다. 링컨파크 동물원에서도 홀리데이 라이트를 만날 수 있다. 1월4일까지 진행되며 350만 개의 LED 전구가 설치된 브룩필드 동물원의 홀리데이 매직, 시카고 보타닉 가든의 라이트스케이프, 모튼 수목원의 트리 라이트 행사도 즐길 수 있다. 이 밖에도 시카고 화이트삭스의 홈구장 레이티드 필드와 그리핀 과학 산업 박물관에서도 크리스마스트리 장식을 볼 수 있다. 두 번째는 연극 공연이다. 전통적으로 연말에 무대에 오르는 크리스마스 캐럴 공연은 다운타운의 굿맨 시어터를 비롯해 오크 브룩의 드루리 레인 시어터, 위트 시어터, 라이프라인 시어터 등에서 열린다. 세 번째는 연말 공연이다. 뮤지컬 엘프는 유명 배우 윌 페럴이 출연하는 영화 버전이 처음 나온지 20년 뒤 오디토리엄 무대에 올라 시카고 관객들과 만난다. 또 CIBC 시어터에서는 매직 서커스 크리스마스가, 시카고 시어터에서는 태양의 서커스의 작품이 무대에 오른다. 네 번째는 어른들을 위한 공연과 이벤트로 리글리빌과 루프, 리버 노스 지역에서 임시 바가 연말에만 운영된다. 이중 ‘8 Crazy Nights’이라고 불리는 팝업 바는 하누카를 테마로 올해 처음으로 마련된다. 다섯 번째는 무용 공연이다. 시카고에서 연말 무대에 오르는 가장 유명한 무용 공연은 호두까기 인형이다. 올해도 조프리 발레단의 호두까기 인형 무대가 5일부터 리릭 오페라 하우스에서 열리고 있다. 이 작품의 무대는 1893년 콜럼버스 만국 박람회가 열리기 전 시카고의 크리스마스다. A&A 발레단은 호두까기 인형을 기반으로 1920년대 미국을 배경으로 한 작품 ‘The Art Deco Nutcracker’를 공개한다. 여섯 번째는 스케이트타기다. 연말 시카고 다운타운에는 매기 데일리 파크, 밀레니엄 파크, 네이비피어에 스케이트장이 설치돼 많은 주민들이 찾는다. 이곳뿐만 아니라 또 시카고 컵스의 홈구장 리글리필드의 갈라거 아이스 링크도 2월 중순까지 운영된다. 스케이트가 없어도 현장에서 빌려서 탈 수도 있다. 물론 안전을 위해 장갑은 필수다. 일곱 번째는 티파티와 홀리데이 만찬. 드레이크 호텔의 홀리데이 티 파티, 런던하우스 시카고의 티 서비스 등이 있다. 스테이트길 메이시스 백화점에 위치한 월넛룸에서는 올해 옛 마샬필드를 테마로 한 특별한 식사가 준비된다. 마지막은 야외 마켓. 다운타운 리처드 데일리 센터 플라자에서 열리는 크리스트킨들마켓이 대표적이다. 이 독일 스타일의 크리스마스 마켓은 전통 음식과 라이브 음악, 가족 친화적인 놀이거리, 머그컵에 따라 마시는 핫코코아 등으로 유명하다. 다운타운 뿐만 아니라 리글리빌과 오로라에도 크리스트킨들마켓이 운영된다. 이 중에는 처음 들어보는 이벤트도 여럿이다. 모르는 이벤트가 많을수록 시카고 연말을 제대로 즐기지 못했다는 반증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처음 들어보거나 해보지 않은 이벤트를 하나 하나씩 지우면서 시카고의 연말을 보내는 것도 하나의 재미라고 볼 수 있다. 박춘호 / 시카고 중앙일보 기자기자의 눈 시카고 연말 시카고 크리스마스 시카고 시어터 시카고 화이트삭스
2025.12.29. 19:15
또 1년이 지나 한 살을 더 먹는다. 해마다 비슷한 말을 하지만, 올해는 유독 시간이 빠르게 흘러간 듯하다. 하루하루 열심히 살았느냐고 스스로 물어보면, 선뜻 그렇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물론 모든 것이 개인의 선택과 노력으로만 설명되지는 않는다. 천재지변, 가정환경, 경기 침체처럼 개인이 통제할 수 없는 변수들도 분명 존재한다. 하지만 요즘처럼 SNS와 유튜브를 통해 누구나 자신을 드러내고, 생각과 취향을 공유할 수 있는 시대에서 나를 가장 답답하게 만드는 것은 결국 쌓이지 않은 나 자신이다. 지금은 시도할 수 있는 수단은 과거보다 훨씬 많아졌다. 휴대폰 하나만 있으면 무엇이든 만들고, 기록하고, 업로드할 수 있다. 시도의 문턱은 낮아졌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았을 때 느끼는 불안은 오히려 커졌다. 그래서 요즘의 불안은 환경 때문이 아니라 “나는 왜 아직도 아무것도 쌓지 못했는가”라는 질문에서 시작되는 경우가 많다. 이런 맥락에서 유튜브와 SNS를 바라보는 시선도 달라질 필요가 있다. 많은 사람들은 온라인 세계를 탈출구나 ‘로토’로 생각한다. 콘텐츠 하나만 인기를 끌면 현재 하는 일을 그만두고 다른 삶으로 갈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다. 하지만 실제로 콘텐츠를 만들어보면 금세 알게 된다. 이 일은 생각보다 손이 많이 간다. 꾸준히 아이디어를 만들고, 편집하고, 기록을 남기는 과정은 결코 가볍지 않다. 그래서 시작하는 이는 많지만 오래가는 사람은 적다. 유튜브와 SNS는 장기 투자에 가깝다. 전통적인 투자가 돈을 넣는 일이라면, 콘텐츠는 시간을 넣는 일이다. 단기간의 성과보다, 오랜 시간 감각과 표현력을 쌓는 과정에 더 가깝다. 결국 이 일도 다른 대부분의 일처럼, 끝까지 버틴 사람이 남는다. 그래서 더더욱 ‘올인’이 아니라 ‘병행’이 합리적이다. 본업을 유지한 채 하루 30분 ~1시간 정도의 시간을 꾸준히 투자하는 방식. 이때 기대 수익도 다시 정의해야 한다. 당장 돈을 벌겠다는 목표보다, 나에 대한 이해, 기록, 캐릭터, 그리고 나를 효과적으로 드러내는 방법을 배우는 과정 자체가 수익이 된다. 채널의 성공 여부를 떠나 이 과정에서 쌓인 실력은 사라지지 않는다. 물론 이 일 역시 쉽지 않다. 반응이 없을 때도 많고, 알고리즘은 언제든 변한다. 하지만 세상에 쉬운 일이 어디 있는가. 중요한 것은 요행을 기대하지 않는 태도다. 성공하지 않더라도 배움이 남는다는 관점으로 접근할 때, 이 일은 감당 가능한 투자가 된다. 오히려 초반에 주목받지 않는다는 사실은 이 일을 계속하기에 가장 좋은 조건이 된다. 남들에게 보여주기 위해 서두를 필요도, 봐달라고 애쓸 이유도 없다. 지금은 반응을 끌어내는 시기가 아니라, 천천히 올리고 쌓아가는 시기다. 이 과정에서 중요한 것은 노출이 아니라 실력이다. 무엇을 만들고, 어떻게 기록하고, 어떤 방식으로 나를 드러낼지에 대한 감각은 시간을 들여야만 자란다. 그렇게 쌓인 콘텐츠와 태도가 무르익으면, 어느 순간 유입은 노력 없이도 자연스럽게 따라온다. AI가 점점 더 많은 일을 대신하는 시대에, 끝까지 남는 경쟁력은 결국 ‘누구인가’에 대한 이야기일지도 모른다. 어떤 관점을 갖고 있는지, 무엇에 관심을 두는 사람인지, 어떤 방식으로 세상을 해석하는지. 이런 것들은 자동화되기 어렵고, 하루아침에 만들어지지도 않는다. 그래서 콘텐츠는 지금 당장 돈을 벌기 위한 수단이라기보다, 미래의 선택지를 넓히는 자산에 가깝다. 그래서 나는 거창한 성공을 목표로 삼기보다 작은 장기 투자를 시작하려 한다. 이 글은 사실 2026년의 나에게 건네는 말이자, 지금의 나를 다잡기 위한 글에 가깝다. 하루 20~30분이라도 꾸준히 기록하고, 만들고, 올리는 일. 유튜브와 SNS는 탈출구가 아니다. AI 시대에 ‘나’를 이해하고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이 되기 위한 투자다. 정윤재 / 사회부 기자기자의 눈 경쟁력 실력 장기 투자 콘텐츠 하나 천재지변 가정환경
2025.12.15. 19:26
지난 6일 캘리포니아 시미밸리에서 레이건 국방포럼(RNDF)이 열렸다. 이 포럼은 미국 안보 현안의 흐름이 선명하게 드러나는 자리다. 명함이 오가고, 악수가 이어지며, 공식 문서에 담기기 전의 생각들이 가장 솔직하게 오가는 공간이다. 그런 무대에 미국 안보 라인 핵심 인사 700여 명이 집결했다. 그 한가운데에 한국은 보이지 않았다. 피트 헤그세스 국방장관을 필두로 댄 케인 합참의장, 육·해·공군 참모총장과 해병대 사령관, 인도태평양사령관까지. 미국 군 지휘부의 정점이 총출동했다. 여기에 록히드마틴·보잉·노스롭그루먼·RTX 등 미국 4대 방산업체 수장, 안두릴과 팔란티어 같은 신흥 방산기업 리더들, 제이미 다이먼 JP모건체이스 CEO까지. 정치·군·산업 권력이 한 공간에 모였다. 로널드 레이건 전 대통령의 ‘힘에 의한 평화’ 철학을 기치로 한 포럼의 화두는 분명했다. 중국, 그리고 동맹이었다. 이 주제에서 한국·일본·대만은 빠질 수 없는 국가다. 미국의 인도·태평양 전략 실행과 대중 견제의 최전선에 선 국가들이기 때문이다. 이날 야마다 시게오 주미 일본대사와 주미 대만대사관 역할을 하는 주미 대만경제문화대표부(TECRO)의 알렉산더 유이 대표가 모습을 드러냈다. 특히, 유이 대표는 지난 7월 애스펀 안보 포럼에 이어 이번에도 참석했다. 이들은 미 정부 고위 인사들과 자연스럽게 대화했고, 대학생 펠로들에게까지 직접 각국의 현안을 설명했다. ‘현장 외교’의 교과서 같은 장면이었다. 하지만 한국 정부 인사들은 없었다. 강경화 주미대사는 물론, 한국 정부 관계자 단 한 명도 현장에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애스펀 안보 포럼에 이어 두 번째 공백이다. 실수로 치부하기엔 시점이 너무 중요하다. 한국은 막 미국과 관세 협상을 마무리했고, 한미 조선 협력과 원자력 추진 잠수함 건조라는 굵직한 안보 현안을 구체화하는 단계에 있다. 이런 국면에서 미국 안보 라인 핵심 인사들이 한자리에 모인 자리를 비운다는 건 외교적 무신경함에 가깝다. 아이러니는 기조연설에서 극명해졌다. 헤그세스 장관은 한국이 국방비를 증액해 미국의 부담을 덜어주는 모범 동맹이라고 소개했다. 한국이 칭찬의 대상이 된 무대에, 정작 한국은 없었다. 그 결과, 원자력 추진 잠수함과 MRO(유지·보수·정비)를 넘어 미 해군 함정을 한국 조선소에서 건조하고 싶다는 메시지는 정부 관계자가 아니라 취재 기자의 입을 통해 전달됐다. 포럼 이후 리셉션에서 마이클 더피 국방부 획득·유지 담당 차관이 기자에게 한국 정부의 요구 조건들을 되묻는 장면은 외교 공백이 만들어낸 풍경이었다. 주미대사관의 인력이 충분하지 않다는 현실은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더 선택과 집중이 요구된다. 전략적으로 가장 중요한 자리에 대사가 직접 얼굴을 비추는 판단이 필요하다. 한미 동맹의 무게를 고려할 때, RNDF 같은 자리에 강경화 대사가 참석할 수 있도록 조율하는 것 역시 외교 역량의 일부다. 만약 “시미밸리는 워싱턴과 정반대에 있어 멀다”는 물리적 거리를 핑계로 댄다면, 설득력이 없다. 일본과 대만은 왔고, 참석자 상당수는 워싱턴에서 이동했다. 동맹은 성명서로 유지되지 않는다. 얼굴을 비추고, 같은 공간에서 시간을 쓰며, 관계를 축적할 때 비로소 작동한다. 미국 안보의 중심 무대에 일본과 대만은 있었고, 한국만 없었다. 이 사실이 남긴 메시지는 분명하다. 이를 놓친 대가는, 결국 한국이 치를 수 밖에 없다. 김경준 / 사회부 기자기자의 눈 안보 외교 안보 현안 애스펀 안보 안보 라인
2025.12.14. 17:50
월드컵. 그 이름만 들어도 심장이 뛴다. 주말 새벽마다 눈을 비비고 일어나 유럽 축구를 챙겨보는 나에게 월드컵을 직접 본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2002년 이후로 처음 내가 사는 곳에서 월드컵이 열린다고 하니 오래전부터 기대를 가져왔다. 올해 초 아이가 태어나고 나서는 아이와 함께 월드컵 경기장을 찾는 것이 꿈이었다. 지난 10월, 친구가 가르쳐준 사전 추첨 소식에 큰 기대 없이 응모했다. 전 세계에서 사람들이 몰릴 건데 과연 이게 될까 하는 생각이 컸다. 그런데 놀랍게도 당첨의 기쁨을 맛봤다. 그것도 한국 대표팀 조별예선 3경기 패키지였다. 가격은 상당했지만, 평생 몇 번 없을 기회라는 생각에 과감히 결제했다. 미래의 걱정은 미래의 나에게 맡기기로 했다. 당시만 해도 어느 도시에서 경기가 열리는지도 모른 채 티켓을 구매했다. 사실 상대 팀도, 경기장도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한국 응원석에서 목청껏 응원하고 싶었을 뿐이다. 친구들과 가족에게 자랑하며 이미 상상의 나래를 펼쳤다. 한국에 사는 친구들이 부럽다고 이야기를 할 때마다 우쭐했다. 하지만 조 추첨일이 다가올수록 현실적 걱정이 앞섰다. 대부분 축구 팬들이 조 편성과 32강 진출 가능성을 논할 때, 나는 다른 고민에 빠져 있었다. 도대체 어느 도시로 가게 될까 하는 실질적인 문제였다. 미국 내 어디든 환영이지만, 만약 멕시코나 캐나다라면 여러 준비가 필요할 터였다. 안 그래도 부담스러운 티켓 값에 여행경비가 더해지는 것은 물론, 돌이 조금 지난 아이를 데리고 비행기를 타는 것 또한 헤쳐 나가야 할 난관이었다. 12월 5일, 드디어 조 추첨 날이 왔다. 긴장한 채 중계를 지켜봤다. 전설적 농구선수 샤킬 오닐이 커다란 손으로 공을 뽑자마자 바로 A조에 한국이 편성됐다. 멕시코와 같은 조였고 한국은 세 경기 모두 멕시코에서 치르게 됐다. 한국의 축구 커뮤니티는 이동 거리 단축을 반기는 분위기였다. 조에서 3위를 해도 성적에 따라 32강에 진출할 수 있는 월드컵 특성상 무조건 올라갈 수 있다고 자부하는 목소리들도 있었다. 하지만 나는 복잡한 심경이었다. 최근 경기가 열리는 몬터레이 지역에서 신원미상의 유골이 수백개 발굴되는 등의 사건을 보면 안전에 대한 우려가 없지 않았기 때문이다. 더욱이 이제 아버지가 된 입장에서 가족을 생각하면 신중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고민이 커지고 있는 요즘이다. 용기를 내어 멕시코로 떠날 것인가 아쉽지만, 티켓을 양도할 것인가. 만약 티켓을 양도하게 된다면 미국에서 열리는 경기를 보려고 한다. 특히 보고 싶은 것은 한국이 조 2위로 32강에 진출했을 때 LA에서 열리는 경기다. 한인에게는 이보다 더 좋은 시나리오는 없을 것이다. 경기가 열리는 잉글우드의 소파이 스타디움은 태극기가 물결칠 것이다. 안정성과 접근성 면에서 최고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한국 대표팀의 홍명보 감독과 선수들에게 간절히 부탁드리고 싶다. 제발 좋은 성적을 거둬서 LA로 와달라고. 대표팀의 핵심 손흥민 선수가 자리 잡고 있는 LA에서 경기는 큰 의미를 가질 것이다. 월드컵은 누구에게나 인생에 몇 번 없는 특별한 축제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항공료와 숙박비, 그리고 현실적 제약들을 고려해야 하는 치밀한 계획이기도 하다. 그런데도 여전히 설렌다. 경기가 펼쳐지는 순간, 어느 곳이든 한국 응원단의 붉은 함성은 뜨겁게 울려 퍼질 테니까. 정말이지, 이 모든 것이 선수들의 발끝에 달려 있다. 그날 아이와 함께 외치고 싶다. 이것이 바로 우리 가족의 첫 월드컵이라고. 조원희 / 경제부 기자기자의 눈 월드컵 가족 월드컵 경기장 월드컵 특성상 한국 대표팀
2025.12.09. 18:45
아이들의 방의 곰 인형은 오랫동안 침묵을 전제로 한 존재였다. 곰 인형과의 대화는 아이의 상상 속에서만 존재했고, 그 상상은 아이들의 순수한 세계를 의미한다. 그런데 요즘의 봉제 인형은 침묵하지 않는다. 일부는 아이가 말을 걸기도 전에 먼저 응답하고, 심지어 그 응답은 거대한 인공지능 언어모델을 뿌리로 한다. 최근 한 연구기관의 테스트에서 인공지능(AI) 챗봇을 탑재한 곰 인형이 문제성 발언을 쏟아냈다. 싱가포르 업체 폴로토이(Folotoy)의 ‘쿠마(Kumma)’ 곰 인형은 GPT-4o를 탑재한 채 위험한 물건의 위치를 알려주거나 성적 대화를 이어갔다. 논란 이후 회사는 제품을 내렸다가 며칠 뒤 판매를 재개했다. 점검을 거쳤다지만, 아이들이 사용할 장난감에 대한 신뢰는 이미 무너진 뒤였다. 이 사실은 더는 이 문제가 단순한 기술 실수가 아니라는 사실을 드러낸다. 성인조차 거짓 정보에 흔들릴 수 있는 온라인 챗봇을 아이들의 장난감에 그대로 이식한다는 것 자체가 무모한 실험일 수도 있다. 장난감 내부에서 작동하는 목소리가 아이의 현실 감각과 상상력을 어디까지 지켜낼 수 있을지 의문이다. 어쩌면 기술은 아이의 친구가 아니라, 아이의 순수한 세계를 파고드는 어른들의 욕심일지도 모른다. AI 장난감 시장은 이미 해외에서 폭발적으로 성장하고 있다. 중국에서는 1500개가 넘는 업체가 경쟁 중이다. 바비를 만든 거대 장난감 기업 마텔조차 최근 챗GPT 개발사 오픈AI와 손을 잡았다. 이처럼 아이들의 방은 조용히 변모하고 있는데, 이 변화의 속도는 현행 규제 설립 속도보다 훨씬 빠르다. 아이가 인형을 껴안고 잠드는 순간조차, 인형 내부의 소프트웨어는 묵묵히 데이터를 수집하고 있을지 모른다는 불안은 더는 결코 환상이 아니다. 문제는 아이들이 어떤 방식으로 AI와 대화를 학습하느냐다. 언어모델을 그대로 장난감에 넣는 방식은 기술적으로는 매력적일지 몰라도 교육적·정서적 관점에서는 미지의 영역이다. 특정 장난감은 위험한 말을 피하기 위해 제약된 모델을 사용한다. 그러나 그 제약도 완벽할 수 없다는 사실은 모두가 이미 알고 있다. 대화형 AI가 부모가 없는 시간에 아이에게 어떤 세계관과 정보를 전달하는지 부모는 알 수도 통제할 수도 없다. 보안 문제는 더 직접적이다. 얼굴, 목소리, 위치 정보까지 장난감에 기록될 수 있는 시대다. 아이의 말 한마디가 서버 어딘가에 남아 있을 수 있다는 상상만으로도 섬뜩하다.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채 너도나도 뛰어들어 시장 규모만 커지는 것은 분명한 경고 신호다. 물론 AI 장난감이 가진 잠재력을 전부 부정할 수는 없다. 언어학습을 도와주고, 혼자 노는 아이에게 동료가 되어주는 기능은 충분히 유용하다. 아이는 원래 질문이 많은 존재이며, AI는 그 질문에 답할 수 있는 거의 무한한 지식을 알고 있다. 문제는 ‘답을 줄 수 있다’와 ‘답해야 한다’의 차이를 알고 있느냐는 점이다. 아이에게 필요한 것은 응답의 정확성이 아니라 응답을 기다리며 스스로 사고하는 시간이다. AI는 때로 지식을 제공하지만, 동시에 생각할 기회를 빼앗기도 한다. 지금 필요한 것은 우리가 기술에 어떤 역할을 맡길지에 대한 합의다. 아이의 상상력을 확장하는 도구로 AI를 활용할 수도 있지만, 그것은 강력한 보호 장치가 마련되어 있다는 전제하에서만 가능하다. 아무 준비 없이 AI를 인형 속에 담아 아이의 손에 쥐여주는 것은, 마치 위험한 무기를 예쁘게 포장해 장난감이라 부르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아이들이 곰 인형에 말을 건넬 때, 그 대화가 상상 속 친구와의 놀이가 될지, 알고리즘과의 비밀스러운 대화가 될지는 사회가 정하는 문제다. 아이의 동심을 지켜내고 싶다면, 아이의 방은 기술의 실험장이 되어선 안 될 것이다. 우훈식 / 경제부 기자기자의 눈 인형 친구 봉제 인형 인형 아이 인형 내부
2025.12.07. 18:00
미국 정부는 유학생 비자 심사를 지속적으로 강화해 왔다. 입국 후 불법 체류로 전환하거나 허가되지 않은 형태의 취업에 연루되는 사례가 꾸준히 보고돼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단속 강화의 배경과 별개로, 미국은 여전히 유학생을 필요로 한다. ‘전국국제교육협회 (NAFSA)’가 지난해 11월 발표한 분석에 따르면, 2023~2024학년도 전국 유학생 수는 약 110만 명으로 이들이 만들어낸 경제 효과는 438억 달러에 달한다. 이로 인해 37만8000개의 일자리가 유지되거나 새로 만들어졌다. 유학생이 지역 경제에 기여하는 영향이 명확한 만큼, 유학생을 어떻게 대우하고 어떤 환경을 제공할지는 단순 행정 편의가 아니라 국가 경쟁력과 직결된다. 그럼에도 유학생이 실제로 체류 규정을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시스템은 여전히 미흡하다. 국토안보부 산하의 여러 기관이 각각 다른 업무를 담당하며, 대학별 유학생 담당부서가 이를 토대로 개별 안내하는 구조가 유지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비자 발급 기준은 국무부가 관리하고, SEVIS 관리는 ICE가, 체류 신분 유지 기준은 USCIS가, 입국 시 판정은 CBP가 맡는 식이다. 이처럼 여러 기관이 나뉘어 있다 보니, 유학생이 반드시 알아야 할 규정이 한 문서에 정리되어 존재하지 않는다. 여권, I-20, I-94 관리 방식, 풀타임 등록 요건, 휴학 및 전과 절차, 주소 변경 신고 기한, CPT와 OPT 조건 등 신분 유지에 핵심적인 요소는 모두 중요하지만, 이를 한 번에 확인할 수 있는 공식 통합 자료를 찾기는 쉽지 않다. 대학별 안내 내용의 차이도 혼란을 키운다. 존스홉킨스대학교 국제학생처(OIS)는 공식 홈페이지에서 “I-94는 모든 유학생이 항상 출력해 소지해야 하며, 신분 확인 절차에서 반드시 요구된다”고 명확하게 안내한다. 그러나 일부 대학은 I-94를 항시 지참해야 한다는 표현을 사용하지 않고, 필요할 때만 제출하면 된다는 식으로 설명한다. 신분과 본인 확인을 위해 어떤 서류를 반드시 소지해야 하는지에 대한 기준뿐 아니라, 감축 등록을 허용하는 상황과 절차, CPT 승인 요건과 적용 방식 역시 대학마다 표현과 기준이 달라 일관성이 부족하다. 문서 형식은 모두 공식 안내처럼 보이지만, 내용은 통일돼 있지 않다. 같은 연방 규정에 근거해 작성된 문서임에도 대학별 설명이 서로 다르다는 점은 유학생이 어떤 지침을 따라야 하는지 판단하기 어렵게 만든다. 이런 환경 속에서 대부분의 유학생은 규정을 지키기 위해 여러 사이트를 뒤져 정보를 조합하거나, 국제학생 담당자에게 개별적으로 문의해야 한다. 일부 대학은 신분 유지 규정을 체계적으로 정리해 제공하지만, 여전히 많은 대학은 최소한의 핵심 정보만 제시하고 구체적 상황에 대한 해석을 학생에게 맡기는 형태다. 자연스럽게 유학생들은 행정적 실수로 신분 위반이 발생할 수 있다. 이 문제는 단순한 안내상의 불편으로 끝나지 않는다. 규정을 모르거나 잘못 이해한 행동이 신분 위반으로 이어지면, 비자 연장이나 입국 심사, CPT 또는 OPT 승인에서 실제 불이익을 받을 수 있다. 극소수의 규정 악용 사례를 차단하기 위해 강화된 행정이, 오히려 성실한 대다수 유학생에게 불필요한 부담이 되는 모순적 상황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따라서 유학생 신분 유지에 필요한 모든 핵심 규정을 하나의 문서 안에서 확인할 수 있도록 정부 또는 SEVP 차원의 표준화된 공식 안내문이 필요하다. 여권과 I-20, I-94와 같은 기본 서류 관리 방식부터, 풀타임 등록 기준과 휴학 절차, 전과 및 편입 관련 규칙, CPT와 OPT 신청 요건 등 유학생의 체류에 필수적인 요소를 정확하고 일관된 언어로 제시하는 문서가 마련된다면 혼란은 많이 줄어들 것이다. 학교마다 해석이 달라지는 문제도 상당 부분 해결될 수 있다. 정윤재 / 사회부 기자기자의 눈 유학생 보호책 대학별 유학생 존스홉킨스대학교 국제학생처 대학별 안내
2025.11.17. 18:57
43일간 이어진 사상 최장 기간의 연방정부 셧다운(일시적 업무정지)이 지난 12일 끝났다. 그러나 정부가 ‘정상화’됐다는 표현이 무색할 만큼, 이번 사태가 남긴 것은 공백과 손실뿐이다. 국가 운영은 한 달 넘게 사실상 멈춰 있었고, 공화당과 민주당은 책임을 지려 하기보다 정파적 계산만 따졌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과 공화당은 이번 셧다운 종결을 ‘정치적 승리’로 포장하려 한다. 오바마케어(ACA) 보조금 연장을 제외한 단기 지출법안(임시 예산안)이 통과됐다는 점을 내세운다. 그러나 공화당이 보조금 연장을 완전히 배제한 것은 아니다. 단지 논의가 내달로 미뤄졌을 뿐이다. 43일의 셧다운 끝에 얻은 것이 ‘시간 연장’뿐이라는 사실을 외면한 채 승리를 주장하는 것은, 국민의 고통을 회피하는 정치적 언어에 불과하다. 게다가 공화당이 입은 정치적 타격은 분명하다. 지난 4일 가주에서 실시된 연방 하원 선거구 획정안(프로포지션 50) 주민투표가 이를 보여준다. 이 안은 64.4%의 찬성으로 통과됐다. 민주당이 일방적으로 선거구를 그려 가주 의회에서 졸속 통과시킨 방식 자체가 문제임에도, 유권자는 반발하지 않았다. 오히려 중도층이 찬성으로 이동했다는 분석은 공화당이 민심과 얼마나 멀어졌는지를 여실히 드러낸다. 그 이유는 명확하다. 트럼프 2기 이후 지속된 강경 이민 정책, 그리고 이번 셧다운 장기화로 공화당은 중도층의 신뢰를 잃었다. 프로포지션 50의 통과는 민주당의 전략적 성공이 아니라, 공화당이 스스로 만든 정치적 자해에 가깝다. 그렇다고 민주당이 반사이익을 얻은 승자였던 것도 아니다. 민주당 역시 이번 사태의 명백한 패자이며, 책임은 오히려 더 무겁다. 셧다운을 장기화시킨 직접적 요인은 오바마케어 보조금 연장이었다. 민주당은 이를 ‘서민 보호’라는 명분으로 삼아 공화당 예산안에 완강히 반대했다. 그러나 그 명분은 현실과 충돌했다. 저소득층 식료품 지원 프로그램(SNAP), 임산부·유아 영양 보조 프로그램(WIC) 등 생계 기반 프로그램이 중단 위기에 놓인 상황에서, 민주당은 저소득층의 삶보다 정권의 상징물인 ‘오바마케어’에 더 큰 우선순위를 뒀다. 국민 생활이 흔들리는 와중에 민주당이 선택한 것은 타협이 아니라 정치적 고착이었다. 이는 서민 보호가 아니라 서민을 협상의 카드로 사용한 것과 다름없다. 민주당 내부의 혼란도 심각했다. 공화당 예산안에 찬성한 야권 상원의원 8명 중 7명이 민주당이었다. 이에 척 슈머 민주당 상원 원내대표는 당내 의원들로부터 공개적인 비난과 퇴진 요구까지 받았다. 민주당은 내부 분열을 노출하며 리더십 부재를 스스로 입증했다. 결국 이번 셧다운은 이념 경쟁도, 정책 논쟁도 아니었다. 양당이 서로의 실책에 기대며 책임을 미루는 과정이었을 뿐이다. 공화당은 민심을 잃었고, 민주당은 자신들이 보호해야 한다고 주장한 계층에게 가장 큰 부담을 떠넘겼다. 대가는 고스란히 국민에게 돌아갔다. 43일 셧다운의 결론은 단순하다. 승자는 없다. 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지듯, 양당의 갈등 속에서 피해를 본 건 국민뿐이었다. 양당이 책임을 논하려면, 서로에 대한 비난에 앞서 국가를 볼모로 삼는 정치부터 끝내야 한다. 김경준 / 사회부 기자기자의 눈 셧다운 승자 연방정부 셧다운 이번 셧다운 공화당 예산안
2025.11.16. 18:00
지난해 회사 근처에 음료 가게가 문을 열었다. 주변에서 많이 볼 수 있는 보바티 가게였는데 사람들이 줄을 길게 서서 의아했다. 알고 보니 그곳에서 유명 인플루언서가 만든 디저트를 판매하고 있었다.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사람들은 기꺼이 시간을 들여 줄을 섰다. 인플루언서가 직접 디자인했다는 손바닥 반만한 케이크가 20달러 가까이에 팔리고 있는 것을 보면서 우리가 의식하지 못한 사이 인플루언서는 이미 우리 일상 깊숙이 스며들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인플루언서라고 하면 보통 수백만 명의 팔로워를 거느린, 연예인과 비슷한 지명도를 가진 유명인을 떠올린다. 그러나 요즘은 훨씬 더 작은 규모의 크리에이터들이 실질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소셜미디어에서 친구처럼 대화하며 제품, 서비스, 업체를 소개하고, 일상 속에서 자연스럽게 소비를 유도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이 올린 “이거 진짜 좋아요” 한마디가 광고 문구보다 더 큰 힘을 발휘한다. 이런 영향력을 설명할 때 자주 쓰이는 말이 ‘인게이지먼트(engagement)’다. 인게이지먼트란 인플루언서의 콘텐츠에 대해 팔로워가 얼마나 반응하는지를 보여주는 지표로, 좋아요나 댓글, 공유 같은 행위를 포함한다. 팔로워 수가 아무리 많아도 반응이 적으면 실제 영향력은 제한적이다. 반대로 팔로워 수는 적지만 반응률이 높으면 더 가치 있게 평가된다. 최근 기업들은 팔로워 숫자보다 인게이지먼트 비율이 높은 인플루언서를 선호하는 추세다. 특히 팔로워 수가 수천 명에서 수만 명 정도인 ‘마이크로 인플루언서’가 주목받고 있다. 이들은 특정 분야에 집중하고 팔로워와의 관계가 밀접해, 브랜드 입장에서는 광고효과 대비 효율이 높다. 미국 내에서는 한국의 뷰티 제품들이 커다란 인기를 끌고 있는데 이는 뷰티 브랜드들이 틱톡을 중심으로 한 마이크로 인플루언서 활용에 적극적으로 나선 결과물이라는 진단이 많다. 이 외에도 식당 등 소상공인들이 주로 하는 업체들은 인플루언서 마케팅을 통해서 매출 상승을 끌어낸 사례가 많이 소개되고 있다. 물론 부작용도 있다. 팔로워 수를 조작하거나 가짜 계정을 동원해 인게이지먼트를 부풀리는 사례가 늘고 있다. 제품을 소개해놓고 실제로는 품질이 떨어지거나 판매 후 관리가 부실한 경우도 많다. 인플루언서와 협업한 소상공인이 계약 조건이나 수익 배분 문제로 피해를 보는 일도 종종 발생한다. 인플루언서 마케팅이 빠르게 확산하면서 그늘 또한 커지고 있다. 그런데도 인플루언서와 소상공인의 협업은 여전히 잠재력이 크다. 중요한 것은 서로의 역할을 명확히 하고 신뢰를 바탕으로 관계를 맺는 일이다. 인플루언서는 단순히 팔로워 수를 자랑하는 대신 진정성 있는 콘텐츠로 신뢰를 쌓아야 하고, 브랜드나 소상공인은 제품 품질과 협업 조건을 투명하게 관리해야 한다. 소비자 역시 맹목적으로 추천을 따르기보다 ‘왜 이 사람이 이 제품을 권하는가’를 스스로 판단할 필요가 있다. 결국 인플루언서 생태계가 건강하게 성장하려면 상생이 전제돼야 한다. 마이크로 인플루언서를 통해 작은 기업도 충분히 주목받을 수 있고, 소비자는 자신과 맞는 정보를 더 쉽게 얻을 수 있다. 다만 그 모든 과정의 중심에는 ‘진정성’이 있어야 한다. 디저트 가게의 긴 줄이 보여주듯, 소비자들은 이제 인플루언서의 한 마디에 움직인다. 인플루언서라는 문자 그대로 사람들에게 영향력을 끼치는 것이다. 그 영향력이 올바른 방향으로 쓰이려면 결국 중심엔 신뢰가 있어야 한다. 조원희 / 논설실 기자기자의 눈 진심 인게이지먼트 비율 뷰티 제품들 제품 품질
2025.11.10. 18:25
유튜브에 코카콜라의 한 광고 영상이 업로드됐다. 그래픽인듯하면서도 실사 같고, 생생한 디테일이 돋보이지만, 어딘가 뭉그려뜨려진 것 같은 모습. 인공지능(AI)을 활용한 제작된 동영상이다. 올해 연말 시즌을 앞두고 코카콜라는 전적으로 AI 기술을 사용한 광고 캠페인을 제작했다. 그러나 이 실험적인 시도는 대중과 창작계 그 누구에게서도 환영받지 못했다. 소비자는 “정이 없는”, “영혼이 빠진” 느낌이라는 반응을 보였고, 광고계 내외에서는 AI가 창작의 본질을 위협하는 것이라고 질타했다. 코카콜라는 이번 캠페인을 통해 시간과 비용을 절감하고 AI 스토리텔링을 브랜드 자산에 접목하려 했던 것이라고 배경을 밝혔다. 실제로 제작사 측은 기존보다 빠른 제작 과정을 강조했다. 그러나 온라인 반응은 차가웠다. 유튜브 사용자들은 “표정이 이상하다”, “겨울 느낌이 살아나지 않는다”, “인간미가 없다”고 댓글을 달았다. 영상에 대한 ‘좋아요’는 3500여개, ‘싫어요’는 무려 4만5000개에 달했다. 이제까지 광고에서 중요한 덕목으로 여겨져 온 ‘따뜻함’ ‘공감’ ‘연결성’이 해당 제작물에서는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다는 것이 핵심 비판이다. 실제 분석기관 조사에서도 이번 코카콜라의 광고에 대한 긍정적 반응은 7.4%에 불과했다. 광고뿐 아니라 영화·드라마 업계에서도 AI에 대한 저항은 본격화되고 있다. 배우조합(SAG-AFTRA)과 각종 작가 단체, 배우들이 AI 대체에 크게 경각심을 갖고 있다. 예컨대 최근 등장한 AI 배우 틸리 노우드 논란이 대표적이다. 배우조합은 노우드가 실제 배우들의 퍼포먼스를 무단으로 학습해 만들어졌으며, 이는 배우들의 생존권을 위협한다고 성명을 냈다. 또한 작가들도 자신의 직업이 ‘AI 보조’형이 아니라 인간 고유의 창작역량이란 점을 강조하며 집단행동을 통해 조건 개선을 이뤄냈다. 이들의 반감은 기술 변화에 대한 거부감이 아니라, ‘기계가 인간의 감정과 경험을 복제해서 대체하는 것’에 대한 문제 제기여서 더 복잡한 면이 있다. 광고·미디어·엔터테인먼트 영역에서는 AI가 확산하면서 생산성 제고, 비용 절감, 시간 단축이라는 장점이 명확해졌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고용 불안, 직무 재정의, 저품질 콘텐츠의 범람 등의 문제가 제기된다. 또한, 광고 업계에서 인간 중심 제작이 사라질 경우 브랜드 정체성 손상, 소비자와의 감정적 연결 약화 등의 역효과가 나타날 수 있다는 분석도 있다. 이번 AI 광고 논란은 단순히 한 기업의 잘못된 선택이라기보다는, 기술 변화가 창작·광고·문화 산업에 던지는 숙제로 보인다. 우선, ‘기술이 인간을 대신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이 중심이다. 기업 측은 효율성과 혁신을 내세웠지만, 그 대가로 공감을 잃었다. 고용 측면에서는 배우, 작가, 디자이너 등 창작 기반 직무들이 AI 도구에 의해 변형 또는 축소될 가능성이 커졌다. 기업은 AI 도입 시 창작자와의 협업 모델을 명확히 하고, 창작자의 권리·보상 구조를 검토해야 할 도의적 의무가 있다. 반대로 노동조합과 업계는 AI 활용의 경계선을 설정하고, AI라는 이유만으로 사용을 막지 않도록 규범을 마련해야 한다. 이때 소비자는 기술 변화의 수혜자이자 목격자로서, 어떤 콘텐츠가 진정 공감과 연결을 주는지, 효율적인 판단이었는지 결정하게 될 것이다. 우훈식 / 경제부 기자기자의 눈 고통 창작 광고계 내외 온라인 반응 광고 캠페인
2025.11.09. 18:00
트럼프 행정부가 다시 강경한 이민 정책을 밀어붙이면서, 유학생이나 취업비자 소지자들의 불안이 커지고 있다. 언론은 “외국인이 부당한 대우를 받고 있다”는 사례를 반복해 보도하지만, 대부분의 경우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정부가 이미 존재하는 규정을 원칙대로 집행하는 데 가깝다. 문제의 상당수는 체류자가 법의 구조를 정확히 이해하지 못한 데서 비롯된다. 결국 중요한 것은 정부의 강경함이 아니라, 본인이 자신의 신분과 체류 조건을 얼마나 명확히 알고 있느냐다. 최근 가장 많은 혼란과 사고를 낳는 지점은 바로 ‘비자(Visa)’와 ‘신분(Status)’의 구분이다. 두 단어는 비슷하게 쓰이지만, 법적으로 완전히 다른 의미를 가진다. 비자는 미국에 ‘입국할 수 있는 허가증’이다. 해외에 있는 미국 대사관이나 영사관에서 발급받으며, 입국을 시도할 수 있는 권리를 의미한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문을 여는 열쇠에 불과하다. 실제로 문 안에 들어와 머무를 수 있는 권리는 신분(Status)이 결정한다. 입국 시 세관국경보호국(CBP) 담당자가 부여하는 체류 자격이 바로 그것이다. 이 차이를 이해하지 못하면 낭패를 본다. 비자가 만료되면 체류가 불가능하다고 착각하거나, 반대로 신분이 끝났는데 비자가 남아 있으니 괜찮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실제 법적 효력은 반대다. 비자가 만료돼도 신분이 유효하면 합법 체류가 가능하고, 신분이 만료되면 비자가 살아 있어도 체류 자격은 사라진다. 예를 들어 F-1 학생 신분은 I-20에 명시된 프로그램 종료일까지 유효하며, 종료 후 60일의 유예기간이 주어진다. 그 기간이 지나면 ‘Out of Status’로 간주된다. 따라서 비자 만료일보다 I-94, I-20, DS-2019 등 신분 관련 서류의 기한을 우선적으로 확인해야 한다. 입국 후 체류 목적이 달라질 경우에는 ‘신분 변경(Change of Status)’ 절차를 거쳐야 한다. 예를 들어 관광비자(B-2)로 입국한 뒤 공부를 시작하려면, F-1 신분으로의 변경이 승인된 이후에만 수업이 가능하다. 승인 전에 수업을 시작하면 불법 체류로 간주될 수 있다. USCIS(이민국) 정책 매뉴얼에도 “승인 전에는 새로운 활동을 개시하지 말라”는 조항이 명시돼 있다. 신분 변경은 I-94 만료 전에 신청해야 하며, 승인된 시점부터 새 신분이 효력을 가진다. 불가피한 사유가 입증되면 만료 후에도 예외적으로 승인될 수 있지만, 이는 극히 제한적이다. 한편 비이민 체류자가 영주권자로 전환하는 절차는 ‘Adjustment of Status(AOS)’라 불린다. 이는 Form I-485를 통해 미국 내에서 진행할 수 있으며, 합법 신분 유지가 기본 조건이다. 신분 위반 이력이 있을 경우 이민법 245조(c)에 따라 조정이 금지되지만, 시민권자의 직계가족처럼 일부 예외 규정도 존재한다. 즉, AOS는 단순한 연장이 아니라 신분의 성격 자체를 바꾸는 절차다. 트럼프 행정부의 강경한 이민 정책은 새로운 규제라기보다 기존 법의 ‘엄격한 집행’에 가깝다. 따라서 체류자에게 필요한 것은 불만이 아니라 이해와 대비다. 자신의 신분 유형과 체류 만료일, 변경 절차, 출입국 요건을 정확히 파악하고 의심스러운 부분은 전문가나 USCIS에 직접 확인해야 한다. 대부분의 문제는 행정 착오나 기한 관리 실패에서 비롯되지만, 그 복구조차 제도를 이해한 사람만이 할 수 있다. 이민 제도는 복잡하지만 임의적이지 않다. 정부의 변화보다 위험한 것은 무지이며, 체류의 안정은 결국 스스로 공부하고 준비하는 사람에게 돌아간다. 정윤재 / 사회부 기자기자의 눈 체류 신분 체류 신분 비이민 체류자 신분 변경
2025.10.20. 19:33
LA시정부 수장들이 또다시 한인타운을 찾았다. 캐런 배스 LA시장과 짐 맥도널 LA경찰국(LAPD) 국장이 지난 9일 나란히 참석한 ‘한인타운 치안 간담회’는 한인사회와의 소통을 강조하기 위한 자리였다. 그러나 간담회가 끝난 뒤 남은 것은 익숙한 장면과 공허한 약속뿐이었다. “LAPD는 이민세관단속국(ICE) 단속에 협조하지 않는다.”, “노숙자와 불법 노점 문제에 적극 대응하겠다.” 수년째 되풀이된 문장이 또 한 번 회의장을 채웠다. 맥도널 국장은 “LAPD는 1979년부터 ICE의 불법체류자 단속에 절대 협조하지 않는다”고 재차 강조했다. 그러나 이 말은 이미 수십 년째 반복되어온 원칙일 뿐이다. 주민들이 듣고 싶었던 것은 문장 하나의 재확인이 아니라, 그 원칙이 실제로 어떻게 지켜지고 있는지에 대한 구체적 근거였다. 불체자 단속 소문이 돌 때마다 한인사회가 느끼는 불안은 여전하다. “우리는 개입하지 않는다”는 선언만 되풀이되는 사이, 커뮤니티는 여전히 공포 속에 스스로를 방어해야 했다. 원칙만 있고 실행은 없는 현실이다. 이번 간담회에서 거론된 의제 역시 낯설지 않다. 노숙자, 불법 노점상, 낙서 등. 매번 등장하지만, 결코 해결되지 않는 주제들이다. LA시와 LAPD가 같은 문제를 언급하는 사이, 거리의 현실은 오히려 악화됐다. 인도 위엔 여전히 노숙자 텐트가 줄지어 있고, 불법 노점은 늘었으며, 벽에는 낙서가 덧칠되고 있다. “적극 대응하겠다”는 말은 회의록에 남았을 뿐, 현장에서는 사라진 지 오래다. 주민들이 묻고 싶은 것은 단 하나다. “지금까지 나온 대책 중 실제로 작동한 것이 단 하나라도 있었는가?” 배스 시장은 “한인 커뮤니티와 협력하겠다”며 이민자 권리 정보 한국어 제공과 법률 지원 프로그램(Represent LA)을 언급했다. 하지만 이 역시 새로운 대책이 아니라 기존 사업을 되풀이한 수준이다. 정책의 언어는 언제나 그럴듯하지만, 실행은 없다. 말은 부드럽고 사진은 보기 좋지만, 주민의 체감은 전무하다. LA시의 정책은 늘 계획 단계에서 멈추고, 한인타운의 현실은 늘 그 자리에 머문다. 문제는 간담회 형식에도 있다. 매번 열리는 이런 회의는 ‘소통’의 장이 아니라 ‘연출된 대화’의 무대다. 사전에 정해진 발언자들이 준비된 질문을 던지고, 관계자들은 원론적인 답변으로 시간을 채운다. 회의가 끝나면 언론용 사진 몇 장만 남고, 다음날이면 모든 것이 잊힌다. 게다가 현장을 찾았다며 ‘점검’이라는 이름을 붙이지만, 길거리에 나가 문제들을 직접 보는 모습은 나오지 않았다. 결국 치안 현장 점검은 탁상행정에 머무를 뿐, 아무것도 점검되지 않았다. 한인타운 주민들은 이제 ‘말의 정치’에 지쳤다. “협력하겠다”, “지원하겠다”는 구호는 수없이 들었다. 이제 필요한 것은 새로운 약속이 아니라 실행의 증거다. 회의가 아니라 현장에서의 변화, 말이 아니라 행동으로 보여줘야 한다. 배스 시장과 맥도널 국장의 방문은 상징적으로는 의미가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 방문이 실질적 변화로 이어지지 않는다면, 그것은 단지 ‘왔다 갔다 한 행정 퍼포먼스’에 불과하다. 한인타운의 문제는 문서 속 정책 항목이 아니라, 매일 그 거리를 걸어야 하는 주민들의 생존 문제다. 같은 약속을 반복하고, 같은 대책을 재탕하는 간담회라면 차라리 열지 않는 것이 낫다. 문제를 인식하고 있다는 말 만큼 무책임한 위로는 없다. 한인타운 치안 간담회가 진정한 의미를 갖기 위해서는, 이제 말이 아니라 변화의 결과로 증명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이 회의는 또 한 번의 ‘도돌이표 정치’로 기록될 것이다. 김경준 / 사회부 기자기자의 눈 한인타운 약속 한인타운 주민들 한인타운 치안 불법체류자 단속
2025.10.19. 18:54
올해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주요 부문 수상이 가장 유력하다고 얘기되는 영화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One Battle After Another)’를 보았다. 평소부터 좋아하던 폴 토마스 앤더슨 감독이 연출한 데다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숀 펜, 베니시오 델 토로 같은 최고의 연기파 배우들이 나온다고 해서 망설임 없이 골랐다. 영화는 무척 훌륭했다. 3시간에 가까운 상영 시간 동안 지루함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정말 잘 만든 영화는 이런 것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 같았다. 2시간 50분 중에서 단 한 장면이라도 뺀다면 영화 전체가 무너질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 정도로 아주 잘 짜여진, 완벽에 가까운 영화였다. 장면마다 다층적인 의미가 숨어 있어서 생각할 거리를 많이 주는 영화지만 한편으로는 그런 메시지에 전혀 신경 쓰지 않고 봐도, 짜릿하게 즐거운 영화였다. 대중성과 예술성을 동시에 잡았다고 볼 수 있다. 최고 수준의 각본과 연출은 연기자들을 통해 완성됐다. 주연 배우들은 최근 온라인에서 많이 쓰는 말처럼 영화 내내 ‘연기 차력쇼’를 펼쳤다. 특히 연방요원 록조 역의 숀 펜의 연기는 그의 긴 커리어를 비춰봐도 최고의 퍼포먼스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특출났다. 영화는 급진적인 사상을 가진 테러리스트 그룹과 이를 잡으려는 연방요원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두 단체가 대립하는 과정에서 치정이 얽히고 서로 좇으면서 숨 가쁘게 달려가는 이야기다. 16년에 걸친 이 과정은 현재 양극화된 미국 사회를 정확히 보여준다. 주인공 밥 퍼거슨을 연기한 디카프리오는 이 영화가 극단주의로 치닫고 있는 현 사회를 보여주는 거울과 같다고 말했다. 실제로 영화에서는 연방 청사를 폭탄으로 파괴하는 급진 그룹과 비밀스러운 백인 우월주의 그룹이 두 축으로 등장하며 대규모 이민 단속이 이야기를 이끌어 나가는 사건 중 하나다. 그 어느 때보다 갈려 버린 미국 사회를 이보다 정확하게 보여주는 영화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각본을 쓴 앤더슨 감독은 20년 이상 아이디어를 가지고 있었는데 공개하는 시점은 이보다 더 적절할 수 없었다는 소회를 밝히기도 했다. 영화를 보는 내내 나에게 맴도는 한 가지 키워드는 ‘소속감’이었다. 영화에 나오는 모든 등장인물들은 사실상은 단 하나를 위해 싸우고 있다. 바로 소속감이다. 그것이 테러리스트 그룹이든, 백인 우월주의 그룹이든, 서류미비자들을 숨겨주는 이민자 단체든, 수녀회로 위장한 대마초 농장이든, 혹은 그저 댄스 파티에 가는 고등학생들 친구 집단이든, 등장인물은 모두 ‘자신이 속한 곳’을 위해서 노력한다. 감독은 최근 인터뷰에서 끝없이 대립하여 양 극단에 서 있는 사람들에게서 찾을 수 있는 공통적인 인간성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싶다고 말한 바 있다. 나에게는 그것이 삶의 고단함에서 오는 외로움과 그 외로움을 느꼈을 때 자신이 기댈 수 있는 곳, ‘소속’을 원하는 마음이라고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이러한 소속을 갖게 됐을 때 그것을 지켜내기 위해 싸운다. 결국 영화는 서로 다른 진영에 선 사람들조차도 모두 ‘자신이 속한 공동체를 지키기 위해 싸우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메시지는 나에게 절절하게 다가왔다. 8개월 된 딸을 키우고 있는 나는 딸을 위해서 무모한 싸움에 나서는 밥 퍼거슨의 캐릭터에 더 몰입했을지도 모른다. 혼란한 시대 상황 속에서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가족과 공동체를 지키기 위해서 영화 제목처럼 끝없는 싸움에 나서고 있다. 이 영화는 그렇게 보이는 혹은 보이지 않는 전투를 하고 있는 사람들을 위한 헌사다. 조원희 / 논설실 기자기자의 눈 소속 이름 테러리스트 그룹 영화 제목 영화 전체
2025.10.14. 20:27
젊은 층 사이에서 작은 휴대폰이 조용히 인기다. ‘유니허츠(Unihertz)’가 만든 초소형 스마트폰 ‘젤리스타(Jelly Star)’는 화면이 3인치에 불과하지만, 최신 안드로이드 13 운영체제를 갖췄다. 손바닥 위에 쏙 들어오는 크기, 투명한 외관, 반짝이는 LED 조명은 과거 휴대폰의 감성을 떠올리게 한다. 작고 귀여운 디자인에 끌린 젊은 이용자들은 작고 귀여운 이 폰을 통해 ‘덜 연결된 삶’을 경험하고 있다. 온라인 커뮤니티 레딧에는 “하루 7시간 쓰던 스마트폰 사용이 젤리스타로 1시간으로 줄었다”는 글이 올라왔다. 오래 사용하기엔 화면이 너무 작고, 긴 글을 쓰기도 불편하다. 결과적으로 온라인에 머무는 시간이 줄고, 오프라인의 시간이 늘어난다. 이런 방식으로 일부 젊은 층은 ‘디지털 미니멀리즘’을 실천하고 있다. 더 큰 화면, 더 강한 성능을 좇던 스마트폰 시장에서, 오히려 작고 불편한 폰이 주목을 받고 있다. 이 현상의 배경에는 디지털 피로감이 있다. 무한한 정보, 끊이지 않는 알림, SNS 속 타인과 비교와 집중력 저하에 지친 젊은 세대가 ‘덜 연결된 일상’을 스스로 설계하려는 것이다. 삶에서 완전히 기술을 끊어내진 않지만, 필요한 만큼만 쓰도록 강제하는 식이다. 젤리스타 같은 제품은 그런 절제된 연결을 가능하게 하는 도구다. 작아서 덜 보게 되고, 덜 하게 만든다는 점이 오히려 매력으로 작용한 것이다. 이는 또 다른 시대적 피로감과 연관돼 있다. 기술이 너무 빨리, 너무 멀리 나아가고 있다는 피로감이다. 하루가 다르게 새로운 기능이 쏟아지고, 인공지능(AI)이 대화하고 글을 쓰고 이미지를 만드는 시대에, 많은 이들은 기술의 속도를 따라잡지 못한 채 숨이 벅찬 상태다. 젤리스타를 든 젊은 세대는 그 피로에 대한 항의처럼 보인다. 더 이상 ‘무엇을 할 수 있느냐’가 아니라, ‘무엇을 하지 않을 것이냐’가 중요해진 것이다. 기술이 인간의 삶을 확장시키는 동시에 압박하고 있다는 사실이 이 작은 스마트폰을 구매하게 되는 계기다. 이와 연관된 또 다른 원인으로는 ‘구식에 대한 향수’가 있다. 젤리스타의 디자인은 2000년대 피처폰을 떠올리게 한다. 요즘 Z세대가 다시 찾는 폴라로이드 카메라, CD플레이어, 덤폰(dumbphone) 열풍과 유사한 현상이라는 것이다. 레딧의 사용자들은 최신 기술이 주는 완벽함보다, 불완전하고 느린 과거의 감각에서 안정을 느꼈다고 말했다. 일각에서는 이 현상을 두고 ‘세대의 역주행’이라 부르기도 한다. 다만 이는 기술 사회에서 파생된 일종의 트렌드다. 유행에 뒤처지고 싶지 않은 이들과 남들과는 달라야 하는 젊은 층이 충돌하면서 발생한 반짝 인기일 수도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너무 많은 것으로부터 벗어나려는 본능으로도 느껴진다. AI 기술의 확산은 이런 흐름을 더 자극하고 있다. 이제 스마트폰은 일정 관리, 문자 작성, 사진 보정까지 알아서 해준다. 하지만 편리함이 쌓일수록 사람들은 점점 스스로 판단하고 결정할 기회를 잃는다. 젊은 세대가 작은 폰을 선택하는 건 이런 과잉 기능에 대한 반발일 수 있다. ‘모든 걸 대신해주는 기계’보다, 최소한의 기능만 가진 폰을 통해 스스로 통제감을 되찾고 싶다는 욕구가 반영된 것이라는 소리다. 모든 게 더 빨라질수록 느린 것에 더 시선이 가게 마련이다. 정말 필요한 건 더 많은 기능이 아니라 나 자신을 통제할 수 있는 방법일 수 있다. 우훈식 / 경제부 기자기자의 눈 연결 자유 스마트폰 사용 초소형 스마트폰 디지털 피로감
2025.10.12. 19:10
H-1B는 본래 미국에서 구하기 어려운 특수 전문직을 일정 기간 보완하려 만든 비자다. 지난 19일 발표한 백악관의 ‘특정 비이민 노동자 입국 제한’ 포고령은 이 취지를 현실에 맞게 정렬하기 시작했다. 지난 21일 이후 접수되는 신규 H-1B 고용 청원서(I-129)에는 10만 달러 납부가 연계되고, 미납이면 비자가 나와도 입국 단계에서 제한된다. 대상은 신규 접수분으로 한정되며 기존 보유자·9월 21일 이전 접수분·갱신·여행·재입국은 제외된다. 운용은 12개월 한시, 국가이익 예외는 케이스별 적용이 가능하다. 닫는 조치가 아니라 누가 끝까지 책임을 지고 들어올지를 앞단에서 가려내는 설계다. 이미 등록 단계의 선필터는 수치로 확인됐다. 2026 회계연도 전자등록에서 수혜자를 개인 단위로 묶고 여권 정보를 확인하자 유효 등록이 전년 47만342건에서 34만3981건으로 26.9% 줄었고, 1인당 평균 등록 수는 1.01까지 내려갔다. 그럼에도 일반 6만5000·석사 2만 쿼터는 지난 7월 18일 전량 소진됐다. 수요는 살아 있고, 중복과 허수만 빠졌다는 뜻이다. 여기에 21일부터 입국 단계의 10만 달러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 가격 신호는 ‘싼값에 많이’ 넣는 대량 신청의 계산을 앞단에서 바꾸고, 실제 가치가 분명한 자리만 추첨장까지 들어오게 만드는 역할을 할 가능성이 높다. 추첨은 남되, 추첨장 입장은 먼저 엄선되는 구조로 방향이 바뀌는 중이다. 이 흐름은 제도 설계와도 맞물린다. H-1B를 쓰려면 고용주는 노동조건신청서(LCA)로 직무·임금·근무지·기간을 신고·공개하고, 회사 내부 실제임금과 지역 통상임금 가운데 더 높은 금액을 최저선으로 지급해야 한다. 파업·직장폐쇄 중 대체 투입 금지와 회사 사유의 비생산 시간 임금 지급 의무까지 붙어 있어 “미국인 연봉 12만 달러 자리에 H-1B 7만 달러”식 임금 덤핑은 애초 계산이 잘 맞지 않는다. 이번 변화는 이 기본 구조에 입구의 비용 필터를 한 겹 더 얹어, 많이 넣는 복권 게임을 제값을 치르는 커밋 게임으로 바꾸는 단계다. 여기에 포고령 제4조가 다음 수순을 분명히 걸어뒀다. 노동부에는 통상임금 수준을 재조정하는 규정 개시를, 국토안보부에는 고임금·고숙련에 우선순위를 두는 선발 기준 마련을 각각 지시했다. 등록을 깨끗하게 하고, 진입을 가격으로 확인하며, 기준을 규정으로 고정하는 삼중 여과가 제도 안에 자리 잡도록 설계한 것이다. 단기 파장도 있다. 초기·영세 기업에는 체감 비용이 커질 수 있고, 일부 직무·지역에서는 구인 비용과 채용 리드타임이 늘 수 있다. 전환기에는 행정 안내와 심사 기준이 현장에 퍼지는 동안 일시적 혼선도 가능하다. 다만 이번 조치는 신규 접수분으로 한정되고 12개월 한시이며, 전략 분야·핵심 인력에는 국가이익 예외가 열려 있다. 축은 ‘채용을 막느냐’가 아니라 ‘누가 끝까지 책임을 지고 들어오느냐’로 옮겨가는 중이다. 평가는 데이터로 하자. 10만 달러 납부는 9월 21일 이후 접수분부터 본격 작동했으니, 효과의 본무대는 2026 회계연도 말과 2027 회계연도 초에 드러난다. 그때 우리는 등록·추첨의 중복 축소 폭, 승인 분포에서의 고숙련 유지와 중소 스폰서 진입률, 임금·선발 기준 개정 이후의 실제 임금 분포 변화를 보면 된다. 지금까지의 사실만 놓고 내릴 수 있는 결론은 간단하다. 제도는 문을 닫지 않았다. 추첨장에 아무나 들어오던 길을 정리했고, 끝까지 책임을 지는 쪽만 남게 만드는 길로 조용하지만 뚜렷하게 방향을 틀었다. 정윤재 / 사회부 기자기자의 눈 진입 지역 통상임금 신규 접수분 추첨장 입장
2025.09.22. 19: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