샌타애나 리버 오솔길을 따라 남편과 함께 걸었다. 우리가 걷는 왼쪽은 아스팔트 길인데 유모차, 자전거, 롤러스케이트, 스쿠터가 달린다. 오른쪽은 아주 작은 돌 섞인 모래가 깔려 있는데 그곳은 승마를 위한 길로 말이 다닌다. 그 길 너머는 깊은 숲 속이다. 그 아래로는 물이 흐르는 소리가 들린다.
숲 속과 모래길 사이에 기다란 사각형 모양의 하얀 플라스틱 울타리가 두 줄로 처져 있다. 그 울타리 바로 밑 모래땅에 물방울무늬가 같은 간격으로 둥근 도장을 찍어 놓은 것처럼 새겨져 있다.
자세히 보니 양옆에 밤새 매달려 있던 이슬방울이 모래땅을 뚫었나 보다. 자연 현상은 인간의 생각이 미치지 못할 만큼 정교하다. 울타리에 전력을 다해 매달렸던 방울들. 그것이 모래땅에 뛰어내려 남긴 가지런한 무늬처럼 나의 일상도 그렇게 정돈되고 평온해지기를 희망해 본다.
커다란 사냥개 목줄을 잡고 달리기를 하는 사람, 햇빛 가리개가 있는 유모차를 미는 젊은 여인, 무언가를 적으면서 주위를 살피며 걷는 젊은이, 세발자전거를 타는 손자 뒤를 힘겹게 따라가는 노부부, 롤러스케이트를 타고 춤추듯이 미끄러지는 학생, 스쿠터를 타고 날쌔게 달리는 청년을 보았다.
모두가 나름대로 목표가 있어서 노력하는 중이었다. 나는 당뇨가 있는 남편을 위해 정해진 시간에 나가 함께 걸었다. 그곳에 나온 사람들은 운동하며 몸을 단련했다. 우리는 신선한 공기를 가슴 깊이 들이마시며 자연의 숨결을 온몸으로 느꼈다.
매일 걷는 산책로에서 모서리를 돌면 늪지대가 있다.
그곳에 청둥오리 한 쌍이 보였다. 자유롭게 하늘을 날아 이곳까지 날아왔나 보다. 우리처럼 둘이 꼭 붙어다닌다. 수컷이 암컷을 졸졸 따라다닌다. 암컷은 지푸라기 같은 수초들 사이에서 잘 보이지 않는다. 수컷은 둥근 머리에 녹색 광택이 번쩍거려 한눈에 들어온다. 그 윤기가 빛 물결처럼 흘러 녹색 입자가 떠간다. 놀라지 않게 살그머니 손을 뻗어 사진을 찍었다. 수컷은 노란 부리와 짙은 녹색의 머리, 하얀 줄이 목걸이처럼 둘러 있다. 암컷은 어두운 황색이 섞인 부리를 가졌고 몸은 갈색과 베이지색이 섞인 얼룩무늬다. 이 얼룩무늬가 보호색 역할을 한다고 남편이 알려준다.
둘이 물 위를 떠다니며 가끔 고개를 돌리고 한 마리가 방향을 바꾸면 그 길을 주저 없이 따른다. 오랜 세월을 함께 살아온 한 쌍의 모습 같다. 청둥오리는 대부분 평생을 짝과 함께한다. 봄이 되면 그 짝을 찾아 서로 지켜 주고 가을이 되어 떠날 때도 함께 떠나겠지. 이 청둥오리 한 쌍의 인연이 강물처럼 오래도록 흐르고 고요한 평화 속에 머물기를 빌어본다.
청둥오리 앞에 머물러 한참을 바라보다가 다시 남편 손을 잡고 걷는다. 그는 이십 대 후반에 나를 만나 가정을 꾸리고 무역회사에 다니면서 온 세계를 누비고 다녔다. 유럽, 중동, 인도, 남아메리카 등 곳곳에 자수 원단을 팔러 샘플을 들고나갔다.
출장에서 돌아온 후, 늦은 퇴근길 교통사고로 목발 짚고 집으로 들어와 나를 놀라게 했던 적이 있었다. 지금도 그날 밤의 기억이 선명하다. 자기 일에 묵묵히 분투하며 가족을 보살피느라 온 힘을 다했던 시절이 아련히 떠오른다. 자수 무역회사를 그만두고 이민 길에 올라 낯선 이국 땅에서 언어와 문화의 장벽을 허물고자 안간힘을 썼다. 이곳에서 남편은 다시 원단 장사를 시작하였다. 한편, 이곳에 정착하기 위해 우체국 시험을 치르고, 의료기구 만드는 회사에서 납땜 연기를 맡으며 케이블을 연결하던 내 모습도 떠올랐다. 캘리포니아주 교사 자격증을 받으려 여러 번 영작문 시험에 도전하며 조마조마했던 그 시절도 생각났다.
우리 부부는 새로운 삶을 일구며 자리 잡았다. 그 후에 남편에게 갑자기 찾아온 갑상선암으로 수술 후 방사선 치료를 받으며 힘든 시기를 잘 견디고 은퇴했다.
남편은 은퇴 후 텃밭을 가꾸며 농사를 짓는다. 그는 부엌 창문 앞에 난초, 납풀, 장미꽃, 금불초, 제라늄, 부겐빌레아를 심어 내 마음과 눈을 즐겁게 해준다. 나를 위해 부엌 창문 앞에 다양한 꽃을 심는다. 흰 꽃, 보라색 꽃, 빨강 꽃, 노랑 꽃, 연분홍 꽃이 어우러져 창밖을 내다볼 때마다 눈과 마음을 환하게 밝힌다. 바람에 살랑이는 꽃잎을 보고 있으면 기분까지 가벼워진다. 그는 사시사철 나에게 변함없는 마음을 보내고 있다.
물 위를 나란히 떠가는 청둥오리를 바라보며 세월 속에 흘러온 우리 부부를 떠올린다. 물 위를 미끄러지듯 유유히 떠도는 청둥오리 모습이 평화롭다. 자연의 품 안에서 조화롭게 살아가는 그들의 모습이 우리 삶과 겹쳐 보인다. 지금까지 걸어온 길이 얼마나 소중한지 다시 깨닫는다. 남은 세월도 한결같은 사랑으로 감싸안으며 함께 나아가길 소망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