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혀진 영웅 6·25 참전용사] 참전용사 대부분이 90대 생존자 줄어 행사도 중단 숭고한 뜻 후세에 알려야
지난 2018년 샌타폴라시 베터런스 메모리얼파크에서 열린 6·25 참전용사 추모 행사. 참전용사들과 함께 화랑청소년재단(총재 박윤숙) 회원들이 참석해 감사의 꽃다발을 전달하는 모습. [샐리 로페즈 씨 제공]
노병이 사라지고 있다.
올해로 75주년을 맞은 6·25 한국전쟁이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있는 중이다. 참전 군인들이 하나 둘 세상을 떠나고, 이제 기념행사는 물론 흔한 추모깃발도 찾아보기 힘들다. 모두가 잊고 싶어은 분명 아닐 것이다. 전쟁의 상처와 교훈, 그 희생의 의미를 후세들에 전해준다면 노병들은 항상 우리곁에 있지 않을까. 한국전 참전 용사들의 현재를 살펴보고, 보훈당국이 기억하고 챙겨야 할 것들은 무엇인지도 점검한다.
(1) 사라지는 노병과 조직 (2) 한국 전우들의 현주소
(3) 한미 보훈 당국 대책은
캘리포니아 벤투라카운티의 고요한 소도시 샌타폴라.
2년 전까지 매년 7월 27일 이곳에서 열렸던 한국전쟁 정전 기념일 행사가 올해는 열리지 않는다. 한국전쟁 참전용사회(KWVA) 벤투라카운티 지부(챕터 56)의 데이비드 로페즈 회장이 지난 2021년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다. 리더가 사라지자 관련 모임과 행사도 없어지기 시작했다.
60년대 초반부터 추모비와 한반도 벽화가 있는 추모 공원에서 한 해도 빠짐없이 열렸던 행사가 이젠 역사 속으로 사라진 것이다. 이 행사는 2020년 전후로 많은 한인 인사들과 2세 청소년들이 찾아 감동을 받았었다.
로페즈 전 회장의 딸 샐리 로페즈(토런스 거주)는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한두 해 LA와 오렌지카운티(OC) 지회에서 기억을 위한 조그만 행사들을 해왔지만 그마저 동력을 잃어 더이상 모이지 못하게 됐다”며 “참전 용사 대부분이 이제 95세 전후의 고령자가 됐고, 커뮤니티와 공공기관의 관심도 예전같지 않은 것이 현실”이라고 전했다.
로페즈 전 회장은 2003년 벤투라카운티 126번 하이웨이를 ‘한국전참전용사 추모도로’로 지정하는데 앞장서기도 했다. 하지만 로페즈 가족과 생존 전우들은 지난해 지부 폐쇄 결정을 내리고 서류 작업을 마무리했다.
샌타폴라에서는 75년전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100여 명의 청년이 군에 입대한 것을 계기로 벤투라카운티의 한국전쟁과 전몰 장병 추모의 성지가 됐다. 전사한 군인들은 이웃들이자 학교 선후배, 아들과 딸이자 누군가의 연인이기도 했다.
1950년 발발해 3년 동안 지속된 한국전쟁에서 미군 3만6516명이 전사했고, 8176명이 실종됐다. 부상자도 10만명에 이른다.
샌타폴라 지역 출신 참전 군인 40여 명도 다시 고향에 돌아오지 못했다.
데이비드 로페즈 전 회장은 전투에서 살아남아 구사일생 돌아왔지만 적잖은 트라우마에 시달렸다. 전우들을 잊지 못하는 고통 속에서도 그는 전우회를 조직하고 60년 넘게 자리를 지켜왔다.
로버트 손 KWVA LA 지부 회장은 “단순히 참전 군인들이 모일 수 있는 시간과 공간이 없어진 것이 문제가 아니라 후손들이 직접 참전 용사들을 만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하며 이는 우리의 소중한 희생이 ‘삶이 아닌 기록’으로만 남는다는 것을 뜻한다”고 안타까워했다.
━
가난·외로움도 크지만 우리를 기억해줬으면
데이비드 로페즈 전 한국전쟁 참전용사회(KWVA) 벤투라카운티 지부 회장이 한국전 참전을 앞두고 훈련 후 전우들과 함께 촬영한 사진. 왼쪽에서 세 번재 총을 들고 있는 사람이 로페즈 회장이다. [샐리 로페즈 씨 제공]
LA 지회도 현재 등록된 참전 용사가 3~4명에 불과하다. 그나마 병원에 있거나 거동이 불편한 상태가 대부분이다. 지회는 주변 군소 지회들의 회원과 가족들을 흡수해 연락을 지속하는 노력을 하고 있지만 재정과 인력에서 쉽지 않은 작업이 되고 있다.
전국 400여 개 KWVA 지회의 상황도 크게 다르지 않다. 참전 군인들은 이제 고령인데다 다른 방법을 찾지 않는 이상 예전의 모임들은 진행이 어려워졌다. 그나마 자비를 털어 모임과 행사는 준비한 것도 수년째다.
연방보훈청(DOVA) 자료에 따르면 2025년 기준으로 한국전 생존 참전용사의 중간 나이는 92세며, 70% 이상이 88세 이상이다.
데이비드 피켓 KWVA 전국 회장은 “90대 중반에 접어드는 참전 군인들은 가족의 도움 없이는 홈리스에 가까운 가난과 외로움을 견디고 있는 것이 현실”이라며 “하지만 정작 이들은 얼마되지 않는 생활비 지원보다, 기억해주길 바라는 간절한 소망을 갖고 있다”고 전했다.
한반도를 지키기 위해 생명을 바쳤지만 이제 참전 미군들의 모습은 추억 속 사진으로만 남을 위기에 있다. 그 숭고한 뜻을 진짜 추억으로만 남길 것인지는 이제 한국 정부와 한인 사회의 의지에 달렸다.
샐리 로페즈는 “전쟁의 의미를 소중하게 기억하는 사람들이 먼저 움직여야 한다”고 당부했다.
“우리는 전쟁에서 되돌아오지 못해 예전과 같은 일상의 삶을 이어가지 못한 참전군인들을 추모하고 기억할 것이다.” 샌터폴라 한국전쟁 참전유공자 추모비 뒷면에 새겨진 전우들의 다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