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른 논에 물들어가는 것과 자식 입에 밥 들어가는 것만큼 보기 좋은 것은 없다.’ 어머니가 늘 하던 말씀이다. 청춘에 홀로 되어 두 남매 배 안 고프게 하고 올바르게 키우려고 몸이 부셔져라 일하셨다. 초등학교 문 앞에도 못가신 무학이지만 내 어깨 너머로 한글을 깨우쳐 개똥철학의 달인이 되신다.
근동에서 대지주였던 아버지는 내가 두살 때 뇌일혈로 돌아가셨다. 그 때부터 가장이 되신 어머니는 머슴들과 소작농들을 한 식구처럼 돌보며 일꾼들보다 더 열심히 손목이 휘어지도록 농삿일을 했다.
해기 서산으로 기울기 시작하면 옥이 언니는 무쇠 가마 솥에 삼만이 아재가 땔감으로 팬 장작에 불을 지핀다. 뜸이 돌기 시작하면 온 마당에 구수한 밥 냄새가 진동하고 누렁이는 제 꽁지를 잡으려고 마당을 뛰어다닌다.
저녁 햇살 받아 옻칠이 반짝이는 오래된 밥상은 우리 세 식구가 먹을 자리다. 근데 군데 갈라지고 터진 커다란 두리상 다리를 펴는 건 오빠 몫이다. 둥근 모양의 두리상은 여러 사람이 둘러앉아 먹기 편해 밥 먹을 사람 머릿수에 상관없이 수저만 더 갖다 놓으면 된다.
그 시절에는 끼니를 거르는 사람들이 많았다. 쌀 독에 바닥이 보이면 부엌에 연기 나는 집 앞을 어슬렁거리면 끼니를 해결 할 수 있던 시절이다.
단골로 오는 사람들은 일찌감치 와서 황토로 단단해진 마당에 물을 뿌려 쓸어주거나 돼지 우리를 치워 주기도 한다. 우리집은 언제나 사람이 넘쳐났다. 아버지가 안 계셨지만 나는 외롭지 않게 자라났다.
어머니는 배고픈 사람, 몸이 아픈 사람, 거동이 불편하신 어른, 동네를 떠돌던 미치광이 여자, 우리집 담벽 햇살 따스한 곳에 포대기 깔고 사는 동님(?)씨를 챙겼다. 아이들은 동님이 아재를 거지라고 놀려댔다. 동님씨는 일제 때 강제 징집 당해 전쟁터에서 두 다리가 잘려 불구자가 됐다. 흙 담장을 타고 새하얀 박꽃이 피면 동님씨는 꽃을 꺾어주며 머리에 꽂으라고 손짓을 한다.
몸으로 실천하고 가슴으로 새기는 사랑보다 더 훌륭한 가르침은 없다.
‘밤에 잘 잤나? 밥은 묵었나? 그라면 됐다 끊는다.’ 어머니는 매일 아침 일 분도 안 되는 짧은 전화를 친구 할머니에게 일년이 넘도록 했다. 할머니를 공주처럼 떠받들고 사랑하던 할아버지가 돌아가셨기 때문이다. 황야의 무법자 모자에 멋진 부츠를 신은 피니씨를 우리 애들은 카우보이 할배라고 불렀다.
골프왕 피니 할매는 국은 절대로 안 먹고 밥을 물에 말아먹지 않는다. 식모살이 할 때 주인이 매일 멀건 죽을 먹여 진절머리가 난다고 했다. 어머니는 남편 잃고 죽을만큼 힘든 친구의 생사를 확인하는 911 안전요원 노릇을 한 셈이다.
모든 걸 잃고 사랑하는 많은 것들이 사라진다 해도 산 사람은 살아 남는다. 살아있다는 것은 복잡한 사연이나 갈피 없는 방황이 아닌 아주 단순한 몸짓, 간단한 말 한마디, 사랑이 담긴 다정한 눈빛인지 모른다.
인생에는 공식이 없다. 어디서 어떤 때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 수 없다. 힘든 사람 다정하게 손잡아 주고 잔잔한 미소로 사랑을 전하는 작은 실천일 뿐.
어쩌면 사는 게 힘든 것이 아니라, 생을 힘들게 하며 사는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을 한다. 사라지는 것이 있는 것처럼 작지만 오래 남는 것들이 있다. (Q7 Editions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