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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광장] 6월28일 서울이 함락되던 날

Los Angeles

2025.06.24 18: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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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영세 / 은퇴목사

주영세 / 은퇴목사

1950년 6월28일 우리집은 성동구 신당동에 있었다. 현재 박정희 대통령 본가 앞집이다. 그날, 우리는 세상의 돌아가는 전황을 알 수 없었다. 집에 있던 최고급 라디오는 고장 났고, 신문도 오지 않았다. 오직 시내 쪽에서 들려오는 희미한 총성에 귀를 기울일 뿐이었다. 나중에야 그 소리가 국군 저격 사건의 총성이었음을 알게 되었지만, 당시에는 아이들 폭죽 소리처럼 아득했다.
 
해가 뜨자마자 시내 중앙청 국기 게양대의 깃발을 확인하려던 우리의 희망은 곧 실망으로 바뀌었다. 펄럭이는 깃발은 태극기가 아닌 낯선 검은색 인공기였다. 가족들은 침묵 속에 얼굴을 굳혔다.
 
오전 8시경, 낯선 두 사람이 동회에서 왔다며 9시까지 대문에 인공기를 그려 붙이지 않으면 “재미없을 것”이라고 위협했다. 난생 처음 듣는 험악한 말이었다. 형은 인공기를 본 적이 없어 그릴 수 없다며 난감해했다. 그런데 내가 대문을 열고 나가보니, 이미 동네 모든 집 대문에는 인공기가 붙어 있었다. 나는 기가 막혔다. 대체 언제, 어디서 보고 그린 것일까. 온 동네는 과거의 정겨움 대신 살벌한 냉기가 감돌았다.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9시가 넘어 나는 몰래 광희국민학교 옆 기갑부대 자리로 가봤다. 부대는 텅 비어 있었고, 장갑차도 군인도 그림자조차 없었다. 돌아오는 길에 들른 신당동 율원 파출소도 마찬가지였다. 경찰은 한 명도 없고, 붉은 완장을 찬 민간인 복장의 사람들이 보초를 서고 있었다. 그 많던 국군과 경찰은 다 어디로 간 것일까. 괴뢰군이 들어오지도 않았는데 빨치산들은 어디서 나타난 걸까. 집에 돌아와 아버지께 말씀드리자, 아버지는 앞으로 절대 밖에 나가지 말라고 당부하셨다.
 
10시가 넘자 남산 하단부 장충단 공원 일대에서 분명한 총격전 소리가 들렸다. 퇴로가 차단된 국군 잔여 병력과 추격하는 괴뢰군 사이의 치열한 전투였다. 총소리는 잠시 멈췄다가 다시 들려왔지만, 강도는 약해졌고 결국 끊어졌다. 이것이 서울 시내에서의 국군 마지막 저항이었다. 얼마나 많은 군인들이 희생되었을까, 가족들은 말없이 슬픈 표정만 지었다.
 
11시가 가까워지자 다시 대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문을 열어보니 무장한 사람들이 모여 있었고, 그중에는 사촌 형과 큰어머니, 아주머니가 보였다. 동숭동 청년단장으로 6.25 직전 훈련을 받고 임관한 사촌 형은 서울이 점령된 와중에 병력을 이끌고 우리 집에 도착했다. 지금 생각해도 그 시간에 어떻게 병력을 데리고 올 수 있었는지 놀랍다.
 
사촌 형은 동덕여중 근방에서 권총을 든 동대문 경찰서 소속 형사를 만났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 형사는 위험한 상황에서도 상관의 허락 없이는 통과시킬 수 없다며 길을 가로막았다고 한다. 사촌 형은 “세상에 이런 용감한 사람은 처음 봤다”며 그를 죽일 뻔했지만, 용감함에 감탄해 빨리 피신하라고 일러 보냈다고 했다. 조국을 위해 목숨을 아끼지 않았던 그 형사가 살았는지 죽었는지 알 수 없지만, 그 같은 이들이 있었기에 이 나라가 존재함을 깨닫는다.
 
12시경부터 약 한 시간 동안 서울 운동장과 동대문 부근에서 괴뢰군의 위협 사격이 계속되었다.  
 
오후 1시경, 우리는 군인들에게 주먹밥을 먹이고, 아버지와 협의 끝에 부대를 해산시켰다. 형은 군복을 벗고 사복으로 갈아입은 뒤, 큰어머니의 재촉에 한강을 향해 떠났다. 그러나 형은 결국 한강을 건너지 못하고 시내에서 체포되어 희생되었다는 소식이 나중에 전해졌다. 임신 중이던 아주머니도 9.28 수복 당시 서울역 부근에서 피신 중 박격포탄 파편에 맞아 뱃속 아이와 일가족 네 명이 몰살당하는 비극을 겪었다. 이 일로 아버지와 사촌 누나 역시 체포되어 모진 고문을 당하기도 했다.  
 
수복 후, 큰어머니는 아들이 그리워 무덤도 묘비도 없는 동작동 국군 묘지를 찾아 “대일아, 대일아” 아들 이름을 부르며 지내시다 돌아가셨다. 이 땅에 다시 있어서는 안 될 민족 비극 역사의 가슴 아픈 한 단면이다.  
 
오후 3시경, 무학봉 근처에서 외롭고 가녀린 기관총 소리가 들려왔다. 소리는 점차 약해지더니 30분 만에 완전히 멎었다. 한강 이북에서의 국군의 저항은 이것이 마지막이었다.  
 
해가 기울고, 주인이 바뀐 서울의 첫 밤이 어둠 속에 잠겼다. 서울이 함락되던 그날의 안타까운 모습이었다.

주영세 / 은퇴목사·ROTC 1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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