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신국' 내면의 영혼서 진리 찾기 시작 중세 내내 지대한 영향 끼쳐 세속 군주와 투쟁 때 영향력
기원후 410년에 로마가 고트족에게 함락되자, 이교도의 관점에서 재난의 원인을 '주피터'를 외면한 것에서 찾았다. 이에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런 이교도들의 논증에 답을 해야 했고, 이것이 '신국(412~427)'을 저술하게 된 배경이다. '신국'은 중세 내내 지대한 영향을 미친 책으로, 특히 교회가 세속 군주들과 투쟁할 때 영향력을 발휘했다. '신국'은 로마가 고트족의 점령으로 약탈당하는 동안 발생한 문제점을 고찰하면서 시작됐고, 그리스도교가 전파되기 이전 시대에 일어난 훨씬 더 참혹한 사건을 보여주려고 기획되었다. 우선, 아우구스티누스는 로마가 약탈당하는 동안 고트족이 그리스도 교인들에게는 경의를 표하고, 침범하지 않은 교회가 많았다고 한다. 즉, 고트족은 절대로 야만인이 아니라는 것이다. 되레, 다른 여러 도시에서 발생한 약탈보다도 참혹하지 않았던 것은 그리스도교의 영향 덕분이라고 했다.
그는 로마의 약탈 동안, 능욕당한 독실한 처녀들의 문제를 거론했다. 그 숙녀들은 아무 잘못이 없다고 했다. 즉, 다른 사람의 육욕이 그들을 더럽힐 수는 없다는 것이다. 정절은 마음의 덕이므로, 능욕당한 것으로 잃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실행하지 않았더라도 간음죄를 지으려는 의도로 잃게 된다고 했다. 만약, 능욕을 피하려고 자살했다면, 그것이 더 사악하다고 했다. 자살은 언제나 죄를 짓는 일이기 때문에 피해야 한다고 한다. 소크라테스의 생각과 같다. 단, 그들은 능욕당하는 것을 즐겨서는 안 된다고 했다. 만약 즐긴다면 죄를 짓는 행위라고 한다. 마치 마조히즘을 통한 쾌락을 의미하는 것 같다.
그는 플라톤에게 공감을 표하면서 가장 위대한 철학자라고 치켜세웠다. 다른 철학자들은 모두 플라톤에게 자리를 내어주어야 한다고 했다. 가령, 탈레스는 물과 함께, 아낙시메네스는 공기와 함께, 스토아학파는 그들이 말한 불과 함께, 불은 이전에 헤라클레이토스도 주장한 바 있다. 에피쿠로스는 원자들과 함께 떠나라고 했다. 즉, 플라톤에 대한 극찬이다. 여기서 언급한 철학자들은 모두 유물론자라는 공통점이 있다. 플라톤은 관념론자다. 유물론은 훗날 마르크스에 의하여 공산주의 이론으로 탈바꿈한다. 플라톤은 신이 어떤 신체도 갖지 않은 존재이지만, 만물이 신 때문에 존재함을 이해했다고 한다. 그러나 플라톤학파가 '육화'를 인정하지 않은 점은 비판했다. 또한 플라톤은 신의 존재를 알고 있었으면서 신을 숭배하지 않은 점은 비판했으나, 감각계는 이데아 세계보다 열등하다는 점은 인정한다.
신국의 본성에 대해서 그는 신의 선택을 받은 사람들로 구성된 사회라고 한다. 신에 대한 지식은 오로지 그리스도를 통해서 얻는다고 하면서, 더 높은 종교적 지식을 얻으려면 성서에 의존해야 한다고 한다. 이와 함께, 세계가 창조되기 전의 시간과 공간을 알려고 해서는 안 된다고 하면서, 창조 이전에는 시간과 장소가 없었다고 무에서 유를 신이 창조했음을 강조한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당시의 회의주의(허무주의)를 극복하기 위해 새로운 인식론을 전파했다. 당시에 외부의 경험 세계에서 인식을 시작하던 회의주의자들과 달리 그는 내면의 영혼에서 진리를 찾기 시작했다. 물론, 플라톤의 이데아 사상이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그는 하느님의 존재에 대한 믿음을 이성으로 확증하기 위해서 노력했다. 그는 '독백'에서 이성과 대화하는 목적에 대해서 말했는데, 하느님과 인간(영혼)을 알고 싶어서, 지혜를 포착하기 위하여, 인간 영혼은 과연 불사불멸한 것인지 스스로 터득하고 싶다고 했다. 이성은 답하기를 "진리는 외치고 있고, 그 안에 자기가 거처하고 있다고. 자기는 불사불멸한다고. 자기가 거처하는 처소는 신체의 그 어느 죽음에 의해서도 박탈되지 않는다"라고. 아우구스티누스는 신국과 사람의 왕국을 비교하면서 신의 나라는 그리스도교적 가르침을 따라가는 나라이고, 사람의 왕국은 인간의 탐욕에 의해 얼룩져있는 나라라고 차별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