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일요일, 32년간 몸담았던 교회에서 고(故) K 씨의 천국 환송 예배에 참석했다. 80여 명의 조문객이 엄숙한 분위기 속에서 그의 마지막 길을 배웅했다. 폐암 말기 판정을 받은 지 채 6개월도 되지 않아 향년 63세로 그는 결국 우리 곁을 떠났다.
K씨는 이민 후 사업 실패로 가정이 파탄 나 가족과 연을 끊고 떠돌이 생활을 했다고 전해 들었다. 그러다 내가 근무하는 회사에서 동료로 만나게 된 인연이다. 그는 언제나 쾌활하고 성실했다. 스스로 할 일을 찾아 솔선수범하는 모습은 경영주 입장에서 더할 나위 없이 귀한 직원이었다.
그런 그가 노후 자금을 마련하겠다며 세금을 공제하지 않는 사업체로 이직했을 때, 먼지 쌓인 창고에서 지게차를 운전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개인적인 소견으로는 그 열악한 환경이 폐암의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으리라 생각한다.
암 투병 소식을 듣고 식사 한 끼 대접하고 싶어 그를 불러냈다. 의사가 방사선 치료를 열심히 받으면 살 수 있다는 희망을 주었다며 그는 어느 정도 안심하는 듯했다. 그런데 잠시 화장실에 다녀온 뒤 식대를 계산하러 카운터에 갔을 때, 이미 그가 지불했다는 말을 들었다.
호되게 나무라자, 그는 평소 내게 신세 진 것을 조금이라도 보답하고 싶었다며 눈물을 글썽였다. 미리 준비해 간 작은 성의가 담긴 봉투를 그의 차 안에 던져주고 헤어진 것이 불과 한 달 전이었는데, 어느 날 갑자기 부음이 날아든 것이다. 그와의 이별은 나에게 죽음에 대해 진지하게 성찰하는 계기가 되었다.
인간은 누구나 한 번은 죽음을 맞이한다. 죽음은 피할 수 없는 운명이다. 유교의 운명론에 따르면 우리는 태어날 때 이미 죽음이 정해져 있다고 한다. 그러니 하루를 보낸다는 것은 그만큼 죽음에 가까워졌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우리는 지금 의학과 과학의 발전으로 ‘100세 시대’를 살고 있다. 건강한 몸과 마음으로 100세까지 사는 것이 신의 축복이 될 수 있지만, 치매 등으로 주변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며 장수하는 것이 타인에게는 감내하기 힘든 고통과 재앙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인간이 100세까지 산다 한들, 신적인 차원에서 보면 조물주가 눈 한 번 깜박이는 찰나의 순간과도 같다. 그래서 인생을 ‘초로(草露)’, 즉 풀잎에 맺힌 이슬에 비유하는지도 모른다. 햇볕이 나면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이슬처럼, 그 무엇도 영원한 것은 없다.
몇 년 전, 라디오 뉴스에서 들었던 이야기가 있다. 하버드대학교 연구진이 평소 ‘죽고 싶다’는 말을 입버릇처럼 하는 노인 60명을 대상으로 한 명씩 수영장에 빠뜨리는 실험을 했다는 것이다. 그 결과, 스스로 물속에 가라앉은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고, 100%의 노인들이 살려달라고 허우적거렸다고 한다. 그 이야기를 듣고 실소를 금치 못했다.
내 대학 동문인 최 선배는 올해 90세이다. 3살 어린 부인을 파킨슨병으로 올 초 먼저 떠나보내고 ‘짝 잃은 고무신’ 신세가 되었지만, 5년 넘게 눈물겹도록 아내 병수발을 했다. 주변 사람들이 혀를 내두를 정도로 지극정성이었다. 선배는 보청기를 착용하는 것 외에는 여전히 꼬장꼬장하다. 혈색도 좋고 걸음걸이도 제대로다. 그는 “내가 살아보니 85세에 죽는 것이 가장 적당하다. 너무 오래 살았다. 지금이라도 빨리 가야 하는데…”라는 말을 자주 한다. 내 판단으로는 그가 100세까지 장수하는 것은 무난할 것 같다.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겨야 한다고 한다. 하지만 좋은 일로 이름을 남기지 못하더라도, 후세에 악인으로 오명을 남기지 않고 죽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우리가 죽을 때 입고 가는 수의에는 주머니가 없다. 죽을 때 가져갈 것이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빈손으로 왔다가 가는 이 짧은 인생을 왜 쓸데없는 욕심으로 아옹다옹하는가. 왜 부정한 짓으로 남을 울리는가.
내 나이 이제 고희를 넘겼다. 남은 인생은 죄를 짓지 않고 타인에게 선을 베풀며 살다가, 지금이라도 자다가 죽는다면 그것이 바로 하늘이 내린 복이 아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