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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마당] 네 살 때 아버지의 회초리

Los Angeles

2025.07.21 18: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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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살 무렵 나는 함경북도 제일 끝자락에 있는 ‘서수라’라는 곳에서 살았다.
 
당시 서수라에는 일본인과 중국인이 많이 살았다. 어린 나에게 가장 익숙했던 것은 일본인들이 부르던 “미나미나 고로세 짱꼴라(모두 모두 죽여라 짱꼴라)”라는 노래였다. 어른들의 무분별한 말은 어린 내게 중국인을 얕잡아 보고 ‘죽일 놈’이라 여기게 했다.
 
우리 집 앞 언덕 너머에는 중국인들이 가꾼 채소밭이 넓게 펼쳐져 있었다. 봄이 되면 검은 바지에 옆트임 옷을 입은 중국인들이 어깨에 멘 저울 양쪽 바구니에 싱싱한 채소를 가득 담아 팔러 오곤 했다. 가지런히 담긴 알록달록한 채소는 마치 꽃꽂이 같아 어린 내 눈에도 인상적이었다.
 
어느 봄날, 또래 아이들과 함께 그 채소밭 언덕을 조심스럽게 올라갔다. 예쁜 빨간 무들이 흙 밖으로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한 아이가 무를 뽑자 너도나도 고사리 같은 손으로 몇 개씩 무를 뽑았다. 나 역시 몇 개를 뽑아 손에 꼭 쥐었다. ‘나쁜 짱꼴라의 것이니 아빠 엄마에게 칭찬받을 거야’라는 생각에 나는 황급히 집으로 달려 내려갔다.
 
마침 마당에 계시던 아빠와 엄마에게 나는 자랑스럽게 외쳤다. “아빠, 엄마! 이거 짱꼴라 것! 이거 짱꼴라 것!” 내 말을 들은 아빠와 엄마는 깜짝 놀라셨다. 아빠는 나지막이 “짱꼴라 것도 남의 것이니 가져오면 ‘도둑놈’이야!”라고 말씀하셨다. ‘도둑놈’이라는 말에 나는 큰 충격을 받았다. 아빠는 다른 말씀도 하셨지만, 내 귀에는 오직 ‘도둑놈’이라는 단어만 맴돌았다.
 
“영순아, 너 잘못했으니 맞아야겠지?” 아빠는 벽시계 뒤에 걸어두셨던 회초리를 내리시며 내 종아리를 몇 차례 때리셨다. 종아리의 통증보다 ‘도둑놈’이라는 말이 주는 충격이 훨씬 컸다. 풀이 죽은 나를 보며 아빠는 걱정스러우셨는지 나를 안고 달래주셨다. 아빠는 나를 꼭 안아주시며 “우리 영순이는 착하지?”라고 속삭이셨다. 그때 아빠의 위로와 사랑은 지금도 어제 일처럼 따뜻하게 느껴진다.
 
네 살 때 아빠에게 받은 이 교훈은 분별력이 없는 시기에 교육이 얼마나 중요한지 내 마음에 단단히 새겨졌다. 나는 아버지의 교육 방식을 아름다운 모델로 삼아 내 자녀들에게도 그대로 전수할 수 있었다. 네 살배기가 양심의 가책으로 고통받았던 그날의 기억은 내게 보석 같은 삶의 지침이 되었다.

이영순 / 샌타클라리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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