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부턴가 한국에는 미국 상품이, 미국에는 한국 물건이 흔해졌다. 그래서 요즘은 한국을 방문할 때 선물을 따로 준비하지 않는다. 한때는 귀한 물건이라며 이민 가방을 가득 채워 오가던 시절도 있었다.“뭐 필요한 거 없어?” 하고 물으면, 이제는 정말로 “그냥 와, 다 있어”라는 말이 현실이 되었다. 그렇게, 세월도 바뀌었고 세상도 달라졌다.
이민 초기에는 한국에 있는 가족이 그리워 매달 500달러 가까운 국제전화 요금을 낸 적도 있었다. 지금은 어떤가. 카카오톡, 보이스톡, 페이스타임으로 얼굴을 보며 무료로 대화할 수 있다. 시간도, 비용도, 거리도 훨씬 가까워진 세상이 되어버렸다. 코스트코에는 김치와 양념 불고기는 물론, 냉동 떡볶이와 김밥, 삼계탕, 떡국까지 다양한 한국 식품을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다. ‘한국 판매 1위(No.1 sales in Korea)’라는 문구가 붙은 인기 화장품들도 자주 눈에 띈다. 흐뭇한 마음으로 구경하고 있으면, 제품에 대해 묻는 외국인들도 종종 있다. 그럴 때면 나는 마치 한국 홍보대사라도 된 듯, 신나게 사용 후기를 늘어놓는다.
“이 제품 쓰면 너처럼 피부 고와지니?” 하고 묻으면, “당연하죠!” 하며 웃는다.
어릴 적 골목에서 숨바꼭질하며 외쳤던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는 ‘오징어 게임’ 드라마를 통해 넷플릭스로 전 세계에 퍼졌고, 블랙핑크의 로제가 부른 ‘아파트’ 덕분에 외국인들이 ‘아파트’를 영어 단어 ‘apartment’의 어원처럼 여길 정도가 되었다.
세상이 바뀐 만큼, 사람들의 반응과 시선도 달라졌다. 한국의 위상이 높아질수록, 한인들에 대한 시선도 함께 달라지고 있음을 피부로 느낀다. 세상도, 시선도 변했지만 나는 여전히 이곳에서 내 삶을 살아간다. 다만 마음 한 켠에는, 예전보다 조금 더 당당한 기운이 자라고 있음을 느낀다.
어느 날, 평소 자주 가던 한인 마켓에 들렀다. 과일 코너에서 사과를 고르고 있는데, 백인 할머니 한 분이 내 주위를 맴도는 것이 느껴졌다. 눈이 마주치자, 그녀는 조심스럽게 다가와 말을 건넸다. “Excuse me…”
그녀가 가리킨 건 내 팔에 끼고 있던 연분홍색 쿨토시였다. 자외선이 강한 캘리포니아에서는 운전할 때 직사광선을 피하려고 쿨토시를 자주 착용한다. 원래는 골프용이지만, 해변이나 공원 산책할 때도 유용하다. 나는 코리아타운의 몇몇 가게를 알려주며, 실용성과 품질을 자랑스럽게 소개했다. 그러자 할머니는 안타까운 표정으로 말했다.
“이제는 나이가 들어서, 프리웨이 운전은 무서워서 하지 못해요.”
긴 소매를 걷어 보인 하얀 팔 위에는, 세월의 흔적처럼 기미 꽃이 소담하게 피어 있었다. 처음 만난 사이에 대신 사 주겠다 할 수도 없고 해서 한참을 망설이다 용기를 내 조심스럽게 말을 건넸다. “이거, 제가 쓰던 거긴 한데, 괜찮으시면 이거 드릴까요?” 잠시 멈칫하던 할머니는 얼굴에 환한 미소를 띠며 되물었다.
“Are you sure?” 그리고는 “Thank you, thank you!”를 연거푸 외쳤다.
그녀는 나를 껴안고, 볼을 맞대며 고마움을 표현했다. 쓰던 걸 벗어준 것뿐인데도 과분한 인사를 받으니 민망하면서도 가슴 한 켠에 뿌듯함이 스며들었다.
쿨토시를 끼고 기뻐하실 할머니를 상상하다 보니, 문득 ‘애국’이라는 단어가 마음에 스쳤다. 애국은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치거나, 세계 무대에서 국위를 드높인 위대한 사람들만의 이야기인 줄 알았다. 이제는 생각이 조금 달라졌다.
애국은 반드시 거창할 필요는 없다. 내가 사는 이곳에서 한국의 온정을 나누는 것도 애국이 아닐까 싶다. 어쩌면, 디아스포라의 삶의 현장이야말로 애국을 실천하기에 가장 적합한 자리일지도 모른다. 오늘, 나는 코리안 아메리칸으로서 내 몫의 애국을 조용히 실천한 것 같다. 그 작은 쿨토시 하나가, 미국 할머니의 마음속에 ‘코리안의 따스함’으로 얼마나 오래 남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