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준호 감독의 영화 ‘기생충’이 뉴욕타임스가 선정한 ‘21세기 최고의 영화’로 꼽혔다. 그것도, 영화감독과 배우, 소설가 등 영화 관련 예술인 500여 명의 투표 결과와 20만 명 넘는 독자가 참여한 설문조사 결과 두 부문에서 모두 최고의 영화로 선정되었다니 보통 일이 아니다.
이런 소식을 몇 년 전에 들었다면 감격에 벅차서 축배라도 들었을 텐데, 아쉽게도 그런 뻐근한 감동은 느끼지 못했다. 이미 한국문화가 더 올라가야 할 정상이 없을 정도로 세계 정상에 확실하게 올라섰기 때문이다.
근래 한국 문화예술은 각 분야에서 세계 정상급 찬사를 받고 있다. 칸영화제 그랑프리와 아카데미 작품상 등 4개 부문 수상작 기생충, 에미상 6개 부문 수상작 ‘오징어 게임’, 토니상 최우수 뮤지컬 등 6개 부문 수상작 ‘어쩌면 해피엔딩’, 최근 전 세계에서 인기를 끌고 있는 애니메이션 ‘케이팝 데몬 헌터스’, K팝 그룹 BTS와 블랙핑크는 물론 조성진과 임윤찬 등 젊은 클래식 음악가들도 이미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다.
그리고 한강의 노벨문학상 수상, 김혜순 시인의 전미도서비평가협회상과 독일 국제문학상, 김주혜의 톨스토이문학상 수상 등 고전적인 문화예술과 대중문화 모두에서 한국의 위상은 더욱 높아졌다. 미술 쪽에서도 영국의 테이트 모던에서 내년 여름 개인전을 갖는 서도호 작가, 프랑스 정부 문화예술공로훈장을 받은 김수자 등 여러 작가들이 주목을 받고 있다.
가장 감격스런 소식은 역시 노벨문학상 수상이었는데, 느닷없고 어이없는 계엄령 소동에 가려져 무척 섭섭했었다.
‘코리아니즘’이라는 낱말이 나올 정도다. 이제 우리에게 주어진 숙제는 계속 정상을 지키며 세계문화를 이끌어가는 일일 것이다. 변방에서 조명받는 중심이 되었으니, 그에 걸맞은 철학과 이론적 바탕이 필요하고, K-문화의 본질을 자세하게 살펴서, 그 저력의 뿌리를 밝혀내 발전시키는 작업이 필요하다.
무엇보다도 먼저 중요한 것은 당당한 자신감이다. 최근에 정상에 올라선 사람들은 거의 다 60년대 이후에 태어난 신세대들이다. 그 이전 세대는 배우 윤여정(1947), 정명훈(1953), 김혜순 시인(1955) 정도다. 달리 말하면, 일제 강점기, 전쟁, 분단, 지독한 가난 같은 어두운 그림자가 어느 정도 가신 시대에 성장한 세대들이다. 전 세대들이 빠져있던 열등감이나 패배의식, 자기 비하 같은 부정적 정신문화에서 벗어나 자신감을 키운 세대였다. 외국문화를 비판 없이 무조건 받아들이지도 않았다. 우리 것을 알려고 다양하게 노력하고 싸웠다.
결국, 우리 사회가 현대화, 민주화 과정에서 겪은 온갖 갈등과 좌절, 절망 등을 이겨내며 하나하나 차곡차곡 쌓아온 힘이 지금 K-문화의 저력인 셈이다. 월드컵 응원의 뜨거운 물결, 촛불 혁명…. 그러므로 앞으로도 우리 정신문화의 바탕을 이루는 정체성을 찾아 바로 세우는 노력이 필수적일 수밖에 없다.
그런 생각을 하면 이어령 선생 같은 눈 밝은 선구자가 그리워진다. 글로컬리즘, 즉 세계에 통하는 로컬리즘 같은 정확한 방향 제시, 인류 문화의 흐름을 꿰뚫어 보고 미래를 정확하게 예측하는 능력, 우리가 잊고 있었던 아련한 근원 정서를 찾아내 세계인이 공감할 언어로 재창조하는 일에서 그이는 정말 탁월한 능력을 보여주었다. 대표적인 것이 88서울올림픽 개막식의 굴렁쇠 소년, 디지로그, 글로컬리즘, 생명자본론, 보자기론 등이다.
그런 한국 특유의 정서를 현대화한 성공사례가 오징어 게임에 등장하는 딱지치기, 땅따먹기, 구슬치기, 제기차기, 줄넘기, 줄다리기, 달고나 등 한국의 놀이문화다. 같은 맥락에서, 외국어로 바로 번역하기 어려운 우리말, 예를 들어 멋, 정, 한(恨), 신바람 같은 낱말에도 주목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