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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아침에] 보랏빛 머리 어르신

Los Angeles

2025.09.02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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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아 수필가

이정아 수필가

병원 진료실 앞 복도에서 내가 앉은 휠체어를 남편이 밀고 있었다. 큰 수술을 마친 뒤여서 초췌한 내 몰골이 말이 아닐 때였다. 용모에 신경 쓸 새도 없고 만사가 귀찮았다. 병고로 찌든 머리칼은 백발이었다.
 
그때 옆에서 우리 내외를 보고 있던 분이 나더러 “착한 아드님을 두셨네요” 이러는 게 아닌가? 남편과 나를 모자지간으로 보다니. 그분이 민망할까 봐 괜찮다며 웃었지만 웃는 게 웃는 게 아니었다.
 
병원에서 오던 길로 미용실에 들러 당장 흑발로 염색을 했다. 염색약이 독성이 있다며 주치의는 하지 말라 했어도 안 할 수 없는 마음이었다. 특단의 조치가 필요했다. 남편에겐 앞으로 염색하지 말고 흰머리로 살 것을 명령했다.  
 
오랜만에 미용실에 가니 예전의 흑색 염색흔적은 없어지고 백발에 약간의 검은 머리칼이 섞였다며 슈퍼 트렌드인 ‘솔트 앤 페퍼(salt & pepper)’가 되었단다. 돈을 번 기분으로 이후로는 염색 않고 흰머리를 유지하는 중이다.
 
작년 한국 방문 시 남편의 친구 목사님 교회를 방문하게 되었다. 택시기사분이 남편더러 “어르신이 카카오 택시 부르셨어요?” 한다. 내 눈엔 남편보다 나이가 더 들어 보이는 기사가 남편을 “어르신” 하고 부르니 당황했다. 욕도 아니고 비하의 단어도 아니건만 기분이 별로였다. 호칭에 별 의미를 두지 않는다면서도 남편은 염색을 다시 시작했다. 요즘엔 남편과 나를 더 이상 모자지간으로 보진 않는다. 다행이다.
 
백발에도 유행이 있고 관리법이 있는 걸 알았다. 갤러리에 전시회 구경을 갔다가 흰머리의 K화백을 만났다. 그녀가 백발을 관리하는 보랏빛 샴푸를 알려준다. 연한 보라색이 들어가면 흰머리가 훨씬 깔끔하고 생동감이 있어 보인단다. 그대로 따라 하며 현재 잘 관리되고 있는 내 머리칼.
 
며칠 전 교회에서 목사님과 장로님이 내게 아닌 남편에게 “보라색 염색을 하셨어요?” 난데없이 묻는다. 아들아이도 아빠머리가 보라색이라며 이상하다고 전화를 했다. 남편은 염색약 알레르기가 있어 한 가지 염색약만 쓰는 걸 내가 안다. 흑색 염색이 물이 빠지면 햇빛 아래선 그리 보이나보다. 70세 가까운 이가 BTS도 아니고 보랏빛 머리라니. 당치도 않다.
 
멕시코 선교를 다녀온 남편이 금요예배 때 간증을 했다. 선교팀 중 가장 연장자여서 다들 ‘어르신’으로 호칭하더란다. ‘어르신’이 되도록 선교에 열심을 못 낸 자신이 너무나 부끄럽다며 내년에 은퇴하면 선교에 힘을 쓰겠다고 고백했다. 이번에 들은 ‘어르신’은 감동적이었다.
 
보랏빛 머리 어르신이 된 남편은 더 자주 선교를 갈 것이고, 나는 여유롭게 글 쓰는 시간이 많아지기를 기대한다.

이정아 /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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