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원 진료실 앞 복도에서 내가 앉은 휠체어를 남편이 밀고 있었다. 큰 수술을 마친 뒤여서 초췌한 내 몰골이 말이 아닐 때였다. 용모에 신경 쓸 새도 없고 만사가 귀찮았다. 병고로 찌든 머리칼은 백발이었다. 그때 옆에서 우리 내외를 보고 있던 분이 나더러 “착한 아드님을 두셨네요” 이러는 게 아닌가? 남편과 나를 모자지간으로 보다니. 그분이 민망할까 봐 괜찮다며 웃었지만 웃는 게 웃는 게 아니었다. 병원에서 오던 길로 미용실에 들러 당장 흑발로 염색을 했다. 염색약이 독성이 있다며 주치의는 하지 말라 했어도 안 할 수 없는 마음이었다. 특단의 조치가 필요했다. 남편에겐 앞으로 염색하지 말고 흰머리로 살 것을 명령했다. 오랜만에 미용실에 가니 예전의 흑색 염색흔적은 없어지고 백발에 약간의 검은 머리칼이 섞였다며 슈퍼 트렌드인 ‘솔트 앤 페퍼(salt & pepper)’가 되었단다. 돈을 번 기분으로 이후로는 염색 않고 흰머리를 유지하는 중이다. 작년 한국 방문 시 남편의 친구 목사님 교회를 방문하게 되었다. 택시기사분이 남편더러 “어르신이 카카오 택시 부르셨어요?” 한다. 내 눈엔 남편보다 나이가 더 들어 보이는 기사가 남편을 “어르신” 하고 부르니 당황했다. 욕도 아니고 비하의 단어도 아니건만 기분이 별로였다. 호칭에 별 의미를 두지 않는다면서도 남편은 염색을 다시 시작했다. 요즘엔 남편과 나를 더 이상 모자지간으로 보진 않는다. 다행이다. 백발에도 유행이 있고 관리법이 있는 걸 알았다. 갤러리에 전시회 구경을 갔다가 흰머리의 K화백을 만났다. 그녀가 백발을 관리하는 보랏빛 샴푸를 알려준다. 연한 보라색이 들어가면 흰머리가 훨씬 깔끔하고 생동감이 있어 보인단다. 그대로 따라 하며 현재 잘 관리되고 있는 내 머리칼. 며칠 전 교회에서 목사님과 장로님이 내게 아닌 남편에게 “보라색 염색을 하셨어요?” 난데없이 묻는다. 아들아이도 아빠머리가 보라색이라며 이상하다고 전화를 했다. 남편은 염색약 알레르기가 있어 한 가지 염색약만 쓰는 걸 내가 안다. 흑색 염색이 물이 빠지면 햇빛 아래선 그리 보이나보다. 70세 가까운 이가 BTS도 아니고 보랏빛 머리라니. 당치도 않다. 멕시코 선교를 다녀온 남편이 금요예배 때 간증을 했다. 선교팀 중 가장 연장자여서 다들 ‘어르신’으로 호칭하더란다. ‘어르신’이 되도록 선교에 열심을 못 낸 자신이 너무나 부끄럽다며 내년에 은퇴하면 선교에 힘을 쓰겠다고 고백했다. 이번에 들은 ‘어르신’은 감동적이었다. 보랏빛 머리 어르신이 된 남편은 더 자주 선교를 갈 것이고, 나는 여유롭게 글 쓰는 시간이 많아지기를 기대한다. 이정아 / 수필가이아침에 보랏빛 어르신 보랏빛 샴푸 염색약 알레르기 보랏빛 머리
2025.09.02. 20:13
우린 저 하늘에 그려진 청춘의 색 붉음도 푸름도 아닌 보랏빛 노을입니다 검은 나무들이 새 옷 입은 5월! 마을 회관 잔치 마당에 보랏빛 노을이 한 가득 이네요 떠난 지 오랜 고향 생각일랑 버리시고 웃음 바다에 빠져 봅시다 깃털 하얀 잔디가 손짓하는 길에서 사랑에 굶주린 낙엽들 주름을 펴세요 예쁘고 행복하라고 만들어진 설레는 잔치 아픔 고통 잊으시고 덩실덩실 흐르는 음악 소리 맞추어 손 흔들어 춤을 추세요 삶을 마음껏 즐기세요 다이아몬드가 뚝 뚝 떨어지는 오동나무 그늘 아래 예쁜 꽃들이 우리들인 걸 잊지 마세요 때 이른 코스모스가 손짓하는 5월 아픔일랑 털어내시고 크게 웃으세요 외로움의 소굴을 탈출하세요 광옥 같던 얼굴에 검 버섯도 좋아서 웃을 겁니다 파랑새 뛰노는 길에서 보랏빛 노을들! 모여 모여 크게 웃으며 살아요 우리 엄경춘 / 시인문예마당 보랏빛 노을 보랏빛 노을들 오동나무 그늘 아픔 고통
2025.06.19. 19:00
나는 은연중 보랏빛만 떠오르면 가슴이 설렌다 알듯 모를 듯 슬픔이 일렁이고 애잔한 무언가가 눈물 주위를 서성거리는 것은 보랏빛 그 아득한 여운 때문인지 요즈음 길에 나서면 5월의 융단바닥을 눈부시게 뒤덮고 있는 자카란다 보석 꽃잎이 나를 설레게 한다 좀더 머물러 있지않고 왜 서둘러 가려는지 바닥에 처연히 누워있는 그 모습은 애틋하다 보랏빛 자카란다 꽃잎이여 어찌하다 떨어져 슬피 우는가 나도 같이 통곡이라도 해야할 것 같은 자카란다 내년 이맘때까지 그리움 한 섶을 가슴에 안고 자카란다 꽃 이제 이별과 마주한 채로 보랏빛 눈부신 자태는 영영히 내 안에 서성대고 있는데… 장정자 / 시인문예마당 보랏빛 연가 보석 꽃잎 내년 이맘때 눈물 주위
2025.06.12. 18:27
올해는 유난히 옅어진 보랏빛 색채가 아쉽다. 만개하지 못한 자카란다 탓이다. 이맘때면 LA를 온통 보랏빛으로 물들였던 자카란다가 올해는 잘 보이지 않는다. 꽃은 물을 먹고 핀다. 올해는 많은 비가 내려 들판의 야생화가 만발했다. 꽃구경 가기 좋게 자연은 ‘수퍼 블룸’으로 보답했다. 반면, 자카란다는 여느 꽃과 다르다. 상대적으로 부족했던 일조량 때문에 개화시기를 놓쳤다. 자카란다의 원산지는 본래 남미다. 날씨 좋은 남가주, 플로리다, 텍사스 일부 지역에서만 볼 수 있는 드문 꽃이다. 보랏빛의 자태를 가진 자카란다는 관상수다. 20세기 초 여성 원예가 케이트 세션스가 남아메리카에서 이곳으로 가져왔다. 다른 꽃에 비해 자카란다는 주목받지 못하는 꽃이었다. 꽃이 지자 바닥에 쌓였고, 거리마다 넘치는 썩은 꽃잎 때문에 보랏빛의 매력은 오래가지 못했다. 시간이 흘러 LA는 다시 자카란다를 찾았다. 캘리포니아를 대표하는 팜트리가 가뭄의 영향으로 기운을 잃자 LA시는 가로수를 자카란다 나무로 교체했다. 맑은 날씨가 이어지는 LA에서 자카란다는 최적화된 나무다. 보랏빛이 LA에 가져다준 선물은 한두개가 아니다. 가뭄과 같은 열악한 환경에서도 아름답게 잘 핀다. 일조량이 증가할수록 그늘을 제공하기 때문에 열섬 현상도 해소한다. LA지역에는 그렇게 100여년에 걸처 15만 그루의 자카란다 나무가 심겼다. 김상진 사진부장 [email protected]김상진 기자의 포토 르포 보랏빛 보랏빛 색채 남가주 플로리다 케이트 세션스
2023.06.16. 19: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