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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방된 아빠, 남겨진 가족…생이별의 고통

Los Angeles

2025.09.03 1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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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가주서 불체자로 33년 살았던 남성
ICE 단속에 걸려 멕시코로 강제추방
아내와 네 자녀는 힘든 선택의 기로
“미국에 남아 있을까, 멕시코로 갈까?”
예수스가 아들 안헬을 달래며 공항으로 가기 위해 차로 걸어가고 있다.  [후안 파블로 암푸디아 / LA타임스 객원기자]

예수스가 아들 안헬을 달래며 공항으로 가기 위해 차로 걸어가고 있다. [후안 파블로 암푸디아 / LA타임스 객원기자]

예수스 크루즈가 멕시코 키니에서 아내 노에미 시아우를 포옹하며 위로하고 있다.  [후안 파블로 암푸디아 / LA타임스 객원기자]

예수스 크루즈가 멕시코 키니에서 아내 노에미 시아우를 포옹하며 위로하고 있다. [후안 파블로 암푸디아 / LA타임스 객원기자]

멕시코 유카탄주 키니 - 6월의 한 무더운 밤, 예수스 크루즈는 마침내 자신이 17살까지 살았던 작은 고향 마을 키니로 돌아왔다. 수십 년 만의 귀향이었다.
 
누이는 눈물 어린 포옹으로 그를 맞았다. 다음 날, 그는 병든 어머니를 찾았다. 어머니는 그의 귀에 속삭였다. “네가 다시 돌아올 줄은 몰랐다.”
 
하지만 그는 집에 온 듯하면서도 집으로 돌아온 것이 아니었다.
 
그가 사랑하던 모든 것은 3000마일 떨어진 미국 남가주에 남겨져 있었다. 이민 단속 요원들이 세차장을 급습해 그에게 수갑을 채워 끌고 가기 전까지 33년 동안 살았던 곳이다.
 
크루즈는 친구들과 작은 흰 개 ‘부카’를 그리워했다. 집도, 차도, 직장도 모두 잃었다. 무엇보다도 그는 아내 노에미 시아우와 네 자녀를 간절히 그리워했다. 시아우는 야간 근무를 했고, 크루즈는 아이들을 먹이고 입히며 학교와 음악학원에 데려다 주는 일을 도맡았다. 혼잡하고 힘든 일상이었지만 그는 그것을 사랑했다. “아이들이 더 나은 삶을 살길 원했다. 내가 살았던 삶이 아닌, 더 나은 삶을.”
 
그러나 이제 그는 멕시코에서 홀로, 처가 소유의 빈집에 살고 있었다. 그는 영주권자인 아내와 함께 불가능한 선택의 기로에 서 있다. 아내와 아이들이 멕시코로 와야 할까, 아니면 미국 잉글우드에 남아야 할까.
 
두 사람 모두 국경 때문에 가족이 찢어진 경험이 있었다. 그 고통을 아이들에게 물려주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지난 몇 달간 아이들은 힘들어했다. 16살 장녀 델레이니는 잠을 거의 이루지 못했고, 가장 사랑하던 피아노 연주도 멈췄다. 5살 막내 가브리엘은 문제 행동을 보였다. 14살 에스테르와 10살 안헬 역시 상처를 입었다.
 
그러나 네 명의 미국 시민권자 아이들을 멕시코로 데려오는 것도 공정하지 않았다. 아이들은 스페인어를 하지 못했고, 키니의 학교는 미국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열악했다. 델레이니는 고등학교 졸업을 앞두고 있었고, UC계 대학과 하버드 로스쿨 진학을 꿈꾸고 있었다.
 
경제적 문제도 컸다. 세차장에서 그는 하루 220달러를 벌었다. 그러나 키니의 일용직 노동자 하루 품삯은 8달러에 불과했다. 시아우는 LA 국제공항에서 국제 항공사의 화물 영업을 담당하는 안정적인 직장을 갖고 있었다. 그 일을 포기한다는 것은 무모했다.
 
시아우는 남편을 안고 싶었다. 온 가족이 멕시코에 모여 사는 것이 어떤 기분인지 알고 싶었다. 그래서 8월 초, 그녀는 아이들과 함께 불쑥 크루즈를 찾아왔다.
 
키니는 메리다에서 차로 한 시간가량 떨어진 울창한 열대림 속에 있다. 크루즈는 이곳에서 스페인어와 마야어를 쓰며 초가집에서 자랐다. 부모는 너무 가난해 신발조차 사주지 못했고, 그는 어린 나이에 학교를 그만두고 아버지와 함께 소를 키우고 농삿일을 거들었다. 17살 때 미국으로 향하는 청년 무리에 합류했다.
 
1992년, 로드니 킹 사건으로 격렬한 시위가 벌어지던 시기에 그는 LA 잉글우드에 도착했다. 친척이 살던 초록색 스투코 아파트 단지는 키니 출신 이민자들의 보금자리가 되었고, 그는 그곳에서 안정을 찾았다. 그곳에서 그는 노에미 시아우를 만나 결혼했다. 그녀는 어린 시절 부모를 따라 미국에 건너와 레이건 대통령의 사면 정책 덕에 합법 신분을 얻었다.
 
네 아이가 태어나자 가족은 소박한 전통을 만들었다. 아이가 우등상을 받으면 데이브앤버스터스에서 축하했고, 여름마다 디즈니랜드를 찾았다. 주말이면 멕시코 음식점 카사 감비노에서 저녁을 함께했고, 금요일 밤에는 조부모에게 아이들을 맡기고 부부만의 데이트를 즐겼다.
 
미국에 합법적으로 머물 수 있는 길도 있었다. 네 아이가 모두 미국 시민권자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변호사들은 멕시코에서 신청해야 하고 수년이 걸릴 수 있다고 했다. 아이들을 떠나고 싶지 않았던 그는 그대로 머물렀다.
 
지난해 가을,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재선에 성공하며 ‘대규모 추방’을 공언했다. 크루즈는 걱정하지 않으려 했다. 범죄 기록이 없는 자신은 안전하다고 믿었다. 그러나 이번 정부의 단속은 달랐다.
 
지난 6월 8일, 복면을 한 이민 단속 요원들이 웨스트체스터 세차장을 급습했다. 크루즈는 순찰차에 강제로 밀쳐 넣어졌고, 손목은 심하게 졸라매져 온몸에 멍이 들었고 어깨를 다쳤다. 그는 변호사나 가족과 연락할 기회도 거부당한 채 엘파소 구치소로 이송됐다. 결국 그는 안경이 없어 글을 읽지도 못한 채 ‘자진 출국’ 서류에 서명했다.
 
수십 년 만에 돌아온 키니는 달라져 있었다. 미국에서 돌아온 사람들이 지은 호화 주택이 늘어섰고, 낯선 젊은이들이 그를 호기심과 경계의 눈으로 바라봤다. 그는 소박한 농장에서 일을 시작했다. 새벽이면 자전거를 타고 나가 잡초를 뽑고 소를 돌봤다. 오랜 도시 생활 끝에 맞이한 고향의 고요함은 낯설면서도 익숙했다.
 
무엇보다 어머니와 함께할 수 있었다. 다발성경화증을 앓는 어머니는 어떤 날은 대화를 나눴고, 어떤 날은 침묵 속에 함께 앉아 있었다. 그는 매일 밤 아이들과 통화하며 멀리서라도 아버지 역할을 하려 했다. 그러나 딸 델레이니가 더 이상 피아노를 치지 않는다는 소식은 그를 아프게 했다.
 
8월, 아내와 아이들이 멕시코에 도착했을 때 그는 공항으로 달려갔다. 온 가족이 피자를 먹으며 웃고 울었다. 막내 가브리엘은 처음 만나는 사촌들과 비를 맞으며 놀았고, 델레이니는 오랜만에 깊은 잠에 빠졌다. 시아우는 “마침내 행복한 가족이 된 것 같았다”고 말했다. 그러나 곧 미국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현실이 그들을 짓눌렀다.
 
키니의 축제 현장에서 함께 소를 구경하며 웃고, 밤에는 함께 춤을 추었지만 떠날 날은 다가왔다. 마지막 밤, 부부는 손을 잡고 눈물을 흘리며 미래를 고민했다. 미국으로 돌아가기 위한 소송을 제기했지만, 언제 결과가 나올지 알 수 없었다.
 
출국 날, 크루즈는 가족을 공항까지 배웅하지 않았다. 이별의 고통을 견딜 자신이 없었다. 막내 가브리엘은 아버지를 끌어안고 울며 말했다.
 
“사랑해요, 아빠.”
 
“괜찮아, 아가. 나도 사랑해.”
 
그날 오후, 그는 혼자 키니의 거리를 걸었다. 축제의 흔적은 사라지고 노동자들이 땀을 흘리며 시설을 철거하고 있었다. 며칠 전 딸의 생일을 떠올렸다. 디즈니랜드에서 치러졌어야 할 파티 대신, 키니의 집에서 마리아치 밴드가 부른 노래에 맞춰 딸과 춤을 추었다.
 
“너는 내 태양, 내 평온, 내 삶, 내 영원한 사랑.”

 

원문은 LA타임스 8월28일자 “A wrenching decision for a family torn apart” 기사입니다.  

글=케이트 린시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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