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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뜨락에서] 꽃피우는 작업

New York

2025.09.08 2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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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평생 다니는 직장에서도 동료들이 은퇴하면 제삼의 장소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고 싶어 한다. 그중 우선순위는 따뜻한 장소와 생활비가 저렴한 곳이다. 아무래도 노인은 추위에 약하고 제한된 수입에 의존해 살기 때문이리라. 나도 은퇴 후 어디서 내 남은 생을 마감할까 많이 고민해 본 결과 결국 지금 사는 이 집이 가장 편안하겠다는 결정을 내렸다. 내가 사는 글렌코브는 내가 필요로 하는 많은 조건을 골고루 갖추고 있다. 맨해튼까지는 한 시간, 내 직장까지는 25분, 플러싱까지는 35분이면 되고 우선 동네가 조용하고 나무가 많다. 주위에 수목원이 많아 경관이 수려하고 수영할 수 있는 바닷가가 3분 이내에 있다. 제일 중요한 것은 날마다 운동할 수 있는 YMCA가 4분 이내에 있다. 아무리 운동을 좋아하고 하고 싶어도 장소가 멀면 귀찮아 가지 않게 된다.  
 
일단 나는 내 집에 정을 주고 사랑하기로 했다. 이 집에 이사 온 지도 올해로 22년째다. 사람 몸처럼 20년 이상을 날마다 쓰면 집도 여기저기 고장이 나기 마련이다. 전에 살던 집에서 이 집으로 이사 올 때 낡은 짐 처리 문제로 곤욕을 치렀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그 당시 이 집이 새집이어서 새 가구를 마련하려고 모든 가구와 살림살이를 그대로 두고 나오고 싶었다. 하지만 새 집주인은 집을 깨끗이 비워주기를 요구했다. 덤스터를 하나 주문해 짐을 치우기 시작했으나 두 번째 세 번째까지 불러 겨우 낡은 짐들을 치울 수 있었다.  
 
그 중노동에서 겨우 살아남은 나는 이사 가는 새집에서는 미니멀리스트로 살겠다고 결심했었다. 이번에 화장실을 새로 고치기로 했다. 시작 동기는 간단했으나 결국 대 공사가 되고 말았다. 컨트랙터는 초대형 크기의 덤스터를 미리 갖다 놓았다. 난 처음에 그 덤스터의 크기에 압도당했었으나 이번 기회에 20년 묵은 집안 물건들을 정리하고자 마음먹었다. 서랍과 옷장 구석구석에 그동안 얼마나 물건들을 사재고, 쌓아놓았는지 숨이 막혔다. 그리고 정말 받아들이고 싶지 않지만 나에게 쇼핑 벽이 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항상 스스로 낭비가 아닌 합리적인 쇼핑한다고 자랑하기도 했다. 내 나이 또래의 지인들은 이제 사는 것은 그만하고 있는 물건들을 정리한다고들 한다. 나 자신도 매해 1월이 되면 정리를 시작하다가 끝도 없고 표도 나지 않는 이 작업을 결국 포기하고 만다. 차라리 치우는 시간에 책을 읽고 글을 쓸 때 훨씬 행복하다. 지금까지 사들인 물건들은 할 수 없지만 앞으로는 사재기를 자제하는 것만이 답이다.  
 
하지만 평생 몸에 밴 이 사재기 습관을 과연 버릴 수 있을는지는 아직도 의문이다. 언젠가 때가 되면 자녀들과 지인들을 불러 필요한 물건들을 챙겨가고 나머지 물건들은 다 덤스터에 버리라고 말하련다. 버리고 버려도 끝이 없는 이 작업을 겪으면서 ‘삶이란 온갖 쓰레기를 모으는 과정’이 아닌가 생각된다. 죽을 때 하나도 가져갈 수 없는 이 물건들에 왜 이렇게 집착하는지 생각과 행동의 불일치감에 괴리감을 느낀다. 이번에는 내 주변에 있는 보이는 물건 정리에 초점을 두었지만, 이 기회에 내 뇌(brain)도 한번 되돌아보며 정리하고 싶다. 지난 평생 내 뇌 안에 계속 쌓여 나를 혼동하게 하고 어지럽히는 생각, 기억을 이번에 깔끔하게 정리 정돈 하고 싶다. 앞으로 남은 내 생에 도움이 될 만한 것들만 남겨두고 남아있는 내 생을 위해 여백을 남겨두고 여유롭게 살고 싶다. 남아있는 삶은 실생활에서나 정신적으로도 아름답고 행복한 꽃을 피우며 살고 싶다. 내가 가진 자산으로 아름다운 꽃을 피울 수만 있다면 더 이상의 바람은 없겠다. 그동안 나를 지배해온 어둡고 무거운 기억의 파장과 혼란을 모두 비우고 새롭고 아름다운 꽃봉오리들로 꽃피우고 싶다.  
 
워즈워스는 ‘우리 영혼은 불멸의 바다 풍경을 품고 있다’라고 했다. 인생은 물음을 던지는 만큼만 살아지기 때문이다. ‘시인이 될 수 없다면 시처럼 살라.’ 이 얼마나 아름다운가.

정명숙 /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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