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고닫기

이기희의 같은 하늘 다른 세상- 꼴찌의 행복

Chicago

2025.09.09 13:09

  • 글자크기
  • 인쇄
  • 공유
글자 크기 조절
기사 공유
이기희

이기희

여러명이 경주하면 항상 꼴찌다. 근데 홀로 뛰면 나는 늘 일등이다 운동 신경 발달 부족과 주의력 결핍으로 잘 넘어져 꼴찌 신세를 면하지 못한다.
 
‘안에서 새는 바가지 밖에서도 샌다.’ 생활의 달인 우리 엄니 김해연 여사 개똥철학에 의하면 ‘머리만 잘 돌아가면’ 사는데 별 문제 없다는 실사 구제의 원론이다.
 
우리 집은 스스로 명성을 자랑하는 요리왕이거나, 요리왕에게 빌붙어 아부하며 먹거리 챙기는 두 종류의 인간으로 분류된다.
 
홍콩에서 쇼부라더스 영화 필름 제작자로 일할 때 이소룡(?)과의 친분을 과시하는 우서방은 미식가에 식도락가의 명성을 자처하는 인물이다. 회사 명의로 십 수 년을 특급 호텔 샹그릴라 등에 거주하며 미슐랭 스타 레스트랑에서 즐기던 음식 자랑에 애들은 선망의 눈초리로 존경을 표한다. 돈 안들이고 혼자 즐기는데 초를 칠 일 없어 내게는 소 귀에 경 읽기다.
 
나는 양은 냄비에 라면 끓여 찬밥 말아먹어도 꿀맛이라서 감지덕지 먹어 치운다. 어머니는 한식요리 대가로 소문이 자자한 분이다. 스스로 궁중요리 내지 종가집 전통요리 손맛을 자처해서 찬사를 받는다.
 
퇴근 시간이면 내가 좋아하는 요리로 정성스럽게 저녁상을 준비하시는 어머니. 명절이면 밤잠을 설치며 강정 약과 유과 수정과 식혜를 만들어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교회 마당에서 배포(?) 하신다. 수혜자는 어머니 손잡아 드리며 깍듯이 인사 잘하는 사람들이다.  
 
세상에 공짜는 없다. 공부 잘하는 친구들 앞에서 기 죽은 적은 없지만 먹거리 앞에선 생계가 달린 문제라서 머리 수그리고 숙연해진다.
 
우리집 식탁의 하이라이트는 딸 크리스티나의 등장이다. 컬리너리스쿨 수석 졸업에 푸드네트워크 인턴을 거쳐 레이쳘 레이쇼 수석 푸드 스타일리스트로 방송에 출연한 딸 앞에선 잘난 체 하던 식구들의 기가 팍 죽는다. 어찌나 빠른 속도로 온갖 요리를 한꺼번에 해치우는지 역시 공부는 열심히 해야한다는 결론에 이른다. 전혀 경쟁의 대상이 안 될 경우, 납작 업드려 꼬리 흔드는 게 상수다.
 
방학 때나 휴가 때 집에 오기 전에 우서방과 입맞추며 메뉴 정하느라 전화통이 불이 난다. 그동안 굶었나? ‘엄마는 아무것도 하지 마요.’ 간곡하게 부탁한다.
 
공짜 인생에 길들린 막내 아들은 먹는데는 천재고 도사 빰친다. 고집 세고 자기 것만 챙기는 녀석인데 음식 앞에서 폭삭 찌그려져 온갖 아첨을 떤다. 장 보는 것은 물론이고 부엌에서 보조 요리사로 아부하며 제 먹거리 챙기는데 귀신이다.
 
‘벗이 먼 데서 찾아오니 또한 기쁘지 아니한가?(有朋自遠方來 不亦說乎)가 아니라 ‘자식이 멀리서 집에 오니 기쁘지 아니한가’로 혼자 미소 짓는다.
 
꼴찌는 행복하다. 시비 거는 사람 없고, 측은지심, 다음 번에 더 잘하라고 격려의 멘트로 위로한다. 한 등수만 올리가도 잘 했다고 칭찬한다.
 
적어도 우리집에서는 아무도 나에게 요리 못한다고 태끌 걸지 않는다. 잔소리 안하고, 잘 먹고 감탄사 연발하는 군중이 있어야 요리사가 신나는 법이다.
 
일등은 외롭고 괴롭다. 고난의 길이 끝없이 펼처진다. 붙잡고 매달려야 자리 보존하고, 추락할까 가슴 졸이고, 앞이 안 보이는 곳을 향해 혼자 달린다.
 
꼴찌의 여유로움을 즐기며, 유배지의 식탁은 쓸쓸하지만 편안하다. (Q7 Editions 대표)
 

이기희

많이 본 뉴스

      실시간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