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의 접촉에 관해 논의할 때 눈에 거슬리는 어휘가 있습니다. 바로 혼혈(混血)이라는 어휘입니다. 혼혈은 말 그대로 피가 섞였다는 뜻입니다. 혼혈아(混血兒)라는 표현도 합니다. 지금은 차별적인 어휘로 다루기도 합니다. 혼혈이라는 말을 칭찬의 경우보다는 비하의 의미로 쓰기 때문입니다. 혼혈은 서로 다른 종족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를 의미합니다. 한편 혼종(混種)이라는 말은 종이 섞였다는 의미이기 때문에 굳이 보자면 인종 간의 출산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묘한 것은 혼혈이라는 말은 한국인과 중국인, 한국인과 일본인 사이의 출생에는 그다지 사용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한국, 일본, 중국 등은 같은 종족이라고 보는 것일 수도 있겠습니다. 한국어에서 혼혈이라는 말은 오히려 인종 사이를 의미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즉, 모습이 한민족과 달라지지 않으면 혼혈로 보지 않는 겁니다. 이는 겉모습을 강조하는 태도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겉으로 사람을 판단하는 게 씁쓸합니다.
사실 세상에 단일민족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단일민족을 강조하면 남을 배척하는 결과를 가져옵니다. 특히 지금처럼 세계화 시대, 다문화, 상호문화 시대에 단일민족을 강조하고, 다른 문화를 다문화로 비하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될 겁니다. 실제로 우리나라에도 수많은 다문화 가정이 있고, 국제결혼도 늘어나고 있습니다. 앞으로는 국제결혼이라는 말도 어색할 수 있습니다. ‘국제’라는 말에는 나라와 나라 사이라는 점이 전제인데, 실제로는 한국에서 자란 다른 민족, 인종의 결혼이 늘어날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문화라는 말도 마찬가지로 어색한 표현이 될 겁니다.
일본에서는 국제결혼 자녀를 ‘하프(half)’라는 용어를 써서 부르기도 합니다. 반반씩 섞였다는 의미일 겁니다. 하프라는 말에도 차별의 느낌이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요즘에는 하프가 아니라 ‘더블(double)’로 부르는 경우가 늘고 있습니다. 예전에는 ‘아이노코’라는 표현을 하기도 했습니다. 사이에서 낳았다는 의미입니다. 비하어죠. 저도 어릴 적에 무슨 뜻인지도 모르면서 이 말을 쓴 적이 있습니다.
언어의 접촉에서 등장하는 용어는 혼종어(混種語)입니다. 서로 다른 언어에서 유래한 말이 합쳐서 형성되었다는 의미입니다. ‘전셋집’처럼 고유어와 한자어가 합쳐진 말이 대표적일 겁니다. 고유어와 유럽어가 합쳐진 어휘도 많습니다. ‘드럼통’처럼 유럽어와 한자어가 합쳐진 말도 많습니다. 깡통도 캔과 통이 합쳐진 말입니다만, 일본을 거쳐서 캔이 깡으로 변하고, 통과 합쳐졌습니다. 볼펜심도 비슷한 표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일본어에서 변형된 볼펜과 심(心/芯)이 합쳐진 말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말 혼종어 중에서 가장 흥미로운 구성은 아마도 ‘비까번쩍’이 아닐까 합니다. 이 말은 화려하고 광이 나는 것을 표현하는 속어입니다. 사전에도 올라가 있지 않은 말입니다. 이 말은 우리말 ‘번쩍번쩍’과 비슷한 말입니다. 그런데 비까는 일본어입니다. 일본어에는 ‘비카비카’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이 말은 번쩍번쩍, 강렬하게 빛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일본 만화영화에 나오는 피카추의 피카가 바로 여기에서 유래된 표현입니다. 강렬한 빛을 내는 캐릭터입니다. 왔다리갔다리의 ‘-다리’도 일본어식 표현이 어미로 붙어있는 묘한 구성입니다. ‘-다리’는 ‘-거나’의 의미를 가진 일본어 표현인데 우리 용언 어간에 붙어있는 겁니다.
혼종어 중에는 고유어, 한자어, 유럽어가 모두 함께 섞인 혼종어도 있습니다. 순우리말로 보이는 어휘 중에도 유래를 명확히 알기 어려운 어휘가 많으니 순수한 고유어를 논하는 것은 부질없는 일일 수 있습니다. 혼종어도 시간이 지나고 나면 기원을 명확히 구분하기가 어려울 겁니다. 혼종어는 언어 접촉의 모습을 가장 분명하게 보여주는 자료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