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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케의 저울] 불완전한 법, 그 책임도 유권자 몫

Los Angeles

2025.09.23 1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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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한신 변호사·한미정치경제연구소 이사장

김한신 변호사·한미정치경제연구소 이사장

최근 보수 정치 인플루언서 찰리 커크가 암살당했다. 이 비극적인 사건은 증오가 정치를 삼키고, 신념의 차이가 기어코 총성으로 귀결될 수 있다는, 우리 시대의 가장 섬뜩한 경고를 보내고 있다.
 
커크는 젊은 보수층을 겨냥해 ‘터닝포인트 USA’를 설립하고, 거침없는 언변으로 미국 우파의 아이콘으로 떠오른 인물이다. 그의 주장은 때로 선동적이었고, 반대자들에게는 분노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그의 죽음은 그가 남긴 논쟁의 크기만큼이나, 미국 사회가 앓고 있는 깊은 병을 상징적으로 드러낸다.
 
소셜미디어는 예상대로 추모와 조롱, 음모론으로 들끓었다. 이 아수라장은 미국이 단일 국가라는 사실조차 의심케 한다. 우리는 같은 땅에 살지만, 전혀 다른 현실을 보고 다른 진실을 믿는 부족으로 나뉘어 서로를 향해 으르렁대고 있다. 상대는 더 이상 토론의 대상이 아닌, 제거해야 할 ‘적’으로 규정된다.
 
물론 역사 속에서 분열의 골이 깊었던 시대는 있었다. 노예제를 두고 나라가 두 동강 났던 남북전쟁기(1850~70년대)가 그랬고, 부패와 경제적 격변으로 신음했던 도금시대(1870~90년대)에는 선정적인 ‘옐로 저널리즘’이 지금의 소셜미디어처럼 대중의 분노를 부추겼다.
 
민권 운동, 베트남 전쟁, 워터게이트 사건 등이 사회적 균열을 일으키던 1960~70년대의 상처도 여전히 생생하다.  
 
이 시기를 지나면서, 민주당은 사회 개혁과 복지 확대를 주도하는 진보 정당으로 자리 잡았고, 공화당은 점차 보수 정당으로 굳어졌다. 이 정당 구도가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증폭되고 있다. 여기에 ‘분노의 산업화’가 기름을 붓는다. 현대 정치 담론은 설득의 과정이 아니라, 자기 진영을 향한 ‘분노의 퍼포먼스’가 되었다. 더 자극적인 발언, 더 격한 비난이 곧 관심과 영향력, 그리고 정치적 자금으로 직결된다.
 
과거의 갈등이 특정 쟁점을 중심으로 벌어졌다면, 지금의 분열은 존재론적이다. 알고리즘이 만든 ‘필터 버블’ 속에서 우리는 각자의 신념을 강화하는 정보만 소비하며 괴물이 되어간다. 같은 사실도 전혀 다른 ‘진실’로 해석되고, 불신과 증오는 바이러스처럼 퍼져나간다.
 
이런 현상이 통하는 이유는 공동체의 붕괴와 경제적 불안 속에서 수많은 이들이 소속감과 정체성에 목말라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복잡한 문제에 대한 명쾌한 해답과 명확한 ‘적’을 제시하는 선동가에게서 위험한 위안을 얻는다.
 
민주주의는 본질적으로 다양한 견해의 공존을 전제로 한다. 갈등을 조정하기 위해 의회, 투표, 토론의 제도와 법을 만들어왔다. 법은 단순한 규제가 아니라 사회적 합의의 구체적 표현 방식이다. 강력한 이민 단속이나 급격히 인상된 H-1B 신청 비용 같은 문제도 결국은 법의 적용과 집행의 문제다. 그 방법에 동의한다면 해당 집행 세력을 계속 지지하고, 반대한다면 다른 정치 세력에게 표를 주어 교체하는 것이 유권자의 권리이자 책임이다. “어떻게 그런 법이 있느냐”고 분노하는 것은 결국 “어떻게 그런 대표자를 뽑았느냐”는 질문으로 이어진다. 대의 민주주의의 본질은 바로 여기에 있다.
 
우리는 결코 힘이 곧 정의였던 암흑기나, 총잡이가 법보다 빨랐던 서부시대로 돌아갈 수는 없다. 현대 민주주의 사회 질서는 법에 의한 지배라는 문명적 합의 위에 서 있다. 법은 불완전할 수 있고 때때로 부당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 법을 바꿀 수 있는 힘은 결국 시민, 즉 유권자의 손에 있다.
 
찰리 커크의 죽음은 미국 사회를 갈림길에 세웠다. 이 비극을 또 다른 증오의 자양분으로 삼아 내전과 같은 파국으로 치달을 것인가, 아니면 법과 제도라는 마지막 보루를 통해 깨어진 합의를 재건할 것인가. 정의의 여신 디케의 저울이 더 이상 피로 얼룩지지 않기를, 폭력이 아닌 투표를 통해 균형을 잡기를 간절히 바랄 뿐이다.

김한신 / 변호사·한미정치경제연구소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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