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고닫기

[열린광장] 국군의 날에 담긴 역사적 의미

Los Angeles

2025.09.30 18:40

  • 글자크기
  • 인쇄
  • 공유
글자 크기 조절
기사 공유
박종식 예비역 육군 소장

박종식 예비역 육군 소장

우리에게 익숙한 10월 1일 국군의 날은 단순히 군의 위용을 기념하는 날이 아니다. 이 날짜에는 대한민국 육·해·공군이 겪어온 파란만장한 역사와 그 속에서 빛난 한 인물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1950년 10월 1일, 6·25 전쟁의 격랑 속에서 육군 제3사단이 38선을 최초로 돌파한 역사적인 순간을 기리기 위해 국군의 날이 제정됐다.
 
사실 육·해·공군은 제각기 다른 날에 창설됐다. 육군은 국방경비대가 창설된 1946년 1월 15일, 해군은 해병 병단 창설일인 1945년 11월 11일, 공군은 육군에서 독립한 1949년 10월 1일이 각각의 창설일이었다. 그러나 1956년 대통령령 제1173호에 따라 10월 1일로 통합되면서, 각 군의 정체성을 넘어 대한민국 군 전체의 상징적인 날로 자리 잡게 됐다.
 
38선 돌파는 군사적인 판단을 넘어 정치적으로도 중대한 결정이었다. 당시 맥아더 장군은 유엔 안보리에서 소련과 중국, 인도의 거센 반대에 부딪혔음에도 불구하고 트루먼 대통령 등을 설득해 “38선을 넘어도 좋다”는 승인을 얻어냈다. 그러나 맥아더는 명령이 떨어지기 전까지는 38선을 넘지 말 것을 엄격히 지시했다.
 
반면 이승만 대통령은 달랐다. 그는 맥아더에게 위임한 작전권은 언제든 되찾을 수 있는 것이라며, 심지어 “도둑질하러 들어온 강도를 잡겠다는데 무슨 소리인가! 한국군 단독으로라도 38선을 돌파하라!”고 격노하며 북진을 독려했다. 결국 제3사단은 맥아더의 공식 승인보다 앞선 9월 29일에 38선을 돌파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러한 역사적 순간의 중심에는 당시 제3사단장이었던 이종찬 장군이 있었다. 일제강점기 일본군에 복무했던 아픔 때문에 해방 후 한동안 군인의 길을 외면했던 그는 뒤늦게 육사에 입학해 수도경비사령관(1950년), 육군 참모총장(1952년), 국방부 장관(1960년) 등을 역임하며 조국을 위해 헌신했다.
 
특히 1952년 부산정치파동 당시, 그는 이승만 대통령의 계엄군 동원 명령을 ‘군의 정치적 중립’을 이유로 거부해 참모총장직에서 해임되기도 했다. 군의 정치적 중립성을 지키려 한 그의 소신은 이후 미군 장성들의 도움으로 파면은 면했으나, 당시 군이 겪었던 정치적 격동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10월 1일은 단순히 기념일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이 날은 혼란의 시대 속에서 나라를 지킨 국군의 용기와, 원칙을 잃지 않았던 한 군인의 신념을 되새기는 날이다. 그들의 희생과 헌신이 오늘날 우리에게 평화라는 소중한 가치를 선물했음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박종식 / 예비역 육군 소장

많이 본 뉴스

      실시간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