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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 원조를 멈추면 생명이 멈춘다

Los Angeles

2025.10.13 17: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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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브히지트 바네르지 / 2019 노벨경제학상 수상자· 매사추세츠공과대학(MIT) 교수

아브히지트 바네르지 / 2019 노벨경제학상 수상자· 매사추세츠공과대학(MIT) 교수

세계는 지금 중요한 갈림길에 서 있다. 지난 20여 년간, 특히 2019년까지의 시기는 인류 역사상 가장 고무적인 시기였다. 극빈층은 눈에 띄게 줄었고 산모 사망률과 영아 사망률은 절반 이하로 떨어졌으며, 여성의 교육 참여율은 비약적으로 상승했다. 이 모든 성과는 결코 자연스럽게 주어진 것이 아니라 국제사회의 원조와 협력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그러나 최근 미국을 비롯한 주요 서방 국가들이 원조를 축소하면서 우리는 이 모든 성과들을 잃을 위기에 처했다. 일부 초빈곤국에서는 원조가 정부 예산의 상당 부분을 차지한다. 이들 국가에서 원조가 줄어든다는 것은 정부가 교육, 보건복지, 사회 기반시설 투자를 포기해야 함을 의미한다. 이미 몇몇 나라에서는 프로그램 중단이 시작됐다. 이는 단순한 행정상의 어려움이 아니라 사람들의 생존과 직결되는 문제이다.
 
시리아, 남수단, 소말리아, 콩고민주공화국처럼 분쟁과 가뭄이 겹친 지역은 더 심각하다. 수많은 아동이 굶주림의 벼랑 끝에 서 있고, 원조 삭감은 그들을 실제로 죽음으로 내몰고 있다. 미국이 전면적으로 식량 원조를 중단하지는 않았지만, 상당부분이 취소되었고 이와 함께 국제구호기구(NGO)와 지역 단체들은 무너지고 있다. 원조 전달 인프라 자체가 사라지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야 말로 눈앞에서 생명을 잃게 만드는 가장 즉각적이고 치명적인 결과이다.
 
특히 보건 분야는 더욱 위험하다. 미국이 주도했던 PEDFAR(HIV 치료 프로그램)는 저소득 국가에서 수많은 생명을 살렸다. 또한 GAVI(세계 백신접종 기금)는 전 세계 아동에게 백신을 제공해왔다. 그러나 지금 미국 내 정치 환경은 백신조차 자국민에게 불필요하다는 인식을 퍼뜨리고 있으며, 이는 국제 보건 지원의 의지를 약화시키고 있다. 만약 HIV 치료와 백신 접종이 줄어든다면 예방이 가능한 사망자가 수없이 생기는 현실을 볼 것이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국제개발처(USAID)를 “낭비와 부패의 온상”이라고 비난했다. 그러나 내가 경험한 바로는 이는 사실과 거리가 멀다. 오히려 USAID 는 과도하게 ‘절차적 정직성’을 지키려는 나머지 지나치게 많은 행정 비용을 지출한다. ‘사기와 부패’가 아니라 ‘과잉 절차’가 문제다. 이는 우리가 고쳐야 할 문제이지, 원조 자체를 무용지물로 몰아붙일 근거가 될 수 없다.
 
지금 소규모 기부국인 노르웨이와 스페인이 원조 확대로 미국의 빈자리를 메우려 하고 있지만 그 규모는 턱없이 부족하다. 이제는 중간 소득 국가로 성장한 인도, 브라질, 남아공 같은 중견국가들이 적극적으로 나설 차례다.
 
민간 부호들의 역할도 간과할 수 없다. 전 세계 상위 3000명의 부호들이 재산의 단 1%만 기부해도 약 1400억 달러가 마련된다. 이는 현재 사라지고 있는 원조를 상당 부분 대체할 수 있는 규모이다. 재원이 부족한 것이 아니라 정치적·사회적 의지가 부족한 것이 문제다.
 
원조를 둘러싼 담론에서 언론의 역할은 결정적이다. 그러나 언론은 지나치게 ‘실패’, ‘부패’, ‘재난’에 집중한다. 그러나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은 원조가 실제로 극빈층을 줄이고, 아이들의 생명을 연장했으며, 여성들에게 교육과 기회의 문을 열어주고 있다는 사실이다. 물론 실패도 존재한다. 그러나 성과 또한 분명히 존재한다. 언론은 이러한 긍정적인 성과를 균형 있게 전달함으로써 국제사회의 의지를 이끌어내야 한다.
 
원조는 단순히 돈을 주는 행위가 아니다. 그것은 인간 존엄을 지키는 최소한의 약속이다. 지금 우리는 그 약속을 저버릴 것인지, 아니면 다시 지켜낼 것인지 선택해야 한다. 기후변화, 전염병, 난민 문제는 국경과 상관없는 모든 나라의 위기이며, 인류 공동체의 협력 없이는 해결할 수 없다.
 
원조 삭감은 결국 세계 전체를 위험에 빠뜨린다. 인류는 이미 원조를 통해 더 나은 세상을 만들어왔다. 이제는 이 성과를 지켜내고 더 나아가 확대할 책임이 있다. 세계는 여전히 희망이 있다. 그러나 그 희망은 우리 모두의 의지와 연대에 달려 있다. 원조는 선택이 아니라 의무이다. 우리는 이 의무를 외면할 수도, 연기할 수도 없다. 지금 행동하지 않는다면 내일은 너무 늦을지도 모른다.

아브히지트 바네르지 / 2019 노벨경제학상 수상자·매사추세츠공과대학(MIT)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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