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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리건 살이] 오리건서 깨달은 한글 신문의 가치

Los Angeles

2025.10.14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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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유건 회계사

이유건 회계사

포틀랜드 국제공항(PDX)을 이륙할 때 하늘에서 내려다 본 포틀랜드는 마치 콘메이즈(Corn Maze)처럼 숲 속에 가로등 불빛으로 그려진 미로가 가득 펼쳐져 있다.
 
불빛의 정사각형들이 무한하게 펼쳐져 있는 LA의 밤 야경이나 마천루의 불빛들이 모여 비치는 뉴욕의 찬란함과는 거리가 있다. 하지만 PDX를 이륙할 때는 부모를 떠나는 것 같은 아쉬움이, 땅으로 돌아갈 때는 나의 세계로 침잠할 수 있겠다는 푸근함이 있다.  
 
오랜만에 밤 비행기로 출장을 다녀와, 오리건이 아닌 타지에서 살아가는 한인들의 모습을 보니 건물 간판만 보아도 애환이 느껴지고, 이 땅을 살아가는 이민자로서의 녹록지 않은 현실의 무게도 느껴졌다.
 
언론사 재무팀에서 30대의 절반을 보냈다. 그중 2년은 매달 동서부를 오가며 출장 다녔다. 시카고 지사의 회계 담당자가 출산으로 자리를 비워 3개월 동안 그곳에서 일한 적도 있고, 동부 몇몇 지사를 정리하는 쉽지 않은 경험도 있었다. 몇 달간 함께 어깨를 맞대고 일했던 사람들 앞에서 “회사를 닫는다”는 공지를 전하는 일은 가슴 먹먹한 일이었다.  
 
한 지사의 게시판에는 독자가 쓴 감사 편지가 붙어 있었는데, “자식들은 키우면 돌아오지 않지만, 신문은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늘 우리 곁에 있어 소식을 전해주니 고맙습니다” 라고 적혀 있었다. 사무실을 오가며 그 손 편지를 볼 때마다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모든 직원의 정리해고가 끝나고, 건물을 비롯한 유형자산의 소유권을 정리하고, 폐기할 물품을 처리해 줄 업체를 수배하면서 홀로 사무실에 남아 사람들이 일했던 흔적을 하나하나 정리하는 일은, 지금 생각해도 젊은 나이에 감당하기 버거운 일이었다. 일을 도와주신 지사 관리국장님들 역시 같은 마음이었으리라. 결국 2018년을 보내면서 감정이 소진됐고, 퇴사로 이어졌다.
 
우리는 한국과 미국 등 큰 세상의 일은 여러 매체를 통해 쉽게 접할 수 있다. 그러나 내가 사는 동네의 이야기를 전해주는 매체는 여전히 드물다. 오리건에 살다 보면 중앙일보 같은 신문이 없어 지역사회의 소식을 파악하기 어렵고, 대부분의 한인 소식은 교회 친교 자리에서 들려온다. 반면 LA나 뉴욕의 한인들은 신문과 방송을 통해 손쉽게 지역 사회의 소식을 접할 수 있다.  
 
타주에 와서야, 내 모국어로 된 언론이 얼마나 중요한지 새삼 깨닫고 있다. 영리 법인으로서 손익은 중요하지만, 돌이켜보면 한인 골프대회, 청소년 미술대회, 장학생 선발 같은 행사들은 소수인종인 한인들을 하나로 모아주는 접착제 역할을 했다. 이런 면에서 손익 계산에 따라 지사들을 정리한 결정은, 지역사회에 대한 책임을 외면한 아쉬운 일이다.
 
오리건에는 ‘오리고니언(Oregonian)’이라는 정론지가 있다. 한국으로 치면 강원도민일보쯤 되겠다. 신문이 아닌 온라인 콘텐츠만으로도 연간 120달러라는 비싼 구독료를 받지만, 나는 몇 년째 구독 중이다. 인구 300만의 작은 주에서, 옆 동네의 사건이나 내 지역의 계획을 매일 알차게 전해주기 때문이다.  
 
비슷한 맥락에서, 공동체가 해체되어 가는 21세기에 소수민족 언론은 더욱 소중하다. 지역사회는 이들의 역할을 존중해야 하고, 언론인들은 소명의식과 자부심을 지녀야 한다. 미주 한인이 한글로 된 기사를 읽으며 자신의 자리를 확인하는 감정은, PDX 착륙 때 창밖으로 보이는 미로 같은 불빛을 바라볼 때의 나의 감정과 닮아있다.  
 
비록 종이 신문이 사라지는 세상이 오더라도, 미주 한인의 삶의 일부로서 우리의 소식을 전하는 언론사의 역할과 의무는 계속되어야 한다.

이유건 / 회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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