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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리건 살이] ‘오래됨’에서 발견한 삶의 가치

매년 이맘때면 오리건에서는 특별한 축제가 열린다. ‘스팀업(Steam-up)’이라는 이 행사는 오리건에 사람들이 정착하던 시절부터 사용되던 증기기관부터, 캐터필러나 기중기 같은 각종 산업용 기계들까지 시간의 흔적을 고스란히 간직한 유물들을 한자리에 모은다.   나는 이 행사장에서 음악을 연주한다. 매년 가족과 함께 보낸 좋은 기억이 많다. 아들과는 두 번째 방문이다. 아이들에게 축제의 하이라이트는 보물찾기다. 각종 박물관에 돌아다니며 질문에 답하거나 숨겨놓은 물건 찾기를 통해 노란 종이에 도장을 찍거나 뱃지를 받는다. 아이들을 따라다니며 평소 무심히 지나쳤던 낡은 장치들의 유래를 다시 읽어보니, 그 기계들이 품고 있는 시간의 이야기가 새롭게 다가온다.   행사장 한쪽의 클래식카 전시장에서는 매년 이맘때쯤 재즈 오케스트라가 연주를 하곤 한다. 이곳엔 건물의 반쪽을 차지할 정도로 거대한, 100년이 넘은 수동 오르간이 존재감을 뽐내고 있다. 건반 하나를 누르면 벽면의 장치들이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소리를 내는 모습은 경이롭기까지 하다. 세월의 흔적이 가득한 이 기계를 정성껏 관리하는 미국인들의 태도에서, 오래된 것에 대한 깊은 존경심을 느낄 수 있다.     120년이 다 된 목조 건물의 관리인이 증조할머니가 그곳의 역무원이었다는 사실을 자랑스럽게 이야기하고, 배 나온 할아버지들이 수십 년 된 증기기관 트랙터를 몰고 퍼레이드를 펼치는 풍경은, 그들의 삶 속에 스며든 ‘오래됨’의 가치를 웅변하고 있었다.   이 축제를 보며 자연스럽게 내 삶의 일부가 된 오래된 물건들이 떠올랐다.   내가 연주하는 색소폰은 1947년에 만들어졌는데, 이 시기에 만들어진 색소폰들은 이 세상에 다시는 나올 수 없는 명기로 알려져 있다. 악기 제조사들은 그 시절의 소리를 복원하려고 수많은 시도를 했지만, 실패했다.그래서 아직도 사람들은 1940~1950년대에 만들어진 색소폰을 최고의 색소폰으로 일컫고 있다.     그 이유로 가장 많이 회자되는 이야기 중 하나는 소재 때문이다. 2차 세계대전 직후 남은 포탄을 녹여 만든 황동에는 의도치 않게 다양한 불순물이 섞여 있었고, 이 독특한 조합이 오히려 전설적인 악기의 음색을 만들어냈다는 것이다. 결국 이 악기는, 아무리 기술이 발달해도 다시는 만들 수 없는 시대의 산물이 되었다.   내 서재의 책장 역시 1차 세계대전 당시 유럽에서 만들어져 미국 서부까지 흘러온 것이다. 5년 전 중고거래 사이트에서 단돈 50달러에 구입했지만, 지금도 뒤틀림 하나 없이 튼튼하게 제 역할을 다하고 있다. 아들이 쓰는 장난감, 필자가 모은 보드게임, 외삼촌께 물려받은 골프채, 누군가 버리려던 것을 가져와 조율한 피아노까지, 내 주변의 많은 물건들은 다른 이들의 손을 거쳐 필자에게로 온 것이다.   어머니와 아내는 계절마다 옷을 챙겨주지만, 나는 사계절 내내 같은 두 벌의 옷과 외투 하나, 잠옷 한 벌로 살아간다. 이쯤 되면, 많은 것을 바꾸지 않아도 우리는 관에 들어갈 때까지 큰 불편 없이 살 수 있지 않을까 싶다.     한국의 오래된 아파트 단지들을 보며 나무와 꽃, 그리고 햇볕에 바랜 외벽이 어우러진 자연스러운 아름다움을 발견하곤 한다. 정말 무너질 정도가 아니라면, 굳이 재건축을 서두르기보다 지금 가진 것을 잘 보존하며 그 위에 새로운 기억들을 덧입히는 삶도 충분히 가치 있지 않을까? 새로운 것을 좇기보다, ‘오래됨’의 가치를 발견하고 지키는 삶이 우리에게 더 큰 행복을 가져다줄지 모른다는 생각을 해본다.   어쩌면 우리는 너무 쉽게, 너무 자주 새로운 것을 갈망하는지도 모른다. 새것만이 가치가 있다고 믿으며, 아직 수명이 한참 남은 물건들조차 버리고 바꾸려 한다. 하지만 시간의 손길과 사람의 이야기가 깃든 물건에는 새것이 결코 흉내 낼 수 없는 깊이와 따뜻함이 있다. 그것은 결국 우리 자신의 삶과 기억이 켜켜이 쌓인 결과이기도 하다. 이유건 / 회계사오리건 살이 발견 가치 행사장 한쪽 증기기관 트랙터 악기 제조사들

2025.08.06. 1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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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리건 살이] 10년전의 포틀랜드를 찾아서

10년 전의 포틀랜드는 아름다웠다. 비록 수입도 없이 앞날이 보이지 않는 삶이었지만, 그 시절의 포틀랜드는 그런 나를 충분히 위로해주었다.     10만 마일이 넘은 고물차를 끌고 도심 어딘가에 주차한 뒤, 큰 분수가 있는 커피숍 앞에서 아내와 함께 하염없이 앉아있곤 했다. 그러다 보면 어느새 7월4일의 불꽃놀이를 보러 가기 위해, 면식도 없는 동네 사람들과 함께 어느 커피숍이 더 맛있는지 등의 농담을 즐기며 호손 브리지를 오르곤 했었다. 사람들은 친절했고, 올드타운의 펍에서 마신 맥주는 뒷목이 시릴 만큼 상쾌했다.   아들의 밥값을 더 벌어야 되다 보니, 요즘은 다운타운의 조그마한 신용조합에서 파트타임 회계사로 일하고 있다. 회사는 10년 전 친구들과 자주 걷던 그 거리 위에 있다. 그때는 자전거 대여 업체들이 줄지어 있었고, 가이드가 자전거를 타고 우리에게 포틀랜드의 역사와 명소를 설명해주었으며, 중간 중간 펍에 들러 함께 맥주로 목을 축이곤 했다.     하지만 코로나 이후의 올드타운은 더 이상 그때의 모습을 간직하지 못하고 있다. 내가 일하는 신용조합 건물은 홈리스들과 마약상인들로 둘러싸여 있고, 직원 전용 주차장에는 지독한 소변 냄새가 진동한다. 위험하다는 동료 직원들의 만류에도, 나는 때때로 주변 상권이 얼마나 회복되었는지 보기 위해 거리로 나선다.     작년까지 간신히 열던 식당 두 곳은 이제 문을 닫았고, 10분은 걸어야 겨우 문을 연 음식점이 보이기 시작한다.   포틀랜드는 홈리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시민들로부터 세금을 더 걷고 있지만, 내가 일하고 있는 이 지역은 철저히 버려진 느낌이 든다. 지구인으로서, 그리고 한 사회의 소시민으로서 이 문제를 해결할 힘이 없다는 사실에 좌절감을 느낀다.     이곳을 삶의 터전으로 삼던 많은 이웃들이 떠났다. 이름 모를 식당에라도 들어가 “고생 많으셨다”는 말 한마디라도 건네고 싶었지만, 문을 연 곳을 찾지 못한 채 사무실로 되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코로나 시대의 도래와 AI의 급속한 발전으로 사회는 더욱 개인화되어 가고 있다. 마냥 좋은 추억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단지 보고서 한 장을 만들어 대표이사의 결재를 받으려면 팀원들과의 끊임없는 토론과 부서장으로부터의 사실 검증, 지지고 볶으면서 나오는 스트레스, 고뇌를 떨쳐버리기 위한 담배 한 모금, 그리고 과업이 끝난 뒤에 즐기는 선후배와의 저녁식사들이 나의 삶에 있었다.   이것들은 우리가 하나의 단체에 속해 있다는 소속감을 느끼게 해주었고 그 단체 내의 역동적인 상호작용은 내가 인간임을 인지하는 데 있어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이제는 누군가 질문을 하면, 믿을 만한 AI를 네댓 개 켜놓고 그들의 의견이 얼마나 일치하는지, 내가 가진 지식 및 관련 법률과 얼마나 부합하는지를 확인한 뒤 답변을 한다. 안타깝게도 이 방식은 사람과 소통할 때보다 훨씬 효율적이며, 그 비용 또한 사람을 쓰는 것보다 훨씬 저렴하다. 사용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이런 생각을 하다 나의 눈을 다시 주변으로 돌려본다. 도시는 끝내 회복하지 못하고, 공동화 현상은 피할 수 없는 길처럼 느껴진다.     ‘인간’이라는 단어는 본디 사람과 사람 사이의 간격을 의미한다는데, 나는 인간으로서의 실존을 도대체 어디서 찾아야할까. 영화 속 스카이넷은 무력으로 인간을 억압했지만, 우리는 이미 전혀 다른 방식으로 종속되고 있는지도 모른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던 시절만 해도 우리는 더 나아질 수 있다는 희망을 품었고, ‘지구촌’이라는 말이 그리 낯설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 우리는 지구촌에 살고 있다고 말하기엔 서로에게서 너무 멀어진 듯하다.     커뮤니티의 회복이 필요하다. 일터에서 인간이 더 이상 가장 효율적인 존재가 아니라면, 우리는 일 밖의 시간에 피부로 느낄 수 있는 존재들과 더 많이 소통해야 한다. 더 많은 비효율을 추구하면서, 인간이라는 존재임을 서로 확인시켜야 한다. 카카오톡이나 슬랙 같은 메신저보다, 직접 얼굴을 보고 약속을 잡아 식당에서 함께 식사하며 음식 맛을 나누고, 시답잖은 날씨 이야기를 하며 주말 계획을 서로 물어보아야 한다.     주말마다 방 안에 누워 스낵과 쇼츠로 시간을 보내기보다는, 침대에서 일어나 취미를 찾고 합창을 하든, 춤을 추든, 낚시를 가든, 골프를 치든, 사람들과 교류하며 실존을 찾아야 한다. 그렇게 하다 보면, 어느새 우리는 다시 만들어진 위대한 커뮤니티 안에서 개인의 영달보다는 인간으로서 추구해야 할 공통의 선을 더 강하게 좇고 있을지도 모른다. 이유건 / 회계사오리건 살이 포틀랜드 홈리스 문제 신용조합 건물 파트타임 회계사

2025.07.08. 20: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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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리건 살이] 계엄서 대선까지 한국살이 반년

한국에서 지난 12월 초부터 무려 6개월을 보내고, 저번 주에 오리건으로 돌아왔다.     나와 아내는 한국행 비행기를 타러 가는 와중에 계엄 소식을 들었고, 과연 인천에 착륙은 할 수 있을까 반신반의하며 좌석에서 미주알고주알 이야기를 나눈 기억이 난다. 인천공항 게이트에서 뉴스를 다시 켰을 때, 계엄은 종료되어 있었고 환율은 무려 100원이 뛰어 있었다.   모국의 상황이 좋지 않음에 안타까워해야 했지만, 막상 식당에서 카드를 긁으며 밥값이 싸졌다는 생각에 놀부 마냥 남들 몰래 웃었다.     서울은 그 복잡한 정치상황과는 관계없이 언제나처럼 흘러가고 있었고, 우리 가족은 15년 만에 한국의 싱그러운 봄을 만끽하다가 며칠 전 포틀랜드로 돌아왔다. 남들이 보면 그야말로 팔자 좋은 여행 다녀온 셈이다. 심지어 우리 가족이 돌아오는 주에는 마법같이 환율이 다시 100원 떨어져 있었다. 신은 존재한다.   이번 한국 여행은 특히나 좋은 기억이 많았는지, 오기 싫은 마음에 비행기 안에서 눈물을 짜냈다. 오리건의 과일향 나는 초록 숲으로 돌아오자, 나는 다시 움츠러들었다. 여느 때처럼 일상으로 돌아와 교회 성가대에 앉아 노래를 부르니 원하는 모든 것을 다 가질 수 없다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한국에서의 즐거움은 다시 아득한 추억이요, 나의 즐거움은 여기서 찾아야 할 것이다.   나의 기억이 시작된 지점이 있다면 강동구 둔촌아파트였던 것 같다. 여름햇살이 매미소리 마냥 비치던 선린 초등학교 운동장 어느 나무 그늘 기억이나, 아버지와 종종 올라가곤 했지만 지금은 다 없어진 매봉산 자락의 약수터처럼, 은둔하고 싶어하는 나의 깊은 욕망의 뿌리는 그곳에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어린 시절 나는 반장이 되는 걸 즐기지는 않았던 것 같다. 마블 영화에서나 나올 법한 “큰 힘엔 큰 책임이 따른다”는 말이 괜히 부담스러웠고, 얼추 공부는 했지만 사람들을 이끄는 것보다는 일을 많이 하는 위치에 나를 넣어 놓고는 했었다.     반장선거를 하면 앞에서 친구들에게 약속을 하는 것보다는, 친구들의 표를 모아 하나하나 불러주는 게 그저 좋았다. 그 시절의 반장선거는 참 재밌었다. 반장후보들은 반을 위해 열심히 공약을 외쳤고, 투표가 끝난 뒤 승자는 패자를 위로했으며, 패자도 박수를 받으며 “그래도 반을 위해 열심히 하겠다”고 말했다. 무려 50명이나 되는 반에서 우리는 민주주의를 12년 동안 꽤 모범적으로 배워온 셈이다.   밥벌이하느라 바빠서일까. 나이가 들수록 우리는 점점 외골수가 되고, 타인의 시각을 이해하려 하지 않게 된다. 내 어깨 위에 짊어진 게 많아질수록, 지켜야 할 것이 많아질수록, 너와 나 사이에는 선이 그어진다. 애초에 내가 보호해야 할 무언가가 없었다면, 남과 다툴 일이 있었을까. “이번엔 내가 양보하지 뭐” 하며 그냥 웃고 넘어가진 않았을까. 하지만 우리는 가진 것을 내려놓을 수 있는 신성한 존재는 아니다.   그럼에도, 6.25 마냥 이렇게 아프게 좌우가 부딪히는 시기라면, 결과를 떠나 서로 남긴 상처에 대해 한 번쯤은 돌아보는 선거였으면 좋겠다. 50.01%로 승패가 갈렸다고 해도, 이를 받아들이는 것이 민주주의이고, 또한 민심이리라. 패자는 절규하기보다는 결과를 받아들이고, 승자는 49.99%로 진 소수의 의견을 묵살하지 않고 배려하는 관용을 보여야 한다.     누군가와 서로 심하게 다투면 그도 많은 피를 흘리지만, 작용 반작용의 법칙에 따라 내 몸과 마음도 상처 입게 되어 있다. 내 가족, 내 재산, 내 신념 등 각자 지키고 싶은 것이 달라서 그런 것이리라. 그 다름을 인정하고 상대방이 지키려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아보려 노력한다면, 우리는 이 위기의 시대의 선거를 통해 또 한 번 진화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까지 쓰다 보면, 누군가는 시골에서 배부른 소리 한다고 비웃을지도 모르겠다. 그 말도 틀리진 않다. 그래도 나는, 당신 이야기를 듣고 이해하려 한다.   글을 맺으며, 대통령 탄핵에 대한 헌법재판소의 판결 일부를 다시 떠올려본다. “국회는 소수의견을 존중하고 정부와의 관계에서 관용과 자제를 전제로 대화와 타협을 통하여 결론을 도출하도록 노력하였어야 합니다. 피청구인 역시 국민의 대표인 국회를 협치의 대상으로 존중하였어야 합니다.” 이유건 / 회계사오리건 살이 한국살 계엄 한국행 비행기 계엄 소식 패자도 박수

2025.06.03. 19: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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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리건 살이] 욕망의 주머니를 비워낼 시간

대학교에 입학한 이후로 25년 동안, 나는 악기를 쉬지 않고 연주해왔다. 친구들과 밴드가 하고 싶어 집에 있는 업라이트 피아노를 떼쓰듯이 팔고는 싸구려 중고 알토 색소폰을 하나 샀다. 그리고 학교에 있는 ‘윈드 오케스트라(현악기가 없이 관악기만으로 이루어진 오케스트라)’에 입단했다. 어쩌다 보니 군악대를 다녀오고, 여러 오케스트라와 밴드를 전전하며 매순간 미련을 버리지 못한 채 지금까지 악기를 손에서 놓지 않고 있다.     오리건에 올라오기 전 LA에서는 샌타모니카를 비롯한 여러 파머스 마켓에서 내 연주가 울려 퍼지기도 했다. 지금 이 동네에서도 포틀랜드에서 꽤 이름 있는 재즈 오케스트라의 단원으로 앉아있다. 물론 이런 구력이 나의 실력을 포장할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지금까지 꾸준히 해온 것만큼은 자신 있게 보여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체계적인 정규교육을 받지 않은 채 길거리 악사로 살아온 나는, 어디를 가든 내 실력을 증명해와야 했다. 1세대 이민자라 영어가 부족했고, 음악 쪽 인맥도 없다 보니, 오디션과 잼 세션(jam session·즉흥 협주)에서 어떻게든 내 실력을 보여야 했다. 특히 잼 세션에서는, 서로 얼굴도 모르는 뮤지션들이 무대에 올라 즉석에서 몇 곡을 정해 연주해야 했는데, 당연히 그런 자리의 즉흥 연주는 늘 공격적일 수밖에 없었고, 뒤따르는 피로감도 적지 않았다.     어느 날은 내가 마지막 프레이즈를 끝내기도 전에 다음 주자가 내 연주를 끊어버린 적도 있었고, 일부러 궁합이 맞지 않는 곡을 던져주는 일도 많았다. 웃자고 하는 얘기지만, 잼 세션 초대를 받을 때는 “악기를 가져와라” 대신 “Bring your axe(도끼를 가져와라)”라는 메시지를 받는다. 그런 경험들 때문인지, 몇 년 전부터는 잼 세션에 나가지 않게 되었다.   뉴욕에는 진푸름이라는 걸출한 알토 색소포니스트가 있다. 대한민국 사람 중 알토를 가장 잘 부는 사람을 꼽으라면, 나는 단연 그녀를 선택할 것이다. 이번에 그녀가 신보를 냈다기에, 10장 정도 받아서 한국을 방문할 때마다 클럽마다 시디를 비치해뒀다. 그러던 중, 금호동의 작은 클럽 ‘올레오’를 방문하게 되었다. 여기서는 수요일부터 일요일까지 5일 동안, 정규 공연 없이 오직 잼 세션만 운영하고 있었다. 일본의 오래된 재즈 클럽 ‘인트로’ 정도나 이런 실험적인 운영을 하는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한국에도 이런 형태의 공간이 생겼다는 게 신선하고 반가웠다.     ‘참새가 방앗간을 그냥 지나치랴.’ 나는 다시 도끼를 꺼내들고 잼 세션에 참여하기 시작했다. 첫 방문 때, 얼굴이 시뻘게질 정도로 박자를 놓쳤다. 그놈의 미련이 또 몸 밖으로 튀어나와, 두 번, 세 번, 계속해서 올레오에 들락날락했다.   그러던 와중 어제는 참 반가운 소식을 들었다. 올레오의 잼 세션에서 호스팅하던 드러머에게서 함께 연주해보지 않겠느냐는 제안을 받은 것이다. 부끄러움과 고마움의 감정이 동시에 들었다. 아직도 나는 그 친구들에 비하면 한참 실력이 부족한데, 나를 써주겠다고 한 드러머와 클럽사장의 마음이 갸륵했다. 그렇게 바라던 한가지 일이 이루어졌는데 마침 나에게 온 다음 감정은 더 잘하고 싶은 마음 한편에 부담스러움이었다.   갑자기 뒤를 돌아보고 나에게 되묻는다. 이 정도까지 했으면, 이제 잠깐 멈춰서도 되지 않을까. 이삼십대의 나라면 앞만 보고 달렸겠지만, 마흔이 되어 돌아보니, 이제는 무엇을 더 가지려는가, 또 무엇을 놓아야 하는가를 고민하게 된다.     홀로 악기와 함께 있던 시절은 이제 멀리 있다. 지금은 내가 먹여 살려야 할 가족이 있고, 새로운 페이지를 열어가는 일은 결코 가볍지가 않다.     “욕망의 주머니가 한번 채워지면 비워낼 줄도 알아야 한다.” 어느 친구가 했던 이 말이 머릿속을 맴돈다. 돈 한 푼 벌리지 않는 악기를 열심히 불고 있을 때, 집에서 엄마와 단둘이 놀고 있을 아들의 모습이 눈에 어른거린다. 시간이 조금이라도 남는다면, 한 시간이라도 아이와 더 함께 있어야 하지 않을까. 아니면, 맛있는 것 하나라도 더 먹일 수 있는 돈을 버는 게 맞지 않을까.     포기가 아름답진 않을 수 있다. 하지만 삶의 갈림길에서 가장 소중한 것을 지키려는 선택이라면, 그 또한 하나의 삶으로 충분히 존중받아야 하지 않을까. 이유건 / 회계사오리건 살이 주머니 욕망 재즈 오케스트라 윈드 오케스트라 즉흥 연주

2025.05.06. 18: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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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리건 살이] ‘양복입은 거지’의 느린 여행

포틀랜드 공항에 착륙해 게이트를 나오면, 코끝에 촉촉한 공기가 스며든다. 사실 랜딩하기 전, 비행기 창문을 통해 내려다보는 오리건의 초록 숲만으로도 마음이 푸근해지곤 한다. 우리 동네 공항만의 푹신한 카펫바닥을 밟으며 걸어 나오다 문을 열면, 깊은 들숨이 저절로 쉬어진다. 그 첫 숨을 들이마실 때 느껴지는 공기는 때때로 내 뇌까지 시원하게 해주곤 한다.   공항 주차장에 세워둔 차에 지친 몸을 싣고 집으로 향한다. 겨울의 포틀랜드는 쉬이 마르지 않는 비가 추적추적 내린다. 가랑비를 뚫고 집으로 가는 길, 이끼 옷을 두른 나무들이 줄지어 선 모습을 보며 나는 ‘집’을 실감한다. 어떤 이는 이곳을 ‘우울의 바다에 익사할 수도 있는 곳’이라 말하지만, 해가 드문 오리건의 가을과 겨울은 침잠하고자 하는 은둔자나 먼길을 떠나온 외톨이 회계사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피난처다.   회계사에게 이삼월은 잔인한 달이다. 하루 종일 세금 보고서를 작성해야 할 것 같지만, 현실은 그보다 복잡하다. 말 안 듣는 클라이언트에게 영수증과 자료를 받아내려 노트북 하나 들고 미국 전역을 날아다녀야 한다. 이메일과 업무용 메신저가 발달한 지금도, 자료를 내놓지 않는 고객을 붙들고 하루 종일 씨름해야 재무제표를 완성할 수 있는 경우가 많다.   얼마 전, 나는 지구를 한 바퀴 돌았다. 겨울, 부모님께 손자를 보여드릴 겸 한국을 찾았다가 한국 내 네트워크를 정리하고, 세금 보고 시즌을 맞아 포틀랜드로 돌아와 로컬 업무를 소화했다.   숨 가쁘게 일을 처리한 뒤, LA에서 쪽잠을 청하고 오랜 클라이언트가 있는 뉴욕으로 향했다. 비행은 대개 새벽 편을 이용해 기내에서 잠을 청하고, 다음날 오전에 클라이언트를 만나서 일을 마무리한다.     누군가는 이를 ‘글로벌 인재’라고 놀릴지도 모르지만, 정작 나는 ‘양복 입은 거지’ 같은 기분이 들었다. 욕심이 생겨 뉴욕에서 곧장 한국으로 돌아가기가 싫어졌다.     비행 일정을 바꿨다.에펠탑 옆에서 커피와 빵 한 조각을 집어서는, 소아시아로 건너가 보스포루스 해협에서 2천년 고도를 찾았다.     저렴한 한인 호스텔에 몸을 뉘이고 이틀 동안 잠시 랩탑을 꺼두었다. 동로마 시대에 지어진 성당에서 동행 없이 공간을 음미하고, 정처없이 거리를 걷다가 노점에서 산 고등어 케밥을 물고 계단에 앉아있으면, 느려진 시간이 옆에 있음을 느낀다.   그제서야,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8시간도 어쩌면 사람이 하루에 일하기에는 벅찬 시간일지도 모른다.’   삼시 세 끼를 먹은 다음에는 소화할 시간이 있어야 하고, 일을 마친 다음에는 가족과 미주알고주알 수다를 떨 시간도 있어야 하고, 함께 사는 고양이 똥도 치우고, 아내에게 예쁨 받으려면 가끔 밥도 해야 하고, 적어도 뒷마당에 잡초는 내가 뽑을 수 있어야 하며, 친한 친구와 만나거나 전화라도 해서 안부를 묻는 한편, 일주일에 한 번쯤은 보드게임을 하고, 주말에는 동네 연주자들과 시답잖은 연주라도 할 수 있는 시간이 있어야 한다.     이것들을 다하고서는 매일 30분 정도는 동네를 걸으며 모든 전자기기에서 벗어나 사색을 할 시간도 있어야 한다. 밥 먹고 16시간을 일한 뒤 곯아떨어진다고 해서 우리의 몸이 쉼에 대한 욕구를 잊었다고 생각하기는 어려운 것이다.   그러면서 과거를 떠올려 본다. 공과금을 내기 위해 부모님은 은행까지 버스나 지하철을 타고 가셨었고, 멀리 있는 이에게는 편지로 안부를 묻곤 했으며, 5.25인치 플로피 디스크로 컴퓨터를 부팅하려면 1분을 넘게 기다려야 했는데 그 기다림 속의 사색과 잡생각이 뇌를 식혀주기도 했을 것이다.     세상은 너무나 효율적으로 돌아가고 있고, 우리는 그 속도에 맞춰 살아가고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의 뇌가 고요함을 필요로 하지 않게 된 것은 아니다. 너무 빨리 돌아가는 나머지, 공항을 잃어버린 비행기처럼, 우리는 찰나의 빈 시간이 생기면 불안해하며 무언가를 찾아 헤맨다.   쉼이 있는 삶이어야 한다. 남들보다 느려도 괜찮고, 조금 더 빨리 가기 위해 차선을 바꿔가며 분주할 필요도 없다. 언젠가 나에게 돌아올 종착지는 내 몸을 뉘일 관 하나일 것이다. 그 과정에서 우리가 가질 수 있는 가장 큰 부유(富有)는 시간을 느리게 가지며, 순간순간의 과업이 아닌 ‘나’ 를 오롯이 느끼는 것이 아닐까. 이유건 / 회계사오리건 살이 양복입 여행 포틀랜드 공항 비행기 창문 동네 연주자들

2025.04.03.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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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리건 살이] 추억을 만난 현실의 무게

만남과 헤어짐의 삶이라. 군필 남자들이나 아는 냄새 풀풀 나는 이야기겠지만 훈련소를 마친 동기들 사이에서 흔히 나누는 말이 있다. “휴가 나가면 꼭 연락해서 술 한잔하자.”     하지만 막상 휴가가 되면 대부분 연락이 끊기고, 전역하면 영원히 만나지 않는 사이가 되곤 한다. 인연이란 게 늘 그렇다. 처음에는 아무리 가까웠다 해도 시간이 흐르면서 자연스럽게 멀어지고, 끝내 잊히기도 한다.   드넓은 미국 대륙 안에서의 1세대 한인으로의 삶을 돌아보면 훈련소를 나온 이등병의 삶과 딱히 다를 게 있을까 싶다. 신분이 없고 돈이 없던 시기에 만나서 차 한 잔에 뜨거워진 사이가 있는가 하면, 우정이 영원하리라 믿었던 과거의 친구들은 어느새 마음이 닿을 수 없는 인연이 되어버린 경우도 있다. 시공간의 제약은 생각보다 더 쉽게 사람 사이를 갈라놓는다.   얼마 전 업무 차 LA를 다녀왔다. 짧은 일정이었지만, 옛 직장 동료와 상사를 만났고, 고등학교 시절 친했던 친구가 미국으로 발령을 받았다는 소식을 듣고 반가운 마음에 찾아가기도 했다. 오랜만의 재회였지만, 나는 과거의 추억 속에서 친구를 찾았고, 그는 현실의 무게 속에서 나를 마주했다.     한 시간 남짓 이어진 대화는 어딘가 어색했고, 나는 찜찜한 기분으로 자리를 떠났다. 다음날이 되어서야 내 마음이 좋지 않음을 확인하고 섭섭하다는 문자를 보냈는데, 보내고 나서도 맘이 여전히 편하지는 않았다.   시간이 지나면서 자연스럽게 멀어진 관계가 어쩌면 당연한 것인데도, 그 당연함을 인정하기가 쉽지 않았다.   곰곰이 생각해 본다. 내 머릿속에서는 여전히 과거의 친구를 떠올리지만, 현실의 우리는 이미 너무 다른 길을 걸어왔다. 태평양을 건넌 뒤에 나는 두고온 인연에 에너지를 쏟지 않았다. 내가 기대했던 친구와의 농담 따먹기는 고등학교 때의 추억일 뿐이었다. 미국에서 이민자로 살아가느라 정신없이 바빴던 나도, 새로운 환경 속에서 나름의 삶을 꾸려온 그도, 서로가 놓쳐버린 시간들을 다시 메우기는 어려웠다.   조용필의 노래 가사 중에 이런 구절이 있다. “소중한 건 옆에 있다고, 멀리 떠나가는 사람에게 말해주면…”     이역만리 타지에서 내가 소중히 해야 할 것은 어쩔 수 없이 내 가족이고 그 다음이 같은 땅에서 만난 인연들일 수밖에 없다. 물론 태평양을 사이에 두고 이어지는 끈끈한 사이도 있을 수 있지만 이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였다가는 마음이 아플 때가 종종 있다.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에서도 멀어진다’ 말이 있다. 그렇다면 ‘마음에서 멀어지지 않으면, 눈에서도 멀어지지 않는다’고 할 수 있을까.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고 본다. 눈에서 멀어지는 건 인연일테지만 추억은 남는다.   글이 산으로 간다. 소중한 것을 잃고 싶지 않지만 모든 것은 영원할 수 없다. 사랑하는 아내와 결혼식장 주례 선생님 앞에서 금석 같은 맹세를 하고 평생 행복하게 해주겠다고 약속하지만 때로 작은 말 한마디에 서로 상처받고 할퀴는 일도 있는가 하면, 이바구가 잘 맞아서 매주 보던 한인타운의 친구도 훈련소에서 자대 배치받는 기차 타는 마냥 어느 날 타주로 떠나 버리기도 한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 다시 만났을 때, 서로가 다른 사람이 되어 있음을 깨닫는다. 그것은 시간과 공간이 만들어낸 자연스러운 변화이며, 누구의 잘못도 아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여전히 무언가가 영원하기를 바란다. 그것이 물질이든, 가치이든, 사람이든. 어쩌면 우리는 스스로 변하는 존재이기에, 변하지 않는 무언가를 갈망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내일은 오리건에 올라와서 처음으로 사귄 친구들과 오랜만에 저녁식사를 하기로 했다. 이제 함께 지낸 지 5년이 됐다. 그동안 서로에게 많은 변화가 있었지만, 여전히 나를 아끼고 걱정해주는 이들과 오래도록 좋은 관계를 이어가길 바란다. 모든 것이 영원할 수는 없겠지만, 최소한 이 순간만큼은 소중히 간직하고 싶다. 추억은 남을 테니까. 이유건 / 회계사오리건 살이 추억 무게 고등학교 시절 이역만리 타지 결혼식장 주례

2025.03.03. 1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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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리건 살이] 보드 게임서 배운 인생의 점수

며칠 전, 오리건을 비롯한 미국 서북부 지역에서 보드게임이 유행한다는 기사를 봤다. 이유를 알 것 같으면서도 인터뷰 내용이 궁금해 읽어보니 아니나 다를까 “Because it rains all the time”이라고 한다.   그렇다. 오리건과 워싱턴주에서는 11월부터 3월까지 해를 보기가 어렵고, 일주일에 하루 정도를 제외하고는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편이다.     자연스럽게 사람들은 겨울이 되면 밖에서 놀기보다는 집에 틀어박힐 수밖에 없는데, 보드게임 역시 기나긴 우기를 버티는 방법 중 하나로 볼 수 있겠다.   꼭 그런 이유는 아니지만, 캘리포니아에 있을 때부터 보드게임을 자주 즐기곤 했다. 짧은 게임은 1시간도 안 되는 경우가 있지만, 긴 게임은 12시간이 넘는 경우도 있다. 이런 유장한 게임을 할 때는 새벽부터 모여 샌드위치와 커피로 시작해 저녁 시간이 되어서야 게임을 마무리하고 식사를 하러 가는 경우가 많다. 골프보다 더 지독한 취미인 셈이다. 게다가 이런 게임을 소화할 수 있는 사람도 많지 않다.     긴 게임을 하다 보면 그 시간 동안 현실에서 잠시 벗어날 수 있고, 한편으로는 게임 라운드가 진행되는 동안 나의 삶을 어느 정도 투영해볼 수도 있다.   인생이 5라운드라면, 내 나이 42세, 지금 3라운드 초입 어딘 가에 있다고 볼 수 있겠다. 운이 좋아 좋은 부모를 만나 양질의 교육을 받았고, 필요할 때 인생의 전환점을 만들어 준 동료와 선배들 덕분에 큰 어려움 없이 여기까지 왔다. 물론 중간 중간 고난이 있었지만, 누적된 손익계산서로 보자면 지금까지의 결과물이 손실은 아닌 것 같다.     게임의 중반부가 되면 각자가 추구하는 바가 명확히 드러난다. 자원이 매우 적더라도 자신의 목표를 향해 꾸준히 나아가는 플레이어가 있는가 하면, 그때그때 좋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자원이나 점수를 쌓아가는 사람도 있다. 중요한 점은 게임마다 승리 조건이 무엇인지(자원이냐, 돈이냐, 점수냐)를 명확히 파악하고 운영해야 한다는 것이다. 열심히 자원이나 돈을 모아도 라운드 끝에서 점수를 내지 못해 게임을 접게 되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배가 부르면 이런 개똥철학이 나오는 걸까. 우리 인생에서 점수란 무엇일까. 돈을 많이 모으고 누적된 손익계산서를 이익으로 만들어 자식에게 물려주는 것이 과연 내 인생의 승리 조건일까.     자원과 돈은 기본적인 삶을 영위하기 위한 필요조건임은 분명하지만, 그것들이 행복을 보장하거나 보편적인 선 혹은 가치를 창출하는 충분조건으로 보기는 어렵다.     문득 사람들이 왜 선교여행에 가서 건물을 짓고 자신의 돈과 시간을 쓰는지, 왜 남들보다 못한 쥐꼬리만한 월급을 받으면서도 어려운 사람들을 돕기 위해 애쓰는지 궁금해졌다.     비록 자신이 가진 자원을 잃더라도 이를 통해 공동체를 선의 방향으로 이끌고 가치를 창출하려는 사람들을 생각하니, 이 야밤에 숭고한 마음이 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오늘도, 내가 가지지 못한 주식이나 코인의 가치가 떨어지면 속으로 기뻐하고 그 음험한 마음을 남에게 티도 안 낸 채 아쉬운 표정을 지어 보인다. 그런가 하면, 길 위에서 마주치는 노숙자에게는 눈길조차 주지 않고, 자선단체나 교회에 헌금도 구두쇠처럼 최소한도로 한다.     수신제가 치국평천하라 했던가. 개인부터 글러먹었다. 이제 겨우내 이뤄놓은 자수성가를 잠시 내려놓고, 가치를 창출하는 일에 나라는 인간이 에너지를 쏟을 수 있을지 스스로 의문이 든다.     문득 한 술 더 떠 나를 비웃는다. 나는 왜 아무것도 없던 시절엔 기회의 평등을 갈망하다가, 내가 가진 것이 늘어나니 이토록 빼앗기고 싶지 않아 안달이 났을까. 이유건 / 회계사오리건 살이 보드 게임 게임 라운드 보드 게임 유장한 게임

2025.02.02.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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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리건 살이] 오리건 숲속 4년, 안빈낙도는 멀다

미국이 딱히 오고 싶은 곳은 아니었다. 10여 년 전 첫 직장이 워크아웃에 빠지면서, 남들보다 빨리 다른 곳을 바라보게 된 나는 일단 지긋지긋한 서울을 벗어나야겠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서울에서 땅을 드릴로 뚫어 지구 반대편으로 갈 수 있는 곳이 어디일까 찾아보니, 아르헨티나와 우루과이 앞의 바닷가쯤 되었던 것 같다. 무작정 부에노스 아이레스행 티켓을 두 장 끊고, 양가에 떠나겠다고 말씀드렸지만 흔쾌히 가라고 허락해 주실 리 만무했다. 바다는 건너야겠다고 설득해서 가까스로 허락받은 곳이 미국이었다.   부부 둘이서 큰 여행 가방 두 개씩 들고 샌프란시스코에 내리니, 어학연수 때 돈이나 쓰고다니던 편한 마음은 없고 어떻게든 살아야겠다는 중압감이 몸을 눌렀다.     미국에서 제일 비싼 동네가 북가주 베이 지역이다. 그것도 모르고 친구가 방 싸게 빌려준다는 말 한마디에 아무것도 모르는 와이프를 이역만리 타국으로 데리고 왔다. 나쁜 남편이 맞다. 서울에 있었으면 아파트에라도 살고 있었을 텐데, 아무것도 모르는 순진한 여자를 데리고 샌프란시스코의 쪽방 생활을 시작한 것이다.     비싼 어학연수 값을 내면서 신분을 유지하고, 그 와중에 회계사 준비를 하며 살다 보니 둘이 한국에서 3년간 악착같이 모은 돈이 눈 녹듯 사라지기 시작했다. 렌트비 낼 돈이 모자라 선택한 것이 오리건으로의 이사였다.     이사한 뒤에는 정말 잔고가 바닥을 보였다. 배송업체에서 근무하며 팔레트에 짐을 쌓기 시작했다. 와이프는 스타벅스 바닐라 라테를 먹고 싶어했지만, 4.5불 곱하기 30일이면 135불이라 안 먹었으면 좋겠다고 했다. 길거리에서 꺼이꺼이 우는 모습을 보고 못난 남편이 여기 있구나 생각했다.   회계사에 붙으면 부자가 될 줄 알았다. 미국 유수의 내로라 하는 기업들이 여섯 자리 숫자 연봉을 줄 테니 제발 좀 와주십사 해줄 줄 알았고, 영주권도 금세 해결될 줄 알았다. 참 아무것도 몰랐다. 이력서를 100장 넘게 보내도 면접 볼 기회조차 오지 않고, 막상 면접을 봐도 내 영어실력이 형편없어 붙을 리 만무했다.   신분이 없으니 면접이 잘되어도 스폰서를 받지 못했다. 내가 갈 수 있는 선택지는 영주권 스폰서가 가능한 한국계 기업들로 좁아졌다.     여러 옵션 중에 LA 한 언론사와 면접 기회를 얻었다. 화상 면접이었는데, 면접 시간에 맞춰 집으로 가는 길에 앞쪽 차 3대가 연쇄 추돌사고를 냈다. 차들이 박살난 사이를 뚫고 집에 도착해 허겁지겁 모니터를 켰다.     다행히 면접은 늦지 않았고 합격했다. 하지만 아내가 징조가 너무 안 좋으니 다시 생각해 보는 게 어떠냐고 했다. 그럴 수 없었다. 주머니에 돈이 절박했고 기회를 주는 회사라면 맨발로라도 뛰어가야 하는 상황이었다. 못난 남편은 언젠가 기회가 되면 꼭 돌아오자고 기약없는 약속을 한 뒤에 아내 손을 다시 끌고 남쪽으로 차를 돌렸다.   그렇게 LA에서의 세월이 하염없이 흘렀다. 영주권이 나온 뒤 남들 마냥 급여가 높은 회사로 이직을 했다. 배가 부르기 시작했다. 서울에서 질려 오리건으로 왔던 나는 LA에 또 질려갔다. 코로나가 터지면서 우리는 좋은 기회에 오리건에 집을 샀다. 사람 만나고 술 먹는 것을 좋아하면서도 나는 항상 어디론가 숨고 싶어했다.     오리건의 가을이 그립기도 했다. 가끔 바람이 불면 단풍이 하염없이 떨어져서 하늘조차 안 보이는 오리건으로 돌아가 아무도 모르게 숨만 쉬고 살고 싶었다. 우리는 2020년 5월28일 LA에서 짐을 싸고 다시 오리건으로 올라왔다.   그렇게 벌써 4년이 지났다. 영원히 건강하실 줄 알았던 부모님의 나이 듦을 보게 되고, 새롭게 아이가 태어났다. 안빈낙도를 꿈꾸며 이곳에 다시 왔지만 직장 3곳에서 근무하며 돈의 노예 마냥 몸을 갈아서 일하고 있다. 복잡한 LA 생활이 싫어서 숲 속으로 들어왔지만 그새 사람이 그리워 갈구했다. 막상 친구가 그리워 한국에 잠시 가면 팍팍한 한국에서의 삶에 금세 염증을 느껴버린다.     말러의 3중 고뇌라고 했던가. 나는 오리건에서는 LA 사람이요, 미국에서는 1세대 이민자이며, 세계에서는 한국인인 셈이다.     오리건에 겨울이 오면 해는 일찍 지면서 추적추적 비가 멈추지 않는다. 빗소리를 들으면서 일본 마켓에서 사온 회 한 접시에 소주를 홀짝거린다. 10분 정도는 몸이 데워지는 느낌을 흠뻑 즐길 수 있지만, 이내 함께 잔을 기울일 친구가 그립다.     이유건 / 회계사오리건 살이 안빈낙도 오리건 오리건 숲속 면접 기회 면접 시간

2025.01.01.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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