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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리건 살이] 아스토리아로 가는 길

Los Angeles

2025.11.11 16:37 2025.11.11 17: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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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유건 회계사

이유건 회계사

5번 프리웨이 북쪽 방면을 따라 오리건으로 올라오다 보면, 포틀랜드를 지나기 전 26번 고속도로가 나온다.  
 
이 길은 오리건 코스트의 캐넌비치와 주 경계 도시인 아스토리아로 향하는 지방 고속도로인데, 해변을 따라 올라오는 역사적인 Route 101과도 만난다.  
 
가을이 되어 아스토리아로 넘어가는 이 길은 지금 장관이다. 단풍이 하늘을 가릴 듯이 떨어지고, 끝없는 낙엽 사이로 사슴과 여우가 종종 얼굴을 내민다. 도시의 소음이 닿지 않는 이 길은, 인간의 시간보다 자연의 시간이 더 오래된 곳이다.
 
아스토리아는 오리건에서 가장 오래된 항구 도시이자, 루이스와 클라크 탐험대가 태평양에 도착했던 역사의 끝자락이다. 19세기 초 이곳은 서부 개척의 출발점이자 무역의 관문이었다. 태평양을 건너온 이주민들과 항해자들이 머물던 항구에는 여전히 오래된 창고와 목조건물들이 남아 있다.  
 
그중 몇몇은 이제 카페와 소규모 갤러리로 바뀌어, 도시의 오래된 숨결과 새로운 감각이 함께 흐른다. 바다를 향해 뻗은 거대한 철교 아래로는 강물과 바닷물이 뒤섞이며, 흐르는 시간처럼 끊임없이 변하고 있다.
 
얼마 전 한국으로 업무 차 2주간 출장을 다녀왔다. 서울에서는 계절을 느낄 틈도 없이 바빴고, 숨 막히는 업무에 파김치가 된 채 다시 비행기에 실려 집으로 돌아왔다.  
 
관세와 정치적 흐름의 여파인지, 최근에는 한국 기업들의 미국 직접 진출이 눈에 띄게 늘어난 듯하다. 덕분에 일거리는 많아졌고 한국 방문 횟수도 잦아졌으며, 이제는 한국과 미국에 내 몸이 하나씩 있거나, 아니면 하루가 48시간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까지 든다.  
 
다행히 AI는 매일 발전하며 내 일을 도와주고 있지만, 언젠가는 내 벌이마저 가져갈지도 모른다는 걱정을 하면서도 이 녀석을 떼어놓고는 살 수 없게 되어버렸다.
 
수천 년간 이어져 온 역사와는 달리, 우리는 더 이상 어른들의 지혜에 기댈 수 없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부모님이 겪어온 인생의 통찰을 가지고 급변하는 세상 속 변화를 따라가려 해도, 선구자들은 너무 멀리 앞서 있고 나는 이 길을 좇기엔 이미 늦은 듯하다.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가장 빠르다’는 옛말도 이제는 어딘가 현실과 어긋난다. 늦었으면 그냥 늦은 것일지도 모른다. 학교생활을 열심히 하고 공부해서 대학에 가고 직장을 가지면 된다는 순진한 믿음조차 앞으로는 재고해야 할 것이다.  
 
아마 내년이면 AI는 사람 수준의 대화를 수행할 것이고, 거리에선 주문을 받고 서빙하는 로봇이 단순 노동을 대체할 날이 머지 않았다. 이런 생각에 겁이 나고, 이 시대의 소시민으로서 어떻게 살아야 할지 고민이 끊이지 않는다.
 
새벽에 집에 도착해 짐을 정리하고, 착잡한 마음으로 시차에 적응 안 된 몸을 새벽에 깨워 생각을 이어본다. 내 몸은 둘이 되어 동시에 다른 대륙에 존재할 수 없고, 지나간 어제의 시간에도 간섭할 수 없다. 인간은 애초에 시공을 초월할 수 없는 존재다.  
 
일거리를 잠시 뒤로하고 가족과 함께 브런치를 먹으러 나와보니, 한국에 가느라 미처 느끼지 못했던 오리건의 가을이 늦은 인사를 건넨다. 파란 하늘 아래 빨갛고 노란 단풍들, 이끼와 어우러진 녹갈색 나무들은 청량한 가을 공기와 함께 답답한 나의 물음에 조용히 답을 속삭이는 듯했다.
 
그래, 일단 내 할 일에 충실하자. 보이지 않는 미래를 두려워하기보다 오늘 하루를 성실히 살아내다 보면, 내일은 그 나름의 해답을 보여줄지 모른다.  
 
AI의 등장은 우리의 삶을 송두리째 바꿔놓을 것이고, 심지어 내가 사는 이 세상의 종말을 가져올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렇다 하더라도, 우리는 오늘의 삶을 포기하고 무기력하게 주저앉을 수는 없다. 문득 떠오른 말이 있다. 내일 지구가 멸망하더라도, 나는 오늘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
 
아스토리아의 강물이 태평양으로 흘러가듯, 우리의 하루하루도 두려움을 건너 희망으로 이어진다.

이유건 / 회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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